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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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브 퀴리는 프랑스 출신의 작가, 언론인, 그리고 국제 기구 활동가이다. 그녀는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이자, 이렌 졸리오퀴리의 동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종군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특별 고문을 역임했다. 1937년 어머니 마리 퀴리의 전기를 출간하여 성공적인 작가로 데뷔했으며, 남편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가 유니세프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때 유니세프 활동을 지원했다. 195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2007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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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에브 드니즈 퀴리 라부이스 |
출생일 | 1904년 12월 6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사망일 | 2007년 10월 22일 |
사망지 | 뉴욕 시티, 미국 |
국적 | 프랑스 (1904–2007) 미국 (1958–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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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저널리스트, 피아니스트 |
학력 | |
교육 기관 | 콜레주 세비녜 |
가족 관계 | |
어머니 | 마리 퀴리 |
아버지 | 피에르 퀴리 |
자매 | 이렌 졸리오퀴리 |
배우자 | |
배우자 |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 (1954년 결혼, 1987년 사망)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 Madame Curie (1937) Journey Among Warriors (1943) |
수상 | |
수상 내역 | 전국 도서상 (1937) 크루아 드 게르 레지옹 도뇌르 (2005) |
2. 생애
1904년 파리에서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브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등 예술적인 면모를 보였다. 1925년에는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언니 이렌 졸리오퀴리 부부가 연구 분야에서 어머니를 도왔던 것과 달리, 이브는 언니가 결혼한 후에도 집에 머물며 어머니의 유럽 각국 방문에 동행하는 등 생활 면에서 지원했다. 1934년 어머니 마리 퀴리가 재생 불량성 빈혈로 사망했을 때도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3]
어머니 사후, 이브는 전기 집필에 몰두하여 1937년 전기 『퀴리 부인』(''Madame Curie'')을 출판했다. 이 책은 각국어로 번역되며 큰 인기를 얻었고,[16] 1943년에는 머빈 르로이 감독에 의해 영화 "퀴리 부인"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자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국 및 자유 프랑스 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1941년 비시 프랑스로부터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회복되었다. 1943년에는 전쟁 초기 여행기 『전진의 여정』(''Journey Among Warriors'')[17]을 출판했다.
전후 1952년 NATO 사무총장의 특별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1954년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와 결혼하기 전까지 NATO 국제 직원으로 일했다.
이브는 부모, 언니 부부,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노벨상 수상자였지만, 자신은 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어요"라고 유머러스하게 말하곤 했다.[18]
1987년 남편과 사별한 후 2007년 10월 22일 뉴욕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 자택에서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말년에 퀴리 가문의 여성들 중 유일하게 장수한 것에 대해 방사능과 관련된 삶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벌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16] 유해는 남편의 출신지인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메테리 묘지에 부부 합장으로 안장되었다[https://www.findagrave.com/memorial/22456774/%25c8ve-curie].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이브 퀴리는 1904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물리학자인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이렌 졸리오퀴리이다. 이브는 1906년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 마리 퀴리는 남편의 소르본 대학교 교수직을 수락했다. 1910년 시아버지 외젠 퀴리 박사가 사망하자, 마리 퀴리는 보모의 도움을 받아 두 딸을 홀로 키웠다.[3] 마리는 두 딸의 교육과 관심사 발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언니 이렌이 저명한 과학자가 된 반면, 이브는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관심사를 더 많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두 딸은 프랑스 국적이었고, 모국어는 프랑스어였지만, 폴란드 출신임을 알고 폴란드어를 사용했다. 1911년 그들은 폴란드를 방문하여 말을 타고 산에서 하이킹을 하기도 했다.[4]
1921년 봄, 이브는 언니와 어머니와 함께 RMS ''올림픽'' 호를 타고 뉴욕으로 항해했다.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여 두 차례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는 그곳에서 정중한 의례로 환영받았다. 이브는 언론으로부터 "라듐 눈을 가진 소녀"라는 별명을 얻었다.[5] 미국에 있는 동안 마리, 이렌, 이브는 워런 G. 하딩 대통령을 워싱턴 D.C.에서 만났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으며, 기차를 타고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했다. 그들은 1921년 6월 파리로 돌아왔다.
이브는 언니 이렌과 마찬가지로 파리의 무종교 사립 고등학교인 세비네 학교를 졸업했으며, 1925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편, 그녀는 피아노 실력을 향상시키고 1925년 파리에서 첫 번째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그녀는 여러 번 무대에 올라 프랑스 수도, 지방 및 벨기에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926년 언니 이렌이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결혼한 후, 이브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그녀를 돌보고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및 스위스 전역의 여행에 동행했다. 1932년, 그들은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와 함께 스페인 여행에 동행했다.
이브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인문학을 선호했다.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항상 세련된 삶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이브와 이렌 모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재생 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던 마리는 장기간의 이온화 방사선 노출로 인해 1934년 7월 4일에 사망했다.
2. 2. 작가로서의 활동
1935년 어머니의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자취를 확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37년 어머니의 전기인 "퀴리 부인"(Madame Curie프랑스어)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1943년 미국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사에 의하여 시나리오로 각색되기도 하였다.[6]《마담 퀴리》는 즉각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미국 도서상 논픽션 부문에서 세 번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7] 이는 미국 서점 협회(American Booksellers Association)의 투표로 결정되었다.[8][9]
이브는 문학 및 저널리즘 작업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전기 외에도, 주간지 《캉디드》에 음악 평론을 게재했고, 파리의 다른 신문에 연극, 음악, 영화에 대한 기사를 기고했다.[4]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브 퀴리는 전쟁 특파원으로 활약하며 샤를 드골이 이끌던 프랑스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했다.[4]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였던 비시 프랑스는 이브의 시민권을 박탈했지만, 전쟁 이후 회복되었다.[4]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프랑스 정보 위원이었던 장 지로두는 이브를 자신의 사무실 여성 부서 책임자로 임명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후, 이브는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피신했고,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나치즘에 맞서 싸웠다. 이로 인해 비시 프랑스 정부는 1941년 그녀의 프랑스 국적과 재산을 몰수했다.
이브는 전쟁 기간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고, 윈스턴 처칠을 만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강연과 기고 활동을 했으며, 1940년 백악관에서 엘리너 루즈벨트를 만났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여성과 전쟁"에 대한 강연과 에세이를 발표했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이브는 종군 기자로 아프리카, 소련, 아시아를 여행하며 영국의 공세와 소련의 반격을 목격했다. 이 과정에서 이란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자유 중국의 장제스, 마하트마 간디 등 여러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영국 편에서 싸우거나 소련 내 폴란드군을 조직한 폴란드 군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브의 보고서는 미국 신문에 게재되었고, 1943년 책 ''전사들 사이의 여정''으로 묶여 1944년 퓰리처상 통신 부문 후보에 올랐다.[4] 러시안 리뷰의 한 기사는 이브의 책을 비판하며, 그녀의 열정이 판단력을 흐렸다고 지적했다.[10]
유럽으로 돌아온 이브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유 프랑스군 여성 의료 부대에서 자원 봉사자로 복무하며 중위로 진급했다. 1944년 8월, 그녀는 부대와 함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상륙했고,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
2. 4. 전후 활동과 국제기구 참여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이브는 일간지 파리 프레스의 부발행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국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NATO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 아동 구호 활동가 등으로도 활약하였다.[16]1952년부터 1954년까지 초대 나토 사무총장인 헤이스팅스 이스메이의 특별 고문을 지냈다.
1954년 11월 19일, 국제 기구 활동을 통해 만난 미국 외교관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Henry Richardson Labouisse Jr.)와 결혼하였고, 195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고인이 될 때까지 미국과 프랑스의 이중 국적을 유지하였다.[16] 1965년 남편 헨리 라부이스 퀴리는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까지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자신만 타지 못했다면서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18]
2. 5. 유니세프 활동과 노벨 평화상
이브 퀴리는 국제 기구 활동을 통해 만난 미국 외교관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와 1954년 11월 19일 결혼하였고, 195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미국과 프랑스의 이중 국적을 유지하였다.[11] 1965년 남편 헨리 라부이스는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11] 이브 퀴리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에 이어 남편까지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자신만 받지 못했다며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1965년, 이브의 남편은 유엔 사무총장 우 탄의 제안으로 유엔 아동 기금(UNICEF)의 집행 이사 자리를 맡아 미국 정부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11] 라부이스는 1979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으며, 이브 퀴리 역시 유니세프에서 일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종종 "유니세프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불렸다.[11] 그들은 함께 100개국 이상을 방문했는데, 대부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는 제3세계 국가들이었다.[11] 1965년, 라부이스는 이브 퀴리와 함께 유니세프에 수여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11]
2. 6. 말년과 죽음
1987년 남편이 타계한 후, 이브는 뉴욕에 거주하였다. 이브는 헨리 라부이스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에 헨리하고 전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앤 페레츠 퀴리'''로부터 돌봄을 받았다. 2005년에는 유니세프 활동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밖에도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 폴란드 부활기사십자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를 수여받았다. 그녀의 101세 생일(2005년 12월 6일)때는 세계 국가원수들의 축전이 이어졌다. 2년 후인 2007년 10월 22일, 이브는 뉴욕 맨해튼의 서튼 플레이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향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뉴올리언스의 메타리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다.[12][13][14][16][17][18]2004년 12월, 이브 퀴리는 100세 생일을 맞이했다. 이 때, 그녀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또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았다.
2005년 7월, 이브 퀴리 라부아스는 유니세프에서의 공헌으로 레지옹 도뇌르의 오피시에로 승진했는데, 이는 프랑스 최고 훈장이다. 그녀는 훈장에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이러한 훌륭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멋진 날이고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이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고 농담했다. "우리 가족에는 노벨상이 다섯 개나 있었어요."라고 그녀는 농담했다. "어머니에게 두 개, 아버지에게 하나, [제] 여동생과 매형에게 하나, 그리고 남편에게 하나. 저만 성공하지 못했죠..."
앤 베네만 유니세프 사무총장은 그녀의 사망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라부아스 부인은 평화와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자신의 많은 기술을 활용한 재능있는 전문 여성입니다. 남편이 유니세프를 이끌었을 때, 그녀는 그와 함께 여행하며 어린이들을 옹호하고, 유니세프 직원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제공하며, 조직에서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의 에너지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어야 합니다.
말년에, 퀴리 가문의 여성들 중에서 자신만 장수하게 된 것에 대해, 방사능과 관련된 인생에서 도망친 것에 대한 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남편 라부이스의 출신지인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메테리 묘지에, 부부가 함께 묻혀있다.
3. 가족 관계
- '''어머니:''' 마리 퀴리 (1867년~1934년)
- '''아버지:''' 피에르 퀴리 (1859년~1906년)
- '''언니:''' 이렌 졸리오퀴리 (1897년~1956년)
- '''형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1900년~1958년)
- '''배우자:'''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 (1904년 2월~1987년)
이브 퀴리는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과학자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언니는 이렌 졸리오퀴리이다. 1954년에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와 결혼했다.
4. 저서
1935년 어머니의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자취를 확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37년 어머니의 전기인 "퀴리 부인"(Madame Curie프랑스어)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1943년 미국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사에 의하여 시나리오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 『퀴리 부인과 딸들: 20세기를 개척한 모녀』
:: 클로딘 몽테유, 내야마 나오미 역, 주오코론 신샤, 2023년
5. 서훈
2005년 7월, 이브 퀴리는 유니세프에서의 공헌으로 레지옹 도뇌르의 오피시에로 승진했는데, 이는 프랑스 최고 훈장이다.[12] 그녀는 훈장에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이러한 훌륭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멋진 날이고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이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고 농담했다. "우리 가족에는 노벨상이 다섯 개나 있었어요."라고 그녀는 농담했다. "어머니에게 두 개, 아버지에게 하나, [제] 여동생과 매형에게 하나, 그리고 남편에게 하나. 저만 성공하지 못했죠..."[13]
참조
[1]
서적
Madame Curie, translated by Vincent Sheean
https://archive.org/[...]
Doubleday, Doran and Co., Inc
2016-08-23
[2]
서적
Journey Among Warriors
https://archive.org/[...]
Doubleday, Doran and Co., Inc
2016-08-21
[3]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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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y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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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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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ve Curie's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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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7
[5]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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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6
[6]
웹사이트
Madame Curie : Eve Curie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https://archive.org/[...]
[7]
문서
After two U.S. National Book Award cycles, the Non-fiction and Biography categories were combined beginning 1937.
[8]
뉴스
Books and Authors
The New York Times
1936-04-12
[9]
뉴스
Booksellers Give Prize to 'Citadel': Cronin's Work About Doctors Their Favorite{{nbsp}}...
The New York Times
1938-03-02
[10]
간행물
Book Reviews
Russian Review
1943
[11]
뉴스
Henry Labouisse's obituary in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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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UNICEF hosts award ceremony in honour of Madame Eve Laboui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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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ve Curie's obituary (Polish)
http://www.wiadomosc[...]
201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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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UNICEF mourns the death of Ève Curie Labouisse
http://www.unicef.or[...]
201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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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Kraj mojej matki, film – Pocisk.com – ciekawostki historyczne
http://www.pocisk.co[...]
[16]
문서
日本語版の新訳は『キュリー夫人伝』([[河野万里子]]訳、[[白水社]]、2006年、新装版2014年)
[17]
문서
訳書は、エーヴ・キューリー『戦塵の旅 ロシア篇』([[坂西志保]]・[[福田恆存]]訳、日本橋書店、1946年)。後年『福田恆存翻訳全集3』([[文藝春秋]]、1992年)に収録
[18]
뉴스
Eve Curie Labouisse, Mother’s Biographer, Dies at 102 -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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