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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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란은 타림 분지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 또는 국가로, 기원전 19세기 경의 미라가 발견되는 등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세기 흉노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월지 세력권에 속했으며, 이후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등 복잡한 정세를 겪었다. 2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간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지만, 448년 독립 왕국으로서 멸망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문서들은 당시 누란의 국정과 사회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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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원어 이름 (페르시아어-인도어) | 𐨐𐨿𐨪𐨆𐨪𐨩𐨁𐨣 (Krorayina) |
| 다른 이름 | 크로란 |
| 중국어 | 樓蘭 (간체: 楼兰, 병음: Lóulán) |
| 위구르어 | كىروران (Kroran) |
![]() | |
| 위치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 |
| 유형 | 정착지 |
| 상태 | 폐허 |
| 역사 | |
| 건설 | 알 수 없음 |
| 버려짐 | 알 수 없음 |
| 시대 | 알 수 없음 |
| 문화 | 알 수 없음 |
| 점령자 | 알 수 없음 |
| 사건 | 알 수 없음 |
| 고고학 | |
| 발굴 | 알 수 없음 |
| 고고학자 | 알 수 없음 |
| 기타 정보 | |
| 소유 | 알 수 없음 |
| 관리 | 알 수 없음 |
| 대중 접근 | 알 수 없음 |
| 비고 | 폐허 상태임 |
| 정보 (한국어) | |
| 상태 |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No.3-211)로 지정됨 |
2. 역사
wikitext
누란이라는 도시 또는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며, 누란의 미라는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9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문헌상 '누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흉노의 지배자 묵돌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다. 묵돌선우는 이 편지에서 월씨를 격파하고 누란, 우손, 호게 및 인근 26개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했다. 이 편지는 기원전 176년에 보내졌으므로, 누란은 적어도 그 이전에 형성되어 월씨의 세력권에 있다가 기원전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 사이에 동박도위를 설치하고 누란을 포함한 서역 국가들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하서회랑에 군사를 주둔시켜 교역을 통제했다.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 즉위 후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장건이 서역으로 파견되어 흉노를 견제하려 했으나, 당시 흉노의 지배력이 강해 실패했다.
기원전 127년과 121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 본거지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서역 경영을 본격화했다. 기원전 115년 하서사군 설치는 한나라의 서역 진출의 시작이었다. 서역 교통로를 장악한 한나라는 서역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했으나, 한나라 사람들과 서역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빈번해지면서 반한 감정이 커졌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나라의 진출을 꺼려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했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조파노와 왕회에게 명하여 누란과 고사에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누란은 조파노가 이끈 700기병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고, 국왕은 사로잡혔다. 누란은 왕자 한 명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 복속했다. 그러나 흉노 역시 누란을 공격하여, 누란은 흉노에게도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한나라와 흉노의 서역 쟁탈전은 계속되었고, 누란의 정치는 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 무제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대완이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나라는 이광리를 지휘관으로 하여 두 차례 대군을 파견했다(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이 과정에서 누란 왕은 다시 한나라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는데,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고 복속하고 있는 것을 추궁받았다. 누란 왕은 "소국은 대국 사이에 있어 양쪽에 복속하지 않고서는 편안할 수 없다"고 답하며, 양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나라 영토에 땅을 주어 이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무제는 이를 납득하고 누란 왕을 귀국시켰다. 이후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2세기경, 누란은 타림 분지 주변 지역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하여, 중앙아시아와 인도 간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남부 상인들은 카라코람 산맥, 히말라야 산맥,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누란과 니아로 향했다. 카로슈티 문자와 브라흐미 문자 등 인도 문자들의 흔적과 싯다르타 고타마의 묘사는 불교 전파 경로를 보여준다. 누란은 둔황에서 코를라로 이어지는 주요 노선, "북쪽 노선"과 연결되었고, 뤄창 오아시스의 우니 마을, 호탄, 예청까지 연결되었다.
타림 미라는 누란과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미라들이다. 한 여성 미라는 기원전 1800년경으로 추정되어 이 지역의 이른 정착을 보여준다. 발굴된 미라들은 금발과 옅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는 180cm가 넘었다. 이는 산산 왕국 사람들이 유라시아 대초원 이주민의 후손일 수 있다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초기-중기 청동기 시대 인구는 고대 유전자적으로 고립된 지역 인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주변 유목민과 농업 종사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미라는 서쪽에서 온 면과 동쪽에서 온 실크로 감싸져 있어 누란의 상업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2. 1. 초기 역사
누란이라는 도시 또는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며, 누란의 미라는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9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된다.문헌상 '누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흉노의 지배자 묵돌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다. 묵돌선우는 이 편지에서 월씨를 격파하고 누란, 우손, 호게 및 인근 26개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했다. 이 편지는 기원전 176년에 보내졌으므로, 누란은 적어도 그 이전에 형성되어 월씨의 세력권에 있다가 기원전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 사이에 동박도위를 설치하고 누란을 포함한 서역 국가들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하서회랑에 군사를 주둔시켜 교역을 통제했다.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 즉위 후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장건이 서역으로 파견되어 흉노를 견제하려 했으나, 당시 흉노의 지배력이 강해 실패했다.
기원전 127년과 121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 본거지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서역 경영을 본격화했다. 기원전 115년 하서사군 설치는 한나라의 서역 진출의 시작이었다. 서역 교통로를 장악한 한나라는 서역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했으나, 한나라 사람들과 서역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빈번해지면서 반한 감정이 커졌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나라의 진출을 꺼려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했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조파노와 왕회에게 명하여 누란과 고사에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누란은 조파노가 이끈 700기병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고, 국왕은 사로잡혔다. 누란은 왕자 한 명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 복속했다. 그러나 흉노 역시 누란을 공격하여, 누란은 흉노에게도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한나라와 흉노의 서역 쟁탈전은 계속되었고, 누란의 정치는 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 무제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대완이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나라는 이광리를 지휘관으로 하여 두 차례 대군을 파견했다(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이 과정에서 누란 왕은 다시 한나라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는데,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고 복속하고 있는 것을 추궁받았다. 누란 왕은 "소국은 대국 사이에 있어 양쪽에 복속하지 않고서는 편안할 수 없다"고 답하며, 양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나라 영토에 땅을 주어 이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무제는 이를 납득하고 누란 왕을 귀국시켰다. 이후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2세기경, 누란은 타림 분지 주변 지역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하여, 중앙아시아와 인도 간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남부 상인들은 카라코람 산맥, 히말라야 산맥,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누란과 니아로 향했다. 카로슈티 문자와 브라흐미 문자 등 인도 문자들의 흔적과 싯다르타 고타마의 묘사는 불교 전파 경로를 보여준다. 누란은 둔황에서 코를라로 이어지는 주요 노선, "북쪽 노선"과 연결되었고, 뤄창 오아시스의 우니 마을, 호탄, 예청까지 연결되었다.
타림 미라는 누란과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미라들이다. 한 여성 미라는 기원전 1800년경으로 추정되어 이 지역의 이른 정착을 보여준다. 발굴된 미라들은 금발과 옅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는 180cm가 넘었다. 이는 산산 왕국 사람들이 유라시아 대초원 이주민의 후손일 수 있다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초기-중기 청동기 시대 인구는 고대 유전자적으로 고립된 지역 인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주변 유목민과 농업 종사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미라는 서쪽에서 온 면과 동쪽에서 온 실크로 감싸져 있어 누란의 상업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2. 2. 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141년, 한나라는 대 흉노 정책을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던 월씨(대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이 파견되었고, 그의 견문록에서 누란이 언급되었다. 장건은 두 번이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이를 통해 당시 서역에 대한 흉노의 지배가 널리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나라는 실크로드 무역을 위해 서역 여러 나라에 견사나 대상을 많이 파견했다. 그러나 교역 증대로 한나라 사람들과 서역 여러 나라 사이에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서역 여러 나라에서는 한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나라의 무역 사절단 파견을 싫어하여 흉노와 가깝게 지내며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했다. 흉노는 누란을 재차 공격했고, 누란은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흉노와 한나라의 무역을 위한 싸움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고, 누란은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한나라는 누란국을 통해 한혈마를 얻고 싶어 사자를 파견했지만, 누란은 한나라 사신을 홀대하고 쫓아냈다. 한나라 사신은 귀향길에 욱성성(郁成城)에서 습격당해 살해되고 재물을 빼앗겼다. 분개한 한나라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흉노의 습격을 받아 둔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는 누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된 일에 항의했다.
《한서》에는 누란과 한 왕조(기원전 206년 – 서기 220년) 사이의 상호 작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7] 기원전 126년, 흉노의 ''선우''가 중국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누란을 정복했다고 언급했으며, 같은 해 중국 사신 장건은 누란을 로프 노르 근처의 요새화된 도시로 묘사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한 무제는 대원 (파르가나)과의 접촉을 확대하려 했으나, 한나라 사신들은 누란과 구시 왕국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다. 기원전 108년, 누란은 조파노(趙破奴)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왕이 사로잡혔고, 이후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8] 흉노는 누란을 공격했고, 누란 왕은 아들 중 한 명을 흉노에게, 다른 아들을 한나라 조정에 인질로 보냈다.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황제는 누란 왕에게 왕국을 옮겨 한나라 영토 내에 거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받고 왕을 석방했지만, 그의 아들은 인질로 남겨두었다. 기원전 92년, 누란 왕이 사망하자 한나라 조정은 왕자를 돌려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왕자는 한나라 법을 위반하여 거세된 상태였다. 한나라 조정은 다른 아들을 누란 왕으로 즉위시키고, 새 왕의 아들 또한 인질로 받았다.
기원전 77년, 여러 한나라 사신들이 누란에서 살해된 후, 부개자가 누란 왕을 암살했다. 왕의 동생 위투치(尉屠耆)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한나라 조정은 누란에게 산산이라는 새 이름을 채택하도록 강요하며 통제를 강화했다. 한나라는 서기 2세기까지 흉노와 누란의 지배권을 다투었다.
1세기 말경부터 선선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교역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한(漢)과 흉노에 비해 약소국이었고, 한의 개입이 본격화되자 선선국은 그 패권을 인정해야 했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 시대에 한이 서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73년에 반초가 선선국에 파견되었을 때, 선선왕 광은 처음에는 반초를 정중하게 대접했지만, 흉노 사신이 방문하자 태도를 바꿨다. 반초는 흉노 사신을 학살했고, 광은 한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며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 반초는 서역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고, 123년에는 그의 아들 반용이 서역 경영을 계속했다.
2. 3. 선선국 시대


로란이라고 불리는 도시, 또한 그 이름을 가진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날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가 시작된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른바 "로란의 미녀"로 알려진 미라는, 걸치고 있던 의복의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해 기원전 19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문헌 사료에 로란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사기』 흉노 열전에 수록된 편지 속에서 언급된 것이 처음(기원전 2세기)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이다. 그 편지는 흉노의 군주인 묵특 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것으로, 이 속에서 묵특 선우는 월지에 승리하고, 로란, 우손, 호갈 및 인근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기원전 176년)에 보내졌기 때문에, 로란은 적어도 기원전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지의 세력권에 있었던 것, 그리고 기원전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서역을 모두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 사이에 동복도위를 두고, 로란을 포함한 서역 제국에 부세를 매기고, 하서 회랑에 수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그 교역을 지배했다.
기원전 141년에 한에서 무제가 즉위하자 한은 대흉노 적극책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던 월지(대월지)와 동맹을 맺는 것을 목적으로 장건이 파견되었고, 그의 왕복의 견문 속에서 로란도 언급되었다. 장건은 그 왕복에서 두 번이나 흉노에게 사로잡혔으며, 당시 서역에 흉노의 지배가 널리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은 기원전 127년과 기원전 121년에 위청과 곽거병의 지휘 아래 대규모 대흉노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그는 기원전 119년에는 막북의 흉노 본거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결과, 한은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섰다. 기원전 115년의 하서사군 설치는 한의 서역 진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역의 교통로를 장악한 한은 서역 제국과 더 나아가 서방으로 遣使(견사)나 대상(隊商)을 많이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거 증대한 한의 사람들(그 중에는 신흥의 교역 시장에서 활로를 찾은 빈민도 많았다고 한다)과 서역 제국 사이에서는 트러블이 빈발했고, 서역 제국에서는 반한 감정이 증대했다. 특히 로란과 고사는 한의 진출을 싫어하여 흉노와 접근하여 한 사신의 왕래를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
이를 우려한 한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 종표후 조파노와, 로란에 遣使(견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는 왕회에게 명하여, 수만 명을 동원하여 로란과 고사에 군사 개입을 했다. 기병 700기와 함께 선행한 조파노의 공격을 받아 로란은 점령되었고, 국왕이 사로잡혔다. 이 때문에 로란은 왕자의 1명을 한에 인질로 보내 한에 복속했다. 그런데 서역의 요충 로란의 한에의 복속은 흉노에게는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얼마 안 가 흉노도 로란을 공격했으므로, 로란은 흉노에게도 인질로 왕자를 보내 공납을 바쳤다.
이러한 한과 흉노의 서역을 둘러싼 싸움은 오래 지속되었고, 로란의 정치는 그 움직임에 격렬하게 좌우되었다. 이윽고 다시 한의 군사 개입을 초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제는 대완의 한혈마를 입수하기를 원하여 대가로 재물을 가지고 사신을 대완에 보냈지만, 대완은 한 사신의 태도가 무례하다 하여 이를 물리쳤고, 그 귀로에 대완의 동쪽 울성성에서 이를 습격하여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것은 한의 대규모 보복을 초래했고, 한은 장군 이광리의 지휘 아래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파견했다(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이 한의 대완 원정 시에 로란 왕은 다시 한에게 사로잡혀 무제의 심문을 받게 되었고, 무제는 로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하고 있는 것을 책망했다. 로란 왕은 이에 대답하여 "소국은 대국 사이에 있어, 양속하지 않고서는 편안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고,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의 영토에 토지를 주어 이주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고 한다. 무제는 이를 듣고 납득하고, 로란 왕은 귀국을 허가받았다. 이후, 한은 로란 방면의 군세를 강화했기 때문에,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후퇴해 갔다.
『한서』에 따르면, 기원전 92년에 언급된 누란 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누란은 한에 인질로 보냈던 왕자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그는 한에서 법률을 위반하여 궁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한은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인물이 왕이 되었고, 그 또한 한의 밑으로 왕자 위도기를 인질로 내보냈으며, 흉노에게도 왕자 안귀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이 신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흉노에게 인질로 보내졌던 왕자 안귀가 귀국하여 왕위를 얻었다. 이에 대해 한은 입조를 요구하며 사자를 보냈지만, 안귀의 후처들은 한이 인질로 보낸 왕자를 귀국시키지 않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고, 결국 입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한 사신과의 트러블도 있었으며, 누란에서는 차츰 한의 사절을 살해하는 사건도 일어나게 되었다.
한은 기원전 77년에 대장군 곽광의 지시에 따라 평락감 부개자에게 친흉노파인 안귀를 암살하게 하고, 인질로 장안에 있던 왕제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삼았다. 또한 국명을 "선선"으로 개칭하게 하고, 한군이 누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도기에게 궁녀를 아내로 주고, 인장을 주었다. 여기서 굳이 "선"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누란의 이름을 개칭하고, 인장과 아내의 수여는 누란 왕국이 한의 괴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 한군 주둔에 대해서는, 위도기가 자신의 입장이 약함을 걱정하여 스스로 한에 의뢰했다고 전해진다. 한군은 위도기의 건의에 따라 이순성에 주둔하게 되었고,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역 남도에서 한의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누란이 한의 지배 하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의 종복도위였던 일축왕이 한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기원전 60년). 이 결과 한은 서역 남도에 더하여 서역 북도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새로 서역도호를 설치하고 정길을 도호로 삼았다. 이후 한의 서역 지배는 왕망에 의해 전한이 종언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선선으로 이름을 고친 누란도 괴뢰 왕국으로서 그 지배 하에 계속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나라가 루란을 지배하게 된 후, 샨샨(Shanshan)으로 이름이 변경된 왕국은 중국의 괴뢰국이 되었다. 새로 즉위한 왕은 암살된 왕의 아들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쉰(伊循, 차클리크 또는 미란으로 추정)에 한나라 군대를 주둔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군 장교들이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쉰에 도독부가 설치되었다. 《한서》에는 치에모와 니야와 같은 타림 분지의 여러 정착지가 독립 국가로 묘사되었지만, 나중에는 샨샨의 일부가 되었다. 왕국의 이름은 중국에 의해 샨샨으로 변경되었지만, 루란 지역은 현지인들에게 크로란(Kroran)으로 계속 알려졌다.
이 지역은 간헐적으로 중국의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이 서역에서 약해졌을 때는 루란이 사실상 독립했다. 서기 25년, 루란이 흉노와 동맹을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기 73년, 한나라 군관 반초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샨샨으로 갔는데, 샨샨은 동시에 흉노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초는 흉노 사절들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왕에게 바쳤고, 샨샨의 광왕은 한나라의 권위에 굴복했다. 이는 중앙 중국에서 샨샨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첫 번째 단계가 안정적인 중국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보장했다. 약 119년경, 반용은 루란에 500명의 중국인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수오만 장군에 의해 루란에 군사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서기 222년, 샨샨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서기 283년에는 진나라 무제 재위 기간 동안 왕의 아들이 인질로 중국 조정에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루란은 또한 3세기 《위서》에서 샨샨의 속국으로 기록되었다.
한의 번영에 따른 동서 무역의 발전은 서역의 경제를 크게 윤택하게 했다. 26개 내지 36개국이라고 불렸던 서역 제국은 전한 말에는 55개국으로 증가했다. 이는 기존의 왕국이 세분화된 것이 아니라, 교역의 활황에 따라 새로운 오아시스 도시 국가가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한의 힘에 의한 정치 상황의 안정도 이러한 경제의 활황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에서는 왕망의 쿠데타에 의해 새롭게 신이 성립되었다. 왕망의 서역 정책은 현지에서 불평을 샀다고 하며, 누란을 포함한 서역 제국의 대부분 (사차국을 제외)은 다시 흉노(북흉노)에 귀순했다(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은 무너지고 후한이 성립한다). 그러나 북흉노는 서역 제국이 한의 지배 하에 있어 공납이 없었던 것을 책망하며, "미납"이 되어 있던 공납품을 징수했기 때문에 서역 제국은 다시 한에 복속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후한서』에 따르면, 서역 제국 중에서도 가장 강세를 자랑했던 사차국(현재의 예청현)의 왕 현은, 처음에는 선선왕 안 등과 함께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 그 결과 광무제로부터 서역도호의 인수를 받았지만, 둔황 태수 배준이 "'''오랑캐에게 대권을 줄 수 없다'''"며 이 인수를 빼앗았다. 이 때문에 현은 한과 적대하게 되었고, 독자적으로 '''대도호'''를 칭하며, 북흉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서역 제국을 복속시켰지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서역의 18개국이 한에 귀순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서역 제국에서는 한의 지원을 요구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한의 광무제는 국내의 불안정을 이유로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둔황 태수 배준은 마치 한이 새롭게 서역도호를 파견하는 것처럼 위장 공작을 펼쳤지만 효과는 없었고, 현은 한의 개입이 없음을 확신하고, 한과 가까운 선선국에게 한과의 국경 교통로를 봉쇄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중계 무역으로 나라를 이룬 선선국에게 이는 따를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고, 선선왕 안은 사차국의 사자를 참살하여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현은 선선을 공격하여 1000명 정도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선선국왕 안은 남쪽의 산악으로 도망가 다시 한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다시 군사를 보낼 수 없다는 답신을 보냈기 때문에, 선선국은 다른 몇몇 제국과 함께 흉노와의 동맹을 재개했다.
서기 61년에 사차왕 현이 우전국(현재의 호탄시)과의 다툼에서 암살되자 서역의 정치 정세는 일변했다. 사차국의 지배 하에 있던 제국은 거의 독립하여 상호 다투었지만, 선선국은 이 다툼 속에서 몇 개국을 병합하여 서역의 한 구석에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우전국, 거사국(현재의 투르판시), 구자국(현재의 쿠차현), 언기국(현재의 옌치 후이족 자치현) 등이 할거하며 번영했다. 당시 선선국에서 작성된 한문 문서에는, 옛날부터 사용되던 이름인 누란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루란은 정착지를 지원하던 타림강의 물길이 바뀌면서 물 부족으로 인해 서기 330년에 버려졌고, 군사 주둔지는 50km 남쪽의 하이토우(海頭)로 이전되었다. 북서쪽의 잉판 요새는 당나라까지 중국의 통제를 받았다. 《위서》에 따르면, 샨샨의 빌롱 왕은 442년에 거거 안주의 공격을 받은 후 그의 백성의 절반과 함께 치에모로 도망쳤고, 그리하여 샨샨은 치에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445년에 샨샨은 북위에 복속되었다. 6세기 말, 수나라는 샨샨의 도시 국가를 재건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이 지역은 토욕혼, 유연 카간국, 정령과 같은 유목 국가의 잦은 침략을 받았고, 점차 버려졌다. 630년경, 당나라 초기에 샨푸퉈(鄯伏陁)는 남은 샨샨 백성을 이끌고 하미로 갔다.
불교 순례자 현장은 644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지역을 지나갔고, 루란의 나푸보(納縛波, 차클리크로 추정)라는 도시를 방문했으며, 치에모에 대해 "요새는 있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다"고 썼다.
2. 4. 카로슈티 문자 시대
2세기 초반 이후, 누란(선선)에 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번영했다. 2세기 후반, 한문 서적에 선선에 대한 정보가 줄어들었으나, 3세기 전반부터 선선 자체 문자로 된 사료가 풍부하게 출토되었다. 이들은 프라크리트어의 일종인 간다리어를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문서 양식과 왕호는 쿠샨 왕조와 유사하여, 선선(누란)이 쿠샨계 이주자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추정된다. 누란이 서방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카로슈티 문자 해석 결과, 이 시기 선선은 로프노르 호수 주변에서 체드타에 이르는 영역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상업 문서, 명령서, 징세 기록 등이 대부분이어서 3세기 선선의 정치사는 불분명하다. 다만, 당시 선선은 서쪽의 우전(호탄, 당시 문서에서는 코탄나)과 국경 분쟁을 겪었고, 티베트계 강족 일파인 스피의 침입과 약탈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실용 문서와 출토품을 통해 당시 선선의 국정과 사회상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2. 5. 멸망
누란은 기원전 19세기경 로란의 미녀로 알려진 미라가 발견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가 시작된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문헌 사료에는 기원전 2세기 사기 흉노 열전에 수록된 묵특 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묵특 선우는 월지를 격파하고 누란을 포함한 인근 26국을 평정했다고 기록했다. 이 편지는 기원전 176년에 보내졌으므로, 누란은 적어도 그 이전에 형성되어 월지의 세력권에 있다가 기원전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는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장건을 파견하여 서역과의 동맹을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누란이 언급되었다. 기원전 127년과 기원전 121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 본거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기원전 115년 하서사군을 설치하며 서역 진출을 시작했다. 한나라와 서역 제국 간의 마찰이 빈번해지자, 누란은 고사와 함께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했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조파노와 왕회에게 명하여 누란과 고사에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조파노가 이끄는 700기병의 공격으로 누란은 점령되었고, 국왕은 사로잡혔다. 누란은 왕자를 인질로 보내 한나라에 복속했지만, 흉노 역시 누란을 공격하여 누란은 양쪽에 인질을 보내는 상황에 놓였다.
한 무제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대완이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나라는 이광리의 지휘 아래 두 차례 대군을 파견하여 대완을 원정했다(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이 과정에서 누란 왕은 다시 한나라에 사로잡혀 심문을 받았고, "소국은 대국 사이에 있어 양속하지 않고서는 편안할 수 없다"라고 답하며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나라 영토에 이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무제는 이를 허락하고 누란 왕을 귀국시켰으며, 이후 한나라의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3세기 후반,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서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누란에서 진나라 시대의 병사 식량 지급 기록과 호적 단편이 발견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전량은 335년 장군 양선을 보내 선선국을 공격했고, 선선국은 전량에 입조하며 조공했다. 전량이 전진에 멸망한 후에도 선선국왕 휴밀타는 382년 전진에 입조했다. 422년에는 선선국 비룡이 북량에 입조했다. 439년 북위의 북량 침공으로 북량은 패배하고, 441년 저거안주가 선선국(누란)을 공격했다. 누란은 첫 공격을 막아냈지만, 442년 저거무휘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여 선선국왕 비룡은 4000여 가구와 함께 차말(체르첸)로 도망쳤다. 445년 북위는 만도귀를 보내 선선을 점령하고 선선국왕 진달을 사로잡았다. 448년 한목이 선선국왕으로 봉해지면서 독립 왕국으로서의 선선국(누란)은 멸망했다. 누란은 7세기 무렵까지 존속했지만, 이전과 같은 위상은 회복하지 못했다.
3. 국정
누란의 국정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카로슈티 문자 문서와 현지에서 작성된 문서에 의존한다. 이러한 문서류가 많이 발견된 것은 주로 3세기경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하에 기술하는 국정의 개요도 기본적으로는 3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복원되었다.
=== 중앙 정부 ===
누란은 기록이 남아있는 전 시대를 통틀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어느 정도 강력했는지, 혹은 제약받았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다. 적어도 현존하는 사료를 통해 보면 고위 관료의 인사권을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는 종종 주변국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누란왕과 결혼했다. 한나라에서 궁녀가 하사되어 누란왕의 아내가 되었다는 기록이 《한서》에 남아있으며, 3세기경에는 인접국인 호탄 (호탄, 또는 코탄나)의 왕녀가 왕비로 맞이해졌다. 호탄국과 선선국은 국경을 두고 다투었으나, 한편으로 선선 왕비가 된 호탄 왕녀가 고향으로 돌아간 기록도 남아있어, 당시 외교 교섭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중앙 정부의 관제는 《한서》 서역전에 선선국왕을 정점으로 보국공, 극호공, 선선도위, 격거사도위, 좌우저거, 격거사군, 역장이라는 관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관직을 알 수 있는 현지 사료는 부족하여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3세기의 관직에 대해서는 카로슈티 문자 문서류를 통해 상당히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알 수 있는 누란의 관료 기구는 《한서》 서역전의 기록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시대적 차이가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렵다.
3세기의 누란(선선국)에는 대왕(마하라야 Maharaya) 아래 가장 고위 관료로 키차이차(Kitsaitsa)가 있었다. 키차이차 직책을 맡은 자의 서명은 각종 공문서에 반드시 존재하며, 각종 재판에서 판결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차이차 다음가는 고위 관직으로 칼라(Kala)가 있었으며, 이 직책에는 왕자(마하라야푸트라 Maharayaputra)가 있었다. 일설에는 왕자의 칭호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그 외에 오구(Ogu), 구스라(Gusura), 큐발라이나(Cuvalayina) 등의 직책이 있었으며, 이들의 직권 등은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각 주의 장관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고급 관료였다. 이러한 고급 관료에게는 국왕으로부터 '''장원''' (킬메 Kilme)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거기에서 얻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 지방 통치 ===
누란(선선국)의 지방 통치에 관해서는, 문서 사료가 많이 출토된 차도타(정절)에 관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차도타에는 지방 장관(초지보 Cojhbo)이 배치되었다. 초지보의 임면권은 기본적으로 국왕에게 있었다고 생각된다. 3세기의 차도타 장관 소움자카에게 보낸 왕의 명령서 등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대왕은 차도타의 전권을 소움자카에게 주었으니, 누구도 소움자카를 거스르면 안 된다."라고 기록된 것도 있어, 지방 장관(초지보)이 담당 지역의 전권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사자의 호위 등은 각 지방의 장관이 각 담당 지역 내에서 맡아 책임을 졌다.
각 주에 대해 왕은 '''달마'''(법)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도록 여러 번 지시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달마는 각 주의 전통적인 관습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특히 민사 사건에 관해서는 영역 내에 반드시 통일된 법률 같은 것은 제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지보 아래에는 툼가(Tomga), 압수(Apsu), 소탐가(Sothamga), 타스차(Tasuca), 브루야가(Vuryaga), 참쿠라(Camkura)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소탐가(징세관)는 종종 초지보와 나란히 문서에 등장하여 중요한 관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도, 징세에 관련된 직책이 몇 개 있었다.
=== 세제 ===
카로슈티 문자 문서 중에는 징세에 관한 문서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선선국(누란)이 지배한 각 지방의 장관(초지보)에게 국왕이 징세를 명령하는 문서나, 세금 횡령을 비난하는 문서 등이다. 지방 장관은 산하의 징세관(소탐가)을 사용하여 해당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은 물납이 기본이었으며, 곡물, 와인, 낙타, 알팔파, 버터, 양, 펠트, 카펫 등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징수되었다. 이러한 세금으로 징수되는 물품은 20종류가 넘는다. 가장 주요한 세금은 곡물과 와인이었으며, 각각 도시의 관청 등에 일단 모인 후, 적절한 시기에 중앙으로 보내졌다. 낙타세는 국가의 사절이나 역참을 위한 낙타 제공이었다. 여기에는 사용료가 지불되었지만, 일종의 요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지에서 징수된 세금은 낙타를 사용하여 중앙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낙타의 사료로서 알팔파가 징수되었다.
각 오아시스는 나가라(도시 Nagara)와 아바나(마을 Avana)로 구성되었고, 나가라와 아바나는 다시 사다(백호 Sada)와 프라데삼(지방 Pradesam) 등으로 세분되었다. 이것이 징세의 최소 구분이며, 납세액의 계산은 이것들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세금 징수는 '''왕령'''(라자데 rajade)과 '''장원'''(킬메 Kilme)에서 별도로 이루어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징세 처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관리의 횡령, 착복, 미납, 그리고 수송 중의 약탈 피해 등이었다. 현존하는 세무 문서의 대부분이 체납에 대한 독촉장이나, 착복한 관리를 파면하라는 명령 문서라는 점은, 이러한 문제에 당시 선선국(누란) 중앙 정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현대에 전해준다. 세금 미납이 발각되면 기본적으로 미납분 전부가 징수 대상이 되었다.
3. 1. 중앙 정부
누란은 기록이 남아있는 전 시대를 통틀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어느 정도 강력했는지, 혹은 제약받았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다. 적어도 현존하는 사료를 통해 보면 고위 관료의 인사권을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는 종종 주변국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누란왕과 결혼했다. 한나라에서 궁녀가 하사되어 누란왕의 아내가 되었다는 기록이 《한서》에 남아있으며, 3세기경에는 인접국인 호탄 (호탄, 또는 코탄나)의 왕녀가 왕비로 맞이해졌다. 호탄국과 선선국은 국경을 두고 다투었으나, 한편으로 선선 왕비가 된 호탄 왕녀가 고향으로 돌아간 기록도 남아있어, 당시 외교 교섭의 복잡성을 보여준다.중앙 정부의 관제는 《한서》 서역전에 선선국왕을 정점으로 보국공, 극호공, 선선도위, 격거사도위, 좌우저거, 격거사군, 역장이라는 관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관직을 알 수 있는 현지 사료는 부족하여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3세기의 관직에 대해서는 카로슈티 문자 문서류를 통해 상당히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알 수 있는 누란의 관료 기구는 《한서》 서역전의 기록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시대적 차이가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렵다.
3세기의 누란(선선국)에는 대왕(마하라야 Maharaya) 아래 가장 고위 관료로 키차이차(Kitsaitsa)가 있었다. 키차이차 직책을 맡은 자의 서명은 각종 공문서에 반드시 존재하며, 각종 재판에서 판결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차이차 다음가는 고위 관직으로 칼라(Kala)가 있었으며, 이 직책에는 왕자(마하라야푸트라 Maharayaputra)가 있었다. 일설에는 왕자의 칭호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그 외에 오구(Ogu), 구스라(Gusura), 큐발라이나(Cuvalayina) 등의 직책이 있었으며, 이들의 직권 등은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각 주의 장관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고급 관료였다. 이러한 고급 관료에게는 국왕으로부터 '''장원''' (킬메 Kilme)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거기에서 얻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3. 2. 지방 통치
누란(선선국)의 지방 통치에 관해서는, 문서 사료가 많이 출토된 차도타(정절)에 관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차도타에는 지방 장관(초지보 Cojhbo)이 배치되었다. 초지보의 임면권은 기본적으로 국왕에게 있었다고 생각된다. 3세기의 차도타 장관 소움자카에게 보낸 왕의 명령서 등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대왕은 차도타의 전권을 소움자카에게 주었으니, 누구도 소움자카를 거스르면 안 된다."라고 기록된 것도 있어, 지방 장관(초지보)이 담당 지역의 전권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사자의 호위 등은 각 지방의 장관이 각 담당 지역 내에서 맡아 책임을 졌다.각 주에 대해 왕은 '''달마'''(법)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도록 여러 번 지시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달마는 각 주의 전통적인 관습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특히 민사 사건에 관해서는 영역 내에 반드시 통일된 법률 같은 것은 제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지보 아래에는 툼가(Tomga), 압수(Apsu), 소탐가(Sothamga), 타스차(Tasuca), 브루야가(Vuryaga), 참쿠라(Camkura)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소탐가(징세관)는 종종 초지보와 나란히 문서에 등장하여 중요한 관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도, 징세에 관련된 직책이 몇 개 있었다.
3. 3. 세제
카로슈티 문자 문서 중에는 징세에 관한 문서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선선국(누란)이 지배한 각 지방의 장관(초지보)에게 국왕이 징세를 명령하는 문서나, 세금 횡령을 비난하는 문서 등이다. 지방 장관은 산하의 징세관(소탐가)을 사용하여 해당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은 물납이 기본이었으며, 곡물, 와인, 낙타, 알팔파, 버터, 양, 펠트, 카펫 등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징수되었다. 이러한 세금으로 징수되는 물품은 20종류가 넘는다. 가장 주요한 세금은 곡물과 와인이었으며, 각각 도시의 관청 등에 일단 모인 후, 적절한 시기에 중앙으로 보내졌다. 낙타세는 국가의 사절이나 역참을 위한 낙타 제공이었다. 여기에는 사용료가 지불되었지만, 일종의 요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지에서 징수된 세금은 낙타를 사용하여 중앙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낙타의 사료로서 알팔파가 징수되었다.각 오아시스는 나가라(도시 Nagara)와 아바나(마을 Avana)로 구성되었고, 나가라와 아바나는 다시 사다(백호 Sada)와 프라데삼(지방 Pradesam) 등으로 세분되었다. 이것이 징세의 최소 구분이며, 납세액의 계산은 이것들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세금 징수는 '''왕령'''(라자데 rajade)과 '''장원'''(킬메 Kilme)에서 별도로 이루어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징세 처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관리의 횡령, 착복, 미납, 그리고 수송 중의 약탈 피해 등이었다. 현존하는 세무 문서의 대부분이 체납에 대한 독촉장이나, 착복한 관리를 파면하라는 명령 문서라는 점은, 이러한 문제에 당시 선선국(누란) 중앙 정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현대에 전해준다. 세금 미납이 발각되면 기본적으로 미납분 전부가 징수 대상이 되었다.
4. 종교
누란은 초기부터 불교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누란의 불교에 대한 지견은 카로슈티 문자 문서가 다수 출토되는 3세기의 사정이 잘 알려져 있다. 3세기 누란(선선국)의 불교는 매우 조직화되어 있었다. 승단(상가)은 누란 지배하의 각 오아시스마다 설립되었지만, 이는 중앙의 대승단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 사실은 마힐리 왕 치세 하에서 수도의 승단이 차도타(정절)의 승단의 기강이 문란한 것을 질책하고, 새로운 규칙을 정하는 문서가 출토된 것으로부터 알려져 있다. 400년에 누란을 방문한 중국 승려 법현은 선선국에 4000명의 승려가 있었고,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누란의 영역 각지에서는 엄청난 수의 불교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차도타나 미란 유적 등에서 탑과 불교 벽화, 불상이 발견되었다. 이들 중에는 약간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보이는 것도 존재하며, 그림 제작자의 이름과 보수액이 기록된 문서도 발견되었다. 그 제작자 중에 로마풍의 이름인 티타사(티투스)가 발견된 것은 누란에서 보이는 헬레니즘의 영향과 함께 흥미로운 것이다. 불교 이외의 흔적으로, 아테나와 에로스, 헤라클레스 상을 새긴 봉니도 발견되었다.
5. 고고학적 발굴

이연수는 《북사》에서 과거의 루란으로서 선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로서가 아닌 국가로서의 루란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다른 도시에 관한 것이라는 설이 강하다. 또한, 7세기에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폐허가 된 루란에 들렀다고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지만[45], 이 역시 도시로서의 루란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는 폐허가 된 옛 선선국의 다른 도시인지 불분명하다.
1893년 10월부터 시작된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1900년 3월 23일 로란 유적을 우연히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4] 이듬해 그는 로란을 재방문하여 조사를 진행, 몇몇 가옥을 발굴하여 나무 카로슈티 석판과 서진 시대(266–420)의 많은 중국 필사본을 발견했다. 이 필사본에는 이 지역이 카로슈티어로는 "크로란"으로 불렸지만, 중국어로는 "로우란"으로 표기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32] 헤딘은 또한 타림강의 흐름 변화로 인해 로프누르 호수가 말라 로울란이 멸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4]
1934년 헤딘은 신장에서 발생했던 회족의 반란 때문에 구금되었지만, 우연히 로프누르 지방에서 관개의 가능성 조사를 명령받아 현지 조사를 진행, 여성 미라를 발견했다. 그는 그 미라에 "로프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우렐 스타인은 1906년과 1914년에 로프누르의 옛 호수 주변에서 추가 발굴을 진행하여 이 지역의 많은 유적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 유적지를 L(누란)로 지정하고, 방문한 순서대로 알파벳(A부터 T까지)을 덧붙였다.[33] 스타인은 다양한 문서, 양털 카펫 조각, 약간의 노란색 실크, 간다라 건축 목각 조각을 포함한 많은 유물을 수집했다.
- '''L.A.'''는 호수 북쪽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였다. 두꺼운 성벽은 흙과 짚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면의 길이가 305m 이상이고 기저부의 두께는 6.1m이다. 거대한 탑과 몇몇 행정 건물이 있으며 오랫동안 점유되었다. 일반적으로 누란 도시로 여겨진다.
- '''L.B.'''는 L.A.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이 있는 유적지다.
- '''L.E.'''는 L.A.에서 북동쪽으로 30km 떨어진 요새화된 도시였다. 북쪽 문이 있는 이 지역의 유일한 알려진 도시였다. 한나라의 누란 왕 암살에 관한 텍스트에 북쪽 문이 언급되어 있어, 한나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전인 기원전 1세기의 누란 수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북쪽 문이 누란이 아닌 장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유적지는 서기 3세기 말까지 점유되었다.
- '''L.F.'''는 L.A.에서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곳으로, 건물 기초와 묘지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나무 관 속에 젊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펠트 모자와 가죽 부츠를 신고 양모 담요 아래에 누워 있었다. 에페드라 가지 묶음이 이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훨씬 더 오래된 매장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 '''L.K.'''는 호수 서쪽에 있는 성벽 도시로, 성벽에 출입구만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하이토우로 확인했다.[34]
- '''L.L.'''은 L.K.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요새로, 구조는 유사하지만 더 작다.
1893년 10월부터 시작된 스벤 헤딘의 중앙아시아 탐험과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조사국이 파견한 오렐 스타인이 이끄는 탐험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조사했다. 스타인 탐험대에 앞서 1889년 영국령 인도 제국에 근무하던 영국 군인 바워 대위는, 카라코람 고개에서 상업상의 문제로 살해당한 야르칸드의 상인 델그라이시의 범인 조사를 명령받았다. 범인을 쫓아 쿠차까지 간 바워 대위는, 그곳에서 현지인이 폐허에서 주워 왔다는 고사본을 구입하여 가져갔다[46]。
인도 정부는 고사본 수집을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의 카슈가르 영사 페트로프스키도 고사본 수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사본 안에서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카로슈티 문자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럽 학계에서 중앙아시아의 탐험 조사의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스타인의 탐험대는 1900년부터 서역으로 파견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니야의 마을에서 현지인 이브라힘이 발견한 목간을 보고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의 안내로 니야 유적(정절 왕국 차도타)을 조사하여 100장이 넘는 목간 문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로란 왕이 내린 명령서를 찾아냈다. 스타인은 같은 시기에 헤딘이 로란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인도에 돌아온 후 이 발견을 알게 된 그는 두 번째 조사를 기획하여, 1906년 12월에는 로란의 유적을 조사하여,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했다.
1908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제2차)가 로란을 방문했다. 니시혼간지의 오타니 코즈이는 수차례에 걸친 중앙아시아 조사를 기획했고, 그에 의해 파견된 타치바나 즈이초는 로란 고성을 방문했다. 이때의 조사로 『이백 문서』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는 1911년에도 과거 로란 왕국의 영역을 방문하여 벽화 등을 수집했다.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조사국이 파견한 오렐 스타인이 이끄는 탐험대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조사했다. 1900년부터 서역으로 파견된 스타인의 탐험대는 니야 유적을 조사하여 100장이 넘는 목간 문서를 발견했다. 스타인은 1906년 12월에는 로란의 유적을 조사하여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했다.
1908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제2차)가 로란을 방문했다. 니시혼간지의 오타니 코즈이에 의해 파견된 타치바나 즈이초는 로란 고성을 방문, 『이백 문서』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서를 발견했다.
1979년과 1980년에 중국 사회과학원 신장 분원이 후원한 3차례의 고고학 탐험대가 로란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35] 그들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로란을 관통하는 깊이 4.5m이고 폭이 16.5m인 운하를 발견했으며, 9.6m 높이의 흙으로 된 돔형 불교 탑, 그리고 중국 관리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길이 12.3m, 너비 8.4m의 집으로 3개의 방과 나무 기둥으로 지지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 지역에서 나무 용기, 청동 물체, 보석, 동전, 그리고 중석기 석기를 포함한 797개의 유물을 수집했다.[36][37] 2003년에 보고된 이 지역의 다른 발견물로는 추가적인 미라와 매장지, 마황 막대, 속이 빈 옥 돌을 담은 끈 팔찌, 가죽 가방, 양모 샅바, 빨간색으로 칠해졌으며 크고 코와 이빨이 있는 나무 마스크, 배 모양의 관, 활과 화살, 그리고 짚 바구니가 있다.
이 시기 조사가 끝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국공 내전,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 등으로 인해 한동안 누란 조사는 중단되었다. 다시 누란에 대규모 조사대가 방문한 것은 1979년의 일이다. 이는 일본의 NHK와 중국의 중앙텔레비전의 공동 제작 프로그램 『실크로드』의 취재에 의한 것으로, 이때 중앙텔레비전의 요청에 의해 중국인 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대가 편성되었다. 이 때 새롭게 여성 미라(누란의 미녀)가 발견되었다. 다음 해에는 더욱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져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누란의 수원도 밝혀졌다. 그 후에도 대규모 조사가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많은 지견을 얻었다.
1986년 이후에는 신장 문화청에 의해 항시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방대한 양의 유물이 수집되었다. 1988년의 중일 공동 조사에서는 와세다 대학 교수 나가사와 카즈토시와 저널리스트 구와에다 다카시도 누란 고성 조사를 맡았으며, 외국인으로서는 54년 만의 누란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외국인에 의한 조사가 거의 허가되지 않아 중국인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5. 1. 스벤 헤딘의 탐험
1893년 10월부터 시작된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1900년 3월 23일 로란 유적을 우연히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4] 이듬해 그는 로란을 재방문하여 조사를 진행, 몇몇 가옥을 발굴하여 나무 카로슈티 석판과 서진 시대(266–420)의 많은 중국 필사본을 발견했다. 이 필사본에는 이 지역이 카로슈티어로는 "크로란"으로 불렸지만, 중국어로는 "로우란"으로 표기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32] 헤딘은 또한 타림강의 흐름 변화로 인해 로프누르 호수가 말라 로울란이 멸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4]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조사국이 파견한 오렐 스타인이 이끄는 탐험대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조사했다. 1900년부터 서역으로 파견된 스타인의 탐험대는 니야 유적을 조사하여 100장이 넘는 목간 문서를 발견했다. 스타인은 1906년 12월에는 로란의 유적을 조사하여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했다.
1908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제2차)가 로란을 방문했다. 니시혼간지의 오타니 코즈이에 의해 파견된 타치바나 즈이초는 로란 고성을 방문, 『이백 문서』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서를 발견했다.
1934년 헤딘은 신장에서 발생했던 회족의 반란 때문에 구금되었지만, 우연히 로프누르 지방에서 관개의 가능성 조사를 명령받아 현지 조사를 진행, 여성 미라를 발견했다. 그는 그 미라에 "로프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5. 2. 오렐 스타인의 탐험
아우렐 스타인은 1906년과 1914년에 로프누르의 옛 호수 주변에서 추가 발굴을 진행하여 이 지역의 많은 유적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 유적지를 L(누란)로 지정하고, 방문한 순서대로 알파벳(A부터 T까지)을 덧붙였다.[33] 스타인은 다양한 문서, 양털 카펫 조각, 약간의 노란색 실크, 간다라 건축 목각 조각을 포함한 많은 유물을 수집했다.- '''L.A.'''는 호수 북쪽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였다. 두꺼운 성벽은 흙과 짚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면의 길이가 305m 이상이고 기저부의 두께는 6.1m이다. 거대한 탑과 몇몇 행정 건물이 있으며 오랫동안 점유되었다. 일반적으로 누란 도시로 여겨진다.
- '''L.B.'''는 L.A.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이 있는 유적지다.
- '''L.E.'''는 L.A.에서 북동쪽으로 30km 떨어진 요새화된 도시였다. 북쪽 문이 있는 이 지역의 유일한 알려진 도시였다. 한나라의 누란 왕 암살에 관한 텍스트에 북쪽 문이 언급되어 있어, 한나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전인 기원전 1세기의 누란 수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북쪽 문이 누란이 아닌 장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유적지는 서기 3세기 말까지 점유되었다.
- '''L.F.'''는 L.A.에서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곳으로, 건물 기초와 묘지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나무 관 속에 젊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펠트 모자와 가죽 부츠를 신고 양모 담요 아래에 누워 있었다. 에페드라 가지 묶음이 이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훨씬 더 오래된 매장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 '''L.K.'''는 호수 서쪽에 있는 성벽 도시로, 성벽에 출입구만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하이토우로 확인했다.[34]
- '''L.L.'''은 L.K.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요새로, 구조는 유사하지만 더 작다.
1893년 10월부터 시작된 스벤 헤딘의 중앙아시아 탐험과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조사국이 파견한 오렐 스타인이 이끄는 탐험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조사했다. 스타인 탐험대에 앞서 1889년 영국령 인도 제국에 근무하던 영국 군인 바워 대위는, 카라코람 고개에서 상업상의 문제로 살해당한 야르칸드의 상인 델그라이시의 범인 조사를 명령받았다. 범인을 쫓아 쿠차까지 간 바워 대위는, 그곳에서 현지인이 폐허에서 주워 왔다는 고사본을 구입하여 가져갔다[46]。
인도 정부는 고사본 수집을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의 카슈가르 영사 페트로프스키도 고사본 수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사본 안에서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카로슈티 문자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럽 학계에서 중앙아시아의 탐험 조사의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스타인의 탐험대는 1900년부터 서역으로 파견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니야의 마을에서 현지인 이브라힘이 발견한 목간을 보고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의 안내로 니야 유적(정절 왕국 차도타)을 조사하여 100장이 넘는 목간 문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로란 왕이 내린 명령서를 찾아냈다. 스타인은 같은 시기에 헤딘이 로란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인도에 돌아온 후 이 발견을 알게 된 그는 두 번째 조사를 기획하여, 1906년 12월에는 로란의 유적을 조사하여,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했다.
1908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제2차)가 로란을 방문했다. 니시혼간지의 오타니 코즈이는 수차례에 걸친 중앙아시아 조사를 기획했고, 그에 의해 파견된 타치바나 즈이초는 로란 고성을 방문했다. 이때의 조사로 『이백 문서』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는 1911년에도 과거 로란 왕국의 영역을 방문하여 벽화 등을 수집했다.
5. 3. 중국의 발굴
1979년과 1980년에 중국 사회과학원 신장 분원이 후원한 3차례의 고고학 탐험대가 로란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35] 그들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로란을 관통하는 깊이 4.5m이고 폭이 16.5m인 운하를 발견했으며, 9.6m 높이의 흙으로 된 돔형 불교 탑, 그리고 중국 관리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길이 12.3m, 너비 8.4m의 집으로 3개의 방과 나무 기둥으로 지지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 지역에서 나무 용기, 청동 물체, 보석, 동전, 그리고 중석기 석기를 포함한 797개의 유물을 수집했다.[36][37] 2003년에 보고된 이 지역의 다른 발견물로는 추가적인 미라와 매장지, 마황 막대, 속이 빈 옥 돌을 담은 끈 팔찌, 가죽 가방, 양모 샅바, 빨간색으로 칠해졌으며 크고 코와 이빨이 있는 나무 마스크, 배 모양의 관, 활과 화살, 그리고 짚 바구니가 있다.이 시기 조사가 끝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국공 내전,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 등으로 인해 한동안 누란 조사는 중단되었다. 다시 누란에 대규모 조사대가 방문한 것은 1979년의 일이다. 이는 일본의 NHK와 중국의 중앙텔레비전의 공동 제작 프로그램 『실크로드』의 취재에 의한 것으로, 이때 중앙텔레비전의 요청에 의해 중국인 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대가 편성되었다. 이 때 새롭게 여성 미라(누란의 미녀)가 발견되었다. 다음 해에는 더욱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져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누란의 수원도 밝혀졌다. 그 후에도 대규모 조사가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많은 지견을 얻었다.
1986년 이후에는 신장 문화청에 의해 항시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방대한 양의 유물이 수집되었다. 1988년의 중일 공동 조사에서는 와세다 대학 교수 나가사와 카즈토시와 저널리스트 구와에다 다카시도 누란 고성 조사를 맡았으며, 외국인으로서는 54년 만의 누란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외국인에 의한 조사가 거의 허가되지 않아 중국인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6.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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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時の殺人犯はその後サマルカンドで捕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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