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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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용은 조선 후기 종친으로,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완림군 이재원의 아들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종척 집사, 시강원 시종관 등을 역임했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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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관료, 일제 강점기 조선귀족으로, 한일 병합 조약에 적극 가담하고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강요했으며 고종 독살 의혹을 받았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조선자작 - 조민희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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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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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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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이기용 |
한자 | 李埼鎔 |
가타카나 | 이・기요 |
히라가나 | 리 きよう |
로마자 표기 | I Gi-yong |
기본 정보 | |
이름 | 이기용 |
한자 | 李埼鎔 |
작위 | 자작 |
재위 | 1910년 ~ 1947년 |
자녀 | 이광 |
아버지 | 이재원 |
어머니 | 청송심씨 · 수원김씨 |
배우자 | 연안김씨 |
친척 | 조선 고종 (당숙) |
출생일 | 1889년 11월 1일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961년 3월 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정치 경력 | |
주요 경력 | 귀족원 의원 |
2. 생애
이기埼鎔중국어는 조선 후기의 종친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현손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의 백형(伯兄) 흥녕군 이창응의 손자이고, 고종과 흥친왕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아버지는 완림군 이재원으로, 흥선대원왕의 조카이다. 이재원은 본래 남연군의 차남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이었지만, 남연군의 장남인 큰할아버지 흥녕군 이창응이 아들 없이 일찍 사망하여 그의 사후 양자가 되어 계동궁의 종주 자리를 획득하였다.
1889년(고종 26) 11월 1일 한성부 북부 관광방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147번지) 계동궁에서 태어났다. 2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계동궁의 사손(嗣孫)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증조부 남연군이 인평대군의 후손이지만,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직계 조상이 된 이유로 1902년(광무 2) 장조의 능 참봉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1][2]
2. 1. 대한제국 시기
1902년(광무 2) 장조의 능 참봉직에 임명되었고, 1904년(광무 8) 1월 2일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된 후, 같은 해 9품직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5일 다시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5]1905년(광무 9) 시강원의 시종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06년(광무 10) 돈명의숙 정치전문부에 입학하여 1908년(융희 2) 졸업하였다. 1907년에는 수학원(修學院) 초등부에 입학했고, 1908년(융희 2)에는 돈명의숙을, 1909년(융희 3)에는 수학원 초등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수학원 중등부로 진학하여 1910년(융희 4) 졸업하였으나, 18세 이후 성년이 되었음에도 봉작받지 못했다. 남연군궁의 봉사손인 그가 봉작받지 못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0년(융희 4) 8월 27일 6품에서 정3품으로 품계가 올랐다.[5] 같은 해 10월 7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22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푼전(매국공채)도 받았으나 빚 때문에 파산하였다.[6]
2. 2. 일제강점기
1910년(융희 4) 8월 27일 6품에서 정3품으로 가자되었다.[5] 10월 7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22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푼전(매국공채)도 받았으나 빚에 몰려 파산한 바 있다.[6]1911년 7월 20일 엄귀비의 상중에 종척 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고, 1914년 10월 31일과 1915년 10월 21일에는 영조(英祖)의 탄신일을 맞아 선원전(璿源殿)을 봉심(奉審)하였다.
1915년 11월 3일 대례(大禮) 참례차 교토〔京都〕에 다녀왔다.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이완용(李完鎔)과 함께 별입직(別入直)에 임명되어 입궐하였다. 1919년 1월 22일, 1926년 4월 26일과 5월 10일 천릉시에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1945년 2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조선인도 일본 국회에 진출 할 수 있도록 법령이 개정되면서, 그해 4월 박상준, 윤치호, 박중양 등과 더불어 일본 제국의회의 상원인 귀족원 의원으로 뽑혔다.
1910년 대한제국 수신학교 중등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조선 귀족 자작이 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소유의 미개간지인 경기도남양군 장안면에 있는 토지의 이용권을 취득하였으며, 같은 해에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고, 재동공립보통학교 위원으로 활동했다. 1915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관하여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불교 옹호회 고문이 되었으며, 이후 도박 등의 이유로 파산 신청을 했으나, 경성지방법원의 판단으로 작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32년 조선신궁의 신상제에 조선 귀족 총대표로 참가하였고, 1935년까지 조선신궁의 각종 제례에도 참여했다. 1936년 강원도김화군 임남면에 있는 금은광의 공동 광업권을 취득했다. 1937년 조선국방협회와 동요회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1938년 조선보국회 발기에도 협력했다. 1945년 4월부터는 귀족원 조선·대만 칙선 의원을 지냈다.[1][2]
2. 3.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 후 박흥식, 이종형, 최린, 이승우, 이풍한에 이어 반민특위에 의해 1948년 1월 18일에 이성근과 같은 날 검거되었다.[7] 3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했다. 1960년까지는 한일 병합 당시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는 유일하게 생존해 서울 서대문구에 살고 있었다.[8] 의친왕의 일곱번째 서자 이형길을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어가고 있다.2. 4. 사후
1960년대에 그의 생가이자 집인 계동궁이 철거되었다.2002년 대한민국 국회 민족정기회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고,[3]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그는 아들이 없어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므로, 의친왕의 자녀들인 이광 등을 수양아들, 수양딸로 입양하고 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였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완림군 이재원 | 1831년 | 1891년 2월 19일 | |
어머니 | 정경부인 청송 심씨 | 1831년 1월 7일 | 1877년 11월 17일 | 심우영(沈愚永)의 딸, 효종의 부마 청평도위 심익현의 5대손, 영의정 심지원의 6대손, 내무독판·조선자작 민영휘의 이모, 완림군 이재원의 본처 |
이복누나 | 전주 이씨 | |||
이복자부 | 심상만 | 대사성 심희순(沈熙淳)의 아들, 증 비서승 심정우(沈正愚)의 손자, 대제학 영의정 심상규의 증손, 대사성 · 장례원 소경 · 홍릉 제조 · 기로소 비서장 | ||
이복누나 | 전주 이씨 | |||
이복자부 | 조준호(趙駿鎬) | |||
어머니 | 정경부인 수원 김씨 | 1859년 1월 15일 | ? | 감역 김기헌(金基憲)의 딸 |
누나 | 전주 이씨 | |||
자부 | 신일균(申一均) | |||
부인 | 연안 김씨 | 1888년 5월 19일 | ? | 판서 김세기(金世基)의 딸 |
양자 | 이광 | 1921년 | 1952년 | 의친왕의 7남 |
양녀 | 이령 | 1918년 | 1981년 | 의친왕의 장녀 |
양녀 | 이진 | 1919년 | 2020년 | 의친왕의 2녀 |
양녀 | 이찬(李瓚) | 1920년 | 2009년 | 의친왕의 3녀 |
양녀 | 이숙 | 1920년 | ?년 | 의친왕의 4녀 |
양녀 | 이공 | 1930년 | 현재 | 의친왕의 5녀 |
4. 비판과 논란
이기용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3], 친일반민족행위자로도 지정되었다.[4] 그는 아들이 없어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의친왕의 자녀들인 이광 등을 수양아들과 수양딸로 입양하고 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이기용(李琦鎔)
http://encykorea.aks[...]
2022-06-22
[2]
웹사이트
議会制度七十年史. 第1
https://dl.ndl.go.jp[...]
昭和35年12月
[3]
웹사이트
국회민족정기모임 발표 친일파 708명 명단(한자이름)
http://legacy.www.ha[...]
2002-02-28
[4]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5]
문서
승정원일기 순종 4년 경술(1910) 7월 23일(갑자, 양력 8월 27일 토요일) 02번째 기사, "김득광 등에게 상전을 내렸고, 박만동 등에 대한 인사를 행하였다"
[6]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05-01
[7]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05-20
[8]
저널
日帝韓人貴族의 近況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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