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뷔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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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뷔허는 독일의 경제학자, 언론학자, 사회학자이다. 헤세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에서 역사와 고전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널리스트와 김나지움 교사로 활동하다가 뮌헨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여 학계에 진출했다. 타르투 대학교, 바젤 대학교, 칼스루에 기술 전문 학교를 거쳐 189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경제학을 가르쳤다. 뷔허는 《국민 경제의 발생》, 《노동과 리듬》 등의 저서를 통해 경제사 및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191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독일 최초의 신문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미디어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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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뷔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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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카를 뷔허 |
원어 이름 | Karl Bücher |
출생 | 1847년 2월 16일 |
출생지 | 키르베르크 |
사망 | 1930년 11월 12일 |
사망지 | 카를스루에 |
국적 | 독일 |
직업 | 경제학자, 언론학자, 통계학자 |
분야 | 국민경제학, 언론학, 통계학 |
배우자 | 엠마 루테르 |
영향 받은 인물 | 카를 마르크스 |
영향 준 인물 | 베르너 좀바르트 |
학력 | |
모교 | 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경력 | |
재직 | 도르파트 대학교 바젤 대학교 에를랑겐 대학교 카를스루에 공과대학 라이프치히 대학교 |
학문 활동 | |
소속 | 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 (신문학 연구소) |
수상 | |
수상 내역 |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 |
기타 정보 | |
참고 |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언론학자 |
2. 생애
카를 뷔허는 1847년 헤세의 작은 마을 키르베르크에서 태어나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본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역사와 고전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잠시 김나지움 교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자유주의적이고 비스마르크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후 학계로 돌아와 뮌헨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마쳤다.
그의 교수 경력은 러시아 제국의 타르투 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곳에서 민족지학, 지리학, 통계학을 가르치고 '신문학'(Zeitungswissenschaftende) 개념을 처음 구상했다. 이후 스위스 바젤 대학교와 독일 칼스루에 공과대학교를 거쳐 189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경제학 및 통계학 교수로 부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그의 학문적 전성기를 맞이하여 ''국민 경제의 발생''(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de)과 ''노동과 리듬''(Arbeit und Rhythmusde) 등 중요한 저작을 출판하고, 대학 행정에도 참여하며 총장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언론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6년 유럽 최초의 '신문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3]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 때문에 교수 임용 과정에서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학문적 업적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독일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초기 생애 (1847년 ~ 1870년)
카를 뷔허는 헤세의 작은 마을인 키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솔 제조공이자 농부였으며, 할아버지 필리프는 가구 제조공이었다. 어머니 크리스티안 도른은 빵집 주인의 딸이었다. 뷔허는 인근 다우본의 목사가 운영하는 사립 예비 학교를 다녔고, 1863년부터 1866년까지는 하더마르의 가톨릭 김나지움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전직 교사가 대학교 진학을 권유했고, 오랜 논의 끝에 부모님도 이에 동의했다.2. 2. 학문적 성장과 활동 (1870년 ~ 1892년)
본 대학교에서 역사와 고전학을 공부한 뷔허는 김나지움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의 학문적 스승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대사학자 아르놀트 셰퍼였다. 학비 마련을 위해 잠시 개인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괴팅겐과 본에서 학업을 이어가 1870년 역사 및 비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박사 학위 취득 후 잠시 김나지움 교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그의 자유주의적이며 비스마르크에 비판적인 견해가 잘 알려져 있었다. 이후 학계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뮌헨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마쳤다.
1882년, 뷔허는 에를랑겐 대학교의 특별 교수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장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에 위치한 독일어 사용 대학인 타르투 대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수락했다. 이 덕분에 약혼녀였던 에밀리 미터마이어와 결혼할 수 있었다. 타르투 대학교에서는 빌헬름 슈티에다의 후임으로 민족지학, 지리학, 통계학 교수를 맡았으며, 주로 통계학 연구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그는 '신문학'(Zeitungswissenschaftende)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883년 8월에는 외아들 프리드리히가 태어났다.
1883년, 가족 관련 사유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경제학 및 통계학 교수직 제안을 받아들여 알폰스 툰의 후임이 되었다. 그는 1890년까지 바젤에 머물렀으며, 이 기간 동안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문화 철학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뷔허는 통계경제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연구는 주로 바젤 지역에 초점을 맞춘 통계적인 성격을 띠었다. 또한 바젤에서 유럽 최초로 '신문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1889년에서 1890년 사이, 뷔허는 바덴 대공국 칼스루에에 위치한 기술 전문 학교의 경제학 교수직 제안을 수락하여 에베르하르트 고테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후 작센 왕국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루요 브렌타노의 후임으로 경제학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여전히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문제되어 정치적인 이유로 초기 임용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대학교 측에서 통계학 분야를 추가하여 경제학 두 번째 교수직을 신설했고, 뷔허는 만장일치로 이 자리에 추천되어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1892년부터 라이프치히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2. 3.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 시절 (1892년 ~ 1926년)
작센의 라이프치히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루요 브렌타노의 후임으로 뷔허를 초빙하려던 계획은 그가 너무 자유주의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대학 측은 통계학을 추가하여 경제학 분야에 두 번째 교수직을 신설했고, 뷔허는 만장일치로 이 자리에 추천되어 1892년 공식적인 승인을 받고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라이프치히에서 교수로 재직한 기간(1892년 ~ 1916년)은 뷔허의 학문적 경력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1893년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자 비시장 경제(교환 및 선물 경제) 연구의 기초를 다진 ''국민 경제의 발생''(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de)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초판의 17번째이자 마지막 판이 출간되었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는 6판까지 인쇄되었다. 1895년에는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역사학과의 통신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96년에는 ''노동과 리듬''(Arbeit und Rhythmusde)을 출판했으며, 이 책은 1924년까지 6판이 발행되었고 1899년에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1923년에 재판되었다.[1]
1901년, 뷔허는 알베르트 셰플레와 함께 ''모든 정치 과학 저널''(Zeitschrift für die gesamte Staatswissenschaftde)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이 저널은 1844년 창간된 독일 최초의 학술 경제학 저널로, 오늘날 "제도 및 이론 경제학 저널"로 이어지고 있다. 뷔허는 1904년부터 단독 편집자를 맡아 1924년까지 이 중요한 독일 경제학 및 행정학 저널을 이끌었다.[2] 그는 대학 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1901/1902년에는 철학부 부학장을, 1902/1903년에는 철학부 학장을, 그리고 1903/04년에는 총장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언론과 선전 활동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191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럽 최초의 '신문 과학 연구소'(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de) 설립을 주도했으며, 1926년까지 연구소를 이끌었다.[3] 1919년 독일 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는 공장의 사회화에 관한 소책자와 그의 성공적인 자서전인 ''삶의 기억''(Lebenserinnerungende)을 출판했다.
뷔허는 한때 라이프치히 시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기센 대학교에서 법학 명예 박사(Dr.jur.h.c.) 학위를, 본 대학교에서 경제학 명예 박사(Dr.rer.pol.) 학위를 받았다. 또한 작센 왕립 ''게하이머 호프라트''(Geheimer Hofratde, 추밀고문관)이자 작센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2. 3. 1. 신문학 연구소 설립과 언론 연구
뷔허는 타르투 대학교(당시 도르파트) 재직 시절부터 "신문학"(Zeitungswissenschaftende)을 새로운 학문 분야로 구상했으며, 이후 바젤 대학교에서는 유럽 최초로 신문학 관련 강의를 진행했다.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언론과 선전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을 바탕으로, 뷔허는 191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신문 과학 연구소'(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de)를 설립했다. 이는 이미 1915년에 관련 부서를 만든 데 이은 것으로, 유럽 최초의 신문학 전문 연구소였다. 이 연구소의 설립은 독일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뷔허는 1926년까지 연구소 소장을 맡아 신문학 분야를 발전시키고 독일 학계에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주요 저서 및 연구
카를 뷔허는 역사학 연구로 학문 경력을 시작했으나, 이후 통계학, 경제학, 그리고 자신이 개척한 "신문학"(Zeitungswissenschaften|차이퉁스비센샤프텐deu) 분야로 연구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의 학문적 여정은 저널리즘 활동 경험과 자유주의적 시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저널리스트 활동 시기에는 자유주의적이며 반비스마르크적인 소신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 임용 과정에서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통계학을 포함한 경제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뷔허의 학문적 성과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재직 시기(1892–1916)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출판했다. 1893년에는 비시장 경제 연구의 기초를 놓은 ''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 (국민 경제의 발생)을 출간했으며, 1896년에는 ''Arbeit und Rhythmus'' (노동과 리듬)를 출판하여 노동과 인간 활동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1] 이 두 저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뷔허는 저술 활동 외에도 학술 저널 편집과 새로운 학문 분야 개척에도 힘썼다. 1901년부터 저명한 경제학 저널인 ''Zeitschrift für die gesamte Staatswissenschaft|차이트슈리프트 퓌어 디 게잠테 슈타츠비센샤프트deu'' (모든 정치 과학 저널)의 공동 편집자를 맡았고, 1904년부터는 단독 편집자로 활동하며 1924년까지 저널을 이끌었다.[2]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언론과 선전의 영향력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191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럽 최초의 ''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인스티투트 퓌어 차이퉁스비센샤프텐deu'' (신문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독일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3] 뷔허는 1926년까지 이 연구소를 이끌며 신문학을 학문 분야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19년에는 독일 혁명 이후 공장 사회화에 대한 소책자와 함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 ''Lebenserinnerungen|레벤스에리너룽엔deu'' (삶의 기억)을 출판하기도 했다.
3. 1. 국민 경제의 발생 (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
뷔허의 라이프치히 대학교 재직 시기(1892–1916)는 그의 학문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893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는 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디 엔트슈테훙 데어 폴크스비르트샤프트de (국민 경제의 발생)을 출판했다. 이 책은 비시장 경제, 즉 교환이나 선물 경제와 같은 형태를 다룬 기초 연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초판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어 17번째이자 마지막 판은 1926년에서 1930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또한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6판까지 출판될 정도로 학계에 널리 읽히고 영향을 미쳤다.3. 2. 노동과 리듬 (Arbeit und Rhythmus)
카를 뷔허는 1896년에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Arbeit und Rhythmus|아르바이트 운트 리트무스deu'' (노동과 리듬)를 출판했다. 이 책은 1924년까지 독일에서 6판이 출판될 정도로 꾸준히 주목받았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1899년에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1923년에 재판되었다.[1]4. 학문적 업적 및 영향
뷔허의 학문 활동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재직 기간(1892–1916)에 정점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그는 주요 저작들을 출판하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3년, 그의 대표작인 Die Entstehung der Volkswirtschaftde (국민경제의 발생)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비시장 경제(교환 및 선물 경제)에 대한 기초 연구로 평가받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정판(초판의 17번째이자 마지막 판은 1926–1930년 출판)이 나왔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는 6판까지 출판될 정도로 널리 읽혔다. 1896년에는 노동과 리듬의 관계를 다룬 Arbeit und Rhythmusde (노동과 리듬)를 출판했으며, 이 책 역시 1924년까지 6판이 출판되었고 1899년에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1]
뷔허는 언론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타르투 대학교(당시 도르파트) 재직 시절 "신문학"(Zeitungswissenschaftende)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구상했으며, 바젤 대학교에서는 유럽 최초로 신문학 관련 강의를 진행했다. 이러한 관심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언론과 선전 활동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16년,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럽 최초의 신문학 연구 기관인 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de (신문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독일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3], 뷔허는 1926년까지 연구소를 이끌며 이 분야를 발전시키고 독일 학계에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뷔허는 1901년부터 알베르트 셰플레와 함께, 1904년부터는 단독으로 Zeitschrift für die gesamte Staatswissenschaftde (모든 정치 과학 저널)의 편집을 맡았다. 이 저널은 1844년에 창간된 독일 최초의 학문적 경제학 저널로, 뷔허는 1924년까지 편집자로 활동하며 독일 경제학 및 행정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2]
이 외에도 뷔허는 1919년 독일 혁명 시기 공장의 사회화에 관한 소책자를 출판했으며, 그의 자서전인 Lebenserinnerungende (삶의 기억) 역시 같은 해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기센 대학교에서 법학 명예 박사(Dr.jur.h.c.), 본 대학교에서 경제학 명예 박사(Dr.rer.pol.) 학위를 받았으며, 작센 왕립 Geheimer Hofratde이자 작센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그의 초기 활동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적이며 반비스마르크적인 성향은 그의 학문적 관심과 사회 참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뷔허는 젊은 시절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유주의적이고 반비스마르크적인 입장을 견지한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또한 한동안 라이프치히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학문적 성취 외에도 다양한 영예를 안았다. 기센에서 법학 명예 박사(Dr.jur.h.c.) 학위를, 본에서 경제학 명예 박사(Dr.rer.pol.)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작센 왕립 ''Geheimer Hofrat''의 일원이었으며, ''작센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언론과 선전의 폐해를 목격한 경험은 그가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 뷔허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럽 최초의 ''Institut für Zeitungswissenschaften'' (신문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다.[3] 이는 독일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학문적 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뷔허는 1926년까지 연구소를 이끌며 신문학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1919년 독일 혁명 이후에는 공장의 사회화에 대한 소책자를 출판하여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으며, 같은 해 자서전 ''Lebenserinnerungen'' (삶의 기억)을 출간했다.
참조
[1]
서적
Literaturnaia Entsiklopediia
http://feb-web.ru/fe[...]
Kom. Akam.
[2]
서적
The History of Economics
Springer
[3]
학술지
Institute of Communication and Media Studies (University of Leipzig)
SAGE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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