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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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1901년 연방 성립 이후 창설된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육군으로, 영국 육군의 계급 체계를 기반으로 하며, 다양한 분쟁에 참전해왔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주요 전투에 참여했고, 냉전 시기에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도 파병되었다. 현재는 정규군과 예비군을 합쳐 약 49,000명 규모로, M1A1 에이브람스 전차, ASLAV 장갑차, 보잉 CH-47 치누크 수송 헬리콥터 등 다양한 장비를 운용하고 있다. 육군은 1사단, 2사단, 특수작전사령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군 깃발과 군기, 표준기 등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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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명칭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
| 원어 명칭 | Australian Army |
| 창설일 | 1901년 3월 1일 |
| 국가 | 오스트레일리아 |
| 군종 | 육군 |
| 역할 | 육상전 |
| 규모 | 28,524명 (정규군), 15,711명 (예비군) |
| 소속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
| 웹사이트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웹사이트 |
| 애칭 | AusArmy |
| 표어 | Serving the Nation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 |
| 군가 | The Army March |
| 지휘부 | |
| 국방군 사령관 | 데이비드 존스턴 |
| 육군 참모총장 | 사이먼 스튜어트 |
| 육군 부참모총장 | 크리스 스미스 |
| 전력 사령관 | 수잔 코일 |
| 전투 | |
| 주요 참전 | 제2차 보어 전쟁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립 베트남 전쟁 제2차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1999년 동티모르 위기 2006년 동티모르 위기 솔로몬 제도 지역 지원 임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
| 휘장 | |
| 기타 정보 | |
2. 역사



1901년 3월, 연방 성립 이후 창설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초기에는 해체된 6개의 식민지 군대의 육군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식민지 군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령 인도 제국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위해 제2차 보어 전쟁에 파병되었던 부대들이 있었기에 곧바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육군은 이러한 부대들을 지휘하게 되었고,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들의 파병을 강화하기 위해 연방 부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4][5]
1903년 국방법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작전 및 지휘 구조를 확립하였다.[6] 1911년에는 보편적 복무 계획이 시행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으로 징병제가 도입되었으며, 14세에서 26세 사이의 남성들은 사관후보생 및 시민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스트레일리아 주 및 준주 외부의 해외 파병을 규정하거나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제한은 20세기 중반까지 별도의 자원군을 모집하는 과정을 통해 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우회되었는데, 이러한 해결책은 물류상의 딜레마를 야기하는 등 단점이 없지 않았다.[7]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는 중앙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자원병으로 구성된 제1차 오스트레일리아 원정군(AIF)을 창설했다.[8] 당초 2만 명 모집을 목표로 했으나 5만 2,561명이 지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육군 원정군(ANMEF)은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하는 등 독일의 태평양 영토를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8][9] 오스만 제국이 중앙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AIF는 이집트로 이동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군단(ANZAC)을 편성하고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10][11]
1915년 4월 25일, AIF는 ANZAC 만에 상륙했지만, 전투는 곧 참호전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8개월간의 전투 후, 1915년 12월 갈리폴리에서 철수했다.[11] 이후 AIF는 재편성되어 서부 전선과 아라비아 및 레반트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오스트레일리아 제1군단(AIF)은 솜 전투, 프롬멜 전투, 포지에르 전투, 무케 농장 전투 등에 참전하여 6주 동안 2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2] 이러한 손실과 병력 유지를 위한 영국의 압력으로 빌리 휴즈 총리는 징병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13][14]
1917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공격하는 불레쿠르 전투 제1차 전투와 제3 이프르 전투의 일부인 메닌 도로 전투, 폴리곤 우드 전투에 참여했다.[15][16][17][18] 1918년 독일 봄 공세 당시 미카엘 공세에서 15,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빌레르-브르토뇌를 지켜내고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8] 이후 평화로운 침투 작전을 통해 주요 목표들을 달성했다.
1918년 하멜 전투에서 존 모나슈의 지휘 아래 전차를 성공적으로 활용했으며, 아미앵 전투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독일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19] 이후 몽 생 캉탱 전투와 에페 전투를 거쳐 힌덴부르크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여 방어선을 돌파했다.[19] 1918년 10월 5일,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전선에서 철수했으며,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전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다.[9][20]
한편, ANZAC 기병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기병사단은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 참전하여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고 시나이 사막 탈환에 기여했다. 1917년 제4 및 제12 경기병 연대는 베르셰바를 점령했으며, 이후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전투도 종결되었다.[9]
1918년 휴전과 1919년 말 사이, 오스트레일리아 제국군 해산 이후 본국 송환 노력이 이루어졌다. 1921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부대의 명예와 번호를 계승하기 위해 시민군(CMF) 부대의 번호가 AIF 부대의 번호로 재배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전 전쟁이 오스트레일리아 국민 정신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으로 인해 국방 문제에 대한 안이함이 만연했다. 1929년 제임스 스컬린 총리의 당선 이후, 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징병이 폐지되었고, 대공황의 경제적 영향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공황의 경제적 여파는 국방비와 육군 병력을 감축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징병이 폐지됨에 따라 새로운 자원병 중심의 시민군의 성격을 반영하여 CMF는 민병대로 개명되었다.
영국이 나치 독일 및 그 동맹국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이후 1939년 9월 3일 로버트 멘지스 총리가 이를 확인함에 따라,[2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2만 명 규모의 자원병으로 구성된 제2차 오스트레일리아 원정군(Second Australian Imperial Force, 2nd AIF)을 창설했다. 초기에는 제6사단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제7사단과 제9사단이 추가되었고, 싱가포르로 파병된 제8사단도 포함되었다.[21] 1939년 10월에는 미혼 남성 21세 이상에 대한 의무 군사 훈련이 재개되어 3개월의 훈련을 이수해야 했다.[14]
2nd AIF는 작전 컴패스로 북아프리카에서 첫 작전을 시작했으며, 바르디아 전투로 시작되었다.[22] 이후 그리스 전투에서 추축군에 맞서 방어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부대를 지원했다.[23] 그리스 철수 후, 오스트레일리아 군대는 크레타 전투에 참가했지만,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24] 그리스 전역에서 연합군은 이집트로 밀려났고 토브룩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토브룩 방어의 주요 인원은 제9사단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었으며, 이들은 '토브룩의 쥐들(Rats of Tobruk)'로 불렸습니다.[25] 또한 AIF는 시리아-레바논 전역에 참가했다. 제9사단은 제1차 및 엘 알라메인 제2차 전투에서 싸운 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26]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호주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결과, 이후 동남아시아의 급속한 정복이 호주 정책 입안자들을 매우 우려하게 만들었고, 민병대가 동원됨에 따라, 호주군(AIF)은 귀국 요청을 받았다. 싱가포르 함락과 그에 따른 8사단 전체의 포로로서의 포획 이후,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21] 징병제가 재도입되었지만, 복무는 다시 호주령으로 제한되어 AIF와 민병대 사이에 긴장을 야기했다. 이것은 CMF의 인식된 열악한 전투 능력에 더해져, 이러한 불만으로 인해 민병대는 "코알라"와 "초코" 또는 "초콜릿 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4][27][28][29][30]
일본 해군의 산호해 해전에서의 실패는 일본 육군이 오웬 스탠리 산맥을 통해 모레스비를 점령하려는 계기가 되었다.[31] 1942년 7월 21일, 일본군은 고나에 상륙한 후 코코다 전투를 시작했다. 호주 대대가 이들을 물리치려는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적인 공세 작전은 일본군이 뉴기니에서 완전히 몰려나가는 것으로 끝났다.[32] 이러한 방어와 동시에 밀른 만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이 격퇴되자 이는 전쟁에서 그들의 첫 번째 중요한 역전으로 여겨졌다.[33] 1942년 11월, 일본군의 철수 이후 전투가 끝났고, 호주군의 진격은 부나-고나 전투로 이어졌다.[32][34]
1943년 초, 살라마우아-라에 전투가 시작되어, 동명의 도시들을 탈환하기 위한 박격포 일본군에 대한 작전이 수행되었다.[35] 이는 1943년 9월 초 7사단이 성공적인 합동 상륙 작전인 라에 상륙 작전과 공중 나드잡 상륙 작전을 통해 라에를 점령한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해상 공격은 갈리폴리 이후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후, 살라마우아는 1943년 9월 11일 호주-미국 합동 공격에 의해 며칠 후 함락되었다.[36] 라에 전투는 또한 더 광범위한 후온 반도 전투의 일부였다. 라에 함락 후, 핀슈하펜 전투가 시작되어 목표물을 비교적 빠르게 장악했고, 그 후 일본군의 반격이 격퇴되었다. 1943년 11월 17일, 사텔베르크 전투로 시작하여 와레오 전투로 이어지고 1944년 1월 15일 시오 전투로 끝나는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진격의 추진력은 제8여단에 의해 계속되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마당 전투로 이어졌다.[37]
1944년 중반, 호주군은 미군으로부터 토로키나 주둔을 인계받았고, 이러한 변화는 부건빌 전투에 대한 호주군의 사령부 책임을 부여했다. 같은 해 11월 도착한 직후, 제2군단 사령관인 스탠리 세이비지(Stanley Savige) 중장은 제11여단과 제23여단과 함께 제3사단을 동원하여 섬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투는 일본의 항복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종결에 대한 명백한 중요성이 거의 없고 발생한 사상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호주가 치른 가장 큰 비용을 치른 전투 중 하나였다.[38]
1944년 10월, 호주군은 아이타페-웨왁 전투에 참여하여 아이타페에 있는 미군을 호주 제6사단으로 교체했다. 미군은 이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수동적으로 방어했지만, 호주군 사령부는 이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944년 11월 2일, 제2/6 기갑 코만도 연대에 이 지역을 순찰하는 임무가 부여되었고, 소규모 교전이 보고되었다. 12월 초, 코만도들은 토리첼리 산맥에 접근하기 위해 내륙으로 파견되었고, 제19여단은 순찰을 담당했다. 그 결과, 치열한 전투와 확보된 영토가 증가했다. 이러한 성공에 따라 마프릭과 웨왁 점령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 보급이 주요 문제가 되었다. 1945년 2월 10일, 이 전투의 주요 공세가 시작되어 1945년 4월 22일 두 지역 모두 빠르게 함락되었다.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소규모 작전이 계속되었고, 7월까지 모든 중요한 작전이 중단되었다.[39]
보르네오 전투는 제7사단과 제9사단이 실시한 3개의 별개의 상륙 작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투는 1945년 5월 1일 타라칸 전투로 시작하여 6주 후 라부안 전투가 이어졌고, 발리파판 전투로 끝났다. 타라칸을 점령한 목적은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 섬은 최초 상륙 후 7주 만에 함락되었다. 1945년 6월 10일, 라부안 작전이 시작되었고, 자원과 해군 기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일본의 항복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7월 1일, 발리파판 작전이 시작되어 전쟁이 끝날 무렵 모든 주요 목표가 달성되었다. 이 작전은 3만 3천 명의 호주 군인이 참여한 호주군이 수행한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으로 남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40][41][42]
냉전 시대에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여러 분쟁에 참여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연방 점령군(BCOF)의 일원으로 제34여단을 파병했다.[43] 한국 전쟁 발발 후, 제3왕립호주연대 대대(3RAR)가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한군과 싸웠으며, 이후 제1왕립호주연대 대대(1RAR)가 합류했다.[43][44] 1951년부터 1959년까지 멘지스 정부는 국가 봉사 계획에 따라 징병제를 시행했다.[29][45]
1955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말레이시아 비상사태(1948~1960)에 제2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 대대(2RAR)를 파병하여 말레이시아 민족해방군(MNLA)과 싸웠다.[46] 1963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는 말레이시아 파병을 종료했다.[46] 말레이시아 대치(1962년 ~ 1966년) 기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는 말레이시아군을 지원했으며, 1965년 제3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3RAR)가 사라왁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1966년에는 제4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 대대(4RAR)가 배치되었다.[47][48]
베트남 전쟁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1962년 군사 고문을 파견하고, 1965년 제1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1RAR)를 포함한 전투 부대를 파병했다.[49][50] 1964년, 징병제가 재도입되었는데, '생일 추첨' 방식은 논란이 되었다.[49][50][29][45] 1966년, 제1오스트레일리아 임무부대가 1RAR을 대체했다. 롱탄 전투(1966년 8월)에서 제6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6RAR) D중대는 대규모 적군을 격퇴했다.[49][50] 1968년 테트 공세를 방어한 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97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1973년 1월 11일 공식적으로 철수를 완료했다.[49][50]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은 이라크에 철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이라크가 거부하여 1991년 1월 17일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5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걸프 전쟁에 참전하였고, 1993년 1월부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조약을 감시하는 다국적군 감시단(MFO)에 병력을 순환 배치했다.[52]
1999년 동티모르 국제군 파병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최대 규모로 참여한 평화유지 활동이었다.[53]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 국제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동티모르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유엔 휴전 감시 기구(UNTSO) 활동과 2004년 인도양 지진 이후 수마트라 지원 작전 등의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펼쳤다.[53]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대테러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작전 슬리퍼(Operation Slipper)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54] 전투 임무는 2013년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작전 하이로드(Operation Highroad)에 따른 훈련 부대가 2021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54][55]
21세기 초,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유엔에 이라크 침공을 요청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를 지지했다. 유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2003년 3월 19일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56]
2015년 4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작전 오크라(Operation Okra)의 일환으로 이라크 타지에 300명 규모의 부대를 배치하여 이라크군 훈련을 지원했다.[57][58] 이 기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뉴질랜드군과 함께 복무했다.
2020년에는 브레레턴 보고서(Brereton Report)가 발표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오스트레일리아 특수부대의 전쟁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가 종료되었다.[59] 이 보고서는 SAS를 포함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 소속 25명이 39명의 민간인 및 포로 살해에 연루되었음을 확인했으며, 이 중 19명은 형사 조사를 위해 호주 연방 경찰(Australian Federal Police)에 회부되었다.[59]
2. 1. 창설과 초기 (1901년 ~ 1914년)
1901년 3월, 연방 성립 이후 창설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초기에는 해체된 6개의 식민지 군대의 육군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식민지 군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령 인도 제국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위해 제2차 보어 전쟁에 파병되었던 부대들이 있었기에 곧바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육군은 이러한 부대들을 지휘하게 되었고,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들의 파병을 강화하기 위해 연방 부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4][5]1903년 국방법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작전 및 지휘 구조를 확립하였다.[6] 1911년에는 보편적 복무 계획이 시행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으로 징병제가 도입되었으며, 14세에서 26세 사이의 남성들은 사관후보생 및 시민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스트레일리아 주 및 준주 외부의 해외 파병을 규정하거나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제한은 20세기 중반까지 별도의 자원군을 모집하는 과정을 통해 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우회되었는데, 이러한 해결책은 물류상의 딜레마를 야기하는 등 단점이 없지 않았다.[7]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는 중앙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자원병으로 구성된 제1차 오스트레일리아 원정군(AIF)을 창설했다.[8] 당초 2만 명 모집을 목표로 했으나 5만 2,561명이 지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육군 원정군(ANMEF)은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하는 등 독일의 태평양 영토를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8][9] 오스만 제국이 중앙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AIF는 이집트로 이동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군단(ANZAC)을 편성하고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10][11]1915년 4월 25일, AIF는 ANZAC 만에 상륙했지만, 전투는 곧 참호전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8개월간의 전투 후, 1915년 12월 갈리폴리에서 철수했다.[11] 이후 AIF는 재편성되어 서부 전선과 아라비아 및 레반트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오스트레일리아 제1군단(AIF)은 솜 전투, 프롬멜 전투, 포지에르 전투, 무케 농장 전투 등에 참전하여 6주 동안 2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2] 이러한 손실과 병력 유지를 위한 영국의 압력으로 빌리 휴즈 총리는 징병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13][14]
1917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공격하는 불레쿠르 전투 제1차 전투와 제3 이프르 전투의 일부인 메닌 도로 전투, 폴리곤 우드 전투에 참여했다.[15][16][17][18] 1918년 독일 봄 공세 당시 미카엘 공세에서 15,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빌레르-브르토뇌를 지켜내고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8] 이후 평화로운 침투 작전을 통해 주요 목표들을 달성했다.
1918년 하멜 전투에서 존 모나슈의 지휘 아래 전차를 성공적으로 활용했으며, 아미앵 전투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독일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19] 이후 몽 생 캉탱 전투와 에페 전투를 거쳐 힌덴부르크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여 방어선을 돌파했다.[19] 1918년 10월 5일,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전선에서 철수했으며,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전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다.[9][20]
한편, ANZAC 기병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기병사단은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 참전하여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고 시나이 사막 탈환에 기여했다. 1917년 제4 및 제12 경기병 연대는 베르셰바를 점령했으며, 이후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전투도 종결되었다.[9]
2. 3. 전간기 (1919년 ~ 1939년)
1918년 휴전과 1919년 말 사이, 오스트레일리아 제국군 해산 이후 본국 송환 노력이 이루어졌다. 1921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부대의 명예와 번호를 계승하기 위해 시민군(CMF) 부대의 번호가 AIF 부대의 번호로 재배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전 전쟁이 오스트레일리아 국민 정신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으로 인해 국방 문제에 대한 안이함이 만연했다. 1929년 제임스 스컬린 총리의 당선 이후, 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징병이 폐지되었고, 대공황의 경제적 영향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공황의 경제적 여파는 국방비와 육군 병력을 감축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징병이 폐지됨에 따라 새로운 자원병 중심의 시민군의 성격을 반영하여 CMF는 민병대로 개명되었다.2. 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영국이 나치 독일 및 그 동맹국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이후 1939년 9월 3일 로버트 멘지스 총리가 이를 확인함에 따라,[2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2만 명 규모의 자원병으로 구성된 제2차 오스트레일리아 원정군(Second Australian Imperial Force, 2nd AIF)을 창설했다. 초기에는 제6사단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제7사단과 제9사단이 추가되었고, 싱가포르로 파병된 제8사단도 포함되었다.[21] 1939년 10월에는 미혼 남성 21세 이상에 대한 의무 군사 훈련이 재개되어 3개월의 훈련을 이수해야 했다.[14]2nd AIF는 작전 컴패스로 북아프리카에서 첫 작전을 시작했으며, 바르디아 전투로 시작되었다.[22] 이후 그리스 전투에서 추축군에 맞서 방어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부대를 지원했다.[23] 그리스 철수 후, 오스트레일리아 군대는 크레타 전투에 참가했지만,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24] 그리스 전역에서 연합군은 이집트로 밀려났고 토브룩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토브룩 방어의 주요 인원은 제9사단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었으며, 이들은 '토브룩의 쥐들(Rats of Tobruk)'로 불렸습니다.[25] 또한 AIF는 시리아-레바논 전역에 참가했다. 제9사단은 제1차 및 엘 알라메인 제2차 전투에서 싸운 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26]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호주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결과, 이후 동남아시아의 급속한 정복이 호주 정책 입안자들을 매우 우려하게 만들었고, 민병대가 동원됨에 따라, 호주군(AIF)은 귀국 요청을 받았다. 싱가포르 함락과 그에 따른 8사단 전체의 포로로서의 포획 이후,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21] 징병제가 재도입되었지만, 복무는 다시 호주령으로 제한되어 AIF와 민병대 사이에 긴장을 야기했다. 이것은 CMF의 인식된 열악한 전투 능력에 더해져, 이러한 불만으로 인해 민병대는 "코알라"와 "초코" 또는 "초콜릿 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4][27][28][29][30]
일본 해군의 산호해 해전에서의 실패는 일본 육군이 오웬 스탠리 산맥을 통해 모레스비를 점령하려는 계기가 되었다.[31] 1942년 7월 21일, 일본군은 고나에 상륙한 후 코코다 전투를 시작했다. 호주 대대가 이들을 물리치려는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적인 공세 작전은 일본군이 뉴기니에서 완전히 몰려나가는 것으로 끝났다.[32] 이러한 방어와 동시에 밀른 만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이 격퇴되자 이는 전쟁에서 그들의 첫 번째 중요한 역전으로 여겨졌다.[33] 1942년 11월, 일본군의 철수 이후 전투가 끝났고, 호주군의 진격은 부나-고나 전투로 이어졌다.[32][34]
1943년 초, 살라마우아-라에 전투가 시작되어, 동명의 도시들을 탈환하기 위한 박격포 일본군에 대한 작전이 수행되었다.[35] 이는 1943년 9월 초 7사단이 성공적인 합동 상륙 작전인 라에 상륙 작전과 공중 나드잡 상륙 작전을 통해 라에를 점령한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해상 공격은 갈리폴리 이후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후, 살라마우아는 1943년 9월 11일 호주-미국 합동 공격에 의해 며칠 후 함락되었다.[36] 라에 전투는 또한 더 광범위한 후온 반도 전투의 일부였다. 라에 함락 후, 핀슈하펜 전투가 시작되어 목표물을 비교적 빠르게 장악했고, 그 후 일본군의 반격이 격퇴되었다. 1943년 11월 17일, 사텔베르크 전투로 시작하여 와레오 전투로 이어지고 1944년 1월 15일 시오 전투로 끝나는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진격의 추진력은 제8여단에 의해 계속되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마당 전투로 이어졌다.[37]
1944년 중반, 호주군은 미군으로부터 토로키나 주둔을 인계받았고, 이러한 변화는 부건빌 전투에 대한 호주군의 사령부 책임을 부여했다. 같은 해 11월 도착한 직후, 제2군단 사령관인 스탠리 세이비지(Stanley Savige) 중장은 제11여단과 제23여단과 함께 제3사단을 동원하여 섬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투는 일본의 항복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종결에 대한 명백한 중요성이 거의 없고 발생한 사상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호주가 치른 가장 큰 비용을 치른 전투 중 하나였다.[38]
1944년 10월, 호주군은 아이타페-웨왁 전투에 참여하여 아이타페에 있는 미군을 호주 제6사단으로 교체했다. 미군은 이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수동적으로 방어했지만, 호주군 사령부는 이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944년 11월 2일, 제2/6 기갑 코만도 연대에 이 지역을 순찰하는 임무가 부여되었고, 소규모 교전이 보고되었다. 12월 초, 코만도들은 토리첼리 산맥에 접근하기 위해 내륙으로 파견되었고, 제19여단은 순찰을 담당했다. 그 결과, 치열한 전투와 확보된 영토가 증가했다. 이러한 성공에 따라 마프릭과 웨왁 점령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 보급이 주요 문제가 되었다. 1945년 2월 10일, 이 전투의 주요 공세가 시작되어 1945년 4월 22일 두 지역 모두 빠르게 함락되었다.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소규모 작전이 계속되었고, 7월까지 모든 중요한 작전이 중단되었다.[39]
보르네오 전투는 제7사단과 제9사단이 실시한 3개의 별개의 상륙 작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투는 1945년 5월 1일 타라칸 전투로 시작하여 6주 후 라부안 전투가 이어졌고, 발리파판 전투로 끝났다. 타라칸을 점령한 목적은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 섬은 최초 상륙 후 7주 만에 함락되었다. 1945년 6월 10일, 라부안 작전이 시작되었고, 자원과 해군 기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일본의 항복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7월 1일, 발리파판 작전이 시작되어 전쟁이 끝날 무렵 모든 주요 목표가 달성되었다. 이 작전은 3만 3천 명의 호주 군인이 참여한 호주군이 수행한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으로 남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40][41][42]
2. 5. 냉전 시대 (1945년 ~ 1990년)
냉전 시대에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여러 분쟁에 참여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연방 점령군(BCOF)의 일원으로 제34여단을 파병했다.[43] 한국 전쟁 발발 후, 제3왕립호주연대 대대(3RAR)가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한군과 싸웠으며, 이후 제1왕립호주연대 대대(1RAR)가 합류했다.[43][44] 1951년부터 1959년까지 멘지스 정부는 국가 봉사 계획에 따라 징병제를 시행했다.[29][45]1955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말레이시아 비상사태(1948~1960)에 제2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 대대(2RAR)를 파병하여 말레이시아 민족해방군(MNLA)과 싸웠다.[46] 1963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는 말레이시아 파병을 종료했다.[46] 말레이시아 대치(1962년 ~ 1966년) 기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는 말레이시아군을 지원했으며, 1965년 제3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3RAR)가 사라왁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1966년에는 제4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 대대(4RAR)가 배치되었다.[47][48]
베트남 전쟁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1962년 군사 고문을 파견하고, 1965년 제1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1RAR)를 포함한 전투 부대를 파병했다.[49][50] 1964년, 징병제가 재도입되었는데, '생일 추첨' 방식은 논란이 되었다.[49][50][29][45] 1966년, 제1오스트레일리아 임무부대가 1RAR을 대체했다. 롱탄 전투(1966년 8월)에서 제6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6RAR) D중대는 대규모 적군을 격퇴했다.[49][50] 1968년 테트 공세를 방어한 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97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1973년 1월 11일 공식적으로 철수를 완료했다.[49][50]
2. 6. 최근 역사 (1990년 ~ 현재)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은 이라크에 철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이라크가 거부하여 1991년 1월 17일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5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걸프 전쟁에 참전하였고, 1993년 1월부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조약을 감시하는 다국적군 감시단(MFO)에 병력을 순환 배치했다.[52]1999년 동티모르 국제군 파병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최대 규모로 참여한 평화유지 활동이었다.[53]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 국제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동티모르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유엔 휴전 감시 기구(UNTSO) 활동과 2004년 인도양 지진 이후 수마트라 지원 작전 등의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펼쳤다.[53]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대테러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작전 슬리퍼(Operation Slipper)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54] 전투 임무는 2013년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작전 하이로드(Operation Highroad)에 따른 훈련 부대가 2021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54][55]
21세기 초,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유엔에 이라크 침공을 요청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를 지지했다. 유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2003년 3월 19일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56]
2015년 4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작전 오크라(Operation Okra)의 일환으로 이라크 타지에 300명 규모의 부대를 배치하여 이라크군 훈련을 지원했다.[57][58] 이 기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뉴질랜드군과 함께 복무했다.
2020년에는 브레레턴 보고서(Brereton Report)가 발표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오스트레일리아 특수부대의 전쟁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가 종료되었다.[59] 이 보고서는 SAS를 포함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 소속 25명이 39명의 민간인 및 포로 살해에 연루되었음을 확인했으며, 이 중 19명은 형사 조사를 위해 호주 연방 경찰(Australian Federal Police)에 회부되었다.[59]
3. 조직

- 통합참모장
- 육군 본부
- * 제2여단[101]
- ** 제1의무지원대대
- ** 제2의무지원대대
- ** 제3의무지원대대
- ** 제4의무지원대대
- * 제6여단 (통신 및 정보·감시·정찰)
- ** 제1통신그룹
- ** 제1정보대대
- ** 제1헌병대대
- ** 제2/30훈련그룹
- ** 제6공병지원연대
- ** 제7통신연대(전자전)
- ** 제16방공연대
- ** 제19공병부대
- ** 제20무인항공·표적연대
- ** 노스웨스트 기동부대(예비, 장거리정찰)
- ** 필바라 연대(예비, 장거리정찰)
- * 제9여단
- **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기병 제3/9연대
- ** 제1기갑연대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7대대(륜형 기계화보병)
- ** 왕립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10/27대대
- ** 제16포병중대
- ** 제48포병중대
- ** 제9전투공병연대 제3중대
- ** 제144통신중대
- ** 제9전투지원대대
- * 제17전투지원여단
- ** 제17통신연대
- ** 제2군사지원대대(예비)
- ** 제9군사지원대대
- ** 제10군사지원대대
- ** 제39후생지원대대
- ** 제1심리전부대
- 제1사단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2대대(수륙양용보병)
- * 제1통신연대
- * 지상전준비센터
- * 제1여단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5대대(기계화보병)
- ** 제8/12포병연대
- ** 제1전투공병연대
- ** 제1전투통신연대
- ** 제1전투지원대대
- * 제3여단
- ** 제2기병연대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1대대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 ** 제4포병연대
- ** 제3전투공병연대
- ** 제3전투통신연대
- ** 제3전투지원대대
- * 제7여단
- ** 제2/14경기병연대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6대대(륜형 기계화보병)
- ** 왕립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8/9대대(륜형 기계화보병)
- ** 제1포병연대
- ** 제2전투공병연대
- ** 제139통신중대
- ** 제7전투지원대대
- 특수작전사령부(SOCOMD)
- * 군단사령부지원중대
- * 오스트레일리아 SAS 연대(SASR)
- * 제1코만도 연대(1CDO)
- * 제2코만도 연대(2CDO)
- * 긴급대응연대(대NBC)
- * 특수작전공병연대(SOER)
- * 특수작전지원중대
- * 국방특수작전훈련 및 교육센터
-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특수작전학교
-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공수학교
- * 군사령부(예비역·후방지원부대 등의 지휘통제)
- ** 군단훈련여단
- ** 육상훈련여단
- 제2사단
- * 제8통신연대(예비)
- * 제9포병연대
- * 제4여단(예비)
- ** 웨일스공왕 연대 제4/19대대(정찰)
- ** 왕립빅토리아 연대 제5/6대대
- ** 왕립빅토리아 연대 제8/7대대
- ** 왕립타스마니아 연대 제12/40대대
- ** 제2/10포병연대
- ** 제4전투공병연대
- ** 제108통신중대
- ** 제4전투지원대대
- * 제5여단 (예비)
- ** 제1/15 왕립뉴사우스웨일스 창기병연대
- ** 왕립뉴사우스웨일스 연대 제1/19대대
- ** 제12/16 헌터리버 창기병연대
- ** 왕립뉴사우스웨일스 연대 제2/17대대
- ** 왕립뉴사우스웨일스 연대 제41대대
- ** 브리티시 왕립뉴사우스웨일스 연대 제4/3대대
- ** 제7포병연대
- ** 제8전투공병연대
- ** 제155통신중대
- ** 제8전투지원대대
- ** 제23포병연대
- ** 제5전투공병연대
- ** 제21건설연대(예비)
- ** 제142통신중대
- ** 제5전투지원대대
- * 제8여단 (훈련)
- ** 애들레이드 대학교 연대
- ** 멜버른 대학교 연대
- ** 퀸즐랜드 대학교 연대
- ** 시드니 대학교 연대
- **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 연대
- ** 서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 연대
- * 제11여단 (예비)
- ** 왕립퀸즐랜드 연대 제9대대
- ** 왕립퀸즐랜드 연대 제25/49대대
- ** 왕립퀸즐랜드 연대 제31/42대대
- ** 제11전투공병연대 제35중대
- ** 제141통신중대
- ** 제11전투지원대대
- * 제13여단 (예비)
- ** 제10경기병연대 A중대
- ** 왕립서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11/28대대
- ** 왕립서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16대대
- ** 제3포병연대 제7중대
- ** 제13전투공병연대 제13중대
- ** 제13전투지원대대
- ** 퍼노스 퀸즐랜드 연대 제51대대(예비, 장거리정찰)
- 육군항공본부
- * 제16항공여단 (항공)
- ** 제1항공연대
- ** 제5항공연대
- ** 제6항공연대
3. 1. 1사단
2023년 7월 1일부터 제1호주사단(1st Australian Division)으로 개칭되었다.[60] 이전의 사단 본부와 예하 여단 간의 연락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이었다.[60]제1사단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주요 편제 중 하나이다. 예하에 제1여단, 제3여단, 제7여단을 두고 있다.[60] 각 여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제1여단 - 다윈에 주둔하는 경보병여단[61]
- 제3여단 - 타운스빌에 주둔하는 기갑여단[61]
- 제7여단 - 브리즈번에 주둔하는 기계화여단[61]
3. 2. 작전사령부
작전사령부(Forces Command)는 호주 육군의 모든 비전투 자산을 행정적으로 통제하며, 모든 훈련 시설을 통합하여 규모 확장 및 동원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60]
작전사령부 예하에는 다음과 같은 여단들이 있다.
- 제2여단 – 호주 전역에 배치된 의무 여단.[101]
- 제6여단(CS&ISTAR) – 시드니에 배치된 혼성 여단.
- 제8여단 – 호주 전역에 부대를 두고 있는 훈련 여단.[62]
- 제9여단 – 남호주에 배치된 통합 전투 여단.[62]
- 제17지원여단 – 시드니에 배치된 지원 여단.
작전사령부에는 다음과 같은 훈련 및 지원 시설 또한 포함된다.
- 뉴사우스웨일스주 카푸카에 위치한 육군 신병훈련소.
-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에 위치한 던트룬 왕립군사학교.
- 빅토리아주 퍼커퍼낼에 위치한 호주 합동병과훈련센터.
- 빅토리아주 보네길라, 반디아나에 위치한 육군 후방지원 훈련센터.[63]
- 빅토리아주 맥클리오드에 위치한 국방사령부 지원훈련센터.
- 퀸즐랜드주 타운스빌에 위치한 호주 전투훈련센터.
-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에 위치한 제39작전지원대대.
3. 3. 2사단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제2사단은 시드니에 본부를 두고 예비군을 지휘하는 부대이다.[101]
- 제4여단은 빅토리아주와 태즈메이니아주에 주둔한다.
- 제5여단은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주둔한다.
- 제11여단은 퀸즐랜드주에 주둔한다.
- 제13여단은 서호주에 주둔한다.
- 제8통신연대(예비), 제9포병연대가 있다.
3. 4. 육군 항공 사령부
육군 항공 사령부는 호주 육군의 헬리콥터 및 훈련, 항공 안전, 그리고 무인 항공기(UAV)를 담당한다.[64] 제16 항공 여단은 갈리폴리 막사(Gallipoli Barracks)가 있는 에노게라, 브리즈번에 주둔하고 있다. 육군 항공 훈련 센터는 오키에 위치한다.3. 5. 특수작전사령부
오스트레일리아 특수작전사령부(Special Operations Command)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의 다른 사령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육군의 모든 특수부대 부대를 포함한다.[65][66] 예하에 특수부대 그룹(Special Forces Group)이 편성되어 있다.[65][67]2023년 현재 편제는 다음과 같다.
- 군단사령부지원중대
- 오스트레일리아 SAS 연대(SASR)
- 제1코만도 연대(1CDO)
- 제2코만도 연대(2CDO)
- 긴급대응연대(대NBC)
- 특수작전공병연대(SOER)
- 특수작전지원중대
- 국방특수작전훈련 및 교육센터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특수작전학교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공수학교
4. 병력
2022년 6월 기준,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정규군 28,387명과 예비군 20,74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자원입대자이다. 2019년에는 현역 병사 29,511명과 예비역 18,738명이 있었다. 여성은 육군의 15.11%를 차지하며, 2025년까지 18%로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3년 1월부터 전방 전투 또는 훈련 역할에 대한 성별 제한이 해제되었다.[72]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육군의 3.7%를 차지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육군, 해군, 공군이 모두 있지만, 해병대는 없으며, 장교 임관은 육군사관후보생과 해군사관후보생 선발로 이루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 공군만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생 및 공군사관후보생 선발로 장교를 임관한다.
5. 계급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계급은 영국 육군의 계급을 기반으로 하며, 대부분 동일한 실제 휘장을 사용한다. 장교의 경우 어깨 휘장의 "Australia"를 제외하고는 계급이 동일하다. 부사관 휘장은 준위까지 동일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스타일(예: 영국 왕실 문장이 아닌 오스트레일리아 문장 사용)로 변경된다.
| NATO 코드 | OF-10 | OF-9 | OF-8 | OF-7 | OF-6 | OF-5 | OF-4 | OF-3 | OF-2 | OF-1 | OF(D) | ||
|---|---|---|---|---|---|---|---|---|---|---|---|---|---|
| 오스트레일리아 장교 계급 휘장 | |||||||||||||
| 계급 명칭: | 원수 | 대장 | 중장 | 소장 | 준장 | 대령 | 중령 | 소령 | 대위 | 중위 | 소위 | 장교 후보생 | 사관학교 생도 |
| 약칭: | FM | GEN | LTGEN | MAJGEN | BRIG | COL | LTCOL | MAJ | CAPT | LT | 2LT | OCDT | SCDT |
| NATO 코드 | OR-9 | OR-8 | OR-7 | OR-6 | OR-5 | OR-4 | OR-3 | OR-2 | OR-1 | |
|---|---|---|---|---|---|---|---|---|---|---|
| 오스트레일리아 기타 계급 휘장 | 휘장 없음 | |||||||||
| 계급 명칭: | 육군 연대 상사장 | 준위 1급 | 준위 2급 | 상사 | 중사 | 하사 | 상병 | 일병 | 신병 | |
| 약칭: | RSM-A | WO1 | WO2 | SSgt | Sgt | Cpl | LCpl | Pte | Rec | |
6. 장비


; 화기 및 포병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개인 화기로 EF88 개량형 F88 오스테어(소총)[76], F89 미니미(지원화기)[76], 브라우닝 하이파워(권총)[76], FN MAG(MAG-58)(기관총)[76], HK417, SR-98(저격총)[76], 미니미 7.62(맥시미) 및 AW50F[76]를 사용한다. 특수부대는 M4 카빈, 헤클러&코흐 USP, SR-25, F89 미니미, MP5, SR-98, 미니미 7.62(맥시미), HK416, HK417, 블라서 R93 전술, 배럿 M82 및 Mk 14 강화 전투 소총(Mk14 EBR)을 사용한다.
야포로는 M777A2 155mm 곡사포 48문[77], M252A1 81mm 박격포 176문[78], M224A1 60mm 박격포[79]를 보유하고있다.
; 차량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주력 전차, 장갑복구차, 정찰차량, 장갑병원정차, 보병 기동차량, 경량 유틸리티 차량, 트럭 등을 운용한다. 주력 전차로는 M1A1 에이브람스 59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75대의 M1A2 에이브람스 SEPv3로 교체될 예정이다.[102] 장갑복구차로는 M88A2 허큘리스 13대를 보유하고 있다.[80][81]
정찰차량으로는 ASLAV 257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 복서 장갑차 211대로 교체될 예정이다.[103][104] 장갑병원정차로는 M113 장갑차 431대가 운용 중이며, 한화 레드백(Redback)(K21)으로 교체될 예정이다.[82]
보병 기동차량으로는 부시마스터(Bushmaster)와 SC 그룹 HMT 익스텐다(Extenda) Mk1 31대 및 HMT 익스텐다(Extenda) Mk2 89대를 운용 중이다. 경량 유틸리티 차량으로는 G-바겐(G-Wagon) 4x4 및 6x6, 호케이(Hawkei)를 운용하고 있다.[105] 트럭으로는 라인메탈 MAN(Rheinmetall MAN) RMMV HX 시리즈(series) 트럭을 사용한다.[83]
; 지원 장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레이더로 AN/TPQ-36 파이어파인더 레이더, AMSTAR 지상 감시 레이더, AN/TPQ-48 경량 대 박격포 레이더, GIRAFFE FOC, 휴대용 탐색 및 표적 획득 레이더 – 확장 범위를 사용한다.[84][85] 무인 항공기로는 RQ-7B 섀도우 200, 워스프 AE, PD-100 블랙 호넷을 운용한다.[84][85]
; 항공기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수송 헬리콥터, 공격 헬리콥터, 훈련용 헬리콥터 등을 운용하고 있다.
보잉 CH-47F 치누크 14대의 중량급 수송 헬리콥터[86]와 시코르스키 UH-60M 블랙 호크 3대의 중형 수송/다용도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다.[87] 2024년 말까지 9대가 추가로 인도될 예정이며, 총 40대를 확보할 계획이다.[88] MRH-90 타이판 40대[110], CH-47 14대[109], 시콜스키 S-70 35대를 보유하고 있다. 비치크래프트 킹 에어 3대도 운용한다.
공격 헬리콥터로는 유로콥터 타이거 무장 정찰 헬리콥터(ARH) 22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5년부터 보잉 AH-64E 아파치 가디언 29대로 대체될 예정이다.[89] 티거 22대[111]를 대체하기 위해 AH-64E 아파치 29대를 2025년부터 인도받을 예정이다.[112]
훈련용 헬리콥터로는 유로콥터 EC-135T2+ 15대를 해군과 공동으로 운용하고 있다.[90][91] OH-58 키오와 27대는 퇴역했다.
6. 1. 화기 및 포병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개인 화기로 EF88 개량형 F88 오스테어(소총)[76], F89 미니미(지원화기)[76], 브라우닝 하이파워(권총)[76], FN MAG(MAG-58)(기관총)[76], HK417, SR-98(저격총)[76], 미니미 7.62(맥시미) 및 AW50F[76]를 사용한다. 특수부대는 M4 카빈, 헤클러&코흐 USP, SR-25, F89 미니미, MP5, SR-98, 미니미 7.62(맥시미), HK416, HK417, 블라서 R93 전술, 배럿 M82 및 Mk 14 강화 전투 소총(Mk14 EBR)을 사용한다.야포로는 M777A2 155mm 곡사포 48문[77], M252A1 81mm 박격포 176문[78], M224A1 60mm 박격포[79]를 보유하고있다.
6. 2. 차량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주력 전차, 장갑복구차, 정찰차량, 장갑병원정차, 보병 기동차량, 경량 유틸리티 차량, 트럭 등을 운용한다. 주력 전차로는 M1A1 에이브람스 59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75대의 M1A2 에이브람스 SEPv3로 교체될 예정이다.[102] 장갑복구차로는 M88A2 허큘리스 13대를 보유하고 있다.[80][81]정찰차량으로는 ASLAV 257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 복서 장갑차 211대로 교체될 예정이다.[103][104] 장갑병원정차로는 M113 장갑차 431대가 운용 중이며, 한화 레드백(Redback)(K21)으로 교체될 예정이다.[82]
보병 기동차량으로는 부시마스터(Bushmaster)와 SC 그룹 HMT 익스텐다(Extenda) Mk1 31대 및 HMT 익스텐다(Extenda) Mk2 89대를 운용 중이다. 경량 유틸리티 차량으로는 G-바겐(G-Wagon) 4x4 및 6x6, 호케이(Hawkei)를 운용하고 있다.[105] 트럭으로는 라인메탈 MAN(Rheinmetall MAN) RMMV HX 시리즈(series) 트럭을 사용한다.[83]
6. 3. 지원 장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레이더로 AN/TPQ-36 파이어파인더 레이더, AMSTAR 지상 감시 레이더, AN/TPQ-48 경량 대 박격포 레이더, GIRAFFE FOC, 휴대용 탐색 및 표적 획득 레이더 – 확장 범위를 사용한다.[84][85] 무인 항공기로는 RQ-7B 섀도우 200, 워스프 AE, PD-100 블랙 호넷을 운용한다.[84][85]6. 4. 항공기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수송 헬리콥터, 공격 헬리콥터, 훈련용 헬리콥터 등을 운용하고 있다.보잉 CH-47F 치누크 14대의 중량급 수송 헬리콥터[86]와 시코르스키 UH-60M 블랙 호크 3대의 중형 수송/다용도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다.[87] 2024년 말까지 9대가 추가로 인도될 예정이며, 총 40대를 확보할 계획이다.[88] MRH-90 타이판 40대[110], CH-47 14대[109], 시콜스키 S-70 35대를 보유하고 있다. 비치크래프트 킹 에어 3대도 운용한다.
공격 헬리콥터로는 유로콥터 타이거 무장 정찰 헬리콥터(ARH) 22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5년부터 보잉 AH-64E 아파치 가디언 29대로 대체될 예정이다.[89] 티거 22대[111]를 대체하기 위해 AH-64E 아파치 29대를 2025년부터 인도받을 예정이다.[112]
훈련용 헬리콥터로는 유로콥터 EC-135T2+ 15대를 해군과 공동으로 운용하고 있다.[90][91] OH-58 키오와 27대는 퇴역했다.
7. 기지
육군의 작전 본부인 포스 커맨드(Forces Command)는 시드니의 빅토리아 막사(Victoria Barracks)에 위치해 있다.[92]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3개 정규 여단은 다윈 근처 로버트슨 막사(Robertson Barracks),[93] 타운스빌의 라바랙 막사(Lavarack Barracks), 그리고 브리즈번의 갈리폴리 막사(Gallipoli Barracks)에 주둔하고 있다.[94] 전개 합동군 사령부(Deployable Joint Force Headquarters) 또한 갈리폴리 막사에 위치해 있다.[95]
다른 중요한 육군 기지로는 오키 근처의 오키 육군 항공 센터(Oakey Army Aviation Centre),[96] 시드니 근처의 홀스워디 막사(Holsworthy Barracks), 싱글턴의 론 파인 막사(Lone Pine Barracks), 그리고 애들레이드 근처의 우드사이드 막사(Woodside Barracks)가 있다.[96] 오스트레일리아 특수항공서비스 연대(Australian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SASR)는 퍼스의 교외인 스완번의 캠벨 막사(Campbell Barracks)에 주둔하고 있다.
멜버른 북쪽의 퍼커펀얄(Puckapunyal)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합동병과훈련센터(Combined Arms Training Centre),[97] 지상전 개발 센터(Land Warfare Development Centre), 그리고 5개 주요 전투병과학교 중 3개가 있다. 다른 막사로는 시드니의 스틸 막사(Steele Barracks), 애들레이드의 케스윅 막사(Keswick Barracks), 그리고 퍼스의 카라카타(Karrakatta)에 있는 어윈 막사(Irwin Barracks)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수십 개의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예비군(Australian Army Reserve) 창고가 있다.[98]
8. 군기, 표준기 및 기수기

호주 육군의 보병 부대와 일부 다른 전투 부대는 "군기(Colours)"로 알려진 왕의 군기(King's Colour)와 연대 군기(Regimental Colour)라는 깃발을 휴대한다.[68] 기갑 부대는 군기보다 작은 표준기(Standards)와 기수기(Guidons)를 휴대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기병, 랜서, 경기병 및 기마 보병 부대가 휴대한 깃발이다. 제1기갑연대는 중기갑 부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호주 육군에서 표준기를 휴대하는 유일한 부대이다. 포병 부대의 대포는 그들의 군기로 간주되며, 열병식에서는 같은 예우를 받는다.[68] 비전투 부대(전투지원부대)는 군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군기는 전투 깃발이기 때문에 전투 부대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많은 부대가 표준기나 깃발을 사용한다. 전투 명예를 수여받은 부대는 군기, 표준기 및 기수기에 이를 새겨 넣는다. 이는 부대의 역사와 전몰자를 기리는 상징이다. 포병 부대는 전투 명예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유일한 명예는 "Ubique"(어디에나)라는 뜻을 가진 "Ubique"이다. 비록 명예 칭호를 받을 수는 있지만.[68]
육군은 국기의 수호자이며, 따라서 호주 왕립 공군과 달리 자체 깃발이나 군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육군은 육군 깃발(Army Banner)이라고 알려진 깃발을 가지고 있다. 육군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여 총독 윌리엄 딘 경,은 2001년 3월 10일 호주 전쟁 기념관 앞 열병식에서 육군에 새로운 깃발을 수여했다. 이 깃발은 육군 연대 상사(RSM-A)인 피터 로즈몬드 준위에게 전달되었다.[69][70]
육군 깃발의 앞면에는 호주 국장이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금색으로 "1901–2001"이라는 날짜가 있다. 뒷면에는 호주 육군의 욱일 휘장이 있으며, 금색 테두리가 있는 작은 두루마리에 7개의 전투 명예가 나란히 있다: 남아프리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말레이-보르네오, 남베트남, 그리고 평화유지. 이 깃발은 금색 테두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금색과 진홍색 끈과 술이 달려 있고, 일반적인 영국 왕실 문장 정상 장식이 있는 창에 장착되어 있다.[71]
9.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저널
1948년 6월부터 호주 육군은 자체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저널(Australian Army Journal)"이라는 제목의 저널을 발행해왔다.[99] 초대 편집장은 유스타스 키오(Eustace Keogh) 대령이었다.[99] 초창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육군 훈련 각서(Army Training Memoranda)"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신할 목적이었다.[99]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점, 목적 및 형식이 변화해왔다.[99]
저널은 수기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세이, 서평, 사설 등)를 다루고 있으며, 현역 장병뿐만 아니라 전문 작가들의 투고도 받고 있다.[99] 저널의 목표는 "...육군의 전문적인 논의를 위한 주요 포럼...[그리고]...호주 육군 내의 토론...[그리고 엄격하고 까다로운 품질 기준을 준수함으로써]...그 토론의 지적 엄격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99] 1976년에는 "국방군 저널(Defence Force Journal)"의 발행이 시작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99] 그러나 199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저널"의 발행이 재개되었고, 그 이후로 최소한의 중단만을 제외하고는 주로 분기별로 발행되고 있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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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F signs up for next generation of weap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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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g the M777 more lethal - Australian Defenc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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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alia approves the sending of six M777 155mm towed howitzers to 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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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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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pectacular delivery of extra Chinooks, as ADF's newest helicopters remain grou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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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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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USTRALIAN GOVERNMENT ORDERS 12 NH90 HELICOPTERS - NHIndu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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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che confirmed as Tiger ARH replac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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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ustralia to acquire more Romeos and Apaches - Australian Defenc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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