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겐 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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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겐 요훔은 독일의 지휘자이다. 바이에른주 바벤하우젠에서 태어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뮌헨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및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등 주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역임했다. 특히 안톤 브루크너의 권위자로 평가받으며,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두 번 녹음했다. 그의 레코딩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하이든, 오르프 등의 작품을 포함하며, 특히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녹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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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겐 요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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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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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Oigen Yokeum |
사망 장소 | 서독 바이에른주 투칭 |
출생지 | 독일 바이에른 |
직업 | 지휘자 |
장르 | 클래식 음악 |
2. 생애
오이겐 요훔은 독일의 저명한 지휘자로, 특히 브루크너 해석으로 명성이 높다. 바벤하우젠의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 음악원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1] 1926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한 후, 킬, 만하임, 뒤스부르크, 베를린 라디오 오케스트라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2][3]
1934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나치 시대에도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고 활동했으며, 정권에 의해 금지된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했다. 전후 탈나치화 과정에서 잠시 논란이 있었으나, 나치 협력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4]
1949년에는 새로 창단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1960년까지 악단을 이끌며 기틀을 다지고 많은 녹음을 남겼다.[5] 이후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공동 수석 지휘자(1961-1963),[6][7]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 지휘자(1975-1978), 밤베르크 심포니 수석 지휘자(1969-1973) 등을 역임하며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등을 녹음했다.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 EMI 등에서 방대한 양의 음반을 남겼으며, 특히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8] 그러나 자신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에 더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바흐, 베토벤, 브람스 녹음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8]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녹음은 작곡가 자신이 승인한 권위 있는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9]
그의 지휘는 명료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석과 유연한 템포 조절(루바토)이 특징으로 꼽힌다. 동생 게오르크 루드비히 요훔 역시 지휘자였으며, 딸 베로니카 요훔은 피아니스트이다. 요훔은 1987년 뮌헨에서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10]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2-1926)
요훔은 1902년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의 아우크스부르크 근교 바벤하우젠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이자 지휘자였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했으며,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아우크스부르크 음악 아카데미에 다녔다.[1]이후 뮌헨 음악원에서 공부를 이어갔고, 처음에는 헤르만 폰 발터스하우젠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러나 곧 지휘로 전공을 바꾸어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에게 사사했다. 하우제거는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 원곡을 초연하고 최초로 녹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음악원 졸업 후 처음에는 뮌헨글라트바흐에서, 이후 킬에서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등을 포함한 프로그램으로 지휘자 데뷔를 했다. 같은 해 킬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첫 시즌에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장미의 기사'', ''투란도트''를 포함하여 17개의 오페라를 지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
2. 2. 초기 경력 (1926-1934)
오이겐 요훔은 뮌헨글라트바흐와 킬에서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했다. 1926년, 그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 포함된 프로그램으로 지휘 데뷔를 했다. 같은 해, 킬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첫 시즌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장미의 기사'', ''투란도트''를 포함한 17개의 오페라를 지휘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킬을 떠난 후 만하임으로 옮겨 활동했으며, 이곳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로부터 지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시기 뉴욕 필하모닉으로부터 12번의 콘서트 지휘 제안을 받았으나, 자신의 레퍼토리와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 요훔이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인 1958년이었다.
그의 다음 경력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뒤스부르크의 음악 감독직이었다.[3] 1932년에는 베를린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동시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체 오퍼에서도 한 시즌 동안 16번의 콘서트를 지휘했다.[2]
1934년, 요훔은 카를 뵘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 3. 함부르크 시절과 나치 시대 (1934-1949)
1934년, 요훔은 카를 뵘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나치 시대 동안 함부르크는 요훔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했고, 덕분에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힌데미트나 바르토크와 같이 나치 정권에 의해 연주가 금지된 작곡가들의 음악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요훔을 신이 내린 예술가 명단에 포함시켰다.전쟁이 끝난 후 진행된 탈나치화 과정에서 요훔의 활동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 당국 사이에 의견 차이가 컸는데, 이는 보통 미국의 주도를 따르던 영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4] 미국 당국은 1945년 5월 초기 심사에서 요훔을 통과시키고 뮌헨 필하모닉 지휘자로 선정했지만, 이후 그가 전쟁 중 "유난히 잘 지냈다"는 점과 그의 형제들이 "광신적인" 나치였다는 이유로 그를 일시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반면, 영국 당국은 요훔이 나치당, 친위대(SS), 돌격대(SA)에 가입한 적이 없고, "확신에 찬 로마 가톨릭 신자"이며 "예술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의 결백을 옹호했다.[4] 결국 1948년, 미국 당국도 요훔이 나치 조직에 가입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4]
요훔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49년까지 함부르크에서 활동했으며,[2] 이후 새로 창단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5]
2. 4.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창단 및 전성기 (1949-1960)
1949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에서의 활동을 마친[2] 요훔은 새로 창단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음악계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요훔은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뛰어난 연주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으며, 특히 현악 파트의 중심 역할을 할 쾨커트 4중주단을 합류시켰다.[5]요훔은 1960년까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며[5] 악단의 기틀을 다지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해 오케스트라와 함께 수많은 음반을 녹음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5] 그의 리더십 아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높은 연주력을 갖춘 악단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훗날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 5. 국제적 활동 및 말년 (1961-1987)
1961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음악 감독직을 떠난 후, 요훔은 국제적인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함께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공동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6][7] 그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런던에서도 자주 활동했다. 1975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고, 1978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1969년부터 1973년까지는 밤베르크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후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도 정기적으로 협력하며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과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 등을 녹음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출연했으며, 1971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요훔은 스테레오 LP 시대에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많은 음반을 남겼다.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녹음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은 1960년대 초 발매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8] 이후 EMI에서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녹음한 전집과 더불어 그를 브루크너 전문가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50년부터 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요훔 자신은 1983년 인터뷰에서 "오늘날 모두가 나를 브루크너 전문가로 생각하지만, 나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으로 시작했고 여전히 그들의 음악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바흐 b단조 미사와 요한 수난곡 녹음은 최고 명반으로 꼽히며,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도 세 차례(베를린 필/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DG, 콘세르트헤보우 - 필립스, 런던 심포니 - EMI) 남겨 호평을 받았다.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역시 두 차례(베를린 필 - DG, 런던 필 - EMI) 녹음했으며, 지휘자 케네스 우즈는 이를 근거로 요훔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람스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8] 에밀 길렐스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녹음 또한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모차르트, 하이든, 슈만, 바그너, 오르프 등의 작품 녹음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르프가 직접 참여하여 승인한 1967년 카르미나 부라나 녹음은 권위 있는 해석으로 여겨진다.[9]
그의 지휘 스타일에 대해 케네스 우즈는 "매우 작고 집중된 손 움직임이지만 매우 강력하다"고 묘사했으며, "그의 루바토 감각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보다 더욱 정확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요훔은 1987년 뮌헨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마리아는 1985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10]
3. 주요 활동 및 업적
오이겐 요훔(Eugen Jochum, 1902년 11월 1일 ~ 198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지휘자이다. 특히 브루크너의 교향곡 해석으로 유명하며, 그의 녹음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02년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 근교의 작은 마을 바벤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오르간 연주자이자 지휘자였다. 요훔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고,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아우크스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뮌헨 음악 아카데미에서 하우제거와 바우스네른에게 작곡을, 폰 하우제거에게 지휘를 배웠다. 1926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지휘하며 데뷔했다.
1927년 킬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며 모차르트,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만하임 국립 가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았고,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1934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나치 시대에도 그는 힌데미트나 바르토크와 같이 나치에 의해 금지된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등 소신을 지켰다.
1949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초대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1961년까지 활동하며 악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53년부터 1973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도이치 그라모폰, 필립스, EMI 등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다. 그의 브루크너 해석은 깊은 종교적 감성과 구조적 명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공동으로 맡았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밤베르크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를 맡았다. 198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요훔은 브루크너 음악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지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슈만, 바그너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었다. 그의 지휘는 명료한 구조, 풍부한 감정 표현, 그리고 깊은 종교적 경건함이 특징이다.
3. 1. 주요 직책
연도 | 직책 | 소속 기관 | 비고 |
---|---|---|---|
1926년 | 지휘 데뷔 |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브루크너 교향곡 7번 포함 |
1927년–1929년 | 음악 감독 | 킬 오페라 하우스 | |
1929년–1930년 | 음악 총감독 | 만하임 국립 가극장 | |
1930년–1932년 | 음악 총감독 | 뒤스부르크 시립 | |
1932년–1934년 | 수석 지휘자 |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 베를린 필하모닉, 도이체 오퍼에서도 지휘 |
1934년–1949년 | 음악 감독 |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 함부르크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겸임 |
1949년–1961년 | 초대 음악 감독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악단 창설 및 발전에 기여[5] |
1961년–1963년 | 공동 수석 지휘자 |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공동[6][7] |
1969년–1973년 | 수석 지휘자 | 밤베르크 심포니 | 1968년 예술 고문 취임 |
1975년–1978년 | 명예 지휘자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75년 명예 지휘자 임명 (~1978년) |
요훔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서 악단을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 1961년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공동 수석 지휘자로 임명된 것은, 전임자 에두아르트 판 베이눔이 1959년 급서하고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후임으로 취임하자,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공동으로 임명된 것이며, 이 직책에 네덜란드인이 아닌 지휘자가 임명된 첫 사례였다.[6][7] 또한 1968년 밤베르크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예술 고문으로 취임하여 급한 상황을 수습했으며, 이후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75년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었다. 이 외에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등 유럽의 주요 음악 무대에서 정기적으로 활동했으며, 만년에는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도 지휘했다.
4. 가족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지휘자였다. 형 오토 요훔 (1898–1969)은 작곡가이자 합창 지휘자였고, 동생 게오르크 루드비히 요훔 (1909–1970) 역시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딸 베로니카 요훔은 피아니스트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교수이다. 아내 마리아는 1985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10]
5. 평가
바흐부터 오르프에 이르는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을 특기로 하였으며, 특히 브루크너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 시 주로 노바크판 악보를 사용했으며, 1950년부터 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브루크너 해석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8]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두 차례 녹음했는데, 첫 번째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두 번째는 EMI에서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함께였다(두 전집 모두 교향곡 0번은 제외됨). 이 녹음들은 오랫동안 카탈로그에 남아 널리 호평받으며 그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8] 브루크너의 미사곡 전곡 등 종교 음악 녹음도 남겼다. 만년인 1986년에는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교향곡 5번을 연주했는데, 이는 그의 브루크너 연주를 총결산하는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요훔 자신은 1983년 인터뷰에서 "오늘날 모두가 나를 브루크너 교향곡 전문가로 생각하지만, 나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으로 시작했고 여전히 그들의 음악과 가장 가깝다고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그의 바흐 b단조 미사와 요한 수난곡 녹음은 최고 명반으로 꼽힌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도 세 차례 녹음했는데, 1950년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및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1960년대 후반 필립스에서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1970년대 EMI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브람스 교향곡 전집 역시 두 차례(1950년대 중반 베를린 필하모닉과 DG, 1977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EMI) 녹음했으며, 에밀 길렐스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녹음(DG)은 최고 명반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지휘자 케네스 우즈는 이러한 녹음들을 근거로 요훔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람스 지휘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8]
또한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녹음(1967년, DG)은 작곡가 오르프 본인이 녹음 과정에 참여하고 완성본을 승인하여 권위 있는 해석으로 인정받으며,[9] 이 곡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외에도 모차르트, 하이든(특히 런던 교향곡집, DG 및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 슈만, 바그너(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전곡, 모차르트 레퀴엠 등 DG 녹음) 등의 녹음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는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이나 말러의 대지의 노래 녹음도 남겼다. 만년에는 밤베르크 심포니와 모차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을 RCA에서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지휘 스타일에 대해 케네스 우즈는 "매우 작고 집중된 움직임이지만 매우 강력하다"고 묘사했으며, "그의 루바토 감각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푸르트벵글러보다 더욱 정확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시대의 저명한 독일어권 지휘자였던 카라얀이나 뵘에 비하면 생전의 대중적 인기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6. 주요 음반
바흐부터 오르프에 이르는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을 특기로 했으며, 특히 브루크너의 권위자로 알려졌다. 그는 노바크판 악보를 주로 사용했고, 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요훔은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두 차례 녹음했으며(0번은 제외), 미사곡 전곡 등 종교 음악 녹음도 남겼다. 1986년에는 과거 수석 지휘자를 맡았던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교향곡 5번을 녹음했는데, 이는 그의 브루크너 해석을 집대성한 연주로 평가받는다.[8] 이 전집과 나중에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EMI에서 녹음한 요훔 브루크너 전집은 그의 이름을 이 작곡가와 특별히 연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요훔은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의 초기 녹음(1953년)과 1967년 녹음을 통해 이 곡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7년 녹음은 작곡가 오르프 자신이 직접 녹음 과정에 참여하고 완성본을 승인하여 권위 있는 해석으로 간주된다.[9]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세 차례(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1950년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필립스에서 1960년대 후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EMI에서 1970년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두 차례(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1950년대 중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1977년) 녹음했다. 에밀 길렐스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녹음은 최고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8] 또한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집 녹음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모차르트, 슈만, 바그너 등의 작품 녹음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음반 회사로는 주로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다. 필립스에는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의 녹음이 있으며, 만년에는 밤베르크 심포니와 모차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을 RCA에서 녹음했다.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로는 첫 번째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브루크너 종교 음악집, 『카르미나 부라나』, 하이든 런던 교향곡집 외에도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을 녹음했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말러의 『대지의 노래』 녹음도 있다. EMI 레이블로는 두 번째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베토벤 및 브람스 교향곡 전집 등을 녹음했다.
다음은 그의 주요 녹음 중 일부이다.
작곡가 | 작품 | 연주 단체 / 협연자 | 녹음 연도 | 비고 |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3번 | 함부르크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4 | 최초 상업 녹음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5번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1958 |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5번 |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 1963 |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8번 | 함부르크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최초 상업 녹음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9번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1954 | |
카를 오르프 | 카르미나 부라나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1953 | 최초 녹음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바이올린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2 |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9번 "합창" | 네덜란드 라디오 합창단,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 1969 | |
리하르트 바그너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도이체 오퍼 베를린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플라시도 도밍고 등 | 1976 | |
요하네스 브람스 | 피아노 협주곡 1번 | 에밀 길렐스 (피아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
요하네스 브람스 | 교향곡 1-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1-1956 |
참조
[1]
간행물
Obituary for Eugen Jochum
The Musical Times
1987
[2]
간행물
Interview and profile of Eugen Jochum
http://www.gramophon[...]
The Gramophone
1972-08
[3]
간행물
"European Radio Orchestras: Western Germany"
The Musical Times
1955-09
[4]
서적
Music after Hitler, 1945-1955
Ashgate
2007
[5]
문서
40 Years of the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1989
[6]
간행물
"The Musician's Gramophone"
The Musical Times
1960-05
[7]
문서
[8]
웹사이트
The real Top 20 of Conducting
http://kennethwoods.[...]
2011-03-25
[9]
웹사이트
Classical Net - Carl Orff - Carmina Burana Recordings
http://www.classical[...]
[10]
뉴스
Eugen Jochum, Conductor of German Classics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1987-03-28
[11]
간행물
Obituary for Eugen Jochum
The Musical Times
1987
[12]
웹사이트
Jochum, Brüder Eugen: - Österreichisches Musiklexikon
http://musiklexikon.[...]
Österreich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2017-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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