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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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는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으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지역으로, 사쓰마야키 도자기로 유명하다. 1603년, 도공들은 현재의 미야마 지역인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하여 도자기 제조를 시작했고, 이들은 사쓰마 번의 통제와 지원 속에서 조선의 문화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도자 문화를 발전시켰다. 현재는 "사쓰마야키의 마을"로 알려져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문화 시설과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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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 | |
|---|---|
| 기본 정보 | |
| 명칭 | 동시라이 정 미야마 |
| 한자 표기 | 東市来町美山 |
| 로마자 표기 | Higashiichiki-chō Miyama |
| 종류 | 대자 |
![]() | |
| 위치 | 일본,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동시라이 정 |
| 인구 | 538명 (2020년) |
| 세대수 | 220세대 (2020년) |
| 우편 번호 | 899-2201 |
| 시외 전화 번호 | 099 |
| 자동차 번호판 | 가고시마 |
| 지리 | |
| 특징 | 사쓰마 도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음 |
| 설명 | 미야마는 옛 사쓰마 가도를 따라 발달한 지역 |
| 역사 | |
| 설치일 | 1889년 4월 1일 |
| 코드 | |
| 마을 자 ID | O1-000000_G2-000003 |
| 운수국 주소 코드 | 46515-0264 |
2. 역사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사쓰마야키(薩摩焼) 자기로 유명했다.
1597년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들이 포로로 잡혀 사쓰마 국으로 끌려왔다. 초기에는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603년 사쓰마 번이 안정되면서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하여 도자기 제조를 시작했다.
1673년부터 사쓰마 번의 보호와 통제가 강화되었고, 1845년에는 즈쇼 히로사토의 지원으로 사쓰마야키가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 제도 변화와 일본의 조선 침탈로 인해 조선 도공 후손들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한국 병합 이후에는 일본식 성으로 개명하며 조선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전후부터 일본인 사회와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심수관 가문만이 한국 성씨를 이어오고 있다.
2. 1. 조선 도공의 강제 이주와 정착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사쓰마야키(薩摩焼) 자기로 유명하다.1597년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 43명은 시마즈 군에 포로로 잡혀 1598년 사쓰마 국 히오키 군(日置郡)으로 끌려왔다. 당시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비해야 했던 시마즈는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조선인 포로들은 언어와 관습 차이로 일본 주민들과 갈등을 겪으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603년 에도 막부로부터 사쓰마 번이 공인받아 정세가 안정되자, 시마즈는 조선 도공들을 나에시로가와로 이주시키고 심당길 등을 대표로 임명하여 도자기 제조를 명했다. 번 안의 다른 곳에 잡혀있던 조선인 포로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어 조선인 도공 마을이 형성되었다. 심당길은 마을 북서쪽에 단군을 모시는 다마야마 신사(다마야마 신사 - 일본 가고시마 현 히오키 시에 있는 단군을 모셨던 신사)를 세웠다.[60]
1673년 번주 시마즈 미쓰히사에 의해 영주의 별도 저택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조선 도공들에 대한 보호와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타지에서 나에시로가와로 시집오는 여성을 제외하고는 마을 사람들의 외부 유출 및 통혼이 금지되었고, 일본식 이름이나 의복 착용도 금지되었다. 도자기 제조 기술은 번청(藩廳)의 엄격한 통제 하에 보안이 유지되었는데, 이는 영주 전용 자기 생산과 조선식 풍습을 강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영주의 참근교대(参勤交代) 시에는 도공들이 조선식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고쇼(小姓)'라는 비서를 자체적으로 선발하여 조선 옷을 입혀 에도로 보냈다. 대신 일본인에 의한 마을 침범이나 범죄 행위는 엄벌로 다스리고, 이들에게 무사 신분에 준하는 대우를 하였다.[61]
1845년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는 가마 제조를 지원하고 전매 제도를 개혁하여 주민들의 생활 개선과 생산량 증대를 꾀했다. 이를 통해 나에시로가와에서 생산된 사쓰마야키는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즈쇼가 급사하고 그 일족이 추방된 후에도 나에시로가와 주민들은 그의 공양탑을 다마야마 신사에 몰래 세워 오랫동안 그 공적을 기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 제도 개정으로 대부분의 나에시로가와 출신은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주민들은 가고시마 현에 사족 계급 편입을 요청했으나 모두 각하되었다. 1887년 주민 박수승(朴壽勝)이 도고 씨(東郷氏)를 사들여 일본식 성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이 훗날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이다.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조선이 일본의 침탈을 당하면서 일본 사회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고, 한국병합 이후에는 일본식 성으로 개명하며 조선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나에시로가와 주민과 주변 일본인 사회가 다시 원만한 관계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전후부터라고 한다.
심당길의 후손인 심수관 가문만이 유일하게 한국 성씨를 이어오고 있다.
2. 2. 사쓰마 번의 통제와 지원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시마즈 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 도공 43명이 1603년 사쓰마 번에 의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로 이주되었다. 사쓰마 번은 이들에게 도자기 제조를 명하고, 박평의와 심당길을 대표로 임명했다. 조선인 도공들은 마을 북서쪽에 단군을 모시는 다마야마 궁(현재의 다마야마 신사)을 세웠다.[60]1673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미쓰히사는 영주의 별도 저택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보호와 통제의 이중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인 도공들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번청(藩廳)의 엄격한 통제 하에 보안을 유지했고, 영주 전용 자기 생산 및 조선식 풍습을 강제적으로 유지시켰다. 영주가 참근교대할 때에는 도공들이 조선식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고쇼(小姓)라는 비서를 선발하여 조선 옷을 입혀 에도로 보냈다.[60] 그 대신 일본인에 의한 마을 침범이나 범죄 행위는 엄벌로 다스리고, 이들에게 무사 신분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메이와 원년(1771년)에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는 묘대천 주민들의 생활에서 조선식 문화가 옅어져 특별한 행사 등을 제외하고 일본화된 점을 들어 묘대천 주민들에게 조선 옷 착용과 조선어 상용을 명했다.[60]
1845년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는 가마 제조를 지원하고 전매 제도를 개혁하여 주민들의 생활 개선과 생산량 증대를 시도했다. 이로써 나에시로가와에서 생산된 사쓰마야키는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즈쇼가 급사한 후에도 나에시로가와 주민들은 그의 공양탑을 몰래 다마야마 궁에 세워 오랫동안 그 공적을 기렸다.
게이오 3년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 사쓰마 번은 묘다이가와의 박정관에게 출품용 금수대화병 제작을 명했다. 출품된 사쓰마야키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호평을 받아 세계적인 사쓰마야키 붐으로 각광을 받았고, 그 후 사쓰마야키의 해외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2. 3. 조선 문화의 유지와 변화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에 정착하면서 조선 문화가 유지, 변화되었다.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심당길을 비롯한 43명의 조선 도공들이 포로로 잡혀 1598년 사쓰마국 히오키 군으로 끌려왔다. 1603년 사쓰마 번은 이들을 나에시로가와로 이주시키고 도자기 제조를 명했다. 조선인 도공들은 마을 북서쪽에 단군을 모시는 다마야마 신사를 세웠다.[60]
1673년 번주 시마즈 미쓰히사에 의해 영주의 별도 저택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조선 도공들에 대한 보호와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도자기 제조 기술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조선 풍습 유지를 위해 일본식 이름이나 의복 착용이 금지되었다. 도공들은 조선식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무사 신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60]
1845년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의 지원으로 사쓰마야키가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도 개정으로 조선 도공들은 평민으로 격하되었고, 사족 편입 시도가 좌절되었다. 1887년 박수승(朴壽勝)이 도고 씨(東郷氏)를 사들여 일본식 성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이 도고 시게노리이다.
일본의 침탈이 시작되자 조선 도공 후손들은 차별 대우를 받았고, 한국 병합 이후 일본식 성씨로 개명하며 조선 정체성을 잃어갔다. 전후부터 일본인 사회와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심수관 가문만이 한국 성씨를 이어오고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도공들이 향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단군을 모시는 옥산신사를 건립했다.[61] 옥산신사에서는 조선풍의 신무가 전해졌고, 번주 앞에서나 제례에서 조선 춤으로 선보였다.[61]
메이와 원년(1771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는 묘대천(나에시로가와) 주민들에게 조선 옷 착용과 조선어 상용을 명했다.[61]
2.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변화
1871년 폐번치현으로 사쓰마 번이 폐지되고 가고시마현이 설치되면서, 사쓰마 번의 보호와 통제를 받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제토 사업은 민간 기업으로 넘어가게 되었다.[60] '사쓰마 제토 회사'가 설립되었지만, 1873년 상법상 불리한 손실을 입고 사장이 도망가면서 1877년 회사는 해산되었다.[60] 1874년 사쓰마 제토 회사를 퇴직한 제12대 심수관은 새로 가마를 열어 도공들의 버팀목이 되었다.[61]같은 해 호적법에 따른 임신호적에 의해, 그때까지 사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던 나에시로가와 주민 대부분이 평민으로 편입되었다.[61] 주민 364명은 가고시마현에 사족 편입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재정 부담 증가를 우려한 메이지 정부에 의해 거절되었다.[61]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일본식 성씨를 얻고 나에시로가와 밖으로 이주했다.[61]
이후 외무대신이 된 도고 시게노리는 도공이었던 박수승의 장남으로, 박수승은 사족 주식을 구입하여 도고(東郷) 성을 사용했다.[13]
1884년에는 9개 촌을 관할하는 호장역소가 묘대천촌(苗代川村)에 설치되었다.[61] 1889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묘대천촌은 히오키군 시모이주인촌의 대자(大字) "'''묘대천'''"이 되었다.[61] 동시에 정촌제에 의한 시모이주인촌사무소가 묘대천에 설치되었고,[61] 고등소학교도 설치되는 등 시모이주인촌의 중심지가 되었다.[61] 1897년 7월 20일에는 묘대천 우편국이 설치되었고, 1930년 9월 1일 시모이주인 우편국으로 개칭되었다.[61]
1947년에는 시모이주인촌사무소가 시모이주인촌 중앙부인 시모고덴(下古殿)으로 이전했다.[61]
2. 5. 현대의 미야마
1956년 9월 30일, 시모이주인 촌이 해체 분할되면서 묘시로가와는 히가시이치키 정에 편입되었고, 이때 아자(字)명이 묘시로가와에서 '''미야마'''(みやま)로 변경되었다.[15]2005년 5월 1일, 히가시이치키 정이 주변 정들과 합병하여 히오키시가 성립하면서,[18] 미야마는 히오키 시의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라는 대자(大字)명이 되었다.[21]
3. 지리
히오키시의 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히가시이치키정 나가사토, 북동쪽으로는 이주인정 노다, 동쪽으로는 이주인정 데라와키, 남쪽으로는 히가시이치키정 미야마 모토데라와키, 히가시이치키정 미야타, 히가시이치키정 데라와키, 서쪽으로는 히가시이치키정 이사쿠다와 접하고 있다.
미야마 중심부에는 2005년 현재 14개의 사쓰마야키 가마터가 있으며[6], 가마터 외에도 공방과 찻집, 음식점이 모여 있다. 미야마는 "사쓰마야키의 마을"로 알려져 관광지가 되어 있다.[4] 또한, 구 히가시이치키정을 구역으로 책정된 히가시이치키 도시 계획에서는 미야마를 "사쓰마야키의 마을 광역 교류 거점"으로 지정하고, 고유의 역사와 문화 자원을 활용한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다.[7]

남부에는 "사쓰마야키 400주년 기념 석탑"이 건립되어 있다. 이 석탑은 1998년(헤이세이 10년)에 대한민국 등에서 기증한 것으로, 제막식에는 오부치 게이조 내각총리대신과 김종필 국무총리가 참석했다.[6] 교육기관으로는 히오키 시립 미야마 초등학교, 미야마 보육원이 있다.
3. 1. 자연 환경
미야마에는 농업용 저수지가 있다.[8] 미야마시모가와, 미야마미나미가와, 하라이가와 등의 강이 흐른다.3. 2. 유적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에서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걸친 "유키야마 유적"과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에 걸친 "이케노아타마 유적"이 발굴되었다[1][2]。두 유적 모두 국도 3호의 우회 도로인 남큐슈 서부 자동차도 건설 시 사업 주체인 건설성(현재의 국토교통성) 큐슈 지방 정비국이 사업 구역 내 문화재 조사를 의뢰받은 가고시마현 교육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발견되었다[1]。유키야마 유적은 자(字)역의 서부에 있는 자 유키야마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걸친 산포지 생활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3]。200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1]。이 유적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박편 첨두기, 세석인핵, 세석인, 박편[4], 조몬 시대의 마에히라식 토기, 요시다식 토기 및 석기[5], 고분 시대의 세이카와식 토기가 출토되었다[6]。
이케노아타마 유적은 자 이케노아타마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에 걸친 유적이다[2]。1991년 분포 조사에서 이케노아타마 일대에 유물이 흩어져 있음이 확인되어 1997년 조사가 시작되었다[7]。이 유적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흑요석 세석인이나 세석핵, 박편·쇄편[4], 조몬 시대의 마에히라식 토기, 요시다식 토기, 이시자카계 토기[5], 고분 시대의 세이카와식 토기 조각이나 석기 등 1만 2000점 이상이 출토되었다[6]。
4. 문화 및 관광
정유재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끌고 온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곳으로, 사쓰마야키(薩摩焼) 자기로 유명하다.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 43명이 시마즈 군에 포로로 잡혀 1603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로 이주하여 도자기 제조를 시작했다.[4] 이들은 마을 북서쪽에 다마야마 신사(일본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 있는 단군을 모셨던 신사]])를 세웠다.
1845년 가로 즈쇼 히로사토는 가마 제조를 지원하고 전매제도를 개혁하여 사쓰마야키 생산량 증대와 주민 생활 개선을 이끌었다. 그의 노력으로 사쓰마야키는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게이오 3년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사쓰마야키는 호평을 받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후 해외 수출이 활발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나에시로가와 출신들은 평민으로 격하되었고, 사족 계급 편입 요청도 각하되었다. 이후 도고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이 도고씨(東郷氏)를 사들여 일본식 성을 쓰기 시작했다.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조선이 일본의 침탈을 당하면서 차별 대우를 받았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식 성으로 개명하며 조선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심수관 가문만이 한국 성씨를 이어오고 있다.
1998년 10월 22일부터 10월 29일까지 히가시이치키 정에서 사쓰마야키 400주년 축제가 거행되었다.[16]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의 모룡산에서 채화된 불이 미야마로 옮겨져 옥산신사에 봉납된 후 공동 오름 가마(400년 가마)에 점화되었다.[16] 29일에는 한국 정부 등에서 기증한 "기념 석탑"의 제막식이 거행되었고, 일본 측에서는 오부치 게이조 내각총리대신, 대한민국 측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참석했다.[16]
미야마는 "사쓰마야키의 마을"로 알려진 관광지이다.[4] 2005년 기준 14개,[48] 2014년 기준 12개의 가마가 있었으며, 공방, 찻집, 음식점도 있다.[6] 가마는 감소 추세지만, 공예 공방 진출로 "공예의 마을"로의 발전이 기대된다.[49]
매년 11월에 사쓰마야키·잡화 등의 판매, 사쓰마야키 제작 체험 등이 열리는 "미야마 가마터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50]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중단되었고, 2020년부터는 그 대체 이벤트로 "미야마 CRAFTWEEK"가 개최되어, 이벤트는 2주 동안 개인이 주유하며 각 점포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51]
미야마의 주요 문화 시설은 다음과 같다.
- 히오키시 미야마 지구 공민관[39]
- 전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40]
- 미야마 도유관[41]




미야마의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 미야마 사쓰마야키 가마(사적)[28]
- 히오키시 미야마 타마야마 신사 전래 자료(유형 문화재(역사 자료))[29]
- 사쓰마 도자기 옛 가마 고혼마쓰 가마터 1기 (사적)
- 사쓰마 도자기 옛 가마 난킨 사라야마 가마터 2기 (사적)
- 도다이라 가마터 (고고 자료)



4. 1. 사쓰마야키
정유재란 때 사쓰마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곳으로, 사쓰마야키(薩摩焼) 자기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일본어)로 불렸다.1597년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 43명이 시마즈 군에 포로로 잡혀 1603년 나에시로가와로 이주하여 도자기 제조를 시작했다. 이들은 마을 북서쪽에 다마야마 신사(일본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 있는 단군을 모셨던 신사]])를 세웠다.
1673년 번주 시마즈 미쓰히사에 의해 영주의 별도 저택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보호와 통제가 강화되었다. 조선인 도공들은 도자기 제작 기술을 엄격히 통제받았고, 조선식 풍습을 유지해야 했다. 그 대가로 무사 신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845년 가로 즈쇼 히로사토는 가마 제조를 지원하고 전매제도를 개혁하여 사쓰마야키 생산량 증대와 주민 생활 개선을 이끌었다. 그의 노력으로 사쓰마야키는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나에시로가와 출신들은 평민으로 격하되었고, 사족 계급 편입 요청도 각하되었다. 이후 도고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이 도고씨(東郷氏)를 사들여 일본식 성을 쓰기 시작했다.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조선이 일본의 침탈을 당하면서 차별 대우를 받았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식 성으로 개명하며 조선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심수관 가문만이 한국 성씨를 이어오고 있다.
시마즈 시게히데 시대에는 묘다이가와야키에 대한 엄격한 검사가 이루어졌고, 합격품은 도쿠가와 가문이나 천황 등에게 진상되어 사쓰마야키의 명성을 높였다.
사쓰마 번의 가로였던 조소 히로사토는 덴포 4년 (1832년)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명에 따라 번정 개혁을 추진, 특히 1845년부터는 묘다이가와에 대한 지원 정책("묘다이가와 어취구")을 실시하여 사쓰마야키 증산과 촌민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게이오 3년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사쓰마야키는 호평을 받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후 해외 수출이 활발해졌다.
에도 시대 가마터로는 "모토야시키 가마터", "도다이라 가마터", "고혼마쓰 가마", "고테이시키 가마"(가고시마현 지정 사적[10]), "히가시우치도 가마", "우치코쿠 가마", "난킨 사라야마 가마터", "유키야마 유적" 등이 있다.
1998년 발굴된 도다이라 가마터에서는 1기의 가마와 작업장,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조선 도자기 형태였으나 점차 일본식으로 변화했다.[11] 출토품은 가고시마현립 매장 문화재 센터에 보관, 가고시마현 지정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12] 가마는 시모이주인 우체국 부근 공원으로 이전 보존, 히오키시 지정 고고 자료가 되었다.[32]
미야마는 "사쓰마야키의 마을"로 알려진 관광지이다.[4] 2005년 기준 14개,[48] 2014년 기준 12개의 가마가 있었으며, 공방, 찻집, 음식점도 있다.[6] 가마는 감소 추세지만, 공예 공방 진출로 "공예의 마을"로의 발전이 기대된다.[49]
4. 2. 문화 시설
- 히오키시 미야마 지구 공민관[39]
- 전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40]
- 미야마 도유관[41]
미야마는 사쓰마야키의 대표적인 가마터 중 하나이며 '사쓰마야키의 마을'로 알려져 관광지가 되었다.[4] 근세에는 항아리, 단지, 절구, 토병이 제조되었고, 에도 시대 말기에는 수출용 금란수 사쓰마와 묘다이카와 인형이라고 불리는 소성 인형이 교토에서 인기를 끌었다.
'히가시이치키 정지'에 따르면, 미야마에는 2005년 현재 14개의 사쓰마야키 가마가 있었으며, 2014년 히오키시의 팸플릿 '가마터 길 산책'에 따르면 미야마에 소재한 가마는 12곳이다. 가마 목록은 다음과 같다.[48]
- 가츠라기 도예
- 아라키 도요
- 타키가와 토엔
- 엔부 토엔
- 침수관 가마
- 주로 가마
- 삿슈 젠에이 도샤
- 미래 사쓰마 케이스케 가마
- 사타로 가마
- 히이로 가마
- 센요 이와
- 신사이 가마
가마 외에도 공방과 찻집, 음식점이 있다.[6]
가마는 감소 추세에 있지만, 히오키시의 '제2차 종합 계획'에 따르면 목제품과 유리 제품을 취급하는 공방이 진출하고 있으며, '공예의 마을'로서의 전개가 기대되고 있다.[49]
4. 3. 축제
1998년 10월 22일부터 10월 29일까지 히가시이치키 정에서 사쓰마야키 400주년 축제가 거행되었다[16].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의 모룡산에서 채화된 불이 미야마로 옮겨져 옥산신사에 봉납된 후 공동 오름 가마(400년 가마)에 점화되었다[16].29일에는 한국 정부 등에서 기증한 "기념 석탑"의 제막식이 거행되었고, 일본 측에서는 오부치 게이조 내각총리대신, 대한민국 측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참석했다[16]. 또한 사쓰마야키 400주년을 기념하여 우정성에 의해 "불 계량 찻잔"과 "소매 그림 봉황 문 광구 꽃병"을 의장한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16].
미야마 동부에 있는 미야마 도유칸은 1996년 5월 8일에 "미야마 사쓰마야키의 마을 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정비된 체험형 레크리에이션 시설로, 사쓰마야키의 도예 체험을 할 수 있다[48].
매년 11월에 사쓰마야키·잡화 등의 판매, 사쓰마야키 제작 체험 등이 열리는 "미야마 가마터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2019년까지 34회 개최되었다[50]. 그러나, 같은 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중단되었고, 2020년부터는 그 대체 이벤트로 "미야마 CRAFTWEEK"가 개최되어, 이벤트는 2주 동안 개인이 주유하며 각 점포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51].
4. 4. 문화재
시마즈 요시히로 이후 가마 산업의 중심지였던 묘대천은 사쓰마 번의 보호 정책 아래 박평의와 심당길 양가를 중심으로 도업이 번성했다.[13][14] 특히 심당길은 뛰어난 기술로 도장의 주취역으로 임명되어 묘대천 도업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15] 묘대천에서는 항아리, 단지, 절구 등 대형 일용 도기뿐만 아니라, 번주용 어용품인 백사쓰마라고 불리는 고급 사쓰마야키도 생산되었다.[16][17]

메이와 원년(1771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는 묘대천 주민들에게 조선 옷 착용과 조선어 사용을 명했다.[18] 이는 조선 문화가 옅어짐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 결과 묘대천 주민들은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언어, 복장 등 모든 풍속 습관이 조선식이었으며, 삼국명승도회에는 조선식 복장을 한 주민들의 그림이 실려 있다.[19][20]
시마즈 요시히로는 향수병에 걸린 묘대천 주민들을 위해 단군을 모시는 옥산신사를 건립했다.[21] 옥산신사에서는 조선풍의 신무가 전해 내려왔으며, 번주 앞에서나 제례 때 조선 춤으로 선보였다.[22]
간에이 3년(1626년)에는 찻집이 설치되어 번주가 휴식을 취하며 소성물을 구경했다.[23] 간에이 연간에는 장뇌 제조 면허를 받은 정종관이 히가시이치키정 이사쿠타 사람들에게 제법을 전했다.[24] 엔포 3년(1675년)에는 이쥬인정 시모야구치에 있던 사쓰마 번의 외성제에 의한 이쥬인 향의 지두 가옥이 묘대천으로 이전되었다.[25] 조쿄 2년(1685년)에는 이쥬인 향에서 독립하여 관리 등이 설치되고 무사 상당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26][27]
호에이 원년(1704년)에는 토지 부족으로 160명의 주민이 가노야시로 이주했다.[28] 교호 4년(1719년) 묘대천은 다시 이쥬인 향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29] 교호 7년(1722년)에는 이쥬인 중으로 취급되어 씨 글자 사용이 허용되었지만, 조선식 씨 글자를 선택하도록 지정되었다.[30]
사쓰마 번의 가로였던 조소 히로사토는 덴포 개혁의 일환으로 쇠약해진 묘대천에 "묘대천 어취구" 정책을 실시했다.[31] 조소는 무라타 도겐에게 명하여 가마 건설 등을 통해 사쓰마야키 증산과 묘대천 주민들의 생활 개선에 힘썼다.[32][33][34] 묘대천 주민들은 조소와 무라타를 칭송하며 초혼비를 건립했다.[35]
게이오 3년(1867년), 사쓰마 번은 파리 만국 박람회에 묘대천의 박정관에게 금수대화병 제작을 명했다.[36][37] 출품된 사쓰마야키는 호평을 받아 세계적인 사쓰마야키 붐을 일으켰고, 이후 해외 수출이 활발해졌다.[38][39]
에도 시대 경 가마터로는 모토야시키 가마터,[40] 도다이라 가마터,[41][42] 고혼마쓰 가마,[43] 고테이시키 가마(가고시마현 지정 사적)[10][44], 히가시우치도 가마,[45] 우치코쿠 가마,[46] 난킨 사라야마 가마터,[47] 유키야마 유적이 있다.[48]
도다이라 가마터는 1998년 발굴 조사에서 1기의 가마가 발굴되었다.[49] 1620년대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에는 조선 도자기 기형을 한 도기가 제작되었으나 점차 일본식으로 변화했다.[11] 출토품은 가고시마현립 매장 문화재 센터에 보관되어 있으며, 가고시마현 지정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12] 가마는 시모이주인 우체국 부근 공원으로 이전 보존되었고,[50] 히오키시 지정 고고 자료가 되었다.[32]
- 미야마 사쓰마야키 가마(사적)[28]
- : '어정식 가마'라고 불리는 사쓰마 번의 어용 가마로, 흰 사쓰마야키, 잡색 유약, 염부 백자가 구워졌다.[28]
- 히오키시 미야마 타마야마 신사 전래 자료(유형 문화재(역사 자료))[29]
- : 타마야마 신사에 전해지는 제사 자료로, 사쓰마 번의 이화 정책에 따른 조선 습속을 현재에 전하고 있다.[29]
- 사쓰마 도자기 옛 가마 고혼마쓰 가마터 1기 (사적)
- 사쓰마 도자기 옛 가마 난킨 사라야마 가마터 2기 (사적)
- 도다이라 가마터 (고고 자료)
미야마 이외 지역에 보관·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 도다이라 가마터 출토품(가고시마현 지정 유형 문화재)
- : 도다이라 가마터에서 출토된 17세기 도자기 제품 155점.[12] 기리시마시 고쿠부 우에노바라 조몬의 숲의 가고시마현립 매장 문화재 센터에 소장되어 있다.[12]
5. 교통
미야마 지역을 운행하는 대중교통에는 가고시마 교통과 히오키시 커뮤니티 버스가 있다.[55]
5. 1. 도로
미야마의 서부를 남큐슈 서부 순환 자동차도 (국도 3호선 우회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가고시마현도 24호 가고시마히가시이치키선이 미야마의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간다. 남큐슈 서부 순환 자동차도는 2002년 4월 6일에 이치키 나들목에서 이주인 나들목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으며[53], 미야마에는 미야마 주차장이 설치되었다. 미야마 주차장의 디자인은 미야마의 특산품인 사쓰마야키의 파편이 박혀 있다[53]。
2020년 9월 6일에는 미야마의 중심부를 우회하는 가고시마현도 24호 가고시마히가시이치키선의 "미야마 바이패스"가 전선 개통되었다[54]。
;일반 국도
- 남큐슈 서부 순환 자동차도 (국도 3호선 우회 도로, 가고시마 도로)
- : 미야마 나들목, 미야마 주차장, 미야마 본선 요금소는 인접한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 겐지라와키에 위치한다.
- 국도 3호선
;주요 지방도
- 가고시마현도 24호 가고시마히가시이치키선
;광역 농도
- 히오키 광역 농도
5. 2. 대중교통
| - | 미야마 | 미야마상 | 유아이 학원 | 마키노카도 입구 | 미야마시타미나미 |
6. 관련 인물
- 도고 시게노리 (외교관, 외무대신, 귀족원 의원):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출생.[60]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온 조선 도공의 후손이다.[61] 도쿄 제국대학 독일 문학과를 졸업하고 외교관이 되었다.[60]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도조 내각의 외무대신이었으나, 대동아성 설치에 반대하여 사임했다.[60]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을 맡아 종전을 맞이했지만,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지명되어 스모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1950년 7월 23일 미국 육군 병원 (현재의 세인트 루카 국제 병원)에서 옥사했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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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명승도회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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