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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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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1648년부터 1668년까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며, 스웨덴 바사 왕가의 일원이다. 그는 형인 브와디스와프 4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며, 스웨덴과의 전쟁과 코사크 반란 등 혼란스러운 시기에 통치했다. 얀 2세는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68년 퇴위 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예수회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예술 후원자로서 네덜란드 회화를 수집했으며, 그의 컬렉션은 전쟁으로 인해 손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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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니엘 슐츠의 초상화, 1658년경
다니엘 슐츠의 초상화, 1658년경
서명Signature of John II Casimir of Poland.PNG
출생일1609년 3월 22일
출생지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크라쿠프
사망일1672년 12월 16일
사망지프랑스 왕국 네베르
매장일1676년 1월 31일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신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파리 (심장)
통치 기간1648년 11월 - 1668년 9월 16일
대관식1649년 1월 19일
왕조바사 가문
아버지지그문트 3세 바사
어머니오스트리아의 콘스탄체
종교가톨릭
통치
왕위 계승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이전 통치자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다음 통치자미하우 1세
결혼 및 자녀
배우자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 (1649년 결혼, 1667년 사망)
클로딘 프랑수아즈 미뇨 (1672년 결혼)
자녀얀 지그문트 바사
마리아 안나 바사

2. 공식 칭호


  • Ioannes Casimirus, Dei Gratia rex Poloniae, magnus dux Lithuaniae, Russie, Prussiae, Masoviae, Samogitiae, Livoniae, Smolenscie, Severiae, Czernichoviaeque; nec non Suecorum, Gothorum, Vandalorumque haereditarius rex, etc.la
  • 한국어 번역: 요안네스 카시미루스, 신의 은총으로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루테니아, 프로이센, 마조비아, 사모기티아, 리보니아, 스몰렌스크, 세베리아, 체르니히우의 대공이며, 또한 스웨덴인, 고트족, 반달족의 세습 국왕.

3. 생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이자 바사 왕조의 마지막 폴란드 통치자였다. 그의 생애는 이복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폴란드 귀족(슈라흐타)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오스트리아 문화를 선호하고 폴란드의 사르마티즘 문화를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스몰렌스크 전쟁에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한 입지에 놓여 있었다. 여러 차례의 결혼 시도가 무산되고 프랑스에 투옥되는 등 개인적인 시련을 겪었으며, 한때 예수회에 입회하기도 했다.

1648년, 형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치세는 흐멜니츠키의 난과 대홍수 시대로 알려진 스웨덴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국토 대부분이 외세에 점령당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그는 르부프 서약을 통해 국민적 저항을 호소하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1660년 올리바 조약을 통해 스웨덴 왕위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 리보니아리가를 스웨덴에 할양했으며,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좌안 우크라이나 지역을 러시아에 넘겨주면서 연방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다.

전쟁 이후 얀 2세는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와 함께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시도했다. 프랑스의 콩데 공작 루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계획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1667년,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고립감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계속되는 정치적 실패와 개인적인 슬픔 속에서 1668년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다시 예수회로 돌아가 수도원장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672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5][8] 그의 죽음으로 폴란드 바사 왕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

얀 2세는 네덜란드 회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열정적인 예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는 궁정 화가 다니엘 슐츠를 후원했으며, 암스테르담의 미술상인 헨드릭 판 유일렌부르흐와 그의 아들 게릿 판 유일렌부르흐를 통해 렘브란트,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야코프 요르다엔스, 귀도 레니, 구에르치노, 브뤼헐, 야코포 바사노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수집했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귀중한 미술품 컬렉션의 상당수는 대홍수 시대에 바르샤바를 점령한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퇴위 시 프랑스로 가져간 작품들을 제외하고 바르샤바 왕궁에 남아있던 일부 컬렉션마저도 이후 대북방 전쟁 중에 다시 약탈당하거나, 후대의 왕이자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에 의해 드레스덴으로 옮겨졌다. 렘브란트의 "검은 베레모를 쓴 수염 난 남자의 초상"과 "진주 장식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 등 일부 작품은 현재 독일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3. 1. 초기 생애와 권력 승계

다니엘 슐츠가 그린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초상화, 1667년경


얀 카지미에시는 1609년 3월 22일 크라쿠프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 지그문트 3세 바사는 스웨덴 구스타브 1세의 손자로, 한때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으나 1599년 숙부 칼 9세에게 폐위되었다. 이 사건은 바사 왕가 출신의 폴란드 국왕들이 스웨덴 왕위를 계속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결국 1600-1629년 폴란드-스웨덴 전쟁으로 이어졌다. 어머니 콘스탄체 왕비는 오스트리아 카를 2세 대공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누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폴란드는 30년 전쟁 (1618–1648)에서 직접적인 참전은 피하면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는 입장이었다.[5]

얀 카지미에시는 평생 이복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는 폴란드 귀족(슈라흐타)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는데, 이는 그가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문화를 동경하며 폴란드의 사르마티즘 문화를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불친절하고 비밀스러웠으며, 사치스러운 생활과 종교적 명상에 몰두하고 정치를 기피하여 폴란드 궁정 내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이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33년 스몰렌스크 전쟁에서는 모스크바를 상대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다.[6]

바치아렐리가 그린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사후 초상화, 18세기


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얀 카지미에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632년에서 1635년 사이에 그를 사촌인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나 이탈리아 공주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635년, 얀 카지미에시는 으로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으나, 임무를 포기하고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 합류하여 프랑스와 싸웠다. 그가 속한 부대가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는 1년간 빈 궁정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1636년 연방으로 돌아온 얀 카지미에시는 귀족 부인 굴덴테른(Guldenstern)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으나 형 브와디스와프 4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형은 그를 쿠를란트 공국의 통치자로 삼으려 했으나, 이 계획 역시 연방 의회인 세임의 반대로 실패했다. 국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자, 얀 카지미에시는 1638년 스페인으로 가서 포르투갈부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여행 도중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리슐리외 추기경의 명령으로 1640년까지 투옥되었다. 그는 스몰렌스크 보이보드였던 크시슈토프 고시에프스키의 외교적 노력과 반프랑스 폴란드-스페인 협상의 결과로 석방되었다.

1641년, 얀 카지미에시는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하고, 1642년 다시 연방을 떠나 독일로 갔다. 1643년 형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회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연방과 교황청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생겼다. 얀 카지미에시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지만, 성직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마침 형 브와디스와프 4세의 유일한 아들이 사망하여 왕위 계승 가능성이 열리자, 그는 1647년 10월 추기경직을 버리고 연방으로 돌아왔다.[7] 그는 왕위 계승을 위해 모계 친족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얻고자 오스트리아 대공녀와의 결혼을 추진하기도 했다.

1648년, 후사 없이 사망한 형의 뒤를 이어 국왕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연방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얀 카지미에시는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형의 미망인이었던 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와 결혼했다.

3. 2. 폴란드 국왕 (1648-1668)

164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1660년 올리바 조약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1648년,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이복 형 블라디스와프 4세 바사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폴란드 의회(세임)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폴란드를 통치한 바사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의 치세는 시작부터 흐멜니츠키의 난과 같은 내부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폴란드 역사상 대홍수 시대로 불리는 재앙적인 시기와 일치한다.

얀 2세의 통치는 러시아와의 전쟁 (1654–1667)스웨덴과의 전쟁("대홍수")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스웨덴과의 전쟁은 그의 아버지 지그문트 3세 바사와 형 블라디스와프 4세가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며 야기한 오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총독들과 귀족(슐라흐타)들의 공모와 배신으로 인해, 스웨덴군은 1655년 별다른 저항 없이 연방 영토 대부분을 침략하고 점령했다. 국왕 얀 2세는 실레시아로 망명하여 귀족들에게 항전을 호소해야 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폴란드인들은 침략자 스웨덴에 맞서 봉기했고, 몇 년간의 격렬한 저항 끝에 스웨덴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의 대가는 참혹했다. 연방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며, 일부는 후퇴하는 스웨덴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이러한 이유로 얀 2세의 통치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실패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사 왕"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전쟁 이후 연방은 막대한 영토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1660년 스웨덴과의 올리바 조약을 통해 얀 2세는 스웨덴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현재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리보니아 지역과 리가 시를 스웨덴에 할양해야 했다. 또한, 연방의 봉토였던 프로이센 공국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통치 하에 완전한 독립을 얻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1667년에는 러시아와의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드네프르강 동쪽의 좌안 우크라이나 지역을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이는 흐멜니츠키의 난 이후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우크라이나 코사크 국가의 분할을 의미했다.

얀 2세는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왕비 마리 루이즈 곤자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프랑스의 콩데 공작 루이 2세를 차기 국왕으로 미리 지명하는 방식(비벤테 레게)을 통해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 시도는 강력한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1665년에는 폴란드 야전 헤트만이었던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루보미르스키의 난), 결국 왕권 강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667년, 국왕에게 큰 정치적 버팀목이었던 왕비 마리 루이즈 곤자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얀 2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계속되는 전쟁과 내란, 개혁 실패, 그리고 왕비의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고립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얀 2세는 결국 1668년 9월 16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3. 3. 르부프 서약 (1656)

얀 마테이코의 ''르부프 서약'', 브로츠와프 국립 박물관


1656년 4월 1일, 얀 2세 카지미에시는 르부프의 르부프 성모 승천 라틴 대성당에서 교황 대사 피에트로 비도니가 집전한 가톨릭 성체성사 중에 르부프 서약을 거행했다. 이 서약을 통해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봉헌하고, 성모 마리아를 "폴란드 왕관과 그의 다른 국가의 여왕"으로 선포했다. 또한 "왕국의 백성을 어떤 강요와 부당한 속박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스웨덴과 러시아의 침공(대홍수 시대, 러시아-폴란드 전쟁, 북방 전쟁)으로 국토 대부분이 점령당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서약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농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봉기를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서약의 주요 내용은 루터교(스웨덴)와 정교회(러시아) 침략자들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특히 농민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국왕에 이어 왕관 부차관이자 크라쿠프 주교인 안제이 트제비츠키도 귀족(슐라흐타)을 대표하여 비슷한 서약을 했다.

이 서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1657년 스웨덴군을, 1661년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얀 2세가 약속했던 농민 처우 개선과 같은 사회 개혁 약속은 대부분 이행되지 못했다. 이는 기득권층인 슐라흐타 귀족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인 농노제를 약화시키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세임(의회)을 통해 이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3. 4. 퇴위와 죽음

1667년, 국왕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가 사망하자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국내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그는 이듬해인 1668년 9월 16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프랑스에서 그는 다시 예수회에 들어가 파리의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그의 퇴위 후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어 1669년 9월 29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1672년 가을, 얀 카지미에시는 폴란드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출발 전에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이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10세에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폴란드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1672년 12월 16일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5][8], 유해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파리의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폴란드의 바사 왕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유산과 평가

얀 2세 카지미에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대홍수 시대에 나라를 통치했다. 그의 치세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대규모 봉기, 러시아와의 전쟁, 스웨덴침공 등 끊임없는 외침과 내분으로 얼룩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폴란드 영토 대부분이 외세에 점령당하는 등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660년 스웨덴과의 올리바 조약에서는 스웨덴 왕위 계승 요구를 포기하고 리보니아리가를 할양했으며,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1667년 러시아와의 안드루소보 조약에서는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는 등 영토 손실도 컸다.

얀 2세는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시도했으나, 비벤테 레게(생전 후계자 지명)와 같은 정책은 마그나트(대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1665년 야전 헤트만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왕권 강화 시도는 결국 좌절되었다.

1667년 그를 지지하던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1668년 9월 16일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예수회 수도원장으로 여생을 보내다 1672년 사망했다.

그의 퇴위와 사망으로 바사 가문의 폴란드 통치는 막을 내렸으며, 두 자녀가 모두 어려서 사망하고 다른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보나 스포르차와 그녀의 할아버지인 나폴리 국왕 알폰소 2세의 혈통도 그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비록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연방은 큰 위기를 겪고 국력이 쇠퇴했지만, 얀 2세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르부프 서약 등을 통해 항전을 독려하고 국가를 지키려 노력한 군주로 기억된다. 그는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유명한 역사 소설 삼부작 중 《불과 칼로》와 《대홍수》에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 1. 예술 후원

''랍비의 초상'', 렘브란트 작품


얀 2세 카지미에시가 의뢰한 1640년 은제 주전자


폴란드 바사 왕가에 속했던 방대한 회화, 초상화, 도자기 및 기타 귀중품 컬렉션은 1650년대 대홍수 시기 바르샤바를 약탈한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 군대에 의해 대부분 약탈당했다.[9] 약탈된 문화재 중 다수는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리거나 유럽 다른 지역에 전시되었고, 일부는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나 오폴레에 숨겨져 있던 귀도 레니의 ''유럽의 강간''과 같은 일부 유명 작품들은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왕실 컬렉션 확충에 기여한 주요 인물로, 특히 네덜란드 회화의 열렬한 수집가였으며 다니엘 슐츠와 같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다. 다니엘 슐츠는 크림 반도 출신 아가 데데쉬의 아들 초상화를 그렸고, 166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아버지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왕실 매사냥꾼 직위를 받기도 했다.[10] 얀 2세의 회화 컬렉션 상당 부분은 1660년대 암스테르담의 중개인 헨드릭 판 위일렌부르흐와 그의 아들 헤리트 판 위일렌부르흐를 통해 확보되었으며, 주로 네덜란드 회화와 렘브란트의 작품들이었다. 이 컬렉션에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야코프 요르다엔스, 귀도 레니, 게르치노, 소 얀 브뤼헐, 야코포 바사노 등의 작품도 포함되었다.[9]

얀 2세 카지미에시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떠날 때, 그의 회화와 초상화 중 상당수를 가져갔다. 바르샤바왕궁에 남아 있던 컬렉션은 대북방 전쟁 동안 약탈당하거나, 1720년 작센 선제후 강력왕 아우구스투스 2세에 의해 압수되었다. 이때 압수된 작품 중에는 렘브란트의 그림 두 점, ''랍비의 초상''(1657)과 ''진주로 장식된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1667)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오늘날 독일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de에 전시되어 있다.[9]

5. 가계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생존한 자녀가 없었다. 그의 모든 형제자매 역시 후손 없이 그보다 먼저 사망하여, 그는 보나 스포르차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알폰소 2세의 모든 적통 후손은 명맥이 끊겼다.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와 브리엔 상속에 대한 그의 권리를 계승한 사람은 그의 먼 사촌인 탈몽 공이자 타란토 공인 앙리 드 라 트레모이유였다. 앙리 드 라 트레모이유는 페데리코 4세(페르디난도 1세와 클레르몽의 이사벨라의 둘째 아들)와 그의 첫 부인인 사보이의 안의 후손으로서 상속권을 가졌다.

또한 얀 2세 카지미에시는 형의 뒤를 이어, 성 비르지타의 여동생으로부터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내려오는 가계의 수장이었다. 그가 사망한 후, 이 수장직은 이미 퇴위한 그의 사촌 크리스티나에게 제안되었다.

참조

[1] 뉴스 Jan Kazimierz http://sciaga.pl/tek[...] 2018-10-01
[2] 웹사이트 Historical Collections of the Vilnius University Library – MANUSCRIPTS http://www.mb.vu.lt/[...] UNESCO 2009-06-20
[3] 웹사이트 John II Casimir http://chestofbooks.[...] 2018-10-01
[4] 문서 'Jan II Kazimierz Waza' Polski Słownik Biograficzny
[5] 웹사이트 kazimierz http://www.szlachta.[...] 2018-10-01
[6] 뉴스 Władca, co kaprysił http://www.polityka.[...] 2018-10-01
[7] 서적 The Polish-Lithuanian State, 1386-179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8] 웹사이트 Onet – Jesteś na bieżąco http://dampol.republ[...] 2018-10-01
[9] 서적 Vademecum Zamku Warszawskiego Warszawa
[10] 웹사이트 Dedesz Aga http://swiadectwotes[...]
[11] 백과사전 Katarina Jagellonica https://sok.riksarki[...] National Archives of Sweden 1973
[12] Wikisource
[13] 서적 Gustav Vasa – Landsfader eller tyrann? Prisma 2002-09-10
[14] 백과사전 Margareta https://sok.riksarki[...] National Archives of Sweden 1985
[15] Britannica Sigismund I
[16] 서적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18-04-29
[17] EB1911 Ferdinand I
[18] 간행물 "Candalei Anna II. Ulászló neje, magyarországi útjának és a menyegzői ünnepélyek leírása (Közlemények a párisi Nemzeti könyvtárból 1448-1596, 83-122)"
[19] NDB Albrecht V.
[20] Wiki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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