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틀로프 프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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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틀로프 프레게는 독일의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로, 1848년 비스마르에서 태어나 1925년 바트클라이넨에서 사망했다. 그는 현대 논리학의 기초를 다지고 분석 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하고, 언어 철학에서 의미와 지시체, 개념과 대상의 구분을 제시했다. 주요 저서로는 《개념 표기법》, 《산술의 기초》, 《산술의 기본 법칙》 등이 있으며, 논리주의를 주창하며 수학을 논리로 환원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공리계는 러셀의 역설로 인해 수정이 필요했고, 말년에는 파시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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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로프 프레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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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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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고틀로프 프레게 |
출생 | 1848년 11월 8일 |
출생지 | [[파일:Flagge Großherzogtümer Mecklenburg.svg|border|25px]]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비스마르() |
사망 | 1925년 7월 26일 (향년 76세) |
사망지 | [[파일:Flagge Großherzogtümer Mecklenburg.svg|border|25px]]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 Bad Kleinen() |
학력 | |
출신 대학 | 예나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박사 학위 | 괴팅겐 대학교 (1873년) |
교수 자격 | 예나 대학교 (1874년) |
박사 지도교수 |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율리우스 셰링() |
학문 지도교수 | 알프레트 클렙슈 |
경력 | |
소속 기관 | 예나 대학교 |
주목할 만한 제자 | 루돌프 카르나프 |
사상 | |
학파 | 분석철학 논리적 객관주의 논리주의 (수학) 초월론적 관념론 (1891년 이전) 실재론 (1891년 이후) |
주요 관심사 | 수학 철학 수리논리학 언어 철학 |
주요 아이디어 | Principle of compositionality 일계 술어 논리 Quantification theory (양화 이론) Predicate calculus 논리주의 (수학) 지시체와 의미 Concept and object (개념과 대상) Third Realm Mediated reference theory Descriptivist theory of names Redundancy theory of truth Set-theoretic definition of natural numbers (자연수의 집합론적 정의) 흄의 원리 프레게의 정리 Frege–Geach problem (프레게-기치 문제) law of trichotomy technique for binding arguments 기호논리학 술어 논리 |
영향을 준 사상가 | 쿠노 피셔、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헤르만 로체、오토 리프만、베노 케리、에른스트 아베、데이비드 흄、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베르나르트 볼차노 |
영향을 받은 사상가 | 자크 라캉, 자크-알랭 밀레르,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루돌프 카르나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이클 더밋, 에드문트 후설, 게르솜 숄렘, 칼 포퍼 |
주요 저서 | |
학위 논문 | |
박사 논문 제목 | Ueber eine geometrische Darstellung der imaginären Gebilde in der Ebene (평면에서 허수 구조의 기하학적 표현에 관하여) |
박사 논문 URL | 박사 논문 |
박사 논문 년도 | 1873년 |
교수 자격 논문 제목 | Rechnungsmethoden, die sich auf eine Erweiterung des Größenbegriffes gründen (크기 개념의 확장에 기반한 계산 방법) |
교수 자격 논문 URL | 교수 자격 논문 |
교수 자격 논문 년도 | 1874년 |
2. 생애
1848년 11월 8일 비스마르Wismarde에서 태어났다.[33] 1869년 비스마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4학기를 공부하였고, 1871년 괴팅겐 대학교로 전학하여 1873년 12월 사영기하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74년 예나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마치고 수학 개인 강사로 일했다.
1887년 3월 14일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소피아 아나 리제베르크(Margarete Katharina Sophia Anna Liesebergde, 1856년 2월 15일 ~ 1904년 6월 25일)와 결혼하였다.[33]
1879년 예나 대학교 조교수(Ausserordentlicher Professorde)로 임용되었고, 같은 해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한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de)을 출판하였다.[33] 1884년에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Die Grundlagen der Arithmetik: eine logisch-mathematische Untersuchung über den Begriff der Zahlde)를 출판하였다.[33]
1893년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 begriffsschriftlich abgeleitetde) 1권을 출판하였고, 1896년 예나 대학교 정교수(Ordentlicher Honorarprofessorde)로 승진하였다.[33] 1903년에는 《산술의 기본 법칙》 2권을 출판하였다.[33]
1917년 또는 1918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발견된 일기에서 파시즘 성향을 드러냈으나, 실제로는 많은 유대인들과 가까이 지냈다.[19] 1925년 7월 26일 바트클라이넨Bad Kleinende에서 사망하였다.[33]
연도 | 사건 |
---|---|
1848년 | 비스마르 출생 |
1854년 | 비스마르 김나지움 진학 |
1866년 | 아버지 카를 알렉산더 사망 |
1869년 | 비스마르 김나지움 졸업, 예나 대학교 진학 |
1871년 | 예나 대학교 졸업, 괴팅겐 대학교 이동 |
1873년 | 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874년 | 예나 대학교 수학과 사강사 채용 |
1879년 | 《개념 표기법》 간행, 예나 대학교 강사 승진 |
1884년 | 《산술의 기초》 간행 |
1885년 | 예나 의학·자연과학 협회 "산술의 형식적 이론에 대하여" 강연 |
1887년 | 마르가레테 리제베르크와 결혼 |
1891년 | 예나 의학·자연과학 협회 "함수와 개념" 강연 |
1892년 | 논문 "의미와 뜻에 관하여", "개념과 대상에 관하여" 발표 |
1893년 | 《산술의 기본 법칙》 제1권 간행 |
1895년 | 뤼베크 독일 자연과학자·의학자 대회 강연, 다비트 힐베르트와 만남 |
1896년 | 예나 대학교 정명예교수 승진 |
1898년 | 어머니 아우구스테 비아로블로츠키 사망 |
1899년 | 프레게와 페아노 서신 교환 Rivista di matematica 발표 |
1900년경 | 알프레트를 양자로 맞이함 |
1900년 | 파리 국제 철학 학회 초청 강연 거절 |
1902년 | 러셀로부터 "러셀의 역설" 편지 받음 |
1903년 | 《산술의 기본 법칙》 제2권 간행, 추밀 고문 칭호 수여 |
1905년 | 아내 마르가레테 사망 |
1911년 | 비트겐슈타인 프레게 방문 |
1912년 | 케임브리지 수학 회의 초청 강연 거절 |
1917년 | 비트겐슈타인 빈 초대 거절 |
1918년 | 예나 대학교 퇴직, 바트클라이넨 은퇴 |
1925년 | 바트클라이넨 사망 |
2. 1. 유년 시절 (1848-1869)
1848년 11월 8일, 당시 독일 통치 하에 있던 비스마르에서 태어났다.[33] 아버지는 카를 알렉산더 프레게로 여자 고등학교의 공동 설립자이자 교장이었다. 어머니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소피 프레게는 남편 사후 학교를 이끌었다.[10] 프레게는 루터교 신자였다.[11]어린 시절, 프레게는 아버지의 저서를 통해 언어의 구조와 논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아버지가 쓴 ''Hülfsbuch zum Unterrichte in der deutschen Sprache für Kinder von 9 bis 13 Jahren''(9세에서 13세 어린이를 위한 독일어 교육 보조 교재)는 언어의 구조와 논리를 다루었다.
1869년 비스마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김나지움 교사 구스타프 아돌프 레오 작세의 권유로 예나 대학교에 입학했다.[12][13]
2. 2. 대학 시절 (1869-1874)
프레게는 1869년 봄에 북독일 연방 시민 자격으로 예나 대학교에 입학했다. 4학기 동안 약 20개의 강의를 들었는데, 대부분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스승은 에른스트 카를 아베(1840–1905; 물리학자, 수학자, 발명가)였다. 아베는 중력 이론, 갈바니즘과 전자기학, 복소해석학, 복소변수 함수 이론, 물리학의 응용, 역학의 일부 분야, 고체 역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 아베는 프레게에게 단순히 스승 이상의 존재였는데,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고, 광학 제조업체 칼 자이스 AG의 대표로서 프레게의 경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33] 프레게가 졸업한 후, 그들은 더욱 긴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그의 다른 주목할 만한 대학 스승으로는 크리스티안 필립 카를 스넬(1806–86; 과목: 기하학에서 무한소 해석의 사용, 평면의 해석 기하학, 해석 역학, 광학, 역학의 물리적 기초), 헤르만 샤퍼(1824–1900; 해석 기하학, 응용 물리학, 대수적 해석, 전신 및 기타 전자 기기에 관하여), 철학자 쿠노 피셔(1824–1907; 칸트 및 비판 철학)가 있었다.
1871년부터 프레게는 독일어권 지역의 수학을 선도하는 대학인 괴팅겐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는데, 그곳에서 루돌프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클레브쉬(1833–72; 해석 기하학),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율리우스 셰링(1824–97; 함수론),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1804–91; 물리 연구, 응용 물리학), 에두아르트 리케(1845–1915; 전기 이론), 헤르만 로체(1817–81; 종교 철학)의 강의를 들었다. 프레게가 성숙한 후의 많은 철학적 교리는 로체와 유사하며, 로체의 강의를 들은 것이 프레게의 견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이 있어 왔다.
1873년, 프레게는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율리우스 셰링 아래에서 "Ueber eine geometrische Darstellung der imaginären Gebilde in der Ebene"("평면에서 허수 형태의 기하학적 표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33] 이 논문에서 그는 사영 기하학의 무한히 먼 (허수) 점의 수학적 해석과 같은 기하학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874년, 하빌리타치온을 마치고 예나 대학교에서 수학 개인 강사로 일했다.
2. 3. 결혼과 가정
1887년 3월 14일에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소피아 아나 리제베르크(Margarete Katharina Sophia Anna Liesebergde|1856년 2월 15일 ~ 1904년 6월 25일)와 결혼하였다.[33] 프레게 부부는 슬하에 최소 두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후 아들 알프레트를 입양하였다.2. 4. 예나 대학교 교수 시절 (1879-1918)
1879년에 예나 대학교의 조교수(Ausserordentlicher Professorde)로 임용되었다.[33] 같은 해에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de)을 출판하였고, 이 책에서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하였다.[33] 1884년에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Die Grundlagen der Arithmetik: eine logisch-mathematische Untersuchung über den Begriff der Zahlde)를 출판하여 수의 개념에 대한 심리주의적 정의를 비판하였다.[33]1893년에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 begriffsschriftlich abgeleitetde) 1권을 출판하였고,[33] 1896년에 예나 대학교의 정교수(Ordentlicher Honorarprofessorde)로 승진하였다.[33] 1903년에 《산술의 기본 법칙》 2권을 출판하였다.[33]
2. 5. 은퇴와 말년 (1918-1925)
1917년 또는 1918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33] 은퇴 후 발견된 당시의 일기에서 그는 의회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칭송하는 등 파시즘 성향을 드러냈으나, 실제로는 많은 유대인들과 가까이 지냈다.[19] 1918–19년 독일 혁명 이후 그의 정치적 견해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20] 76세의 나이로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일기에 의회 제도,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가톨릭교도, 프랑스인, 그리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가능하다면 독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견을 담았다.[20] 프레게는 "한때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했고 비스마르크의 팬이었다"고 고백했지만, 이후에는 루덴도르프 장군을 지지했다.[21] 1924년 5월 5일자 일기에 프레게는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Deutschlands Erneuerung''(독일의 부활)에 실린 아돌프 히틀러를 칭찬하는 기사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21] 프레게는 독일 유대인들이 "사라지거나, 더 좋게는 독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기록했다.[21] 그 시대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쓰여졌다.[22] 일기에는 보편적 선거권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22] 프레게는 실제 생활에서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의 제자 중에는 그의 가르침을 매우 높이 평가했던 게르숌 숄렘이 있었고,[23][24] 그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버트런드 러셀에게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가도록 권유했다.[25] 1924년 일기는 사후인 1994년에 출판되었다.[26] 1925년 7월 26일에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작은 마을 바트클라이넨(Bad Kleinen|바트클라이넨de)에서 사망하였다.[33]3. 업적
프레게는 교육과 초기의 수학적 연구에서 주로 기하학에 집중했지만, 곧 그의 연구는 논리학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개념 표기법》은 논리학 역사에서 전환점을 표시했다. ''개념 표기법''은 함수와 변수에 대한 엄격한 처리를 포함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15] 프레게의 목표는 수학이 논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는 다른 기술을 고안했지만 스토아 학파의 명제 논리에 매우 가까워졌다.
프레게는 공리화된 술어 논리를 발명했는데, 이는 주로 양화 변수를 발명한 덕분이며, 이는 결국 수학과 논리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다중 일반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전의 논리는 '그리고', '또는', '만약... 그렇다면...', '아니다', '어떤' 및 '모든'과 같은 논리 상수를 다루었지만, 이러한 연산의 반복, 특히 "어떤"과 "모든"은 거의 이해되지 않았다.
유클리드 정리와 같은 수학적 명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은 그러한 추론을 표현할 수 있다.[16]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알프레드 타르스키의 진리 이론은 궁극적으로 프레게에 기인한다.
프레게가 밝힌 목적 중 하나는 진정으로 논리적인 추론의 원리를 분리하여 수학적 증명의 적절한 표현에서 "직관"에 호소하는 부분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직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분리되어 공리로서 별도로 표현되어야 했다. 프레게의 더 큰 목적은 산술이 논리의 한 분야라는 논리주의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기하학과 달리 산술은 "직관"에 기반을 두지 않고, 비논리적 공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1879년 ''개념 표기법''에서 삼분법의 법칙의 일반화된 형태와 같은 중요한 예비 정리가 프레게가 순수 논리로 이해한 것 안에서 도출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산술의 기초''에서 비기호적인 용어로 공식화되었다. 이후 그의 ''산술의 기본 법칙''에서 프레게는 그의 기호법을 사용하여 산술의 모든 법칙을 그가 논리적이라고 주장한 공리에서 도출하려고 시도했다. 이 공리들 대부분은 그의 ''개념 표기법''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변경이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1903년에 ''Grundgesetze'' 2권이 출판되려 할 때 프레게에게 편지를 보내 프레게의 기본 법칙 V에서 러셀의 역설을 도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레게는 2권에 서둘러 부록을 써서 모순을 인정하고, 기본 법칙 V를 수정하여 이를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프레게가 제안한 해결책은 담론의 우주에 객체가 하나만 있음을 함축하는 것으로 밝혀져 무가치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Grundgesetze''의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이 다른 방식으로 구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지 불로스에 의해 기본 법칙 V를 약화시키는 방식이 제안되었고, 흄의 원리로 대체될 수 있다는 프레게의 정리도 발표되었다. 또한 2차 논리는 예언적 2차 논리로 약화될 수 있다.
프레게의 논리 연구는 1903년 러셀이 수학의 원리''에서 프레게와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부록을 썼을 때까지 국제적인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프레게가 사용한 도해 기호법은 이전의 것이 없었고 그 이후로 모방자도 없었다.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3권)가 1910–13년에 나타날 때까지, 수학적 논리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 방식은 조지 불과 에른스트 슈뢰더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논리적 아이디어는 그의 학생 루돌프 카르나프 및 버트런드 러셀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을 통해 퍼져나갔다.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 논리학에 혁명을 일으켜, 수학의 철학인 논리주의를 제창했다.[32] 혁명적인 『개념 표기』는 1879년에 출판되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전통 논리학을 일소하고 논리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수학에서 정착된 ∀(임의의)나 ∃(존재)와 같은 양화는 프레게의 업적에 기초한다.
프레게는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의 공리화를 최초로 행한 인물이며, 특히 술어 논리는 그 자체가 프레게의 발명이다. 그러나 그 지나친 선진성, 독창성 때문에 프레게의 동시대에는 그 의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의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주세페 페아노나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한 바가 크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에드문트 후설, 루돌프 카르나프는 프레게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철학자들이다.
또한 프레게는 언어 철학과 분석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의미와 뜻에 관하여"에서의 의미와 뜻의 구분, 개념과 대상과의 구분 등으로 알려져 있다.
프레게는 논리주의의 첫 번째 주요 논객이었으며, 그의 『산술의 기본 법칙』은 자연수론 및 실수론을 논리에서 이끌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러셀이 『산술의 기본 법칙』의 공리계가 러셀의 역설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여 지적했기 때문에, 2권의 보충에 이 모순에 대해 인정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프레게는 모순을 회피하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1938년에 스타니스와프 레시니에프스키에 의해 프레게의 수정안에도 결함이 있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프레게의 체계에 모순이 생긴 원인은 오랫동안 그의 제5법칙에 있었다. 그러나 찰스 파슨스, 조지 부로스, 리처드 헥 등에 의해 제5법칙에 호소하지 않고도, "흄의 원리"에서 모순을 낳는 자연수론이 도출 가능하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프레게의 논리주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3. 1. 《개념 표기법》 (1879)

1879년에 출판된 책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de)에서 프레게는 기존에 알려진 명제 논리를 술어 논리로 확장하였고,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를 표현하는 형식적 언어를 고안하였다. 프레게의 표기법은 다음과 같다.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의 중요한 핵심이 되는 양화(quantification)가 바로 술어논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안한 프레게의 개념이다.[15] 그의 업적은 당시에는 거의 인정받지 않았으나, 그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에드문트 후설도 프레게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상 프레게는 공리화된 술어 논리를 발명했는데, 이는 주로 양화 변수를 발명한 덕분이며, 이는 결국 수학과 논리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다중 일반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전의 논리는 논리 상수인 '그리고', '또는', '만약... 그렇다면...', '아니다', '어떤' 및 '모든'을 다루었지만, 이러한 연산의 반복, 특히 "어떤"과 "모든"은 거의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소년은 어떤 소녀를 사랑한다"와 "어떤 소녀는 모든 소년의 사랑을 받는다"와 같은 문장의 구별조차 매우 인위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반면, 프레게의 형식주의는 "모든 소년이 어떤 소년을 사랑하는 어떤 소녀를 사랑하는 어떤 소녀" 및 유사한 문장의 서로 다른 의미를, 예를 들어 "모든 소년은 어리석다"와 같은 그의 처리 방식과 완전히 병행하여 표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자주 언급되는 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유클리드 정리와 같은 수학적 명제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한히 많은 소수가 있다는 수론의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은 그러한 추론을 표현할 수 있다.[16]
3. 2. 《산술의 기초》 (1884)
프레게는 수학이 논리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의 초기 주창자 중 한 명이었다. 1884년에 출판된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Die Grundlagen der Arithmetik|eine logisch-mathematische Untersuchung über den Begriff der Zahlde)에서 기존의 심리주의적 수의 개념을 비판하였고, 수의 개념이 종합적(synthetic영어) 개념이 아니라 해석적(analytic영어)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3. 3. 《산술의 기본 법칙》 (1893, 1903)
논리주의에서 산술을 유도하려는 시도를 담은 저서이다. 1권 출판 후 버트런드 러셀이 러셀의 역설을 지적하여, 프레게는 2권에 이 사실을 인정하는 부록을 추가했다.[32] 최근에는 프레게의 논리주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 begriffsschriftlich abgeleitet|산술의 기본 법칙,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됨de) (1권 1893년, 2권 1903년)에서 프레게는 논리학으로부터 산술을 유도하려고 시도하였다. 1판이 출판된 뒤 버트런드 러셀은 프레게의 공리계가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프레게는 이미 완성된 2권에 이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부록을 추가하였다.
프레게가 제안한 해결책은 이후 담론의 우주에 객체가 하나만 있음을 함축하는 것으로 밝혀져 무가치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Grundgesetze''의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이 다른 방식으로 구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기본 법칙 V는 다른 방식으로 약화될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방식은 조지 불로스에 의한 것이다.
- 기본 법칙 V는 간단히 흄의 원리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결과는 프레게의 정리라고 불린다.
- 2차 논리로 알려진 프레게의 논리는 소위 예언적 2차 논리로 약화될 수 있다.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은 자연수론 및 실수론을 논리에서 이끌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러셀이 『산술의 기본 법칙』의 공리계가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 (소위 러셀의 역설)을 발견하여 지적했기 때문에, 2권의 보충에 이 모순에 대해 인정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3. 4. 언어철학
프레게는 언어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특히 고유명사의 뜻과 지시체(Sinn und Bedeutungde) 개념을 제시했다.[15]1892년 논문 〈감과 지시체에 대하여〉에서 프레게는 의미에 대한 기존의 설명, 즉 표현이 단 하나의 특징(지시체)을 가진다고 본 것과 달리, 표현에는 감(Sinn)과 지시체(Bedeutung, "의미" 또는 "지시"로도 번역됨)라는 두 가지 의미 측면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고유명사의 ''지시체''(Bedeutung)는 주어진 표현(예: "톰")이 단순히 그 이름을 가진 개체(톰이라는 이름의 사람)를 지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게는 명제가 그 진리값과 지시적 관계를 맺는다고도 주장했는데, 이는 진술이 그것이 가지는 진리값을 "지시"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완전한 문장의 ''감''(Sinn)은 그것이 표현하는 생각이다. 표현의 감은 지시 대상의 "제시 방식"이며, 동일한 지시 대상에 대해 여러 가지 제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Charles Philip Arthur George Mountbatten-Windsor"라는 이름과 "the King of the United Kingdom"이라는 함수 표현은 동일한 ''지시체'' (찰스 3세 국왕)를 갖는다. 그러나 "United Kingdom"이라는 단어의 ''감''은 후자 표현의 감의 일부이지만, 찰스 국왕의 "전체 이름"이 갖는 감의 일부는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러셀의 논문 "지시에 관하여"에서 특히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솔 크립키의 "명명과 필연성" 강의를 통해 현재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4. 주요 저서
제목 | 연도 | 비고 |
---|---|---|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 | 1879 | 독일어 원문 |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 | 1884 | |
함수와 개념 | 1891 | 1891년 1월 9일 예나 의학 및 자연 과학 협회 강연 |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 | 1892 | 철학 및 철학적 비판 저널 100권, 25-50쪽에 게재. |
개념과 대상에 관하여 | 1892 | 과학 철학 분기별 저널 16권, 192-205쪽에 게재. |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 | 1893 | 독일어 원문 |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2권) | 1903 | |
기하학의 기초에 관하여 | 1903 | 독일 수학자 연합 연례 보고 12권, 368-375쪽에 게재. |
함수란 무엇인가? | 1904 | 루트비히 볼츠만 탄생 60주년 기념 논문집, 656–666쪽에 게재. |
사고: 논리적 연구 | 1918 | 독일 관념론 철학 기고 1권, 58-77쪽에 게재, 사후 출판. |
부정 | 1918 | 독일 관념론 철학 기고 1권, 143-157쪽에 게재, 사후 출판. |
복합 사고 | 1923 | 독일 관념론 철학 기고 3권, 36-51쪽에 게재, 사후 출판. |
마지막 세 논문(〈사고〉, 〈부정〉, 〈복합 사고〉)은 《논리 연구》(Logische Untersuchungende)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계획이었으나, 프레게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5. 영향
고대 그리스(그리스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 논리학에 혁명을 일으켜, 수학의 철학인 "논리주의"를 제창했다.[32] 혁명적인 『개념 표기』(''Begriffsschrift'')는 1879년에 출판되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전통 논리학을 일소하고 논리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수학에서 정착된 ∀(임의의)나 ∃(존재)와 같은 양화는 프레게의 업적에 기초한다.
프레게는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의 공리화를 최초로 행한 인물이며, 특히 술어 논리는 그 자체가 프레게의 발명이다(실제로는 개념 표기는 고계 논리의 체계이며, 람다 계산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선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지나친 선진성, 독창성 때문에 프레게의 동시대에는 그 의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의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주세페 페아노나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한 바가 크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에드문트 후설은 프레게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철학자이다. 루돌프 카르나프는 프레게의 수업에 참석했으며, 그의 (카르나프에 따르면 수줍어하는) 성격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또한 프레게는 언어 철학과 분석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의미와 뜻에 관하여"에서의 의미 (Bedeutung|베도이퉁de, meaning, reference|미닝, 레퍼런스영어)와 뜻 (Sinn|진de, sense|센스영어)의 구분, 개념과 대상과의 구분 등으로 알려져 있다.
프레게는 수학은 논리에 귀착될 수 있다고 하는 논리주의의 첫 번째 주요 논객이기도 했으며, 그의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은 자연수론 및 실수론을 논리에서 이끌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러셀이 『산술의 기본 법칙』의 공리계가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 (소위 러셀의 역설)을 발견하여 지적했기 때문에, 2권의 보충에 이 모순에 대해 인정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프레게 자신은 어떻게든 모순을 회피하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프레게의 수정안에도 결함이 있다는 것이 1938년에 스타니스와프 레시니에프스키에 의해 제시되었다.
프레게의 체계에 모순이 생긴 원인은 오랫동안 그의 제5법칙에 귀결되어 왔다. 그러나 이후 찰스 파슨스, 조지 부로스, 리처드 헥 등에 의해 제5법칙에 호소하지 않고도, 소위 "흄의 원리"에서 모순을 낳는 자연수론이 도출 가능하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프레게의 논리주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6. 비판과 논란
더밋은 프레게 연구자로, 프레게의 일기를 읽고 자신의 영웅이 반유대주의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했다.[19] 1918–19년 독일 혁명 이후 프레게의 정치적 견해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그는 76세의 나이로 생애 마지막 해에 쓴 일기에서 의회 제도,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가톨릭교도, 프랑스인,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담았다. 특히 유대인에 대해서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가능하다면 독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0]
프레게는 한때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했고 비스마르크의 팬이었다고 고백했지만, 이후에는 루덴도르프 장군을 지지했다. 1924년 5월 5일자 일기에서 프레게는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Deutschlands Erneuerung''(독일의 부활)에 실린 아돌프 히틀러를 칭찬하는 기사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21] 그는 독일 유대인들이 "사라지거나, 더 좋게는 독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기록했다.[21]
프레게는 보편적 선거권과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그는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게르숌 숄렘이 있었고,[23][2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버트런드 러셀에게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가도록 권유하기도 했다.[25] 프레게의 1924년 일기는 사후인 1994년에 출판되었다.[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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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ism in Metaphy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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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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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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