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미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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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미래당은 2012년 11월 가다 유키코에 의해 창당된 일본의 정당이다. 창당 당시에는 민주당 탈당파, 감세 일본, 녹색 바람 등 다양한 정당 및 정치 세력이 참여했으며, 2022년까지 원자력 발전 폐지, 소비세 인상 동결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61석에서 9석으로 의석수가 급감하는 참패를 겪었고, 오자와 이치로의 영향력으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오자와 그룹이 분리되어 생활의 당을 창당하고, 가다는 녹색 바람과의 합당에 실패하면서 일본미래당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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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래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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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창립자 | 가다 유키코 |
창립일 | 2012년 11월 28일 |
해산일 | 2013년 5월 17일 |
합병 대상 | 국민생활이 제일 감세일본 |
후신 | 생활의 당 |
본부 | 오쓰시, 시가현, 일본 |
웹사이트 | 일본미래당 |
주요 인물 | |
대표 | 아베 도모코 |
사무총장 | 이이다 데쓰나리 |
정치적 입장 | |
이념 | 환경주의 반핵 에너지 |
정치 성향 | 중도좌파 |
당색 | |
색상 | 녹색 |
2. 역사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 야마다 마사히코 전 농림수산대신 등이 감세 일본과 일본미래당의 통합을 논의했고, 미도리의 바람 일부 의원들도 합류 의사를 밝혔다.[1]
2012년 11월 28일, 가다 유키코 당시 시가현 지사가 자유주의 성향의 소수 정당들을 흡수하여 일본미래당을 결성했다. 보수파 재계 인사 이나모리 가즈오와 감세일본도 합류했다. 결성 당시 국회 의석은 민주당, 자민당에 이은 제3당이었다.
당시 정책 강령은 2022년까지 원자력 발전 폐지, 소비세 인상 동결,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반대 등을 내걸었다.[1]
그러나 12월 16일 총선에서 의석의 80%를 잃는 대패를 겪었다. 선거 후 오자와 이치로의 영향력으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고, 12월 28일 오자와 그룹은 생활의 당을 결성하며 분당되었다.[2]
아베 토모코가 유일하게 당에 남았고, 일본미래당은 국회 내 정당 지위를 잃었다. 시가현 의회는 가다 유키코에게 지사와 당 대표 겸직 중단을 결의했고, 가다는 2013년 1월 4일 대표직에서 사임했다.[3]
이후 일본미래당 잔여 세력은 해산되어 녹색 바람으로 흡수되었다.[4] 오자와 이치로계는 생활의 당, 자유당으로 이어졌지만, 이는 "정당 강탈"로 평가받기도 한다. 가다 유키코 등은 동명의 정치 단체를 결성했으나 미도리의 바람에 흡수 합병되었다. 법적 후계 정당인 자유당도 국민민주당에 흡수되어 일본미래당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2. 1. 창당 배경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난립했던 제3세력 간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과 야마다 마사히코 전 농림수산대신은 감세 일본과 일본미래당의 통합을 논의했고, 미도리의 바람 일부 의원들도 일본미래당 합류 의사를 밝혔다.[1]2012년 11월 28일, 가다 유키코 당시 시가현 지사가 비와호 선언을 당 방침으로 도쿄도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총무대신에게 설립 신고서를 제출하며 일본미래당이 창당되었다.[7] 창당 당시 소속 국회의원은 8명이었다.[8]
일본미래당은 자유주의 성향의 소수 정당을 흡수하여 결성되었지만, 보수파 재계 인사 이나모리 가즈오도 참여했고, 최종적으로 보수 성향의 감세일본도 합류했다.
창당 직후 국회 의석수는 민주당, 자민당에 이어 제3당이었지만, 12월 16일 총선에서 의석의 80%를 잃는 대패를 겪었다.
일본미래당에 참여한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은 다음과 같다.
정당/정치 세력 | 성향 및 주요 인물 | 비고 |
---|---|---|
국민의 생활이 제일 | 오자와 이치로 대표, 민주당 탈당파 | 당내 최대 세력, 합류 직후 당무 위임[10] |
감세 일본·반 TPP·탈원전을 실현하는 당 | 야마다 마사히코, 가와무라 다카시 공동 대표 | 감세 일본과 반 TPP·탈원전·소비세 인상 동결을 실현하는 당이 합병[11] |
감세 일본 |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 대표 | 주쿄 지방 지역 정당 |
반 TPP·탈원전·소비세 인상 동결을 실현하는 당 | 가메이 시즈카 간사장, 야마다 마사히코 대표 | |
아베 토모코 | 사회민주당 정책 심의 회장 출신 | 11월 27일 참가 표명[12] |
미도리의 바람 | 신흥 좌파 정당 | 합류하지 않았으나, 3명의 전/중의원 의원 이적 및 선거 협력[13] |
2012년 총선 정책 강령은 2022년까지 원자력 발전 폐지, 정부의 소비세 인상 계획 동결,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반대 등이었다.[1]
2. 2. 창당
日本未来の党일본어은 2012년 11월 28일, 가다 유키코에 의해 공식 창당되었다.[7]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난립한 제3극 중에서 비교적 리버럴한 소수 정당을 흡수하여 결성되었으며, 가다 유키코 (당시 시가현 지사)가 대표를 맡았다. 창당 당시 비와호 선언을 당 방침으로 발표했다.창당 시점의 소속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이 8명이었다.[8]
- 국민의 생활이 제일 (2012년 7월 민주당 탈당한 오자와 이치로 그룹)
- 감세 일본·반 TPP·탈원전을 실현하는 당 (야마다 마사히코, 가와무라 다카시 공동 대표)
- 아베 도모코 (사회민주당 탈당)
- 미도리의 바람 (일부 의원 이적)
가다 유키코 대표와 대표 대행인 이다 테츠야는 국회의원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국민의 생활이 제일 사무국에 당 본부 사무를 위임했다. 주요 직책에는 국민의 생활이 제일 출신으로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대상이 아닌 참의원 의원들이 임명되었다.[9]
이후 임원 인사에서 이다 테츠야는 다시 "대표 대행" 직함을 맡게 되었고, 야마다 마사히코, 아베 토모코도 "부대표"로 추가되었다. 이 결과, 최고 2인이 모두 비 국회의원, 최고 5인 중 과반수인 3명이 여성이라는 구성이 되었다.
창당 당시 일본미래당에 합류한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다.
정당 | 구분 | 의원명 | 지역구 | 비고 |
---|---|---|---|---|
국민의 생활이 제일 | 중의원 의원 | 오자와 이치로 | 이와테 4구 | 중의원 14선 |
야마오카 켄지 | 토치기 4구 | 중의원 5선, 참의원 2선 | ||
아즈마 쇼조 | 도쿄 15구 | 중의원 5선 | ||
마키 요시오 | 아이치 4구 | 중의원 4선 | ||
코미야마 야스코 | 사이타마 7구 | 중의원 3선 | ||
우치야마 아키라 | 지바 7구 | 중의원 3선 | ||
히타카 고 | 가나가와 18구 | 중의원 3선 | ||
스즈키 카츠마사 | 아이치 14구 | 중의원 3선 | ||
아오키 아이 | 도쿄 12구 | 중의원 2선, 참의원 1선 | ||
요코야마 홋토 | 아오모리 1구 | 중의원 2선 | ||
오타 카즈미 | 후쿠시마 2구 | 중의원 2선 | ||
마츠자키 테츠히사 | 사이타마 10구 | 중의원 2선 | ||
오카지마 카즈마사 | 지바 3구 | 중의원 2선 | ||
나카가와 오사무 | 오사카 18구 | 중의원 2선 | ||
고가 타카아키 | 후쿠오카 4구 | 중의원 2선 | ||
와타나베 코이치로 | 비례 도쿄 | 중의원 2선 | ||
토요타 준타로 | 비례 킨키 | 중의원 2선 | ||
하타 코지 | 이와테 2구 | 중의원 1선 | ||
사이토 야스노리 | 미야기 2구 | 중의원 1선 | ||
쿄노 키미코 | 후쿠시마 3구 | 중의원 1선 | ||
이시하라 요조로 | 후쿠시마 1구 | 중의원 1선 | ||
쿠로다 유 | 지바 2구 | 중의원 1선 | ||
오카모토 에이코 | 가나가와 3구 | 중의원 1선 | ||
키우치 타카타네 | 도쿄 9구 | 중의원 1선 | ||
키무라 고시 | 도쿄 14구 | 중의원 1선 | ||
가토 마나부 | 나가노 5구 | 중의원 1선 | ||
하기와라 히토시 | 오사카 2구 | 중의원 1선 | ||
무라카미 후미요시 | 오사카 6구 | 중의원 1선 | ||
오타니 케이 | 오사카 15구 | 중의원 1선 | ||
후쿠시마 켄이치로 | 구마모토 2구 | 중의원 1선 | ||
타마키 데니 | 오키나와 3구 | 중의원 1선 | ||
나카노와타 노리코 | 비례 토호쿠 | 중의원 1선 (아오모리 2구) | ||
미야케 유키코 | 비례 키타칸토 | 중의원 1선 (군마 4구) | ||
카네코 켄이치 | 비례 미나미칸토 | 중의원 1선 (지바 11구) | ||
나카고 아츠시 | 비례 미나미칸토 | 중의원 1선 (지바 12구) | ||
스가와라 히로시 | 비례 주고쿠 | 중의원 1선 (히로시마 1구) | ||
키쿠치 초에몬 | 비례 토호쿠 | 중의원 1선 | ||
타카마츠 카즈오 | 비례 토호쿠 | 중의원 1선 | ||
이시이 아키라 | 비례 키타칸토 | 중의원 1선 | ||
아이하라 후미노 | 비례 미나미칸토 | 중의원 1선 | ||
카와시마 토모타로 | 비례 도쿄 | 중의원 1선 | ||
카사하라 타미코 | 비례 토카이 | 중의원 1선 | ||
미와 노부아키 | 비례 토카이 | 중의원 1선 | ||
코바야시 마사에 | 비례 토카이 | 중의원 1선 | ||
오야마 마사히로 | 비례 토카이 | 중의원 1선 | ||
쿠마가이 사다토시 | 비례 킨키 | 중의원 1선 | ||
와타나베 요시히코 | 비례 킨키 | 중의원 1선 | ||
참의원 의원 | 모리 히로코 | 참의원 니가타 | 참의원 2선 (2007년 당선) | |
히로노 마사시 | 비례구 | 참의원 2선 (2007년 당선) | ||
사토 코지 | 참의원 히로시마 | 참의원 1선, 중의원 4선 (2007년 당선) | ||
나카무라 테츠지 | 참의원 나라 | 참의원 1선, 중의원 2선 (2007년 당선, 2012년 12월 4일 퇴직) | ||
히메이 유미코 | 참의원 오카야마 | 참의원 1선 (2007년 당선) | ||
토모치카 사토시 | 참의원 에히메 | 참의원 1선 (2007년 당선) | ||
토야마 사이 | 참의원 미야자키 | 참의원 1선 (2007년 당선) | ||
타니 료코 | 비례구 | 참의원 1선 (2010년 당선) | ||
감세 일본·반 TPP·탈원전을 실현하는 당 | 중의원 의원 | 카메이 시즈카 | 히로시마 6구 | 중의원 12선 |
야마다 마사히코 | 나가사키 3구 | 중의원 5선 | ||
코바야시 오키 | 비례 도쿄 | 중의원 5선 | ||
코이즈미 토시아키 | 이바라키 3구 | 중의원 3선 | ||
히라야마 야스오 | 도쿄 13구 | 중의원 1선 | ||
사토 유코 | 아이치 1구 | 중의원 1선 | ||
쿠마다 아츠시 | 오사카 1구 | 중의원 1선 | ||
하시모토 벤 | 비례 토카이 | 중의원 1선 (기후 2구) | ||
미즈노 토모히코 | 비례 미나미칸토 | 중의원 1선 | ||
미도리의 바람 | 중의원 의원 | 하츠시카 아키히로 | 도쿄 16구 | 중의원 1선 |
후쿠다 에리코 | 나가사키 2구 | 중의원 1선 | ||
야마자키 마코토 | 비례 미나미칸토 | 중의원 1선 (가나가와 8구) | ||
기타 정당 | 중의원 의원 | 아베 토모코 | 가나가와 12구 | 중의원 4선 (사회민주당 출신) |
츠지 메구미 | 오사카 17구 | 중의원 2선 (민주당 출신) |
2. 3. 총선거 패배와 당내 갈등
2012년 총선에서 일본미래당은 중의원 의석이 61석에서 9석으로 대폭 감소하는 참패를 겪었다.[2] 소선거구에서는 오자와 이치로와 카메이 시즈카만이 당선되었고, 비례대표에서도 7석을 얻는 데 그쳤다.[2] 이로 인해 당 대표 대행이었던 이이다 데쓰야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낙선했다.이러한 참패는 난립하는 제3세력 속에서 유권자들에게 명확한 인상을 주지 못하고, 민주당 등과의 표 분산으로 이어진 결과로 분석된다. 특히 오자와 걸스로 불린 여성 후보들을 집중 공천한 미나미칸토 블록과, 감세 일본과의 합당으로 기대를 모았던 도카이 블록에서조차 소선거구 당선자를 내지 못했으며, 많은 후보들이 공탁금을 몰수당했다.
선거 후, 당내에서는 가다 유키코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 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가다 대표는 공동 대표에 아베 토모코, 간사장에 스즈키 카츠마사를 임명하고, 낙선한 이이다 데쓰야를 대표 대행으로 유임시키려는 인사를 추진했으나,[32][33] 오자와 계파는 오자와 이치로 또는 그와 가까운 인물을 공동 대표로 요구하며 대립했다.[35]
한편, 시가현 의회는 가다 유키코가 현 지사와 당 대표를 겸직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둘 중 하나의 직책을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34] 이러한 압박 속에서 가다는 당 대표직 사임을 결정하게 된다.[3]
결국 당내 갈등은 봉합되지 못하고, 2012년 12월 28일 오자와 계파는 일본미래당을 탈당하여 생활의 당을 창당했다.[2] 가다 유키코 등은 동명의 정치 단체를 결성했지만, 이는 사실상 미도리의 바람에 흡수 합병되어 소멸되었다.
2. 4. 분당과 해산
2012년 총선에서 제3당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중의원에서 9석을 얻는 데 그치며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2] 오자와 이치로의 영향력으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오자와 그룹은 일본미래당에서 분리되어 생활의 당을 결성했다.[2]아베 토모코는 유일하게 일본미래당에 남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은 국회 내 정당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2] 시가현 의회는 가다 유키코 지사에게 지사와 당 대표 겸직을 중단할 것을 결의했고, 가다는 2013년 1월 4일 당 대표직에서 사임했다.[3]
이후 일본미래당의 잔여 세력은 해산되었고, 자산은 녹색 바람으로 흡수되었다.[4]
오자와 이치로 계열은 당명을 "생활의 당"으로 개칭, 이후 "자유당"으로 변경하며 법규상 정당의 계보를 이어갔다.[2] 그러나, 이 과정은 "오자와 일파에 의한 정당 강탈"로 간주되기도 했다.[2]
분열 후, 가다 유키코 등은 당내 좌파 그룹과 함께 동명의 정치 단체를 결성했지만, 2014년에 미도리의 바람에 사실상 흡수 합병되어 소멸되었다.[2] 법적인 후계 정당인 자유당도 2019년에 국민민주당으로 흡수 합병]]되어, 일본미래당은 완전히 소멸되었다.[2]
3. 이념 및 정책
일본미래당은 '''비와코 선언'''을 통해 6가지 기본 정책을 제시하고,[42][43] 이후 '''미래를 향한 약속'''에서 이를 구체화했다.[44]
가다 대표는 스웨덴 수준의 여성 경제활동 참여를 통해 경제 성장과 생활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으며, 환경, 관광, 건강 분야를 중점 분야로 제시했다.[50] 또한, 탈원전과 여성·아동 정책을 당 대표 책임 하에 추가했다고 밝혔다.[9]
그러나 당 공천을 받은 나카노와타 쇼코는 과거 민주당 의원 시절 도호쿠 전력 히가시도리 원자력 발전소 조기 가동을 요구하는 등 당의 탈원전 정책과 배치되는 행보를 보였다.[51][52] 마이니치 신문은 나카노와타 쇼코가 오마 원전 건설 및 핵연료 사이클 추진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53]
3. 1. 비와코 선언
'''비와코 선언'''은 일본미래당이 제시한 6가지 기본 정책이다.[42][43]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 무역을 위해 자유 무역 협정(FTA) 및 경제 연계 협정(EPA)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TPP에는 반대한다.
- 식량 안보 관점에서 식량 자급률 50%를 목표로 한다.
- 동아시아 외교를 중시하고, 아시아의 평화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
- 안전 보장 기본법을 제정하고, 국제 연합 평화 유지 활동(PKO) 참여를 추진한다.
- 대규모 재해나 테러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일본판 NSC를 창설한다.
- 다양한 자원 외교를 통해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를 도모한다.
- "납치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국제적인 아동 유괴의 민사적 측면에 관한 협약 (헤이그 협약)을 조기에 비준하는 동시에, 국내의 아이 유괴 행위를 금지한다.
이후, '''미래를 향한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비와코 선언"을 상세화·구체화한 정책을 발표했다.[44]
"비와코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저명인사들이 찬동했다.[49]
가다 대표는 "전원 참여형의 고용에 의한 경제 성장과 생활의 안정을 목표로 합니다. 여성이 스웨덴 수준이 되면 길이 열립니다. 환경, 관광, 건강의 3가지 분야가 중점이 됩니다. 더블 인컴, 3명의 아이"라고 말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을 중시하는 자세를 보였다.[50] 또한, 기자단에게 "생활 정책에는 전체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거기에 탈원전과 여성·어린이 정책을 제 당 대표의 책임으로 더했다"며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9]
하지만, 당의 공천을 받은 나카노와타 쇼코는 민주당 중의원 의원 시절 도호쿠 전력의 히가시도리 원자력 발전소 조기 가동 등을 요구했던 과거가 있어,[51] 당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52] 마이니치 신문은 "'22년의 원전 제로가 공약이지만, 대체 에너지 제시가 전제다. 안이한 폐지론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라며 오마 원전 건설 및 핵연료 사이클 추진을 외쳤다"고 보도했다.[53]
3. 2. 주요 정책
일본미래당은 2012년 11월 27일, '비와코 선언'을 통해 6가지 기본 정책을 제시했다.[42][43] 이후, '미래를 향한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비와코 선언을 구체화한 정책들을 발표했다.[44]- 탈원전 정책:
- 도쿄전력 파산 처리 및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수습과 피폭 방호를 국가가 직접 관리.[45]
- 전기 요금 인상분은 국채 형태로 전력 회사에 지급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보급과 3년 내 발송전 분리를 통해 얻는 수익으로 상환.[46]
- 오이 발전소 가동 중지, 사용 후 핵연료재처리 공장 및 몬주 즉시 폐지.[47]
- 발송전 분리 등 전력 시스템 개혁으로 공정한 경쟁 촉진.
-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 에너지 보급 확대로 석유, 석탄 의존도를 줄이고, 지역 고용 및 경제 활성화.
- 여성·아동 정책:
- 중학교 졸업까지 자녀에게 연간 31만 2천 엔(월 2만 6천 엔)의 수당 지급 (일부는 '육아 응원권').[48]
- 결혼, 출산이 여성 경력에 불리하지 않은 사회 조성.
- 학대, 육아 방임 방지를 위한 부모 육아 환경 개선.
- 이혼, 별거 시 양부모 공동 양육 계획 작성 의무화.
- 가정, 학교, 지역사회가 함께 '육아'와 '아이 성장'을 응원하는 사회 조성.
-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 유지.
-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한 초·중학생 '마음 교육' 실시.
- 가정 폭력 형사 처벌 법 개정.
- 생활 안정 정책:
- 워킹 셰어링 촉진으로 가정과 일 양립, 완전 고용 실현.
- 바이오매스 자원 활용, 육아·의료·복지·교육 등 환경 배려형 산업 진흥, 개별 소득 보상으로 농림어업 활성화 및 고용 창출.
- 젊은 세대 인재 육성 및 경력 형성 촉진.
-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촉진.
- 최저 보장 연금 및 소득 비례 연금 구축, 연금 제도 일원화.
- 지역 포괄 케어 및 재택 간호 지원 체제 강화, 개호 제도 확충.
- 국민 개보험 유지, 의료 보험 제도 일원화.
- 후기 고령자 의료 제도 폐지.
- 탈증세 정책:
- 소비 증세법 동결.
- 특별 회계 전면 재검토 등 정치 개혁, 행정 재정 개혁, 지역 주권 개혁으로 재원 마련.
- 현행 소비세 결함 시정.
- 각 지역 요구에 맞는 재정 지원 제도로 동일본 대지진 부흥 가속화.
- 관료주의 극복 정책:
- 정치 주도를 위한 공무원 제도 개혁.
- 낙하산 인사 금지, 정부 관계 법인 폐지로 낭비와 이권 근절.
- 국가 보조금 및 정책 경비는 원칙적으로 지방에 자주 재원으로 교부.
- 국가 출장 기관을 도도부현 광역 연합으로 이관.
- 사법 관료에 의한 국민 권리 침해 중단 조치.
- 국회에 '행정·사법 고충 처리 제3자 위원회' 설치.
- 외교 정책:
- 자유 무역을 위한 자유 무역 협정(FTA) 및 경제 연계 협정(EPA) 추진, TPP 반대.
- 식량 안보를 위한 식량 자급률 50% 목표.
- 동아시아 외교 중시, 아시아 평화 조정 기능 수행.
- 안전 보장 기본법 제정, 국제 연합 평화 유지 활동(PKO) 참여 추진.
- 대규모 재해, 테러 대응 일본판 NSC 창설.
- 자원 외교를 통한 안정적 에너지 확보.
- 국제적인 아동 유괴의 민사적 측면에 관한 협약 조기 비준, 국내 아이 유괴 금지.
가다 유키코 대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중시하며, 스웨덴 수준의 여성 경제활동 참여를 통해 경제 성장과 생활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50] 또한, 탈원전 및 여성·아동 정책을 추가한 배경을 설명했다.[9]
하지만, 당 공천을 받은 나카노와타 쇼코는 과거 민주당 중의원 의원 시절 도호쿠 전력 히가시도리 원자력 발전소 조기 가동 등을 요구한 전력이 있어, 당의 탈원전 정책과 배치되는 행보를 보였다.[51][52][53]
4. 조직 및 직책
2012년 12월 1일부터[54] 12월 27일까지 존속했던 일본미래당의 집행부이다.
4. 1. 역대 대표
대수 | 이름 | 취임일 | 퇴임일 | |
---|---|---|---|---|
초대 | ![]() | 가다 유키코 | 2012년 11월 28일 | 2012년 12월 27일 |
2 | ![]() | 아베 토모코 | 2013년 1월 4일 | 2013년 5월 17일 |
4. 2. 역대 집행부
아베 토모코모리 유코
사토 고지
다니 료코
히로노 마코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