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안보 협력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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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는 1960년대 말 소련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냉전 시기 동서 진영 간의 긴장 완화와 유럽 안보 협력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핀란드의 중재로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35개국이 참여하여, 1975년 헬싱키에서 최종 합의안인 헬싱키 협정을 채택했다. 헬싱키 협정은 유럽 안보, 경제 협력, 인도적 협력 등 3가지 바스켓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인권 및 기본적 자유 존중을 강조하여 동유럽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재검토 회의를 통해 협정 이행을 점검하고, 1990년 파리 헌장을 거쳐 1994년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로 발전하며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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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핀란드 -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은 냉전 시대 긴장 완화를 위해 미국, 소련을 포함한 35개국이 1975년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 안보 협력 회의 최종 의정서로, 참가국 간 관계 규제 원칙과 경제, 과학, 문화 교류 협력 방안을 담고 있으며 인권 운동 기반을 제공하고 유럽 안보 협력 기구의 토대가 되었다.
유럽 안보 협력 회의 | |
---|---|
개요 | |
명칭 | 유럽 안보 협력 회의 |
로마자 표기 | Yureop Anbo Hyeopryeok Hoeui |
영어 명칭 |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 |
프랑스어 명칭 | Conférence sur la sécurité et la coopération en Europe (CSCE) |
러시아어 명칭 | Совещание по безопасности и сотрудничеству в Европе (СБСЕ) |
독일어 명칭 | Konferenz über Sicherheit und Zusammenarbeit in Europa (KSZE) |
역사 | |
설립 | 1973년 |
해체 | 1994년 |
후신 | 유럽 안보 협력 기구 |
목적 | |
주요 목표 | 유럽의 긴장 완화, 동서 간의 협력 증진, 인권 및 기본적 자유 존중 |
구성 | |
회원국 | 유럽 국가, 미국, 캐나다 (총 35개국) |
활동 | |
주요 활동 | 헬싱키 협정 (1975년) 체결 유럽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협상 진행 인권 및 기본적 자유 보호 노력 |
중요성 | |
역사적 의의 | 냉전 시대 동서 간 대화 채널 유지, 유럽 안보 질서 구축에 기여 |
2. 역사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구상은 냉전 시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WP)의 결성으로 유럽의 군사적 분단과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1954년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유럽의 집단 안보 문제를 처음 공식 제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15] 소련은 이를 통해 미군의 유럽 철수와 NATO 약화, 그리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동독의 국제적 승인을 얻고자 했다. 반면 서방 진영은 동서 유럽 간 자유로운 인적 이동 보장 등을 통해 폐쇄적인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에 변화를 유도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1960년대 들어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부쿠레슈티 선언(1966)과 부다페스트 어필(1969) 등을 통해 경제·기술 협력, 현존 국경 인정 등 구체적인 안보 협력 방안을 제시했다.[37][38] 특히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 진압 이후 국제적 이미지가 실추되고 유로코뮤니즘 확산 및 중소 분쟁 등으로 외교적 어려움을 겪던 소련은 CSCE 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1][2]
소련과 동구권의 제안에 대해 서방은 미국과 캐나다의 참여를 전제 조건으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보였으며, 특히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인적·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립국 핀란드는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의 주도로 동서독 승인 문제를 회의 개최의 전제 조건에서 제외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하는 독자적인 중재안을 제시하며 회의 개최를 적극 추진했다. 초기 서방의 미온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1969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취임과 동방 정책 추진은 CSCE 논의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다. 결국 1970년대 초, 핀란드의 제안으로 회의 의제와 절차 논의를 위한 대사급 준비 회의가 시작되면서 CSCE는 본격적인 외교 협상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3]
2. 1. 구상
유럽의 안전보장 구상을 처음 제안한 것은 1954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이었다.[15] 1949년 NATO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WP)가 결성되면서 유럽이 군사적으로 분단되자, 유럽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몰로토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15] 소련의 주요 목표는 미군을 유럽에서 철수시켜 NATO를 약화하거나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할슈타인 원칙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고립된 동독이 서방 국가들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다. 반면, 서방 진영의 목표는 동서 유럽 간 자유로운 인적 이동 보장 등을 통해 폐쇄적인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1953년 동독 봉기,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같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소련의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서방은 이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단을 갖지 못했다.1966년 7월,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부쿠레슈티에서 '유럽의 평화와 안전 강화에 관한 선언'(부쿠레슈티 선언)을 발표하며 유럽 안보 협력 구상을 구체화했다.[16] 이 선언에는 ▲범유럽 차원의 경제·문화·기술·학술 교류 기구 설치 ▲NATO와 WP의 동시 해체를 통한 효과적인 유럽 안보 기구 창설 ▲외국 군사 기지 철수 및 비핵 지대 설치 ▲서독의 핵무기 보유 불허 ▲현존 국경의 불가침성 확인 ▲두 개의 독일 국가(동독과 서독) 승인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16][37] 이 중 경제·기술 협력, 현존 국경 및 두 독일의 승인 문제는 9년 뒤 헬싱키 협정의 주요 내용으로 이어졌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군사적으로 진압(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하면서 소련의 국제적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는 소련이 유럽 안보 협력 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소련은 서방 공산당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유로코뮤니즘 참조), 중국과의 이념 대립으로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이었다.[1][2]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지도부는 새로운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69년 3월,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NATO 해체와 같은 비현실적인 요구를 제외하고 '범유럽 국가에 대한 호소'(부다페스트 호소)를 발표했다. 이 호소에서 동구권은 유럽 안보 체제 구축의 전제 조건으로 ▲현존 국경의 보전 ▲두 개의 독일 국가 승인 ▲서독의 핵무기 보유 의사 포기라는 세 가지 사항을 제시하며 서방의 참여를 촉구했다.[17][38]
소련과 동구권의 제안에 대해 NATO는 1969년 4월 워싱턴 D.C.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NATO는 소련 및 동구권과의 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면서도, 회의에는 반드시 미국과 캐나다가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18] 같은 해 12월 브뤼셀에서 열린 NATO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CSCE 구상을 더욱 구체화했다. 서방은 각국의 체제 선택권 존중이 유럽 평화와 안보의 기초가 되며, 경제 및 문화 교류 확대가 상호 이익 증진에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서독을 중심으로 한 유럽 경제 공동체(EEC) 국가들은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인적 교류(human contact)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CSCE 개최를 통한 외교적 성과를 중요하게 여겼던 소련은 결국 미국과 캐나다의 회의 참여 및 인적 교류 문제를 의제로 다루자는 서방 측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련 내 유대인의 해외 이주가 제한적으로나마 확대되고 있었고, 1970년 서독과 체결한 모스크바 조약에 따라 소련 내 독일계 주민들의 출국도 허용된 상황이었다.
한편, 핀란드는 중립국으로서 CSCE 구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르호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은 중부 유럽의 군사적 긴장이 핀란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하에, 소련의 제안을 단순한 선전전이 아닌 실질적인 협상의 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핀란드는 동서독 동시 승인을 회의 개최의 전제 조건으로 삼지 않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하며 핀란드가 회의를 주최하는 방안을 독자적으로 제안했다. 당시 핀란드는 동서독 어느 쪽도 공식 승인하지 않으면서 양측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중재자로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초기 서방 국가들은 핀란드의 제안에 미온적이었고, NATO는 독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회의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그러나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가 서독 총리로 취임하여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핀란드는 회의 의제와 절차 논의를 위한 대사급 예비 회담 개최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3]
2. 2. 인권·인도와 안전 보장의 연관
본디 소련에서는 인민의 권리는 존재했지만 보편적 인권에 관한 개념은 거의 없었다. 1948년에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소련 내에서 출판되거나 보도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내 인권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65년 무렵부터였다.특히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소련군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은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웠던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탱크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이는 소련의 대외적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핵물리학자이자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렸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진보, 평화 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이라는 글을 서방에 발표하며 소련 지식인들의 저항에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게 했다. 사하로프는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을 통해 서방 세계는 소련 내 정치범의 존재와 그들의 열악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39]
같은 시기,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소련 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 요구가 거세졌다. 소련 공산당은 결국 1,500명의 유대인의 출국을 허용했지만[40], 이는 소련의 민족 정책 실패라는 인식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따라서 소련 당국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출국은 '가족 재결합'과 같은 인도적 목적으로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72년 8월, 소련은 출국 희망자 중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고액의 교육세(약 2만 루블)를 부과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서방의 비난을 샀다. 마침 미국은 소련과의 통상 협정을 통해 최혜국 대우를 부여할 예정이었는데, 민주당 소속 헨리 M. 잭슨 상원의원과 찰스 A. 배닉 하원의원은 이 교육세 문제와 유대인 출국 문제를 미소 무역과 연계시키는 잭슨-배닉 수정 조항을 발의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는 인권 문제가 국제 통상 및 외교 관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국내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뿐만 아니라, 서방으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도 철저히 통제했다. 서방 신문의 판매는 극히 제한되었고, 동구권을 향한 서방의 단파 라디오 방송은 재밍되었으며, 동구권에 주재하는 서방 언론인들의 활동 역시 엄격한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인권 및 인도적 문제에 대해 서방의 군사 동맹인 NATO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가 서독 총리로 취임하여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동서독 분단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동구권과의 접촉을 늘려 점진적인 내부 변화를 유도하려는('접근을 통한 변화')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NATO는 1967년, 분단된 베를린 시민들이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동서독 간의 인적·경제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기대를 표명했다. 이는 훗날 헬싱키 협정에서 구체화될 인권 및 인도주의적 교류(제3 바스켓)의 중요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41]
결론적으로,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판,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추진, 그리고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개최를 원했던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서방 국가들은 인권 및 인도주의적 문제를 안보 문제와 연계하여 동구권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핀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등 동서 진영에 속하지 않은 중립 국가들 역시 CSCE 구상에 동조하며 회의 개최를 촉구했다.[42]
CSCE 본회의 준비 회의에서는 ① 유럽의 안전 보장(제1 바스켓), ② 경제 협력(제2 바스켓), ③ 인도적 협력(제3 바스켓), ④ 재검토 회의라는 네 가지 주요 의제가 설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방은 특히 제3 바스켓의 인적 교류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강조했으며, 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원했던 소련의 입장을 활용하여 이 분야에서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 또한 제1 바스켓에 포함된 <제7원칙>(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의 존중)과 <제3원칙>(국경의 불가침) 등을 둘러싸고 동서 간의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각기 다른 바스켓의 내용을 연계하여 협상이 진행되는 등, 안보와 인권·인도주의 문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 명확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소련은 서방이 제3 바스켓에서의 공세를 완화하는 대가로 제1 바스켓의 인권 관련 원칙 수용에 양보하는 식의 타협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권 및 인도주의적 문제는 유럽의 안보 질서를 논의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3. 준비 회의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본회의의 의제를 결정하기 위한 준비 회의는 1972년 11월부터 핀란드 에스포의 디폴리에서 시작되어 1973년 6월까지 이어졌다.[4] 준비 회의 시작 전, 참가국들은 본회의에서 다룰 의제를 크게 안전 보장(제1 바스켓), 경제 교류(제2 바스켓), 인도적 분야(제3 바스켓)의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서방 국가들은 특히 제3 바스켓의 '인도적 분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정보 침투)을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한 별도의 소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소련은 CSCE 본회의를 조속히 개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서방의 요구에 비교적 쉽게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1972년 12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인적 교류 분야를 별도 의제로 다루는 데 동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41] 처음에는 서방의 요구가 온건했지만, 미국-소련 통상 협정 체결(1972년 10월), SALT-II 개시(1972년 11월),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1972년 12월) 등 소련이 CSCE의 빠른 타결을 위해 서방에 연이어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자, 서방은 소련이 CSCE 성과에 매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더욱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41]
제1 바스켓(안전 보장)에서는 여러 원칙들이 논의되었다. 특히 스위스가 처음 제안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존중'(제7원칙)은 주요 쟁점이었다. 소련은 이것이 국가 간의 관계를 다루는 CSCE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서방은 유엔 헌장에도 명시된 보편적 원칙임을 내세워 소련을 압박했다. 결국 소련은 이 원칙을 본회의 의제로 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방이 제안한 '인민의 자결권'(제8원칙)과 '국제법상 의무의 성실한 이행'(제10원칙)에 대해서도 소련은 처음에는 식민지 문제에나 해당한다며 반대했지만, 유엔 헌장을 근거로 한 서방의 주장에 밀려 결국 수용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의제는 '국경의 불가침'(제3원칙)이었다. 이는 소련이 CSCE를 통해 얻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성과였다. 하지만 서방 진영 내에서도 오데르-나이세선을 인정하지 않는 서독, 아일랜드-영국 국경 문제로 영국과 갈등 중인 아일랜드, 지브롤터 영유권을 주장하는 스페인, 발트 3국 병합을 인정하지 않는 캐나다 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합의가 쉽지 않았다. 소련은 여러 쟁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방이 요구하는 인권 문제를 수용하는 대신 서방 역시 국경 불가침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압박했다. 서방은 당초 제3 바스켓(인도적 분야) 논의에서 소련이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내세워 인권 문제 개입을 회피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관련 조항 삽입을 시도했으나, 이를 포기하는 대신 소련이 요구한 국경 불가침 원칙에 동의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준비 회의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길어져 199일간 계속되었다. 이는 모든 결정이 참가국 전체의 동의(컨센서스)를 얻어야 하는 방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속한 회의 타결을 원하는 소련의 입장을 이용하여 서방이 지속적으로 압박하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련은 서방의 요구에 밀려 여러 차례 예상치 못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43]
1973년 6월, 준비 회의는 "헬싱키 협의 최종 권고"(The Final Recommendation of the Helsinki Consultations)를 발표하며 마무리되었다. 이 권고는 본회의의 주요 의제로 ① 유럽의 안전 보장(제1 바스켓), ② 경제 협력(제2 바스켓), ③ 인도적 협력(제3 바스켓), ④ 후속 회의(재검토 회의) 개최 등 네 가지를 확정하고, 총 96개 항목에 달하는 세부 의제를 제시했다. 제1 바스켓에는 앞서 언급된 인권과 기본적 자유 존중(제7원칙), 국경 불가침(제3원칙) 등을 포함한 10개의 기본 원칙이 포함되었고, 제3 바스켓에는 인적 교류, 정보 유통, 문화 및 교육 교류, 청년·스포츠 교류 등이 의제로 선정되었다.
2. 4. 본회의
1973년 6월 헬싱키에서 발표된 '헬싱키 협의 최종 권고'를 바탕으로, 1973년 9월부터 1975년 7월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문가 회의(CSCE 본회의 2단계)가 열려 세부적인 내용 검토가 이루어졌다.처음에 서방 측은 자신들이 추진하던 MBFR(Mutual and Balanced Force Reductions)을 CSCE와 연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연계는 실패했고, MBFR 협상 자체도 별다른 성과 없이 1980년대에 중단되었다. 이후 서방은 CSCE에서 인도적 협력 분야, 즉 '제3 바스켓'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다. 1973년 12월 NATO는 성명을 통해 "특히 인적 접촉 분야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압박이 되었다. 하지만 서방 내부에서도 온도 차이는 존재했다.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CSCE 자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인권 문제 협상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EC 회원국들은 EPC(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틀 안에서 각국이 제3 바스켓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내놓았다. 특히 서독은 가족 재결합 문제와 관련하여 "합리적인 기간 내에 여권 발급"과 "긴급 상황 시 우선 처리" 등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헬싱키 협정에 포함되었다.[21]
소련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 확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동구권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폴란드는 "집단적 및 개인적 여행의 발전"과 "직업적 또는 개인적 이유로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시민의 요청을 호의적으로 고려"할 것을 단계적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했으며, 가족 재결합 문제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폴란드의 입장은 당시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폴란드 내 독일계 주민 12만 명의 서독 이주를 허용하는 대신 대규모 경제 원조를 약속받았던 배경과 관련이 깊다. 훗날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서기장은 대서독 관계 측면에서 CSCE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5]
외국 언론인의 활동 조건 개선 문제 역시 제3 바스켓의 주요 쟁점이었다. 서방, 특히 서독은 출입국 비자 발급의 편의 보장, 취재 활동에 필요한 인적·기술적 장비 확충 등을 제안하며 동구권을 압박했다. 당시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가 "유럽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잔존하는 여러 제한이 폐지될 것을 갈망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서방은 이 문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21]
이에 대해 동구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동독은 본회의가 진행 중이던 1974년 2월, 오히려 외국 언론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은 서방과의 협상 의지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1973년 9월, 서방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전파 방해(재밍)를 일부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RFE/RL 등의 방송 중단을 서방에 요구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26] 동구권 국가들은 라디오 방송 내용에 대해 각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CSCE 정상회담(3단계)을 1975년 여름까지 개최하려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강한 의지에 따라 소련은 서방과의 타협을 선택했다.[27]
결과적으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관련된 직접적인 제한이나 국가의 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명문화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동구권은 '정보 침투' 관련 규정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권고 수준으로 만들려 했으나, 서방의 요구에 따라 구체적인 결의 내용으로 포함시키는 데 동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7-8월 헬싱키 정상회의에서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정보 수단이 국가 간, 국민 간 불화의 해독을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발언한 것처럼, 소련은 서방의 사상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21]
사람과 정보의 교류 문제에 비해, 제1 바스켓(안보 원칙)에 포함된 인권 문제는 비교적 순조롭게 합의가 진행되었다. 제7원칙(인권과 기본적 자유 존중)과 관련하여 영국이 "개인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알고 이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고, 소련은 큰 저항 없이 이를 수용했다. 다만, 네덜란드가 제안했던 "통신의 비밀" 보장 조항은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2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5년 8월 1일, 헬싱키에서 CSCE 최종 합의문인 헬싱키 협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서방 측은 애초에 소련과 동구권이 협정의 인권 관련 규정을 완전히 준수하리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영국 외무부 내부 문서에서는 "CSCE 결과로 모스크바에서 자유롭게 '타임스'지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8]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역시 헬싱키 연설에서 "역사는 이 회의를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내일 우리가 행하는 것에 의해, 우리가 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지킬 약속에 의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협정의 실질적인 이행이 어려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21] 소련 측 역시 협정의 인권 조항을 엄격히 지키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당시 소련과 갈등 관계에 있던 중국은 헬싱키 협정을 "종잇조각에 불과한 합의"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9]
2. 5. 재검토 회의
헬싱키 선언 채택 이후, 서방은 합의 내용의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후속 회의, 즉 재검토 회의(follow-up meeting) 개최를 소련 측에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는 헬싱키 선언에 대해 "무엇을 지킬지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라고 자신하며 내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으나[30],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다.헬싱키 선언문 전문이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의 신문에 게재되면서(이는 선언 자체의 요구 사항이었다), 이를 근거로 시민들 사이에서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련에서는 인권 단체인 헬싱키 그룹이 결성되었다.[30] 물론 이러한 인권 단체들은 해당 국가 정부로부터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서방 국가들은 헬싱키 선언의 인권 관련 조항들을 근거로 삼아 동구권의 인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명분을 얻게 되었다. 이는 이후 베오그라드(1977-1978), 마드리드(1980-1983), 빈(1986-1989) 등지에서 열린 재검토 회의들을 통해 동서 관계 및 냉전 구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2. 5. 1. 베오그라드 회의 (1977-1978)
1977년, 인권을 외교 정책의 중심에 둔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헬싱키 선언의 이행을 점검하는 첫 재검토 회의인 베오그라드 회의(1977년 10월 4일 ~ 1978년 3월 9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카터 행정부의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는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가족 재결합, 국제 결혼, 개인적·직업적 여행의 자유, 정보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접근 등 인권 관련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1] 이는 소련의 인권 문제를 국제 정치 무대에서 공론화하려는 의도였다.카터 행정부는 소련 내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에게 지지 서한을 보내고, 미국 언론인에 대한 소련 당국의 고소(1978년 7월)를 비난하며 각료급 인사의 소련 방문을 중지(1978년 5월)하는 등 적극적인 인권 외교를 펼쳤다. 또한, 뮌헨에 위치한 자유 유럽 방송(RFE/RL)의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미국 의회는 헬싱키 선언을 근거로 소련과 동구권의 재밍 행위를 강력히 비판했다.[21]
미국 의회 역시 행정부와 보조를 맞췄다. 1975년부터 국무부에 미국의 원조를 받는 국가들의 인권 상황을 매년 의회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며 인권 문제와 경제 원조를 연계하는 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특히, 소련과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헬싱키 그룹 대표 유리 오를로프 등 반체제 인사들과 면담하고 돌아온 공화당 하원의원 밀리센트 펜윅은 의회 내에 CSCE 프로세스를 감시하기 위한 유럽 안보 협력 위원회 설립 법안을 제출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등 기존 외교 노선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미국 내 유대인 및 동유럽계 이민자 사회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법안은 1976년 6월 통과되었고, 이 위원회는 이후 미국의 CSCE 정책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21]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은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인권 문제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가족 재결합 신청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허가되어야 하며, 불허 시 재신청에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NATO 회원국들과 함께 종교, 양심, 신념, 사상의 자유 준수를 최종 문서에 명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적극적인 인권 문제 제기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들은 헬싱키 선언 제1 바스켓의 제6원칙(내정 불간섭)을 내세우며 미국이 회의의 분위기를 해치고 선전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31] 또한,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일부 서유럽 국가들조차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부담을 느끼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49]
결국, 인권 문제를 둘러싼 동서 간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베오그라드 회의는 실질적인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폐막 시 채택된 최종 문서에는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담기지 못했으며, 다음 재검토 회의를 마드리드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성과였다. 헬싱키 선언으로 잠시 해빙기를 맞는 듯했던 동서 관계는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여전한 이념 대립을 재확인했으며, 이는 중부유럽 상호 병력 감축 협상(MBFR)의 정체, SALT II 협상의 부진과 맞물려 데탕트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1980년대 신냉전 시대를 여는 배경이 되었다.[32][50]
2. 5. 2. 마드리드 회의 (1980-1983)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데탕트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41] 1981년 새로 취임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는 소련이 기존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며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에서 탈퇴하는 방안까지 검토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41] 이러한 냉전 재점화 분위기 속에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마드리드에서 재검토 회의가 열렸다.이전 베오그라드 재검토 회의(1977-1978)와 마찬가지로, 마드리드 회의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소련과 동구권의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비판했다.[41] 서방 측은 동구권의 인권 문제를 120건 이상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인권 문제에 관한 전문가 회의 개최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이후 오타와 인권 전문가 회의(1985년)와 베른 인적 접촉 전문가 회의(1986년) 개최로 이어졌다.
마드리드 회의는 여러 차례 중단을 겪는 등 난항을 거듭했지만, 베오그라드 회의와는 중요한 차이점을 보였다. 베오그라드 회의 최종 문서는 인권 관련 내용을 담지 못했지만, 마드리드 회의에서는 인권 분야의 구체적인 진전을 포함한 마드리드 최종 문서를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마드리드 최종 문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의 이동: 긴급 상황 시 가족 재결합이나 국제결혼 관련 신청을 통상 6개월 이내에 처리하도록 노력하고, 관련 수수료는 점진적으로 적정한 수준으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신청 절차에 필요한 정보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신청이 거부되더라도 다시 신청할 권리를 인정했다.
- 정보 유통 및 언론인 활동: 자유유럽방송 등에 대한 전파 방해(재밍) 문제는 합의가 어려워 논의에서 제외하는 대신, 스페인,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비동맹·중립 국가들의 중재로 언론인의 활동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 구체적으로는 언론인에 대한 비자 발급 절차 간소화 및 우대 조치, 외국 언론인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국내 정보원에 대한 개인적 접촉 제한 완화, 보도 목적의 참고 자료 휴대 인정 등이 합의되었다.
- 기본적 자유 및 인권: 폴란드에서 활동하던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가입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추가했다.
2. 5. 3. 빈 회의 (1986-1989)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소련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내부 개혁과 신사고외교를 추진했다. 미국에서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뒤, 군사비 지출 증가로 인한 재정 적자 부담 때문에 대소련 전략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87년 12월 INF 조약이 체결되었고, 1988년 5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는 등 냉전은 종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소련은 신사고 외교를 통해 CSCE를 재평가하고, 헬싱키 선언이나 CSCE 합의 문서를 유럽 헌법 수준으로 격상하는 방안까지 논의했다.[51][33] 이러한 변화로 인권을 둘러싼 이념 대립은 완화되었고,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정치적 분열이 동구권 내부에서 나타나는 가운데 많은 제안이 결실을 보았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6년 12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진행된 빈 회의에서는 중요한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1]
- 우편 및 통신에 대한 국가의 검열 금지
- 안전보장을 이유로 한 출판 제한 남용 방지
- 정보 침투와 관련하여 자유 유럽 방송에 대한 전파 방해(재밍) 중지가 처음으로 합의됨
- 인권과 관련해 헬싱키 선언 및 마드리드 최종 문서의 항목에 더해 10개의 새로운 항목이 추가됨
- 과거 CSCE 회의에서 합의된 원칙 중 일부에 강제력을 부여함
특히 빈 회의에서는 CSCE의 '인적 측면'(human dimension)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기존의 제7 원칙(기본적 자유 및 인권)과 제3 바스켓(인도적 협력)에 걸친 합의 사항들을 참가국들이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시하고 강제하기 위해 인권 보호 메커니즘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메커니즘은 특정 참가국이 다른 참가국으로부터 인권 관련 정보 요구를 받거나 외교적 항의, 양자 협의 요청을 받을 경우 의무적으로 응하도록 규정했다.[21] 이 메커니즘은 1989년 1월부터 시행되었으며, 시행 첫해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다 투옥된 바츨라프 하벨의 처우 문제,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정치인 알렉산데르 둡체크 관련 문제, 루마니아의 헝가리계 주민 억압 및 반체제 인사 탄압 문제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52][34]
빈 최종 문서는 소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권관에 변화가 생겼음을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이는 동서 냉전 시대 내내 지속되었던 이념 대립의 종식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헬싱키 선언을 계기로 탄생한 헬싱키 그룹과 폴란드의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와 같은 시민사회조직(CSO)들은 동구권 사회를 '아래로부터'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고,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위로부터' 변화를 이끌었다. 이들 모두 헬싱키 선언의 인권 규범 실현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현대 유럽에서는 냉전 종식의 여러 원인 중 하나로 헬싱키 협정의 역할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시각이 우세하다.[53][35]
2. 6. 1990년대
1990년 6월 파리 헌장이 채택된 이후, 베를린, 프라하, 스톡홀름, 로마 등에서 각국 장관들이 모여 꾸준히 합의를 이루어냈다. 이 시기는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로의 전환, 유고슬라비아 내전 격화, 소련 해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 등 CSCE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급증하던 때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CSCE의 성격도 변모했으며, 유럽 경제 공동체는 유럽연합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냉전 시기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삼았던 NATO는 소련 해체 후에도 존속했고, CSCE는 NATO를 대체하는 새로운 유럽의 안전보장 공동체가 되지는 못했다. 실질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CSCE는 파리 헌장을 통해 사무국을 설치하는 등 발전을 모색했다. 결국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 정상회의에서 기존의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로 개편하기로 결정하면서 CSCE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54]3. 헬싱키 협정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1973년 7월 헬싱키 핀란디아 홀에서 열린 1단계 외무 장관 회의에서는 향후 논의의 틀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4] 당시 회의 분위기는 긍정적이어서 아흐티 카르얄라이넨 핀란드 외무 장관은 "헬싱키 정신"을 언급하기도 했다.[5]
이후 1973년 9월부터 1975년 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2단계 전문가 회의가 열려 협정의 세부 내용에 대한 실질적인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인적 교류와 정보의 자유로운 이동 문제는 동구권과 서방 간의 주요 쟁점이었다.[6] 서방, 특히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들은 가족 재결합, 여행의 자유, 언론 활동 보장 등을 요구했으나[21],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은 이를 이념적 문제로 간주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소련은 CSCE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1][2] 결국 서방과 타협하여 관련 조항들을 일부 수용했다. 다만 정보 접근 제한이나 국가의 정보 통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명문화하지 않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21][27]
최종적으로 1975년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헬싱키 핀란디아 홀에서 3단계 정상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는 알바니아와 안도라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총 35개국의 국가 원수 또는 정부 수반이 참석했다. 서독과 동독의 정상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
1975년 8월 1일, 참가국 정상들은 헬싱키 협정(Helsinki Final Act)에 서명했다. 서명식은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가 시작하여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마무리했다. 헬싱키 협정은 크게 네 부분(바스켓, Basket)으로 구성되어 유럽 안보 관련 문제, 경제·과학·기술·환경 분야 협력, 인도주의 및 기타 분야 협력, 그리고 후속 조치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헬싱키 협정은 냉전 시대 동서 진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와 협력의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데탕트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3. 1. 주요 원칙
헬싱키 협정은 참가국 간 상호 관계의 기본 원칙들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냉전 시대 동서 진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다년간의 외교적 노력과 협상의 결과물이었다.협정의 주요 원칙에는 국경의 불가침과 영토 보전이 포함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확립된 유럽의 국경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강력히 원했다. 이러한 요구는 이미 1966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부쿠레슈티 선언과 1969년 부다페스트 어필에서도 주요 의제로 제시된 바 있었다.[37][38] 서방 국가들은 동구권의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인권 및 인도주의 분야에서의 진전을 확보하고자 했다.
인권과 기본적 자유 존중 역시 협상의 핵심 쟁점이었다.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인적 교류의 자유 확대, 분단된 가족의 재결합 촉진, 정보 접근성 개선, 언론인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등을 중요한 의제로 제기했다.[41] 특히 영국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협정에 명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제7 원칙 제7항).[21] 그러나 서방의 모든 요구가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가 제안했던 통신의 비밀 보장 조항은 소련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최종 합의에 포함되지 못했다.[21] 소련과 동독 등 동구권 국가들은 서방의 인권 문제 제기와 자유로운 정보 유입 시도가 자국의 체제 안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고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41][21]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헬싱키 정상회의 연설에서 정보 매체가 국가 간 불화와 반목을 퍼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서방의 이념 공세에 대한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41]
국가 간 협력 증진 또한 헬싱키 협정의 중요한 기둥이었다. 경제, 과학 기술, 환경 보호, 문화 교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국가 간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평화 공존의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협력의 필요성은 이미 1966년 부쿠레슈티 선언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37]
헬싱키 협정은 이러한 내용들을 포함하여 참가국 간 관계를 규율하는 여러 기본 원칙들을 명시했다. 이 원칙들은 서로 다른 체제와 이해관계를 가진 동서 양 진영이 오랜 협상 끝에 도달한 타협의 결과였다. 하지만 협정 채택 직후부터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서방 국가들조차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인권 관련 조항들을 성실히 이행할 것으로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28][47]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헬싱키 연설에서 "역사는 우리가 오늘 여기서 한 말이 아니라, 내일 우리가 할 행동으로 우리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하며, 협정의 실제적인 이행이 중요함을 강조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협정 준수의 어려움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되기도 했다.[41][21] 한편, 당시 중소 분쟁으로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은 헬싱키 협정을 실질적인 구속력이 없는 "종이 위의 합의"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48][29]
3. 2. 참가국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의 최종 단계인 정상 회담은 1975년 7월 말과 8월 초 핀란드 헬싱키의 핀란디아 홀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는 당시 알바니아와 안도라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총 35개국의 국가 원수 또는 정부 수반이 참석하여 헬싱키 협정에 서명했다.헬싱키 협정 원 서명국 및 이후 가입국은 다음과 같다.
'''헬싱키 협정 원 서명국 (1975년)'''
국가 | 국가 | 국가 |
---|---|---|
오스트리아 | 헝가리 | 포르투갈 |
벨기에 | 아이슬란드 | 루마니아 |
불가리아 | 아일랜드 | 산마리노 |
캐나다 | 이탈리아 | 스페인 |
키프로스 | 리히텐슈타인 | 스웨덴 |
체코슬로바키아 | 룩셈부르크 | 스위스 |
덴마크 | 몰타 | 터키 |
핀란드 | 모나코 | 소련 |
프랑스 | 네덜란드 | 영국 |
서독 | 노르웨이 | 미국 |
동독 | 폴란드 | 유고슬라비아 |
그리스 | 바티칸 시국 |
'''이후 가입국'''
가입 시기 | 국가 |
---|---|
1991년 6월 19일 | 알바니아 |
1991년 9월 10일 |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
1992년 1월 30일 |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
1992년 3월 24일 | 크로아티아 조지아 |
1992년 4월 30일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1993년 1월 1일 | 체코 슬로바키아 |
4. 영향 및 평가
헬싱키 선언은 채택 당시 냉전의 종결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회의 이후 국제 언론에서는 "헬싱키 정신"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으며, 데탕트(긴장 완화)라는 용어는 종종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다.[10] 핀란드는 회의 개최를 통해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고, 참가국들은 헬싱키를 중립적인 회담 장소로 인정하게 되었다.[10]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헬싱키 선언, 특히 인권과 관련된 제3 바스켓의 내용을 완전히 이행할 의지가 부족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선언 내용 중 무엇을 지킬지는 소련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며 내부의 우려를 잠재우려 했다.[30] 서방 국가들 역시 동구권이 선언 내용을 전면적으로 이행하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28]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헬싱키 연설에서 "역사는 (...) 우리가 한 약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약속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되기도 했다.[21] 당시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은 헬싱키 선언을 "종이 위의 합의"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29] 실제로 헬싱키 선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 간의 긴장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1970년대 후반 냉전은 제3세계로 확산되었고, 1980년대 초 유럽에서는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간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 경쟁이 격화되었다.[9]
헬싱키 선언의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동구권 내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높이고, 인권 운동가들에게 활동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같은 소련 내 반체제 인사들은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 등에 충격을 받고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시작했다.[39] 헬싱키 선언은 이러한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었다. 비록 브레즈네프는 합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했지만,[30] 선언문 전문이 (선언의 요구에 따라) 동구권 국가들의 신문에 게재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 단체인 '헬싱키 그룹'이 여러 국가에서 결성되었다.[30] 이들 단체는 당국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지만, 서방 국가들은 헬싱키 선언을 근거로 동구권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을 얻었다.[30]
헬싱키 선언은 합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재검토 회의(follow-up meeting) 개최를 규정했다. 1977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첫 재검토 회의부터 인권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특히 카터 행정부 하의 미국은 인권 증진을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고, 소련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11][21] 카터 행정부는 사하로프에게 지지 서한을 보내고, 동구권을 향한 자유 유럽 방송(RFE/RL)의 예산을 증액하는 등 적극적인 '목소리 높은 외교'를 펼쳤다.[21] 미국 의회 내에서도 CSCE 과정을 감시하고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https://www.csce.gov/ 유럽 안보 협력 위원회]"가 1976년 설립되었다.[21] 이러한 미국의 공세적인 인권 외교는 소련과 동구권의 강한 반발을 샀으며, 일부 서방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빚기도 했다.[31] 결국 베오그라드 회의는 인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 없이 마무리되었다.[32] 그러나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재검토 회의(1979-1983)에서는 폴란드의 자율 관리 노조 '연대' 탄압 문제를 반영하여 "노동 조합을 자유롭게 설립하고 가입할 권리" 등이 최종 문서에 포함되는 등 인권 분야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졌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데탕트 분위기에 종지부를 찍었고,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소련의 합의 불이행을 이유로 CSCE 탈퇴론까지 검토될 정도로 회의의 존속 자체가 불투명해 보였다.[11] 하지만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여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외교는 CSCE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권을 둘러싼 동서 간의 이념 대립은 눈에 띄게 완화되었다.[33]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재검토 회의는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인권 침해 문제를 다루고 참가국 간의 정보 요구 및 항의 절차를 규정한 '인적 측면(human dimension)' 메커니즘 도입은 중요한 진전이었다.[21][34] 이 메커니즘은 발족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의 하벨 등 반체제 인사들의 처우 개선 요구 등에 활발히 활용되었다.[34]
결론적으로 헬싱키 선언과 CSCE 프로세스는 냉전 종식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헬싱키 선언의 인권 규범은 헬싱키 그룹이나 폴란드의 '연대'와 같은 시민 사회 조직의 성장을 촉진하며 동구권 사회 변화를 '아래로부터'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동시에 고르바초프와 같은 개혁적 지도자의 등장은 '위로부터'의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헬싱키 선언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 로마 교황의 동유럽 방문, 미소 간 군비 경쟁의 부담,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 등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과 함께 작용하여 냉전 종식을 앞당기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5]
냉전이 종식되면서 CSCE는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1990년 파리 헌장 채택을 계기로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1992년 헬싱키 후속 회의를 거쳐 199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정상회의에서 CSCE는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로 명칭을 변경하고 상설 국제기구로 전환되었다. 이는 변화된 유럽의 안보 환경에 대응하여 예방 외교, 분쟁 해결, 민주주의 및 인권 증진 등 보다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알바니아, 발트 3국, 구 소련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해체 후 등장한 신생 독립국들이 연이어 가입하면서 회원국 규모도 크게 확대되었다.[13]
5. 한국에 대한 시사점
냉전 시기 동서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출범한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는 군사적 대치 상황에 더해 이념적,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CSCE의 결과물인 헬싱키 협정은 단순히 국가 간 안보 문제뿐만 아니라, 인권 존중과 인도적 교류라는 가치를 주요 의제로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CSCE 논의 과정에서 인권 문제는 핵심 쟁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소련의 경우, 1948년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조차 러시아어로 번역되거나 제대로 보도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 인권 개념이 희박했다.[39] 그러나 1965년경부터 소련 내부에서도 인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은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같은 소련 내 반체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하로프 등의 활동은 소련 내 인권 상황을 외부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서방 국가들의 관심을 끌었다.[39] 또한,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소련 내 유대인들의 출국 요구가 이어지자, 미국 민주당 의원들이 주도하여 소련과의 통상 문제와 인권 문제를 연계하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통과시키기도 했다.[40]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국내 정보 검열은 물론 서방으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 추진과 함께 서방 국가들은 CSCE를 통해 동구권의 인권 문제에 개입할 통로를 마련하고자 했다. 서방은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 존중(헬싱키 협정 제1 바스켓 제7원칙),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 및 인적 교류 확대(제3 바스켓)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인권 문제를 국내 문제로 간주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유엔 헌장에 이미 명시된 원칙이라는 점, 그리고 CSCE의 조속한 타결을 원했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결국 서방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헬싱키 협정에서 강조된 인권 존중, 정보 및 인적 교류의 원칙은 당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민주화와 인권 개선을 갈망하던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국제 사회에서 인권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국내 민주화 운동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미를 지녔다.
나아가 CSCE는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가진 국가들이라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안보 불안을 관리하고 평화 공존의 틀을 모색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선례이다. 특히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뿐만 아니라 경제, 환경, 인권 등 포괄적인 분야에서 협력을 추구하고, 국경 불가침(제3원칙)과 같은 현상 유지 원칙과 인권 존중(제7원칙), 인민 자결권(제8원칙) 등 변화 지향적 가치들을 함께 다루며 합의를 도출해낸 과정은 복잡하게 얽힌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CSCE의 경험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넘어 경제 협력, 사회·문화 교류, 인도적 문제 해결 등 다층적인 접근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남북 간의 직접 대화 노력과 더불어, 주변국 및 국제 사회와의 다자 협력 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CSCE 및 이를 계승한 OSCE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활용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공존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의미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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