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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다케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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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 제국 시대의 실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이다. 그는 지바현 나리타시 출신으로, 경부철도에서 근무하며 대구에서 토지 투자를 통해 자산을 축적했다. 1909년 대구시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남선합동전기, 조선전력 사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부터 조선의 고미술품을 수집하여 오구라 컬렉션을 형성했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일부 소장품을 가져갔다. 1981년에는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통해 컬렉션을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현재 이 컬렉션은 한국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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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다케노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다케노스케
출생일1870년 9월 7일
사망일1964년 12월 26일 (향년 94세)
국적일본
직업사업가, 미술품 수집가

2.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생애와 활동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의 사업가이자 고미술품 수집가이다. 지바현 나리타시 출신으로, 아버지 오구라 요시노리는 중의원 의원과 실업가를 지냈다.[1]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1904년 조선으로 건너와 경부철도 등에서 근무하며 초기 자본을 마련했다.

1909년 대구에서 '''대구시 전기회사'''를 설립하며 전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후 여러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부를 축적했다.[2] 이 과정에서 1922년 또는 1923년경부터 조선의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3], 이는 훗날 논란이 되는 오구라 컬렉션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남선합동전기'''와 '''조선전력''' 사장 등을 역임하며 식민지 조선의 주요 경제인으로 활동했다.[3]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10월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이때 수집한 문화재 중 일부를 가져갔다. 일본에서는 1956년 '''재단법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사망 시까지 소장품을 관리했다.[2] 아내의 언니의 남편은 쿠와나 이노키치이다.[4]

2. 1. 생애

지바현 나리타시 출신이다. 아버지 오구라 요시노리는 호쿠소 에이칸기주쿠를 창립했으며, 1892년부터 중의원 의원을 3선 역임하고 나리타 철도와 나리타 은행을 설립한 실업가였다.[1]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일본우선에 입사했다. 이후 경부철도에 입사하여 1904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급여를 밑천 삼아 토지를 매입하고 지가 상승으로 거액을 벌어들여 대구광역시의 자산가로서 전기 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1905년 2월 경부철도를 퇴사했다.

1909년, 오구라는 대구 지역 자산가들과 공동으로 전기 사업을 출원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대구시 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주식 과반수를 출자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1913년 1월 1일 종업원 12명, 수요 가구 322호로 사업을 시작했다. 오구라는 사업 확장에 적극적이어서, 1918년에는 회령시 전기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함흥시 전기를 합병했으며, 1920년에는 광주광역시 전기를 합병했다. 그의 사업은 크게 성장하여 1937년에는 16개의 발전소와 2016km의 송전선을 갖추게 되었다.[2]

또한, 1922년 또는 1923년경부터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1935년에는 그 해 발족한 '''남선합동전기'''의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전력''' 사장과 대구상공은행 이사를 역임했다.[3]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일본의 조선 통치가 끝나자, 1945년 10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때 소장품의 일부를 가져갔으며, 약 4,000점의 유물은 대구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에는 나라시노시 미루미로 이주하여 '''재단법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그곳에 수장고를 마련하고 94세로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2]

아내의 언니의 남편은 쿠와나 이노키치이다.[4]

2. 2. 대구에서의 활동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일본우선을 거쳐 경부철도에 입사한 오구라는 1904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급여를 밑천 삼아 토지를 매입했고, 지가 상승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아 대구의 자산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기 사업 진출을 준비했으며, 1905년 2월 경부철도를 퇴사했다.

1909년, 오구라는 대구 지역 자산가들과 함께 전기 사업 허가를 조선총독부에 신청하여 승인받았다. 이를 통해 '''대구시 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주식 과반수를 확보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1913년1월 1일 종업원 12명, 수요 가구 322호 규모로 사업을 시작했다.[2] 오구라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18년에는 회령 전기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함흥 전기를 합병했으며, 1920년에는 광주 전기를 합병했다. 그의 전기 사업은 크게 성장하여 1937년에는 16개의 발전소와 2016km의 송전선을 보유하게 되었다.[2]

또한, 1922년에서 1923년경부터 조선의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업적으로도 1935년 발족한 '''남선합동전기'''의 사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전력''' 사장과 대구상공은행 이사를 역임했다.[3]

태평양 전쟁 종결 후 일본의 조선 통치가 끝나자, 오구라는 1945년 10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 자신이 수집한 소장품 중 일부를 가져갔으며, 약 4,000점의 유물은 대구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2]

2. 3. 문화재 수집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강점기 대구를 중심으로 전기 사업을 확장하며 상당한 자산을 축적했다.[2] 이를 바탕으로 1922년 또는 1923년경부터 한반도의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3]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0월에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 중 일부를 가져갔으며, 약 4,000여 점은 대구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2]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56년 지바현 나라시노시로 이주하여 '''재단법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는 이곳에 수장고를 설치하고 사망할 때까지 수집품을 관리했다.[2]

2. 4. 광복 이후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1945년 10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때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 소장품 중 일부를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약 4,000여 점은 대구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에는 지바현 나라시노시 미루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재단법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으며, 수장고를 설치하여 관리했다. 이후 9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2]

3. 오구라 컬렉션의 형성과 반환 문제



오구라 컬렉션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수집한 문화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형성 과정과 소유권 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컬렉션에 포함된 다수의 중요 문화재가 도굴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반환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부터 1965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 회담에서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그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일본 측은 해당 컬렉션이 개인 소장품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환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후 공개된 1962년 일본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 내부에서도 오구라 컬렉션 일부의 반환 또는 기증을 검토했던 사실이 드러났으나, 실제 반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5]

1981년,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는 소장품 전체를 도쿄 국립 박물관에 일괄 기증하였고, 박물관은 1982년 봄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2] 이후에도 오구라 컬렉션 반환 문제는 2007년 일본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에서 질의가 이루어지는 등[6] 정치적, 사회적 관심사로 남아있다.

민간 차원에서도 반환 노력이 이어졌다. 2014년 8월, 한국의 민간 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7]는 오구라 컬렉션 중 일제강점기 도굴품으로 추정되는 34점에 대해 도쿄 간이 재판소에 반환 조정을 신청했다. 이들은 국제박물관협의회 (ICOM)의 윤리 규약을 근거로 도난품 소장 중단을 요구했으나, 같은 해 11월 재판소는 신청 단체가 소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했다.[8][9][10]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3. 1. 컬렉션의 형성 과정

3. 2. 반환 요구와 일본 정부의 입장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부터 1965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 회담에서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해당 컬렉션이 개인 소장품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따라 반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한일 시민이 만드는 한일 회담 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이 정보 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일본 외무성 문서가 공개되었다. 1962년 2월 14일자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작성 "문화재 문제 해결 방침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일본 정부 내부에서 "한국 측이 특별한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오구라 컬렉션 중 일부를 정부가 매입하거나, 오구라 본인의 자발적 기증 형태로 한국에 넘겨주는 방안"을 검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당시 외무성이 한국에 일정 부분 양보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입김이 작용한 문부성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5]

1981년,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는 소장품 전체를 도쿄 국립 박물관 (동박)에 일괄 기증하고 해산하였다. 기존에 컬렉션을 보관하던 수장고 부지는 나라시노시에 기부되어 현재 오구라 공원(나라시노시 미루미 5초메 16번)으로 조성되었다.[2] 1982년 봄에는 도쿄 국립 박물관 동양관에서 오구라 컬렉션 특별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2]

오구라 컬렉션 반환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2007년 4월 6일에는 일본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에서 관련 질의가 이루어졌다.[6]

2014년 8월, 조선반도에서 유출된 문화재 반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민간 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7]는 도쿄 국립 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컬렉션 중 일부 유물에 대한 반환 조정을 도쿄 간이 재판소에 신청했다. 대상 유물은 조선 왕실 유물 9점, 경주 금관총 출토 유물 8점, 부산 연산동 고분 출토 유물 4점, 창녕군 출토 유물 13점 등 총 34점이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이 유물들이 일제강점기도굴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도난품 수증을 금지하는 국제박물관협의회 (ICOM)의 윤리 규정에도 어긋나므로 박물관 측이 소장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5일, 도쿄 간이 재판소는 문화재제자리찾기가 해당 문화재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정을 기각했다.[8][9][10]

3. 3. 민간단체의 반환 노력

오구라 컬렉션은 1952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진 한일 회담에서 지속적으로 반환 요구가 있었지만,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일본 측은 개인 소장품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환 대상에서 제외했다.[5] 1981년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는 이를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다.[2]

이후에도 오구라 컬렉션 반환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었으며, 특히 민간 차원에서의 노력이 이어졌다. 2014년 8월, 조선반도에서 유출된 문화재 반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의 민간 단체인 문화재 제자리 찾기[7]는 도쿄 국립 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컬렉션 중 일부 유물에 대해 반환을 요구하는 조정을 도쿄 간이 재판소에 신청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총 34점의 유물이 일제강점기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도난품의 취득 및 소유를 금지하는 국제박물관협의회 (ICOM)의 윤리 규약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립문화재기구에 해당 유물들의 소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조정 신청 대상이 된 주요 유물은 다음과 같다.

구분수량
조선 왕실 유물9점
경주시 금관총 출토 유물8점
부산광역시 연산동 고분 출토 유물4점
창녕군 출토 유물13점



그러나 같은 해 11월 5일, 도쿄 간이 재판소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가 해당 문화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 신청을 기각했다.[8][9][10]

4. 오구라 컬렉션의 주요 내용

오구라 컬렉션 중 상당수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여기에는 중요문화재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다수의 한국 문화재가 포함되어 있다[2]。특히 삼국 시대 유물을 비롯한 고고학 자료와 미술품 등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도쿄 국립박물관 기증품 외에도 상당수의 유물이 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컬렉션의 정확한 전체 규모와 내용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

4. 1.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품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오구라 컬렉션은 총 1110점으로, 이 중에는 중요문화재 8점과 중요미술품 31점이 포함되어 있다. 세부적으로는 고고학 자료 557점, 도자기 130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등으로 구성된다[2]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다음 2건 8점이다.

이 외에도 대구에 약 4000점의 유물이 남겨졌으며, 오구라가 생활 유지를 위해 일본 내에서 매각한 유물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컬렉션의 전체 규모와 내용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

'''주요 소장품 이미지'''

4. 2. 대구에 남겨진 유물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유물 외에도 대구에 약 4,000점의 유물이 남겨졌다고 여겨진다. 또한 오구라가 생활을 위해 일본에서 일부 유물을 매각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오구라 컬렉션의 전체 내용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

5. 오구라 컬렉션 관련 자료


  • 오구라 다케노스케 편 『오구라 컬렉션 목록』 1958년[11], 1964년 4월[12]
  •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 편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 관계 자료』 1980년[13]
  •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 편 『오구라 컬렉션 사진집』 1981년 3월 (출판지 도쿄)[14]
  •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 편 『오구라 컬렉션 사진집』 〔1〕임나의 일부·신라/〔2〕선사 시대 한나라 시대/〔3〕고구려·백제(원문 그대로)・임나의 일부·고려/〔4〕조선 시대/〔5〕서화·불상·불화·일본의 부 (총 5권, 출판지 나라시노)[15][16]
  • 도쿄 국립박물관 『기증 오구라 컬렉션 목록』 1982년 3월[17]
  •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오구라 컬렉션 한국 문화재: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해외 소재 문화재 조사서 제12책) 2005년[18]

참조

[1] 데이터베이스 明治時代に千葉で活躍した小倉良則(おぐらよしのり)について詳しく知りたい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05-12-09
[2] 서적 千葉のなかの朝鮮―歩いて知る朝鮮と日本の歴史 明石書店 2001-10-01
[3] 사전 小倉武之助 おぐら-たけのすけ https://kotobank.jp/[...]
[4] 문서 小倉武之助 http://jahis.law.nag[...] 『人事興信録』第8版 1928-07
[5] 뉴스 韓国文化財「小倉コレクション」 日本、かつて一部返還を検討 https://japanese.joi[...] 2014-11-07
[6] 회의록 衆議院会議録 第166回国会 文部科学委員会 第8号 平成19年4月6日 https://www.shugiin.[...]
[7] 뉴스 〈本の紹介〉「民族文化財を探し求めて」慧門著・李一満訳 「奪われた側」は決して、あきらめない http://chosonsinbo.c[...] 2014-11-13
[8] 뉴스 日本裁判所「盗掘の疑いのある韓国文化財の返還申請」却下 https://japanese.joi[...] 2014-11-07
[9] 뉴스 東京簡裁 韓国団体の調停申請を却下=韓国文化財返還問題 http://japanese.yonh[...] 2014-11-13
[10] 뉴스 へムン僧侶、東京国立博物館に盗難の疑いがある34点 所蔵中止を申請 回答なき場合は日本裁判所に提訴 「盗難・盗掘品の所蔵は両国にとって不名誉」 http://japan.hani.co[...] 2014-11-13
[11]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目録 http://iss.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12]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目録 http://www.lib.usp.a[...] 滋賀県立大学図書情報センター
[13] 자료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会関係資料 http://iss.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14]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写真集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15]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写真集」検索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16]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写真集 https://www.library.[...] 千葉県立図書館
[17] 도서 寄贈小倉コレクション目録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18] 도서 小倉コレクション韓国文化財 : 日本東京国立博物館所蔵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19] 데이터베이스 明治時代に千葉で活躍した小倉良則(おぐらよしのり)について詳しく知りたい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0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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