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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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사 연표는 핀란드의 선사 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연도별로 정리한 문서이다. 핀란드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하여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쳤으며, 800년경 발트 핀족이 정착했다. 중세 시대에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1323년 뇌테보리 조약으로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간의 국경이 정해졌다. 칼마르 동맹 시대를 거쳐 바사 왕조 시대에 이르러 스웨덴은 핀란드 대공국을 선포했고,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은 러시아에 영토를 할양했다. 1809년 핀란드 전쟁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핀란드는 내전, 겨울 전쟁, 계속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으며, 1947년 파리 조약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1950년대 이후 핀란드는 경제 성장과 복지 국가 건설을 이루었고,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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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사 연표 | |
---|---|
지도 | |
핀란드사 연표 | |
선사 시대 | |
기원전 9000년경 | 빙하기 이후 첫 인간의 정착 |
기원전 7000년경 | 수오무스야르비 문화 |
기원전 5300년경 | 콤사 문화 |
기원전 4200년경 | 빗살무늬토기 문화 |
기원전 3200년~기원전 2300년 | 전투 도끼 문화 |
기원전 1500년경 | 청동기 시대 시작 |
기원전 500년경 | 철기 시대 시작 |
500년~1300년 | |
500년~1000년 | 핀족의 핀란드로 이주 |
1155년 | 스웨덴의 에리크 9세의 제1차 십자군 전쟁 |
1238년~1239년 | 스웨덴의 제2차 십자군 전쟁 |
1249년 | 스웨덴의 비르예르 백작의 제2차 십자군 전쟁 |
1293년 | 스웨덴의 제3차 십자군 전쟁 |
스웨덴 통치 시대 | |
1300년경 | 핀란드는 스웨덴의 일부가 됨 |
1362년 | 핀란드인들이 스웨덴 왕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함 |
1523년 |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에서 탈퇴함 |
1543년 | 최초의 핀란드어 책인 아베체다리움이 미카엘 아그리콜라에 의해 출판됨 |
1550년 | 헬싱키가 구스타프 1세 바사에 의해 건립됨 |
1581년 | 핀란드 지역은 공국으로 승격됨 |
1640년 | 투르쿠 대학교가 건립됨 |
1700년~1721년 | 대북방 전쟁: 핀란드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됨 (대분노 시대) |
1714년 | 강트 해전 |
1741년~1743년 | 소북방 전쟁: 핀란드는 러시아에 의해 다시 점령됨 (소분노 시대) |
1808년~1809년 | 핀란드 전쟁: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함 |
러시아 제국 통치 시대 | |
1809년 |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이 됨 |
1812년 | 헬싱키가 핀란드의 수도가 됨 |
1854년 | 알란드의 깃발이 처음으로 게양됨 |
1856년 | 알란드 제도가 비무장화됨 |
1863년 | 핀란드어가 공용어로 지정됨 |
1906년 | 핀란드는 유럽에서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부여한 최초의 국가가 됨 |
독립 | |
1917년 |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함 |
1918년 | 핀란드 내전: 백군이 적군을 격파함 |
1919년 | 핀란드는 공화국 헌법을 채택함 |
1920년 | 페차모가 핀란드에 할양됨 |
1932년 |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함 |
1939년~1940년 | 겨울 전쟁: 핀란드는 소련의 침략을 받음.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을 소련에 할양함 |
1941년~1944년 | 계속 전쟁: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에 전쟁을 선포함. 핀란드는 페차모를 소련에 다시 할양함 |
1944년~1945년 | 라플란드 전쟁: 핀란드는 독일군을 라플란드에서 몰아냄 |
1947년 | 핀란드는 소련과 평화 조약을 체결함 |
1948년 | 핀란드는 소련과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함 |
1952년 | 헬싱키에서 1952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됨 |
1955년 | 핀란드는 국제 연합에 가입함 |
1956년~1982년 | 우르호 케코넨이 핀란드의 대통령으로 재임함 |
1975년 | 헬싱키에서 유럽 안보 협력 회의가 개최됨 |
1995년 | 핀란드는 유럽 연합에 가입함 |
1999년 | 핀란드는 유로존에 가입함 |
2023년 | 핀란드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함 |
2. 선사 시대
기원전 250000년경-기원전 75000년경: 오늘날의 크리스티난카우풍키의 수실루올라 동굴에 원시인 거주 (논란 있음)
기원전 8000년경: 바이흐젤 빙하의 후퇴로 핀란드 땅이 드러나고 최초의 현생인류가 핀란드에 상륙[1]
연도 | 날짜 | 사건 |
---|---|---|
기원전 9000년 | 핀란드에서 마지막 빙하기 종료. | |
기원전 8900년 | 핀란드는 현생 인류에 의해 거주되었다.[1] | |
기원전 5300년 | 핀란드 최초의 도기. | |
기원전 3500년 | 자이언트 교회 건설. | |
기원전 2000년 | 키우카이넨 문화 시작.[2] | |
기원전 1500년 | 청동기 시대 시작. | |
기원전 500년 | 철기 시대 시작.[1] |
'''중석기 시대 (기원전 8700년경-기원전 5100년경)'''
핀란드 중석기 문화는 수렵, 어로, 채집으로 먹고사는 수렵채집문화였다.[1] 사냥감은 사슴, 비버, 물개 등이었고, 개를 가축으로 길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주지는 당시 기준의 호반가(이 당시 발트해는 안퀼루스호라는 거대 담수호였음)에 위치했다. 사람들은 사냥감의 이동을 따라다니며 이주하며 살았다. 핀란드 중석기인들의 인구는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였다. 핀란드의 중석기 문화는 기원전 7500년경 완전히 정착했으며, 수오무스얘르비 문화라고도 한다.
- 기원전 8800년경: 오리마틸라 뮐뤼코스키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700년경: 에노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700년경-기원전 5100년경: 후이티넨 사슴두상 제작.
- 기원전 8600년경-기원전 8500년경: 요우체노 사레노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600년경-기원전 8200년경: 라흐티 리스톨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540년경: 안트레아 그물 제작.
- 기원전 8300년경-기원전 8200년경: 우쵸키 수얄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7500년경-기원전 5100년경: 수오무스얘르비 문화.
- 기원전 6980년경-기원전 6800년경: 헤이놀라 썰매날 제작.
- 기원전 6500년경: 키르코눔미 골각기 제작.
- 기원전 5790년경: 로바니에미 사슴두상제작.
'''신석기 시대 (기원전 5100년경-기원전 1500년경)'''
신석기 시대에 들어 농사와 다른 가축들이 도입되었다. 마을 단위의 거주지와 마을 문화가 발생했다. 핀란드에 처음 도입된 작물은 메밀이었으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퍼져나갔다. 토기제작도 확산되었고, 석간주묘가 매장 형태로 정착했다.

- 기원전 5300년경: 코우볼라 메밀재배문화.
- 기원전 5200년경-기원전 2000년경: 빗살무늬토기 문화.
- 기원전 5000년경-기원전 4500년경: 핀란드 최초의 암면화 출현.
- 기원전 3200년경: 핀란드에 가축 도입.
- 기원전 3000년경-기원전 2000년경: 거인교회들의 건설.
- 기원전 2800년경-기원전 2300년경: 매듭무늬토기 문화.
- 기원전 2500년경: 중앙수오미 지역에 농사 도입.
- 기원전 1500년경: 투르쿠 니우스칼라에서 보리농사.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청동을 비롯한 금속과 합금이 무기, 연장,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 공동체는 농경민과 수렵어로민으로 구성되었고, 계급사회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남부, 볼가강 중류, 우랄산맥과 연결되어 있었다. 농업이 우세한 산업이 되었지만, 어로의 중요성은 여전했다. 농사는 거의 화전농업이었고, 작물은 보리와 밀이 흔했다. 동부에서는 수렵문화가 계속되었고 축산업이 일부 출현했다. 기후 냉각화로 인해 농사는 지리멸렬했으며 내륙지역에서는 아예 농사가 포기되었다. 가축으로는 양, 돼지, 염소, 소를 길렀다. 조선기술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주양식은 헛간과 창고와 거실로 구성된 스칸디나비아식 롱하우스였다. 선상열석도 제작되었다. 무덤 양식으로서 서해안에서는 분구묘가, 내륙지역에서는 라피식 폐허가 만들어졌다. 장례는 처음에는 그냥 매장이 주류였고, 후기에는 화장한 뒤 매장하는 식으로 변했다.
- 기원전 1900년경-기원전 1000년경: 로보체로 토기 제작.
- 기원전 1900년경-기원전 500년경: 직물무늬토기 제작.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1100년경: 낙킬라에서 셀캐캉가스 적석총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800년경: 파이미오 토키 제작.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에우라의 쿠닌칸하우타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에우라 루이스타리 고분군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하랴발타 마틴하류 고분군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코케매키 오랴파시 고분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라이틸라 하우트부오리성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살로 베이탁칼라 산성 건설.
- 기원전 1200년경-기원전 1100년경: 아베난마의 오테르뵈텐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900년경: 마닌카 도끼 제작.
- 기원전 1100년경-기원넌 500년경: 리에토 고성이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500년경: 안틸라 토기 제작.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500년경: 라우마 삼말라흐덴매키 청동기시대 고분군 건설.
- 기원전 900년경-기원전 300년경: 루콘사리 토기 제작.
- 기원전 800년경: 현재의 핀인의 조상이 되는 발트핀족 주류계열이 핀란드 서남해안에 상륙.[13]
- 기원전 800년경-기원전 300년경: 모르뷔 토기 제작.
-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300년경: 시르니흐타 토기 제작.
-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300년경: 콀뫼위 토기 제작.
'''철기 시대 (기원전 500년경-기원후 1300년경)'''
철은 도끼, 칼, 창촉, 낫, 장신구 등의 주재료가 되었다.[1] 핀란드 최초의 철기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에 도입되었다. 해안지역은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발트해 연안지역에서, 내륙지방은 유럽 러시아 동부에서 유입되었다. 핀란드 땅에서 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에 가장 이른 증거가 발견된다. 철기시대 들어 핀란드의 거주지들은 서부 해안지역과 동부 내륙지방의 문화가 완연히 분화하기 시작했다. 농사는 보리, 호밀, 귀리, 순무를 작물로 재배했고, 소, 양, 염소, 돼지를 가축으로 길렀다. 장례는 청동기시대의 분구묘 양식이 지속되다가 기원후 500년경부터 토광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기원후 800년 이후 무덤 양식은 동서 양쪽에서 바이킹 시대와 문화적으로 교류하여 연결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4][15]
기원전 300년경-기원전 200년경에는 핀란드 최초의 철기가 생산되었다. 98년,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에서 "페니트족"을 언급했다. 200년대에는 노우시아이넨 목걸이가 제작되었다.

300년대-800년대에는 이소퀴뢰 레밴루흐타에 매장된 뼈들의 탄소연대가, 300년경-1000년경에는 패이배니에미 매장지가 존재했다. 400년경-500년경에는 파이미오 나콜린나 산성이 축조되었다. 500년대에는 배해퀴뢰 얘틸래이센 티에가 만들어졌다.

500년경-700년경에는 리에토 고성이 두 번째로 사용되었고, 500년경-800년경에는 카르야 보클린트 산성이 축조되었다. 500년경-1200년경에는 바리콘니에미 철기시대 거주지가, 550년경-800년경에는 베실라흐티 키르무카르무 언덕 매장지가, 550년경-1150년경에는 에우라 팝필란매키 철기시대 거주지가, 550년경-1200년경에는 에우라 캐래얘매키 철기시대 거주지가 존재했다. 500년경-1300년경에는 에우라 루이스타리 매장지가 만들어졌다.
600년대에는 뵈위리 캘다매키와 윌리스퀼래 배무덤이 만들어졌다. 650년경-800년경에는 라이틸라 바이니온매키 매장지가 만들어졌다. 700년경-1000년경에는 홀롤라 카파투오시아 산성이 만들어졌다. 793년-1066년에는 살트빅 보르그보다 산성과 타이팔섬 쿠이바케트벨레 산성이 만들어졌다. 800년대에는 쿠흐모이넨 파피섬 매장지와 투르시안녿코 거주지가 만들어졌으며, 뵈위리 룬돌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18-19세기의 위작이라는 설이 있음). 800년경-1000년경에는 캑스매키 라폴라 고성이 축조되었다.
2. 1. 중석기 시대 (기원전 8700년경-기원전 5100년경)
핀란드 중석기 문화는 수렵, 어로, 채집으로 먹고사는 수렵채집문화였다.[1] 사냥감은 사슴, 비버, 물개 등이었고, 개를 가축으로 길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주지는 당시 기준의 호반가(이 당시 발트해는 안퀼루스호라는 거대 담수호였음)에 위치했다. 사람들은 사냥감의 이동을 따라다니며 이주하며 살았다. 핀란드 중석기인들의 인구는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였다. 핀란드의 중석기 문화는 기원전 7500년경 완전히 정착했으며, 수오무스얘르비 문화라고도 한다.
- 기원전 8800년경: 오리마틸라 뮐뤼코스키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700년경: 에노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700년경-기원전 5100년경: 후이티넨 사슴두상 제작.
- 기원전 8600년경-기원전 8500년경: 요우체노 사레노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600년경-기원전 8200년경: 라흐티 리스톨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8540년경: 안트레아 그물 제작.
- 기원전 8300년경-기원전 8200년경: 우쵸키 수얄라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7500년경-기원전 5100년경: 수오무스얘르비 문화.
- 기원전 6980년경-기원전 6800년경: 헤이놀라 썰매날 제작.
- 기원전 6500년경: 키르코눔미 골각기 제작.
- 기원전 5790년경: 로바니에미 사슴두상제작.
2. 2. 신석기 시대 (기원전 5100년경-기원전 1500년경)
신석기 시대에 들어 농사와 다른 가축들이 도입되었다. 마을 단위의 거주지와 마을 문화가 발생했다. 핀란드에 처음 도입된 작물은 메밀이었으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퍼져나갔다. 토기제작도 확산되었고, 석간주묘가 매장 형태로 정착했다.- 기원전 5300년경: 코우볼라 메밀재배문화.
- 기원전 5200년경-기원전 2000년경: 빗살무늬토기 문화.
- 기원전 5000년경-기원전 4500년경: 핀란드 최초의 암면화 출현.
- 기원전 3200년경: 핀란드에 가축 도입.
- 기원전 3000년경-기원전 2000년경: 거인교회들의 건설.
- 기원전 2800년경-기원전 2300년경: 매듭무늬토기 문화.
- 기원전 2500년경: 중앙수오미 지역에 농사 도입.
- 기원전 1500년경: 투르쿠 니우스칼라에서 보리농사.
2. 3.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청동을 비롯한 금속과 합금이 무기, 연장,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 공동체는 농경민과 수렵어로민으로 구성되었고, 계급사회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남부, 볼가강 중류, 우랄산맥과 연결되어 있었다. 농업이 우세한 산업이 되었지만, 어로의 중요성은 여전했다. 농사는 거의 화전농업이었고, 작물은 보리와 밀이 흔했다. 동부에서는 수렵문화가 계속되었고 축산업이 일부 출현했다. 기후 냉각화로 인해 농사는 지리멸렬했으며 내륙지역에서는 아예 농사가 포기되었다. 가축으로는 양, 돼지, 염소, 소를 길렀다. 조선기술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주양식은 헛간과 창고와 거실로 구성된 스칸디나비아식 롱하우스였다. 선상열석도 제작되었다. 무덤 양식으로서 서해안에서는 분구묘가, 내륙지역에서는 라피식 폐허가 만들어졌다. 장례는 처음에는 그냥 매장이 주류였고, 후기에는 화장한 뒤 매장하는 식으로 변했다.
- 기원전 1900년경-기원전 1000년경: 로보체로 토기 제작.
- 기원전 1900년경-기원전 500년경: 직물무늬토기 제작.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1100년경: 낙킬라에서 셀캐캉가스 적석총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800년경: 파이미오 토키 제작.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에우라의 쿠닌칸하우타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에우라 루이스타리 고분군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하랴발타 마틴하류 고분군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코케매키 오랴파시 고분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라이틸라 하우트부오리성 건설.
- 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 살로 베이탁칼라 산성 건설.
- 기원전 1200년경-기원전 1100년경: 아베난마의 오테르뵈텐에 고대인 거주.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900년경: 마닌카 도끼 제작.
- 기원전 1100년경-기원넌 500년경: 리에토 고성이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500년경: 안틸라 토기 제작.
- 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500년경: 라우마 삼말라흐덴매키 청동기시대 고분군 건설.
- 기원전 900년경-기원전 300년경: 루콘사리 토기 제작.
- 기원전 800년경: 현재의 핀인의 조상이 되는 발트핀족 주류계열이 핀란드 서남해안에 상륙.[13]
- 기원전 800년경-기원전 300년경: 모르뷔 토기 제작.
-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300년경: 시르니흐타 토기 제작.
-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300년경: 콀뫼위 토기 제작.
2. 4. 철기 시대 (기원전 500년경-기원후 1300년경)
철은 도끼, 칼, 창촉, 낫, 장신구 등의 주재료가 되었다.[1] 핀란드 최초의 철기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에 도입되었다. 해안지역은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발트해 연안지역에서, 내륙지방은 유럽 러시아 동부에서 유입되었다. 핀란드 땅에서 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에 가장 이른 증거가 발견된다. 철기시대 들어 핀란드의 거주지들은 서부 해안지역과 동부 내륙지방의 문화가 완연히 분화하기 시작했다. 농사는 보리, 호밀, 귀리, 순무를 작물로 재배했고, 소, 양, 염소, 돼지를 가축으로 길렀다. 장례는 청동기시대의 분구묘 양식이 지속되다가 기원후 500년경부터 토광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기원후 800년 이후 무덤 양식은 동서 양쪽에서 바이킹 시대와 문화적으로 교류하여 연결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4][15]기원전 300년경-기원전 200년경에는 핀란드 최초의 철기가 생산되었다. 98년,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에서 "페니트족"을 언급했다. 200년대에는 노우시아이넨 목걸이가 제작되었다. 500년대-600년대에는 앵글로색슨어 시 「위드시드」에 "핀눔인"을 다스리는 자 "캘릭"(Cælic)이 언급되었다. 811년, 프랑크 왕국 편년사에 "수오미니미넨(Suomi-niminen)"이라는 사람이 평화협정과 관련해 언급되었는데, 이는 "수오미"라는 낱말이 문헌상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이다.[14][15]
300년대-800년대에는 이소퀴뢰 레밴루흐타에 매장된 뼈들의 탄소연대가, 300년경-1000년경에는 패이배니에미 매장지가 존재했다. 400년경-500년경에는 파이미오 나콜린나 산성이 축조되었다. 500년대에는 배해퀴뢰 얘틸래이센 티에가 만들어졌다.
500년경-700년경에는 리에토 고성이 두 번째로 사용되었고, 500년경-800년경에는 카르야 보클린트 산성이 축조되었다. 500년경-1200년경에는 바리콘니에미 철기시대 거주지가, 550년경-800년경에는 베실라흐티 키르무카르무 언덕 매장지가, 550년경-1150년경에는 에우라 팝필란매키 철기시대 거주지가, 550년경-1200년경에는 에우라 캐래얘매키 철기시대 거주지가 존재했다. 500년경-1300년경에는 에우라 루이스타리 매장지가 만들어졌다.
600년대에는 뵈위리 캘다매키와 윌리스퀼래 배무덤이 만들어졌다. 650년경-800년경에는 라이틸라 바이니온매키 매장지가 만들어졌다. 700년경-1000년경에는 홀롤라 카파투오시아 산성이 만들어졌다. 793년-1066년에는 살트빅 보르그보다 산성과 타이팔섬 쿠이바케트벨레 산성이 만들어졌다. 800년대에는 쿠흐모이넨 파피섬 매장지와 투르시안녿코 거주지가 만들어졌으며, 뵈위리 룬돌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18-19세기의 위작이라는 설이 있음). 800년경-1000년경에는 캑스매키 라폴라 고성이 축조되었다.
3. 원사 시대 (기원후 1000년경-기원후 1240년경)
1000년경 리칼라 시장이 형성되었다.[16] 1000년경에서 1370년경 사이에는 리에토 고성이 세 번째로 사용되었다.[16] 1008년, 헤르달레르 전투에서 우시마 지역의 핀족이 노르웨이 왕자 올라프와 싸웠다(『헤임스크링글라』 「올라프 성왕의 사가」).[16] 1020년경에서 1050년경 사이에 에우라 여성복이 제작되었다.[16] 1030년대에는 "오트뤼그(Otrygg)"라는 바이킹이 핀란드에서 피살되었고( 룬돌 U 582[16]), 1030년경에서 1050년경 사이에는 에길(Egil)이라는 바이킹이 해메 지역에서 사망했다( 룬돌 Gs 13[16]). 1042년, 노브고로드 공작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얨인(아마 해메인?)을 공격하며 노브고로드-옜인 전쟁이 발발했다.[16]
1100년경 베실라흐티 발키스텐 산성이 축조되었다.[16] 1100년대에는 할릭코 퇴장화폐가 나타났고, 페르니외 여성복이 제작되었다.[16]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는 티우린린나가 건설되었다.[16] 1123년, 노브고로드-옜인 전쟁에서 노브고로드 공작 프세볼로트 므스티슬라비치가 핀란드를 공격했다(『노브고로드 제1연대기』).[16] 1134년경에서 1158년경 사이, 잉글랜드인 성직자 헨리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16] 1138년경에서 1154년경 사이, 무함마드 알이드리시의 지도에 라그발다라는 핀란드 도시 또는 읍락이 표시되었다.[16] 1142년, 노브고로드-옜인 전쟁에서 얨인들과 스웨덴이 노브고로드를 공격했다.[16] 1143년, 캘키살미성이 최초로 문헌에 언급되었다.[16] 1149년, 노브고로드-옜인 전쟁에서 얨인들이 다시 노브고로드를 공격했다.[16] 1150년경, 제1차 스웨덴 십자군으로 헨리 주교가 에리크 9세를 따라 핀란드로 건너왔다.[16]
1170년경, 『노르웨이의 역사』에 "크벤란드"가 언급되었다.[16] 1171년 또는 117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서한 「그라비스 아드모둠」에 핀인들이 언급되었다.[16] 1075년경, 『함부르크 주교들의 사적』에 "테라 페미나리움(Terra feminariumla)"이 언급되었다.[16]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핀란드 최초의 교회당인 라반툴라 중세교회가 건설되었다.[16] 1191년, 노브고로드-옜인 전쟁에서 카리알라인들과 노브로고드군이 얨인을 공격했다.[16]
13세기경, 야낙칼라 하코이넨 산성과 야낙칼라 항가스텐매키 산성이 축조되었다.[16] 13세기, 『에길의 사가』에 북유럽의 지리를 설명하면서 크벤란드와 카리알라의 지명, 그리고 크벤인들의 왕 "파라비드"가 언급되었다.[16] 같은 시기, 스웨덴 왕 아그네 스캴파르본디가 핀란드를 침공해 군장 프로스티의 딸 스캴비를 약탈혼했고(『윙글링 일족의 사가』),[16] 스웨덴 왕 에리크 아눈드손이 핀란드, 카리알라, 쿠를란트, 에스토니아를 정복했다(『헤임스크링글라』 「올라프 성왕의 사가」).[16]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 헬싱키 바르티오퀼래 산성이 축조되었다.[16]
1200년경에서 1400년경 사이, 툭칼라 매장지가 사용되었다.[16] 1202년경에서 1209년경 사이, 로돌푸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16]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서간에서 최근 기독교로 개종하는 지역들 중 하나로 핀란드가 언급되었다.[16] 1210년경에서 1234년경 사이, 풀코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16] 1213년, 발케아코스키 아필란레흐티 고성이 축조되었다.[16] 1220년대, 사스타말라 펜티 산성이 축조되었다.[16] 1220년경에서 1245년 사이, 투오마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16] 1226년에서 1227년 사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야로슬라프 2세 프세볼로도비치가 얨인과 에스티인, 카리알라인을 공격했다.[16] 1227년, 노브고로드 공작 야로슬라프가 카리알라에 선교사를 보냈다.[16] 1228년 여름, 얨인들이 2,000 병력으로 스타라야라도가로 복수원정을 갔으나 처참히 패배했다.[16]
1229년, 북방 십자군의 일환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발트해 상업도시들(비스뷔, 리가, 뤼베크)에 노브고로드에 대한 금수조치를 내리고 몇년 뒤에는 핀란드 땅을 지키라고 검의 형제기사단을 파견했다.[16] 같은 해,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핀란드를 애매한 선교지가 아닌 확고한 천주교 교구로 지정하고, 전통종교의 희생의식 장소들을 접수하도록 했다.[17] 또한 핀란드 주교좌를 노우시아이넨에서 코로이넨으로 옮겼다.[17] 1237년 12월 9일, 해메 분란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해메인들이 전통종교로 재전향하여 교회기물을 파괴하고 있다며, 그들에 맞서 싸울 것을 고취하는 내용의 서한을 웁살라 주교에게 보냈다.[16] 1240년 7월 15일, 네바강 전투에서 핀족들 중 카리알라인들은 노브고로드 공화국 측에, 남서수오미인과 해메인들은 스웨덴 왕국 측에 가담했다(『노브고로드 제1연대기』, 『소피아 제1연대기』).[16]
연도 | 날짜 | 사건 |
---|---|---|
1 | 로마 시대 시작. | |
400 | 민족 이동 시대 시작. | |
575 | 메로빙거 왕조 시대 시작. | |
800 | 메로빙거 왕조 시대 종료. |
4. 중세 시대 (스웨덴 지배기)
제2차 스웨덴 십자군은 1239년 또는 1256년에 일어났다.[3] 1278년에는 카렐리아가 노브고로드의 지배를 받았다. 제3차 스웨덴 십자군은 1293년에 일어났다.[3]
=== 중세 전기 ===
1248년경부터 1258년까지 베로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18] 1249년에는 제2차 스웨덴 십자군이 일어났으며(전거: 『뤼베크시 연대기』),[3] 베로 주교는 스웨덴 왕에게 “핀란드 세금”을 납부했다.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의 역사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스웨덴이 핀란드 서해안에 대한 정복을 실제로 시작한 것은 이 즈음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 투르쿠에 핀란드 최초의 수도원인 성 올라프 도미니코 수도원이 세워졌다.
1250년부터 1266년까지는 스웨덴 왕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의 생부 비르예르 야를이 섭정으로서 스웨덴의 권력을 장악했다. 1258년부터 1266년까지는 라그발드 1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비르예르 야를이 죽은 1266년부터 1275년까지는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이 스웨덴 국왕으로서 친정했다. 1266년부터 1286년까지는 카틸루스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75년부터 1290년까지는 망누스 라둘로스가 스웨덴 왕위에 있었다. 1276년에는 핀란드의 첫 교구인 투르쿠 대교구와 핀란드 최초의 학교인 투르쿠 대성당학교가 세워졌다. 1280년, 칼 구스타브손이 "핀란드 도호(praefectus finlandiae)"로 임명되어 남서수오미 지역의 사령관이 되었다.[18] 1280년에는 중기병 군마를 생산하는 농장들에 조세감면이 주어지면서 랠시 계급이 생겨났다. 1284년, 스웨덴 왕 망누스 라둘로스는 막내동생 벵그트 비르예르손을 핀란드 공작으로 봉작했다. 1286년부터 1290년까지는 요한네스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90년부터 1318년까지는 비르예르 망누손이 스웨덴 왕위에 있었고, 1290년부터 1298년까지는 비르예르 망누손이 어려서 토르켈 크누트손이 섭정했다. 1291년부터 1308년까지는 망누스 1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93년에는 제3차 스웨덴 십자군이 일어나(전거: 『에리크의 연대기』) 스웨덴군이 카리알라까지 진격하여 비푸리성을 세워 카리알라 일대의 교역 및 방어의 중심지로 삼았다.[3]
14세기에는 시포에 시포 고성이 세워졌고, 크벤인들이 코르시인들과 함께 스웨덴령 지역(Svíþjóð-alueelle)을 공격했다(전거: 「노르나게스트의 사트르」). 14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는 『아보아 송가집』이 저술되었다. 1300년에는 투르쿠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1302년에는 발데마르 망누손이 핀란드 공작이 되었다.
1309년, 투르쿠라는 도시가 문헌상에 최초로 언급되었고, 1309년부터 1321년까지 라그발드 2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308년부터 1321년까지는 쿠시스토 주교성이 세워졌다(전거: 파벨 유스텐 주교의 『핀란드 주교연대기』). 1318년, 루스인들이 투르쿠시를 불태우고 투르쿠 대성당을 약탈했다(전거: 파벨 유스텐 주교의 『핀란드 주교연대기』). 같은 해부터 1319년까지 마티아스 케틸문드손이 스웨덴의 실권자가 되었다.
=== 중세 성기 ===
- 1319년-1364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스웨덴 왕이 되다.
- 1323년 8월 12일: 뇌테보리 조약으로 스웨덴-노브로고드 전쟁이 끝나고, 카리알라 지협을 동서로 나누어 스웨덴 왕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
- 1326년: 투르쿠에서 핀란드 최초의 국회가 열렸다.[18]
- 1340년: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새액스매키 농민들을 파문하다.
- 1344년: 핀란드가 처음으로 "외스테를란드"(Österland, 동쪽 땅)라고 지칭되다.
- 1346년: 포르보시가 세워지다.
- 1350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토지법과 도시법을 발표하다.
- 1351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핀란드를 방문해 핀인 랠시들을 군마와 병기 검사에 초대했다.[18]
- 1353년: 벵그트 알고츠손이 핀란드 공작이 되다.[18]
- 1360년–1370년: 보 욘손 그리프가 라세포리성을 축성하다.
- 1362년: 핀란드가 스웨덴 왕위선거에 라만니를 파견할 권리를 얻다.[18]
- 1364년-1389년: 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이 스웨덴 왕이 되다.
- 1365년: 알브레히트 3세의 군대가 투르쿠성을 공성해 항복을 받아내고, 포흐얀마와 사타쿤타를 장악하다.[18]
- 1365년 2월 7일: 알브레히트 3세가 울빌라를 시로 승격시키다.
- 1367년: 코케매키강변에 아보르흐성이 축성되고 린만성은 에우라요키에 속하게 되다.
- 1371년: 보 욘손 그리프가 "스웨덴의 최고궁내관 겸 동쪽 땅의 총장"이 되다.[18]
- 1388년: 카스텔홀름성이 문헌상에 처음 언급되다.
- 1348년: 마그누스 4세가 정교회를 상대로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 칼마르 동군연합 시대 (1397년–1523년) ===

1389년-1412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여왕을 겸하고, 1396년-1439년에는 포메른 공작 에리히 1세가 에리크 13세로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397년 에리크 13세가 칼마르에서 노르드계 삼왕국의 왕으로 대관하여 칼마르 연합이 결성되었다. 칼마르 연합은 1521년까지 지속되었다.


15세기에는 『난탈리 수도원 본초서』가 집필되었다. 1403년 비푸리가 시로 승격되었고, 1407년 에리크 13세는 투르쿠를 방문해 파발리 카르팔라이센, 올라비 본포이카,[19] 수네 수네손[17] 등 14명의 랠시를 접견했다. 1409년에는 투르쿠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412년-1450년 망누스 2세 타바스트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으며, 1414년 투르쿠 토지법원이 세워졌다. 1429년 투르쿠에 큰 불이 났다.[17] 1430년대에는 『아보아의 서』가 집필되었다.
1434년-1436년 엥엘브렉트의 난이 일어나 엥엘브렉트 엥엘브렉트손이 에리크 13세에 반하여 봉기했다. 1435년 에리크 13세는 투르쿠를 다시 방문해서 14명의 랠시를 접견했고,[17] 같은 해 스웨덴 아르보가에서 4개 신분이 모두 참여하는 의회가 처음 열렸다.[17] 1435년 핀란드의 사법 관할구(Laamannikunta)는 남핀란드와 북핀란드로 나뉘었고, 카리알라에는 별도의 관할구가 설치되어 비푸리성 성주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1436년-1438년 칼 크누트손이 스웨덴 실권자가 되었고, 1438년-1441년에는 스웨덴 섭정이 되었다. 1438년-1439년 사타쿤타에서 다비드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 난탈리 수도원이 세워졌다. 1441년-1448년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42년 라우마시가, 1443년 난탈리시가 세워졌다. 1448년 벵그트 왼손과 닐스 왼손이 핀란드의 섭정이 되었고, 같은 해 팔름스쾰드 파편이 작성되었다. 1448년–1457년 칼 크누트손이 칼 8세로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50년–1460년 올라우스 마그니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고, 1457년 왼스 벵그트손과 에리크 악셀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57년-1464년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60년-1489년 콘라트 비츠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464년-1465년 칼 8세 크누트손이 다시 스웨덴 왕이 되었고, 1465년-1466년 왼스 벵그트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66년-1467년 에리크 악셀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467년-1470년 칼 8세 크누트손이 다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70년-1497년 스텐 스투레 덴 엘드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74년경 『투르쿠 대성당의 흑색서』가 작성되었고, 1475년 사본린나의 올라비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1483년 칼마르 약조를 통해 덴마크 왕 한스 1세를 스웨덴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추밀원의 동의 없이 과세하거나 행정구역을 나누지 못하도록 했지만, 한스 1세가 비준하지 않아 강제력을 갖지 못했다. 1488년 핀란드 최초의 인쇄본 책인 『아보아 미사전서』가 제작되었다. 1489년-1500년 망누스 3세 스톄른코르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495년-1497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였다. 1495년 11월 30일 비푸리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1497년-1501년 한스 1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6세기 전례서 『베스트의 서』가 작성되었다. 1500년-1506년 라우리 수르패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501년-1503년 스텐 스투레 덴 엘드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501년-1512년 덴마크와 스웨덴의 전쟁이 일어나 한스 1세의 덴마크군이 핀란드 서해안을 공격하여 카스텔홀름성이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투르쿠와 포르보가 불탔다.
1504년-1512년 스반테 닐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506년-1510년 요한네스 4세 올로프손이 핀란드 주교가 되었고, 1510년-1522년 아르비드 쿠르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512년 에리크 트롤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512년-1520년 스텐 스투레 덴 윙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514년 투르쿠 주교 헤밍의 시복이 투르쿠에서 기념되었으나, 종교개혁 통에 시성은 유예되었다. 1520년-1521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고, 1520년 11월 7일-11월 10일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크리스티안 2세의 스웨덴 왕 대관식 다음날 스웨덴 독립파 귀족들이 학살당했다.
1520년-1523년 스웨덴 독립전쟁이 일어나 스톡홀름 피바다에 대한 반응으로 스웨덴 귀족들이 구스타브 바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521년 구스타브 바사가 스웨덴의 섭정으로 선출되었고,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1522년 『아보아의 의제서』가 작성되었다.
4. 1. 중세 전기
1248년경부터 1258년까지 베로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18] 1249년에는 제2차 스웨덴 십자군이 일어났으며(전거: 『뤼베크시 연대기』),[3] 베로 주교는 스웨덴 왕에게 “핀란드 세금”을 납부했다.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의 역사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스웨덴이 핀란드 서해안에 대한 정복을 실제로 시작한 것은 이 즈음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 투르쿠에 핀란드 최초의 수도원인 성 올라프 도미니코 수도원이 세워졌다.
1250년부터 1266년까지는 스웨덴 왕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의 생부 비르예르 야를이 섭정으로서 스웨덴의 권력을 장악했다. 1258년부터 1266년까지는 라그발드 1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비르예르 야를이 죽은 1266년부터 1275년까지는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이 스웨덴 국왕으로서 친정했다. 1266년부터 1286년까지는 카틸루스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75년부터 1290년까지는 망누스 라둘로스가 스웨덴 왕위에 있었다. 1276년에는 핀란드의 첫 교구인 투르쿠 대교구와 핀란드 최초의 학교인 투르쿠 대성당학교가 세워졌다. 1280년, 칼 구스타브손이 "핀란드 도호(praefectus finlandiae)"로 임명되어 남서수오미 지역의 사령관이 되었다.[18] 1280년에는 중기병 군마를 생산하는 농장들에 조세감면이 주어지면서 랠시 계급이 생겨났다. 1284년, 스웨덴 왕 망누스 라둘로스는 막내동생 벵그트 비르예르손을 핀란드 공작으로 봉작했다. 1286년부터 1290년까지는 요한네스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90년부터 1318년까지는 비르예르 망누손이 스웨덴 왕위에 있었고, 1290년부터 1298년까지는 비르예르 망누손이 어려서 토르켈 크누트손이 섭정했다. 1291년부터 1308년까지는 망누스 1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293년에는 제3차 스웨덴 십자군이 일어나(전거: 『에리크의 연대기』) 스웨덴군이 카리알라까지 진격하여 비푸리성을 세워 카리알라 일대의 교역 및 방어의 중심지로 삼았다.[3]
14세기에는 시포에 시포 고성이 세워졌고, 크벤인들이 코르시인들과 함께 스웨덴령 지역(Svíþjóð-alueelle)을 공격했다(전거: 「노르나게스트의 사트르」). 14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는 『아보아 송가집』이 저술되었다. 1300년에는 투르쿠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1302년에는 발데마르 망누손이 핀란드 공작이 되었다.
1309년, 투르쿠라는 도시가 문헌상에 최초로 언급되었고, 1309년부터 1321년까지 라그발드 2세가 핀란드 주교를 역임했다. 1308년부터 1321년까지는 쿠시스토 주교성이 세워졌다(전거: 파벨 유스텐 주교의 『핀란드 주교연대기』). 1318년, 루스인들이 투르쿠시를 불태우고 투르쿠 대성당을 약탈했다(전거: 파벨 유스텐 주교의 『핀란드 주교연대기』). 같은 해부터 1319년까지 마티아스 케틸문드손이 스웨덴의 실권자가 되었다.
4. 2. 중세 성기
뇌테보리 화약에서 정한 국경선(빨간색).- 1319년-1364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스웨덴 왕이 되다.
- 1323년 8월 12일: 뇌테보리 조약으로 스웨덴-노브로고드 전쟁이 끝나고, 카리알라 지협을 동서로 나누어 스웨덴 왕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
- 1326년: 투르쿠에서 핀란드 최초의 국회가 열렸다.[18]
- 1340년: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새액스매키 농민들을 파문하다.
- 1344년: 핀란드가 처음으로 "외스테를란드"(Österland, 동쪽 땅)라고 지칭되다.
- 1346년: 포르보시가 세워지다.
- 1350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토지법과 도시법을 발표하다.
- 1351년: 망누스 4세 에릭손이 핀란드를 방문해 핀인 랠시들을 군마와 병기 검사에 초대했다.[18]
- 1353년: 벵그트 알고츠손이 핀란드 공작이 되다.[18]
- 1360년–1370년: 보 욘손 그리프가 라세포리성을 축성하다.
- 1362년: 핀란드가 스웨덴 왕위선거에 라만니를 파견할 권리를 얻다.[18]
- 1364년-1389년: 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이 스웨덴 왕이 되다.
- 1365년: 알브레히트 3세의 군대가 투르쿠성을 공성해 항복을 받아내고, 포흐얀마와 사타쿤타를 장악하다.[18]
- 1365년 2월 7일: 알브레히트 3세가 울빌라를 시로 승격시키다.
- 1367년: 코케매키강변에 아보르흐성이 축성되고 린만성은 에우라요키에 속하게 되다.
- 1371년: 보 욘손 그리프가 "스웨덴의 최고궁내관 겸 동쪽 땅의 총장"이 되다.[18]
- 1388년: 카스텔홀름성이 문헌상에 처음 언급되다.
연도 | 날짜 | 사건 |
---|---|---|
1323 | 8월 12일 | 노테보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
1348 | 마그누스 4세가 정교회를 상대로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 |
1397 |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었다. |
4. 3. 칼마르 동군연합 시대 (1397년–1523년)
1389년-1412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여왕을 겸하고, 1396년-1439년에는 포메른 공작 에리히 1세가 에리크 13세로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397년 에리크 13세가 칼마르에서 노르드계 삼왕국의 왕으로 대관하여 칼마르 연합이 결성되었다. 칼마르 연합은 1521년까지 지속되었다.
15세기에는 『난탈리 수도원 본초서』가 집필되었다. 1403년 비푸리가 시로 승격되었고, 1407년 에리크 13세는 투르쿠를 방문해 파발리 카르팔라이센, 올라비 본포이카,[19] 수네 수네손[17] 등 14명의 랠시를 접견했다. 1409년에는 투르쿠에서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412년-1450년 망누스 2세 타바스트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으며, 1414년 투르쿠 토지법원이 세워졌다. 1429년 투르쿠에 큰 불이 났다.[17] 1430년대에는 『아보아의 서』가 집필되었다.
1434년-1436년 엥엘브렉트의 난이 일어나 엥엘브렉트 엥엘브렉트손이 에리크 13세에 반하여 봉기했다. 1435년 에리크 13세는 투르쿠를 다시 방문해서 14명의 랠시를 접견했고,[17] 같은 해 스웨덴 아르보가에서 4개 신분이 모두 참여하는 의회가 처음 열렸다.[17] 1435년 핀란드의 사법 관할구(Laamannikunta)는 남핀란드와 북핀란드로 나뉘었고, 카리알라에는 별도의 관할구가 설치되어 비푸리성 성주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1436년-1438년 칼 크누트손이 스웨덴 실권자가 되었고, 1438년-1441년에는 스웨덴 섭정이 되었다. 1438년-1439년 사타쿤타에서 다비드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 난탈리 수도원이 세워졌다. 1441년-1448년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42년 라우마시가, 1443년 난탈리시가 세워졌다. 1448년 벵그트 왼손과 닐스 왼손이 핀란드의 섭정이 되었고, 같은 해 팔름스쾰드 파편이 작성되었다. 1448년–1457년 칼 크누트손이 칼 8세로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50년–1460년 올라우스 마그니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고, 1457년 왼스 벵그트손과 에리크 악셀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57년-1464년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60년-1489년 콘라트 비츠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464년-1465년 칼 8세 크누트손이 다시 스웨덴 왕이 되었고, 1465년-1466년 왼스 벵그트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66년-1467년 에리크 악셀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467년-1470년 칼 8세 크누트손이 다시 스웨덴 왕이 되었다.
1470년-1497년 스텐 스투레 덴 엘드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474년경 『투르쿠 대성당의 흑색서』가 작성되었고, 1475년 사본린나의 올라비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1483년 칼마르 약조를 통해 덴마크 왕 한스 1세를 스웨덴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추밀원의 동의 없이 과세하거나 행정구역을 나누지 못하도록 했지만, 한스 1세가 비준하지 않아 강제력을 갖지 못했다. 1488년 핀란드 최초의 인쇄본 책인 『아보아 미사전서』가 제작되었다. 1489년-1500년 망누스 3세 스톄른코르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495년-1497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였다. 1495년 11월 30일 비푸리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1497년-1501년 한스 1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16세기 전례서 『베스트의 서』가 작성되었다. 1500년-1506년 라우리 수르패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501년-1503년 스텐 스투레 덴 엘드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501년-1512년 덴마크와 스웨덴의 전쟁이 일어나 한스 1세의 덴마크군이 핀란드 서해안을 공격하여 카스텔홀름성이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투르쿠와 포르보가 불탔다.
1504년-1512년 스반테 닐손이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506년-1510년 요한네스 4세 올로프손이 핀란드 주교가 되었고, 1510년-1522년 아르비드 쿠르키가 핀란드 주교가 되었다. 1512년 에리크 트롤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고, 1512년-1520년 스텐 스투레 덴 윙레가 스웨덴의 섭정이 되었다. 1514년 투르쿠 주교 헤밍의 시복이 투르쿠에서 기념되었으나, 종교개혁 통에 시성은 유예되었다. 1520년-1521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고, 1520년 11월 7일-11월 10일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크리스티안 2세의 스웨덴 왕 대관식 다음날 스웨덴 독립파 귀족들이 학살당했다.
1520년-1523년 스웨덴 독립전쟁이 일어나 스톡홀름 피바다에 대한 반응으로 스웨덴 귀족들이 구스타브 바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521년 구스타브 바사가 스웨덴의 섭정으로 선출되었고,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1522년 『아보아의 의제서』가 작성되었다.
5. 근세 시대
5. 1. 바사 시대 (1523년–1617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1523년 스웨덴 왕이 되면서 스웨덴은 칼마르 연합에서 이탈했다. 같은 해 에리크 스벤손이 투르쿠 주교가 되었으나, 1528년 구스타브 1세는 쿠이스토 주교성을 허무는 등 교회 권력을 억제했다. 1543년에는 미카엘 아그리콜라가 최초의 핀란드어 책 『ABC서』를 집필했다.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핀란드어 성서 번역은 핀란드 문어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556년 구스타브 1세의 장남 요한 왕자가 핀란드 공작이 되었고, 1558년에는 포리를 세웠다. 1581년 요한 3세는 핀란드 대공을 칭했다.
1593년 웁살라 교회회의에서 루터교가 스웨덴 국교로 정해졌고, 17세기에는 루터교 정통주의가 핀란드의 지배적 종교가 되었다.
1595년 테우시나 조약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의 전쟁이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북에스토니아를 획득하고 핀란드에서의 러시아와의 국경을 북극해의 바랑게르협만으로 확정했다.

1596년-1597년에는 몽둥이 전쟁이, 1597년-1599년에는 시기스문드 폐위전쟁이 일어났다.

1599년 투르쿠 피바다가 일어났다.

1601년에는 짚의 해로 인해 핀란드 역사상 최악 수준의 흉년이 닥쳤다.
1610년-1617년에는 잉그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5. 2. 스웨덴 제국 시대 (1617년–1721년)
1617년 스톨보보 화약으로 잉그리아 전쟁이 스웨덴의 승리로 끝나면서, 스웨덴은 캐키살미와 잉그리아를 획득하여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을 막았다. 1634년 스웨덴령 핀란드의 행정 구역은 카리알라주, 캐키살미주, 포흐얀마주, 투르쿠주, 우시마주, 해메주로 개편되었다. 1637년부터 1654년까지 페르 브라헤 덴 윙레 백작이 핀란드 총독을 역임했는데, 이 시기를 소위 "백작시대(Kreivin aika)"라고 부른다. 핀란드 체신청은 1638년 9월 6일에 설치되었고, 1639년에는 해멘린나와 사본린나가 세워졌다. 1640년에는 투르쿠 한림원이 설립되었으며,
1656년-1658년에는 러시아와 스웨덴이 카리알라-잉그리아 땅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이는 제2차 북방전쟁의 북부전선이었다. 1658년 발리에사레 조약이 체결되었고, 1661년 6월 21일 카르디스 조약으로 제2차 북방전쟁 북부전선이 스웨덴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696년-1697년에는 대죽음의 해로 불리는 기근과 질병으로 핀란드 인구 50만 명 중 3분의 1 가량인 12만 명이 사망했다. 1700년-1721년에는 대북방전쟁이 발발했고, 1714년-1721년은 대격노 시기로, 대북방전쟁 중 러시아군의 핀란드 침공 및 점령기였다. 1718년-1719년에는 올란드에서 스웨덴과 러시아가 대북방전쟁 종결을 위한 올란드 회의를 열었다.
5. 3. 자유 시대 및 구스타브 시대 (1721년–1809년)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대북방전쟁이 스웨덴의 패배로 끝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에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캐키살미, 서키라알라를 할양하고 동북유럽의 패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8] 1741년-1743년에는 러시아 점령에 저항한 스웨덴 잔류파의 반란인 소격노가 일어났고, 1742년에는 핀란드 왕국 구상이 있었다. 1743년에는 투르쿠 화약이 체결되었다.1770년대 윌리토르니오에서 비클룬드파 종교개혁운동이 유행했고, 같은 시기 투르쿠에서는 아우로라 결사라는 비밀결사가 활동했다.

1788년-1790년에는 구스타브 전쟁이 일어났고, 1790년 배랠래 화약으로 전쟁 이전으로 상황이 되돌아갔다.

1800년 스웨덴은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와 중립동맹을 맺었지만 영국의 압력으로 탈퇴했다.[18] 1802년 6월,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핀란드를 방문하여 투르쿠, 헬싱키, 로비사, 아흐벤코스키, 사보, 오울루를 순행했다.[18] 1805년 스웨덴은 제3차 대불동맹에 가맹하고 포메라니아에 군대를 진주했으나, 나폴레옹 군대에 패배하여 전쟁에서 물러났다.[18]
1808년-1809년에는 핀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1808년 2월 21일 러시아군이 선전포고 없이 퀴미강을 도하하여 아흐벤코스키와 엘리매키로 진군했고, 3월 22일 투르쿠를 함락시켰다. 1809년 3월 포르보 국회가 소집되었고,

6. 러시아 지배기 (핀란드 대공국)
알렉산드르 1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09년부터 1899년까지 핀란드는 핀란드 대공국 시기였다. 1809년–1863년에는 국회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1812년 구핀란드(대북방전쟁 때 먼저 러시아에 할양된 땅)와 나머지 핀란드를 합치고, 헬싱키를 신생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로 삼았다.
1817년 에우라에서 카리스마주의 영성운동인 휩피헤래튀스가 출현했고, 1820년에는 투르쿠에서 핀란드의 두 번째 핀란드어 신문 『투르쿠 빅코사노마트』가 간행되었다. 1822년-1826년에는 만네르헤임 원로원이 있었다. 니콜라이 1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25년-1855년 사이, 1827년 9월 4일 투르쿠 대화재로 투르쿠가 전소되었고, 1828년 대학교가 헬싱키로 이전했다. 1835년 엘리아스 뢴로트가 『칼레발라』를 출간했다. 1848년 헬싱키 쿰태흐티 광장에서 "Maamme"가 초연되었다. 1854년-1855년에는 크림 전쟁으로 핀란드 해안도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올란드 전쟁).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55년-1881년 사이, 1860년 요한 빌헬름 스넬만이 추진하여 핀란드 마르카가 도입되었고, 1862년 헬싱키-해멘린나 구간에 핀란드 최초의 열차 노선이 부설되었다. 1863년 헬싱키 국회를 통해 핀란드의 자치권이 강화되었으며, 1865년 지방법으로 행정구와 교구가 분리되었다. 1867년-1868년에는 이끼의 해로 불리는 핀란드에서 발생한 마지막 대기근으로 인구의 2할인 27만 명이 사망했다. 1879년에는 완전한 사업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1808년 2월 21일 핀란드 전쟁이 시작되어 1809년 9월 17일 종결되었다. 1809년 3월 29일 핀란드 의회가 설립되었다. 1818년 베르나도트 왕가가 수립되었다. 1869년 1869년 교회법이 통과되었다. 1889년 1889년 이교도법이 통과되었다.[7] 1892년에는 핀란드어가 핀란드의 공용어가 되었다.[7] 1899년 핀란드 러시아화가 발생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핀란드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6. 1. 자치기 (1809년-1899년)
알렉산드르 1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09년부터 1899년까지 핀란드는 자치기로, 핀란드 대공국 시기였다. 1809년–1863년에는 국회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1812년 구핀란드(대북방전쟁 때 먼저 러시아에 할양된 땅)와 나머지 핀란드를 합치고, 헬싱키를 신생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로 삼았다.1817년 에우라에서 카리스마주의 영성운동인 휩피헤래튀스가 출현했고, 1820년에는 투르쿠에서 핀란드의 두 번째 핀란드어 신문 『투르쿠 빅코사노마트』가 간행되었다. 1822년-1826년에는 만네르헤임 원로원이 있었다. 니콜라이 1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25년-1855년 사이, 1827년 9월 4일 투르쿠 대화재로 투르쿠가 전소되었고, 1828년 대학교가 헬싱키로 이전했다. 1835년 엘리아스 뢴로트가 『칼레발라』를 출간했다. 1848년 헬싱키 쿰태흐티 광장에서 "Maamme"가 초연되었다. 1854년-1855년에는 크림 전쟁으로 핀란드 해안도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올란드 전쟁).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 대공이 된 1855년-1881년 사이, 1860년 요한 빌헬름 스넬만이 추진하여 핀란드 마르카가 도입되었고, 1862년 헬싱키-해멘린나 구간에 핀란드 최초의 열차 노선이 부설되었다. 1863년 헬싱키 국회를 통해 핀란드의 자치권이 강화되었으며, 1865년 지방법으로 행정구와 교구가 분리되었다. 1867년-1868년에는 이끼의 해로 불리는 핀란드에서 발생한 마지막 대기근으로 인구의 2할인 27만 명이 사망했다. 1879년에는 완전한 사업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1892년에는 핀란드어가 핀란드의 공용어가 되었다.[7] 1899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핀란드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6. 2. 압제기 (1899년-1917년)
1899년 니콜라이 2세가 2월 선언을 발표하면서 제1차 압제기가 시작되었다. 핀인들은 대진정을 작성하며 저항했다. 1900년에는 10년 안에 핀란드의 행정 및 사법 문서에서 사용되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를 러시아어로 교체하겠다는 언어선언이 발표되었다. 1901년에는 핀란드군이 폐지되고 핀인들을 러시아 육군에 복무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1902년 핀인들의 저항으로 철회되었다.
1904년 6월 16일, 에우겐 샤우만이 핀란드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를 암살했다. 1905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는 대(大)총파업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니콜라이 2세가 11월 선언을 발표하여 2월 선언을 철회했다.

1906년에는 의회개혁이 단행되어 신분제 국회가 폐지되고 단원제 의회가 설치되었다. 보통평등선거가 도입되면서 여성에게 세계 최초로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는 제2차 압제기였다. 1910년, 러시아 국가두마는 입법권을 핀란드에까지 미치도록 결정하여 핀란드 자치권을 제도적으로 부정했다. 1912년에는 평등법이 제정되어 핀란드 거류 러시아인들이 핀인들과 같은 권리를 갖게 되었다. 1914년에는 핀란드를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시행이 취소되었다.

1917년 3월 16일,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면서 핀란드에 대한 압제정책이 철회되었다. 7월 18일에는 권력법이 통과되었다. 11월 15일, 사민당이 단독 과반인 의회가 권력법에 따라 의회를 핀란드의 최고 권력 기구로 선언했다. 12월 4일, 핀란드 독립선언이 작성되었다.
7. 근현대사 (1917년-현재)
1919년 7월 26일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핀란드 제1대 대통령이 되었다.[8]
1920년 10월 14일 타르투 조약이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체결되었다. 같은 해 12월 31일 조약이 발효되었다.
1925년 3월 2일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31년 3월 2일 페르 에빈드 스윈후부드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32년 매르첼래 반란이 일어났다.[9]
1937년 3월 1일 큐외스티 칼리오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39년 11월 30일 ''겨울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0년 3월 13일 ''겨울 전쟁''이 종료되었다. 같은 해 12월 19일 리스토 류티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41년 6월 25일 ''계속 전쟁'':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7월 10일에는 ''동 카렐리아 정복''이 시작되어 9월에 핀란드가 동 카렐리아를 정복했고, 12월 6일에 종료되었다.
1944년 8월 4일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9월 15일 ''라플란드 전쟁'':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9월 19일 ''계속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1945년 4월 27일 ''라플란드 전쟁'': 마지막 독일군이 핀란드를 떠나면서 핀란드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다.
1946년 3월 11일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47년 2월 10일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1941년 1월 1일의 국경선이 회복되었다.
1952년 핀란드가 여권 동맹에 가입했다.
1956년 3월 1일 우르호 케코넨이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61년 핀란드가 유럽 자유 무역 연합 가입을 요청했다.
1975년 핀란드가 헬싱키 협정에 서명했다.
1982년 1월 27일 마우노 코이비스토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82년 케케 로스베르크가 1982년 포뮬러 원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초의 핀란드 포뮬러 원 드라이버가 되었다.
1986년 핀란드가 유럽 자유 무역 연합의 회원이 되었다.
1991년 경제 과열 이후 불황이 발생했다.
1994년 3월 1일 마르티 아티사리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1995년 핀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1998년 11월 1일 미카 하키넨이 일본에서 미하엘 슈마허를 상대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99년 핀란드가 유로존에 가입했다.
2000년 3월 1일 타르야 할로넨이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2006년 1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2007년 10월 21일 키미 라이코넨이 챔피언십에서 페르난도 알론소와 루이스 해밀턴을 제치고 브라질에서 우승했다.
2009년 12월 31일 셀로 쇼핑몰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2010년 2월 12일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95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2011년 4월 17일 핀란드 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10월 16일에는 올란드 자치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12월 26일 사이클론 다그마가 핀란드를 강타하여 10년 만에 최악의 폭풍 피해를 입혔다.[10]
2012년 3월 1일 사울리 니니스퇴가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다.[8] 5월 26일에는 휘빈캐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2013년 1월 30일 위배스퀼래 도서관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15일 2013년 북유럽 폭풍이 핀란드를 강타했다.
2014년 6월 9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핀란드가 NATO에 가입할 수 있지만 러시아는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11] 7월 24일 두 명의 핀란드 여성이 헤라트,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다 살해당했다. 11월 28일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다.[12]
2018년 1월 28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2023년 4월 4일 핀란드가 NATO에 가입했다.
7. 1. 신생 공화국 건국기 (1917년-1939년)
1917년 12월 6일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31일 볼셰비키 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27일부터 5월 14일까지 핀란드 내전이 발발했다. 핀란드 내전.]] 이 내전은 시민위병(백위대)과 적위대 간의 권력 투쟁으로, 5월 14일 백위대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 중 555명의 적군 포로가 사형당하고, 12,000여 명이 포로수용소에서 기아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1918년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아브 크발스타드와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이 차례로 핀란드의 섭정을 맡았다. 같은 해, 핀란드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매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무산되었다.
1919년 7월 17일 핀란드는 공화국이 되었고,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1919년 금주법이 제정되었으나, 1931년 국민투표로 철회되었다.
1920년 10월 14일 타르투 조약을 통해 핀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핀란드는 페차모를 얻는 대신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를 포기했다. 같은 해 핀란드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1921년 국제연맹의 결정으로 올란드 제도를 핀란드령으로 확보했다.
1920년대에는 핀란드 의용병들이 동카리알라,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민족전쟁에 참전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에 참전한 핀란드 의용병들.]]
1929년 대공황이 핀란드 경제를 강타했고, 같은 해 자생적 파시즘 운동인 라푸아 운동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라푸아 운동의 "농민행진".]] 1930년 라푸아 운동은 "농민행진"을 통해 헬싱키로 진군했고, 1932년 맨챌래 반란을 일으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
7. 2. 제2차 세계대전기 (1939년–1945년)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과 겨울전쟁을 치렀다.[8] 1939년 프란스 에밀 실란패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40년 1월 23일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기업들이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1월 약조가 있었다. 겨울전쟁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핀란드는 패배했다.[8]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리스토 뤼티가 제5대 공화국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1940년 3월 13일부터 1941년 6월 25일까지는 휴전기였다. 1941년 6월 25일 계속전쟁이 발발하여 1944년 9월 19일까지 소련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1941년 7월 10일 핀란드는 동 카렐리아 정복을 시작, 9월에 완료하고 12월 6일 종료하였다.[8] 1944년부터 1946년까지는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이 제6대 공화국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1944년 9월 15일부터 1945년 4월 27일까지는 나치 독일과 라플란드 전쟁을 치렀다. 1945년에는 아르투리 일마리 비르타넨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제3차 라피 골드러시(렘멘요키 골드러시)가 있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인민민주동맹, 사회민주당, 농업동맹의 인민전선 연정이 구성되었다.
7. 3. 전후 재건기 (1945년-1950년대)
1946년-1956년까지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제7대 핀란드 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1947년 2월 10일,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핀란드는 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협약을 맺었고, 얘니스코스키-니스카코스키 지역을 소련에 할양했다.1952년에는 아르미 쿠셀라가 미스 유니버스로 뽑혔고, 헬싱키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1953년에는 퀼리키 사리 피살사건과 칼라요키 반란이 발생했다. 1955년에는 핀란드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었고, 북유럽 협의회와 국제연합에 가맹했다. 1956년에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7. 4. 구조개혁과 복지국가 이행기 (1950년대-현재)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핀란드는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시스템 구축, 그리고 유럽 통합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현대 국가로 발전해왔다.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은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핀란드의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다.[8] 1958년에는 YLE가 "수오멘 텔레비시오"라는 이름으로 정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같은 해 8월부터 12월까지는 밤서리 위기가 발생했다. 1959년 7월 27일에는 아담스 영화사 화재로 많은 초기 핀란드 영화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7월 28일에는 툴릴라흐티 이중살인사건이 발생했다. 1960년대에는 마가린 추문이 있었으며, 6월 5일에는 보돔호 살인사건, 12월에는 운니수르마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10월-11월에는 구술서 위기가 있었고, 1968년 11월 25일에는 헬싱키 구학생회관 점거사건이 발생했다. 1969년에는 최초의 노사정 포괄소득정책협정(리나마 1호)이 체결되었고, 3월 7일에는 피흐티푸다스 경찰피살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에는 제1회 루인스록이 개최되었으며, 1972년 5월 12일에는 퀴턔얘 삼중살인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담이 개최되었다. 1976년 4월 13일에는 라푸아 탄약공장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1977년에는 아에로플로트 투폴레프 Tu-134 하이재킹 사건과 쿠르시비 인쇄소 파괴사건이 발생했다. 1978년 9월 30일에는 오울루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2월 17일에는 랍파얘르비 지진이 발생했는데, 이는 핀란드에서 측정된 가장 강한 지진(매그니튜드 3.8)이었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우노 코이비스토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1982년 8월 2일에는 헬싱키 메트로가 개통되었다. 1986년 8월 8일-8월 9일에는 미켈리 인질극이 발생했다. 1987년 1월 17일에는 유말라 극장 추문이 있었다. 1989년에는 핀란드의 마지막 토지분배가 완료되었으며, 1889년 1월 25일에는 라우만메리 학교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 핀란드는 핀란드 금융위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992년 핀란드는 유럽 공동체에 가맹했고, 같은 해 여름 루오콜라흐티의 사자 사건이 있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마르티 아흐티사리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1994년 9월 28일에는 연락선 M/S 에스토니안 웁포아미넨호 침몰 사건이 발생했다.
1995년 핀란드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1997년 3월 20일-3월 21일에는 헬싱키 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 22일에는 테흐단가 경찰피살사건이 발생했다. 1998년 4월 18일 핀란드는 유럽경제통화동맹에 가맹했고, 11월 21일에는 휘빙캐 토막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페새팔로 승부조작추문도 있었다.
2000년 새 헌법이 발효되었고, 타르야 할로넨이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8] 2000년 4월 23일부터 10월 12일까지는 시파단 인질극이 있었다.
분류:핀란드의 역사
분류: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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