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연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표연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김종직과 서거정의 문인이다. 147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했으며, 이조참의, 대제학을 역임했다. 연산군에게 뱃놀이를 간언했다가 물에 빠지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으며,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다. 사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으나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저서로는 남계문집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오사화 관련자 -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무오사화 관련자 - 이극돈
이극돈은 조선 초 훈구파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대에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세조실록》 편찬, 《경국대전》 간행 등 국가 사업에 참여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사림파로부터 비판받았다. - 1498년 사망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수도사이자 종교 개혁가로,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교황과 대립하여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 1498년 사망 - 샤를 8세
샤를 8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으로, 브르타뉴 여공작과의 결혼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통합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사망하여 발루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1449년 출생 - 덕원군 (왕족)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원군 이서는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10세에 덕원군에 봉해졌고, 효심이 지극하며 성리학과 예법에 밝아 유종이라 칭송받았던 조선의 왕족이다. - 1449년 출생 - 채수
채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작가로,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폐비 윤씨의 휼양을 청하다 파직되었으나, 중종반정 가담 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설공찬전》과 《나재집》 등의 저서를 남겼고, 사후 임호서원이 건립되고 신도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표연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표연말 |
원어 이름 | 表沿沫 |
출생일 | 1449년 |
출생지 | 경상도 함양군 |
사망지 | 강원도 은계역(銀溪驛) |
사망일 | 1498년 9월 4일(음력 8월 19일) (50세) |
별명 | 자(字) 소유(少游) 호(號) 남계(藍溪) |
본관 | 신창(新昌) |
학력 | 1472년 식년 문과 급제 1486년 중시 문과 급제 |
직업 | 문관,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종림(李從林)의 딸 |
자녀 | 아들 표빙(表憑) |
부모 | 아버지 표계(表繼) 어머니 탐진 안씨(안홍기(安鴻起)의 딸) |
경력 | |
주요 경력 | 대제학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조판서 |
2. 생애
1449년(세종 31)에 태어나 1498년(연산군 4)에 49세로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약관에 문행(文行)과 도학(道學), 효행(孝行)으로 알려졌으며,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문장이 뛰어났고, 조위, 김일손 등과도 교유하였다.[1]
1469년(예종 1) 생원·진사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85년 장례원 사의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 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492년 대제학을 지냈다.[1]
1498년 (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소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사초에 적고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경원으로 유배 가던 중 은계역에서 객사하였다.[1]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1507년(중종 2) 신원되었다.[1]
서거정의 문생으로 『필원잡기』의 서문을 썼고, 「논학(論學)」에서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을 보여주었다. 유호인과는 고향 친구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1]
함양군 구천서원, 함창읍 임호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상주시 함창읍 대조2리 ‘새 사오게 마을’에 있다.[1] 1854년(철종 5)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 『남계문집』 4권 2책이 전해진다.[1]
2. 1. 가계와 성장
新昌중국어 표연말(表沿沫, 1449년(세종 31년) ~ 1498년(연산군 4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이며, 김종직과 서거정의 문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을충(乙忠)이고, 아버지는 감찰 계(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었다.어려서부터 문행(文行)과 도학(道學) 그리고 효행(孝行)으로 알려졌으며,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문장이 뛰어났다. 조위, 김일손 등과도 깊은 교류를 맺었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 스승인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이 하나 높아졌다.[1]
그의 스승은 김종직(점필재)였고, 서거정은 좌주(座主)였다. 그의 친구들은 김맹성·김굉필·정여창·조위·권오복·유호인 등이었다. 또 동문이면서 같은 관청에서 근무한 홍귀달·허계·홍한·이세인·유숭조 등과도 친히 교류하였다. 이 가운데에서 허계와 유숭조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점필재의 문인이었다.[1]
김굉필(한훤당)과 정여창(일두)이 도학에만 뛰어났다면, 표연말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서 뛰어났다. 그가 37세 되던 해(1479년)에 실시한 문신제술(文臣製述)에서 당당히 1등을 한 것으로만 보아도 그의 글재주를 알 수 있다. 또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주자의 「재거감흥(齋居感興)」시에 차운하여「근차주자감흥(謹次朱子感興)」시 20수를 지었다. 이는 그가 주자학을 구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1]
동방4현(東方四賢), 또는 동방5현(東方五賢)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그는 도학과 문장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1]
주자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중용』에 나오는 ‘존덕성(尊德性) 도문학(道問學)’이라는 말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다루었다. 그 뒤 16세기에 들어서 주세붕(신독재)·이황(퇴계)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는 고려말부터 싹이 트기 시작한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을 보다 깊이 체득하였고, 작품을 통하여 이론화 한 선구자였다.[1]
아버지 한훤재(寒暄齋) 표계(表繼)가 함창(咸昌)의 검열교수(檢閱敎授)를 지냈으나, 언제 함양(咸陽)으로 이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1] 따라서 표연말이 함양군 효리(孝里)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아버지 대에 함양으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 함양에서 산 것은 그가 24살 되던 해 2월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1]
함양에 살면서 상주 함창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김종직의「혼인을 하러 함창에 가는 표 상사를 보냄(送表上舍之咸昌成親)」을 보면 그 정황을 알 수 있다.[1] 함령(咸寧)은 함창(咸昌)의 옛 이름이다. 생원(生員)ㆍ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것이 21살(1469년)이고 대과에 급제한 것이 24살(1472년)이기 때문에 22살 아니면 23살 때에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1] 23살 되던 해에 집에 집을 지었고, 또 자신의 호를 남계 또는 평석(平石)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집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결혼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1] 부인은 성주(星州) 이씨로 호군(護軍)을 지낸 종림(從林)의 딸이다.[1]
2. 2. 관직 생활
표연말은 1469년(예종 1) 생원·진사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85년 장례원 사의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 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지냈다.[1]벼슬 초기에 예문관 한림의 관례대로 신관들을 괴롭히며 금육과 여악으로 주연을 베푼 일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를 받았는데, 표연말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후 향회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성법을 다시 어길 수 없다'며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한다.[1]
1495년(연산군 1) 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6년(연산군 2)에는 직제학으로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하였다. 그 뒤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1]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뱃놀이를 즐기는 연산군에게 안전한 육지를 두고 위험한 뱃놀이를 즐기냐며 말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표연말을 물에 빠뜨렸다. 연산군이 죽기 직전의 표연말을 건져 올리고 “네가 어찌하여 물에 빠졌는고?”라고 묻자, 표연말은 “신은 초나라 회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러 갔다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굴원은 어리석은 임금에게 낙심하여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충신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이 어리석은 임금에 비유된 것에 화가 났지만, 표연말이 굴원에게 받은 시에서 자신을 어진 임금이라고 칭한 것에 마음이 누그러져 그를 살려 주었다.[1]
2. 3. 강직한 성품과 일화
표연말은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어느 날 연산군에게 뱃놀이의 위험함을 간언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물에 빠졌다.[1] 연산군이 건져 올린 후 어찌 된 일이냐 묻자, 표연말은 초나라 회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러 갔다 왔다고 답했다. 굴원은 어리석은 임금에게 낙심하여 물에 빠져 죽은 충신이었다.[1]연산군이 굴원을 정말 만났냐고 묻자, 표연말은 굴원에게서 시 한 수를 받았다고 답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1][1]
연산군은 표연말이 자신을 어진 임금이라 칭한 것에 만족하여 그를 살려주었다.[1]
표연말은 예문관 시절, 한림의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들을 괴롭히며 금육과 여악으로 주연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를 받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탓으로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1] 이후 향회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1]
2. 4. 무오사화와 죽음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하여 썼다는 이유로 경원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은계역에서 객사하였다. 갑자사화 때에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나, 1507년(중종 2)에 신원되었다.무오사화는 소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사초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한 것이 원인이었다. 표연말은 스승의 행장을 쓴 것은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고, 스승의 행장이었기 때문에 다소 미화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반목으로 인해 스승과 6명의 제자들이 참형을 당하는 무오사화 속에서 표연말은 스승의 행장을 썼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객사하였다.
표연말의 죽음을 두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배되어 가던 표연말이 은계역 도중에서 죽었다. 표연말은 성품이 순후하고 성실한데다가 서사를 통하여 문명이 있었다. 오래 경악에서 모시었으며, 여러 벼슬에서 지내 동지중추부사까지 이르렀다."라는 짧은 기록을 남겼다.
3. 학문과 사상
남계는 도학과 문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정암 조광조는 한훤당, 일두와 함께 남계를 도학의 주요 인물로 언급하며 그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했다.[1]
조긍섭은 점필재와 정암을 잇는 중요한 역할로 한훤당, 일두, 남계을 꼽았다. 그는 점필재가 도학을 창도하고 정암이 계승하는 과정에서, 한훤당, 일두, 남계 세 사람이 조선에서 일성(日星)과 강하(江河)처럼 우뚝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남계가 한훤당과 일두에 비해 덜 알려진 점을 아쉬워했다.[1]
한훤당과 일두가 주로 도학 분야에서 뛰어났다면, 남계는 도학과 문학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7세에 문신제술(文臣製述)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그의 문학적 역량을 입증한다. 또한 남계는 조선 최초로 주자의 「재거감흥(齋居感興)」 시에 차운하여 「근차주자감흥(謹次朱子感興)」 시 20수를 지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4수의 시는 문학과 철학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1. 평가와 의의
남계 표연말은 글공부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점필재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당대 경상도와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이는 표연말 자신이 그만큼 인격이나 학문에서 뛰어났음을 보여준다.양희지(1439-1504)의 『대봉집(大峯集)』에 따르면, 표연말은 벗들과 함께 지은 연구(聯句)에서 "한발 한발 돌계단을 따라, 차츰 안개속으로 들어가네"라는 구절을 지었다. 이는 학문도 등산처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표연말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표연말은 도덕, 문장, 충효, 절의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이대연(李大淵) 등은 「구천서원청액소(龜川書院請額疏)」에서 표연말을 정여창, 정온, 노정과 함께 "도덕과 문장, 충효와 절의가 모두 백세의 유종(儒宗)"이라고 칭송했다.[1]
조긍섭(曺兢燮)은 점필재와 정암을 잇는 중요한 역할로 한훤당, 일두, 남계을 꼽았다. 그는 남계가 한훤당과 일두보다 덜 알려진 것을 안타까워했다.[1]
정암 조광조는 표연말의 도학을 높이 평가했다. 조긍섭은 정암이 경연에서 유현(儒賢)을 포장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기를 청할 때, 한훤당, 일두, 남계를 반드시 언급했다고 전한다. 이는 표연말의 도학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1]
한훤당과 일두가 도학에서만 뛰어났다면, 표연말은 도학과 문장 모두에서 뛰어났다. 표연말이 37세 때 문신제술(文臣製述)에서 1등을 한 것은 그의 글재주를 입증한다.
표연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자의 「재거감흥(齋居感興)」 시에 차운하여 「근차주자감흥(謹次朱子感興)」 시 20수를 지었다. 현재는 4수만 남아있지만, 그 내용은 문학과 철학을 겸비하고 있다.
4. 무오사화(戊午士禍)와 표연말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표연말은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하고 사초에 소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적었다는 이유로 경원으로 유배를 갔다. 유배 도중 은계역에서 객사하였다.[1]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나,[1] 1507년(중종 2년) 신원되었다.[1]
4. 1. 무오사화의 배경과 발단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훈구파 이극돈이 정희왕후 국상 때 전라도 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다.[1]대의명분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인지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고, 대간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편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1]
특히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를 무고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유자광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1]
또한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극돈과 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1]
그러나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해서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을 개설하였는데, 우연하게도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면서 훈구파가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파악하고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1]
유자광은 즉시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과 모의해서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사림파의 간언과 권학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1]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7월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1]
4. 2. 표연말의 연루와 유배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하여 썼다는 이유와 사초에 소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적은 것 때문에 경원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은계역에서 객사하였다.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나, 1507년(중종 2년) 신원되었다.
4. 3. 유배와 죽음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경원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은계역에서 객사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나, 1507년(중종 2)에 신원되었다.5. 저서 및 작품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표을충(表乙忠) |
조부 | 표하(表河) |
아버지 | 표계(表繼) |
외조부 | 안홍기(安鴻起) |
어머니 | 탐진 안씨(耽津安氏) |
형 | 표연원(表沿源) |
형 | 표연한(表沿漢) - 양덕현감(陽德縣監) |
처부 | 이종림(李從林) |
부인 | 성주 이씨(星州李氏) |
아들 | 표빙(表憑) |
참조
[1]
문서
성화기축6년9월일생원진사시방(成化己丑六年九月日生員進士試榜)
[2]
서적
남계집
표연말
[3]
실록
성종실록 184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10월 22일(기해)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85-10-22
[4]
실록
성종실록 181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7월 26일(갑술)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85-07-26
[5]
실록
성종실록 254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6월 17일(임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91-06-17
[6]
실록
성종실록 280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7월 29일(신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93-07-29
[7]
실록
연산군일기 1권, 즉위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12월 27일(임오)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94-12-27
[8]
실록
연산군일기 5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5월 11일(계사) 7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95-05-11
[9]
실록
연산군일기 30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7월 17일(신해) 6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98-07-17
[10]
실록
연산군일기 56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10월 24일(신사)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04-10-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