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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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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에비는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게르만 조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여러 게르만 부족을 포괄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발트해 남부를 고향으로 삼았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모든 게르만족 중 가장 크고 호전적인 민족'으로 묘사했다. 수에비족은 기원전 58년 카이사르와 대립했고, 이후 로마 제국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일부는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수에비 왕국을 세웠으며, 466년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가 6세기 중엽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수에비 왕국은 585년 서고트 왕국에 병합되었다.

2. 어원

어원학자들은 수에비(Suebi)라는 이름의 어원을 게르만 조어 *''swēbaz''에서 찾는데, 이는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의미한다.[9] 이 어근은 더 이전의 인도유럽어족 어근 ''*swe-''에서 유래했다.[10]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민족 이름으로는 스웨덴족(이로부터 스웨덴인의 이름도 유래), 삼니움족, 사벨족, 사비니족 등이 있으며, 슬라브족 또한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는 가설이 있다. 이는 더 광범위하고 공통적인 인도유럽 민족 이름인 "우리 자신의 사람들"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고전 작가들에게 수에비족의 가장 큰 집단 중 하나로 알려진 셈노네스 또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이름인 듯하며, 로마인들은 다른 발음으로 기록했다.

수에비라는 이름은 "방랑자"를 의미하는 켈트어 단어에서 차용되었을 수도 있다.[11]

수에비 매듭 헤어스타일을 한 게르만 남성들의 주조된 머리 4개로 장식되어 있는 무쇼프 솥. 2세기경 체코 무쇼프의 게르만족 추장의 무덤에서 1988년에 발견된 로마 시대 청동 솥이다.

3. 분류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마르코만니족과 구별했지만, 후대 작가들은 "수에비"라는 용어를 더 넓게 사용했다.[13] 타키투스, 플리니우스, 스트라본 등은 수에비족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고 기록했다.[14] 대 플리니우스는 이르미노네스가 수에비족뿐만 아니라 헤르문두리족, 카티, 케루스키를 포함하는 게르만 부족의 큰 집단이라고 기록했다.[15] 타키투스와 스트라본은 카티가 한 지역에 정착한 반면, 수에비는 덜 정착했기 때문에 둘을 구별했다.[16]

현대에는 "엘베 게르만족"이라는 용어가 수에비족과 관련된 게르만 부족들을 포괄하는 데 사용된다. 이 용어는 고지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을 고대 민족을 정의하기 위해 개발되었다.[18]

3. 1. 고전 문헌에 나타난 부족 이름

어원학자들은 '수에비'라는 이름이 게르만 조어 *''swēbaz''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 단어는 3인칭 재귀 대명사에 나타나는 게르만 조어 어근 *''swē-''에서 파생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의미한다.[9] 이 어근은 더 오래된 인도유럽어족 어근 ''*swe-''에서 유래했으며, 폴란드어 ''swe, swój, swoi,'' 라틴어 ''sui,'' 이탈리아어 ''suo,'' 산스크리트어 ''swa'' 등 "자기 자신의"를 뜻하는 여러 단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10]

이러한 어원학적 연관성을 바탕으로, 수이오네스(스웨덴인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 삼니테스, 사벨리, 사비네스 등의 민족 이름이 같은 어근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슬라브족이라는 이름도 이 어근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있으며, 이는 "우리 자신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인도유럽 민족 이름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고대 문헌에서 수에비족의 가장 큰 집단 중 하나로 언급되는 셈노네스족의 이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며, 로마인들은 이를 다른 발음으로 기록했다.

한편, '수에비'라는 이름이 "방랑자"를 의미하는 켈트어 단어에서 차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1]

로마에서는 발트해 남동 해역을 수에비 해(''Mare Suebicum'')라고 불렀다.

3. 1. 1. 다뉴브 강 북안

카이사르 시대에 남부 독일에는 켈트족과 게르만 부족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수에비족이 이끄는 게르만 집단의 압박을 점점 더 받게 되었다. 타키투스는 오늘날의 남부 독일이 도나우강, 마인강, 라인강 사이에 있으며, 현대의 슈바벤에 살던 헬베티족보이족이 떠나면서 비어 있었다고 설명했다.[20]

스트라보(기원전 64/63년 – 기원후 24년경)는 수에비족을 헤르키니아 숲과 도나우강 북쪽의 게르마니아 남부와 연관 짓는다. 그는 도나우강 북쪽에 알프스의 하위 연장선과 같은 산맥, 아마도 슈바벤 알프스를 묘사한다. 스트라보는 수에비 민족으로 마르코만니족을 특별히 언급하는데, 이들은 왕 마로보두스 아래에서 콜두이족(아마도 콰디족)과 함께 헤르키니아 숲으로 이동하여 "보이하이뭄"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점령했다.[22] 타키투스는 "보이에뭄"이라는 이름은 켈트족 보이족의 옛 전통적인 인구를 나타내는 생존물이지만, 인구는 바뀌었다고 말했다.[20]

타키투스는 자신의 시대에 로마와의 국경이었던 도나우강 북쪽을 따라 엘베강이 현대의 체코에서 발원하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일련의 매우 강력한 수에비 국가들을 묘사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 먼저 헤르문두리족이 있었고, 다음으로 나리스티족, 마르코만니족, 콰디족이 나타났다. 콰디족은 더 큰 수에비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남동쪽에 사르마티아인이 있었다.[24]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도나우강 북쪽 강둑을 따라 여러 부족들을 언급했지만, 어떤 부족이 수에비족인지 항상 명시하지는 않았다.

요르다네스는 4세기 초에 반달족이 도나우강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서쪽에는 마르코만니족이, 북쪽에는 헤르문두리족이 여전히 있었다고 쓴다. 일반적으로 도나우강 수에비족은 반달족과 같은 이웃들과 함께 이 시기에 도나우강 남쪽과 동쪽 모두에 있는 로마 영토로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3. 1. 2. 라인 강 접근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이 텐크테리, 우시페테스, 우비와 같은 라인강의 게르만 부족들을 동쪽에서 압박하여 그들의 고향에서 쫓아냈다고 묘사한다.[26] 그는 수에비족의 호전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마치 그들이 케루스키족과 우비족 사이에 정착된 고향을 가지고 있었고, 케루스키족과는 실바 바케니스라는 깊은 숲으로 구분된 것처럼 썼다. 그는 또한 마르코만니족을 수에비족과는 별개의 부족으로 묘사하며, 동일한 동맹 내에서 활동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묘사하지 않는다.

스트라보는 수에비족이 "힘과 숫자 면에서 다른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고 썼다.[26] 그는 수에비 민족(그리스어 ''ethnē'')이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게르마니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국경에 있는 라인 계곡과 라인강 북쪽의 "해안" 지역을 제외했다고 묘사한다.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서기 90년경 ~ 서기 168년경)는 대 게르마니아에 대한 상당히 광범위한 설명에서[27]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수에비족에 대해 몇 가지 특이한 언급을 한다. 그는 그들의 위치가 엘베강에서 수감브리족 근처의 북부 라인강까지 띠 모양으로 뻗어 있다고 묘사한다. "수에비 랑고바르디"는 대부분의 자료에서 언급하는 위치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라인강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수에비족이다. 랑고바르디족의 동쪽에는 "수에비 앙길리"가 있으며, 다른 자료에서 보고된 위치의 동쪽, 중앙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뻗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자료에 혼란을 겪었거나, 랑고바르디족의 이러한 위치가 역사 속 특정한 순간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28]

3. 1. 3. 엘베 강

스트라본은 엘베 강 동쪽에 사는 수에비족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헤르문두리족과 랑고바르디족이 그곳에 살았다고 언급하며, 이들이 로마에 패배하여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덧붙였다.[29][30]

타키투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엘베 강 유역의 수에비 부족들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 셈노네스족: 타키투스는 "수에비 중 가장 오래되고 고귀한 자"로 묘사하며, 100개의 칸톤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들의 공동체의 광대함은 그들로 하여금 수에비 족의 수장으로 여기게 한다"고 말했다.[31]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수에비 셈노네스"는 엘베 강에서 오데르강까지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 랑고바르디족: 타키투스는 "적은 수"로 로마 국경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가장 강력한 부족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전쟁의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안전을 유지했다고 기록했다.[32]

3. 1. 4. 엘베 강 동쪽

고전 작가들은 엘베강오데르강 사이에 걸쳐 있는 지역에 수에비족의 셈노네스족을 위치시켰다.[22] 타키투스는 마르시니족, 부리족 등 "언어와 생활 방식이 수에비족과 유사한" 부족들을 언급했다.[33] 이들은 다뉴브강의 마르코만니족콰디족 북쪽 주변에 "숲과 산꼭대기에" 살고 있었다.[33]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스키부르기산맥과 콰디족 사이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도네스, 코티니 (아마도 타키투스의 고티니족)와 비스부르기 등 여러 부족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산맥은 상부 엘베강 근처에서 비스툴라강의 발원지까지 뻗어 있다. 마르시니족과 부리족이 살았던 이 산맥 너머(아마도 현대의 수데테스산맥)는 현대 폴란드 남서부 지역으로, 타키투스는 다양한 부족이 있었으며,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루기족이었다고 보고했다.[33]

프톨레마이오스는 부리족을 루기족에 포함시켰으며, 산맥 북쪽의 루기족과 관련하여, 그는 "수에부스" 강(아마도 잘레강(소르브어: ''솔라와'') 또는 오데르강)과 비스툴라강 사이에 살고, 부르군트족 남쪽에 거주하는 두 개의 큰 집단인 루고이 오마노이와 루고이 디두노이를 언급했다.

3. 1. 5. 발트 해

폼포니우스 멜라는 그의 저서 《세계의 묘사》에서 덴마크 섬 너머에 "헤르미오네스"가 있다고 썼다.[33] 타키투스발트해를 수에비 해라고 불렀으며, 발트해 근처에 고트족, 루기족, 레모비족 등 왕을 둔 부족들이 있다고 기록했다.[33] 이들은 둥근 방패와 짧은 칼과 같은 비슷한 무기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발트 해 연안의 여러 부족들을 언급했지만, 이들이 수에비족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그는 작센족 동쪽, "칼루수스" 강에서 "수에비" 강까지는 파로디니족이 있고, 그 다음에는 "비아두아" 강까지 시디니족, 그 다음에는 비스툴라 강까지 "루기클레이족"이 있다고 기록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배에 강한" 수이오네스는 한쪽에는 수에비(발트)해를, 다른 쪽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바다를 가진 게르만족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스칸디나비아를 가리킨다고 본다.[34] 시토네스 부족은 수이오네스와 가깝고 매우 유사하다.[35]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칸디나비아에 카에디니족, 파보나이족, 피라이시족, 피니족, 가우타이족, 다우키오네스족, 레보니족 등이 거주한다고 묘사했지만, 이들을 수에비족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타키투스는 "수에비해"(발트해) 동쪽 해안에 있는 에스티족에 대해 "그들의 의식과 풍습, 옷차림은 수에비족과 같지만, 그들의 언어는 브리타니아와 더 비슷하다"라고 묘사했다.[35] 이 설명을 한 후, 타키투스는 "여기서 수에비아가 끝난다"라고 말했다.[36]

로마에서는 발트해 남동 해역을 수에비 해(''Mare Suebicum'')라고 불렀다.

4. 문화적 특징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이 곡물 농사보다는 가축 사육과 사냥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강에서 목욕했으며, 우유와 고기를 주로 먹고 포도주는 금지했다. 수에비족은 노획물을 처분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교역을 거의 하지 않았고, 수출할 만한 상품도 없었다. 이들은 사유지를 소유하지 않았으며, 1년 이상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수에비족은 100개의 칸톤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칸톤은 1,000명의 무장 병력을 제공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38]

수에비 매듭을 한 포로 (루마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


스트라본은 수에비족이 카티나 체루스키와 같은 정착 농경 부족과는 달리 매우 이동성이 강한 유목민적 성격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그는 수에비족이 땅을 경작하거나 식량을 비축하지 않고, 임시 거처인 작은 오두막에서 살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가축을 기르며 생활했고, 유목민처럼 가재도구를 수레에 싣고 가축과 함께 이동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수에비족은 "수에비 매듭"이라 불리는 독특한 머리 모양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이 머리 모양은 자유민과 노예를 구별하는, 즉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38] 수에비족의 추장들은 이보다 더 정교한 머리 모양을 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셈노네스족이 신성한 숲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고 언급했으며,[31]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부족들은 네르투스 의식에 사용될 노예를 살해했다고 기록했다.[32] 나하르발리의 수석 사제는 여자처럼 옷을 입었고, 그 부족 또한 숲에서 숭배 의식을 행했다. 하리이족은 밤에 몸을 검게 물들이고 싸웠다. 수이오네스족은 양쪽 끝에 뱃머리가 달린 노젓는 배로 구성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5. 언어

수에비족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타키투스는 수에비어에 대해 언급하며, 1세기 말에는 여러 종류의 수에비어가 있었음을 암시한다.[39] 특히 수에비족은 이르미노네스가 사용한 초기 방언 그룹인 "엘베 게르만어군"과 관련이 있다. 엘베 게르만어군은 현대 고지 독일어를 정의하는 고지 독일어 자음 이동을 겪었으며,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상부 독일어였다.[39]

따라서 현대의 슈바벤어와 더 넓게는 알레만어는 수에비어로부터 "적어도 부분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40] 바이에른어, 튀링겐 방언,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이 사용한 롬바르드어, 그리고 표준 독일어 자체도 수에비족이 사용한 방언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파생되었다.[39]

6. 역사적 사건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수에비족 왕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군대와 대치하여 라인강 너머로 몰아냈다.[41] 기원전 55년에는 수에비족이 다시 카이사르에게 위협이 되자, 카이사르는 라인강에 다리를 건설하여 경고했다.[42]

카시우스 디오는 기원전 29년 직전에 수에비족이 라인강을 건넜지만 가이우스 카리나스에게 패배했다고 기록했다.[43] 수에토니우스기원전 9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의 전투에서 수에비족이 패배하여 일부는 갈리아로 끌려가 라인강 근처에 정착했다고 언급한다.[44] 플로루스는 같은 해 케루스키족, 수에비족, 시캄브리족이 로마 백인대장 2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동맹을 맺었지만, 드루수스에게 격파당했다고 기록한다.[46]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기원전 9년 패배 이후 로마인들이 수에비족 왕 마르보드와 평화를 맺었다고 언급되어 있다.[47]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은 로마 군단을 전멸시켰는데, 수에비족 일부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기 9년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케루스키족과 그 동맹군을 공격하여 베저강 평원인 이디스타비수스 전투에서 분쇄했다.[49] 아르미니우스는 마로보두스를 비난했고, 셈노네스족과 랑고바르디족은 마로보두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마로보두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카투알다가 이끄는 고트족 부대에게 궁전을 점령당한 후 라벤나에서 여생을 보냈다.[50][51]

2세기에 마르코만니족은 다른 민족들과 연합하여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마르코만니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66년에 시작되어 180년까지 지속되었다.[52]

6. 1. 기원전 58년 아리오비스투스와 수에비족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아르베르니족과 세콰니족의 초청으로 이미 갈리아에 정착해 있던 수에비족 왕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대치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이미 로마 원로원에 의해 왕으로 인정받은 상태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인들이 갈리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지만, 카이사르는 로마가 아에두이족의 동맹이자 수호자라고 여겼다.[41]

카이사르가 상대한 군대는 하루데스족, 마르코만니족, 트리보치족, 방기오네스족, 네메테스족, 세두시족, 그리고 수에비족으로 구성되었다. 카이사르는 전투에서 아리오비스투스를 물리치고 그를 라인강 너머로 도망치게 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새롭게 합류하려던 수에비족 부대는 당황하여 퇴각했고, 라인강 유역의 현지 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을 공격했다.[41]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제1권에는, 최대의 라이벌 중 한 명으로 수에비족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의 이름이 남아있다. 기원전 71년경 아리오비스투스는 많은 게르만족 부족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인의 전쟁에 개입하여 갈리아 내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로마와도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58년에 갈리아인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아 갈리아 원정을 시작한 카이사르와 충돌, 보게스 전투에서 참패하여 게르마니아로 패주했다. 그 후, 그는 다시 갈리아에 침입하지 않았다.[41]

6. 2. 기원전 55년 카이사르와 수에비족

기원전 55년, 수에비족은 카이사르에게 또 다른 위협이 되었다.[42]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족 우비는 수에비족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미 고향에서 쫓겨난 텐크테리족과 우시페테스족은 라인강을 건너 무력으로 갈리아에 진입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라인강에 말뚝 다리를 건설했는데, 이는 최초의 사례로 여겨졌으며 경이로운 건축물로 평가받았지만 불과 18일 만에 해체되었다. 수에비족은 로마인과 가장 가까운 마을을 버리고 숲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소집했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건너 철수하여 파괴했는데, 이는 수에비족에게 경고를 하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수에비족은 우비족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했고, 우비족은 이후 라인강 서쪽, 로마 영토에 재정착했다.

6. 3. 기원전 29년 라인 강 도하

카시우스 디오(서기 150년경 ~ 235년)는 그리스 독자들을 위해 로마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기원전 29년 직전에 수에비족이 라인강을 건넜지만, 가이우스 카리나스에게 패배했다고 전했다.[43] 카리나스는 젊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와 함께 기원전 29년에 개선식을 거행했다.[43] 그 직후, 수에비족은 율리우스 영웅 신전 봉헌을 기념하는 로마의 검투사 시합에서 다키아인들과 싸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6. 4. 기원전 9년 드루수스의 승리

수에토니우스(기원후 69년경 ~ 기원후 122년 이후)는 기원전 9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의 전투에서 수에비족이 패배했다고 간략하게 언급한다. 수에비족과 수감브리는 그에게 항복하여 갈리아로 끌려가 라인강 근처 땅에 정착했으며, 다른 게르만족은 알비스 강 (Elbe) 너머로 밀려났다고 한다.[44]

플로루스(기원후 74년경 ~ 기원후 130년경)는 기원전 9년에 케루스키, 수에비족, 시캄브리가 로마 백인대장 2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동맹을 맺었지만, 드루수스가 그들을 격파하고 전리품을 압수하여 노예로 팔았다고 보고한다.[46]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기원전 9년의 패배 이후 로마인들이 수에비족의 왕으로 묘사된 마르보드와 평화를 맺었다고 언급되어 있다.[47]

6. 5. 서기 9년 로마의 패배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은 3개의 로마 군단을 전멸시켰고, 이후 "... 제국은 ... 라인 강둑에서 제지되었다." 수에비족의 일부가 연루되었을 수 있지만, 이는 주로 북서부 독일의 수에비족이 아닌 부족들, 즉 케루스키족, 마르시족, 카티족, 브룩테리족, 차우치족, 그리고 시캄브리족의 동맹이었다. 마르코만니족과 그 동맹은 이 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 마로보두우스가 패배한 로마 지도자 바루스의 머리를 받자, 이를 로마로 보내 매장하도록 했다. 그의 동맹에는 헤르문두리족, 콰디족, 셈노네스족, 루기족, 주미족, 부토네스족, 무길로네스족, 시비니족, 그리고 랑고바르드족과 같은 다양한 수에비족이 있었다.

6. 6. 서기 9년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케루스키족과 그 동맹군을 공격하여 베저강 평원인 이디스타비수스 전투에서 그들을 분쇄했다. 이 전투에는 8개 군단과 갈리아 지원 부대가 동원되었다.[49]

아르미니우스는 마로보두스가 다른 게르만족이 자유를 위해 싸울 때 헤르키니아 숲에 숨어 있었고, 게르만족 중 유일한 왕이었다고 비난했다. 셈노네스족과 랑고바르디족은 마로보두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케루스키족에 합류했다. 마로보두스는 일리리쿰 총독인 드루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명분만 제공받았다.[50]

전투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마로보두스는 보헤미아로 물러나 티베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바루스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마르코만니 망명자였던 카투알다가 이끄는 고트족 부대가 궁전을 점령하자, 마로보두스는 노리쿰으로 도망가 라벤나에서 여생을 보냈다.[51] 마로보두스가 추방된 후, 마르코만니의 지도권은 헤르문두리족과 콰디족에 의해 다툼을 벌였다.

6. 7. 마르코만니 전쟁

2세기에 마르코만니는 콰디, 반달족, 사르마티아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과 연합하여 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마르코만니 전쟁은 166년에 시작되었는데, 마르코만니가 빈도보나와 카르눈툼 사이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판노니아와 노리쿰 속주 사이의 국경을 따라 침투하여, 플라비아 솔바를 황폐화시키고, 아드리아 해에 있는 아퀼레이아에 거의 도달하기 직전에야 겨우 저지되었다. 이 전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80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52]

7. 중세 시대

259년/260년경, 수에비족의 한 무리 또는 여러 무리가 알레만니라는 새로운 부족 연맹 형성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알레만니는 라인강 동쪽, 마인강 남쪽에 위치한 로마 국경 지역인 아그리 데쿠마테스를 점령했다. 알레만니는 때때로 동시대인들에 의해 단순히 수에비로 불렸으며,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슈바벤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이 불분명한 수에비족의 대규모 집단은 마인츠에서 반달족, 알란족과 거의 같은 시기(406년 12월 31일)에 라인강 도하로 로마 국경을 돌파하여 북부 을 침공했다. 이 집단에는 라다가이수스의 압박으로 고향을 떠난 상당수의 콰디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나중에 스페인을 침공하여 로마 갈리시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다른 수에비족은 엘베강과 현대 체코 근처의 원래 고향 지역에 남아 있었거나 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때때로 이 용어로 불리기도 했다. 또 다른 수에비 집단, 소위 "북부 수에비"는 569년 프랑크 왕 시게베르트 1세 치하에서 오늘날의 작센안할트 지역에서 작센인의 일부로 묘사되었다. 슈바벤가우 또는 수에벵가우로 알려진 지역은 적어도 12세기까지 존재했다.

더 남쪽으로, 수에비족의 한 무리가 판노니아의 일부에 왕국을 세웠는데, 이는 훈족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기록에 나타난다. 그들의 왕 후니문트는 469년 볼리아 전투에서 동고트족과 싸웠다. 수에비 동맹은 전투에서 패배했고, 후니문트는 남부 독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53] 마르코만니는 이 수에비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며, 이들은 적어도 두 개의 별개의 지역에 살았다.[54]

7. 1. 알레만니와 유퉁기

259/60년경, 수에비족은 알레만니라는 새로운 부족 연맹 형성에 주요 요소가 되었다. 알레만니는 라인강 동쪽, 마인강 남쪽에 위치한 로마 국경 지역인 아그리 데쿠마테스를 점령했으며, 이 지역은 오늘날 슈바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3] 이 지역 사람들은 여전히 슈바벤인으로 불리는데, 이는 수에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3세기에 이 지역의 특정 집단은 알레만니와 구별되기도 하는 유퉁기였으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견된 기념비는 이들을 셈노네스라고 언급하고 있다.

7. 2. 수에비 왕국 (갈라에키아)

헤르메릭 왕 치하의 수에비족은 409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갔다.[55] 이들은 바스크 지방을 거쳐 로마 속주 갈라이키아(오늘날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포르투갈 북부 절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포에데라티''로 받아들여져 자치 정부 하에 정착할 수 있었다.[55] 브리타니아의 자치 속주와 동시에, 갈라이키아의 수에비 왕국은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는 영토에서 형성된 최초의 로마 부속 왕국이었다. 수에비 갈라이키아는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최초로 동전을 주조한 왕국이었다.

유럽 전역의 수에비족 이동.


410~500년 수에비 왕국의 금화


갈라이키아와 북부 루시타니아에 수에비 왕국은 410년에 세워져 584년까지 존속했다. 이웃한 서고트 왕국과의 가끔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

수에보스 마을의 도로 표지판, 아메스 (갈리시아)


게르만족 침략자들과 이민자들은 주로 농촌 지역에 정착했다. 댄 스타니슬라우스키에 따르면, 포르투갈인이 북부 지역에서 생활하는 방식은 대부분 수에비족으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여기에는 포르투갈 남부의 대규모 토지와는 구별되는 소규모 농장이 주를 이룬다. 로마 갈라이키아의 옛 수도였던 브라카라 아우구스타, 즉 현대의 브라가시는 수에비족의 수도가 되었다. 수에비족과 함께 갈라이키아에 정착한 또 다른 게르만 집단은 부리였다. 그들은 포르투갈의 테라스 드 부로(부리족의 땅)로 알려진 지역, 즉 카바두 강과 오멩 강 사이 지역에 정착했다.[58]

수에비족은 현지 이베리아 로망스어를 빠르게 채택했기 때문에 게르만어는 몇몇 단어와 대부분의 갈라이키족이 채택한 인명 및 지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59] 갈리시아에는 4개의 교구와 6개의 마을이 옛 수에비 정착지를 따라 '수에보스' 또는 '수에고스', 즉 '수에베스'로 명명되었다.

수에비 검. 포르투갈 코님브리가


수에비족 갈라이시아는 전성기에 메리다세비야까지 남쪽으로 확장되었으며, 이곳은 루시타니아와 베티카의 로마 속주의 수도였다. 439년 로마 수도 메리다를 점령한 후 그들의 원정은 사라고사와 레리다에 도달했다. 전년도인 438년 헤르메릭은 지역의 부분적으로 로마화된 농촌 인구인 갈라이시족과의 평화를 비준했고, 전투에 지쳐 아들 레칠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48년 레칠라가 사망하고 447년경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들 레키아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곧 그는 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1세의 딸과 결혼했고, 여전히 로마 속주인 타라코넨세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작했다. 456년까지 레키아르의 작전은 서고트족의 이익과 충돌했고, 로마 연방군(테오도리크 2세가 지휘하는 서고트족, 군디오크와 킬페리크 왕이 지휘하는 부르군드족)의 대규모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진입하여 오늘날 아스토르가 근처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했다. 레키아르는 매형인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2세에게 포로로 잡힌 후 처형되었다.

459년 로마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수에비족을 격파하여 북부 히스파니아에 로마 통치를 잠시 회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에비족은 2년 후 마요리아누스가 암살된 후 영원히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수에비 왕국은 갈라이시아와 북부 루시타니아의 북서부에 갇혀 있었고, 그곳에서는 왕위 찬탈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분열과 내전이 일어났다. 수년간의 혼란 끝에 레미스문드는 수에비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았고, 서고트족과의 우호적인 정치를 가져왔으며, 그의 백성들이 아리우스주의로 개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570년, 서고트의 아리우스파 왕인 레오비길드는 수에비족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572년부터 574년 사이, 레오비길드는 두에로 강 계곡을 침략하여 수에비족을 서쪽과 북쪽으로 밀어냈다. 575년, 수에비족 왕인 미로는 레오비길드와 평화 조약을 맺어 새로운 안정 시대를 여는 듯했다. 그러나 583년 미로는 가톨릭 고트족 공작 헤르메네길드의 반란을 지지하며 레오비길드 왕에 대항하는 군사 행동을 벌였지만, 가톨릭 공작에 대한 봉쇄를 뚫으려다 세비야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그는 레오비길드를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의 친구이자 보호자로 인정해야 했으며, 몇 달 후 본국으로 돌아와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에보릭 왕은 레오비길드와의 우정을 확인했지만, 1년 후 그의 매제인 아우데카에 의해 폐위되었고, 이는 레오비길드에게 왕국을 공격할 구실을 주었다. 서기 585년, 아우데카와 말라릭이 차례로 패배했고,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에 여섯 번째 주로 병합되었다. 수에비족은 그들의 재산과 자유를 존중받았으며, 갈리시아에 계속 거주하며 중세 초기에 나머지 지역 주민들과 마침내 융합되었다.

411년경 이베리아 반도. 옅은 회색이 수에비 왕국


500년경 이베리아 반도. 옅은 청색이 수에비 왕국

7. 3. 종교

수에비족은 처음에는 이교를 믿었으나, 레미스문드 왕 때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63] 560년대에 삼위일체 가톨릭으로 개종할 때까지 이 아리우스파 교회가 수에비족을 지배했다.[63]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수에보룸의 역사(Historia Suevorum)에서 테오데미르 왕이 선교사 두미오의 마르틴의 도움으로 백성을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기록했다.[63] 반면 투르의 그레고리는 카라릭 왕이 투르의 마르틴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들의 나병 치유를 조건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고, 성 마르틴의 유물과 중재로 아들이 치유되자 왕실 전체가 니케아 신경을 믿게 되었다고 전한다.[64]

561년 5월 1일에 열린 브라가 제1차 공의회 의사록에는 아리아미르 왕의 명령으로 시노드가 열렸다고 명시되어 있다.[2] 당시 8명의 보조 주교 중 수에비족 이름을 가진 사람은 힐데미르 한 명뿐이었다. 569년, 테오데미르 왕은 왕국 내 교구 수를 늘리기 위해 제1차 루고 공의회를 소집했다.[61]

589년 톨레도 제3차 공의회에서 레카레드 1세는 고트족과 함께 "무수한 수에비족이 개종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이전의 개종이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아리아미르는 가톨릭 시노드에 대한 금지를 해제한 최초의 수에비족 군주였고, 카라릭과 테오데미르는 아리아미르의 후계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65][66] 일부 학자들은 카라릭이 먼저 성 마르틴의 유물을 통해 개종했고, 테오데미르는 나중에 두미오의 마르틴의 설교를 통해 개종했다고 주장한다.[67] 카라릭과 테오데미르를 동일 인물로 보거나, 심지어 카라릭은 투르의 그레고리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67][68]

8. 노르드 신화

수에비의 이름은 노르드 신화와 초기 스칸디나비아 자료에도 나타난다. 가장 초기의 증거는 뢰 룬 문자에 기록된 원시 노르드어 이름 ''Swabaharjaz'' ("수에비 전사")와 지명 스보게르스레프(Svogerslev)이다.[9] "수에비"를 의미하는 이름[70]을 가진 스바바(Sváfa)는 《헬기 횸바르손의 노래》에 등장하는 발키리이다. 왕국 ''스바팔란드''(Sváfaland) 역시 이 시와 《디드레크 사가》에 등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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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문서 Medieval Galician records show more than 1500 different Germanic names in use for over 70% of the local population. Also, in Galicia, Northern and Central Portugal, there are more than 5.000 toponyms (villages and towns) based on personal Germanic names ([[Mondariz]] < *villa *Mundarici; [[Baltar, Ourense|Baltar]] < *villa *Baldarii; [[Gomesende]] < *villa *Gumesenþi; [[Gondomar, Portugal|Gondomar]] < *villa *Gunþumari...); and several toponyms not based on personal names, mainly in Galicia (Malburgo, [[Samos, Lugo|Samos]] < Samanos "Congregated", near a hundred Saa/Sá < *Sala "house, palace"...); and some lexical influence on the [[Galician language]] and [[Portuguese language]], such as:
''laverca'' "[[lark]]" < protogermanic *laiwarikō "lark"
''brasa'' "torch; ember" < protogermanic *blasōn "torch"
''britar'' "to break" < protogermanic *breutan "to break"
''lobio'' "vine gallery" < protogermanic *laubjōn "leaves"
''ouva'' "elf" < protogermanic *albaz "elf"
''trigar'' "to urge" < protogermanic *þreunhan "to urge"
''maga'' "guts (of fish)" < protogermanic *magōn "stom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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