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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체릴 라만 나라야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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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체릴 라만 나라야난은 1921년 케랄라 주에서 태어난 인도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인도의 대통령을 지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해럴드 래스키에게 사사했으며 외교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부통령을 역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사회경제적 정의를 강조하고, 소외 계층의 권익 보호에 힘썼으며, 대통령 재량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인도 독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주재하고, 카르길 전쟁 중에도 국가를 이끌었으며, 퇴임 후에도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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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체릴 라만 나라야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0년의 나라야난
나라야난 (2000년)
출생일1920년 10월 27일
출생지우자부르, 트라방코르 왕국, 영국령 인도 (현재 인도 케랄라주)
사망일2005년 11월 9일
사망지뉴델리, 델리, 인도
배우자우샤 나라야난 (1951년 6월 8일 결혼)
자녀2명 ( 치트라 나라야난 포함)
학력
모교케랄라 대학교 (BA, MA)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BSc)
공직
인도 대통령재임 기간: 1997년 7월 25일 – 2002년 7월 25일
총리: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부통령: 크리샨 칸트
이전 대통령: 샹카르 다얄 샤르마
다음 대통령: A. P. J. 압둘 칼람
인도 부통령재임 기간: 1992년 10월 27일 – 1997년 7월 24일
대통령: 샹카르 다얄 샤르마
총리: P. V. 나라심하 라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H. D. 데베 고다,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
이전 부통령: 샹카르 다얄 샤르마
다음 부통령: 크리샨 칸트
로크 사바 의원선거구: 오타팔람
이전 의원: A. K. 발란
재임 기간: 1984년 – 1992년
주미 인도 대사재임 기간: 1980년 – 1984년
이전 대사: 나나보이 팔키왈라
주중 인도 대사재임 기간: 1976년 7월 7일 – 1978년 11월 11일
다음 대사: 람 사테
서명

2. 어린 시절

코체릴 라만 나라야난은 1921년 2월 4일 인도 케랄라 주 우자부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유르베다 의술을 펼치던 아버지 코체릴 라만 바이디야르와 어머니 푼나투라베틸 파피야마 사이의 7남매 중 넷째였다.[5][6] 그의 가족은 파라바르 카스트에 속했는데, 가난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의학적 지식으로 존경받았다.[7] 그의 형제자매로는 바수데반, 닐라칸단, 고우리, 바스카란, 바르가비, 바라티가 있었다.

나라야난은 우자부르의 정부 하위 초등학교, 쿠리치타남, 레이디 오브 루르드 상위 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 학교 교육을 받았다.[6] 그는 매일 1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으며, 학비를 내지 못해 교실 밖에서 수업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은 책을 살 여유가 없었지만, 천식으로 집에 있던 형 K. R. 닐라칸탄이 다른 학생들에게서 책을 빌려 베껴서 나라야난에게 주곤 했다. 그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와 성 존 고등학교를 거쳐, 트라방코어 왕가의 장학금으로 C. M. S. 칼리지에서 중등 과정을 마쳤다.[8]

이후 나라야난은 트라방코어 대학교(현재의 케랄라 대학교)에서 문학사 명예 학사와 문학 석사 학위를 1등으로 취득하여, 트라방코어에서 이 학위를 받은 최초의 달리트가 되었다.[9]

3. 외교관 및 학자

인디라 간디의 요청으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 나라야난은 일본, 영국, 타이, 튀르키예 등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중국 대사 및 미국 대사 등을 역임했다. 교사, 신문 기자, 잡지 기자 등 저널리스트 경력도 가지고 있다. 영국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유학하여 해럴드 래스키에게 사사했다.[31]

4. 정치 경력

인디라 간디의 요청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한 나라야난은 1984년, 1989년, 1991년에 케랄라주 팔라카드의 오타팔람 선거구에서 로크 사바 의원으로 3번 연속 당선되었다. 라지브 간디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기획 및 외무 장관을,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인도의 특허 통제를 강화하려는 국제적인 압력에 저항했다.[96]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의회가 야당이었을 때 나라야난은 야당 의석에 앉았다. 1991년 의회가 다시 집권했을 때 그는 내각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케랄라 주 의회 장관이자 그의 정적이었던 칸노스 카루나카란은 나라야난이 "공산주의 동조자"이기 때문에 장관이 될 수 없다고 통보했다.[96] 그러나 카루나카란은 나라야난이 A. K. 발란과 레닌 라젠드란(두 번) 등 공산당 후보들을 모두 이겼다는 지적에 답변하지 못했다.[96]

4. 1. 부통령직 (1992-1997)

나라야난은 1992년 8월 21일 샹카르 다얄 샤르마 대통령 하에서 인도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이름은 처음에 전 총리이자 당시 자나타 달 의회당 대표였던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에 의해 제안되었다. 자나타 달과 의회 좌파 정당은 공동으로 그를 그들의 후보로 선언했고, 이것은 후에 P. V. 나라심하 라오 하의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어 그의 당선에 대한 만장일치의 결정으로 이어졌다.[43] 좌익 전선과의 관계에 대해 나라야난은 나중에[31] 자신은 공산주의의 신봉자도 맹목적인 반대자도 아니라고 밝혔다. 그들은 그의 이념적 차이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인도에 만연했던 특별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부통령으로서 그를 지지했다. 그는 그들의 지원으로부터 이익을 얻었고, 결국 그들의 정치적 지위는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92년 12월 6일 바브리 마스지드가 철거되었을 때, 그는 이 사건을 "마하트마 간디 암살 이후 인도가 직면한 가장 큰 비극"이라고 묘사했다.[4]

그는 로크 사바 선거에서 투표한 첫 대통령이었고 주의회에 연설하였다.

인도 부통령 K. R. 나라야난이 샨카르 데얄 샤르마 대통령과 만나는 모습

4. 2. 대통령직 (1997-2002)

나라야난은 1997년 7월 17일 인도 대통령 선거에서 95%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97] 이 선거는 소수 정부가 권력을 쥐고 있는 가운데 치러진 유일한 대통령 선거였다. T. N. 세산은 유일한 반대 후보였고, 시브 세나를 제외한 모든 주요 정당들이 나라야난을 지지했다.[98] 세산은 나라야난이 단지 달리트이기 때문에 당선되었다고 주장했다.

K. R. 나라야난이 인도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997년 7월 25일 중앙 의사당에서 대법원장 J. S. 베르마에 의해 인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연설[46]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 사회의 풀뿌리에서 시작하여 이 성스러운 땅의 먼지와 열기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국가의 최고 직책에 대한 합의를 찾았다는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제 우리 사회 및 정치 생활의 중심 무대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어떠한 개인적인 명예보다는 제 선거가 가지는 이러한 더 큰 의미입니다.

1921년 2월 4일 인도 남부 케랄라 주에서 최하층 카스트로 태어났다. 고학 끝에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해럴드 래스키에게 사사했다. 교사, 신문 기자, 잡지 기자 등 저널리스트를 거쳐, 외무부에 들어가 일본, 영국, 타이, 튀르키예 등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중국 대사미국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인도 국민 회의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외무 담당 국무 장관 등을 역임하고, 1992년 8월 부통령, 1997년 최하층 카스트 출신으로 처음 대통령에 취임했다.

재임 중 2000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인도-중국 관계 개선에 힘썼다. 2000년 8월,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가 나라야난 대통령을 예방했다.[87]

2002년 구자라트 주에서 이슬람교도 수천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다.[88][89][90] 나라야난은 종교적 소수자 보호를 위해 인도군 동원을 원했지만, 당시 의회 다수파였던 인도 인민당에 의해 저지되었다. 인도 인민당은 나라야난의 대통령직 2기 연임도 거부했다.

2005년 10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악화되어 뉴델리 육군 병원에 입원했으며, 11월 9일 사망했다. 향년 85세.

4. 2. 1. 인도 독립 50주년

인도 독립 50주년 기념 주요 행사는 1997년 8월 14일 밤에 열린 의회 특별 회기에서 K. R. 나라야난 대통령의 자정 연설이었다.[47] 이 연설에서 나라야난 대통령은 민주적인 정부 및 정치 체제 확립을 독립 이후 인도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다음 날 아침, I. K. 구자랄 총리는 레드 포트 성벽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48]

간디는 인도의 미래를 꿈꾸며 달리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날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간디의 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큰 행운입니다. K. R. 나라야난은 매우 가난하고 억압받는 가정 출신으로, 온 국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그는 라슈트라파티 바반에 새로운 자부심과 존경을 부여했습니다. 대통령이 이 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욱 기쁜 일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뒤처진 계층이 정당한 위치를 얻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자랑입니다. 오늘날 모든 국민, 소수 민족, 지정 카스트 [달리트] 또는 지정 부족 [아디바시] 출신 모두 국가 발전을 위해 단결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4. 2. 2. 선거 참여

1998년 총선에서 K. R. 나라야난은 평범한 시민처럼 줄을 서서 라슈트라파티 바반 단지 내 학교의 투표소에서 투표함으로써 투표한 최초의 현직 인도 대통령이 되었다(1998년 2월 16일).[49][50] 그는 선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고집했으며, 인도 대통령이 총선에서 투표하지 않는 오랜 관행을 바꾸려 했다. 그는 또한 1999년 총선에서도 대통령 자격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4. 2. 3. 공화국 50주년

K. R. 나라야난 대통령이 인도 공화국 50주년에 발표한 국가 연설[51](2000년 1월 26일)은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52] 이 연설은 대통령이 커져가는 불평등, 특히 농촌 및 농업 인구에게 경제적 정의를 제공하는 데 국가가 실패한 여러 가지 방식을 분석하려 한 최초의 사례였다.[53][54] 그는 또한 소외된 사회 계층에서 불만이 생겨나고 좌절감이 폭력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늦게 의회 연설[55]에서 B. R. 암베드카르가 인도 헌법에 기여한 업적을 칭찬하고 헌법의 기본 구조를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해 경고했으며, 암베드카르가 정부의 안정성보다 책무성과 책임을 선호하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공화국 기념일 연설(2001년)[56]에서 이를 더욱 강력하게 반복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투표권을 제한하려는 특정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회의 일부 엘리트 계층보다는 인도 전체의 평범한 남녀에게 믿음을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연설에서 그는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정부의 특정 견해와 여러 면에서 다른 의견을 표명했다.[50][57]

4. 2. 4. 대통령 재량권 행사

나라야난 대통령은 대통령 재량권 행사에 대한 다양한 결정에 이르게 된 과정을 국민에게 설명하는 중요한 관행을 도입했다. 이는 대통령 직무 수행에 개방성과 투명성을 가져왔다.

;총리 임명 및 의회 해산

인도 대통령 K. R. 나라야난, 중국 중앙 텔레비전 인터뷰 중


클린턴 대통령과 인도 대통령 K. R. 나라야난


나라야난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치권 전반의 협의를 통해 어느 누구도 하원의 신임을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두 번이나 로크 사바를 해산했다. 1997년 11월 시타람 케스리 인도 국민 회의 총재는 I. K. 구자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구자랄은 나라야난에게 로크 사바 해산을 권고했고, 나라야난 대통령은 누구도 과반수를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수용했다.[58] (12월 4일). 이어진 총선에서 인도 인민당 (BJP)이 단일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으며, 최대 선거 연합인 국민 민주 동맹 (NDA)을 이끌었고, 연합 지도자 바지파이는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나라야난은 바지파이에게 NDA가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지지 서한을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바지파이는 NDA에 대한 지지가 증가한 후 이 요구를 충족할 수 있었고, 이후 10일 이내에 신임 투표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총리로 임명되었다.[59] (1998년 3월 15일).

1999년 4월 14일, 자야라리타의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이 지지를 철회하자, 나라야난은 바지파이에게 로크 사바에서 신임 투표를 요구하도록 권고했다. 이 안건은 부결되었다(4월 17일). 바지파이와 야당 대표 소니아 간디는 정부 구성을 주장했지만, 양측 모두 지지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나라야난은 총리에게 새로운 선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알렸고, 로크 사바는 바지파이의 권고에 따라 해산되었다.[60] (4월 26일). 이후 총선에서 NDA는 과반수를 확보했고 바지파이는 총리로 재임명되었다.[61] (1999년 10월 11일).

이러한 결정에서 나라야난 대통령은 총리 임명과 관련하여 새로운 선례를 세웠다. 어느 정당이나 선거 전 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할 경우, 하원의 신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연합 정당의 지지 서한을 통해) 대통령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총리로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헝 의회에서 총리를 임명해야 했던 전임자들, N. 산지바 레디, R. 벤카타라만, 샹카르 데얄 샤르마 대통령의 행동에서 벗어났다. 후자 두 사람은 단일 최대 정당 또는 선거 전 연합의 지도자를 정부를 구성하도록 초청하는 관행을 따랐다.

;대통령 통치 시행

나라야난 대통령은 우타르 프라데시의 칼리안 싱 정부(1997년 10월 22일)와 비하르의 라브리 데비 정부(1998년 9월 25일)를 해임하려는 연합 내각의 권고를 재고하도록 두 차례 반환했다.[62][63] 그는 인도 대법원의 ''S. R. Bommai vs. Union of India'' 판결(1994년)을 인용했으며, 첫 번째 경우 내각은 재고 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64] 그러나 두 번째 경우, 내각은 몇 달 후 동일한 권고를 다시 했고, 1999년 2월 비하르에 대통령 통치가 시행되었다.

;카르길 분쟁

1999년 5월 파키스탄과의 통제선 (LoC)에서 카르길에서 군사적 분쟁이 발생했다. 바지파이 정부는 그해 초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했고 야당은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로크 사바는 해산되었고 과도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나라야난은 바지파이에게 분쟁 논의를 위해 라지야 사바 소집을 제안했는데, 이는 여러 야당들이 요구한 것이었다. (1962년 중인 전쟁 동안 바지파이의 요구에 따라 네루가 의회 세션을 소집한 선례를 인용함). 임시 기간 동안 라지야 사바를 단독 소집한 선례는 없었다.[65] 또한, 나라야난은 인도군의 세 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분쟁 진행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이듬해 그의 공화국 기념일 연설[51]은 국가를 수호하다 사망한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 2. 5. 카르길 분쟁

1999년, 잠무 카슈미르 주라다크 지방에서, 파키스탄카르길 분쟁이 일어났다.

4. 3. 사회경제적 정의에 대한 관심

나라야난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달리트아디바시, 소수 민족,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했다.[4][51][66] 그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잔혹 행위, 카스트 차별, 자연 환경 남용, 공공 서비스 부패, 종교 근본주의, 인권 침해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함을 언급했다. 그는 케랄라 주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이 인간 및 경제 발전의 근본이라고 강조하며, 교육을 통한 대중의 각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국민에 대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4][51][66]

나라야난 대통령은 달리트, 아디바시, 기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평등(공공 편의 시설 거부, 따돌림, 괴롭힘 및 폭력, 부실한 개발 사업으로 인한 이주 등)에 대해 여러 차례 연설했다.[51][56][67] 그는 교육 및 공공 부문에서 소외 계층에 대한 차별 철폐 정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정책이 진정성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혜택이 자선이 아니라,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토지 없는 농업 노동자와 산업 노동자로서 경제에 기여하는 계층에 대한 인권과 사회 정의의 방식으로 제공된 것이라고 말했다.[51] 2002년 공화국의 날 연설[68]에서 그는 보팔 선언[69]에 주목하고, 민간 부문이 기업에서 소외 계층의 공정한 대표를 촉진하는 정책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외 계층 출신 자격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위 사법 임명에서 그들의 과소 대표 또는 무대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언급했다.[71] K. G. 발라크리슈난은 달리트 출신으로 인도 대법원에 임명되었는데(2000년 6월 8일), 이는 1989년 이후 유일한 사례였다.

그는 B. R. 암베드카르의 "교육하고, 조직하고, 선동하라"는 외침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외 계층의 궁극적인 운명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조직된 소외 계층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67]

그레이엄 스테인스와 그의 두 어린 아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었을 때(1999년 1월 22일), 나라야난 대통령은 이를 야만적인 범죄로 규탄했다.[72]

2002년 구자라트에서 종교 폭동이 발생했을 때(2002년 2월), 나라야난 대통령은 이를 사회와 국가의 심각한 위기로 묘사하며 깊은 고통을 느꼈다. 그는 평화를 회복하고 국가의 기반과 관용의 전통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든 인도인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는 집권 정부의 지지 부족으로 인해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위한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세계 사회 포럼과 같은 대안적 세계화 운동을 지지했다.[73][74][75] 그는 2004년 5월 총선에서 바즈파이 정부가 실각한 후, 폭동 3주년 기념 인터뷰(2005년 2월)에서 구자라트의 종교 폭동에 정부 및 행정적 지원이 있었다고 말했다.[31] 그는 바즈파이 총리에게 여러 통신문을 보내고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효과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군대를 보내 폭동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군대에 발포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 뒤에 주 정부와 중앙 정부가 관련된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31]

그는 또한 그의 권한에 대한 헌법적 제약으로 인해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76] 나라야난은 대통령 임기 동안 예배 장소나 godmen/godwomen을 방문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했으며, 이 관행을 따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4. 4. 퇴임

나라야난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여러 여론은 그의 재선을 기대했다. 국민 민주 연합(NDA)은 선거인단에서 근소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야난은 합의 후보가 되기를 제안했다. 야당(국민회의, 좌파 전선, 자나타 달(세속주의), 다양한 지역 정당 포함)은 그의 재선을 지지했으며, 소니아 간디는 그의 출마를 요청하기 위해 그를 만났다. 바즈파이는 나라야난을 만나 NDA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합의가 없음을 알리고 그의 출마를 반대했다. 그 후 NDA는 부통령 크리샨 칸트를 합의 후보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고, 이는 야당의 지지를 받았으며, 바즈파이의 대리인이 국민회의에 이와 같은 합의를 전달했다. 그러나 하루 안에 NDA는 내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른 후보 P. C. 알렉산더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더의 출마는 야당의 반대를 샀다. 야당은 나라야난에게 접근하여 재선을 모색해 달라고 재요청했다. NDA는 그 후 합의를 구하지 않고 세 번째 후보 A P J 아브둘 칼람을 공식 후보로 내세웠다. 한 야당(물라얌 싱 야다브가 이끄는 사마자바디당)은 이 제안을 지지함으로써 야당의 단결을 와해시켰다. 나라야난은 이 시점에서 출마를 포기했다.[77][78]

나중에 이 사건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31] 나라야난은 BJP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2002년 7월 24일, 국민에게 보내는 그의 고별 연설에서[79] K. R. 나라야난은 젊은이들의 국가 봉사에 대한 사회 활동과 진전을 희망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도 국민의 본질적인 선함과 지혜를 되돌아보며, 우자부르에서 여러 종교의 신봉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종교적 관용과 조화가 어떻게 만연했는지, 상위 카스트 힌두교도와 부유한 기독교인들이 그의 초기 학업을 어떻게 도왔는지, 그리고 상위 카스트 힌두교도와 기독교인, 무슬림이 오타팔람에서의 그의 선거 운동을 위해 어떻게 열정적으로 함께 일했는지를 회상했다. 그는 인도의 단결과 민주주의의 신뢰성과 인내력은 관용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가 그들의 종교의 전통적인 정신을 표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K. R. 나라야난은 자신의 대통령직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31]

> 인도의 대통령으로서 저는 고통과 무력감으로 가득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저를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많이 우울하게 했습니다. 저는 권력의 한계 때문에 고뇌했습니다. 권력과 그 주변의 무력함은 사실, 특이한 비극입니다.

그는 또한 주 의회에서 연설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5. 퇴임 이후

은퇴 후 K.R. 나라야난은 부인 우샤와 함께 델리 중심부에 있는 방갈로(34 프리트비라지 로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 사회 포럼(WSF)(2004년 1월 21일)에서 그는 반세계화 운동을 지지했다. 폐막식 연설에서 그는 WSF가 가장 포괄적인 형태의 자유를 요구하는 점을 칭찬했으며, 좁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중요한 아이디어 아래 사람들이 모인 것에 기뻐했다. 그는 기업이 여러 국가의 정부를 대체하고, 마하트마 간디가 대중의 힘으로 비폭력적으로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싸웠던 방식을 되돌아보며, 전 세계의 목소리 높은 대중이 세계 자원의 소수를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점유하려는 것에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성공적으로 맞서 싸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권력 기업과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계화 측면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인민의 힘을 국제 정치의 부활하는 요인으로 환영했다.

K.R. 나라야난은 싯다와 아유르베다를 위한 나바조티스리 카루나카라 구루 연구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우자부르에 있는 그의 ''타라바두''(2005년 2월 15일)를 포텐코드의 산티기리 아쉬람에 헌납했다.[80] 이것이 그의 마지막 우자부르 방문이 되었다.

K.R. 나라야난은 2005년 11월 9일, 폐렴과 그에 따른 신부전으로 잠시 앓은 후 85세의 나이로 뉴델리의 육군 연구 및 참조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힌두교 의식에 따라 다음 날 일몰에 국장으로 화장되었으며, 이는 뉴델리 라지갓 근처의 카르마 부미에서 열렸다. 매년 그의 기일에는 이 사마디에서 추모 행사가 열린다. 장례 의식은 그의 조카 P.V. 라마찬드란에 의해 에크타 스탈에서 거행되었으며, 이곳은 야무나 강변에 위치해 있다(그의 스승 자와할랄 네루의 기념관인 ''산티 반''에 인접). 유해를 담은 항아리의 일부는 기차로 하리드와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힌두교 의식을 수행한 힌두교 팡딧의 입회하에 장녀가 갠지스 강에 유해를 뿌렸다. 항아리의 두 번째 부분은 차녀와 함께 케랄라로 옮겨졌고, 케랄라 주 정부는 케랄라의 성스러운 강인 바라타푸자 강으로의 행렬을 주선했다.

그에게는 K.R. 고우리, K.R. 바르가비, K.R. 바라티, K.R. 바스카란의 네 형제가 남았으며, 나라야난이 20대에 두 형이 먼저 사망했다. 그의 누나 고우리(독신으로 지낸 동종 요법 의사)와 그의 남동생 바스카란(역시 독신으로 지낸 교사)은 우자부르에서 살고 있었다. 우자부르 주민들은 K.R. 나라야난의 ''타라바두''로 침묵 속에서 행진하며 그에게 경건한 존경을 표했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그의 삶과 그 메시지에 대해,[81] K.R. 나라야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내 삶의 상징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를 모두 보고 이해한다. 때로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외딴 마을에서 사회적 지위의 중심지로 향하는 개인의 여정으로 시각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삶이 민주적 시스템이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수용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능력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6. K. R. 나라야난 재단

K. R. 나라야난 재단(K.R.N.F)은 2005년 12월에 설립되었으며, 코체릴 라만 나라야난의 이상을 전파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K.R.N.F는 케랄라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 즉 여성, 어린이, 장애인, 노인 및 기타 소외 계층에게 교육 훈련을 제공하고, 건강과 환경을 보호하며,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가족과 지역 사회를 강화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기 위한 공동 행동을 수행한다. K.R.N.F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82]


  • 빈곤층을 위한 친환경 농촌 기술 보급을 위한 과학 기술 연구 개발
  • 인적 자원 개발
  • 태도 변화 및 자기 관리
  • 빈곤층의 경제적 자립


재단은 공직에서의 청렴성, 언론, 공무원, 의학, 사회 봉사, 문학, 스포츠, 연예, 정치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서 최고를 선정하여 표창한다.

K.R.N.F는 K. R. 나라야난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말라얄람어영어) "생존의 발자취"를 제작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선임 기자 써니 조셉이 감독할 예정이며, 대본은 K.R.N.F의 사무총장이기도 한 에비 J. 조세가 쓴 고(故) 대통령의 전기(傳記)를 바탕으로 한다. 재단은 이 창작물의 DVD 사본을 모든 학교, 대학 및 공공 도서관에 배포할 계획이다.[83]

재단 사무총장 에비 J. 조세는 고(故) 대통령의 전기 "K. R. 나라야난 바르타틴테 수르야테자수"를 집필했다. 이 책은 K. R. 나라야난의 모국어인 말라얄람어로 쓰여졌으며, 인도의 첫 번째 달리트 대통령의 순탄치 않았던 삶을 다룬다.[84][85]

7. 대중 문화

인도 영화부는 인도 최초의 달리트 출신 대통령의 삶을 그린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K. R. 나라야난을 제작했으며, 이 영화는 수레쉬 메논이 감독했다.[86]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92년 선거인도의 부통령9대인도 국민회의99.86%700표1위
1997년 선거인도의 대통령10대인도 국민회의95.0%956,290표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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