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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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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노사의 굴욕은 107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굴복한 사건이다.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과 대립하던 하인리히 4세는 파문당하고 왕위까지 위협받자, 교황이 머물던 카노사 성에서 3일간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 사건은 교황권의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으며, "카노사로 가다"는 굴복을 의미하는 관용어로 굳어졌다. 이후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문화 투쟁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외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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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구글 지도
사건 개요
사건명카노사의 굴욕
다른 이름카노사 사건, 카노사의 참회, 카노사로의 행진
날짜1077년 1월
장소카노사 성
관련 인물하인리히 4세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배경
주요 원인서임권 투쟁
갈등교황권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
사건 전개
파문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파문당함
하인리히의 반응파문을 풀기 위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함
카노사로의 행차하인리히 4세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카노사 성으로 감
참회하인리히 4세가 3일 동안 속죄의 옷을 입고 성문 밖에서 기다림
파문 철회교황이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철회
결과
정치적 의미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
후대 영향중세 교황권 강화에 영향
황제권의 위축을 초래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표현이 권력자에게 굴복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됨
관련 이미지
하인리히 4세의 참회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서 교황에게 간청하는 모습
카노사로의 행진
카노사로 향하는 하인리히 4세

2. 사건의 전개

1073년 로마 시민들에 의해 교황으로 추대된 그레고리오 7세는 ''디크타투스 파파에''를 통해 서임권 과정을 개혁하려 했으나, 하인리히 4세의 저항에 직면했다. 하인리히 4세는 전임 황제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대주교, 수도원장, 성직자에게 서임할 권리를 주장하며 교황령에 반대했다.

1075년 6월 랑겐잘차 전투에서 작센 반란을 진압한 하인리히 4세는 9월 밀라노에 새 주교를 임명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자극했다. 1075년 크리스마스 미사 중 폭도들에게 공격받아 투옥되었다가 다음 날 추종자들에게 구출된 그레고리오 7세는[3]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가 워름스에서 소집한 공의회에서 교황에 대한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1059년 ''인 노미네 도미니'' 교황령에 따른 교황 선거 규칙을 언급하며 교황 퇴위를 요구받았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 로마 사순절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 1년 후 왕위 상실이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했다.[4] 하인리히 4세는 북이탈리아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심복 사제들을 밀라노 대주교, 페르모와 스폴레토 주교 등에 임명했으나, 교황은 주교 임명권(서임권)이 교회가 가져야 한다고 통지하고 대립 주교 추대 중지를 요구했다. 하인리히 4세가 이를 거부하고 교황 폐위를 선언하자, 교황 역시 하인리히 4세의 파문과 왕위 박탈을 선언했다.

1077년 1월,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 나타나자 교황은 체포를 두려워하여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무기를 버리고 수도사 복장으로 성 앞에서 용서를 구했고, 교황은 파문 해제 뜻을 전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2. 1. 배경

11세기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우선순위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령을 통해 서임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던 작센 공 마그누스를 비롯한 독일 제후들은 교황의 하인리히 4세 파문과 왕위 박탈 선언을 기회로 삼아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제후들은 1077년 2월 2일까지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로마 왕을 결정하기로 하고,[18] 교황을 중재자로 초빙했다.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후계 왕을 결정하지 않더라도 왕위를 비워두기로 결의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궁지에 몰렸고,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교황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가하기 전 속죄하고자 북이탈리아로 향하던 중, 교황이 토스카나 백작부인 마틸데 디 카노사의 카노사 성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1. 1.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 문제

그레고리오 7세는 재임 초기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을 펼쳤는데, 당시 세속 군주가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하인리히 4세를 돕는 귀족이나 사제도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3]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11세기 그레고리우스 개혁 확산 이후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상대적 우선순위를 놓고 분쟁을 벌여왔다. 1073년 로마 시민들에 의해 교황으로 추대된 그레고리오 7세는 칙령 ''디크타투스 파파에''를 통해 서임 과정을 개혁하려 시도했으나, 하인리히 4세의 저항에 직면했다. 하인리히 4세는 전임 황제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대주교, 수도원장, 다른 성직자에게 '서임'할 권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황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수했다.

1075년 6월 랑겐잘차 전투에서 작센 반란을 진압한 후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9월에 하인리히 4세는 밀라노에 새로운 주교를 임명했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복종을 요구한 그레고리오 7세를 화나게 했다. 그 직후 교황은 1075년 크리스마스 미사를 집전하던 중 폭도들에게 공격받아 투옥되었다. 다음 날 그의 추종자들이 감옥을 습격하여 그를 교회로 데려왔고, 그는 미사를 중단했던 지점부터 다시 집전했다.[3] 1076년 1월 24일 하인리히 4세는 워름스에서 여러 독일 주교들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성직자들은 교황에 대한 모든 약속을 저버렸다. 마침내 하인리히 4세는 1059년 ''인 노미네 도미니'' 교황령에 따른 교황 선거 규칙을 언급하며 그레고리오 7세의 퇴위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 로마에서 열린 사순절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그는 또한 그날로부터 1년 후 왕위 상실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4]

2. 1. 2. 하인리히 4세의 파문

작센 반란을 진압한 후, 하인리히 4세는 1075년 9월에 밀라노에 새로운 주교를 임명했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복종을 요구한 그레고리우스 7세를 화나게 했다.[3] 하인리히 4세는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 사제들을 밀라노 대주교, 페르모와 스폴레토 주교 등에 잇달아 임명했다. 교황은 주교 임명권(서임권)이 군주가 아닌 교회에 있음을 통지하고, 대립 주교의 추대 중지를 요구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듣지 않았다.

1076년 1월 24일,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여러 독일 주교들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성직자들은 교황에 대한 모든 약속을 저버렸다. 마침내 왕은 1059년의 ''인 노미네 도미니'' 교황령에 따른 교황 선거 규칙을 언급하며 그레고리우스 7세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의 파문과 황제권 박탈을 암시하자, 하인리히 4세는 격분하여 독자적인 교회 회의를 열고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6년 로마에서 열린 사순절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으며, 또한 그날로부터 1년 후 왕위 상실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4]

2. 2. 사건의 경과

107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서임권 투쟁에서 파문당할 위기에 놓였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했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직접 사죄하기로 결심하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하인리히 4세는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 알프스산맥을 넘어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에 도착했다. 그는 참회자의 복장을 하고 3일 동안 성문 밖에서 용서를 구했다. 결국 1월 28일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철회했다.[9]

2. 2. 1. 카노사로 가는 여정

1076년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반기를 들었고, 1077년 2월 2일까지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로마 왕을 결정하기로 결의했다.[18]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왕위를 공석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4세는 궁지에 몰려 교황에게 사죄를 구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직접 교황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속죄하고자 북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교황이 마틸데 디 카노사의 카노사 성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쥐라산맥을 넘어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으로 카노사로 향했다. 그는 수도사 복장을 하고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다.[24]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서 금식하며 3일 동안 교황의 허락을 기다렸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이 맹세한 충성 서약을 무효로 선언했는데,[5] 이는 하인리히 4세의 통치에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 귀족들의 반란을 우려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해제해야만 했다. 그는 제후들이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려는 위협에 직면했고, 교황이 제시한 마감일 전에 교회 내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조언자들의 제안에 따라,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는 교황과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슈파이어에서 출발하여 라인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슈바벤 귀족들이 알프스 산맥 통행로를 열어주기를 거부하여 부르고뉴를 통과하여 험준한 몽세니스를 넘어 알프스 산맥을 건너야 했다.[6][7] 람베르트 폰 헤르스펠트의 연대기에 따르면,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아내 사보이아의 베르타, 그리고 어린 아들 콘라드 2세는 혹독한 한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2. 2. 2. 카노사 성에서의 3일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오해한 교황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마틸데 백작 부인이 교황을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여 하인리히 4세의 공격에 대비한 피난처[21]를 제공했다.[22][23] 마틸데는 서임권 분쟁에서 교황을 열렬히 지지한 절친한 동맹자였다.

한편, 하인리히 4세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고 반란의 기미가 보이자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쥐라산맥을 넘어 참회자의 모습으로 1077년 1월 25일[24] 카노사 성에 도착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옷을 입고 맨발이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서 참회복을 입고 금식하며 3일 동안 교황의 허가를 기다렸다. 1월 28일,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성 안으로 들이도록 허락했고(일설에 따르면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한다), 그날 밤 마틸데와 하인리히 4세는 함께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여 파문이 종결되었다. 파문이 취소되자 하인리히 4세는 즉시 제국으로 돌아갔다.

19세기 묘사,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수행원들


하인리히 4세가 마틸다의 성에 도착했을 때, 교황은 그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 것을 명령했다.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하인리히 4세는 참회의 행동을 했다. 그는 털옷을 입고, 맨발이었다고 한다. 람베르트 폰 헤르스펠트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인리히 4세는 3일 동안 성문 옆에서 털옷만 입고 단식을 했다고 한다.[8]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하인리히 4세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교회로 복귀시켰다. 그날 저녁, 그레고리우스 7세, 하인리히 4세, 그리고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성 안에 있는 산타폴로니오 예배당에서 성찬을 함께 했는데, 이는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이 공식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9]

하인리히 4세가 실제로 공식적인 회개를 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행동의 자유를 되찾고 곧바로 독일로 돌아갔으며, 그레고리우스 7세는 몇 달 동안 마틸다와 함께 성과 토스카나의 다른 지역에 머물렀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1115년).

2. 3. 사건 이후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사면받았지만, 독일 제후들은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중재자를 자처했으나 양측 모두에게 비난받았다. 1080년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지만, 하인리히 4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귀족들을 굴복시키자 파문은 효력을 잃었다.[25][26][27]

이후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3월, 3년간의 노력 끝에 로마를 점령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성[28]으로 피신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라벤나의 주교 귀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한 후, 1084년 3월 31일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084년 5월 로베르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퇴각했다.

2. 3. 1. 하인리히 4세의 귀환과 내전

카노사의 굴욕 이후,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한 독일 제후들과의 내전에서 1080년 하인리히 4세가 승리하여 독일 내 권력을 장악했다. 1080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두 번째로 파문했지만, 이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25][26][27] 하인리히 4세는 1080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마틸다를 제압하고 세력을 약화시켰다.

2. 3. 2. 로마 약탈 (1084년)

1080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굴복시키고 세력을 약화시켰다. 1081년 로마에 도착한 후 3년간의 노력 끝에 1084년 3월에 로마를 점령했다.[25][26][27]

로마가 함락되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성[28]으로 피신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라벤나의 주교 귀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한 후, 1084년 3월 31일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084년 5월 로베르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4세는 신속히 퇴각하여 독일로 돌아갔다.

로베르 군대는 로마에 진입하여 저항 세력과 시가전을 벌인 끝에 교황을 구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르만족 특유의 방화와 약탈[29]이 자행되어 로마는 큰 피해를 입었다. 교황과 제휴한 노르만족의 만행에 로마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교황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으며, 1085년 살레르노에서 사망했다.

3. 역사적 의미

카노사의 굴욕은 세속 권력에 대해 교황 권력이 항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라는 이름은 세속 권력이 기독교에 굴복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1583년 영국 개신교도 존 폭스(John Foxe)가 그린 카노사의 헨리 4세 그림.


1877년 하르츠부르크 성에 세워진 비스마르크의 인용문이 새겨진 명판


1728년, 그레고리오 7세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자, 교황령은 유럽 군주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황제 카를 6세에 의해 발표가 금지되었다.

3. 1. 중세 유럽의 권력 관계 변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관계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록 이 사건으로 교황 권력이 세속 권력을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세속 권력이 기독교에 굴복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30][31]

19세기 후반,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에 맞서 문화투쟁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했는데,[13] 이는 독일이 로마 교황청과 같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카노사의 굴욕을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즉,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계기로 보는 것이다.

카노사 회합의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회로 복귀했지만, 교황이 그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곧 사라졌다.[10] 작센과 남부 독일의 유력 제후들은 포르하임에서 회합을 갖고 하인리히 4세가 황제 자격을 상실했다고 선언하고, 살리안 왕조의 세습 황위 계승 주장을 거부했다. 그들은 "왕의 아들도, 비록 뛰어나게 훌륭하다 할지라도, 자발적인 선거를 통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교황은 이를 승인했다.[11] 하인리히 4세는 폐위 상태가 유지되었기에 슈바벤 공작 루돌프와의 내전에 돌입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두 번째로 파문했고, 하인리히 4세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를 침공, 그레고리오 7세를 몰아내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세웠다.[12]

이후 이 사건은 세속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카노사의 굴욕을 거부하는 것은 독일이 어떤 외부 세력(특히 가톨릭 교회)의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상징이 되었다. 독일 통일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문화투쟁피우스 9세와 일으켰을 때, 독일 제국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을 것이다. 몸으로도, 정신으로도!"라고 말했다. 이는 독일이 스스로를 위해 설 것이며 정치, 종교, 문화에 대한 외부 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13]

이 사건은 서임권 투쟁의 일부였지만, 이후 로마 교황청에서는 황제조차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점을 교황권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했다. 반면 16세기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는 반교황적 입장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고, 19세기에는 민족주의반가톨릭주의의 고조 속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 사건을 독일의 굴욕으로 다루는 등, 주로 문화 투쟁의 맥락에서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굴복, 복종, 항복을 뜻하며,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은 하기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3. 2. 후대의 재해석과 상징성

19세기 후반,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에 맞서 이른바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이면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했다.[30][31] 이는 독일이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카노사의 굴욕을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보았다. 즉,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실마리로 본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굴복, 복종, 항복을 뜻한다. ‘카노사로 가다’(go to Canossa|카노사로 가다영어; nach Canossa gehen|카노사로 가다de; Canossarvandring|카노사 순례sv; andare a Canossa|카노사로 가다it 등)라는 표현은 하기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현대적인 용법에서 "카노사로 가다"는 참회 또는 굴복의 행위를 의미한다. "카노사로 가다"는 참회를 하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종종 본의 아니거나 강요된 것임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는 1924년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석방된 후 바이에른 주총리 하인리히 헬트와의 회담을 묘사할 때, 나치당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설명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14] 1938년 로버트 밴시타트 남작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의 회담을 두고 "헨리 4세가 카노사로 간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15]

이 표현은 독일어(''Gang nach Canossa''), 네덜란드어(''naar Canossa gaan''),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Canossavandring'' 또는 ''Kanossagång''), 핀란드어(''ryömiä Kanossaan''), 프랑스어(''aller à Canossa''), 헝가리어(''kanosszajárás''), 이탈리아어(''andare a Canossa''), 슬로베니아어(''pot v Canosso''), 히브리어(''הליכה לקנוסה'' - ''halikha le'kanossa''), 폴란드어(''idąc do Kanossy'')에서 자주 사용된다.

16세기가 되자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는 반교황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19세기에는 민족주의반가톨릭주의의 고조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이 사건을 독일의 굴욕으로 다루는 등, 주로 문화 투쟁의 맥락에서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다.

참조

[1] 서적 Die Jagd nach den Zeugnissen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2005
[2] 뉴스 The Walk to Canossa: The Tale of an Emperor and a Pope http://www.medievali[...] 2018-01-28
[3] 웹사이트 Pontifex Maximus – Days of Glory and Papal Power https://rsc.byu.edu/[...] 2020-12-25
[4]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Conflict of Investitures https://www.newadven[...] 2023-07-07
[5] 웹사이트 Canossa: a medieval clash between church and state https://www.historye[...]
[6] 학술지 A Point in the Itinerary of Henry IV, 1076–1077 https://zenodo.org/r[...]
[7] 간행물 Creber, ‘Women at Canossa' ‘Women at Canossa. The Role of Elite Women in the Reconciliation between Pope Gregory VII and Henry IV of Germany (January 1077),’ https://storicamente[...]
[8] 문서 Account of Canossa http://lygdamus.com/[...]
[9] 문서 This series of events is compiled by Zimmerman (see below) as the most likely, through comparison of original sources on the subject, including letters written by both Henry and Gregory to the German bishops and princes. For a discussion of this, and for other proposed time lines, see Zimmermann's chapter 5
[10] 문서 Gregory had exacted an impossible promise that Henry would not assume imperial powers until permitted to do so by the Pope; a pro-papal chronicler referred to Henry's "pretended reconciliation"
[11] 문서 Robinson 1979:721f.
[12] 웹사이트 Gregory VII http://www.historych[...] 2006-07-11
[13] 문서 For more discussion on cultural references to the Walk to Canossa, see Zimmermann, chapters 1 and 4
[14] 서적 Hitler: 1889–1936: Hubris Norton
[15] 서적 Summits : six meetings that shaped the twentieth century https://www.worldcat[...] Basic Books 2009
[16] 뉴스 人気シリーズ「世界史のリテラシー」の最新刊『ローマ教皇は、なぜ特別な存在なのか  ~カノッサの屈辱』が発売! 誰もが聞いたことのある「あの事件」を現在・未来へとつなげる! https://prtimes.jp/m[...]
[17] 웹사이트 カノッサ事件 https://kotobank.jp/[...]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コトバンク) 2019-05-25
[18] 웹사이트 カノッサの屈辱とは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9-05-26
[19] 서적 ピランデッロ戯曲集Ⅱ 新水社
[20] 문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콜로나 가문 출신의 추기경 2명을 면직 후 파문하였으며 교황군을 동원하여 콜로나 가문의 성채를 파괴하고 토지를 몰수한 바 있다. 로마 귀족 콜로나 가문은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여러 가지 일로 대립하며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97년]]에 콜로나 가문의 지지자들에 의해 교황청 보물 수송마차를 강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교황의 조치는 이에 상응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콜로나의 시아라는 교황에 대해 매우 격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21] 서적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2] 문서 당시 교황은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으로 장거리 여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독일제후들의 초청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출발한 것이 아니다. 로마에서 아우크스부크까지는 1,600km가 넘는다.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철에 알프스를 넘어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수가 따른다. 하인리히 4세의 무력 도발을 피해 카노사성으로 급히 피신한 것이다.
[23] 문서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p133~134...1985년에 그레고리오 7세 선종 9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유골 검사가 실시된바 있다. 이탈리아 의학자들에 의한 검시결과 1077년 당시 교황이 심한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바 있다.
[24]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5]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26]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08-05
[27]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28] 문서 산탄젤로성은 베드로 광장에서 약 800m 떨어진 테베레 강변에 위치해 있다. 로마 시내에 위치해 있기에 결코 외딴성이 아니다. 요새화되어 있는 작은 성이며 베드로 성당에서부터 비밀통로가 놓여있어 교황에게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이 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성으로 신속히 대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29] 문서 1084년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끌고 온 군대는 바이킹 후손인 노르만족과 사라센인이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이킹족은 북해지역에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고 사라센인들은 북아프리카 출신의 해적들 중에 남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에 정착한 이들이다. 특히 방화를 많이 하여 로마 시내의 건물들이 많이 연소되고 무너졌다고 한다. 과거 AD 410년과 AD 455년에 있었던 로마약탈보다도 피해가 컸다고 한다.
[30] 서적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09-25
[31] 서적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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