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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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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훤은 1573년에 태어나 윤두수의 아들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했다. 관료로서 삼척 부사, 동래 부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인조반정 이후 명나라에 주청부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체찰사로 참전했으나 평양을 지키지 못하고, 병력 부족과 군민의 호패법에 대한 반발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윤훤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으나, 그의 아들이 인조의 측근이었기에 부조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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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윤훤
출생일1573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지조선 경기도 강화군
사망일1627년 2월 15일
사망 원인사형 (참수형)
국적조선
별명자 : 차야(次野) · 아호 : 백사(白沙)
작호 : 해흥군(海興君)
학력1597년 정시 을과 1위
배우자청송 심씨
자녀4남 1녀
윤순지 · 윤원지 · 윤징지 · 윤의지
신면의 처
부모윤두수(부) · 정경부인 황씨(모)
군인 정보
복무조선
복무 기간1625년-1627년
최종 계급부체찰사 겸 평안도관찰사
지휘조선 평안도
주요 참전 전투/전쟁병자호란
기타 이력1604년(선조 37년) 호성원종공신 3등(扈聖原從功臣三等)
1614년(광해군 6년)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

2. 생애

2. 1. 생애 초반

1573년 오음 윤두수와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이고, 아버지 윤두수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숙부는 좌찬성을 지낸 윤근수이다.

우계 성혼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가 의주로 피신할 때 호종하고 이듬해 선조와 일행을 따라 환도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사관 등을 지냈다.

2. 2. 관료 생활

1598년(선조 31)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홍문록 선발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2] 1599년 춘추관기사관(記事官), 그해 12월 호조좌랑, 1600년 부수찬, 수찬, 그해 7월 다시 부수찬이 되고, 10월 비변사에서 유장(儒將) 16인을 선발할 때 한사람으로 천거되었다.[2] 1601년 2월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고 이조 좌랑을 거쳐 그해 빈전 도감·국장 도감·산릉 도감 관계자들에게 포상할 때 가자되었다.

1603년 성균관직강, 1604년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장악원 첨정을 거쳐 그해 6월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부임하였다. 1604년 (선조 37년) 호성원종공신 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605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2. 3. 파직과 복직

1605년 동래부사 재직 중 송상현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1624년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고 동시에 부산진첨사 정발도 추향하였다.[3] 동래부사 재직 당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609년 정주 목사(定州牧使), 1611년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612년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김직재의 옥사 당시 죄인 김직재(金直哉)를 압송할 때 후대하였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그 뒤 관직에 복귀, 16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1620년 한성부 우윤을 거쳐 강화 부윤(江華府尹)으로 나아갔다. 1623년 3월인조반정을 지지하였다.

2. 4. 인조반정 이후

인조반정 이후 1624년 인조의 책봉을 받는 책봉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 병조참의가 되었다. 명나라에서 책봉을 성사시킨 공로로 상으로 노비 5구와 토전 15결을 하사받고 가자되었다.

그해 9월 동지의금부사, 10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625년 대사간이 되었다가 평안도관찰사로 도임했다.

2. 5. 정묘호란과 패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참전하였으나, 안주를 빼앗겼다. 당시 평안감사였던 윤훤은 후금군이 가까이 오는데도 계엄을 실시하지 않아 군민이 모두 흩어져버렸다.[4]

평양성에는 윤훤이 60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인근 수령들이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집결하면서 총 8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했다.[5][6] 그러나 이들은 정예병이 아니라 민가에서 강제로 징발된 오합지졸이었다.[6]

윤훤은 성을 지키는 계책을 내놓았으나, 하루는 군사들이 호패를 풀어 성 위에 쌓아 두고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고 말하며 궤멸하기 시작하였다.[7] 이는 당시 조선의 신분제인 호패법에 대한 반발로, 서얼, 상민, 노비들이 출전을 거부한 사건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에게만 전투의 책임을 묻는 항의였다.[7]

후금군이 평양성 밖으로 집결하고 안주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내 군민들 사이에서 도주자가 속출했다.[6] 후금군이 공격 태세를 취했을 때 응전한 조선군은 2000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노약자였다. 종사관 홍명구(洪命耉)는 적의 예봉을 피한 후 후미를 공격하자고 건의했고, 윤훤은 이를 받아들여 병력을 성천으로 이동시켰다.[6] 그러나 후금군은 평양성의 병력 이동을 간파하고 평양성을 공격하지 않은 채 바로 대동강을 건너 황주로 진격했다.[6]

황주는 조선의 제2방어선으로, 황해병사 정호서가 지휘하는 5000여 명의 병력이 후금군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정호서는 윤훤이 평양성 방어를 포기하고 성천으로 병력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소수 병력으로는 후금군을 막을 수 없다며 병력을 봉산으로 후퇴시켰다.[6] 이로써 황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제2방어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붕괴되었다.[6]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당시 조선군의 문제점과 윤훤의 군사적 판단, 그리고 호패법을 비롯한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평양성 철수는 강제로 징발된 오합지졸 중심의 군대 운영과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전투력 약화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2. 5. 1. 서얼, 상민들의 출전 거부

후금군이 평안도 안주까지 남하했을 때 평안감사 윤훤은 안주성을 수호할 계책을 수립했다. 물론 그 계책의 모든 것은 병사들이 목숨 걸고 항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7] 그러나 어느 날 병사들이 호패를 성 위에 쌓아놓고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고 싸우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7] 호패에 양반과 서얼, 상민, 노비를 구분해서 써 놓았는데, 우리들 서얼, 상민, 노비들은 나가서 싸우지 못하겠으니 너희들 양반 사대부들이 나가서 싸우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7]

그렇게 호패법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항전을 포기하자 안주성[7] 순식간에 붕괴되고 만다.

2. 6. 최후

정묘호란 당시 병력과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종사관 홍명구의 건의를 받아들여 평양에서 철군, 성천(成川)으로 후퇴하였다.[4] 황해병사 정호서도 황주를 버리고 퇴각하였다.[4]

조정은 크게 놀라 윤훤을 해임하고 김기종을 평안감사로, 신경원을 남이흥 대신 병사로, 이익을 정호서 대신 황해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정충신을 병사로 삼아 부원수를 겸직시켰다.[4]

정호서도 싸우지 않고 황주에서 철군하는 등 다른 관료들까지 후퇴하자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 하여 의금부에 투옥당하였다. 곧 형인 윤방을 비롯하여 조카 윤신지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강화도에서 사형, 효시(梟示)되었다.[4]

한성부에서 처조카 심명세의 집에서 바둑을 두던 중 효수 명령이 전달되자, 심명세는 애통해하였다. 그러나 윤훤은 마지막 한 수의 바둑을 두고는 '내가 작죄(作罪)할 마음은 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르쳤으니 어명에 승복함이 마땅하다'며 형리에게 담배 한 대를 피우겠다는 부탁을 한 뒤, 순순히 오랏줄을 받고 끌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54세였다.

2. 7. 사후

윤훤의 목은 참수된 뒤 군문(軍門)에 효수되었다. 그는 군율에 따라 처형되었지만, 인조는 특별히 명을 내려 부조하였다. 인조는 전례에 의하여 부조하고 관판(棺板) 1부(部)를 내렸는데, 이는 그의 아들 윤순지가 인조의 시종신이자 총애받는 측근이었기 때문이었다.

3. 가족 관계

4. 저서와 작품

윤훤의 문집은 《백사집》이다. 호가 같은 이항복의 백사집 서문을 쓰기도 했다.

5.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윤훤 http://people.aks.ac[...]
[2] 서적 선조실록 131권, 선조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11월 19일(기미) 2번째기사 "비변사가 유장 유공신 등 16인을 천거하다" 1600-11-19
[3] 뉴스 생활/문화 동아일보 1963-01-28
[4] 서적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가람기획 2003
[5] 서적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플래닛미디어 2008
[6] 서적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플래닛미디어 2008
[7] 서적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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