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발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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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발라 전투는 680년, 무아위야 1세의 아들 야지드 1세가 칼리파로 즉위한 후,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 이븐 알리가 야지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이슬람교 분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시아파는 후세인을 순교자로 추앙하고 아슈라 의식을 통해 그의 죽음을 기린다. 카르발라 전투는 이슬람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아파 이슬람의 발전과 정치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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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발라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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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카르발라 전투 |
로마자 표기 | Battle of Karbala |
분쟁 | 제2차 피트나 |
날짜 | 서기 680년 10월 10일 (이슬람력 61년 무하람 10일) |
장소 | 카르발라, 이라크 |
결과 |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승리 후세인 이븐 알리의 순교 후세인의 가족 구성원 다수 포로 제2차 피트나의 발발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우마이야 칼리파조 |
교전국 2 | 후세인 이븐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 |
지휘관 | |
지휘관 1 | 우바이드 알라 이븐 지야드 우마르 이븐 사드 시므르 알 후르 이븐 야지드 알 타미미 (배신) |
지휘관 2 | 후세인 이븐 알리 알 아바스 이븐 알리 하비브 이븐 무자히르 주하이르 이븐 카인 |
병력 | |
병력 1 | 4,000–5,000 |
병력 2 | 70–145 |
사상자 | |
사상자 1 | 88명 |
사상자 2 | 72명 이상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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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656년 제3대 칼리파 우쓰만이 반란군에 의해 암살당한 후,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제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동료들인 탈하 이븐 우바이달라,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와암,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당시 시리아 총독)과 무함마드의 미망인 아이샤는 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쓰만의 살해자들에 대한 복수와 ''슈라(협의)''를 통한 새로운 칼리파 선출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제1차 피트나(제1차 이슬람 내전)를 초래했다.[6]
661년 알리가 하와리지인 압드 알 라흐만 이븐 멀잠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장남 하산이 뒤를 이었지만, 무아위야와 평화 조약을 맺고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6] 이 조약에서 하산은 무아위야가 정의로운 통치자이며 왕조를 세우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권력을 넘겨주기로 했다.[7] 670년 하산이 사망한 후, 그의 남동생 후세인이 하심 족(무함마드의 족)의 수장이 되었다.[8] 쿠파에서 아버지 알리의 지지자들이 후세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후세인은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하산과 무아위야 사이의 평화 조약을 준수했다.[5]
카르발라 전투는 무아위야가 676년 그의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발생한 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9] 역사학자 윌퍼드 마델룽은 이를 하산-무아위야 조약 위반으로 보았다.[5] 이슬람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세습 계승은 여러 곳에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9]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에서 ''슈라''를 소집하여 외교와 뇌물로 많은 주의 대표들을 설득하여 그의 계획에 동의하게 했다.[9] 그리고 마르완 이븐 알 하캄에게 메디나에서 야지드의 계승을 발표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후세인, 압드 알라 이븐 알 주바이르, 압드 알라 이븐 우마르,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아비 바크르는 혈통을 주장하며 야지드의 계승에 반대했다. [9] 무아위야는 직접 메디나로 가서 이들을 압박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야지드를 지지하지 않았다.[9] 그럼에도 무아위야는 메카와 메디나 사람들에게 야지드에 대한 충성을 받아냈고, 이후 야지드의 계승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은 더 이상 없었다.[9] 역사학자 피츠패트릭과 워커는 야지드의 계승을 "이슬람 역사의 변칙"으로 규정하고, 이 사건이 이슬람 정부를 "협의제"에서 군주제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9] 680년 4월 무아위야는 죽기 전 야지드에게 후세인과 이븐 알 주바이르가 그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특히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다.[9]
2. 1. 무함마드 사후 계승 분쟁과 제1차 피트나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는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다수의 무슬림(이후 수니파)은 무함마드의 오랜 동료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파로 추대했으나, 일부 무슬림(이후 시아파)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656년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이 반란군에게 암살당한 후, 알리가 제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알리의 칼리파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우스만의 복수를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 공동체는 내전(제1차 피트나)에 휩싸였다.
657년 시핀 전투에서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져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하와리지파가 알리 진영에서 이탈했다. 658년 나흐라완 전투에서 알리가 하와리지파를 제압했지만, 661년 알리는 하와리지파에게 암살당했다.
알리 사후, 그의 장남 하산이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곧 무아위야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권력을 넘겨주었다.
2. 2. 알리 암살과 하산-무아위야 조약
656년,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이 암살당하고,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제4대 칼리파로 취임했다. 그러나 우스만의 사촌이자 우마이야 가문 출신인 무아위야는 이에 반발하여 알리에게 우스만 암살의 책임을 물으며 복수를 주장했다. 양측은 657년 시핀 전투에서 충돌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불만을 품은 알리의 지지 세력 중 일부가 이탈하여 하와리지파라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9]658년, 알리와 하와리지파는 나흐라완 전투에서 격돌했고, 알리가 승리했다. 그러나 661년 1월, 알리는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중 하와리지파에게 암살당했다.[9]
알리 사후, 그의 장남 하산이 쿠파에서 칼리파로 추대되었다. 하산은 무아위야와 평화 조약을 맺고 칼리파 직을 양위했는데, 이 조약에는 무아위야 사후 칼리파 선출 방식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존재한다. 하산은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이 조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9]
2. 3. 야지드 1세의 칼리파 계승과 반발

656년 제3대 칼리파 우쓰만이 반란군에 의해 암살당한 후, 메디나 시민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칼리파로 선포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동료들과 아이샤는 알리를 인정하지 않고 슈라(협의)를 통한 새로운 칼리파 선출을 요구했다. 이는 제1차 피트나(제1차 이슬람 내전)를 일으켰다.[6] 661년 알리가 하와리지인 압드 알 라흐만 이븐 멀잠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의 장남 하산이 계승했지만, 곧 무아위야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6] 하산은 무아위야가 왕조를 세우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권력을 넘겨주었다.[7] 670년 하산 사후, 그의 동생 후세인이 바누 하심 족의 수장이 되었다.[8] 쿠파에서 아버지의 지지자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는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한 평화 조약을 준수했다.[5]
카르발라 전투는 야지드 1세의 계승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발생했다.[9] 676년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를 계승자로 지명했는데, 윌퍼드 마델룽은 이를 하산-무아위야 조약 위반으로 규정했다.[5] 이슬람 역사상 전례 없는 세습 계승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9]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에서 ''슈라''를 소집하여 외교와 뇌물로 대표들을 설득했다.[9] 마르완 이븐 알 하캄에게 메디나에서 발표하도록 명령했지만, 후세인, 압드 알라 이븐 알 주바이르, 압드 알라 이븐 우마르,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아비 바크르는 혈통을 주장하며 반대했다.[9] 무아위야는 메디나에서 압력을 가했지만, 그들은 지지를 거부했다.[9] 무아위야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충성을 얻어냈고, 야지드 계승에 대한 공개적 항의는 없었다. [9] 피츠패트릭과 워커는 야지드의 계승이 정부를 "협의제"에서 군주제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9] 680년 4월 무아위야는 야지드에게 후세인과 이븐 알 주바이르를 조심하고, 특히 후세인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경고했다.[9]
무아위야 사후, 후세인은 야지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메카로 갔다. 쿠파의 시아파는 후세인에게 편지를 보내 야지드를 용인하지 않고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고 밝혔다.[9] 후세인은 사촌을 보내 조사했지만, 쿠파의 새 통치자는 시아파를 분열시키고 후세인 측 지도자들을 투옥, 사촌을 처형했다. 쿠파는 혼란에 빠지고, 후세인은 고립되었다.[2] 후세인은 1,000명 군대에 막혔고, 쿠파나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10]
3. 카르발라로의 여정
무아위야 1세가 죽은 후, 후세인은 야지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메카로 갔다. 대부분이 시아파인 쿠파 사람들은 무아위야의 죽음에 기뻐했고, 후세인에게 더 이상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은 후세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9]
후세인은 조사를 위해 사촌 무슬림 이븐 아킬을 쿠파로 보냈다. 그러나 쿠파의 새로운 통치자인 우바이드 알라 이븐 지야드는 가혹한 통치와 매수 행위로 시아파를 분열시켰고, 후세인 측 세력의 지도자들을 투옥했으며, 조사를 위해 온 후세인의 사촌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쿠파는 혼란에 빠졌고, 후세인은 쿠파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립되었다.[2]
후세인은 쿠파로 가던 중 호르가 이끄는 1,000명의 군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야지드 군의 지휘관은 후세인이 쿠파나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10]
4. 전투 전개
무아위야 1세가 죽은 후, 야지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후세인은 가족과 함께 메카로 가서 4개월 동안 머물렀다. 대부분 시아파였던 쿠파 사람들은 무아위야의 죽음에 기뻐했고, 후세인에게 더 이상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충성을 맹세하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후세인은 조사를 위해 사촌을 보냈으나, 쿠파의 새로운 통치자의 결과로 사람들은 겁에 질려 그를 내버려 두었다.
호르는 천 명의 군대로 후세인을 막았고, 쿠파나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80년 10월 2일(이슬람력 61년 무하람월 2일) 후세인은 카르발라에 도착했고, 10월 3일 우마르 이븐 사드는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카르발라에 진을 쳤다. 이후 며칠 동안 다른 여러 군대가 도착했다. 10월 7일부터 군대는 후세인과 그의 동료, 가족들에게 물이 닿는 것을 막았다.
무하람월 9일, 샤마르 빈 디 알-슌은 4,000명의 사람들과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의 편지를 가지고 카르발라에 들어갔다. 편지에는 후사인과 싸워 그를 죽이고,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샤마르 빈 디 알 슌에게 명령을 넘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0월 10일 아침, 후세인은 동맹국들을 전쟁에 대비시켰다. 그는 쿠파 군대에게 자신의 가족이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의 가족이며, 무함마드가 자신과 자신의 형제 하산을 낙원에서 가장 훌륭한 청년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라고 요청하고, 자신에게 오라고 했던 그들을 질책했다. 그는 이슬람 땅 중 한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다시 야지드에게 항복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후세인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24]
야지드 군대의 지휘관 알 후르 이븐 야지드 알 타미미와 그의 아들은 후세인의 주장에 감명을 받아 후세인 군대에 합류했다. 알 후르 이븐 야지드 알 타미미는 쿠파 사람들을 비난했고, 결국 전장에서 전사했다. 하비브 이븐 마다히르는 쿠파 사람들에게 후세인의 말을 듣고 최소한 후세인을 죽이지 말라고 요청했다.[25]
쿠파 군단이 발포를 시작했고, 오른쪽에서 공격했지만 후세인 지지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그의 군대에게 백병전을 하고 멀리서만 사격할 것을 명령했다. 후사인과 그의 동료들은 전방에서만 전진할 수 있었고,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그의 군대에게 후사인의 천막을 사방에서 공격하도록 명령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샤마르 빈 디 알-슌은 여자와 아이들의 천막을 태우고 싶었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설득했다.[26]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후세인과 그의 형제 압바스가 남을 때까지 하나둘 광장으로 갔다. 압바스는 아이들을 위해 물을 길으러 가서 강에 이르러 물그릇을 채웠지만 스스로 물을 마시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공격을 받았고 500명의 저격수가 그를 쏘았다. 후세인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압바스는 중상을 입었다. 압바스는 아이들에게 물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났다.
후세인은 전쟁복을 벗었다. 그런 다음 그는 목이 마른 6개월 된 아기 알리 아스가르를 데리고 적군에게 아기를 위한 물을 요청했다. 하지만 호르말라는 아이의 목에 화살을 던졌다. 후세인은 아이의 피를 손에 쏟은 다음 그 피를 하늘에 뿌렸다.
후세인은 부상의 심각성으로 인해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혼자 싸웠다. 육군 대장은 그의 몸에서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했지만 샤마르 빈 디 알-슌이 그의 머리를 자르기 전까지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카르발라 전투는 680년 10월 10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27]
4. 1. 전력 비교
후세인의 군대는 70명에서 150명 사이였던 반면, 야지드의 군대는 최소 5,000명에서 최대 35,000명으로 추정된다.[22][23]5. 전투 결과 및 영향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의 죽음은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17] 야지드 1세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고, 그가 불경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퍼졌다.[16] 후세인의 가족과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혀 쿠파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으나,[14] 이후 메디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에 대한 반대를 촉발시켰고, 이는 결국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에 기여했다. 특히 압바스 혁명은 카르발라 전투를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했다.[16]
카르발라 전투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후세인과 그의 동료들을 순교자로 여기지만,[21]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이 사건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17] 시아파는 후세인을 순교자로 추앙하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종교 의식인 아슈라를 발전시켰다.[17]
역사가 제랄드 R. 호팅(Gerald R. Hawting)은 카르발라 전투를 "고통과 순교"라는 시아파적 가치의 대표적인 예시로 설명한다.[17] 압둘아지즈 사체디나는 카르발라 사건을 시아파가 겪은 고통과 억압의 정점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복수는 많은 시아파 봉기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마이클 피셔(Michael Fischer)는 시아파의 카르발라 사건 추모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는 행동 규범, 즉 '카르발라의 패턴'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이란 혁명 당시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지자들은 "모든 곳이 카르발라이고, 매일이 아슈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카르발라의 정신을 혁명에 투영했다.[18]
5. 1. 시아파 이슬람의 발전
카르발라 전투는 시아파 이슬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6] 이 사건으로 시아파는 독자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세인의 순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를 발전시켰다.[16] 시아파에게 후세인은 억압에 맞서 싸운 정의의 상징이자, 구원의 매개자로 여겨진다.카르발라 전투 이전, 무슬림 공동체는 두 개의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독특한 신학적 교리와 특정 의례를 가진 종교 종파는 발전하지 않았다.[16][17][18] 카르발라 전투는 알리 지지 세력에게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독립적인 종교 종파로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다.[16][19] 하인츠 할름(Heinz Halm)은 "680년 이전 시아파에는 종교적 측면이 없었다. 세 번째 이맘(이맘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의 죽음은 시아파라는 급속히 확장되는 우주를 창조하고 움직이게 만든 '빅뱅'을 의미한다."라고 썼다.[19]

시아파는 후세인의 카르발라에서의 죽음을 폭정적인 통치자들에 의한 이슬람의 타락을 막고 이슬람의 이념을 보호하기 위해 치른 희생으로 여긴다.[16] 그는 순교자들의 왕자(Sayyed al-Shuhada)로 기억된다.[16] 역사가 G. R. 호팅(G. R. Hawting)은 카르발라 전투를 시아파에게 있어 "고통과 순교"의 "최고의" 예로 묘사한다.[17] 압둘아지즈 사체디나(Abdulaziz Sachedina)에 따르면, 시아파는 이것을 고통과 억압의 절정으로 보고, 그 복수는 많은 시아파 봉기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20]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의 죽음은 무슬림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다.[17] 야지드 1세의 이미지는 손상되었고, 그가 불경한 자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16] 이 사건은 수니파에게도 정서적 영향을 미쳤다.[17] 수니파는 이 사건을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하며, 후세인과 함께 죽은 사람들을 순교자로 여긴다.[21]
시아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의 묘소 순례가 신의 축복과 보상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며,[16] 후세인을 위한 애도가 사후 구원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22] 시아파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첫 방문은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인 알아비딘과 시리아에서 메디나로 돌아오는 길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수행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방문은 술라이만 이븐 수라드와 참회자들이 시리아로 출발하기 전에 후세인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슬퍼하며 가슴을 치고 무덤 옆에서 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23]

후세인이 죽은 후, 그의 가족이 이븐 지야드에게 끌려갈 때, 후세인의 누이 자이납은 그의 머리가 잘린 시체를 보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오, 무함마드여!... 보십시오, 후세인이 피투성이로 찢겨진 몸으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 무함마드여! 당신의 딸들은 포로가 되었고, 당신의 자손들은 죽었으며, 동풍이 그들에게 먼지를 날립니다."[24]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것을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통곡과 애도의 사례로 생각한다.[16]

무하람 달에는 카르발라 전투를 기념하는 정교한 공개 행렬이 거행된다. 후세인의 묘소 순례와 단순한 애도와는 달리, 이러한 행렬은 10세기에 발생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963년 첫 번째 부이족 통치자 무이즈 알 다울라 통치 시대 바그다드에서 있었다.[22] 행렬은 후세이니야에서 시작하여 참가자들은 맨발로 거리를 행진하며, 통곡하고 가슴과 머리를 치며 후세이니야로 돌아와 마즐리스를 갖는다.[16][21] 때로는 사슬과 칼을 사용하여 상처를 내고 신체적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21] 남아시아에서는 후세인의 전투마를 상징하는 화려하게 장비를 갖춘 말인 ''줄자나''가 기수 없이 거리를 행진하기도 한다.[25] 이란에서는 카르발라 전투 장면이 ''타지야''(열정극)라고도 알려진 ''샤비흐''라는 의식으로 관객 앞 무대에서 공연된다.[19][21]
이란 혁명 또한 카르발라 전투에 영향을 받았다. 이란 이슬람 혁명 동안,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지자들은 종종 “카르발라. 모든 곳이 카르발라다.”라는 구절을 외쳤고, 이는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다.[18]
5. 2. 아슈라와 추모 의식
시아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여기며, 매년 이슬람력 무하람 월 10일 아슈라를 기념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19] 이 날은 금식, 애도 행렬, 타지예(카르발라 전투를 재현하는 연극) 등 다양한 종교 의식을 통해 후세인의 희생을 기린다.[20] 특히 이라크 카르발라에서는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 대규모 추모 행렬을 벌인다.
시아파 전통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인 알 아비딘과 살아남은 가족들이 시리아에서 메디나로 돌아오는 길에 후세인의 묘소를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방문은 술라이만 이븐 수라드와 참회자들이 시리아로 출발하기 전에 후세인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슬퍼하며 가슴을 치고 무덤 옆에서 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시아파는 후세인을 위한 애도가 사후 구원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고통을 기리는 행위로 여긴다. 후세인이 죽은 후, 그의 가족이 이븐 지야드에게 끌려갈 때, 후세인의 누이 자인압은 그의 머리가 잘린 시체를 보고 "오, 무함마드여!... 보십시오, 후세인이 피투성이로 찢겨진 몸으로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것을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통곡과 애도의 사례로 생각한다. 후세인의 아들 자인 알 아비딘은 남은 생애를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며 보냈다고 전해지며, 이를 위해 마련된 장소인 후세이니야에서 특별 모임(''마즐리스'')이 열린다.
무하람 달에는 카르발라 전투를 기념하는 공개 행렬이 거행된다. 행렬은 후세이니야에서 시작하여 참가자들은 맨발로 거리를 행진하며, 통곡하고 가슴과 머리를 치며 후세이니야로 돌아와 마즐리스를 갖는다. 남아시아에서는 후세인의 전투마를 상징하는 화려하게 장식된 말인 줄자나가 기수 없이 거리를 행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의 대부분은 무하람 첫 열흘 동안 진행되며 10일째 절정에 이른다. 인류학자 마이클 피셔는 시아파의 카르발라 전투 기념은 단순히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범과 행동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5. 3. 정치적 영향
카르발라 전투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결국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특히 압바스 혁명은 카르발라 전투를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했다.[16] 무슬림들은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을 카르발라에서 순교한 것으로 여긴다.[16]
역사가 제랄드 R. 호팅(Gerald R. Hawting)은 카르발라 전투를 "고통과 순교"라는 시아파적 가치의 대표적인 예시로 설명한다.[17] 압둘아지즈 사체디나(Abdulaziz Sachedina)는 카르발라 사건을 시아파가 겪은 고통과 억압의 정점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복수는 많은 시아파 봉기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마이클 피셔(Michael Fischer)는 시아파의 카르발라 사건 추모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는 행동 규범, 즉 '카르발라의 패턴'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이란 혁명 당시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지자들은 "모든 곳이 카르발라이고, 매일이 아슈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카르발라의 정신을 혁명에 투영했다.[18]
후세인은 "나 같은 사람은 야지드와 같은 자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후세인의 죽음은 무크타르의 봉기 때 처음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데, 그는 "후세인의 복수"를 기치로 내걸고 쿠파를 장악했다.[1] 참회자들 역시 같은 구호를 사용했다.[1] 압바스 왕조는 우마య్యా 왕조를 몰아내고 후세인의 죽음에 복수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했다.[1] 초기 압바스 왕조 통치자들은 무하람 의식을 장려하기도 했다.[1] 부이족은 무하람 공개 의식을 장려하여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체성을 강화했다.[1] 1501년 이란을 장악한 사파비 왕조는 십이이맘파를 국교로 선포하고, 카르발라와 무하람 의식을 왕조의 선전 도구이자 시아파 정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1] 리자 일디림은 사파비 혁명의 원동력이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고 주장했다.[1] 카자르 왕조 역시 무하람 의식을 후원하여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1]
20세기와 21세기, 이란, 이라크, 레바논 등지의 시아파들은 카르발라에서의 후세인의 순교를 억압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해 왔다. 이들은 후세인을 일상생활의 모범으로 삼아, 반(反)시아파 세력에 대한 저항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다.[1]
1979년 이란 혁명에서 카르발라 전투와 시아파 상징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1] 혁명 이전, 자랄 알레 아흐마드, 알리 샤리아티, 네마톨라 살레히 나자파바디와 같은 지식인들은 시아파 이슬람과 카르발라를 새롭게 해석하여, 시아파를 폭정과 착취에 맞선 혁명과 정치 투쟁의 이념으로 제시했다.[1] 이들은 카르발라 전투와 후세인의 죽음을 혁명적 투쟁의 모델로 보았으며, 울음과 애도를 후세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란 샤의 백색혁명에 반대하며 샤를 그의 시대의 야지드로 규정했다.[1] 호메이니는 이란 군주제를 비난하며 "카르발라에서 알-후세인의 투쟁은 비이슬람적인 군주제 원칙에 대한 투쟁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된다"고 썼다.[1] 샤에 대한 반대는 후세인의 야지드에 대한 반대와 비교되었고, 무하람 의식 집회는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1] 혁명 이후 수립된 이슬람 공화국은 무하람 의식을 장려해왔고, 성직자들은 선거 참여를 후세인의 정신과 비슷한 "정치적 활동"으로 장려한다.[1]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란군에서는 후세인의 죽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순교 정신이 자주 목격되었다.[1] 레바논 시아파 조직인 헤즈볼라는 후세인이 자신과 가족을 죽이려는 자들과 싸운 것을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그리고 남레바논군과의 갈등에 비유하며, 이들에 대한 순교 작전에서 사망한 헤즈볼라 대원들은 영광스럽고 영웅적인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1]
6. 역사적 평가와 논쟁
카르발라 전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주로 아부 미크나프의 ''키타브 마크탈 알-후세인''(كتاب مقتل الحسين)을 바탕으로 한다.[1] 이 기록은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의 ''선지자와 왕들의 역사''와 아흐마드 이븐 야히야 알-발라두리의 ''안사브 알-아슈라프'' 같은 2차 자료를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1] 아부 미크나프는 카르발라 전투 이후 약 20년 뒤의 인물로, 많은 목격자들을 알고 있었고 직접적인 증언을 수집했다.[2]
율리우스 벨하우젠에 따르면, 목격자들 대부분은 전투에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후세인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과장했다.[3] 그러나 이라크인인 아부 미크나프는 알리 옹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보고서에는 일반적으로 그의 편견이 많이 담겨 있지 않다고 평가받는다.[4]
타바리와 알-발라두리 외에도 디나와리, 야쿠비 등의 저술에서도 전투에 대한 정보가 발견되는데, 이 또한 아부 미크나프의 ''마크탈''에 기반을 두고 있다.[1]
초기 자료들은 주로 역사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후대 문헌은 성행록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5]
카르발라 전투는 초기 기독교 자료에도 보고되었다. 시리아 기독교 학자 에데사의 테오필루스의 역사에는 후세인과 그의 부하 대부분이 갈증으로 고통받은 후 전투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6] 그러나 테오필루스는 후세인이 무아위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는데, 이는 후세인이 야지드와 싸웠다고 명시하는 무슬림 자료와는 다르다.[6]
전투 시간에 대해, 칼리프 야지드에게 보낸 공식 보고서는 낮잠보다 짧았다고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7] 라멘스는 전투가 전혀 없었고 단 한 시간 만에 끝난 빠른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며, 1차 사료의 상세한 기록은 이라크인들의 날조라고 주장한다.[7]
반면, 라우라 베치아 바글리에리는 일부 날조된 기록이 있음에도 모든 당대 기록이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는 서술"을 형성한다고 반박한다.[8] 윌퍼드 마델룽과 벨하우젠은 전투가 해돋이부터 해질녘까지 지속되었고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은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한다.[9] 바글리에리와 마델룽은 이븐 사드가 후세인을 압도하여 재빨리 죽이려고 시도하는 대신 전투를 지연시켜 항복을 받아내려고 시도한 결과라고 설명한다.[8][9]
야지드가 후세인의 가족에게 보여준 동정심에 대해 벨하우젠은 연극이었다고 주장하며, 후세인을 죽인 책임은 야지드에게 있다고 주장한다.[10] 마델룽도 비슷한 견해로, 초기 기록은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야지드가 아닌 이븐 지야드에게 돌린다고 본다.[9]
후세인의 봉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벨하우젠은 후세인의 반란을 야심찬 인물의 조급하고 준비 부족한 작전이었다고 묘사했다.[11] 라멘스는 후세인을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인물로 보았다.[12]
반면, 바글리에리는 전해지는 자료들이 진정한 것이라면, 후세인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결심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13] 마델룽은 후세인이 경건한 신념에 이끌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9] 마리아 다카케는 후세인이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를 억압적이고 잘못되었다고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14]
후세인 무하마드 자프리는 후세인이 처음부터 무슬림 공동체의 집단적 양심을 일깨우고 우마이야 왕조의 억압적인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순교를 목표로 했다고 주장한다.[15]
7. 문화적 영향
시아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의 묘소 순례를 통해 신의 축복과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시아파 전통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인 알 아비딘과 생존한 가족들이 시리아에서 메디나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묘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첫 방문은 술라이만 이븐 수라드와 참회자들이 시리아로 떠나기 전 후세인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슬퍼하며 가슴을 치고 무덤 옆에서 밤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이 전통은 시아파 이맘들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여섯 번째 시아파 이맘 자파르 사디크와 그의 추종자들 아래서 활기를 띠었다. 부이족과 사파비 왕조도 이 관행을 장려했다. 무하람 10일 (''아슈라'' 순례)과 후세인의 기일 40일 후 (''아르바인'' 순례)에 특별 방문이 이루어진다. 카르발라의 흙은 기적적인 치유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다.
시아파는 후세인을 위한 애도가 사후 구원의 근원이며, 그의 고통을 기리는 행위로 여긴다. 후세인이 죽은 후, 그의 가족이 이븐 지야드에게 끌려갈 때, 후세인의 누이 자이납은 그의 머리가 잘린 시체를 보고 "오, 무함마드여!... 보십시오, 후세인이 피투성이로 찢겨진 몸으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 무함마드여! 당신의 딸들은 포로가 되었고, 당신의 자손들은 죽었으며, 동풍이 그들에게 먼지를 날립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것을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통곡과 애도의 사례로 본다. 후세인의 아들 자인 알 아비딘은 남은 생애를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며 보냈다고 한다. 후세인의 어머니 파티마는 낙원에서 그를 위해 울고 있다고 믿어지며, 신자들의 통곡은 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후세이니야에서 특별 모임 (''마잘리스''; 단수 ''마즐리스'')이 열린다. 이러한 모임에서 카르발라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문 낭송자 (''라우다 쿠완'')들이 다양한 애가 (''라우다'')를 낭송한다.
무하람 달에는 카르발라 전투를 기념하는 공개 행렬이 거행된다. 후세인의 묘소 순례와는 달리, 이러한 행렬은 10세기에 발생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963년 부이족 통치자 무이즈 알 다울라 통치 시대 바그다드에서 있었다. 행렬은 후세이니야에서 시작하여 참가자들은 맨발로 거리를 행진하며, 통곡하고 가슴과 머리를 치며 후세이니야로 돌아와 마즐리스를 갖는다. 때로는 사슬과 칼을 사용하여 상처를 내기도 한다. 남아시아에서는 후세인의 전투마를 상징하는 ''줄자나''가 기수 없이 거리를 행진한다. 이란에서는 카르발라 전투 장면이 ''타지야''(열정극)라고도 알려진 ''샤비흐''라는 의식으로 공연된다. 인도에서는 ''타지야''는 행렬에서 운반되는 후세인의 묘소 모형과 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의 대부분은 무하람 첫 열흘 동안 진행되며 10일째 절정에 이르지만, 마잘리스는 일년 내내 열릴 수도 있다. 과거에는 마잘리스와 행렬에 참여하는 수니파도 가끔 관찰되었다. 이츠하크 나카시에 따르면, 무하람 의식은 "카르발라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시아파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류학자 마이클 피셔는 카르발라 전투의 기념은 "삶의 모범과 행동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올모 괴르츠에 따르면, 카르발라 패러다임은 시아파에게 영웅적인 규범과 순교자 정신을 제공하며,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사이의 투쟁을 구현한다. 자기 채찍질을 포함한 의식은 시아파 학자들에 의해 혁신적인 관행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시아파의 명성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1994년 이후 이란에서 이 관행을 금지했다.
남아시아 철학자이자 시인인 무함마드 이크발은 후세인의 희생을 이시마엘의 희생과 유사하게 보고, 야지드의 후세인에 대한 반대를 파라오의 모세에 대한 반대와 비교한다. 우르두 시인 갈리브는 후세인의 고난을 10세기 수피 만수르 알 할랄지의 고난과 비교한다.
`마크탈`(복수형 `마카틸`) 문헌은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알리, 우스만 등의 죽음에 관한 `마카틸`이 쓰여졌지만, `마크탈` 장르는 주로 후세인의 죽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부 미크나프의 `마크탈` 외에도 후세인에 관한 다른 아랍어 `마카틸`이 쓰여졌다. 이들 대부분은 역사와 전설을 혼합하고 있으며, 후세인의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의 탄생일은 무하람 10일로, 사망일과 일치한다고 한다. 우주와 인류는 아슈라(무하람 10일)에 창조되었다는 묘사도 있다. 아슈라는 아브라함과 무함마드의 탄생일이자, 예수의 승천일이었고, 여러 예언자들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고 주장된다. 후세인은 여러 기적을 행했고, 수천 명의 우마이야 공격자들을 죽였다고 주장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후세인이 죽자 그의 말이 눈물을 흘리며 많은 우마이야 병사들을 죽였고, 하늘이 붉게 변하고 피가 비처럼 내렸으며, 천사, 진과 야생 동물들이 울었고, 후세인의 잘린 머리에서 빛이 나와 꾸란을 낭송했으며, 그의 살해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마크탈`은 페르시아어, 터키어, 우르두어 문학에 들어왔고, `라우다`의 발전에 영감을 주었다.
16세기 이란에서 시아파가 공식 종교가 되자, 샤 타흐마스프 1세와 같은 사파비 왕조 통치자들은 카르발라 전투에 관한 시를 쓴 시인들을 후원했다. 페르시아 학자 휠러 택스턴에 따르면, 마르티야(marthiya) 장르는 "사파비 왕조에 의해 특히 많이 발전되었다." 여러 페르시아 작가들은 전투와 그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각색하고 종합한 텍스트를 저술했다. 사이드 알-딘의 『라우다트 알-이슬람』과 알-콰와리즈미의 『막탈 누르 알-아임마』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라우다트 알-슈하다』(순교자들의 정원)의 작문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 책은 1502년 후세인 와이즈 카셰피에 의해 쓰여졌다. 카셰피의 작품은 마잘리스(majalis)에서 전투 사건을 의례적으로 재구성하는 라우다 크와니(rawda khwani)의 발전에 효과적인 요인이 되었다.
『라우다트 알-슈하다』에서 영감을 받은 아제르바이잔 시인 푸줄리는 그의 작품 『하디카트 알-수아다』에서 이를 축약하고 단순화된 버전으로 오스만 튀르크어로 썼다. 이는 알바니아어로 쓰인 작품들에 영향을 미쳤다. 달립 프라셰리의 『코프슈티 이 테 미레베트』(선의 정원)는 알바니아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카르발라 전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프라셰리는 순교자로 죽은 사람들을 칭송한다.
우르두어 마르티야는 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며, 카르발라 전투의 애가에 집중한다. 비자푸르 (알리 아딜 샤)와 골콘다 술탄국( 무함마드 쿨리 꾸트브 샤 )의 남인도 통치자들은 시의 후원자였으며, 무하람에 우르두어 마르티야 낭송을 장려했다. 그 후 우르두어 마르티야는 인도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유명한 우르두어 시인 미르 타키 미르, 미르자 라피 사우다, 미르 아네스, 미르자 살라마트 알리 다비르도 마르티야를 작곡했다. 칼 마르크스와 후세인을 비교하면서, 조시 말리하바디는 카르발라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혁명적 투쟁의 모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피즘에서 자아 소멸(나프스)과 신의 길에서의 고난이 최고의 원칙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후세인은 모범적인 수피로 여겨진다. 페르시아 수피 시인 사나이(하킴 사나이)는 후세인을 순교자로 묘사하며, 세상의 다른 모든 순교자들보다 높은 계급에 있다고 말한다. 아타르(파리드 우드-딘 아타르)는 그를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한 수피의 원형으로 여긴다. 르미(잘랄 우드-딘 르미)는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의 고통을 신과의 합일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묘사하며,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문제로 여긴다. 신드어 수피 시인 샤 아브둘 라티프 비타이는 그의 저서 《샤 조 리살로》에서 후세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애가와 비가로 기억한다. 그 또한 후세인의 죽음을 신의 길에서 이루어진 희생으로 보고, 야지드를 신의 사랑이 없는 자로 비난한다. 터키 수피 유누스 엠레는 그의 노래에서 후세인과 그의 형 하산을 "순교자들의 원천"이자 "낙원의 왕"으로 부른다.
이슬람 성직자들이 초기 이슬람 인물들의 그림 묘사를 반대해 왔지만, 이란의 타지야(taziya) 열정극의 인기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형태로 이러한 묘사에 대한 대중의 수용을 용이하게 했다. 샤마예르(shamayel) 또는 파르다(parda)라고 불리는 이 그림들은 카자르 시대에 유래되었으며, 타지야 장면을 위한 대중적인 표현으로 의도되었다. "만화 스타일" 그림은 일반적으로 한 캔버스에 여러 전투 장면과 후생의 장면을 묘사하며, 후세인과 그의 지지자들이 천국에서 즐기는 모습과 적들이 지옥에서 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종종 후세이니야(husayniyyas)를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샤마예르는 이후 장면들이 벽에 직접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벽화로 발전했다.
8. 한국의 관점 및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참고)
카르발라 전투는 한국의 중도진보 성향 사람들에게 억압에 대한 저항과 정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에서는 후세인의 희생을 억압적인 권력에 맞선 투쟁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할 수 있다.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의 죽음은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시아파 이슬람에서는 그의 죽음을 폭정에 맞선 희생으로 기린다.[1] 시아파는 카르발라 전투를 고통과 억압의 절정으로 보며, 이 사건을 통해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정신을 강조한다.[2]
1979년 이란 혁명에서 카르발라 전투와 시아파 상징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루홀라 호메이니는 당시 이란 샤를 '예지드'에 비유하며, 카르발라에서의 투쟁을 비이슬람적인 군주제에 대한 투쟁으로 해석했다.[4] 이처럼 카르발라 전투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억압에 맞서는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카르발라 전투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존중하며, 이를 통해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고, 억압에 맞서는 용기를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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