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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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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영편》은 정동유가 저술한 책으로, 상권과 하권으로 구성되어 총 202개의 항목을 담고 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 증거, 견해, 인용, 사례 분석 등을 담고 있으며, 지리, 건축, 역사, 훈민정음, 어휘, 사회 제도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다. 《주영편》은 민담, 사회 민속, 자연 현상 등에 대한 고증과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조선의 기술 수준과 사회 문제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현재 8종의 필사본이 존재하며, 번역 및 평가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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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편
주영편
한글주영편
한자晝永編
히라가나チュウエイヘン
가타카나チュヨンピョン
로마자 표기Juyeongpyeon
매큔-라이샤워 표기Chuyŏngp'yŏn
관련 정보
정동유정동유(鄭東愈)

2. 내용

《주영편》은 "낮이 긴 여름철"이라는 뜻으로, 정동유는 서문에서 여름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1805년(을축년) 여름에 쓰기 시작해 그해 동짓달(12월)에 상권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806년(병인년)에 하권을 완성했다.[1]

《주영편》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상권과 하권 총 202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기 또는 차기라는 글쓰기 방법을 통해 저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하고, 증거 제시, 견해, 인용, 사례 분석 등을 제시하였다.[1]

한국어학에서 《주영편》과 정동유는 이광려를 비롯한 소론 선배들의 연구를 이어받고, 아들 우용과 윤용, 류희를 통해 근대 국어학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고리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1]

2. 1. 상권

《주영편》 상권에서는 지리, 건축, 역법, 세시풍속, 민속, 외국, 표류, 청나라, 고려, 사물의 기원, 제도, 역사, 문헌, 금석문 등을 다루고 있다. 상권은 100칙(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기 또는 차기라는 글쓰기 방법을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저자 본인의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하고, 증거를 제시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인용과 사례를 통해 분석하였다.[1]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여러 가지 사회 현상과 속설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에 대해, 눈이 세 번 내리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눈이 녹았다 쌓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농사에서 눈이 중요한 이유는 녹은 눈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메뚜기 유충을 제거하는 데 있으며, 겨울 눈이 쌓여서 얼어붙는 것보다 눈 녹은 물이 땅으로 흘러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1]

또한 석가탄신일이 4월 8일이라는 통설에 대해 《요사》(遼史), 《금사》(金史),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근거로 2월 8일이 맞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 말 정몽주의 혈흔이 선죽교에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선죽교 혈흔 자체가 사물의 이치에 맞지 않고 17세기 이전 문헌에 관련 기록이 없음을 들어 근래에 만들어진 전설이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1]

사회 분야에서는 조선 건축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규모가 작은 이유를 분석하고, 노비제도가 조선에서만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양반들이 자신만 이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형성하고 유지시킨 것"이라고 비판했다. 성리학양명학의 분쟁에 대해서는 조선과 중국 제지공의 일화를 들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을 모르고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1]

2. 2. 하권

훈민정음의 특징과 가치를 분석한 다음 신숙주와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개정하고 오류를 일으킨 점을 지적하거나 '치다', '늦다' 등 한국어 어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고, 한국에만 존재하는 고유 한자는 물론 영어 알파벳, 표류인으로부터 수집한 포르투갈어 어휘 등의 언어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1]

《묵수당집》(默水堂集)중국어에 실린 글을 보면 "서양의 자음은 24개 자모가 있어 그 자모를 배합해 글자를 이루고 말소리를 이루며, 글자를 합해 구절을 이루고 뜻을 이룬다"라는 중국인의 설명이 있었다. 정동유는 훈민정음과 비슷한 부류로 보이지만, 중성으로 자모를 만들지 않은 점만은 분명하다고 보았다. 그는 무릇 중성으로 만든 자모는 상세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했으며, 서양인들은 이런 일들을 매우 잘 알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사람들이 쉽고 간편하게 이해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1]

1801년 8월에 제주도 당포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의 선원들이 쓰던 말을 전해 듣고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한 자가 만약 여러 해 동안 더 살아 있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과 말이 통하게 될 것이다. 언어가 통하기만 하면 아마도 이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보이면서 주영편 본문에 그 언어를 언문(한글)로 적어두었는데, 당시 정동유는 안남어로 알았으나 실제로는 포르투갈어였다. 표기의 오류나 작은 개념 차이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하늘을 '실우', 임금을 '러이', 산을 '몬떼', 깃발을 '만데라'라고 부른 것 등 현대 포르투갈어와 유사한 단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1]

《주영편》은 어학 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 사회 민속, 제도와 문물, 역사와 지리 등에 대한 고증도 시도했다.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에서 눈이 세 번 온다는 말은 말 그대로 눈이 내리는 현상이 세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녹았다 쌓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농사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녹은 눈이) 토양을 적셔서 기름지게 하고 메뚜기 유충을 없애주는 데 있으며, 눈이 세 번 오는 현상에서도 겨울 눈이 쌓여서 막히고 얼어붙어서 추운 것은 좋지 않고 눈 녹은 물이 땅으로 흘러들어야 귀한 것이라는 과학적인 유추를 들어 설명했다.[1]

석가탄신일이 4월 8일이라는 통설에 대해 《요사》(遼史), 《금사》(金史), 《고려사》(高麗史)에서 2월 8일에 불탄절 행사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들어 2월 8일이 맞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정몽주의 혈흔이 선죽교에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선죽교의 혈흔 자체가 사물의 이치상 맞지 않고 17세기 이전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이 없음을 들어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전설이 와전된 것이 아니냐는 견해를 피력했다. 사회 분야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선 건축이 규모가 작은 이유를 분석하려 시도했으며, 노비제도가 조선에서만 사라지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양반들이 자신만 이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형성하고 유지시킨 것"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성리학양명학의 분쟁에 대해서는 조선과 중국 제지공의 일화를 들어 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 줄도 모르고 서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

2. 3. 언어 및 문자 연구

《주영편》 하권에서는 훈민정음의 특징과 가치를 분석하고, 신숙주와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개정하면서 오류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또한 '치다', '늦다'와 같은 한국어 어휘를 분석하고, 한국 고유 한자, 영어 알파벳, 포르투갈 어휘 등 다양한 언어 현상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1]

默水堂集중국어에 실린 글에는 "서양의 자음은 24개 자모가 있어 그 자모를 배합해 글자를 이루고 말소리를 이루며, 글자를 합해 구절을 이루고 뜻을 이룬다"라는 중국인의 설명이 있었다. 정동유는 이를 훈민정음과 비슷하다고 보았지만, 중성으로 자모를 만들지 않은 점은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중성으로 만든 자모는 상세할수록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쉽고 간편하게 이해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

1801년 제주도 당포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 선원들의 말을 듣고, 정동유는 그들의 언어를 언문(한글)으로 적어두었다. 당시에는 안남어로 알았으나 실제로는 포르투갈어였다. 표기에 오류가 있긴 하지만, 하늘을 '실우', 임금을 '러이', 산을 '몬떼', 깃발을 '만데라'라고 부르는 등 현대 포르투갈어와 유사한 단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1]

2. 4. 사회 및 문화 비판

《주영편》은 어학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 사회 민속, 제도와 문물, 역사와 지리 등에 대한 고증도 시도했다.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에 대해 눈이 녹았다 쌓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눈이 녹은 물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메뚜기 유충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농업 지식임을 보여준다.[2]

석가탄신일이 4월 8일이라는 통설에 대해 《요사》, 《금사》, 《고려사》의 기록을 들어 2월 8일이 맞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려정몽주의 혈흔이 선죽교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는 17세기 이전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조선 건축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규모가 작은 이유를 분석하고, 노비 제도가 조선에서만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양반들이 자신만 이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형성하고 유지시킨 것"이라고 비판했다.[2] 성리학양명학의 분쟁에 대해서는 조선과 중국 제지공의 일화를 들어 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주영편》은 조선의 낮은 기술 수준을 한탄했다. 바늘이 없어 중국 바늘이 없으면 옷도 꿰맬 수 없고, 는 있는데 바퀴는 없다고 지적했다.[2] 후루타 히로시는 조선중국이나 일본에도 시대와는 달리 혁신을 싫어하고, 저수준의 실물 경제를 500년 동안이나 지속했다고 지적하며, 《주영편》의 기록을 언급했다. 그는 조선에는 굽은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술통도 없었고, 옹기는 무거워 술통을 쓸 수 없으니 에 넣어 지게로 운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상점이 없었고, 어용 상인의 상점만이 존재했으며, 일반 민중은 시장에서 물건을 샀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안료가 없어 홍색 그림의 항아리가 없고, 민중의 의복이 흰색인 것도 안료를 자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3][4]

2. 5. 민속 및 자연 현상

《주영편》에서는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에 대해, 눈이 세 번 오는 것은 단순히 눈이 내리는 현상이 세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녹았다 쌓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 눈이 농사에 중요한 이유는 녹은 물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메뚜기 유충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겨울에 눈이 쌓여 얼어붙는 것보다 눈 녹은 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했다.[1]

또한 석가탄신일이 4월 8일이라는 통설에 대해 《요사》(遼史), 《금사》(金史), 《고려사》(高麗史)에서 2월 8일에 불탄절 행사를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2월 8일이 맞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정몽주의 혈흔이 선죽교(善竹橋)에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혈흔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고 17세기 이전 문헌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근래에 만들어진 전설이 와전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1]

3. 사본 및 번역

《주영편》은 현재까지 8종의 필사본이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1종,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와 규장각에 모두 3종(중앙도서관 1종, 규장각 2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1종,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2종, 일본 도쿄대학 아가와 문고(阿川文庫) 소장본 1종이 있다. 이 가운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에 소장된 것(가람본)이 가장 널리 알려진 사본이다.

서울대학교에는 가람본 외에도 규장각에 소장된 일사본과 4권본이 있고, 이 중 가람문고본과 규장각 일사본, 고려대, 연세대 한창수본은 상권(84장)과 하권(84장) 전체 168장의 장수나 각 1면의 10개 행, 1행의 21개 자수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이 중 서울대 4권본과 연세대, 고려대본은 모두 하권 61칙과 62칙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들은 동일한 형식으로써 같은 계열의 사본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어느 것이 선행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필사 시기가 "단기 4283년(1950년) 1월일 등사"로 되어 있으며, 규장각 소장 4권본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으로 현대에 들어와 필사한 책인 데다 4권본보다 오류가 매우 심하다. 이들 사본 가운데 하권 저작명 하단에 '병인록'이라고 기재된 것은 규장각 일사본과 고려대, 연세대본 그리고 아가와문고본이다.

1971년 서울대학교 고전간행회에서 가람본을 토대로 고병익의 해제를 달아 '서울대학교고전총서'로 영인 간행하였으며, 이를 저본으로 남만성이 번역하였다. 1923년 일본인 시미즈 겐키치가 상권 일부를 초역, 《숙향전》과 함께 《선만총서》(鮮滿叢書) 제8권으로 자유토구사(자유토구사)에서 간행하였고, 1936년 일본 도쿄 조선문제연구소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 《아언각비》(雅言覺非), 《해유록》(海遊錄)과 함께 《주영편》의 상하권에서 94칙을 뽑아 번역 간행하였는데, 《주영편》을 "조선의 미신을 타파하고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 책"이라며 번역 동기를 밝혔다.

양명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1931년 1월 《동아일보》에 실은 조선고서해제의 하나로써 당시 자신이 소장하고 있었던 《주영편》의 의의를 밝히는 글을 썼다. 그는 《주영편》의 특징을 가학의 연원과 양명학에 기반을 둔 시각, 국고(國故)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훈민정음과 민생에 집중한 사유, 방만하지 않고 간결한 서술 태도, 모방을 꺼리고 자기 본원에서 우러나온 학문 등으로 요약하며 "조선학의 핵심 저술"로 평가하였다.

1971년 남만성이 서울대학교 고전총서 영인본을 저본으로 번역, 을유문고 2책으로 출간하였는데, 주영편의 최초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었지만 이본을 교감하지 않고 난해한 부분은 제외한 채 번역했으며 참고할 주석도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2016년 한국의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안대회, 서한석 등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생들이 《주영편》을 번역 출간하였다.

4. 평가

후루타 히로시는 조선중국이나 일본에도 시대와는 달리 혁신을 싫어하고, 저수준의 실물 경제를 500년 동안이나 지속했다고 지적하며, 『주영편』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조선 중세 경제사 연구자에게 '말하기 어렵지만, 옛날 일본에서는 정체사관이라고 비판받았지만, 저는 오랫동안 느낀 바로는, 이조(李朝)가 잉카 제국과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더니,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3][4]

후루타 히로시는 이조(조선)가 평범한 중세가 아니라고 평가하며,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제시했다.[3][4]


  • 차가 없음: 굽은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바퀴가 없고, 나무를 구부릴 수 없어 술통도 없었다. 옹기는 무거웠고, 술통은 없어 에 넣어 지게로 운반했다. 왕조 궁궐에 지방의 꿀을 운반할 때도 네모난 말에 담아 등에 지고 운반하여 도착할 때는 반 정도 비는 상황이 발생했다.
  • 상점이 없음: 어용 상인의 상점이 한 곳에 모여 있었지만, 궁중 어용만 담당했다. 일반 민중은 시장에서 물건을 샀으며, 이는 북한과 똑같다. 붓집이나 놋쇠 식기 집 정도만 있었고, 모자 등은 땅에 펼쳐놓고 팔았다.
  • 안료가 없음: 홍색 그림의 항아리가 없고, 흐릿한 붉은색이 있는 정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흰색은 비애의 색'이라 했지만, 이는 가난의 비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코발트를 조금 발색할 수 있을 뿐, 옷도 민중은 전부 흰색이었다. 상류층은 중국에서 들여온 색깔 있는 옷을 입었고, 지방 농촌의 양반은 어용 염료상에게 옷을 염색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하층은 삼베면지의 흰색 옷을 강가에서 막대기로 두들겨 빨래했다.

참조

[1] 뉴스 정동유(鄭東愈)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2] 뉴스 韓国が重ねる歴史研究の「虚偽」自分たちが作った「韓国史」という偶像を崇め奉る韓国人 https://www.sankei.c[...] 2016-03-17
[3] 뉴스 増殖する韓国の「自尊史観」 http://www.sankei.co[...] 2008-12-17
[4] 뉴스 李朝=インカ帝国説 [[産業経済新聞社]] 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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