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쿠시 데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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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쿠시 데쓰야는 1935년 오이타현 히타시 출생으로, 아사히 신문 기자, 잡지 편집장, TBS 뉴스 앵커로 활동하며 일본 언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서 정치부 기자, 특파원을 거쳐 1984년부터 4년간 아사히 저널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TBS의 뉴스 프로그램 'NEWS23'의 앵커를 맡아 '다사 쟁론' 코너를 통해 시사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논평을 선보이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2007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 2008년 사망했으며, TV 저널리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기자 클럽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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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시 데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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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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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지쿠시 데쓰야 |
출생일 | 1935년 6월 23일 |
출생지 | 일본, 오이타현 히타시 |
사망일 | 2008년 11월 7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사인 | 폐암 |
국적 | 일본 |
직업 | 저널리스트 뉴스 캐스터 |
활동 기간 | 1959년 - 2008년 |
학력 | |
출신 학교 |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
경력 | |
직책 | 아사히 신문 기자 (1959년 - 1984년) "아사히 저널" 편집장 (1984년 - 1987년) 아사히 신문 편집위원 (뉴욕 주재, 1988년 - 1989년) TBS 텔레비전 『지쿠시 데쓰야 NEWS23』 캐스터 편집장 (1989년 10월 - 2008년 3월) 와세다 대학 대학원 공공경영연구과 전임 교수 리쓰메이칸 대학 객원 교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등 |
가족 | |
배우자 | 지쿠시 후사코 |
자녀 | 지쿠시 다쿠야 (장남) 지쿠시 유우나 (차녀) |
수상 | |
수상 내역 | 제21회 베스트 드레서 상 학술·문화 부문 (1992년) 제30회 갤럭시 상·텔레비전 부문 개인상 (1993년) 일본 기자 클럽상 (2008년) |
명예 | 히타시 명예 시민 (2006년) |
영향 | |
영향을 받은 사람 | 마루야마 마사오 |
2. 생애
지쿠시 데쓰야는 1989년 10월 TBS의 심야 뉴스 프로그램 '''NEWS23'''의 메인 앵커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NEWS 23》의 칼럼 코너 《다사 쟁론(多事争論일본어)》에서 명료한 논점을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다사 쟁론》에서 그는 독도 문제와 관련,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발언을 비판하고, 일본의 식민지배 등 역사 문제에 대해 피해국 입장에서 일본 우익·보수 세력을 비판하는 등 "시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전쟁 참가, 일본 사회 우경화, 북한 정책 등 굵직한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1993년 『주간 금요일』 창간에 참여하여 사망할 때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칼럼 "자아작고"를 연재했다.
1994년 오이타현 히타시의 시민 대학 "자유의 숲 대학" 학장을 맡아 2006년 폐교까지 역임했다. 같은 해 히타시 명예 시민 칭호를 받았다.
2004년 8월 6일 히로시마현 원폭 돔을 방문, 야마자키 리에코가 주재하는 원폭 돔 합작 회화의 회의 합작 그림에 "화평"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11]
와세다 대학 대학원 공공경영연구과 객원 교수, 리쓰메이칸 대학 객원 교수를 지냈으며, 2008년 일본기자클럽상을 수상했다.[12][13]
2008년 11월 11일, 추도 특별 프로그램 '지쿠시 씨가 남긴 것 - 암 투병 500일'이 생방송되었고, 이노우에 요스이가 마지막 뉴스를 라이브로 불렀다.
2013년 1월, BS-TBS에서 다큐멘터리 '지쿠시 테츠야 내일을 향한 전언 ~ '잔일록'을 따라가는 여행'이 방영되었다.[16]
카네히라 시게키는 고단샤의 PR지 '책' 2014년 2월호부터 '지쿠시 테츠야 'NEWS23'과 그 시대'를 연재했고, 2021년 11월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오이타현 히타시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4] 1935년(쇼와 10년) 오이타현히타군오노무라(현재: 히타시)에서 지쿠시 카즈오미와 후미코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시즈오카현립 누마즈히가시 고등학교, 도쿄 도립 코야마다이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교 제일 정치경제학부[5] 경제학과를 졸업했다.1959년에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동기로는 혼다 쇼이치, 구와타 타카시, 가미마에 준이치로, 시바타 테츠지, 다나카 유타카, 와다 슌, 아사이 야스노리, 타도코로 타케히코, 아라가키 케이 등이 있다. 같은 해 아사히 신문사의 입사 시험은 영어와 논문과 면접만 있었고, 일반 상식 등의 필기 시험은 없어, 사내에서 "상식 없는 (쇼와) 34년 조"라고 비꼬아졌다고 한다.[6] 신인 기자로서의 부임지는 우츠노미야, 이어서 모리오카였다. 지국에서 총 4년을 보내고, 정치부로 이동했다. 정치 기자로서의 시작은 내각총리대신・이케다 하야토 담당이었다.
정치부 기자 외에도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 미군 통치 아래에 있던 류큐(琉球列島米国民政府일본어) 특파원, 워싱턴 특파원, 외신부 차장 등을 지냈다. 1968년 5월부터 1970년까지, 미국 통치 하의 오키나와에 정치부의 "특파원"으로 부임하여, 반환 전의 오키나와를 정력적으로 취재했다.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오키나와에 마음을 기울였다. 1971년 7월부터 1974년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발단부터 종말까지 현지에서 취재한 유일한 일본인 기자라고 한다.[7]
외무대신이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미키 타케오와 무츠코 부인, 브레인이었던 히라사와 카즈시게와 쿠니히로 마사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1976년 1월부터 "아사히 저널" 부편집장을 맡았다. 1977년 6월, 외보부 차장. 1978년 4월부터 1982년 9월까지 텔레비 아사히 "일요 석간! 여기는 데스크"에 메인 캐스터로 출연하여, 프로그램으로서 제16회 갤럭시상을 수상(1979년)했다.
1983년 6월, 제1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즈음하여 무당파 시민 연합의 정견 방송에 출연,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4월부터 캐스터를 맡았던 텔레비 아사히 계열 『TV 스쿠프』도 하차했다.
1984년 1월부터 1987년 3월까지 "아사히 저널" 편집장을 역임한다. 1989년 뉴욕 주재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중, TBS로부터 제안을 받아 아사히 신문사를 퇴사했다.[8]
2. 2.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오이타현 히타시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1]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 미군 통치 아래에 있던 류큐(琉球列島米国民政府일본어) 특파원, 워싱턴 특파원, 외신부 차장 등을 지냈다.[1] 워싱턴 특파원 시절 닉슨 대통령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워터게이트 사건 등을 취재했고,[7] 정치부 기자 때는 자민당 온건파 의원들과 친분을 맺기도 하였다.1984년부터 1987년까지 아사히 신문이 발행하는 잡지인 아사히 저널의 편집장을 지냈고,[1] 1988년 뉴욕에 주재하면서 편집 위원으로 일했다.[8] 1989년 아사히 신문을 퇴직했다.[8]
2. 3. TBS 앵커 시절
1989년 10월 2일, 『지쿠시 데쓰야 NEWS23』이 방송을 시작했다. 1985년 10월에 시작한 TV 아사히 계열 『뉴스 스테이션』의 메인 캐스터이자 대학 후배인 쿠메 히로시와 함께 민영 방송 뉴스 캐스터의 얼굴로 널리 알려졌다. 쿠메 히로시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닛칸 스포츠의 기획으로 1991년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를 함께 관람했다[9]。 쿠메는 "지쿠시 씨는 전쟁의 역사를 새긴 오키나와와 히로시마에 마음을 쏟았고, 지방 구단, 시민 구단의 카프를 사랑했습니다. 지쿠시 씨는 '반 중앙', '반 권력'이라는 자신의 성격을 카프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9]。1992년, 제21회 베스트 드레서 상 학술·문화 부문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지쿠시 데쓰야 NEWS23』의 메인 캐스터로서의 업적에 대해 제30회 갤럭시상·TV 부문 개인상을 수상했다[10]。
1995년 10월 옴진리교와 관련된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니혼 TV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을 사전에 TBS의 담당 프로듀서들이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TBS는 니혼 TV의 보도 내용과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TBS의 와이드쇼 프로그램 담당 프로듀서가 1989년 방송 직전 옴진리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유출시켜 발각되기도 하는 등 문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파문이 일어났다. 이 일은 그 후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1989년 11월 4일에 발생)의 빌미를 제공하여 TBS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당시 이 사건을 속칭 '''TBS 비디오 사건'''이라고 칭했음). 이 문제에 관해 당시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NEWS23》에서 공개적으로 TBS의 내부 대응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고, 이듬해인 1996년 TBS의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이 잘못을 공식 인정한 1996년 3월 25일 《다사 쟁론》을 통해 그는 "TBS는 오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며, TBS는 잘못을 저질렀다. … 나는 오늘 오후에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마지막으로 그만두겠다"라는 발언을 하여 TBS 내부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다.[37]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룽지 중국 총리,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 등 일본을 방문한 외국 국가 원수들과 "일본 국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2000년 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 2008년 4월에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방문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의 직접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2007년 5월 14일에 방송된 《다사 쟁론》에서 "지난 주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검진 받았는데, 초기의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밝히는 등 스스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혔다. 병원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NEWS23》의 방송 출연을 중단했고, 같은 해 10월 8일 치료 후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 이후는 "스페셜 앵커"로서 수개월간 방송 활동을 했다.
지쿠시 데쓰야는 NEWS23 이후, TBS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어, 기본적으로 텔레비전 출연은 TBS 계열 방송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후지 TV의 『트리비아의 샘 〜훌륭한 쓸데없는 지식〜』에 VTR 출연하거나, 1년에 한 번 TV 아사히의 특집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기간 | 프로그램명 | 역할 | 비고 | |
---|---|---|---|---|
1989년 10월 | 2008년 3월 | 지쿠시 데쓰야 NEWS23 (TBS) | 메인 캐스터 | 프로그램 하차까지 3개월은 스페셜 앵커(특별 캐스터)로 부정기 출연 |
2. 4. 투병과 사망
2007년 5월 14일에 방송된 《다사쟁론(多事争論일본어)》에서 "지난 주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검진 받았는데, 초기의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밝히며 스스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했다.[37] 병원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NEWS23》의 방송 출연을 중단했고, 같은 해 10월 8일 치료 후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 이후 "스페셜 앵커"로서 수개월간 방송 활동을 했다. 2008년 11월 7일 오후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7]3. 언론 활동 및 평가
지쿠시 데쓰야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공공경영연구과 객원 교수(전임 교수) 및 리쓰메이칸 대학 객원 교수를 지냈으며, 2008년 일본 기자 클럽상을 받았다. 2007년 5월 14일, 《다사 쟁론》에서 폐암 초기 진단 사실을 밝혔고, 치료를 위해 방송 출연을 중단했다가 같은 해 10월 8일 복귀, 이후 "스페셜 앵커"로 활동하다 2008년 11월 7일 73세로 사망했다.
지쿠시는 신문, 잡지, 텔레비전 보도 현장에서 활동하며 발언하는 동시에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를 "뼈 속까지 리버럴리스트"라 칭했고, 그의 일관된 자세는 "좌표축"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는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음악, 영화, 연극, 문학, 미술, 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현장을 찾아 젊은이들을 격려했다.
2008년 일본 기자 클럽은 지쿠시에게 상을 수여하며 "아사히 신문 기자로서 30년간 쌓은 저널리스트 정신과 풍부한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 흐름이나 다수에 휩쓸리지 않는 안정적인 보도 스타일로 국내외 움직임을 정확히 전달하여 폭넓은 시청자와 뉴스원의 신뢰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날카로운 뉴스 감각과 적절한 아젠다 설정, 문화 활동 발굴 및 소개 등 텔레비전의 가능성에 도전하여 민영 텔레비전 보도의 사회적 역할 향상에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지쿠시의 부고에 다치바나 다카시는 "전후 일본이 낳은 최대의 저널리스트"라며 통곡했다. 혼다 야스하루는 "마이크 앞에서 절명할 정도의 기개로, 지금의 입지를 지켜달라"고 격려했고,[17] 지쿠시의 발언 책임 자세에 감동받아 "진짜 신문 기자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 혼다 가쓰이치는 지쿠시가 폭넓은 교우 관계로 활약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고, 시바타 데쓰지는 그의 본질이 신문 기자이며 필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기시이 시게타카는 "신문 기자의 모범", "권력 감시 능력이 뛰어난 저널리스트", "일본과 세계의 역사, 문화, 전통에 주목하고 문화를 계승하는 이들을 격려했다"고 평가했다. 도리코시 슌타로는 "좌표축 남자", "일본인의 마음과 사회 모습을 묻고 좌표축을 발신했다"고, 다하라 소이치로는 "객관 보도의 허구를 보여주고, 지쿠시 데쓰야로서 말했다"고 평가했다.
오카도메 야스노리는 "지쿠시 씨가 없으면 일본 보도 프로그램은 망가질 것"이라 했고, 우메하라 다케시는 "유연성을 가지고 고전과 세계를 보며 현대를 논하는 드문 저널리스트"라 평했다. 데라시마 지로는 "기성 세력에게도 인정받고, 보수적인 사람들과도 논의하며, 카멜레온성의 기술을 가졌다"고, 강상중은 "지적인 에피큐리언", "명 조련사", "시대에 말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오카모토 유키오는 "균형보다 확실한 좌표축, 나침반", 사카이야 다이치는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 폼과 대중성의 균형이 좋았다"고 평했다. 구니히로 마사오는 "오키나와와 미국 관계를 내다본 특이한 존재", 호리타 리키는 "권력이 시민을 해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프로"라 칭했다.
사다카 노부는 "걸어 다니는 리버럴, 성실하고 잘난 척 안 한다", 스즈키 구니오는 "굉장하고 좋은 사람"이라 회고했다. 오타 마사히데는 "진정한 오키나와 이해자", 후쿠다 야스오는 "마음 편한 친구, 권력과 선 긋는 저널리스트"라 평했다.
미키 무쓰코는 "품위 있는 신문 기자", 노나카 히로무는 "지쿠시 씨에게 영향받아 테러 대책 특별조치법 등에 기권했다"고 밝혔다. 다나카 마키코는 "극상의 경청가", 스즈키 무네오는 "공정하게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간 나오토는 "새로운 도전을 응원", 쓰지모토 기요미는 "미래 세대에 무엇을 남길지 마음 썼다"고 말했다. 나카야마 지나쓰는 "궤적 전체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켰다"고 평가했다.
구사노 미쓰요는 "NEWS23에서 20분 다큐멘터리 전달 장을 지켰다"고 말했다.[18] 오자와 세이지는 "엄청난 음악광, 프로급 식견", 사에구사 시게아키는 "문화에 관심, 예술적 미디어에 관심 있는 드문 사람"이라 평했다.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사무라이, 멋, 깨달음, 흔들림 없고 문화, 가부키 조예 깊다", 코노에 나오시는 "영화, 음악, 고전, 문학 망라, 문화와 교양 있는 어른"이라 말했다. 토다 나츠코는 "더듬지만 성의 있는 인터뷰, 영화에 진지", 오스기는 "영화 평론가로 확립시켜줬다"고 했다.
세토우치 자쿠초는 "경애, 신뢰, 젠체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히라노 케이이치로는 "다른 입장과 소통 자세"에 영향받았다고 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아버지 같은 존재", 오다 카즈마사는 지쿠시 편지에 "마음 들뜨는 기쁜 순간"이라 했다.
나카지마 미유키는 "희대의 명저널리스트, 희대의 신사", 가토 토키코는 "무명인 끌어올리는 힘", 이시카와 사유리는 "따뜻하고 의지되지만 뽐내지 않았다", 키키 키린은 "같은 시선", 와다 아키코는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사람", Cocco는 "70세에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처음, 오키나와인이 좋아하는 이유 알 것 같다"고 했다.
쿠사나기 츠요시는 "안심감, 따뜻함, 남자로서 동경", 칸노 미호는 "다른 의견 경청", 아야세 하루카는 "박식, 알기 쉽게 설명, 심지 굳고 온화", 마츠이 히데키는 "로망, 꿈", 마츠자카 다이스케는 "인간적 도량, 부드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이노우에 요스이는 지쿠시가 저널리즘을 멀리서 보는 유머를 안다고 느꼈다. 그는 지쿠시가 유머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관찰자의 프로였다고 평했다.[19]
한편, 요시모토 타카아키는 지쿠시가 겉치레와 멋진 말만 하고 가혹한 요구만 한다며 "민중의 편"이라는 얼굴에 의문을 제기했다.[20] 우에스기 타카시는 만년의 지쿠시가 논쟁보다 우정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했다.[21] 다나카 야스오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 대한 지쿠시의 무비판적 태도에 "썩었다"고 평했다.[22] 모리 요시로는 지쿠시를 포함한 특정 파벌 기자들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언급하며, 지쿠시의 사과에 "이제 와서 뭘"이라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26]
지쿠시의 "오키나와 = 전쟁과 기지의 비극의 섬"이라는 오키나와관은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비판이 있다. 오쿠보 준과 시노하라 아키라는 지쿠시의 오키나와관이 오키나와 내에 정착되어 피해자 의식에 갇히고 자립 논의를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요나바루 메구미는 지쿠시가 오키나와를 순수 피해자로만 묘사하고 현실과 생각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3. 1. 언론 활동
오이타현 히타시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정치부 기자 외에도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 미군 통치 아래에 있던 류큐(琉球列島米国民政府일본어) 특파원, 워싱턴 특파원, 외신부 차장 등을 지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닉슨 대통령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워터게이트 사건 등을 취재했고, 정치부 기자 때는 자민당 온건파 의원들과 친분을 맺기도 하였다.[1]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간 아사히 신문이 발행하는 잡지인 아사히 저널의 편집장을 지냈고, 1988년 뉴욕에 주재하면서 편집 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 아사히 신문을 퇴직한 이후 1989년 10월에 민영방송사인 TBS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지쿠시 데쓰야 NEWS23'''(현 NEWS23)"의 메인 뉴스 앵커로 활동, 그가 진행하는 《NEWS 23》의 칼럼 코너인 《다사 쟁론(多事争論일본어)》이라는 논평 코너에서 자신의 명료한 논점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면서 큰 호응을 얻어 인기 코너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다사 쟁론》이라는 논평 코너에서 독도 문제에 관해 한국- 일본 간의 첨예한 쟁점과 대립이 일어났을 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선동을 자제해 달라"며 언론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에 대해 "선동하지 말아야 할 곳은 언론이 아니라 바로 정부"라며 총리의 이중성을 비판하기도 하였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 등 동북아 지역의 역사 문제에 대해 피해국의 입장에서 일본 우익·보수세력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등 "시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이라크 전쟁 참가, 일본 사회 우경화, 대 북한 정책에 얽힌 굵직굵직한 정치·사회적인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비판적인 발언을 가했다.
1995년 10월 옴진리교와 관련된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일본 민영 방송사 중 하나인 니혼 TV가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을 사전에 TBS의 담당 프로듀서들이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TBS는 니혼 TV의 보도 내용과 사실을 모두 부인, TBS의 와이드쇼 프로그램 담당 프로듀서가 당시 1989년 방송 직전 옴진리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유출시켜 발각되기도 하는 등 문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파문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일은 그 후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1989년 11월 4일에 발생함)의 빌미를 제공하여 TBS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당시 이 사건을 속칭 '''TBS 비디오 사건'''이라고 칭했음). 이 문제에 관해 당시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NEWS23》에서 공개적으로 TBS의 내부 대응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고, 이듬해인 1996년 TBS의 이소자키 히로조(磯崎洋三일본어) 사장이 잘못을 공식 인정한 1996년 3월 25일 《다사 쟁론》을 통해 그는 "TBS는 오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며, TBS는 잘못을 저질렀다. … 나는 오늘 오후에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마지막으로 그만두겠다"라는 발언을 하여 TBS 내부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다.[37]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룽지 중국 총리,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 등 일본을 방문한 외국 국가 원수들과 "일본 국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2000년 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 2008년 4월에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방문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의 직접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2007년 5월 14일에 방송된 《다사 쟁론》에서 "지난 주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검진 받았는데, 초기의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밝히는 등 스스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병원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NEWS23》의 방송 출연을 중단했고, 같은 해 10월 8일 치료 후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 이후는 "스페셜 앵커"로서 수개월간 방송 활동을 했다.
지쿠시 데쓰야는 NEWS23 이후, TBS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어, 기본적으로 텔레비전 출연은 TBS 계열 방송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후지 TV의 『트리비아의 샘 〜훌륭한 쓸데없는 지식〜』에 VTR 출연하거나, 1년에 한 번 TV 아사히의 특집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했다.
'''보도·토론 프로그램'''
기간 | 프로그램명 | 역할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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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 1982년 9월 | 일요 석간! 여기는 데스크(TV 아사히) | 진행자 | rowspan=2| |
방송 기간 불명 | 더 귄료쿠!(ザ・権力!) (TV 아사히) | |||
1983년 4월 | 1983년 6월 | TV 스쿠프 (TV 아사히) | 앞서 언급한 중의원 선거를 위한 정권 방송에 출연한 것에 따라 정직 처분을 받고 프로그램 시작 3개월 만에 하차 | |
1987년 5월 29일 | 아침까지 생방송! (TV 아사히) | 토론 사회 | ||
1989년 10월 | 2008년 3월 | 지쿠시 데쓰야 NEWS23 (TBS) | 메인 캐스터 | 프로그램 하차까지 3개월은 스페셜 앵커(특별 캐스터)로 부정기 출연 |
'''버라이어티·특별 프로그램'''
- 새해까지 감동 생방송! 사상 최대 39시간 TV:종합 사회를 담당. 1992년 12월 30일부터 1993년 1월 1일까지.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괜찮아! (후지 TV):텔레폰 쇼킹 게스트. 1983년 4월 30일 방송.
- 퀴즈 지구 한입 베어 먹기 (TV 도쿄)
- 지쿠시 데쓰야의 헬로 월드(TBS 라디오)
- 지쿠시 데쓰야의 뉴스 조키(TBS 라디오)
- 지쿠시 데쓰야의 다큐멘터리 일본(TBS 라디오)
- 지쿠시 데쓰야 토요일의 교차로(FM 도쿄)
3. 2. 긍정적 평가
지쿠시 데쓰야는 오랫동안 신문, 잡지, 텔레비전 보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발언을 이어갔고,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소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를 "뼈 속까지 리버럴리스트"라고 평가했으며, 그의 일관된 자세는 "좌표축"으로 비유되기도 했다.[37] 그는 당파성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했으며, 음악, 영화, 연극, 문학, 미술, 스포츠 등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현장을 찾아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2008년 일본 기자 클럽은 "아사히 신문 기자로서 30년 동안 키운 저널리스트 정신과 풍부한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 흐름이나 다수에 휩쓸리지 않는 안정적인 보도 스타일로 국내외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폭넓은 시청자, 뉴스원의 신뢰를 얻었다'''"고 평가하며 지쿠시에게 상을 수여했다. 또한, "날카로운 뉴스 감각과 적절한 아젠다 세팅뿐만 아니라, 문화 활동의 발굴·소개 등 텔레비전 특유의 가능성에도 도전하여, 민영 텔레비전 보도의 사회적 역할 향상에도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쿠시의 부고를 접하고 "'''전후 일본이 낳은 최대의 저널리스트'''"라고 평가하며, 감정에 북받쳐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통곡했다.
혼다 야스하루는 지쿠시에게 "세상은 귀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이크 앞에서 절명할 정도의 기개로, 지금의 입지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격려했다.[17] 그는 지쿠시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는 그의 자세에 감동하여 "오, 여기에 진짜 신문 기자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혼다 가쓰이치는 지쿠시가 폭넓고 거리낌 없는 교우 관계를 구축하는 "무기"가 있었기에 활약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시바타 데쓰지는 지쿠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신문 기자이며, 그 필력은 "수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기시이 시게타카는 지쿠시를 "신문 기자의 모범, 목표, 동경"이라고 칭하며, "권력의 횡포, 지나침에 대해 경계하는, 센서 능력이 저널리스트로서 엄청나게 높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와 문화, 전통의 면에 항상 눈을 돌리고, 일본의 여러 장르의 문화를 계승하고 태어나는 사람들을 격려한다"고 덧붙였다.
도리코시 슌타로는 지쿠시를 "자신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툴", "좌표축 남자"라고 표현하며, "일본인의 마음과 사회의 모습을 항상 물으며 좌표축을 계속 발신했다"고 평가했다. 다하라 소이치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 보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공적은 크다"고 평가하며, "캐스터가 아니라, 항상 지쿠시 테쓰야로서의 말을 했다"고 말했다.
오카도메 야스노리는 "지쿠시 씨가 없어진다면 일본의 보도 프로그램은 더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메하라 다케시는 "자신의 사상을 가지면서, 일종의 유연성을 가지고, 고전과 세계를 바라보면서 현대를 논할 수 있는 드문 저널리스트"라고 평가했다.
데라시마 지로는 "기성 세력에게도 인정받았고, 보수적인 사람들과도 논의할 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카멜레온성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상중은 지쿠시를 "지적인 에피큐리언", "명 조련사"라고 표현하며, "시대에 말하게 하는 것을 관철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오카모토 유키오는 "균형을 잡기보다는, 확실한 좌표축이 있다", "항상 나침반이었다"고 말했다. 사카이야 다이치는 지쿠시를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이며, 약간 폼을 잡고, 약간 대중적, 이 균형이 매우 좋았다"고 평가했다.
구니히로 마사오는 "전후 일본의 저널리스트 중 국제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은 적지만, 지쿠시 군은 오키나와와 미국과의 관계를 내다본 특이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호리타 리키는 지쿠시를 "권력이 시민을 상처 입히지 않도록, 더 깊은 곳에서 날카롭게 감시하는 데 헌신한다. 프로 중의 프로이며, 뼛속까지 저널리스트"라고 평가했다.
사다카 노부는 지쿠시를 "걸어 다니는 리버럴, 존재 자체가 리버럴"이라고 표현하며, "묘하게 성실하다고 할까, 잘난 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즈키 구니오는 지쿠시의 부고를 보고 "굉장한 사람이었네. 좋은 사람이었네."라고 말했다.
오타 마사히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키나와의 이해자"라고 평가했다. 후쿠다 야스오는 지쿠시를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권력과는 선을 긋는다는 저널리스트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키 무쓰코는 "신문 기자 중에 그렇게 품위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나카 히로무는 "지쿠시 씨에게 영향을 받아, 테러 대책 특별조치법이나 자위대의 출동 등에 기권하거나 퇴석을 하거나, 그런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다나카 마키코는 지쿠시를 "극상의 경청가"라고 평가했다. 스즈키 무네오는 "매우 공평·공정하게 제 주장을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간 나오토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그것이 지쿠시 테쓰야 씨"라고 말했다. 쓰지모토 기요미는 "항상 웃고 있었지만, 미래 세대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에 마음을 썼다"고 말했다.
나카야마 지나쓰는 "그의 궤적 전체를 살펴보면, 흔들린 곳이 전혀 없다. 훌륭하게 자신을 지켜냈다"고 평가했다.
구사노 미쓰요는 "NEWS23에서는 20분 정도의 다큐멘터리를 전달하는 장을 지켜나간 것이 지쿠시 씨입니다"라고 말했다.[18]
오자와 세이지는 지쿠시를 "엄청난 음악광", "음악에 대한 보도에서도 그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프로급의 식견, 애착과 애정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에구사 시게아키는 "정치나 경제보다는 오히려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 "예술적인 미디어 모두에 관심이 있는 드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지쿠시를 "사무라이", "멋있고, 깨달음도 있고, 흔들리지 않잖아요. 문화, 가부키 같은 것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말했다. 코노에 나오시는 "지쿠시 씨의 관심은 영화도 음악도 고전도 문학도 망라하고, 정말 다채로웠습니다", "문화와 교양 있는 어른"이라고 말했다.
토다 나츠코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하잖아요. 하지만 그게 상대방에게는 매우 성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영화에 대한 진지함이라든가, 질문의 내용이 달랐다"고 말했다. 오스기는 "영화 평론가로서 확립시켜준 것은 지쿠시 씨"라고 말했다.
세토우치 자쿠초는 지쿠시를 "경애하고, 신뢰했다", "윗사람은 젠체하고, 실물 이상으로 보이려 합니다. 그것이 지쿠시 씨에게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히라노 케이이치로는 "다른 입장인 사람과도 소통하려는 자세"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지쿠시 씨에게 저는 '사카모토 잇키의 아들'이었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다 카즈마사는 지쿠시에게 받은 편지에 대해 "인생에서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기쁜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카지마 미유키는 지쿠시를 "희대의 명저널리스트는 '희대의 신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가토 토키코는 "무명인 사람을 끌어올리는 힘, 선도하는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시카와 사유리는 "따뜻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뽐내지 않으셨어요."라고 말했다. 키키 키린은 "사물을 비스듬히 보지도 않고, 거만하게 굴지도 않고, 여러 사람과 같은 시선을 가진다."고 말했다.
와다 아키코는 "텟짱은,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Cocco는 "70세 가까운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테츠야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쿠사나기 츠요시는 "그 안심감은 뭘까요. 아주 따뜻한 분이고, 그 그릇의 크기는 남자로서 정말 동경합니다"라고 말했다. 칸노 미호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제대로 귀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아야세 하루카는 "어쨌든 박식하고, 제가 무엇을 질문해도, 정말 알기 쉽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심지가 굳고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항상 표정은 온화하고 웃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츠이 히데키는 "로망이라든가 꿈이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전해져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츠자카 다이스케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지는 인간적인 도량이라든가, 마음의 깊이에서 생기는 부드러움이 있었죠"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요스이는 지쿠시가 저널리즘에 몸담으면서 저널리즘을 멀리서 볼 수 있는 유머를 아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지쿠시의 공적 중 하나로 유머의 중요성을 의식했다는 점을 꼽으며, "지쿠시 씨는 '관찰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거나, 세상에 소개하는 의미에서, 관찰자의 프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평했다.[19]
3. 3. 부정적 평가
지쿠시 데쓰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보도 방식과 오키나와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보도 방식에 대한 비판:
- 요시모토 타카아키는 지쿠시가 자신을 외면하고 겉치레나 멋진 말만 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가혹한 요구만 한다고 비판했다.[20] 그는 지쿠시가 "민중의 편"이라는 얼굴로 발언하지만, 과연 그가 평범한 민중인지, 민주주의가 몸에 배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 우에스기 타카시는 지쿠시가 저널리스트로서 정점에 오른 만년에는 논쟁에서 궁지에 몰려도 반론하려 하지 않거나, 사상 신념에 따른 논쟁보다 우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비판했다.[21]
- 다나카 야스오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 대해 지쿠시가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지쿠시 테쓰야는 썩었다"고 평가했다.[22]
- 모리 요시로는 자신의 내각이 언론에 의해 공격받은 배경에 지쿠시를 포함한 특정 파벌과 친밀한 기자들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지쿠시가 한 결혼식에서 "모리 정권 시절, 우리도 '모리를 무너뜨려라'라는 전략으로 조금 심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제 와서 뭘"이라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26]
- 오키나와 문제에 대한 관점 비판:
- 지쿠시의 "오키나와 = 전쟁과 기지의 비극의 섬"이라는 오키나와관은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비판이 있다.
- 오쿠보 준과 시노하라 아키라는 공저 『오키나와의 불편한 진실』에서, 류큐사 연구의 제일인자이자 부지사였던 타카라 쿠라요시의 발언을 인용하여, 지쿠시의 오키나와관이 오키나와현 내에 정착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피해자 의식에 갇히고 자립을 위한 논의를 방해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 오키나와에 가계를 둔 요나바루 메구미는 지쿠시가 오키나와를 "순수"하고 깨끗한 피해자로만 묘사하며, 오키나와의 복잡한 현실과 다양한 생각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들은 지쿠시의 언론인으로서의 객관성과 균형 감각, 그리고 특정 문제에 대한 편향된 시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4. 한국과의 관계
1989년부터 TBS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지쿠시 데쓰야 NEWS23'''(현 NEWS23)"의 메인 뉴스 앵커로 활동하면서, 프로그램의 칼럼 코너인 《다사 쟁론(多事争論일본어)》을 통해 독도 문제 등 한국과 일본 간의 첨예한 쟁점에 대해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논평을 했다.[37]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독도 문제에 대해 "선동을 자제해 달라"며 언론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에 대해, "선동하지 말아야 할 곳은 언론이 아니라 바로 정부"라며 총리의 이중성을 비판했다.[37]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등 동북아 지역의 역사 문제에 대해 피해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 우익·보수세력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등 "시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37]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2000년 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고,[37] 2008년 4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방문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의 직접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37]
5. 기타
- 오이타현 히타시 출신으로,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와오미는 도쿄전력의 전신 회사에 근무했으며[27], 데쓰야는 그의 장남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4명 있었다.[4]
- 할머니는 다나카 코미마사 어머니의 언니였다.[28]
- 큰 외할아버지는 다키 렌타로이다.[29][30] 1993년부터 다케다시에 있는 다키 렌타로 기념관의 명예 관장을 맡았다.
- 하이라이트와 말보로 적색을 하루 3갑씩 피우는 골초였다. 폐암에 걸려 금연한 후에도 담배는 인류가 발명한 위대한 문화이며, 암의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말했다.[31]
- 피스 보트 주최인 쓰지모토 키요미를 학생 시절부터 지원했다.
- 「NEWS23」 출연 시에는, 프로그램 마지막을 항상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는데, 이는 미국의 앵커맨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어구를 직역한 것이다.
- 국회의원의 연금 미납 문제를 비판했지만, 자신의 연금 미납이 발각되어 2004년 5월 13일 방송된 'NEWS23'에서 사죄했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프로그램 출연을 중단했다.[32]
- 사망 후인 2011년 7월, 유족이 지쿠시의 유산에 대해 총 7000만 엔의 신고 누락을 도쿄 국세청으로부터 지적받았다. 그중 해외 계좌의 4000만 엔은 의도적으로 신고에서 제외한 유산 은닉으로 인정되어, 가산세를 포함한 약 2000만엔의 추징과세가 부과되었다.[33][34]
- 오자와 세이지는 지쿠시 데쓰야를 "엄청난 음악광"이자 "음악에 대한 보도에서도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프로급의 식견, 애착과 애정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 사에구사 시게아키는 지쿠시 데쓰야가 "정치나 경제보다는 오히려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지쿠시 데쓰야를 "멋있고, 깨달음도 있고, 흔들리지 않는 사무라이"와 같다고 표현했다.
- 코노에 나오시는 지쿠시 데쓰야를 "문화와 교양 있는 어른"이라고 평가했다.
- 토다 나츠코는 지쿠시 데쓰야의 인터뷰가 상대방에게 매우 성의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인터뷰가 끝나면 모두 '저 사람은 좋았다'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 오스기는 "현실적으로 영화 평론가로서 확립시켜준 것은 지쿠시 씨"라고 말했다.
- 세토우치 자쿠초는 지쿠시 데쓰야를 "경애하고, 신뢰했다"라고 말했다.
- 히라노 케이이치로는 지쿠시 데쓰야에게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다른 입장인 사람과도 소통하려는 자세"라고 말했다.
- 사카모토 류이치는 지쿠시 데쓰야를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 오다 카즈마사는 지쿠시 데쓰야가 보낸 편지에 대해 "인생에서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기쁜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 나카지마 미유키는 지쿠시 데쓰야를 "희대의 명저널리스트는 '희대의 신사'였습니다"라고 표현했다.
- 가토 토키코는 지쿠시 데쓰야가 "무명인 사람을 끌어올리는 힘, 선도하는 힘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 이시카와 사유리는 지쿠시 데쓰야를 "따뜻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고 회상했다.
- 키키 키린은 지쿠시 데쓰야가 "사물을 비스듬히 보지도 않고, 거만하게 굴지도 않고, 여러 사람과 같은 시선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 와다 아키코는 지쿠시 데쓰야를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Cocco는 지쿠시 데쓰야를 통해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 쿠사나기 츠요시는 지쿠시 데쓰야의 따뜻함과 그릇의 크기를 남자로서 동경한다고 말했다.
- 칸노 미호는 지쿠시 데쓰야가 "여러 장르의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제대로 귀를 기울였다"라고 평가했다.
- 아야세 하루카는 지쿠시 데쓰야가 "상냥하고 분위기가 멋지고, 심지가 굳고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항상 표정은 온화하고 웃고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 마츠이 히데키는 지쿠시 데쓰야에게서 로망과 꿈을 느꼈다고 말했다.
- 마츠자카 다이스케는 지쿠시 데쓰야에게 인간적인 도량과 마음의 깊이에서 생기는 부드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 이노우에 요스이는 지쿠시 데쓰야가 유머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관찰자'로서의 프로였다고 평가했다.[19]
출판년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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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 원숭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원숭이 - 체험적 미디어론 | 일본 브리타니카 | [35] |
1980년 | 지쿠시 테쓰야의 "여기는 데스크" 활자판 줌 업 현대 | 가쿠요쇼보 | ISBN 4313830367[36] |
1982년 | 지쿠시 테쓰야의 망나니 영어술 - 통하기 위한 12가지 비결 | 고분샤 | |
지쿠시 테쓰야의 난세를 살아라! -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힌트 | 니혼게이자이신문사 | ISBN 4532162424 | |
지쿠시 테쓰야의 이 "나라"의 행방 | 니혼게이자이신문사 | ISBN 4532161924 | |
오키나와가 전부 | 가와데쇼보신샤 | 테루야 린스케와의 공저, ISBN 4309011721 | |
지쿠시 테쓰야의 세세세(유유유) 파트 3 | 오키나와 타임스사 | ISBN 4871271382 | |
일본 23시 - 지금 여기에 있는 위기 | 고자와 서점 | ISBN 4755103428 | |
마이 아메리칸 노트 포토맥 양쪽 기슭 | 아사히신문사 | ISBN 4022602678 | |
미디어의 바다를 표류하며 | 아사히 문고 | ISBN 4022603402 | |
1984년-1985년 | 젊은이들의 신들 1~4 | 아사히신문사 | 1984년부터 1985년의 젊은이들의 "신들(20~40대)" 50명과의 대담집 |
1986년-1987년 | 젊은이들의 대신 | 아사히신문사 | 1986년부터 1987년의 젊은이들의 "대신(50대 이상)" 22명과의 대담집 |
1986년 | 신인류 도감 1·2 | 아사히 문고 | 대담 당시 10~20대 젊은이 34명과의 대담집 |
1987년 | 팔팔한 여자들 | 스즈사와 서점 | 39명의 활약하는 여성들과의 대담집 |
2005년 |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 1959-2005 | 아사히신문사 | ISBN 4022500743, 『여행 도중 저널리스트로서의 나를 만든 39명과의 만남』(아사히 문고, 2013) |
2009년 | 젊은 친구들에게 - 지쿠시 테쓰야 라스트 메시지 | 슈에이샤 신서 | ISBN 4087205150 |
년도 | 제목 | 배역 | 제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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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메이크 업 | 손님 역 | 뉴 센추리 프로듀서즈 |
1994년 | 푸른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 | 옥상 손님 역 | 서드 스테이지=도쿄 극장 |
1996년 | 안개의 자오선 | 미야모토 역 | 토에이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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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ity journalist Tetsuya Chikushi loses battle with lung c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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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ォッチ・ドッグ」をめざす23時の顔 筑紫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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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くばくか地元のために」日田駅前の夜なべ談義 むしろの誓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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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紫哲也さん遺族 遺産隠し 国税指摘 米マンション売却益4000万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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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告漏れ:筑紫さん遺族、遺産隠し 海外資金の4000万円、修正申告済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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猿になりたくなかった猿 : 体験的メディア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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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23 多事争論 3月25日(月) 「坂本弁護士事件とTBSの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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