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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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좌익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희생시키면서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일부 좌파 및 운동가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와 결합한 파시즘뿐만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적 파시즘도 존재하며, 국가와 이념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좌익 파시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으며, 특정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시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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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 파시즘 | |
|---|---|
| 좌익 파시즘 | |
| 역사 | |
| 주요 사건 | 장검의 밤 |
| 핵심 요소 | |
| 정치 이념 | 개인 숭배 국가주의 군국주의 국수주의 권위주의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일당제 전체주의 제3의 위치 직접 행동 집산주의 폐쇄주의 |
| 영향 | |
| 영향 받은 이념 | 나치즘 생디칼리즘 자코뱅주의 파시즘 |
| 관련 조직 | |
| 정당/단체 | 민족 볼셰비키당 흑색전선 |
| 분파 | |
| 주요 분파 | 슈트라서주의 국민볼셰비즘 |
| 인물 | |
| 주요 인물 | 에른스트 니키쉬 알렉산드르 두긴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에른스트 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
2. 기원
좌익 파시즘에 대한 비판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자유나 권리도 희생할 수 있다는 일부 좌파 및 운동가들의 주장에 대한 반발로서 처음 나타났다.[2]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제자 쥘 베른은 사회주의 혁명이론의 폭력성을 발견하고 민주적인 방법 또는 의회로의 진출을 통한 사회주의 이념 실현을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가 위험사상으로 분류되어 그의 주장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좌파적 파시즘의 지적은 1951년 이전에도 여러 번 지적된 바 있다. 영국에서는 2차대전 직후 일부 좌파들은 파시즘을 신봉하였으나, 히틀러 등의 패망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40년은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한 거국 내각을 표방함에 따라, 일부 좌파가 신봉했던 파시즘이 독일과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영국에서도 하나의 이념으로 민주주의와 대적할 수 있었던 해였다. 훗날 마이클 푸트는 "1940년은 우파에게 징발당한 대단히 상징적인 해"라고 말했다.[2]
1951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회주의 학자와 정치인들의 회의가 열렸고, 이때 일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좌익 파시즘을 배격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를 프랑크푸르트 선언, 다른 이름으로 민주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른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자유세계 30여개국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되면서 확산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제기된 핵심적인 내용은 쥘 베른의 의회진출론 외에도, 파시즘에는 자본주의 이념과 결합한 파시즘도 있지만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적 파시즘도 존재하며, 국가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도 폭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내에서의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하며 사회주의자는 극우 파시즘 외에도 극좌 파시즘 역시 반대,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 사회주의자를 독재를 옹호하는 친독재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 폭력혁명론자와 의회에 참여하고 투표와 선거를 통한 변화를 추구하거나 독재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 반독재 좌파,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로 구분짓기 시작했다.
2. 1. 초기 논의
2. 2. 프랑크푸르트 선언 (1951)
1951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사회주의 학자와 정치인들의 회의에서 좌익 파시즘을 배격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를 프랑크푸르트 선언(민주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른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자본주의와 결합한 파시즘뿐만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적 파시즘도 존재하며, 국가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도 폭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민주주의 정치 체제 내에서의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하며, 사회주의자는 극우 파시즘 외에도 극좌 파시즘 역시 반대,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선언을 계기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은 독재를 옹호하는 친독재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폭력혁명론자와, 의회 참여 및 독재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반독재 좌파/민주적 사회주의자들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3. 경과
3. 1.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좌익 파시즘과 민주적 좌익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시험대에 올랐다.[3] 프랑스 공산당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의 선두에 섰고,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나,[3]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쇠퇴했다. 프랑스 사회당은 소련 전체주의, 처이발상 체제, 마오쩌둥 체제, 호치민 체제를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에서 탈퇴하여 1969년에 창당되었고, 1981년 미테랑 대통령 당선으로 집권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대체했다.[3]1981년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프랑스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책에서 좌파 내부에도 파시스트들이 있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3] 그는 비시 체제와 대독 협력을 '프랑스 색깔을 한 파시즘'이자 프랑스 정치문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3] 또한, 프랑스 공산당, <에스프리>, <르몽드> 등 극좌와 거리를 둔 기관들 내부에도 파시스트들이 숨어있다고 주장했다.[3][4] 조르주 마르셰, 위베르 뵈브 메리, 에마뉘엘 무니에, 30년대의 '계획(경제)주의자들', 샤를르 페기, 'CERES의 신사회주의자들' 등이 '파시스트이며, 파시스트였으며, 앞으로도 파시스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4] 이러한 주장에 대해 좌파 학자들은 앙리 레비의 '얄팍한 역사적 지식, 혼합, 그리고 조잡한 삼단논법'을 비판했다.[3]
3. 2. 독일
1960년대 중반 독일의 사상가 겸 철학자,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좌우 이념에 상관 없이 전체주의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5]1971년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1960년대 말부터 격렬해진 서독 내 학생 운동 세력과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그는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과격 시위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보고 좌익 파시즘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이라 비판하고, 학생운동을 극좌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하여 극렬 학생운동권들의 적이 되었다.[1]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며 더 이상 대학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다.[1] 그때부터 연구소에서 10여 년간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이후 오랜 세월의 사색과 탐구를 거쳐 탄생했다.[6] 하버마스에 대한 극우 진영의 공격과는 별도로 좌익, 학생운동권 진영의 비판 문제는 곧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극좌, 운동 진영의 편협성이 지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무렵, 유사한 논란이 제기되어 좌파적 파시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3. 3.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되었다.[7] 초기 파시스트들은 과격한 퇴역군인,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 젊은 반(反)부르주아 불만 세력으로 민족의 영광과 사회 변화를 함께 꿈꿨다.[7] 이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실제로 초기 이탈리아 파시스트 중 많은 사람들이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좌익 출신이었다.[7]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실패한 좌익 내셔널리즘 파시즘을 고수하는 대신, 자신의 운동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하였다.[8] 1920년에서 1922년 사이 그의 연설과 강령에서 무솔리니가 점차 우파 쪽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8] 초기 파시즘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상은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였다.[8] 1921년 강령에서 파시스트당은 국제연맹을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지중해 라틴 문명의 보루'이자 이탈리아적인 것(Italianita)의 보루로서 이탈리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지 개척과 대규모 상비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8]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옛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주장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중의 지지를 얻어 집권당이 되었다.
4.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문광훈은 삶의 영역을 계몽화하는 일은 사회 전체 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이때 특정 영역이 독점되거나 특권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특권화가 횡행하면 '극좌 파시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9]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극단주의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좌우 이념을 막론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시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 따라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는 광복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극단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해야 한다.
참조
[1]
서적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2]
서적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앤북스
[3]
서적
비시 신드롬
휴머니스트
2006
[4]
서적
비시 신드롬
휴머니스트
2006
[5]
서적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6]
서적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7]
서적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도서출판 교양인
[8]
서적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도서출판 교양인
[9]
서적
아도르노와 김우창의 예술문화론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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