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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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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익현은 조선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도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효종, 현종, 인선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세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특히, 외교 활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칭송받았다. 1683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문장과 필법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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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익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심익현
한자 표기沈益顯
작위조선 효종의 부마
작위 (별칭)청평위 靑平尉
출생일1641년 6월 19일 (음력)
사망일1683년 7월 6일 (음력)
배우자숙명공주
아버지심지원
어머니안동 권씨
가문청송 심씨
자녀2남
자녀 (이름)심정보 · 심정협
가회(可晦)
죽오(竹塢)
능묘심익현 · 숙명공주묘
능묘 (위치)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258-5

2.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부마로, 1641년 영의정 심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1] 명문가인 청송 심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보였다.[1] 1652년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도위(靑平都尉)에 봉해지면서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1]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활동하며 왕가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1]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국가의 주요 행사에 참여했으며, 특히 세 차례에 걸쳐 청나라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1] 1659년 효종 승하 시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례(喪禮)를 원만하게 처리하여 능력을 인정받았고,[1] 1680년 경신환국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공정한 조사로 신망을 얻었다.[1]

그는 문학과 서예에도 능했으며,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1] 부귀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힘쓰고 처신을 조심하여 '현명한 공자(賢公子)'로 불렸다.[1] 1683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숙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장(禮葬)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다.[1]

2. 1. 유년 시절과 혼인

1641년 (인조 19년) 8월 19일,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과 해평 윤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부원군 윤근수(尹根壽)의 손녀이자 부사 윤종지(尹宗之)의 딸이다. 그의 가문인 청송 심씨고려 시대 위위승(衛尉丞) 심홍부에서 시작되어 대대로 명망 높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심익현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징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뛰어난 총명함과 기억력을 보였다. 6세 때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배운 후, 저녁 구름과 잠자러 오는 새를 보고 "바위굴에서 구름이 나오고 새는 지쳐 날아 돌아오네(巖穴出雲, 鳥倦飛而知還중국어)"[1]라는 구절을 자연스럽게 언급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 심지원 역시 그의 비범함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1650년 (효종 원년), 10세의 나이로 효종의 부마 간택에 뽑혔다. 효종 앞에서 보인 빼어난 용모와 예의 바른 태도는 왕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했다. 1652년 (효종 3년),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품계와 함께 청평도위(靑平都尉)에 봉해졌다.[1]

2. 2. 정치 활동

1652년(효종 3년)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면서 청평도위(靑平都尉)에 봉해졌다.[1] 이를 계기로 왕실의 일원으로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효종과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왕가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1]

왕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국가의 주요 의례 및 행사에 참여했으며, 특히 청나라 연경에 세 차례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1] 1680년에는 경신년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하여 진상 조사를 맡아 공정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 그는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1]

2. 2. 1. 관직 생활

1652년(효종 3년)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도위(靑平都尉)에 봉해지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품계를 받았다.[1] 이후 왕궁에 출입하며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번 오위 도총관을 겸직했으며, 1661년(현종 2년)에는 광덕대부(光德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 유록대부(緌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고, 만년에는 내섬시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1]

1659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였으나, 대궐에 들어가 초상 관련 일을 주관하며 일 처리가 명확하여 당시 정승이었던 정태화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효종과 현종 대에 걸쳐 왕실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며, 인선왕후 역시 그를 아꼈다. 왕실의 금원(禁苑)에서 열리는 연회에 자주 참여하고 왕과 시를 주고받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1]

사신으로서 세 차례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1]

사신으로 떠나기 전에는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주거나 원자(元子, 훗날의 숙종)가 술을 권하기도 했으며, 귀환 시에는 중도에서 위로를 받는 등 다른 종척(宗戚)이나 도위(都尉)들보다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1] 주청사로 파견되었을 때 외교 문서(주달, 奏達)에 오류가 있어 문제가 생길 뻔했으나, 이를 원만히 수습하여 숙종의 칭찬을 받고 포상으로 아들이나 아우 중 한 명에게 관직이 내려지고 토지와 노비도 하사받았다.[1] 1680년 주청사 파견 시에는, 사신을 안내하는 빈신(儐臣) 중 한 명이 역관을 통해 조선의 신하가 강성하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조정을 이간질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의 명으로 진상을 조사하게 된 심익현은 중국에서 관련자를 직접 만나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공정하게 보고하여 당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때 연경에서 받은 금품은 모두 수행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1]

글씨에도 뛰어나 산릉(山陵)의 지문(誌文), 옥책문(玉冊文), 교명(敎命) 등을 여러 번 써서 임금으로부터 구마(廐馬, 임금이 타는 말 또는 마구간의 말)를 하사받기도 했다.[1]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신중하고 민첩하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부귀한 환경 속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학문과 서예에 힘썼다고 한다. 왕실의 총애 속에서도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아랫사람들을 엄격히 단속하여, 세간으로부터 '현명한 공자(賢公子)'라는 칭송을 받았다.[1]

2. 2. 2. 외교 활동

심익현은 현종과 숙종 대에 걸쳐 세 차례 청나라 연경(현재의 베이징)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심익현의 연경 사행 기록[1]
연도 (조선 왕)목적비고
1666년 (현종 9년)사은사
1674년 (숙종 즉위년)주청사사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숙종으로부터 아들이나 아우 중 한 명에게 관직을 제수받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는 등 포상을 받았다.
1680년 (숙종 6년)주청사당시 조선 내 정치적 갈등 상황(경신년의 어려움) 속에서, 일부 인사가 거짓 정보를 퍼뜨려 조정을 혼란시키려 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심익현은 청나라에서 관련자를 직접 대면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귀국 후 공정하게 보고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효종 때부터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심익현은 사행을 떠나기 전후로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주거나 세자(원자)를 시켜 술을 권하기도 했으며, 귀국 길에는 사람을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이는 다른 종친이나 부마들에 비해 두드러진 예우였다.[1]

또한 그는 연경 사행 중 청나라로부터 받은 금품을 수행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1]

2. 2. 3. 당쟁 속 중립

심익현은 당쟁이 심했던 시기에도 신중한 처신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 노력했다.

1680년(숙종 6년) 경신년에 발생한 사건은 그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외국 사신을 안내하는 관리(빈신, 儐臣) 중 한 명이 역관(通譯)을 통해 거짓 정보를 퍼뜨려 조정 신료들 사이를 이간질하려 시도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할 적임자로 심익현을 지목하며,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연경으로 파견했다. 이는 심익현이 공정하게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심익현은 "이는 나라의 중대사이니, 그 사이에 조금의 사사로운 뜻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임무에 임했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여 관련자를 직접 만나 사실 관계를 확인한 뒤 귀국하여, 한결같이 공정하게 조사했음을 보고했다. 당시 여론은 그의 공정한 처리를 높이 평가했다.

이 외에도 심익현은 평소 언행을 매우 조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 단속을 엄격히 하여 하인들이 거리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관리했으며, 자녀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그가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처신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2. 3. 죽음

1683년(숙종 9년) 6월에 가벼운 병을 얻어 며칠간 자리에 눕게 되었다.[1] 심익현은 평소 오행설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이치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1683년(계해년)에 죽을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전해진다.[1] 병이 깊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일어서지 못할 것을 알고는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라고 말하며 슬퍼하는 기색 없이 평상시와 같은 얼굴빛을 유지했다고 한다.[1]

숙종이 어의를 보내자, 심익현은 어의에게 "지난날 내가 병들었을 때 선왕께서 그대를 보내셨고, 지금 또 주상께서 보내셨으니 앞뒤로 특별한 대우는 같건만 내가 그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라고 말했다.[1] 아우인 심익창에게 유언을 구술하여 아들들을 훈계하도록 한 뒤, 같은 해 7월 6일 정침(正寢, 평소 거처하던 안방)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숙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중단하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 재료를 하사했으며 부의금을 더하고 내시를 보내 장례 절차를 돕게 하여 나라에서 예를 갖춰 장례(예장)를 치르도록 명하였다.[1] 같은 해 9월 2일, 경기도 고양 석천곡(石川谷) 자좌(子坐) 방향 언덕에 안장되었다.[1]

3. 가계


  • '''11대조''' : 심덕부 - 문하시중, 영삼사사, 문하부 좌정승, 청성백(靑城伯)
  • '''10대조''' : 심징 - 세종의 국구 심온(沈溫) · 태조의 부마 심종(沈淙)의 형, 경창부윤
  • '''9대조''' : 심석준(沈石雋) - 군자감 판관, 증 호조판서, 양혜공(良惠公)
  • '''8대조''' : 심선(沈璿) - 경기도 관찰사, 증 영돈녕부사
  • '''7대조''' : 심안인(沈安仁) - 세종의 부마 심안의(沈安義)의 형,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증 병조참판
  • '''6대조''' : 심빈(沈濱) - 안성군수, 증 이조판서
  • '''5대조''' : 심광언 - 형조판서, 우참찬, 호안공(胡安公)
  • '''고조부''' : 심금(沈錦) - 과천현감, 사헌부 감찰, 증 이조판서
  • '''고조모''' : 여흥 민씨 - 군수 민희열(閔希悅)의 딸, 성종의 부마 민자방(閔子芳)의 손녀
  • * '''증조부''' : 심종침(沈宗忱) - 숙천부사, 증 좌찬성
  • * '''증조모''' : 단양 우씨
  • ** '''조부''' : 심설(沈誢) - 사산감역, 증 영의정
  • ** '''조모''' : 전주 이씨 - 청원도정 이간(靑原都正 李侃)의 딸

'''아버지''' : 심지원 - 영의정, 원상, 총호사
'''어머니''' : 안동 권씨 - 좌랑 권득기(權得己)의 딸, 판서 권극례(權克禮)의 손녀
'''친어머니''' : 해평 윤씨 - 부사 윤종지(尹宗之)의 딸, 좌찬성 윤근수(尹根壽)의 증손녀
'''장인''' : 효종
'''장모''' : 인선왕후 덕수 장씨 -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 '''본인''' : 심익현 - 효종의 부마, 청평도위(靑平都尉)
* '''부인''' : 숙명공주 - 효종인선왕후의 딸
** '''아들''' : 심정보(沈廷輔) - 한성부 우윤
** '''며느리''' : 온양 정씨 - 이조판서 정유악(鄭維岳)의 딸
** '''며느리''' : 전주 이씨 -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의 딸
*** '''손자''' : 심협(沈協) - 사헌부 집의
*** '''손자며느리''' : 백천 조씨 · 광산 김씨
'''증손자''' : 심도진(沈道震) - 진사
* '''고손자''' : 심우영(沈雨永)
** '''5세손녀''' : 청송 심씨
** '''5세손녀사위''' : 여흥 민씨 민두호(閔斗鎬) - 내무독판, 민영휘(閔泳徽)의 아버지
** '''5세손녀''' : 청송 심씨
** '''5세손녀사위''' : 전주 이씨 이재원(李載元) - 내무독판, 종정경 판돈녕부사, 완림군(完林君), 이기용(李埼鎔)의 아버지, 심상만(沈相萬)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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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며느리''' : 전주 이씨
*** '''손자''' : 심사하(沈師夏) - 문인화가,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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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사위''' : 광산 김씨 김원택(金元澤) - 한성부 판윤
'''외증손''' : 김상복(金相福) - 영의정
** '''아들''' : 심정협(沈廷協) - 상의원 첨정
** '''며느리''' : 풍양 조씨 - 진사 조상정(趙相鼎)의 딸, 예조판서 조형(趙珩)의 손녀
*** '''손자''' : 심사주(沈師周) - 전주부사
*** '''손자며느리''' : 연안 이씨 - 군수 이주신(李舟臣)의 딸, 숙종의 국구 김만기(金萬基)의 외손녀
* '''형''' : 심익선(沈翼善) - 풍덕부사
* '''형수''' : 남양 홍씨 - 병자호란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의 딸
** '''조카''' : 심정기(沈廷耆) - 삭녕군수
** '''조카며느리''' : 전주 이씨 - 선조의 왕자 인성군의 삼남 해원군의 딸
** '''조카''' : 심정로(沈廷老) - 고성군수
** '''조카며느리''' : 창원 황씨
** '''조카''' : 심정구(沈廷耇) - 통천군수
** '''조카며느리''' : 청주 한씨
** '''질녀''' : 청송 심씨
** '''조카사위''' : 양주 조씨 조태채(趙泰采) - 노론 4대신 중 한 명, 좌의정,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의 8대조
* '''형''' : 심익상(沈翼相) - 해주목사
* '''형수''' : 한산 이씨 - 참찬 이홍연(李弘淵)의 딸
** '''조카''' : 심정규(沈廷揆)
** '''조카며느리''' : 광산 김씨 - 대사헌 김익경(金益炅)의 딸, 대제학 김익희(金益熙)의 조카, 김장생(金長生)의 증손녀
** '''질녀''' : 청송 심씨
** '''조카사위''' : 양주 조씨 조태기(趙泰耆) - 소론의 거두 좌의정 조사석(趙師錫)의 아들, 소론의 영수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의 동생, 조태채의 사촌
* '''동생''' : 심익창(沈翼昌) - 성천부사, 경종조 연잉군(영조) 시해 미수사건 연루로 영조 때 처형됨
* '''제수''' : 성주 이씨 · 사천 목씨
** '''조카''' : 심정옥(沈廷玉)
** '''조카며느리''' : 부여 서씨 · 문화 류씨
** '''조카''' : 심정주(沈廷胄) - 문인화가
** '''조카며느리''' : 하동 정씨 - 문인화가 정유점(鄭維漸)의 딸
*** '''당질''' : 심사정(沈師正) - 문인화가, 정선(鄭敾), 조영석(趙榮祏) 또는 윤두서(尹斗緖)와 함께 삼재(三齋)로 불림
** '''조카''' : 심정석(沈廷錫)
** '''조카며느리''' : 한산 이씨
** '''조카''' : 심정신(沈廷紳)
** '''조카며느리''' : 평산 신씨 - 도정 신성하(申聖夏)의 딸, 소론 영수 좌의정 박세채(朴世采)의 외손녀, 영의정 신완(申琓)의 손녀
** '''조카며느리''' : 평산 신씨 - 진사 신익돈(申益惇)의 딸
** '''조카''' : 심정악(沈廷岳)
** '''조카며느리''' : 능성 구씨
* '''동생''' : 심익성(沈翼成) - 태인현감, 증 이조판서
* '''제수''' : 광산 김씨 - 좌승지 김만균(金萬均)의 딸, 대제학 김익희(金益熙)의 손녀, 김장생(金長生)의 고손녀
** '''조카''' : 심정채(沈廷采) - 지중추부사
** '''조카며느리''' : 덕수 이씨
*** '''당질녀''' : 청송 심씨
*** '''당질녀사위''' : 안동 김씨 김이복(金履福) - 부사, 노론 벽파 영수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의 장인
** '''조카''' : 심정기(沈廷琦) - 동지돈녕부사
** '''조카며느리''' : 한산 이씨 · 전주 이씨 · 밀양 박씨
** '''조카''' : 심정서(沈廷瑞) - 증 사복시정
** '''조카며느리''' : 전주 이씨
** '''조카''' : 심정최(沈廷㝡) - 지중추부사
** '''조카며느리''' : 남양 홍씨 · 파평 윤씨
*** '''당질녀''' : 청송 심씨
*** '''당질녀사위''' : 청주 한씨 한정유(韓鼎裕) - 승지, 영의정 한익모(韓翼謩)의 아들
** '''조카''' : 심정수(沈廷秀)
** '''조카며느리''' : 안동 김씨
* '''여동생''' : 청송 심씨
* '''매부''' : 덕수 이씨 이광하(李光夏) - 한성부 판윤
** '''외조카''' : 이집(李㙫) - 좌의정

4. 평가

이민서가 지은 묘지명에는 심익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1] 그의 뛰어난 자질과 덕행, 능력 등이 언급되며, 특히 부마로서 왕실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음이 나타난다.[1] 그러나 이민서는 심익현이 부마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1]

4. 1. 긍정적 평가

이민서가 지은 묘지명에 따르면 심익현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을 배울 때 남다른 이해력을 보였다. 1650년(효종 1년) 10세의 나이로 부마로 간택될 당시, 효종 앞에서 보인 뛰어난 용모와 예의 바른 태도로 칭찬을 들었다.[1]

성품은 정성스럽고 민첩하며 온화하고 순수했으며, 문예를 익히는 데 힘써 선비와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부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했으며,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여 부모 봉양과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별세한 후에는 외조모를 어머니처럼 모셨고, 선대의 재산을 형제들에게 양보하는 등 욕심 없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묘답(墓田)과 노비(奴僕)를 잘 관리하여 가문의 영구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1]

자식이 없는 숙모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으며, 형제들과는 늘 화목하게 지내고 어려울 때 넉넉히 도왔다. 심지어 임금이 하사한 노비까지 나누어 주며 복을 함께 누리고자 했다. 가난한 친척이나 덕망 있는 평민들에게도 은혜롭게 대했으며, 종들과 자제들을 엄격히 단속하여 행실에 문제가 없도록 경계했다. 이러한 행실 덕분에 시정의 백성들조차 그를 '어진 공자'(賢公子)라 칭찬했다고 한다.[1]

식견과 사려가 깊고 신중했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중용되었다. 효종 승하 당시 약관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수습하여 정승 정태화에게도 칭찬을 받았다.[1]

사신으로 세 차례나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1666년, 1674년, 1680년). 특히 1674년1680년에는 주청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뻔한 상황을 뛰어난 판별력으로 원만히 해결하여 숙종의 신임을 얻고 상을 받기도 했다. 1680년 경신환국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도 공정하게 처리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신으로 갔을 때는 청나라에서 받은 금품을 수행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1]

글씨에도 뛰어나 산릉의 지문(誌文), 옥책문(玉冊文), 교명(敎命) 등을 여러 차례 써서 임금으로부터 (廐馬)을 하사받기도 했다. 시문에도 능하여 깨끗하고 운치 있는 시를 지었으며,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셨으나 방탕하지 않았다.[1]

효종과 현종, 인선왕후 등 왕실로부터 각별한 총애와 신뢰를 받았다. 임금은 그를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하거나 술을 내렸으며, 사신으로 떠날 때나 돌아올 때 특별한 예우를 보였다. 당대의 다른 부마들이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심익현과 숙명공주 부부는 화목하고 평안하여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과 칭찬을 받았다.[1]

묘지명을 지은 이민서는 심익현이 부귀한 환경 속에서도 겸손하고 문인적인 풍모를 지녔으며, 뛰어난 자질과 학식을 갖추었음에도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며 그의 덕행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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