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다카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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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11세에 관직에 오른 후,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밑에서 급속도로 승진하여 무관직을 역임했다. 조토쿠 2년 가잔 법황을 습격한 사건으로 이즈모노곤노카미로 좌천되었으나, 이후 병부경, 중납언 등을 거쳐 다자이노곤노소치에 임명되었다. 1019년 도이의 입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으며, 만년에는 다시 다자이노곤노소치에 임명되었다. 그는 거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칙찬 가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후손들은 황실 및 섭관가와 혈연을 맺으며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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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다카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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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지와라노 다카이에 |
원어 이름 | 藤原 隆家 |
로마자 표기 | Fujiwara no Takaie |
아명 | 아코 (阿古) |
![]() | |
신분 | |
씨족 | 후지와라 북가중관백가 |
관위 | 정2위, 주나곤 |
생애 | |
출생 | 979년 |
사망 | 1044년 2월 2일 (65세 또는 66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미치타카 |
어머니 | 다카시나노 기시 |
형제 | '미치요리, 요리치카, 고레치카, 데이시, 류엔, 라이시, 미쿠시게도노, 지카이에, 지카요리, 후지와라노 겐시 여방, 요시치카, 다이라노 시게요시의 부인' |
배우자 | '미나모토노 시게노부의 딸, 후지와라노 가게요시의 딸, 미나모토노 가네스케의 딸, 후지와라노 다메미쓰의 딸, 가가노카미 마사미쓰의 딸' |
자녀 | '요시요리, 쓰네스케, 교쇼, 료묘, 아쓰요시 친왕의 비, 후지와라노 가네쓰네의 부인, 스에사다, 이에후사, 요시카즈, 마사노리' |
경력 | |
주군 | '이치조 천황, 산조 천황, 고이치조 천황, 고스자쿠 천황' |
복무 기간 | 알 수 없음 |
계급 | 정2위, 주나곤 |
군사 활동 | |
전투 | 도이의 입구 (1019년) |
2. 경력
에이소 2년(990년) 시종으로 임관한 후,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집정 하에 무관을 역임하며 빠르게 승진했다. 조토쿠 원년(995년) 곤노주나곤이 되었으나, 아버지 미치타카와 백부 후지와라노 미치카네가 연이어 사망하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집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정치적 상황이 변하였다.
조토쿠의 변으로 이즈모노곤노카미로 좌천되었다가 복귀하여 중납언에 다시 임명되었다. 조와 원년(1012년) 눈병 치료를 위해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자청하여 임명되었고,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다시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역임하고 조큐 5년(1044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에이소 원년(989년), 11세에 원복을 하고 종5위하에 서임되었으며, 다음 해인 에이소 2년(990년) 정월에 시종에 임관하였다. 같은 해 7월 우효에노곤노스케(右兵衛権佐)에 임명되었고, 쇼랴쿠 2년(991년) 종5위상, 쇼랴쿠 3년(992년) 정5위하·사콘노에노쇼죠(左近衛少将), 쇼랴쿠 4년(993년) 종4위상·우콘노에노츄조(右近衛中将), 쇼랴쿠 5년(994년) 정월 정4위하 등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집권 하에 무관직을 역임하며 빠르게 승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우콘노에노츄조 관직을 유지한 채 종3위에 올라(삼위 중장) 공경 반열에 들었다. 조토쿠 원년(995년) 4월 곤노주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미치타카가 사망하였다.같은 달 미치타카의 동생 후지와라노 미치카네가 간파쿠가 되었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고, 5월에 집정의 자리는 내람·우대신이 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로 옮겨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 말에 다카이에의 종자와 미치나가의 종자가 교토의 칠조대로에서 난투를 벌이는가 하면,[27] 8월 초순에는 다카이에의 종자가 미치나가의 수신(随身)인 하타노 히사타다(秦久忠)를 살해하기도 하였다.[28] 그러나, 다음 해인 조토쿠 2년(996년) 정월에 친형 후지와라노 고레치카의 여자 문제로 다카이에가 자신이 종자로 거느린 무사를 데리고 가잔 법황의 일행을 습격하였고, 그만 법황의 옷소매에까지 화살이 날아와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29][30] 이것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이용하여 4월에 이르러 가잔 법황의 봉사(奉射) 사건이나 히가시산조인에 대한 저주 혐의, 그리고 함부로 대원수법을 행하였다는 죄장 3개 조를 통해 다카이에는 이즈모노곤노카미(出雲権守)로, 친형인 내대신 고레치카는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로 좌천되었다(조토쿠의 변).[31] 덧붙여 다카이에는 실제 이즈모국까지는 가지 않고 병을 이유로 다지마 국에 머물렀다.
조토쿠 4년(998년) 5월에 히가시산조인 후지와라노 센시의 고뇌에 의한 대사면령으로 수도로 돌아왔고, 10월에 병부경으로서 관계에 복귀하였다. 조호 4년(1002년) 이전의 관직인 곤노주나곤으로 복귀하고, 간코 4년(1007년) 종2위, 간코 6년(1009년) 중납언에 서임되었다.
2. 2. 조토쿠의 변과 좌천
995년 4월,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사망하자, 후지와라노 미치카네가 간파쿠가 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후 권력은 내람 · 우대신이 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넘어갔다.[27] 이러한 상황에서, 7월 말에 다카이에의 종자와 미치나가의 종자가 교토의 칠조대로에서 난투를 벌였고,[27] 8월 초순에는 다카이에의 종자가 미치나가의 수신(随身)인 하타노 히사타다(秦久忠)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8]996년 정월, 형 후지와라노 고레치카가 가잔 법황에게 화살을 쏘는 사건이 발생했다.[29][30] 이 사건은 미치나가의 정치적 공작으로 인해 조토쿠의 변으로 이어진다. 다카이에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이즈모노곤노카미로 좌천되었으나,[31] 실제로는 이즈모까지 가지 않고 병을 핑계로 다지마에 머물렀다.
998년 5월, 히가시산조인(후지와라노 센시)의 대사면령으로 수도로 돌아왔고, 10월에 병부경으로 관계에 복귀했다.
2. 3. 중납언 복귀와 다자이노곤노소치 부임
조호 4년(1002년) 이전의 관직인 곤노주나곤으로 복귀했다.[27] 간코 4년(1007년) 종2위에 서임되었고,[32] 간코 6년(1009년) 중납언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33]조와 원년(1012년) 말 무렵부터 다카이에는 뾰족한 물건에 의한 외상이 원인이 된 눈병을 앓아 조정 출사는 물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저택에 칩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4] 다자이후에 눈을 치료하는 당인(唐人, 중국인) 명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카이에는 다자이노곤노소치 임관을 자청했다.[35]
이 임관 희망에 대해 여전히 명망이 높던 중관백가와 규슈 재지 세력과의 결합을 억제하고자 했던[36]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강한 방해를 받았지만,[37] 결국 같은 눈병으로 고민하던 산조 천황의 동정이 깊어, 결정까지 9개월여의 시간을 들인 끝에 조와 3년(1014년) 11월, 마침내 다자이노곤노소치로 임명되었다. 조와 4년(1015년)에는 부임 공로로 정2위로 승진했다. 다카이에는 다자이후에서 선정을 펼쳐 규슈의 재지 세력들이 완전히 심복했다고 한다.[33]
2. 4. 도이의 입구 격퇴와 만년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가 발생했다. 도이(刀伊)가 쓰시마, 이키에 이어 같은 해 4월 하카타를 공격했을 때, 다카이에는 총지휘관으로서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 · 오쿠라노 다네키(大蔵種材) 등을 지휘해 응전, 격퇴했다.[38] 같은 해 6월, 고려가 노인송사(虜人送使) 정자량(鄭子良)을 파견해 도이로부터 구출한 일본인 포로 259명을 일본으로 송환해 왔고, 다카이에는 정자량에게 일본 조정의 반첩을 보내고 녹물(禄物)을 주는 등 사후 처리를 했다.[38]같은 해 12월,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사임하고 수도로 돌아왔다(후임은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다카이에가 교토로 돌아온 뒤 조정에서는 그가 도이를 격퇴한 공적을 높이 사 대신 · 다이나곤으로 등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교토로 돌아온 뒤 다카이에는 다이리(대궐) 출사를 앞두고 있어 별다른 승진은 없었다고 한다.[39] 이듬해 간닌 4년, 교토에 포창(疱瘡)이 크게 돌아 도이가 대륙에서 가져온 역병이 다카이에에게 붙어 교토까지 온 것이라는 소문이 났다.
지안 3년(1023년), 차남 쓰네스케를 우중변으로 승진시키는 대신 중납언을 사임했다. 이후 대장경(大蔵卿) 등을 맡았지만, 고스자쿠 천황 조라쿠 원년(1037년)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대신 다시 다자이노곤노소치에 임명되었고, 조큐 3년(1042년)까지 재임했다.
조큐 5년(1044년) 1월 1일,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최종 관위는 전 중납언 정2위였다.
3. 인물과 평가
당대 일본에서 "거친 자(さがな者)"로 유명했던 다카이에는 베갯머리 소식, 대경, 고콘초몬주 등에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40][41] 기골이 있는 인물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도 그의 기개를 인정했다.[33] 후지와라노 사네스케 등은 그를 귀하게 여겼으며, 그의 일기 소우기에는 다카이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43][44][45] 칙찬가인(勅撰歌人)으로, 고슈이와카슈(後拾遺和歌集)와 신고킨와카슈에 그의 와카가 실려 있다. 한시에도 능하여, 본초레이소(本朝麗藻)에 그의 칠언율시가 남아 있다.
4. 후손
후지와라노 요시요리(藤原良頼)는 정3위 곤노주나곤까지 올랐다.[46] 그의 딸은 산기 미나모토노 모토히라(源基平)의 부인이 되어 고산조 천황의 총애를 받은 미나모토노 기시(源基子, 사네히토 친왕 · 스케히토 친왕의 생모)를 낳았다. 요시요리의 4대 후손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모로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구명을 기요모리에게 탄원한 이케노젠니이다.
차남 후지와라노 쓰네스케(藤原経輔, 1006년-1081년)는 정2위 다이나곤이 되었으며, 미나세 다이나곤(水無瀬大納言)으로 불렸다.[46] 쓰네스케의 5세손 종3위 다다타카(忠隆)의 아들은 고노에 가의 시조 모토자네(基実)의 부인이 되어 모토미치(基通)를 낳았고, 그 형제 노부요리(信頼)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총신으로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로 유명하다. 쓰네스케의 5세손 수리대부 노부타카(信隆)의 아들 시치조인 시키시(七条院殖子)는 고토바인의 생모이며, 그 동생 보몬 노부키요(坊門信清)는 내대신까지 올랐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어머니 도키와 고젠의 재혼 상대이자 오슈 후지와라 씨와도 관계가 있던 이치조 나가나리(一条長成)도 쓰네스케의 5세손이다.
다카이에류는 모계로 왕실 · 셋케(摂家)에 그 피를 남겼고,[47] 부계 자손은 미나세 류(水無瀬流)로서 후세에 미나세(水無瀬, 우림가) · 시치조(七条, 우림가) · 마치지리(町尻, 우림가) · 사쿠라이(桜井, 우림가)・야마이(山井, 우림가)의 다섯 당상가(堂上家)를 내고 메이지 유신에 이르렀다.
남북조 시대 가네요시 친왕을 옹호했던 히고 국의 호족 기쿠치 씨는 다카이에의 후예를 칭했고, 조상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 초명은 모토사다基定)를 다카이에의 아들이라 칭했다.[48] 히고국 기쿠치 씨는 시조 기쿠치 노리타카가 후지와라노 마사노리의 아들이자 다카이에의 손자라고 주장한다.[7]
5. 한국과의 관계
1019년 도이의 입구 당시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다자이노다이칸 등을 지휘하여 여진족을 격퇴하였다.[15] 고려는 일본인 포로 259명을 일본으로 송환하였고, 다카이에는 정자량에게 조정의 회답과 노획물 등을 주었다.[15]
5. 1. 도이의 입구와 고려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가 발생하였다. 여진족(으로 추정)은 대마도, 이키에 이어, 4월에 하카타를 습격하였다. 이때 다카이에는 총 지휘관으로서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오쿠라노 타네키 등을 지휘하여 이들을 격퇴하였다.[15]같은 해 6월, 고려는 억류인 송사 정자량을 파견하여, 도이에게 잡혀갔던 일본인 포로 259명을 일본으로 송환하였다. 다카이에는 정자량에게 조정의 회답을 보내고 노획물 등을 주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15]
참조
[1]
서적
Gateway to Japan: Hakata in war and peace, 500-13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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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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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ard University Press
[3]
서적
Kugyō Bunin Nenpyō
Yamakawa Shuppan-sha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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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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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ihonshi Shoka Keizu Jimmei Jiten
Kōdansha
[6]
서적
Nihon Keifu Sōran
Kōdansha
[7]
문서
Shōyūki
[8]
문서
小右記』長徳元年7月27日条
[9]
문서
『小右記』長徳元年8月3日条
[10]
문서
『日本紀略』長徳2年正月16日条
[11]
문서
『栄花物語』巻第4「みはてぬゆめ」
[12]
문서
『小右記』長徳2年4月24日条
[13]
문서
『御堂関白記』長和2年正月10日条
[14]
문서
『小右記』長和3年5月7日条
[15]
간행물
日麗交渉と刀伊賊の来寇
国書刊行会
[16]
문서
『大鏡』第四巻,内大臣道隆
[17]
문서
『枕草子』、隆家は「三位中将」または「中納言」の官名でしばしば登場する。
[18]
문서
『小右記』長和元年4月27日条
[19]
문서
『小右記』寛弘2年4月25日条
[20]
정보
実資の最初の妻である源惟正女との関係も考えられる。隆家の妻のうち源兼資の娘は惟正女の姪、藤原景斉の娘は惟正女の従妹にあたる。
[21]
문서
『小右記』寛弘2年正月5日条,長和2年8月13日条,同年9月8日条
[22]
문서
『小右記』寛仁元年9月16日条,寛仁4年10月30日条
[23]
문서
『小右記』寛仁4年(1020年)10月23日条・治安元年(1021年)2月1日条
[24]
정보
隆家次女(参議兼経室)の4世孫にあたる従三位藤原季行の息女が九条兼実室となり九条良経を生んでいるため、九条家にもその血は入った。
[25]
문서
『近衛府補任』
[26]
문서
『帥次第』
[27]
문서
『小右記』長徳元年7月27日条
[28]
문서
『小右記』長徳元年8月3日条
[29]
문서
『日本紀略』長徳2年正月16日条
[30]
문서
『栄花物語』巻第4「みはてぬゆめ」
[31]
문서
『小右記』長徳2年4月24日条
[32]
문서
勝倉[2003: 15]
[33]
문서
『大鏡』第四巻,内大臣道隆
[34]
문서
『御堂関白記』長和2年正月10日条
[35]
문서
『大鏡』第四巻,内大臣道隆
[36]
서적
勝倉
2003
[37]
문서
「天気無動、但左府猶有遏絶者」『小右記』長和3年5月7日条
[38]
논문
日麗交渉と刀伊賊の来寇
국서간행회
1975
[39]
서적
『大鏡』第四巻,内大臣道隆
[40]
서적
『大鏡』第四巻,内大臣道隆
[41]
문서
『마쿠라노소시』에서. 다카이에는 「삼위중장」(三位中将) 또는 「주나곤」(中納言)이라는 관직명으로 자주 등장한다.
[42]
문서
『小右記』長和元年4月27日条
[43]
문서
『小右記』寛弘2年正月5日条,長和2年8月13日条,同年9月8日条
[44]
문서
『小右記』寛仁元年9月16日条,寛仁4年10月30日条
[45]
서적
摂関時代文化史研究
[[思文閣出版]]
2007
[46]
문서
『소우기』간닌 4년(1020년) 10월 23일조 ・ [[지안 (연호)|지안]] 원년(1021년) 2월 1일조에 따르면, 다카이에는 아쓰노리 친왕을 사위로 삼으려다 미치나가의 「기색이 불쾌해지는」(気色不快) 결과를 초래했고, 그 결과 이듬해까지 지연되었다.
[47]
문서
다카이에의 차녀 즉 산기 가네쓰네의 부인의 4세 손에 해당하는 [[종3위]] [[후지와라노 스에유키|스에유키]](季行)의 딸이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의 부인이 되어 [[구조 요시쓰네|요시쓰네]](良経)를 낳았으므로 [[구조 가]](九条家)에도 그 피가 흐르게 되었다.
[48]
문서
[[기쿠치씨|기쿠치 씨#기원]] 참조
[49]
문서
『近衛府補任』
[50]
문서
『帥次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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