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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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즈 야스지로는 1903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3년 사망한 일본의 영화 감독이다. 그는 1927년 데뷔하여 무성 영화 시대를 거쳐 유성 영화, 컬러 영화 시대를 아우르며 5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특유의 낮은 카메라 앵글과 정적인 촬영 기법, 섬세한 화면 구성으로 '오즈조'라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가족 간의 관계와 소시민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도쿄 이야기》, 《만춘》, 《꽁치의 맛》 등이 있으며, 2012년에는 영국 영화 협회에서 역대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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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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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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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즈 야스지로 |
다른 이름 | 제임스 마키 |
출생지 | 일본 도쿄부 도쿄시 후카가와구 (현재의 도쿄도 고토구 후카가와)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유시마 |
신장 | 약 170 cm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
활동 기간 | 1927년 - 1963년 |
주요 작품 | 동경의 합창 (1931년)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년) 호다카 형제 자매 (1941년) 만춘 (1949년) 맥추 (1951년) 동경 이야기 (1953년) 꽁치의 맛 (1962년) |
수상 | |
블루리본상 | 감독상 1951년 맥추 |
매일 영화 콩쿠르 | 감독상 1949년 만춘 각본상 1949년 만춘 특별상 1963년 |
영국 영화 협회 | 사더랜드 컵 1953년 동경 이야기 |
자수포장 | 1958년 |
기타 정보 | |
일본 영화 감독 협회 | 이사장 (1955년 - 1963년) |
히라가나 | おづ やすじろう |
가타카나 | オヅ ヤスジロウ |
로마자 표기 | Ozu Yasujirō |
2. 생애
1903년 도쿄도 후카가와 구(深川)에서 태어난 오즈 야스지로는 쇼치쿠(松竹) 촬영소에 입사하여 1927년 《참회의 칼날》로 데뷔하기까지 3년간 촬영감독과 조감독으로 일했다.[7] 그는 53개의 작품을 남겼으며, 초기 5년간 26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 중 3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쇼치쿠에서 제작되었다.[11]
1930년대에 오즈는 《대학은 나왔지만》 (1929),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등 서민적인 희극 무성영화를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15] 1937년, 그는 징집되어 중일 전쟁에 참전, 중국에서 2년간 보병대 상병으로 복무했다.[58] 귀국 후 첫 작품인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1941년)은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71] 1943년 다시 징집되어 버마에서 선전용 영화를 찍어야 했으며, 이때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이 압수한 수많은 미국 영화를 보았다. 오즈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시민 케인》이었다고 전해진다.[65]
1945년 종전 후, 오즈는 《셋방살이 신사록》(1947년)으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분위기와 섬세한 인물묘사에 치중하며, 《늦봄》 (1949), 《오차즈케의 맛》 (1952), 《동경 이야기》 (1953), 《초봄》 (1956), 《부초》 (1959), 《늦가을》 (1960) 그리고 유작인 《꽁치의 맛》 (1962) 등을 발표했다.
오즈는 유머러스하고 낯가림을 하는 성격이었다.[109] 여성에게는 수줍어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도 한다.[109]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영화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식문화에 정통했다.[108] 장어, 돈가스, 연어 술지게미국 등을 즐겨 먹었다.[111][113][115] 스포츠, 사진, 그림에도 취미가 있었다.[116][117][118]
사토미 톤의 소설을 애독했으며, 《도다 가의 형제들》에서는 사토미의 소설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차용했다.[120] 《만춘》 이후에는 사토미에게 각본을 보내 의견을 구했으며, 만년에는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80]
오즈는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상 | 연도 | 부문 | 작품 | 출처 |
---|---|---|---|---|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 1932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어른의 보이는 그림책 태어나긴 했지만』 | [134] |
1933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태어났지만』 | [135] | |
1934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뜬구름 이야기』 | [136] | |
1941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토다가의 형제들』 | [137] | |
1949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만춘』 | [138] | |
1951년 | 일본 영화 베스트 10 | 『보리』 | [139] |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1949년 | 일본 영화 대상 | ||
1951년 | 일본 영화 대상 | 『보리』 | [58] | |
1963년 | 특별상 | [141] | ||
블루리본상 | 1951년 | 작품상 | ||
1963년 | 일본 영화 문화상 | [143] | ||
서더랜드 컵 | 1958년 | 『동경 이야기』 | [58] | |
영화의 날 특별 공로장 | 1959년 | [144] | ||
미조구치상 | 1960년 | 『피안화』 | ||
아시아 영화제 | 1961년 | 감독상 | 『늦가을』 | |
NHK 영화상 | 1963년 | 특별상 | [58] |
- 1958년: 자수포장[58]
- 1959년: 일본예술원상[58]
- 1961년: 예술선장 문부대신상[145]
- 1962년: 일본예술원 회원[58]
- 1963년: 훈4등욱일소수장 (사후 추증)[146][147]
2. 1. 유년기 및 청소년기
1903년 12월 12일, 도쿄시 후카가와구 카메스미초 4번지 (현재의 도쿄도 고토구 후카가와 1초메)에서 아버지 오즈 토라노스케와 어머니 아사에의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8][59] 형은 2살 위의 신이치, 여동생은 4살 아래의 도키와 8살 아래의 도쿠, 남동생은 15살 아래의 신조이다.오즈 가문은 이세국마쓰사카 출신의 이세 상인인 오즈 요에몬 가문의 분가였다.[60] 이세 상인은 에도에 가게를 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오즈 요에몬 가문도 니혼바시에서 해산물 비료 도매상인 "유아사야"를 운영했다.[60] 오즈의 아버지 토라노스케는 18세에 유아사야의 지배인이 되었다.[60][61] 어머니 아사에는 쓰의 명문가 출신으로, 후에 이세 상인 나카조 가문의 양녀가 되었다.[60]
오즈는 3살 무렵에 뇌막염에 걸려 며칠 동안 고열로 의식 불명 상태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필사적인 간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1909년, 오즈는 후카가와구립 메이지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 입원했다. 당시에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가정이 드물어, 오즈는 매우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은 가정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에는 후카가와구립 메이지 심상 소학교 (현재의 고토구립 메이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58]
1913년 3월, 아버지의 교육 방침과 후카가와의 시멘트 분진 공해로 인한 환경 악화 때문에, 오즈 일가는 오즈 가문의 고향인 미에현이난군고베촌 (현재의 마쓰사카시)으로 이주했다.[58] 아버지는 도쿄와 마쓰사카를 왕복하는 생활을 했다. 같은 해 4월, 오즈는 마쓰사카 정립 제2 심상 소학교 (현재의 마쓰사카 시립 제2 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했다. 당시 오즈는 원만하고 성실하며 성적이 좋았고, 틈만 나면 칼싸움 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윽고 오즈는 집 근처 영화관 "가구라좌"에서 오노에 마쓰노스케 주연의 작품을 본 것을 계기로, 영화에 푹 빠졌다.[58]
1916년, 심상 소학교를 졸업한 오즈는 미에현립 우지야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다.[58] 오즈는 더욱 영화에 열중했고, 가족에게 소풍을 간다고 속이고 나고야까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당시 연속 활극의 여배우 펄 화이트의 팬이었고, 렉스 잉그램 등의 미국 영화에 심취해 있었다.[63] 특히 오즈에게 감명을 준 것은 토머스 H. 인스 감독의 『시빌라이제이션』(1917년)으로, 이 작품에서 영화 감독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고, 감독을 지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63][64]
1920년, 학교에서는 남학생이 하급생 미소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건이 발생했고, 오즈도 이에 관여한 것으로 정학 처분을 받았다. 게다가 오즈는 사감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정학과 함께 기숙사에서 쫓겨나 집에서 통학하게 되었다. 오즈는 추방 처분을 결정한 사감을 평생 혐오했고, 전후 동창회에서도 그와 동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자택 통학으로 바뀐 덕분에 외출이 자유로워져, 영화 관람에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1921년 3월, 오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베 고등 상업 학교와 나고야 고등 상업 학교에 응시했지만 모두 불합격하여 재수 생활을 했다.[58] 그래도 영화에 몰두하여, 7월에는 지인들과 영화 연구회 "이집트 클럽"을 설립하고, 헐리우드 배우의 주소를 알아내 편지를 보내거나, 영화 프로그램을 수집하기도 했다.
1922년 미에현 사범학교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여, 미야마에 심상 고등 초등학교에 대용 교원으로 부임했다. 오즈는 5학년 남자 48명의 반을 맡아, 어린이들에게 당시에는 드문 로마자를 가르치거나, 교실에서 활극 이야기를 하여 즐겁게 했다. 또한, 하숙에서 어린이들에게 만돌린을 연주해 들려주거나, 나막신을 신은 채 어린이들을 데리고 해발 1000m 이상의 교쿠가타케를 등정하기도 했다.
2. 2. 영화계 입문
오즈 야스지로는 1923년 8월 1일 삼촌의 도움으로 쇼치쿠 영화사에 촬영부 조수로 입사했다.[7] 아버지는 영화계 입문을 반대했는데, 당시 영화는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오락으로 여겨져 직업으로서는 경멸받았기 때문이다.[58] 오즈는 입사 직후 1923년 간토 대지진을 겪었지만,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58]1924년 12월 12일, 오즈는 1년간 군 복무를 시작했다.[7][10] 1925년 11월 30일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7][10]
1926년 쇼치쿠에서 조감독이 되었다.[11] 1927년 스튜디오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 다른 직원을 주먹으로 때리는 싸움에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쓴 영화 시나리오를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11] 같은 해 9월, 시대극 부서의 감독으로 승진하여 첫 영화인 참회의 칼을 연출했지만, 이 영화는 현재 유실되었다. 노다 고고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11] 9월 25일, 예비군으로 소집되어 영화의 일부를 다른 감독이 마무리해야 했다.[11]
1928년 쇼치쿠 스튜디오의 책임자인 키도 시로는 회사가 스타 배우가 없는 단편 코미디 영화 제작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오즈는 이러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같은 해 12월 1일에 개봉된 영화 미인은 낮은 카메라 시점을 사용한 첫 번째 오즈 영화이다.[11] 1929년 9월, 오즈의 스타 배우가 출연한 첫 영화인 나는 졸업했지만...이 개봉되었다. 1930년 1월, 쇼치쿠의 톱스타인 구리시마 스미코를 그의 신년 영화인 결혼 입문|結婚学入門일본어에 맡겼다. 오즈는 초기 작품에서 "제임스 마키"[12]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자신의 각본 크레딧을 표시했다.[13] 올스타 캐스트가 출연한 그의 영화 젊은 아가씨는 그가 제임스 마키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영화였다.[14]
1932년 그의 영화 태어나긴 했지만...은 일본 영화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사회 비판 작품으로 영화 평론가들에게 받아들여져 오즈는 널리 호평을 받았다.[15]
2. 3. 전쟁과 전후
1937년 7월에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오즈는 그해 9월 10일에 소집되어 상하이 파견군에 배속되었다.[58] 1938년 1월에는 난징 교외에서 친구인 야마나카를 만나 30분 정도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58] 같은 해 9월에 야마나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오즈는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58] 1939년 3월에는 난창 작전에 참여하여 수이강 도하 작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58] 그 후, 6월 26일에 귀환 명령을 받고 7월 13일에 일본으로 돌아왔다.[58]1939년 12월, 오즈는 귀환 후 첫 작품으로 『그녀는 난징에 간다』 (후에 『오차즈케의 맛』으로 개제)의 각본을 집필했지만, 내무성의 사전 검열에서 전면 개정을 명령받았다.[76] 결국 제작은 중단되었고, 대신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1941년)을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했다.[71] 이후 소집 직전에 각본을 완성했던 『아버지와 함께』 (1942년)를 촬영했다.[58]
1943년 6월, 오즈는 군 보도부 영화반원으로 남방에 파견되어, 주로 싱가포르에 체류했다.[72] 인도 독립을 주제로 한 국책 영화 『델리로, 델리로』를 찍게 되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어 촬영이 중단되었다.[72] 오즈는 접수한 대량의 미국 영화를 감상했는데, 그중에는 『시민 케인』 (1941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65] 1945년 8월 15일에 싱가포르에서 패전을 맞이한 오즈는, 『델리로, 델리로』의 필름과 각본을 소각 처분하고, 민간인 수용소에서 잠시 억류 생활을 했다.[58]
1946년 2월에 귀환한 오즈는 지바현노다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58] 1947년에 전후 첫 작품인 『나가야 신사록』을 촬영했다.[76] 1948년에는 신작 『달은 떠오른다』의 각본을 완성했지만, 제작이 연기되어 대신 『바람 속의 암탉』을 촬영했다.[76] 이 작품은 오즈 자신도 실패작이라고 인정했다.[69][76] 데뷔작부터 콤비를 이루었던 각본가 노다 고고도 작품을 비판했고, 오즈는 차기작 『만춘』(1949년)부터 모든 작품의 각본을 노다와 공동 집필했다.[79] 『만춘』은 하라 세츠코를 주연으로 맞아 오즈풍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작풍의 기조를 보여주는 등, 전후 오즈 작품의 이정표가 되었다.[70]
2. 4. 말년
1948년에는 신작 『달은 떠오른다』의 각본을 완성하고, 도호 전속의 다카미네 히데코를 주연으로 예정했지만, 협상이 난항을 겪어 제작이 연기되었다. 대신 『바람 속의 암탉』을 촬영했는데, 이 작품은 오즈가 존경했던 시가 나오야의 『암야행로』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평판이 좋지 않았고, 오즈 자신도 실패작이라고 인정했다.[69][76] 데뷔작부터 함께한 각본가 노다 고고도 작품을 비판했고, 오즈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여 차기작 『만춘』(1949년)부터 모든 작품의 각본을 노다와 공동 집필했다.[79] 『만춘』은 히로쓰 가즈오의 단편 소설 『아버지와 딸』이 원작으로, 딸의 결혼이라는 테마를 노나 다도 등 일본의 전통적인 정경 속에서 그렸다. 하라 세츠코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오즈풍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작풍의 기틀을 보여주는 등, 전후 오즈 작품의 이정표가 되었다.[70] 이 작품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1위에 선정되었고,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일본 영화 대상을 수상했다.[58]다음 작품인 『무나가타 자매』(1950년)는 신토호 제작으로, 처음으로 다른 회사에서 만든 작품이 되었다.[76]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영화 최고 기록인 약 5000만엔의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그 해 외화를 포함한 흥행 배급 수입 1위를 기록하는 대히트를 쳤다.[80] 1951년에는 『만추』를 감독하여 다시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1위와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일본 영화 대상을 수상했다.[58] 1952년 1월,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의 사무소 본관이 전소되고 오즈가 촬영 중에 숙식하던 감독실도 불탔기 때문에, 5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기타카마쿠라로 이사하여 그곳을 평생의 거처로 삼았다. 이 해에 전전에 검열에 걸렸던 『차 맛』을 촬영했고, 1953년에는 오즈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동경 이야기』를 촬영했다. 같은 해 9월, 쇼치쿠를 포함한 5개 영화사는 닛카쓰의 감독 및 배우 스카우트를 막기 위해 5사 협정을 체결했고, 오즈는 쇼치쿠의 전속 계약자가 되었다.[58]
1954년, 오랫동안 영화화되지 못했던 『달은 떠오른다』가 일본 영화 감독 협회 기획 작품으로 닛카쓰에서 제작되고, 오즈의 추천으로 다나카 키누요가 감독을 맡게 되었다. 오즈는 다른 회사 작품임에도 각본을 제공하고 스폰서와 협상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닛카쓰가 배우 스카우트를 두고 다이에이 등 5개사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제작에 난항을 겪었다. 오즈는 감독 협회 대표로서 닛카쓰와의 협상에 힘썼고, 다나카를 감독으로 추천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9월 8일 쇼치쿠와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프리랜서가 되었다.[65] 결국 작품은 감독 협회가 제작하고 배급만 닛카쓰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955년 1월에 공개되었다. 오즈는 이 작품 관련 문제 처리에 관여한 덕분에 같은 해 10월 감독 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오즈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쇼치쿠에서 제작한 『초봄』(1956년)을 촬영한 뒤, 1956년 2월 쇼치쿠와 연간 1편 제작 계약을 맺고 이후 1년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오즈는 차기작으로 전전에 영화화된 『유쾌한 호키치 군』을 직접 리메이크하려 했으나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중단했다.[65] 6월부터는 나가노현다테시나에 있는 노다의 별장 "운호장"에 머물렀고,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한 오즈는 운호장 근처 가타쿠라 제사의 별장을 빌려 ""이라 이름 붙였다. 차기작 『동경 황혼』(1957년)부터는 다테시나의 별장에서 각본을 집필했고, 무예장은 도쿄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영빈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79] 1957년 10월부터 11월까지 『떠돌이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대근역자』의 각본을 완성하고, 1958년 1월 니가타현 사도가섬과 다카다시 (현재 조에쓰시)에서 로케이션 헌팅을 했지만, 촬영 장소에 눈이 부족하여 촬영이 연기되었다.[76]



오즈는 60세 생일에 암으로 사망하여 가마쿠라의 엔가쿠지에 묻혔다.[76]
3. 작품 세계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세계는 '오즈조'라는 독특한 스타일로 대표된다. 이는 사토 타다오의 말처럼, 몇 편의 영화만 봐도 그의 연출 특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오즈는 초기에는 미국 영화, 특히 에른스트 루비치와 킹 비더 등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서구적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33년작 나는 죄인이다는 갱 영화의 영향을 받아 댄스홀, 권투, 당구 등 서양적인 요소들로 가득 찬 작품이었다. 대학은 나왔지만(1929)과 낙제는 했지만(1930)은 해럴드 로이드 주연의 코미디 영화에서, 결혼학 입문과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는 루비치의 도시적인 소피스티케이티드 코미디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 오즈는 전통적인 일본 가정생활을 주로 다루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는 현실의 추한 것들을 배제하고, 깨끗하고 세련된 것만을 화면에 담는 방식을 추구했다.
초기 작품에는 쇼와 시대 초기의 불황을 반영한 사회적 테마도 나타난다. 대학은 나왔지만에서는 불황으로 인한 취업난을, 회사원 생활(1929)과 도쿄의 합창에서는 실업한 샐러리맨의 비애를 그렸다. 태어나긴 했지만에서는 아이의 시선으로 샐러리맨의 비굴함을 신랄하게 묘사하여 소시민 영화의 정점으로 평가받았다.
오즈는 가족을 소재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의 해체 등을 주로 다루었다. 특히 딸의 결혼으로 인한 부모와의 이별, 가족 구성원의 죽음 등을 통해 가족의 변화를 그려냈다. 그는 같은 테마와 스타일을 반복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을 "두부 가게"에 비유하며 "두부 가게에서 카레나 돈가스를 만들 수는 없다"는 말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오즈는 직접 각본 제작에 참여했으며, 노다 고고와 콤비를 이루어 대부분의 작품을 함께 썼다. 이들은 여관이나 별장에 틀어박혀 꼼꼼하게 각본을 썼으며, 배우의 개성에 맞춰 배역을 정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대사를 만들었다.
촬영에 있어서 오즈는 로케이션 헌팅을 꼼꼼하게 진행하고, 화면 속 인물과 소품의 위치를 밀리미터 단위로 결정하는 등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구도를 중시하여 소품의 형태와 색깔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으며, 진짜 미술품을 사용하고 붉은색 주전자를 자주 등장시키는 등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했다.
오즈는 1930년대부터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에 여러 편 선정되었다. 전후에는 그의 양식미와 보수적인 도덕성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해외에서는 런던 영화제에서 서덜랜드 컵을 수상하는 등 점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도쿄 이야기는 2012년 영국 영화 협회의 설문조사에서 영화감독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영화"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즈는 영화 음악에 있어서도 독특한 방식을 추구했다. 그는 음악을 등장인물의 감정 이입 도구로 사용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것을 피하고, 심각한 장면에 밝은 음악을 사용하는 등 일반적인 영화 음악과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3. 1. 주제와 스타일
오즈는 괴짜였고 대단한 완벽주의자였다. 가장 일본적인 작가 중 하나로 일컬어지나, 사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국제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었다.[43] 그는 다른 영화 감독들에 비해 늦게 유성 영화를 찍었다. 그의 첫 번째 유성영화는 《외아들》 (1936)이었고 《피안화》 (1958)에 이르러서야 겨우 컬러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다다미 쇼트를 즐겨 사용했고 그는 매우 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선호했다. 그리고 한 배우가 화면을 장악하지 않게끔 섬세하게 구축된 화면구성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색채를 장식적으로 사용하였다.감독했던 대부분의 작품은 전위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일관되게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추었다. 그래서인지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도 있긴 하지만 차분하게 작품을 읽어가다보면 도시인의 위선과 고독에서 발산되는, 마치 스쳐지나가는 자그마한 비명소리를 잡아내는 듯한 섬세함이 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듯한 점이 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는 다다미 쇼트로 알려진 지면 바닥에서 촬영하는 낮은 카메라 앵글과, 높은곳에서 낮은곳을 바라보는 모양으로 촬영하는 부감촬영(俯瞰撮影)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후의 《늦봄》이나 《도쿄 이야기》 등에서 부감촬영은 거의 사라지고 다다미 쇼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세계적으로 많은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빔 벤더스, 빅터 에리스, 짐 자머시, 아키 카우리스마키, 허우샤오셴 등이 그러하다. 허우샤오셴은 오즈를 추모하여 《카페 뤼미에르》를 제작하기도 했다. 2003년은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이어서 기념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는 자주 시나리오 작가인 노다 고고(野田高梧), 카메라맨 아쓰다 유하루(厚田雄春)와 작업해왔다. 배우로는 류 치슈, 하라 세츠코 등과 함께한 영화가 많다.

오즈는 내러티브 내용만큼이나 영화의 기술적인 스타일과 혁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 스타일은 특히 후기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이는 그가 전후 유성 영화에서 완전히 발전시킨 스타일이다.[33] 그는 할리우드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34] 대부분의 감독들이 대화 장면에서 흔히 사용하는 숄더 샷 대신, 카메라는 배우들을 직접 응시하며, 이는 관객을 장면의 한가운데에 위치시키는 효과를 낸다.[34] 오즈는 경력 전반에 걸쳐 인간의 시야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50mm 렌즈를 사용했다.[35]
오즈는 장면 전환에 전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장면 사이에서 페이드나 디졸브 대신 정적인 특정 물체들을 보여주거나 직접적인 컷을 사용하여 전환을 표현했다. 대부분의 경우 정적인 물체는 다음 실내 장면이 촬영될 건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음악을 사용했는데, 이는 한 장면의 끝에서 시작하여 정적인 전환을 거쳐 새로운 장면으로 페이드인될 수 있다. 그는 전환 장면 외에는 비디에제틱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36] 오즈는 경력이 진행될수록 카메라를 덜 움직였고, 컬러 영화에서는 트래킹 샷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37] 그러나 데이비드 보드웰은 오즈가 "할리우드 연속성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한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지만, 몇 가지 전제만 변경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38]
오즈는 ''다다미'' 매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시선 높이, 즉 낮은 높이에 카메라를 두는 "다다미 샷"을 발명했다.[39] 사실, 오즈의 카메라는 종종 그보다 더 낮아서, 지면에서 불과 1~2피트 높이에 불과했으며, 이는 특수 삼각대와 높이를 높인 세트를 필요로 했다. 그는 등장인물이 복도를 걸어갈 때처럼 앉는 장면이 없을 때에도 이러한 낮은 높이를 사용했다. 오즈는 컬러 영화를 제작할 때, 다른 어떤 컬러 프로세스보다 빨간색을 훨씬 더 잘 포착한다고 느껴, 독일 컬러 프로세스 아그파컬러로 촬영하기로 선택했다.[40]

오즈는 영화 스토리텔링의 전통적인 규칙을 피했는데, 특히 아이라인 매치가 그러했다.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뜬 구름''에 대한 그의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즈는 또한 엘립시스 즉, 이야기의 주요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 결정을 통해 일본 내러티브 구조의 혁신가가 되었다.[42] 예를 들어, 1962년의 ''늦은 가을''에서 결혼식은 한 장면에서 언급될 뿐이며, 다음 시퀀스는 이 결혼(이미 일어난)을 언급한다. 결혼식 자체는 절대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오즈 영화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할리우드에서 종종 관객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순간들을 생략함으로써 멜로 드라마를 피한다.[42]
오즈는 그의 영화가 해외에서 상영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43] 도날드 리치,[44] 폴 슈레이더,[45] 데이비드 보드웰[46]의 영향력 있는 모노그래프들은 영어권 관객이 오즈의 스타일, 미학 및 주제에 대해 폭넓은 인식을 갖도록 보장했다.
오즈는 다른 감독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작풍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오즈조"라고 불렸다. 영화 평론가 사토 타다오는 "오즈의 영화를 몇 편 보고, 그 연출의 특징을 기억한 관객은 예비 지식 없이 갑자기 도중에 필름을 보여줘도, 그것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인지를 거의 확실하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즈조의 특징적인 스타일로는 로우 포지션으로 촬영한 것, 극력 카메라를 고정시킨 것, 인물과 소품을 유사한 형태로 배치한 것, 소품과 인물의 배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 디졸브나 페이드 등의 문법적 기법을 배제한 것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미국 영화의 영향을 받은 점, 같은 테마, 같은 스태프와 캐스트를 다룬 점 등도 오즈 작품의 특징적인 작풍으로 꼽힌다.

전후 오즈는 전통적인 일본의 가정생활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젊은 시절의 오즈는 수입품 의상과 소지품을 애호하는 모던 보이였으며, 1930년대 중반까지 자신이 경도하는 미국 영화 (특히 오즈가 좋아했던 에른스트 루비치, 킹 비더, 윌리엄 A. 웰먼의 작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하이칼라 취미가 있는 모던하고 세련된 작품을 찍었다. 예를 들어, 『나는 죄인이다』(1933년)는 갱 영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화면에 비치는 것은 댄스홀, 권투, 당구, 양식 아파트 등 서양적인 것뿐인 촌스러운 작품이었다. 또한, 『대학은 나왔지만』(1929년)과 『낙제는 했지만』(1930년)은 해럴드 로이드 주연의 코미디 영화, 『결혼학 입문』,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는 루비치의 도시적인 소피스티케이티드 코미디에서 각각 영향을 받았다.[70][80] 오즈의 미국 영화에 대한 경도는, 초기 작품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국 영화의 영어 포스터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80]
전기(戰期)의 오즈 작품에는, 미국 영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데뷔작인 『참회의 칼날』의 스토리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George Fitzmaurice영어 감독의 『Kick In (1922 film)영어』 (1922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영화의 『Les Misérables (film, 1925)프랑스어』 (1925년)와 존 포드 감독의 『Goodman Blind영어』 (1923년)에서도 일부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나의 마음은』은 비더의 『The Champ (1931 film)영어』(1931년), 『떠도는 풀 이야기』는 피츠모리스의 『The Barker영어』 (1928년), 『토다 가의 형제』는 헨리 킹 감독의 『Over the Hill (1931 film)영어』 (1931년)을 각각 바탕으로 하고 있다.[80]
사토 타다오는, 오즈가 미국 영화에서 배우고 얻은 가장 큰 것은 소피스티케이션, 바꿔 말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더러운 것과 촌스러운 것을 주의 깊게 제거하고, 깨끗하고 세련된 것만을 화면에 남기는 방식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오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화면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예를 들어, 종전 직후의 작품에서도 폐허의 풍경이나 군복을 입은 인물은 등장하지 않고, 젊은이는 항상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다. 오즈 자신도 "나는 화면을 깨끗한 느낌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과연 더러운 것을 다룰 필요가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화면의 청결·불결과는 다른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다루어, 그래서 더러운 것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에서는, 그것이 아름답게 다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87]
초기 오즈 작품에는 쇼와 시대 초기의 불황을 반영한 사회적 테마를 가진 작품이 존재한다.[70] 『대학은 나왔지만』에서는 불황으로 인한 학생들의 취업난을 그렸으며, 제목은 당시의 세상을 나타내는 말로서 정착되었다. 『낙제는 했지만』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것보다 낙제하는 편이 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고 행복하다는 풍자를 담고 있다.[80][70] 『회사원 생활』(1929년)과 『도쿄의 합창』에서는 실업한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어둡고 불안정한 생활과 비애를 유머러스하게 그렸다.[88] 이러한 작품들은 불황 속의 소시민 사회의 생활 감정을 테마로 한 "소시민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즈의 또 다른 소시민 영화 『태어나긴 했지만』에서는 아이의 시점에서 불경기 시대의 샐러리맨의 비굴함을 신랄하게 그려, 그 장르의 정점에 달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88] 『도쿄의 숙소』(1935년)나 『대학 좋은 곳』 『하나뿐인 아들』(1936년)에서도 불경기 속의 실업과 취업난을 다루었으며, 내용은 더욱 어둡고 심각해졌다.[70]
오즈는 생애를 통해 가족을 소재로 삼아,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가족의 해체 등의 테마를 그렸다.[89] 영화 평론가 오구라 마미는 오즈를 "일관되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추구해온 작가"라고 칭했으며,[89] 도널드 리치는 "주요한 테마로서는 가정의 붕괴밖에 다루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가족의 해체와 관련해서는, 딸의 결혼에 따른 부모와 자식 간의 이별이나, 어머니나 아버지 등의 죽음이 모티프가 되는 경우가 많다.[81] 또한, 오즈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은 구성원이 결여된 경우가 많으며, 누군가가 결여된 가족이 딸의 결혼이나 육친의 죽음으로 더욱 결여되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80] 『만춘』 이후에는 부르주아 가정을 무대로, 부녀 또는 모녀의 관계나 딸의 결혼을 반복해서 그렸으며, 유작까지 비슷한 테마와 플롯을 채택했다.[81] 같은 테마뿐만 아니라 같은 스타일에도 집착했기 때문에, 평론가들로부터는 종종 "진보가 없다", "항상 똑같다"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에 대해 오즈는 자신을 "두부 가게"에 비유하며,[90] "두부 가게에서 카레나 돈가스 만들어봤자, 맛있는 것이 나올 리가 없다[90]", "나는 두부 가게다. 기껏해야 간모도키밖에 만들 수 없다. 돈가스나 비프 스테이크는 그 전문인들에게 맡긴다[91]" 등과 같이 발언했다.
오즈는 로케이션 헌팅을 꼼꼼하게 진행하여 촬영 장소를 엄밀하게 정했다. 야외 장면의 대부분은 로케이션이지만, 오픈 세트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고, 실내 장면을 비롯하여 술집 거리나 여관의 장면 등도 스튜디오 내의 스테이지 세트에서 촬영했다. 촬영에 있어서는 1 컷마다 이미지대로의 영상이 되도록, 스스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화면상의 인물이나 소품의 위치를 밀리미터 단위로 결정했다. 스태프에게 위치를 지시할 때는 "오후나 쪽으로 10cm", "조금 더 가마쿠라 쪽으로"와 같이, 오후나 촬영소 근처의 지명이나 역명을 사용하여 방향을 전달했다.[93]
사토가 오즈를 "구도 지상주의자"라고 부른 것처럼, 오즈는 무엇보다도 1 컷 1 컷의 구도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여, 소품의 위치뿐만 아니라 형태와 색깔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조감독을 맡았던 시노다 마사히로에 따르면, 다다미 가장자리의 검은 선이 화면 안에서 넓게 교차되어 눈에 거슬린다며, 선을 없애기 위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석을 놓았다고 한다. 각 컷의 구도를 우선하기 위해, 같은 장면에서도 컷이 바뀔 때마다 배우나 소품의 위치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면 컷 간의 연결이 없어지지만, 시노다가 그것을 오즈에게 지적하자 "모두 그런 것에 눈치채겠어?"라고 말했고, 시노다도 시사회를 보니 위화감이 없었다고 한다.
화면상의 소품이나 의상은 오즈 자신이 골랐으며, 자택에 있는 사물을 가져오는 일도 있었다.[80][94] 찻잔이나 화병 등의 미술품은 미술상으로부터 가져온 진짜를 사용했으며, 컬러 작품에서는 유명 화가의 실제 그림을 사용했다.[95] 예를 들어, 『만추』에서는 우메하라 류자부로의 장미 그림, 야마구치 호슌의 동백 그림, 다카야마 다쓰오의 풍경화, 하시모토 메이지의 무신상도, 히가시야마 가이이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장식했다. 진짜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 오즈는 "다다미 방의 축이나 놓는 물건이, 제대로 된 물건이면, 이른바 소품의 가짜를 꺼내 놓는 것과 제일 먼저 내 기분이 달라진다… 인간의 눈은 속여도 카메라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진짜는 잘 찍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66] 또한, 붉은색을 좋아하는 오즈는, 화면 안에 붉은색 소품을 넣는 일이 많아, 컬러 작품에서는 붉은색 주전자가 잘 찍히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가 잘 알려진 영상 기법으로 카메라를 낮은 위치에 두고 촬영하는 "로우 포지션"이 있다.[101] 로우 포지션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다미에 앉았을 때의 눈높이", "어린아이의 시선", "객석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는 시점" 등 여러 설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 본인은 일본식 방의 구도에 안정감을 추구한 결과 로우 포지션을 채용했다고 말하고 있다.[102] 아쓰다 유슌은 표준 카메라 위치에서 일본식 방을 촬영하면 다다미 가장자리가 눈에 띄어 영상이 조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로우 포지션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101] 오즈 야스지로가 처음 카메라 위치를 낮춘 것은 『육체미(1928년)』로, 그 이유는 세트 촬영에서 바닥에 전기 코드가 널려 있어서 일일이 치우거나 화면에 보이지 않게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고, 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카메라 위치를 낮추자 그 구도에 대한 감을 느껴서, 그 이후부터 카메라의 위치가 점점 낮아졌다고 한다.[66] 로우 포지션으로 촬영할 때는 "솥 뚜껑"이라고 이름 붙인 특제 낮은 삼각대를 사용했고, 기둥이나 미닫이 창과 같은 수직선이 왜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50mm 렌즈를 사용했다.[66][103]
오즈 야스지로가 "로우 앵글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로우 앵글은 카메라의 위치가 아니라 앵글에 대해 정의하는 단어이며, 그 단어의 모호한 사용이 그대로 보급된 것이다.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오즈의 카메라가 낮아 보이는 것은 그 앵글 때문이 아니라 그 위치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로우 앵글은 카메라 앵글을 앙각으로 하여 낮은 시점에서 올려다보듯이 촬영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오즈 야스지로 작품에서는 카메라 앵글을 몇 도만 위로 기울이는 경우는 있어도,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카메라 위치는 특정 높이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촬영 대상에 맞춰 높이를 변경하고, 그 높이에 관계없이 수평 앵글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일본식 방에서는 다다미 상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카메라를 놓았지만, 테이블이나 사무용 책상의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그 높이로 올렸다. 보드웰은 "오즈의 카메라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항상 촬영하는 대상보다 낮지만, 대상의 높이와의 관계에서 변화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즈는 이동 촬영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카메라를 고정하여 촬영했다. 만년에 오즈는 이동 촬영을 "일종의 속임수이며, 영화의 공식적인 기술은 아니다"라고 부정했지만,[86] 초기 작품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태어나기는 했지만』에서는 43번이나 사용되었다. 이윽고 표현상의 필연성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는 것을 멈추고, 특히 표면적인 효과를 내거나, 영화적 화법으로 사용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으며, 토키 작품 이후에는 한 편당 사용 횟수가 크게 줄었다. 현존하는 작품 중에서는 『아버지와 함께』와 『도쿄 황혼』, 그리고 컬러 시대의 모든 작품에서 모든 장면이 고정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또한, 팬의 사용도 극히 소수의 작품으로 제한되어 있다.
후년의 오즈 작품에서의 이동 촬영은, 카메라를 움직여도 샷 내의 구도가 변하지 않도록 촬영되었다. 예를 들어, 야외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걷는 장면에서는, 이동해도 배경이 변하지 않는 장소(긴 담벼락이나 가로수길 등)를 선택하여, 다른 통행인을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도록 하고, 인물이 걷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키다는 이러한 이동 촬영이 "정지된 샷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만춘』에서 하라 세츠코와 미야케 쿠니코가 나란히 이야기하며 사구를 걷는 장면에서는, 오즈 작품에서 유일하게 크레인 촬영이 이루어졌지만, 이것 역시 사구의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걸어갈 때, 구도가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에는, "180도 규칙"이라는 문법적 규칙이 존재한다. 180도 규칙에서는 그림 1에 나타낸 것처럼, 인물 갑과 을의 눈을 잇는 이매지너리 라인 (가상선이나 액션 축이라고도 함)을 긋고, 그것을 넘지 않도록 선의 한쪽, 즉 180도의 범위 내에만 카메라를 둔다(카메라 위치 A와 B). 카메라 위치 A에서 갑을 오른쪽 대각선 앞에서 촬영하고, 다음에 카메라를 바꿔서 카메라 위치 B에서 을을 왼쪽 대각선 앞에서 촬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A→B"처럼 갑은 오른쪽, 을은 왼쪽을 향하게 되므로, 갑과 을의 시선의 방향이 일치하여 두 사람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즈는 이 문법적 규칙을 따르지 않고, 이매지너리 라인을 넘는 것처럼 카메라를 두었다(카메라 위치 A와 C). 즉 갑을 카메라 위치 A에서 오른쪽 대각선 앞에서 촬영한 후, 선을 넘은 카메라 위치 C에서 을을 오른쪽 대각선 앞에서 촬영했다.[104][105] 그렇게 되면 "A→C"처럼 갑도 을도 같은 오른쪽을 향하게 되므로, 시선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 문법 파괴는 일본식 촬영에 따른 제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식 촬영에서는 인물의 앉는 위치와 카메라가 움직이는 범위가 제한되지만, 그 위에 180도 규칙을 따른다면, 자신이 노리는 감정과 분위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104] 오즈는 이것을 "분명한 위법"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롱 숏으로 인물의 위치 관계를 보여주기만 하면, 그 다음은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그런 문법론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고, 그것에 얽매여서는 너무 답답하다. 좀 더 자유롭게 영화를 연출해야 한다"고 말했다.[105] 오즈에 따르면, 『어린이』의 시사 후에 이 위법에 대해 다른 감독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이나가키 히로시는 "이상하지만 처음뿐이고 그 다음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104] 또한, 오즈는 카메라를 인물의 정면 위치에 놓고, 대화하는 두 인물을 정면 구도로 촬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즈 작품의 숏에는 인물이나 물건이 유사형으로 배열된 구도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유사형 구도란 크기는 달라도 형태가 같은 것이 반복되는 구도를 말하며, 키다는 그 화면이 "매우 정연한, 기하학적인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유사형 구도의 예는 『떠도는 인생』의 첫 숏으로, 화면 뒤편에 있는 흰 등대와 화면 앞쪽에 있는 병이 유사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토는 같은 화면 안에 두 인물이 있는 장면에서 인물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오즈의 유사형에 대한 선호는 등장인물의 행동에까지 미쳐, 종종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장면이 보인다. 『아버지와 함께』에서 부자가 계류에서 낚시를 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자세로 유사형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데, 두 사람은 같은 타이밍으로 낚싯대를 들어 올리고 던지는 동작을 하고 있다.
영화 평론가 지바 노부오는, 오즈가 유사형 인물 배치를 선호한 이유에 대해, "두 인물 사이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립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묘한 어긋남이 있고, 그런 두 사람의 내면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사토에 따르면 유사형 인물 배치는 "대립이나 갈등을 배제하고, 두 명 이상의 인물이 일체감으로 맺어져 있는 조화의 세계에 대한 소망의 표명"이라고 한다. 또한, 유사형 구도는 등장인물이 다른 동작을 함으로써 무너질 때가 있는데, 키다는 인물의 연기에서 유사형이 무너지면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되어, 개그 등으로 변한다"고 지적했다.

오즈는 쇼트를 연결하는 기법인 "디졸브(오버랩이라고도 함)"와 "페이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81]. 디졸브는 어떤 화면이 사라져가는 동시에 다음 화면이 겹쳐서 나타나는 기법이며, 페이드는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거나(페이드 아웃), 반대로 밝아지거나(페이드 인)하는 기법이다. 둘 다 장면 전환을 하거나, 시간 경과를 표현하기 위한 고전적인 영화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즈는 이러한 기법을 "하나의 고카마시"로 보고[101], "카메라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69]。
디졸브는 극히 초기에 예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오즈 자신은 『회사원 생활』에서 사용해보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재미없는 것이다[69]"라고 생각하여, 그 이후에는 극히 소수의 사용을 제외하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사토에 따르면, 오즈는 화면의 질서감을 정돈하는 것에 집착했는데, 디졸브를 사용하면 그것을 처리하는 짧은 시간 동안 엄격한 구도의 질서감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디졸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페이드는 디졸브만큼 엄격하게 배제하지 않았고, 비교적 후년까지 사용되었다. 오즈는 『태어나기는 했지만』부터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지만[69], 그 후에도 퍼스트 쇼트와 라스트 쇼트를 전후의 타이틀 부분과 구분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 그러나 컬러 작품 이후에는 그것마저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모든 것을 보통의 컷만으로 연결했다.
오즈는 디졸브나 페이드 대신에, 장면 전환이나 시간 경과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커튼 쇼트"라고 불리는 것을 삽입했다. 커튼 쇼트는 풍경이나 정물 등의 무인 쇼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품의 오프닝이나 엔딩, 또는 어떤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삽입되어 있다. 커튼 쇼트의 명명자는 난부 게이노스케이며, 무대의 드롭 커튼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106]。그 외에도 "공백 쇼트(엠프티 쇼트)"라고 불리거나, 수식어의 기능을 갖기 때문에 "필로우 쇼트"라고도 불린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일한 주제와 스타일을 채택했지만, 동일한 배역 이름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사카모토 타케시는 『우는 아이』, 『뜬 구름』, 『상자 속 아가씨』, 『도쿄의 숙소』, 『다락방 신사록』에서 "키하치"를 연기했으며, 『다락방 신사록』을 제외한 4편은 키하치를 주인공으로 한 인정물이기 때문에 "키하치물"이라고 불린다. 이 키하치물에서는, 이이다 쵸코가 『우는 아이』를 제외한 3편에서 "오츠네" 역을 연기했다. 카사 츄슈는 『만춘』, 『동경 이야기』, 『동경 황혼』, 『피안화』, 『늦가을』의 5편에서 "슈키치" 역, 『아버지와 함께』, 『산마의 맛』의 2편에서 "슈헤이" 역을 연기했다. 하라 세츠코도 『만춘』, 『초여름』, 『동경 이야기』에서 "노리코" 역을 연기했으며, 이 3편은 "노리코 3부작"이라고도 불린다[80]。 그 외에도 나이 많은 여성에게 "시게", 장남에게 "코이치", "코이치", 어린 아이에게 "미노루", "이사무", 젊은 여성에게 "아야"라는 배역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성씨로는 "히라야마"가 자주 등장했다. 또한, 같은 배우가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카사 츄슈는 아버지 역, 미야케 쿠니코는 아내 역, 사쿠라 무츠코는 유흥업소 여성 역을 여러 번 연기했다. 『피안화』, 『늦가을』, 『산마의 맛』의 3편에서는, 나카무라 신로와 키타 류지가 주인공의 친구 역, 타카하시 토요가 요정 와카마츠의 여주인 역을 연기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음악은 일반 작품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며, 오즈식 음악이라고 불린다[107]。그 특징은 음악을 등장인물의 감정 이입 도구로 사용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피한 것과, 심각한 장면에 밝은 음악을 사용한 것이다[81]。오즈는 "장면이 비극이라고 슬픈 멜로디, 희극이라고 우스꽝스러운 곡을 선택하는 것은 싫다. 음악으로 이중으로 과해진다"고 말했다[66]。이러한 특징은 작곡가 사이토 코준과 콤비를 이룬 《초봄》 이후의 작품에서 나타난다.《초봄》의 주인공이 병상의 친구를 문병하는 장면에서는, 내용이 심각하고 어두워서, 오즈가 좋아하는 "사・세・파리", "발렌시아"와 같은 밝은 곡을 사용하려 제안했고, 사이토가 밝은 선율의 곡 "사세레시아"를 작곡했다. 오즈는 이 곡을 마음에 들어 했고, 《도쿄 황혼》, 《피안화》에서도 사용했다. 오즈는 그 후 항상 비슷한 곡을 주문했고, 사이토는 "사세레시아"를 조금 편곡한 곡이나, 폴카풍의 곡을 작곡했다. 그 외 음악의 특징으로는, 일정 불변의 템포와 리듬, 선율의 반복,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상쾌한 멜로디가 지적되고 있다.
3. 2. 대표작
오즈 야스지로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진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스타일은 "오즈조"라고 불린다. 사토 타다오는 "오즈의 영화를 몇 편 보고, 그 연출의 특징을 기억한 관객은 예비 지식 없이 갑자기 도중에 필름을 보여줘도, 그것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인지를 거의 확실하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오즈는 영화 스토리텔링의 전통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았는데, 특히 아이라인 매치가 그러했다. 로저 이버트는 ''뜬 구름''에 대한 그의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즈]는 젊은 조수에게 등장인물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이도록 대화를 촬영해야 한다고 제안받은 적이 있다. 오즈는 테스트에 동의했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장면을 촬영하고 비교했다. "보이지?" 오즈가 말했다. "아무 차이도 없어!"[41]
오즈는 엘립시스를 통해 일본 내러티브 구조의 혁신가가 되었다.[42] 예를 들어, 1962년의 ''늦은 가을''에서 결혼식은 한 장면에서 언급될 뿐이며, 다음 시퀀스는 이미 일어난 결혼을 언급한다. 결혼식 자체는 보여지지 않는다.
오즈 영화의 특징적인 스타일은 다음과 같다.
- 로우 포지션 촬영 (다다미 쇼트): 다다미 매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시선 높이, 즉 낮은 높이에 카메라를 두는 "다다미 샷"을 발명했다.[39]
- 카메라 고정: 카메라를 극도로 고정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 인물과 소품 배치: 인물과 소품을 유사한 형태로 배치하고, 배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 문법적 기법 배제: 디졸브나 페이드 등의 문법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 디에제틱 음악 거의 사용 안 함: 전환 장면 외에는 비디에제틱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36]
- 아그파컬러 선호: 컬러 영화를 제작할 때, 다른 어떤 컬러 프로세스보다 빨간색을 훨씬 더 잘 포착한다고 느껴, 독일 컬러 프로세스 아그파컬러로 촬영했다.[40]
오즈는 미국 영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같은 테마, 같은 스태프와 캐스트 (류 치슈, 하라 세츠코 등)를 다룬 점도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3. 3. 영향
오즈 야스지로는 괴짜이며 대단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가장 일본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1960년대 이전에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그는 다른 감독들보다 늦게 유성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의 첫 유성 영화는 《외아들》(1936)이었고, 《피안화》(1958)에 이르러서야 컬러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는 다다미 쇼트라는 트레이드 마크와 매우 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선호했으며, 배우 한 명이 화면을 장악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구축된 화면 구성을 좋아했다. 또한, 그는 색채를 장식적으로 사용했다.
오즈는 다다미 쇼트로 알려진, 지면 바닥에서 촬영하는 낮은 카메라 앵글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부감 촬영(俯瞰撮影)으로 유명하다. 특히 전후 《늦봄》이나 《도쿄 이야기》 등에서는 부감 촬영이 거의 사라지고 다다미 쇼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많은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빔 벤더스, 빅터 에리스, 짐 자머시, 아키 카우리스마키, 허우샤오셴 등이 그 예이다. 허우샤오셴은 오즈를 추모하여 《카페 뤼미에르》를 제작하기도 했다.
오즈는 내러티브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술적인 스타일과 혁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할리우드 관습을 따르지 않고, 50mm 렌즈를 사용하여 인간의 시야와 가장 가깝게 촬영했다.[35] 장면 전환에는 페이드나 디졸브 대신 정적인 물체를 보여주거나 직접적인 컷을 사용했으며, 전환 과정에서 음악을 활용했다.[36] 그는 디에제틱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36] 경력이 진행될수록 카메라를 덜 움직였으며, 컬러 영화에서는 트래킹 샷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37]
오즈는 "다다미 샷"을 발명했는데,[39] 이는 다다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시선 높이, 즉 낮은 높이에 카메라를 두는 방식이다. 그는 컬러 영화를 제작할 때 아그파컬러(Agfacolor)를 선택했는데, 이는 빨간색을 다른 어떤 컬러 프로세스보다 훨씬 더 잘 포착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40]
오즈는 영화 스토리텔링의 전통적인 규칙, 특히 아이라인 매치를 따르지 않았다.[41] 또한, 엘립시스를 통해 이야기의 주요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본 내러티브 구조를 혁신했다.[42]
오즈는 그의 영화가 해외에서 상영되면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43] 도날드 리치,[44] 폴 슈레이더,[45] 데이비드 보드웰[46]의 영향력 있는 모노그래프들은 영어권 관객들이 오즈의 스타일, 미학, 주제에 대해 폭넓게 인식하도록 도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5》라는 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독했는데, 이 영화는 '오즈에게 바치는 5편'으로도 알려져 있다. 2003년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고, 쇼치쿠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를 제작했다.
오즈는 2002년 영국 영화 협회의 평론가들이 뽑은 역대 영화감독 10인에서 10위에 선정되었다.[47] 그의 《도쿄 이야기》는 평론가와 감독이 선정한 최고의 영화에 대한 ''사이트 앤 사운드'' 설문조사에서 여러 번 선정되었고, 2012년에는 영화감독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1위를 차지했다. 로저 이버트는 오즈를 역대 가장 인도적인 감독이라고 묘사했다.[48][49][50]
2013년, 야마다 요지 감독은 《도쿄 이야기》를 현대적인 배경으로 리메이크하여 《도쿄 가족》을 만들었다.[51] 빔 벤더스는 다큐멘터리 영화 《동경·가》에서 오즈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류 치슈와 아쓰타 유하루를 인터뷰했다.[52]
빔 벤더스는 오즈를 "나의 스승"이라고 불렀으며, 《베를린 천사의 시》(1987년) 엔딩에 "모든 옛 천사들, 특히 야스지로, 프랑수아, 안드레이에게 바친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125][126] 허우 샤오시엔은 《카페 뤼미에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Five (2003 film)영어》를 오즈에게 헌정하는 형태로 발표했다.[130][131][132]

4. 오즈 야스지로와 한국
오즈 야스지로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의 작품과 스타일은 한국 영화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4. 1. 한국에 미친 영향
오즈 야스지로는 각본 제작에 직접 참여했으며, 대부분 작품에 공동 작업자가 있었다. 무성 영화 시대에는 원작자나 윤색자로서 각본 제작에 참여하면서 '제임스 마키'라는 필명을 자주 사용했다.[69][71]5. 작품 연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은 총 54편이며, 그중 17편의 무성 영화 필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오즈 야스지로 전집』 상·하권과 『오즈 야스지로 대전』의 "오즈 야스지로 전 작품 디테일 소사전"을 참고한 작품 목록이다.
; 범례
- ×: 필름이 현존하지 않는 작품(유실된 영화)
- △: 필름의 일부만 현존하는 작품
- □: 유성 영화 작품
- ◎: 컬러 작품
; 무성 영화, 흑백 영화, 컬러 영화
; 기타 참여 작품
5. 1. 무성 영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은 총 54편이며, 그중 17편의 무성 영화 필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현존 여부를 표시한 무성 영화 목록이다.- × 표시는 필름이 현존하지 않는 작품(유실된 영화)
- △ 표시는 필름의 일부만 현존하는 작품
제목 | 개봉일 | 비고 |
---|---|---|
참회의 칼날 | 1927년 | × |
젊은이의 꿈 | 1928년 | × |
아내 분실 | 1928년 | × |
호박 | 1928년 | × |
이사하는 부부 | 1928년 | × |
육체미 | 1928년 | × |
보물산 | 1929년 | × |
학생 로맨스 젊은 날 | 1929년 | |
일본식 싸움 친구 | 1929년 | △ |
대학은 나왔지만 | 1929년 | △ |
회사원 생활 | 1929년 | × |
돌격 소년 | 1929년 | △ |
결혼학 입문 | 1930년 | × |
밝게 걸어가라 | 1930년 | |
낙제는 했지만 | 1930년 | |
그 밤의 아내 | 1930년 | |
에로신의 원령 | 1930년 | × |
발에 닿은 행운 | 1930년 | × |
아가씨 | 1930년 | × |
숙녀와 수염 | 1931년 | |
미인 애수 | 1931년 | × |
도쿄의 합창 | 1931년 | |
봄은 부인에게서 | 1932년 | × |
어른이 보는 그림책 태어나긴 했지만 | 1932년 | |
청춘의 꿈은 어디에 | 1932년 | |
다시 만나는 날까지 | 1932년 | × |
도쿄의 여자 | 1933년 | |
비상선의 여자 | 1933년 | |
되는대로 | 1933년 | |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으랴 | 1934년 | |
떠도는 부초 이야기 | 1934년 | |
상자 속 아가씨 | 1935년 | × |
도쿄의 숙소 | 1935년 | |
대학 좋은 곳 | 1936년 | × |
5. 2. 흑백 영화
일본 내 개봉일 | 제목 | 영화사 |
---|---|---|
1957년 4월 30일 | 동경막색 | 쇼치쿠오후나 |
1956년 1월 29일 | 초봄 | 쇼치쿠오후나 |
1953년 11월 3일 | 동경 이야기 | 쇼치쿠오후나 |
1952년 10월 1일 | 오차즈케의 맛 | 쇼치쿠오후나 |
1951년 10월 3일 | 초여름 | 쇼치쿠오후나 |
1950년 8월 25일 | 무네가타 자매 | 신토호 |
1949년 9월 13일 | 늦봄 | 쇼치쿠오후나 |
1948년 9월 17일 | 바람속의 암탉 | 쇼치쿠오후나 |
1947년 5월 20일 | 나가야 신사록 | 쇼치쿠오후나 |
1942년 4월 1일 | 아버지와 함께 | 쇼치쿠오후나 |
1941년 3월 1일 |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 쇼치쿠오후나 |
1937년 3월 3일 | 숙녀는 무엇을 잊어버렸을까 | 쇼치쿠오후나 |
1936년 9월 15일 | 외아들 | 쇼치쿠오후나 |
1936년 3월 19일 | 대학 좋은 곳 | 쇼치쿠카마타 |
1935년 | 기쿠고로의 거울사자 | 쇼치쿠카마타 |
오즈는 같은 스태프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은 "오즈 조"라고 불렸다[100]。
오즈 조의 주요 인물과 참여 작품 수는 다음과 같다(스태프는 3편 이상, 배우는 5편 이상 참여자만 기재)[100]。
- 각본(원안 및 구성 포함): 노다 타카오 (26편), 이케다 타다오 (16편), 후시미 아키라 (8편), 키타무라 코마츠 (4편)
- 촬영: 모바라 히데오 (32편), 아츠타 유하루 (14편)
- 음악: 이토 센지 (7편), 사이토 타카요시 (7편)
- 미술: 하마다 타츠오 (19편), 시모가와라 토모오 (3편)
- 기타 스태프: 세노 요자부로 (녹음·조음, 15편), 하마무라 요시야스 (편집, 13편), 야마우치 시즈오 (제작, 6편), 야마모토 타케시 (제작, 4편)
- 배우(크레딧 유): 류 치슈 (25편[100]), 사카모토 타케시 (24편), 사이토 타츠오 (23편), 이이다 쵸코 (18편), 요시카와 미츠코 (14편), 돗칸 코조 (12편), 다나카 키누요 (10편), 오야마 겐지, 미야케 쿠니코, 스기무라 하루코 (9편), 타카하시 토요 (8편), 미이 히로지, 스가와라 통제 (7편), 하라 세츠코, 사쿠라 무츠코, 나카무라 신로, 스가 후지오 (6편), 다테 리코, 오카다 토키히코, 츠보우치 미코, 사부리 신, 나오카 테루코 (5편)
5. 3. 컬러 영화
일본 개봉년도 | 제목 | 원제 | 제작사 | 비고 |
---|---|---|---|---|
1958년 9월 7일 | 피안화 | 彼岸花|히간바나일본어 | 쇼치쿠오오후나 | 첫 컬러 영화 |
1959년 5월 12일 | 안녕하세요 | お早よう|오하요일본어 | 쇼치쿠오오후나 | 태어나기는 했지만 리메이크 |
1959년 11월 17일 | 부초 | 浮草|우키구사일본어 | 다이에이 | 부초 이야기 리메이크 |
1960년 11월 13일 | 가을 햇살 | 秋日和|아키비요리일본어 | 쇼치쿠오오후나 | |
1961년 10월 29일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 小早川家の秋|고하야가와케노 아키일본어 | 다카라즈카 에이가 | |
1962년 11월 18일 | 꽁치의 맛 | 秋刀魚の味|산마노 아지일본어 | 쇼치쿠오오후나 | 마지막 영화 |
오즈 야스지로의 감독 작품은 54편이지만, 그중 17편의 무성 영화 필름은 현존하지 않는다. ◎ 표시는 컬러 작품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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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小津安二郎自作を語る
[70]
논문
小津映画全作品
[71]
서적
作品解題
全集(上)
2003
[72]
서적
小津安二郎が監督しなかった作品
全集(下)
2003
[73]
뉴스
"沈黙を棄てる監督" 小津氏との一問一答
都新聞
1936-04-20
[74]
서적
解説
全発言
1987
[75]
간행물
小津安二郞陣中日誌
婦女界
1939-09
[76]
서적
作品解題
全集(下)
2003
[77]
간행물
小津安二郎は語る
キネマ旬報
1947-04
[78]
서적
文字通りの先生
松竹
1993
[79]
서적
小津安二郎という男 交遊四十年とりとめもなく
人と芸術
1964
[80]
서적
小津安二郎 全作品ディテール小事典
大全
2019
[81]
서적
小津の技法を俯瞰する
大全
2019
[82]
뉴스
小津監督の次回作『秋日和』
毎日新聞
1960-06-11
[83]
뉴스
悪いやつの出る映画は作りたくない
東京新聞
1960-09-06
[84]
간행물
おやじ小津安二郎はもういない 佐田啓二の看護日誌
サンデー毎日
1963-12-29
[85]
서적
2000
[86]
간행물
酒は古いほど味がよい
キネマ旬報
1958-08
[87]
간행물
場面の構成と演技指導
百万人の映画知識
1950-01
[88]
간행물
評伝・小津安二郎
キネマ旬報
1952-06
[89]
간행물
『小早川家の秋』に見る小津映画の特質
キネマ旬報
1961-11
[90]
간행물
わたしのクセ
読売グラフ
1955-06-07
[91]
뉴스
スポーツニッポン
1951-09-14
[92]
뉴스
実録日本映画史129
読売新聞
1964-05-21
[93]
서적
「葉ちゃんね、女の一生やるときにはね、次がああだからって演技を組み立てると、わかっちゃってつまらない」って。
大全
2019
[94]
서적
「人間は悲しい時に悲しい顔をするものではない。人間の喜怒哀楽はそんなに単純なものではないのだよ」という小津先生の言葉
大全
2019
[95]
서적
映画に文法はない、自由に作ればいい
松竹
1993
[96]
간행물
小津先生とわたし
キネマ旬報
1958-06
[97]
간행물
小津さんの兵隊
キネマ旬報別冊『日本映画シナリオ古典全集 第2巻』
1966-02
[98]
간행물
追っかけインタビュー 笠智衆 『正月になるとやって来る、ご存知柴又の御前さまの映画人生を小津監督の想い出をからめて語った1時間半』
エコー企画
[99]
서적
全著作 森繁久彌コレクション 2 芸談
https://www.worldcat[...]
株式会社藤原書店
2019-2020
[100]
서적
全集(上)
2003
[101]
서적
小津ロー・ポジションの秘密
人と芸術
1964
[102]
간행물
カラーは天どん 白黒はお茶漬の味 カメラ対談
カメラ毎日
1954-05
[103]
서적
四〇ミリの謎
大全
2019
[104]
간행물
映画の文法
月刊スクリーン・ステーィ
1947-06
[105]
간행물
映画に"文法"はない
芸術新潮
1959-04
[106]
논문
小津安二郎の怒り
1964
[107]
논문
画面と音楽が相殺しない曲を
1993
[108]
논문
老童謡『高野行』 小津さんのこと
1964
[109]
서적
日本映画史の展開 小津作品を中心に
本阿弥書店
2006-02
[110]
웹사이트
山本富士子 巨匠・小津安二郎の秘話を明かす 「ミルクの時間」とは…
https://www.daily.co[...]
2017-07-21
[111]
서적
小津安二郎をたどる東京・鎌倉散歩
青春出版社
2003
[112]
뉴스
(小津安二郎がいた時代)新年会 スタッフに語る構想/首都圏
2015-01-18
[113]
서적
いま、小津安二郎
小学館
2003-05-20
[114]
간행물
とんかつの名店 蓬莱屋
https://brutus.jp/ho[...]
マガジンハウス
2017-08-15
[115]
서적
作家の手料理
平凡社
2021-02-25
[116]
간행물
小津安二郎を育てたもの
新潮社
2007
[117]
논문
復刻中国戦線寫眞集 作品の背景
2019
[118]
논문
小津安二郎における絵画とデザイン
2019
[119]
논문
少年期の絵画
2019
[120]
논문
小津君と鎌倉と私
1964
[121]
서적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85回全史 1924-2011
キネマ旬報社
2012-05
[122]
서적
日本映画作家論
中央公論社
1958
[123]
간행물
シナリオ時評 鼎談第17回
1962-11
[124]
웹사이트
Directors’ top 100
https://www2.bfi.org[...]
BFI
2021-04-01
[125]
웹사이트
第68回ベルリン国際映画祭クラシック部門 小津安二郎監督作品『東京暮色』4Kデジタル修復版ワールドプレミア上映レポート
https://www.cinemacl[...]
2018-02-20
[126]
서적
American Stranger: Modernisms, Hollywood, and the Cinema of Nicholas Ray
SUNY Press
2017
[127]
웹사이트
W・ベンダース監督「東京画」から四半世紀「小津さんでさえ今の日本、東京はわからない」
https://eiga.com/new[...]
2012-02-23
[128]
논문
なぜ小津だったのか
2019
[129]
웹사이트
才能を知る、才能を見る、『ストレンジャー・ザン・パラダイス』を支えた才人たち
https://cinemore.jp/[...]
2018-10-15
[130]
웹사이트
Anywhere but here: the films of Aki Kaurismäki
https://tankmagazine[...]
2021-04-01
[131]
웹사이트
Finding Rhythms Within Rhythms in Parisians’ Lives
https://www.nytimes.[...]
2009-09-04
[132]
웹사이트
Elia Suleiman’s next feature to ‘cross countries’
https://www.screenda[...]
2015-03-09
[133]
서적
楽天楽観 映画監督佐々木康
ワイズ出版
2003-10
[134]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32年・第9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35]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33年・第10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36]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34年・第11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37]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41年・第18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38]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49年・第23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39]
웹사이트
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 1951年・第25回
http://www.kinenote.[...]
2021-02-14
[140]
웹사이트
毎日映画コンクール 第4回(1949年)
https://mainichi.jp/[...]
2021-02-14
[141]
웹사이트
毎日映画コンクール 第18回(1963年)
https://mainichi.jp/[...]
2021-02-14
[142]
웹사이트
ブルーリボン賞ヒストリー 第2回
http://cinemahochi.y[...]
2021-02-14
[143]
웹사이트
ブルーリボン賞ヒストリー 第14回
http://cinemahochi.y[...]
2021-02-14
[144]
웹사이트
映画の日 特別功労大章・特別功労章及び感謝状贈呈者一覧
http://www.eidanren.[...]
2021-02-28
[145]
웹사이트
芸術選奨歴代受賞者一覧(昭和25年度~)
https://www.bunka.go[...]
2021-02-14
[146]
간행물
官報 昭和38年12月16日 第11102号 叙任及び辞令 内閣
1963-12-16
[147]
서적
日本映画監督協会の五〇年
日本映画監督協会
1992
[148]
웹사이트
無藝荘
https://tateshina.ne[...]
2021-03-21
[149]
웹사이트
蓼科高原映画祭とは
https://ozueigasai.j[...]
2021-03-21
[150]
뉴스
「小津安二郎青春館」閉館へ 松阪市、歴史民俗資料館に移転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
2020-09-09
[151]
웹사이트
松阪に小津安二郎記念館オープン 日本映画界の巨匠顕彰 三重
https://www.isenp.co[...]
2021-04-05
[152]
뉴스
思い出の品々一堂に 野田市ゆかりの小津安二郎監督 あすから郷土博物館で特別展
2004-10-14
[153]
뉴스
鎌倉文学館に小津安二郎の遺品 映画史の貴重な資料整理して一般公開へ
1990-08-09
[154]
뉴스
生誕100年、小津安二郎熱再び ゆかりの地で催し続々
2003-01-26
[155]
서적
小津安二郎 未来へ語りかけるものたち
鎌倉市芸術文化振興財団鎌倉文学館
2004
[156]
학술지
デジタル小津安二郎展を終えて
[157]
학술지
デジタル小津安二郎展を終えて
[158]
서적
デジタル小津安二郎展 キャメラマン厚田雄春の眼
東京大学総合研究博物館
1998
[159]
서적
デジタル小津安二郎展 キャメラマン厚田雄春の眼
東京大学総合研究博物館
1998
[160]
뉴스
思い出の品々一堂に 野田市ゆかりの小津安二郎監督 あすから郷土博物館で特別展
2004-10-14
[161]
서적
小津安二郎監督と野田
野田市郷土博物館
2004
[162]
뉴스
家族を描いた監督の軌跡 小津安二郎展 神奈川近代文学館
2023-04-13
[163]
서적
小津安二郎展 生誕120年 没後60年
県立神奈川近代文学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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