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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니아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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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얌니아 회의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대교의 정경 확립을 위한 논의 과정을 지칭한다. 로마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성전이 파괴된 후, 바리새파는 회당과 성경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재정립하고 기독교의 성경 형성에 대응하기 위해 경전 마감을 서둘렀다. 얌니아 회의는 타나크, 즉 유대교 성경의 현재 분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와의 분리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얌니아 회의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학문적 논쟁이 있으며, 오늘날에는 그 신뢰성이 약화된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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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니아 회의
개요
위치현대 이스라엘의 얌니아 (야브네)
시기기원후 1세기 후반 (통상적으로 80-90년대로 추정)
관련 종교유대교
주요 인물요하난 벤 자카이
가믈리엘 2세
기타 바리사이파 학자들
배경
역사적 맥락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예루살렘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목적유대교 재건 및 정체성 확립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논의 및 결정 사항
구약성경 정경화 논의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에스더기, 아가, 전도서 등의 정경성이 논의되었다고 주장함.
그러나 얌니아에서 구약성경 정경이 확정되었다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음.
미슈나 편찬의 시작구전 율법을 집대성하는 과정의 시작점으로 여겨짐.
기독교와의 분리 심화나자렛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반감 증가.
비르카트 하미님 기도문의 수정 (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내용 추가).
논란
역사적 사실 여부얌니아 공의회가 실제로 개최되었는지, 그 결정 사항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 존재.
정경화 과정구약성경 정경화가 얌니아에서 완료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존재.
추가 정보
관련 성경 구절요한복음 9:22
참고 문헌Jack P. Lewis, "Jamnia Revisited"
Walter Kaiser, "The Old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and Relevant?"
Jack P. Lewis, "What Do We Mean by Jabneh?"

2. 배경

탈무드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로마 제국으로부터 할라카(유대교 율법) 학교 설립 허가를 받고 야브네(얌니아)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20][7]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면서 유대교는 큰 전환점을 맞았다. 성전 제례와 유대 왕조를 중시하던 사두가이파는 존재 의의를 잃었고, 회당 중심의 바리새파가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에서 벗어난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의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 서쪽 야브네(얌니아)에 유대교 연구 학교를 세워 유대력을 계산하고 토라를 연구하며 유대교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려 했다.

얌니아 회의는 현대적 의미의 회의가 아니라, 이 학교 학자들이 오랜 시간 논의하여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마소라 본문)을 정의해 나간 과정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70인역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70인역 일부가 히브리어에 뿌리를 두지 않아 정통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얌니아에서의 연구는 중단되었고, 학자들은 갈릴리로 이주했다. 코헬렛의 말(전도서)과 아가의 정경성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헨리 티센은 어느 시대에나 정경성에 대한 의문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17]

2. 1. 얌니아 회의의 역할

기원후 70년 유대전쟁으로 로마군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성전을 파괴하자, 유대교의 여러 분파 중 친로마 정책을 취했던 바리새파를 제외한 사두개파, 에세네파, 젤롯파 등은 사라졌다.[20]

바리새파는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 이후 회당과 성경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정의하고, 바리새파 전통의 유대교를 구축해야 했다. 동시에 급성장하는 기독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기독교가 칠십인역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경전을 형성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경전의 마감을 서둘렀다. 바리새파 안에서 묵시 경향을 띤 분파와 정통주의 바리새파 분파 간의 논쟁에서 최종적인 전통적 바리새파 입장을 확정하고자 했다는 의견도 있다.

성경의 원류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성경 타나크는 대략 기원전 1500~400년대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바빌론, 블레셋, 이집트 등지에서 낱권으로 기록된 경전들이 제시하는 사상들에 대한 대안적인 사상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제시하려고 저술한 문서들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얌니아 회의를 통해 현재의 분류가 확립되었다는 전승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탈무드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제2성전의 멸망과도 관련이 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할라카(유대인의 종교법) 학교를 세우는 것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허락받은 도시가 야브네(얌니아)이다.[20][7]

찰스 윌리엄 윌슨의 ''그림 같은 팔레스타인, 시나이, 이집트''에 수록된 야브네 그림과 얌니아 공의회 논의 페이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파괴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면서 유대교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교의 성전 제례와 유대 왕조에 가치를 두는 사두가이파는 존재 의의를 잃었고, 회당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새파가 민족적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에서 벗어난 유대교 (주로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 서쪽의 마을 야브네(얌니아)에 유대교 연구 학교를 세워 유대력을 계산하고 토라를 연구함으로써 유대교의 전통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 유산을 끊이지 않게 하려 했다.

얌니아 회의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회의는 아니다. 그것은 이 유대교 학교에 소속된 학자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논의하여 성경(히브리어 성경)의 정경(마소라 본문)을 정의해 나간 과정을 가리킨다. 이 시대, 기독교인은 유대교의 한 분파라는 틀을 넘어 지중해 세계로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를 통해 기독교인은 회당에서 추방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주요 텍스트로 삼았던 70인역에 대해서도 논의되었으며, 그중 일부 문서는 히브리어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므로 정통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이 확인되었다. 구약성경외경이라고 할 때 이 회의에서 제외된 문서들을 가리킨다. 이 회의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완전히 나누는 회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얌니아에서의 조용한 연구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르 코크바가 이끈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의 결과, 로마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그들은 얌니아를 떠나 갈릴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코헬렛의 말(전도서)과 아가의 정경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200년까지 정경화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헨리 티센은 어떤 시대에도 어떤 정경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7]

2. 2.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

기원후 70년 유대전쟁으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성전을 파괴하자, 유대 종교 유파 중에서 친로마 정책을 취한 바리새를 제외하고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은 사라졌다.

바리새파는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 이후 회당과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정의하고, 바리새파 전통의 유대교를 구축해야 했다. 동시에 급성장하는 기독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특히 기독교가 칠십인역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경전을 형성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경전의 마감을 서둘렀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파괴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면서 유대교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교의 성전 제례와 유대 왕조에 가치를 두는 사두가이파는 존재 의의를 잃었고, 회당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새파가 민족적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에서 벗어난 유대교 (주로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 서쪽의 마을 야브네(얌니아)에 유대교 연구 학교를 세워 유대력을 계산하고 토라를 연구함으로써 유대교의 전통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 유산을 끊이지 않게 하려 했다.

얌니아 회의는 현대적인 의미의 회의가 아니다. 이 유대교 학교에 소속된 학자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논의하여 성경(히브리어 성경)의 정경(마소라 본문)을 정의해 나간 과정을 가리킨다. 이 시대, 이미 기독교인은 유대교의 한 분파라는 틀을 넘어 지중해 세계로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이 회의를 통해 기독교인은 회당에서 추방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주요 텍스트로 삼았던 70인역에 대해서도 논의되었으며, 그중 일부 문서는 히브리어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므로 정통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이 확인되었다. 구약성서의 외경이라고 할 때 이 회의에서 제외된 문서들을 가리킨다. 이 회의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완전히 나누는 회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17]

3. 얌니아 회의를 둘러싼 논쟁



2세기 말에 편집된 미쉬나는 케투빔의 일부 책들, 특히 아가전도서의 지위에 대한 논쟁을 설명한다. ''야다임'' 3:5는 이 책들에 대한 논쟁에 주목하고, 메길라트 타아니트는 푸림절에 대한 논의를 언급한다.[8]

이러한 언급들을 바탕으로, 하인리히 그레츠는 1871년에 1세기 후반(약 70-90년) 야브네(얌니아)에서 유대교 정경을 결정한 공의회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8] 그러나 이러한 얌니아 회의설은 20세기 이후 W. M. 크리스티, 잭 P. 루이스, 시드 Z. 레이먼, 레이먼드 E. 브라운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 현재는 대체로 신뢰를 잃은 이론이다.[1][2][3] 일각에서는 히브리 정경이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0–40년) 동안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16]

3. 1. 비판적 견해

W. M. 크리스티는 "유대교 역사의 얌니아 시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얌니아 회의에 대한 통설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다.[9] 잭 P. 루이스는 "우리는 자브네를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비판을 제기했고,[10] 시드 Z. 레이먼은 197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논문에서 독자적인 도전을 했다.[11] 레이먼드 E. 브라운은 ''제롬 성서 주석''(1990년 ''뉴 제롬 성서 주석''에도 수록)에 실린 서평에서 루이스를 대체로 지지했으며, 1992년 ''앵커 성경 사전''에서도 루이스의 논의를 지지했다.[12]

앨버트 C. 선드버그 주니어는 루이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유대 자료에는 성경에 대한 논쟁의 흔적이 있지만, 정경성은 문제가 아니었고, 논쟁은 자브네와 관련이 없었다... 자브네에서 있었던 특정 정경적 논의는 역대기와 아가서에 대해서만 증명되었다. 두 책 모두 자브네 이전에 유통되었다. 역대기와 아가서를 두고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힐렐 학파는 두 책 모두 "손을 더럽힌다"고 주장했다. 즉, 성경은 매우 거룩하여 부정함을 전파한다는 랍비 원칙(미쉬나 야다임 3:5에 명시됨)에 따라 거룩하지 않은 글은 부정함을 전파하지 않는다.[13] 한 텍스트는 자브네에서 있었던 공식적인 행위에 대해 언급한다. 이 텍스트는 "모든 성경은 손을 더럽힌다"는 포괄적인 진술을 하며, "그들이 R. 엘르아자르 벤 아자르야를 대학의 수장으로 임명한 날에, 아가서와 코헬렛(전도서)은 모두 손을 더럽힌다"(M. 야다임 3.5)라고 덧붙인다. 외경 중에서는 벤 시라만이 랍비 자료에서 이름으로 언급되었으며, 계속 유통, 복사 및 인용되었다. 자료에는 자브네에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다고 언급된 책은 전혀 없다.[14]

루이스에 따르면,

> 얌니아 회의라는 개념은 성문서 (히브리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의 정경화와 히브리 정경의 종결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논쟁은 얌니아 회의 가설이 근거로 하는 증거의 부족을 시사하며, 그것이 쓸모를 다하고 입증되지 않은 가설의 영역으로 넘겨져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단순한 주장의 반복만으로 확립된 합의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복음주의 학자 F. F. 브루스는 "구약성경 정경의 범위를 규정한 얌니아 회의 또는 시노드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마도 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5] 다른 학자들도 그 이후에 동참했으며 오늘날 이 이론은 대체로 신뢰를 잃었다.[1][2][3] 일부에서는 히브리 정경이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0–40년) 동안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16]

3. 2. 현대적 평가

W. M. 크리스티는 "유대교 역사의 얌니아 시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 통설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다.[9] 잭 P. 루이스는 "우리는 자브네를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이 통설에 대한 비판을 썼다.[10] 시드 Z. 레이먼은 1976년에 책으로 출판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논문에서 독자적인 도전을 했다.[11] 레이먼드 E. 브라운은 ''제롬 성서 주석''(1990년 ''뉴 제롬 성서 주석''에도 수록)에 실린 그의 서평에서 루이스를 대체로 지지했으며, 1992년 ''앵커 성경 사전''에서도 루이스의 논의를 지지했다.[12]

앨버트 C. 선드버그 주니어는 루이스의 주장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유대 자료에는 성경에 대한 논쟁의 흔적이 담겨 있지만, 정경성은 문제가 아니었고, 논쟁은 자브네와 관련이 없었다. 게다가 자브네에서 있었던 특정 정경적 논의는 역대기와 아가서에 대해서만 증명되었다. 두 책 모두 자브네 이전에 유통되었다. 역대기와 아가서를 두고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힐렐 학파는 두 책 모두 "손을 더럽힌다"고 주장했다. 즉, 성경은 매우 거룩하여 부정함을 전파한다는 랍비 원칙(미쉬나 야다임 3:5에 명시됨)에 따라 거룩하지 않은 글은 부정함을 전파하지 않는다.[13] 한 텍스트는 자브네에서 있었던 공식적인 행위에 대해 언급한다. 이 텍스트는 "모든 성경은 손을 더럽힌다"는 포괄적인 진술을 하며, "그들이 R. 엘르아자르 벤 아자르야를 대학의 수장으로 임명한 날에, 아가서와 코헬렛(전도서)은 모두 손을 더럽힌다"(M. 야다임 3.5)라고 덧붙인다. 외경 중에서는 벤 시라만이 랍비 자료에서 이름으로 언급되었으며, 계속 유통, 복사 및 인용되었다. 자료에는 자브네에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다고 언급된 책은 전혀 없다.[14]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얌니아 회의라는 개념은 성문서 (히브리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의 정경화와 히브리 정경의 종결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논쟁은 얌니아 회의 가설이 근거로 하는 증거의 부족을 시사하며, 그것이 쓸모를 다하고 입증되지 않은 가설의 영역으로 넘겨져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단순한 주장의 반복만으로 확립된 합의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복음주의 학자 F. F. 브루스는 "구약성경 정경의 범위를 규정한 얌니아 회의 또는 시노드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마도 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5] 다른 학자들도 그 이후에 동참했으며 오늘날 이 이론은 대체로 신뢰를 잃었다.[1][2][3] 일부에서는 히브리 정경이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0–40년) 동안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16]

4. 얌니아 회의에서 제외된 히브리어 성경 외경 목록



※ 기독교의 구약 외경에 관해서는, 에큐메니즘의 공동번역 성서에서 「구약성서 외경」으로 묶여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외경으로 제외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The Canon Debate
[2] 서적 The Old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and Relevant? InterVarsity 2001
[3] 간행물 What Do We Mean by Jabneh? https://www.jstor.or[...] 1964
[4] 간행물 Expulsion from the synagogue? Rethinking a Johannine Anachronism http://www.tyndaleho[...] 2008
[5] 서적 Kohelet oder der Salomonische Prediger: Ubersetzt und Kritisch Erläutert 1871
[6] 서적 The Canon Debate Hendrickson Publishers 2002
[7] 문서 Talmud Gittin 56a–b
[8] 서적 Kohélet, oder der Salomonische Prediger (Kohélet, or Ecclesiastes) Carl Winters Universitätsbuchhandlung
[9] 간행물 The Jamnia Period in Jewish History https://www.jstor.or[...] 1925
[10] 간행물 What Do We Mean by Jabneh? https://www.jstor.or[...] 1964
[11] 서적 The Canonization of Hebrew Scripture: The Talmudic and Midrashic Evidence Anchor Books 1976
[12] 서적 Anchor Bible Dictionary 1992
[13] 간행물 The Defilement of the Hands as a Principle Determining the Holiness of Scriptures https://www.jstor.or[...] 2010
[14] 간행물 The Old Testament of the Early Church Revisited http://department.mo[...] Monmouth College
[15] 서적 The Canon of Scripture InterVarsity Press 1988
[16] 문서 The Canon Debate
[17] 서적 組織神学 聖書図書刊行会
[18] 문서 Der alttestamentliche Kanon und sein Abschluss (The Old Testament Canon and its finalisation)
[19] 서적 The Canon Debate 2002
[20] 문서 Talmud Gittin 5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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