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데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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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이데라티는 로마 공화국 시기 조약에 의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묶인 부족을 의미하며, 로마 시민권은 없었지만 조약상의 의무를 지녔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야만족 부족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는 관행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도 6세기까지 군사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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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이데라티 | |
|---|---|
| 페데라티 | |
| 유형 | 조약으로 묶인 민족 또는 도시 |
| 관련 국가 | 로마 |
| 역사적 맥락 | |
| 기원 | 로마 공화정 초기 |
| 목적 | 군사 지원 및 동맹 |
| 발전 | 로마의 국경 확장과 함께 변화 |
| 특징 | |
| 의무 | 로마에 대한 군사적 의무 제공 |
| 자치권 | 자체 행정 및 문화 유지 |
| 보상 | 로마의 보호 및 특권 제공 |
| 주요 페데라티 | |
| 예시 | 라틴족 이탈리아 민족 게르만족 |
| 중요성 | |
| 로마 군사 | 보조병 제공을 통한 로마 군사력 강화 |
| 문화 교류 | 로마와 페데라티 간의 문화적 교류 촉진 |
| 로마 제국 쇠퇴 | 로마 제국 쇠퇴기에 게르만족 페데라티의 역할 증대 |
| 추가 정보 | |
| 어원 | 라틴어 "foedus" (조약)에서 유래 |
| 관련 용어 | 콜로니아, 무니키피움 |
2. 로마 공화국 시대
초기 로마 공화국에서 ''포이데라티''는 조약(''foedus'')에 의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묶인 부족이었지만, 고대 로마의 식민지도 아니고 로마 시민권(''civitas'')의 수혜자도 아니었다. 라티움 부족은 혈맹으로 간주되었지만, 나머지는 동맹국 또는 ''소키이''였다. 로마 공화국에 따른 혜택 없이 조약상의 의무만 지는 것 사이의 마찰은 사회 전쟁으로 이어졌다. 포에두스la는 라틴어 표기이다.
2. 1. 라티움 부족과 기타 부족
초기 로마 공화국에서 ''포이데라티''는 조약(''foedus'')에 의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묶인 부족이었지만, 고대 로마의 식민지도 아니고 로마 시민권(''civitas'')의 수혜자도 아니었다. 라티움 부족의 구성원은 혈맹으로 간주되었지만, 나머지는 동맹국 또는 ''소키이''였다. 로마 공화국에 따른 혜택 없이 조약상의 의무만 지는 것 사이의 마찰은, 소수의 가까운 동맹국들과 불만을 품은 ''소키이'' 사이의 사회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90년의 법(''렉스 율리아'')은 조건을 수락한 동맹 국가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모든 도시가 로마의 공화국에 흡수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헤라클레아와 나폴리). 다른 ''포이데라티''는 로마 이탈리아 외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예를 들어 가데스(카디스)와 마실리아(마르세유)가 있었다.2. 2. 사회 전쟁 (기원전 91-88년)
기원전 91년부터 기원전 88년까지 벌어진 동맹시 전쟁은 로마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한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조약 체결 상대의 일부가 불만을 품고 로마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그 결과 기원전 90년에 율리우스 법(''Lex Julia'')이 제정되었으며, 그 조항(공화정에 의한 운영)을 받아들인 동맹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모든 동맹 도시가 로마의 공화정에 흡수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예: 헤라클레아 루카니아, 나폴리). 이탈리아 이외에도 포에데라티는 존재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카디스 (가데스), 마르세유 (마실리아)가 있다.2. 3. 렉스 율리아 (기원전 90년)
기원전 90년에 율리우스 법(''Lex Julia'')이 제정되어, 공화정 운영 조항을 받아들인 동맹 도시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1] 모든 동맹 도시가 로마 공화정에 흡수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헤라클레아 루카니아나 나폴리가 그 예시이다.[1]2. 4. 로마 이탈리아 외부의 포에데라티
공화정 시대,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나 그에 따른 이익이 없어 불만을 품은 조약 체결 상대 일부가 로마를 상대로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기원전 90년에 율리우스 법(''Lex Julia'')이 제정되었으며, 그 조항(공화정에 의한 운영)을 받아들인 동맹 도시 주민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모든 동맹 도시가 로마의 공화정에 흡수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예: 헤라클레아 루카니아나 나폴리). 이탈리아 이외에도 포에데라티는 존재했는데, 예를 들어 스페인의 카디스 (가데스)나 마르세유 (마실리아)가 있다.3. 로마 제국 시대
포이데라티는 로마가 프랑크족, 반달족, 알란족, 훈족, 서고트족 등 야만족 부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하던 관행에서 유래했다. 알라릭 1세는 고트족 포이데라티 부대를 이끌기도 했다.
초기에는 로마가 돈이나 식량을 제공했지만, 4세기와 5세기에 세수가 줄면서 포이데라티에게 지역 토지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는 로마 영토 내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분열과 봉건제적 충성 관계로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3. 1. 의미 변화와 보조금 지급
"포이데라티"라는 용어는 원래 로마가 동맹 부족에게 제공하는 보조금을 의미했지만,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초기에는 프랑크족, 반달족, 알란족, 훈족, 서고트족과 같은 야만족 부족 전체에게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행을 의미했다. 알라릭 1세는 고트족 "포이데라티" 부대를 이끌면서 경력을 시작했다.처음에 로마의 보조금은 돈이나 식량의 형태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4세기와 5세기에 세수가 줄어들면서 "포이데라티"는 지역 토지 소유주에게 숙식을 제공받았고, 이는 로마 영토에 정착하는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 광대한 자급자족적인 빌라에서 살면서 먼 변방 지역( "마르크스" 참조)에 거주하는 대규모 지역 토지 소유주들은 중앙 권위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되었고, 제국은 더 작은 영토로 분할되고 더 개인적인 충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358년,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살리계 프랑크족을 갈리아 북부에 정착시켜 포이데라티로 삼았다. 로마인 병사들은 라인강 방어를 위해 라인강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지역에 군단을 배치하고 있었고, 프랑크족은 그 북쪽과 동쪽에 정착하여 완충 지대를 마련하여 로마 제국의 방어를 도왔다. 그러나 406년과 407년의 겨울, 반달족과 알라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쳐들어오면서 로마인과 프랑크족은 라인강 부근을 잃게 되었다.[2]
376년, 고트족의 일부가 발렌스 황제에게 도나우강 남안으로의 정착을 요청하여 포이데라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378년,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과 싸웠다. 이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병력을 더욱 잃게 되었고, 포이데라티의 전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2]
이들 부족과 지도자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은 불안정했고, 395년에는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로마 제국 후기 강력한 장군이었던 스틸리코는 양친이 포이데라티 출신이었다.[2]
5세기가 되자 서로마 제국은 군단을 유지할 재력이 없어 군대가 거의 포이데라티의 전력으로 구성되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을 격퇴한 것도 서고트족과 알라니족 등 포이데라티의 전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포이데라티의 대두는 쿠데타의 원인이 되어, 476년 군 사령관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환하면서 서방 정제는 소멸했다.[2]
동로마 제국 군대에서는 6세기까지 포이데라티가 존속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단에는 포이데라티가 다수 포함되어 아프리카 속주와 이탈리아 본토 재정복에 기여했다.[2]
3. 2. 주요 포에데라티 부족
로마 제국은 프랑크족, 반달족, 알란족, 훈족, 서고트족 등 여러 야만족 부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이러한 부족들을 포이데라티라고 불렀다. 알라릭 1세는 고트족 포이데라티 부대를 이끌기도 했다.초기에는 로마가 돈이나 식량을 제공했지만, 4세기와 5세기에 세수가 줄어들면서 포이데라티에게 지역 토지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는 로마 영토 내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분열과 봉건제적 충성 관계로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358년 살리계 프랑크족을 갈리아 북부에 정착시켜 포이데라티로 삼았다. 이들은 라인강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76년 고트족의 일부가 도나우강 남쪽에 정착하여 포이데라티로 인정받았으나, 378년 반란을 일으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과 싸웠다. 이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포이데라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2]
포이데라티 부족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395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2] 5세기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거의 포이데라티로 구성되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의 훈족을 격퇴하는 데 포이데라티(서고트족, 알라니족 포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2] 그러나 포이데라티의 성장은 결국 476년 오도아케르의 쿠데타로 이어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2]
동로마 제국에서는 6세기까지 포이데라티가 군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단에도 다수의 포이데라티가 포함되어 있었다.[2]
3. 3. 4세기
332년, 아리아릭이 패배한 후 고트족과 로마 간의 최초의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이것이 ''포에데루스''였는지는 불분명하다.[1]358년, 황제 율리아누스는 프랑크족에게 지난 세기 동안 인구가 감소했던 북부 로마 갈리아 지역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면서 포에데라티가 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라인강을 방어했고, 라인강 남쪽과 서쪽에 약 160.93km 떨어진 곳에 주요 군대를 주둔시켰다. 프랑크족 정착민들은 로마인 북쪽과 동쪽 지역에 정착하여 정보 제공과 완충 지대 역할을 함으로써 로마의 방어를 도왔다. 406년과 407년의 혹독한 겨울에 라인강 도하가 이루어지면서 로마인과 동맹 프랑크족 모두 반달족과 알란족의 대규모 부족 이동에 의해 압도당했고, 라인강을 따라 로마의 존재는 종말을 맞이했다.
376년에 일부 고트족은 황제 발렌스에게 다뉴브강 남쪽에 정착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포에데라티''로 제국에 받아들여졌다. 이후, 같은 고트족들은 학대에 대한 보복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후 치명적인 군사력 손실은 제국이 ''포에데라티'' 징집에 훨씬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부족과 그 추장들의 충성심은 결코 믿을 만하지 않았고, 395년에는 알라리크 1세의 지도 아래 있는 서고트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가장 강력한 후기 로마 장군 중 한 명인 스틸리코의 아버지는 ''포에데라티'' 출신이었다.
3. 4. 5세기
406년, 파에술라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고트족 족장 사루스와 훈족 통치자 울딘의 지원을 받아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고트족, 반달족 연합군을 격파했다.[2]423년,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찬탈자 요안네스에 의해 훈족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보내졌다. 요안네스는 강력한 군대가 없어 수도 라벤나에서 농성하다 425년 여름에 살해당했다. 아에티우스는 대규모 훈족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그의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서방의 권력이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타협하여 훈족 군대를 돌려보내고 갈리아 지역 로마 군대의 최고 사령관 직위를 얻었다.[2]
418년경(또는 426년), 알라니족 왕 아타케스가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살아남은 알라니족은 군데리크에게 왕위를 요청했다. 군데리크는 이를 수락하여 반달족과 알라니족의 왕이 되었다.[2]
군데리크 통치 말기, 반달족은 서고트족 ''포에데라티''와 충돌이 잦았고, 수적으로 불리하여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428년 초 군데리크가 죽은 후, 반달족은 그의 이복 형제 가이세리크를 후계자로 선출했고, 가이세리크는 이베리아 반도를 서고트족에게 넘기고 로마령 아프리카를 침략했다.[2]
5세기, 서로마 제국은 군대를 유지할 재력이 부족하여 ''포에데라티'' 부대에 의존했다. 451년, 훈족의 아틸라는 서고트족, 프랑크족, 알라니족, 색슨족 등 ''포에데라티''의 도움으로 간신히 격파되었다. 476년, ''포에데라티''의 게르만족 족장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국의 상징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려보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에도, ''포에데라티'' 지위를 가진 여러 왕국이 독립을 얻었다. 442년 반달족과 475년 서고트족이 그 예이다.[2] [3]
훈족 제국 붕괴 후,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고 판노니아에 정착하여 비잔틴의 ''포에데라티''가 되었다. 5세기 후반, 동고트족과 비잔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다. 결국, 테오도리쿠스와 황제 제논은 테오도리쿠스가 오도아케르의 왕국을 침략하고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합의를 도출했다.[4]
3. 5. 6세기
동로마 제국군에는 6세기에도 여전히 ''포이데라티''가 존재했다.[5]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대에는 많은 ''포이데라티''가 포함되었는데, 이때쯤 이 용어는 로마 군대의 정규 부대가 된 부대를 지칭했으며, 여기에는 로마인도 포함되었다.[5] 이 군대에는 훈족 궁수와 헤룰 용병과 같은 비로마 요소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포이데라티''와 더 유사했지만 이제는 심마코이로 불렸다.[6] 타기나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대규모 부대는 롬바르드족, 게피드족 및 불가르족으로 구성되었다.동쪽에서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랍의 라흐미드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랍 부족으로 ''포이데라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포이데라티'' 중에는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아멜라 및 가산족이 있었다. 이 용어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치세까지 동로마 군대에서 계속 확인된다.[7] 9세기에 아나톨리콘의 비잔틴 ''테마''에 ''포이데라티'' 부대가 등장하지만, 6세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8]
4. 동로마 제국 시대
''포이데라티''(그리스어로 Φοιδερᾶτοι)는 6세기에도 동로마 제국군에 여전히 존재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끈 군대에는 많은 ''포이데라티''가 포함되었는데, 이때쯤 이 용어는 로마 군대의 정규 부대를 가리키게 되었고, 여기에는 로마인도 포함되었다.[5] 이 군대에는 훈족 궁수와 헤룰 용병과 같은 비로마 요소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포이데라티''와 더 유사했지만 심마코이로 불렸다.[6] 타기나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상당수는 롬바르드족, 게피드족, 불가르족으로 구성되었다.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랍의 라흐미드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랍 부족으로 ''포이데라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포이데라티'' 중에는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아멜라, 가산족이 있었다. 이 용어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치세까지 동로마 군대에서 계속 확인된다.[7] 9세기에 아나톨리콘의 비잔틴 ''테마''에 ''포이데라티'' 부대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6세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8]
4. 1. 포이데라티의 지속
''포이데라티''(그리스어로 Φοιδερᾶτοι)는 6세기에도 동로마 제국 군대에 여전히 존재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대에는 많은 ''포이데라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쯤 이 용어는 로마 군대의 정규 부대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기에는 로마인도 포함되었다.[5] 이 군대에는 훈족 궁수와 헤룰 용병과 같은 비로마 요소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포이데라티''와 더 유사했지만 이제는 심마코이로 불렸다.[6] 타기나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대규모 부대는 롬바르드족, 게피드족 및 불가르족으로 구성되었다.동쪽에서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랍의 라흐미드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랍 부족으로 ''포이데라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포이데라티'' 중에는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아멜라 및 가산족이 있었다. 이 용어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치세까지 동로마 군대에서 계속 확인된다.[7] 6세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9세기에 아나톨리콘의 비잔틴 ''테마''에 ''포이데라티'' 부대가 등장한다.[8]
4. 2. 변화된 의미
''포이데라티''(그리스어로 Φοιδερᾶτοι)는 6세기에도 동로마 제국군에 존재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끈 군대에는 많은 ''포이데라티''가 포함되었는데, 이때쯤 이 용어는 로마 군대의 정규 부대를 가리키게 되었고, 여기에는 로마인도 포함되었다.[5] 이 군대에는 훈족 궁수와 헤룰 용병과 같은 비로마 요소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포이데라티''와 더 유사했지만 심마코이로 불렸다.[6] 타기나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상당수는 롬바르드족, 게피드족, 불가르족으로 구성되었다.동쪽에서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랍의 라흐미드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랍 부족으로 ''포이데라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포이데라티'' 중에는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아멜라, 가산족이 있었다. 이 용어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치세까지 동로마 군대에서 계속 확인된다.[7] 6세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9세기에 아나톨리콘의 비잔틴 ''테마''에 ''포이데라티'' 부대가 등장한다.[8]
포이데라티라는 단어는 전사를 용병으로 제공받는 대가로 로마가 원조를 제공한 주변의 야만족을 의미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크족, 반달족, 알라니족, 서고트족 등이 있다. 알라릭 1세는 원래 고트족 포이데라티의 일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federation"(연맹, 연방)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oedus"(포에두스)에서 유래했다. 포에두스는 로마와 다른 국가가 영구적인 정식 상호 부조 조약을 체결했음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처음에는 로마 측이 상대에게 제공하는 것은 금전이나 식량이었지만,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세수가 감소함에 따라, 포이데라티에게 변방의 토지를 제공하게 되었고, 로마 제국 내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과 포이데라티인 것이 동의어가 되었다. 원래 변방에 자급자족형 광대한 빌라를 짓고 살던 지주들도 이러한 정세 변화 속에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기 어려워 포이데라티와 타협해 갔다. 그렇게 제국은 각 지방별로 뭉치게 되었고, 분열 상태가 되었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358년, 전 세기에 인구가 격감했던 갈리아 북부에 살리계 프랑크족을 정착시켜 포이데라티로 삼았다. 로마인 병사들은 라인강 방어를 위해 라인강에서 남서쪽으로 약 160.93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군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프랑크족은 거기에서 북쪽과 동쪽에 정착하여 완충 지대를 마련하는 형태가 되었고,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로마 제국의 방어를 도왔다. 406년과 407년의 혹독한 겨울에 반달족과 알라니족이 한데 뭉쳐 라인강을 건너 쳐들어왔고, 로마인과 프랑크족은 압도당하여 라인강 부근을 잃게 되었다.
376년, 고트족의 일단이 발렌스 황제에게 도나우강 남안으로의 정착을 요청하여 포이데라티로 인정받았다. 378년, 같은 고트족의 일단이 반란을 일으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인과 싸웠다. 이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더욱 병사를 잃게 되었고, 포이데라티의 전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들 부족과 그 지도자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은 결코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고, 395년에는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로마 제국 후기에 가장 강하다고 불린 장군 스틸리코는 양친이 포이데라티 출신이었다.
5세기가 되자 군단을 유지할 만한 재력이 없어지고,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거의 완전히 포이데라티의 전력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451년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포이데라티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서고트족과 알라니족도 포이데라티로 참전했다). 그리고 포이데라티의 대두가 치명적인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다. 476년, 군 사령관이었던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방 정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환하면서, 명목만 유지하고 있던 서방 정제는 소멸했다.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서는 6세기까지 포이데라티가 존속했다. 아프리카 속주와 이탈리아 본토의 재정복을 수행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단에는 포이데라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4. 3. 아랍 부족과의 관계
6세기 동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랍 라흐미드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랍 부족으로 구성된 ''포이데라티''를 두었다. 여기에는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아멜라, 가산족 등이 있었다.[7]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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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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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s Across Time: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4 Volumes]– Google Kni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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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행물
The Legacy of Theode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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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ederati, the Phoideratoi, and the Symmachoi of the Late Antique East (ca. A.D. 40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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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Byzantine Praetorians: An Administrative, Institutional, and Social Survey of the Opsikion and Tagmata, c. 580-900
Rudolf Habel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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