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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유키오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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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유키오(1967년)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코치이다. 1986년부터 2007년까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1995년 타점왕, 베스트 나인 4회, 골든 글러브 5회, 월간 MVP 3회를 수상했다. 2007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2006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닛폰햄 2군 타격 코치, 1군 타격 코치, 2군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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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유키오 (196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21년 다나카 유키오
2021년
포지션내야수, 코치
타격/투구우투우타
출생일1967년 12월 14일 ()
출생지미야자키현
선수 경력
데뷔일1986년 6월 10일
데뷔팀닛폰햄 파이터스
최종 시즌2007년
최종팀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선수닛폰햄 파이터스/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986–2007)
코치 경력
코치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10–2017)
기록
타율.262
홈런287
타점1,026
수상
하이라이트일본 시리즈 우승 (2006)
인물 정보
본명다나카 유키오
출신 학교미야코노조 고등학교
드래프트 순위1985년 드래프트 3위
대표팀일본
올림픽2000년
기타 정보
별칭미스터 파이터스
별칭 2미스터 닛폰햄

2. 프로 입단 전

아버지가 아사히 카세이에 근무하고 있어서 어린 시절에는 노베오카시에서 거주했다.[100]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야코노조시로 이사를 가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연식 야구팀에 입단했다.[100][101] 중학교 야구부에서는 8번 타자로 활약했는데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102] 응원단이라도 좋으니까 야구부의 멤버로서 고시엔에 가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반 입시를 거쳐 미야코노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102] 동기 신입 부원은 60명 이상이었지만,[103] 오른쪽 치는 것의 기술과 강한 어깨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1학년 가을부터 2번·유격수의 주전으로 정착했다.[102] 1학년 위에는 팀의 에이스인 다구치 류지가 있어서 2학년이 된 1984년에는 제56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고 준결승전에서는 일명 ‘KK 콤비’를 거느리는 PL가쿠엔 고등학교와의 연장전 접전 끝에 패했다.[102] 같은 해 여름에 있었던 제66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3차전에서 또다시 PL가쿠엔 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펼쳤지만 1대 9로 졌다.

2학년 가을이 되면서 팀의 주장으로 발탁됐고 더 나아가 신임 감독의 조언을 받아서 타법을 변경했는데 급격하게 장타력이 붙어서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3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104] 3학년 여름에 있었던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미야자키 대회 3차전에서 팀이 패한 바람에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뛰어날 정도의 강한 어깨와 거칠면서도 파워가 있는 타격으로 고 신지와 함께 규슈에서 1, 2위를 경쟁할 정도의 유격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105]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세이부 라이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스 등의 프로 구단 스카우트가 다나카를 주목해서 학교를 방문했다고 한다.[104] 오사와 게이지 닛폰햄 구단 상무가 시찰했을 때 기대 이상의 좋은 플레이를 보인 적도 있어서[103] 198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3000만, 280만(모두 추정)이었다.[103] 계약금의 일부는 미야자키 현에 소재하고 있는 도서관에 기부했다.[106] 한편, 세이부의 관리부장이었던 네모토 리쿠오는 ‘비밀 병기’라고 생각하고 있던 다나카를 지명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말했다.[107]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다나카 유키오는 프로 야구 선수로서 22년간 활동하며 다양한 기록과 영광을 누렸다.

1986년 프로에 데뷔하여 신인 시절부터 주목받았고, 이듬해부터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88년에는 오시마 야스노리에게 야구를 배워 올스타전 팬 투표 1위에 선정되었고,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0년에는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타격감을 선보이며 수위 타자 경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1991년부터 등번호 6번을 달고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세 번째 골든 글러브 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좌익수로 전향하여 리그 최다 2루타를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특별상을 받았고, 1994년에는 우익수중견수로 활약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복귀하여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고, 타점왕 타이틀과 함께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 상을 받았다.

1997년에는 전 타순 홈런을 기록하고 FA 자격을 얻어 닛폰햄과 장기 계약을 맺었다. 1998년에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월간 MVP를 수상하며 활약했지만, 크고 작은 부상이 이어졌다. 1999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복귀하여 팀을 이끌었고,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001년에는 부상 선수들을 대신해 4번 타자로 활약했고, 2002년에는 3루수로 전향하여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 2003년부터는 주로 지명 타자1루수로 출장했고, 2004년에는 홋카이도로 연고지 이전 후에도 꾸준히 활약하며 2000안타 달성을 눈앞에 두었다.

2005년 통산 1000타점을 달성하고 라식 수술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07년에는 1루수로 활약하며 마침내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다나카 유키오는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등번호 6번은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될 뻔했으나, 본인의 승낙 하에 나카타 쇼에게 넘겨졌다.

다음은 다나카 유키오의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포지션주요 기록수상
1986-이스턴 리그 베스트 나인
1987유격수리그 최다 실책 (25개)
1988유격수올스타전 팬 투표 1위,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
1990유격수-
1991유격수골든 글러브
1993좌익수리그 최다 2루타 (32개), 퍼시픽 리그 특별상
1994우익수, 중견수-
1995유격수타점왕,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
1996유격수-
1997유격수전 타순 홈런
1998유격수, 1루수-
1999유격수-
2000유격수, 좌익수, 지명 타자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1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
20023루수, 우익수, 좌익수-
2003지명타자, 1루수-
2004지명타자, 1루수-
2005지명타자, 1루수통산 1000타점
2006지명타자, 1루수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 우승
20071루수, 지명타자통산 2000안타, 퍼시픽 리그 특별상 (공로상)



3. 1. 입단 초기 ~ 1992년

프로 1년차인 1986년일본어에는 스프링 캠프에서부터 2군에 있었지만 6월 10일 경에 1군에 등록돼 그 날에 열린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을 이뤘다.[108] 이 경기에선 두 번째 타석에서 고등학교 선배에 해당되는 이노우에 유지로부터 프로 첫 안타가 되는 홈런을 때려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17타석 무안타라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인해 1군 등록이 말소되는 등[109] 1군에는 복귀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 해에는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할 9푼 9리, 9홈런, 29타점 등의 성적을 남겨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110]

2년차인 이듬해 1987년일본어에는 팀을 젊게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의 방침도 있어서 전년도까지 주전이었던 다카시로 노부히로와 입단 동기이자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인 히로세 데쓰로를 대신해서 유격수로서 경기에 기용됐다.[108][111] 펀치력 있는 타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한편으로 수비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4월 28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는 1경기 세 번의 실책이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겨서 7점차로 역전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112] 더 나아가 개막전에서 1루로 악송구한 것이 원인으로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그 해에는 리그 1위인 25차례의 실책을 기록했다.[113] 그러나 프로의 레벨을 따라가는데 필사적이어서 주저앉을 여유조차 없었고 그 해에 코치로 부임해 합숙소에서 머물고 있던 사루와타리 히로시게와 함께 밤늦게까지 연습에만 몰두했다고 한다.[113]

1988년일본어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해 온 오시마 야스노리로부터 야구에 대한 자세와 배팅에 대해서 큰 영향을 받았다.[111] 그러나 스프링 캠프 중반에 오른쪽 허벅지 통증으로 경기 출전을 포기해서 오가와 고이치로부터 주전 자리를 위협받았지만 시범 경기 중반에 복귀했고[114] 5월 중순에는 클린업 타자로 기용됐다.[115]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 1위로 선출됐고 올스타전 3차전에서는 7번·유격수로서 선발 기용됐다.[116] 그해 타율 2할 7푼 7리, 홈런 16개의 성적을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되는 영예를 안았다. 더욱이 이 수상에 대해서는 “그 해에도 실책은 17차례로, 이시게 히로미치3루수로 변경하는 등 때때로 타 구단의 선발이 고정돼 있지 않았을 뿐”이라고 훗날 다나카 자신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117] 이듬해 1989년일본어에는 감독인 곤도 사다오가 견고한 수비와 타율 2할 7푼 ~ 2할 8푼, 20 ~ 30홈런을 기록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지만[118] 타격면에서의 성적은 작년보다 떨어졌다.

1990년일본어에는 그해 봄에 발병한 허리 통증으로 선발에서 제외됐지만 상체의 힘만을 없애는 스윙을 염두에 둬서 8월에는 타율이 3할을 넘어서 수위 타자로도 큰 기대를 받았다.[119] 8월 7일 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날려 타자 일순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1번 타자로서 첫 회에 만루 홈런을 날리는 등의 진기한 기록을 달성했다.[120] 시즌 오프에는 작년에 열애한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121]

이듬해인 1991년일본어부터 등번호는 ‘6’이 됐고, 이것이 은퇴할 때까지 계속됐다.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통산 3번째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시즌 종료 후에는 5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4500만(추정치)으로 갱신했다.[122] 1992년일본어에는 스프링 캠프 도중에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해서 시범 경기 종반에 출전했다. 개막전에 대주자로서 출전한 것 밖에 없어서 오른쪽 어깨가 회복되지 않아 7월 2일자로 선수 등록이 말소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123]

3. 2. 1993년 ~ 1997년

1993년에는 팔꿈치나 어깨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해 닛폰햄 감독으로 부임한 오사와 게이지의 지도 하에 좌익수로 전향했다. ‘너와 같이 죽는다’라는 오사와의 신뢰에 부응해서[107] 리그 최다인 32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그 해에는 퍼시픽 리그 특별 시상(노력상)을 수상했고[124] 연봉은 5800만(추정치)으로 갱신했다.[125]

1994년에는 우익수로서 기용돼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3번·우익수로서 선발 출전했고[126] 정규 시즌에서는 모두 개인 최고 성적인 27홈런, 87타점을 기록해 3200만이 상승한 연봉 9000만(추정치)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27] 이 해에는 중견수로서 자주 기용되기도 했다.

1995년에 우에다 도시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유격수로 다시 포지션이 변경됐고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게 됐다.[111] 5월에는 타율 3할 7푼 1리, 5홈런, 18타점의 성적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시즌 최종전이 된 10월 4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타점을 올려 이치로, 하쓰시바 기요시와 나란히[129] 시즌 8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6월 7일부터 9월 21일에 걸쳐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이 되는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을 달성했고 수비율도 리그 기록에 육박하는 9할 9푼이 됐다.[130] 시즌 타율 2할 9푼 1리는 자신의 최고 성적이었다. 그해에는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팀의 야수로서 최고 액수가 되는 4000만이 상승한 연봉 1.3억(추정치)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31]

1996년에는 7월에 타율 3할 5푼 1리, 7홈런, 22타점으로 통산 두 번째의 월간 MVP를 수상했고[128] 시즌에서는 22개의 홈런과 82타점 등의 성적을 남겼다. 전 이닝 출전 등이 평가를 받아 시즌 종료 후 계약 협상에서는 2000만이 상승한 연봉 1.5억(추정치)으로 갱신했으며[132] 세 번째의 미일 야구에 출전했다. 시즌 중간부터 오른쪽 팔꿈치에 경험한 적이 없는 극심한 통증이 일어나게 되면서 시즌 종료 후에 수술을 받았지만 통증이 가라앉지 못할 정도의 완치되진 않았다.[111]

1997년 8월 12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가 되는 전타순 홈런을 달성했고 9월 19일에 오른쪽 팔꿈치 검사를 받아 시즌 종료 후인 10월 6일에 유리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다.[133] 많은 구단들이 영입을 검토하고 있었지만[133] 그해에 취득한 FA권을 시즌 오프 때에 행사하여 재계약금 7500만과 연봉 1.5억(모두 추정치)으로 구단으로서는 역대 최장 기록이 되는 3년 계약을 맺고 닛폰햄에 잔류했다.[134]

3. 3. 1998년 ~ 2002년

은 캠프 초반인 2월 5일에 베이스 러닝 중 발을 헛디뎌, 왼쪽 무릎 내측 인대 손상으로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고[41], 오픈전도 2, 3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42]。 시즌에 들어가자 5월에 타율 .349, 9홈런, 17타점으로 3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6월 21일 롯데전에서는 1점을 뒤쫓는 9회 1사 2루 타석에서 구로키 도모히로로부터 역전 사요나라 2점 홈런[43], 6월 23일 다이에전에서는 6-6 동점인 9회 1사 만루 타석에서 오카모토 가쓰미치로부터 사요나라 안타를 쳐서[44], 2경기 연속 사요나라 타를 기록했다. 6월 하순에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6경기 결장했고 유격수에는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나라하라 히로시가 들어갔다. 복귀 후에는 프로 첫 1루수를 맡게 되었다[45]。 빅뱅 타선의 1번 타자로서 전반전에는 리그 톱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하고 있었지만[46], 7월에 오른쪽 팔꿈치의 변형성 관절증과 피로성 관절염이 판명되었고[47], 8월 1일 롯데전에서는 파울 플라이를 포구했을 때 넘어지면서 오른쪽 어깨 쇄골 관절을 타박하는[48] 등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에 1루수를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양보하고,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다. 5월 20일 다이에전에서 오른쪽 뒤꿈치, 5월 29일 오릭스전에서 왼쪽 발목을 다쳐서 타격 폼이 무너졌고, 타율은 한때 .235까지 떨어졌다[49]。 그 후에는 7월 2일부터 7월 8일에 걸쳐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50] 등 부활하여, 8일에는 퍼시픽 리그 통산 35000호 홈런이 되었다. 한편 전년에 은퇴한 히로세 데쓰로의 뒤를 이을 팀 리더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시즌 후 가타오카 아쓰시와 상의한 끝에, 가타오카를 새로운 리더로 하고 자신은 서포트를 하기로 결정했다[51]

은 신인 다나카 겐스케가 오픈전에서 유격수 선발로 기용되었지만, 개막 후에는 다나카 유키오가 전년과 마찬가지로 레귤러가 되었다. 시즌 전에 시드니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왼쪽 손 과로성 골 부상으로 5월 말부터 1개월 이상 등록이 말소되었다. 올림픽의 무대는, 고시엔이나 프로 1, 2년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되었다고 한다[52]。 팀 최고령 선수였고, 유격수나 좌익수, 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53]。 올림픽에서는 2홈런을 포함한 31타수 10안타, 타율 .323을 기록했고, 3위 결정전에서 팀 유일의 타점을 포함한 7타점을 올렸다.

은 개막 직후부터 샤먼 오반도나 가타오카, 나이젤 윌슨 등이 잇따라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여, 대신 4번을 맡았지만 4월 하순에는 타율이 2할을 밑돌았다[54]。 시즌 후에는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3년 계약을 맺었다[55]。 이 해에도 유격수뿐만 아니라 좌익수나 지명 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는 가타오카가 한신 타이거스로 FA 이적함에 따라 3루수로 포지션 변경되어,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56]。 다카다 노부히로 코치는 나이와 수비 범위도 고려하여, 타격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57]。 7월 27일부터 7월 31일에 걸쳐 5경기 연속 2루타를 기록했다. 수비에 관해서는 3루 수비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시즌 도중부터 2년차인 기모토 구니유키나 그 해 다이에에서 합류한 하야시 다카야가 3루 선발 출장하는 등, 자신은 종종 우익수로 기용되었고, 9월 이후에는 좌익수로 기용되었다. 시즌 후에는 500만 감소한 연봉 1.35억(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58]。 그해 시즌 100경기 출장은 마지막이 되었다.

3. 4. 2003년 ~ 2007년

2003년부터는 지명 타자 혹은 1루수로서의 출장이 대폭 증가했다. 그 해는 부상으로 두 번이나 등록 말소되었고,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은 10년 만에 멈췄다. 계약 갱신에서는 2,500만 엔이 감소한 1.1억(추정)이 되었다.[59]

2004년에 구단이 홋카이도로 이전했고, 이 무렵부터 매년 2000안타 달성을 기대했다.[60] 시즌 초반에는 13경기에서 12안타를 치는 좋은 출발이었지만, 4월 17일 롯데전에서 1루 수비 시 타구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맞아 균열 골절되었고, 약 2개월 반 동안 결장하여 복귀는 6월 26일이 되었다. 9월 20일 다이에전에서는, 9회말 동점 2사 만루 상황에서 SHINJO의 타구가 좌익수석으로 들어갔을 때, 1루 주자인 다나카는 사요나라 승리의 기쁨에 2루 앞에서 신조와 얼싸안고 한 바퀴 돌았다. 이 때문에, 앞선 주자를 추월한 신조는 아웃이 선언되어 홈런은 취소되었다. 기록이 1루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단타가 된 신조에게 사과했는데, "괜찮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겼는데!"라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61]

2005년은 8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사요나라 안타를 쳐서, 이것이 통산 1000타점이 되었다. 시력 저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시즌 후에는 라식 수술을 받았다.[62]

2006년은 주장에 취임하여,[63] 감독 트레이 힐먼의 기용법에 불만을 느낀 팀 동료들을 격려하는 등, 정신적인 면에서도 팀을 지지했다. 9월 이후는 6타수 무안타로 고전했지만, 프로 생활 21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헹가래를 받았다. 본인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제1전에 대타로 출장하여 범타로 물러났고,[64] 이후에는 출장 기회가 없었다. 또한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7번 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한 La New 베어스전은 노히트였지만,[65] 차이나 스타즈를 상대로 대타로 안타를 쳐서,[66] 팀도 아시아 제패를 달성했다.

2007년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요미우리 자이언츠로 FA 이적한 것도 있어, 1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기회가 늘었다. 4월 28일 라쿠텐전에서 2년 만의 홈런(6년 만의 만루 홈런)을 쳤고, 5월 5일 삿포로 돔에서의 오릭스전에서 구장별 홈런을 33개로 하여, 이로써 통산 안타 수는 1997개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홈 구장에서의 4경기에서 노히트로 고전했지만, 5월 17일 열린 도쿄 돔 (홈 경기)의 라쿠텐전에서 4회에 야마무라 히로키로부터 우전 안타를 쳐서, 사상 35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고,[67] 이 경기에서는 2년 만의 맹타상도 달성했다. 닛폰햄 출신으로 2000안타 달성은, 1972년 장훈 이후 35년 만이었다. 9월 7일에 전력 외 통보와 코치 취임을 제안받았고, 팔꿈치 등의 부상을 치료하고 휴양하고 싶다고 하여 코치를 거절했다.[68][69] 시즌 최종전이 되는 9월 19일 도쿄 돔에서 열린 라쿠텐전에서 대타로 적시타를 쳐, 경기 후에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스탠드에서 "유키오" 콜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70]

4. 은퇴 후

2003년에는 부상으로 두 차례나 1군 등록이 말소되면서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이 10년으로 끝났고,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이 삭감됐다.[151] 2004년 구단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통산 2000안타 달성을 기대받았다.[152] 시즌 초반에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4월 경기에서 오른손 집게 손가락 골절상을 입어 약 2개월 반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130] 9월 경기에서는 신조 쓰요시의 타구가 홈런으로 인정되지 않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때 신조는 1루 주자였던 다나카를 추월하면서 아웃으로 기록되었다.[153]

2005년에는 시력이 약해진 것을 느껴 시즌 후 라식 수술을 받았다.[154] 2006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아[155]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155] 일본 시리즈에서는 대타로 출전했지만,[156]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차이나 스타스와의 경기에서 대타로 출전해 안타를 기록하며 팀의 아시아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158]

2007년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1루수로 선발 출전하는 기회가 늘었다.[152] 4월에는 2년 만에 홈런을 기록했고, 5월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130] 9월에는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와 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부상 치료와 휴식을 위해 고사했다.[159][160] 시즌 최종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적시타를 치고, 200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161] 11월에는 팬 페스티벌에서 은퇴식을 가졌고,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됐다. 그해 퍼시픽 리그로부터 특별 시상(공로상)을 받았다.[124] 현역 시절 등번호 6번은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이 검토되었으나, 본인의 승낙을 얻은 후 나카타 쇼에게 넘겨졌다.

5. 플레이 스타일

오시마 야스노리의 타격폼을 참고하여 백스윙을 작게 하고 스텝을 밟는 타이밍을 조절하면서 타격이 개선되었다.[114] 1995년 무렵부터는 왼발을 작게 끌어서 타이밍을 맞추는 시계추 타법을 도입했다.[167] 오른쪽 팔꿈치 유리 연골 통증으로 슬럼프를 겪었기 때문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왼팔 위주의 폼을 만들었지만, 팔을 뻗었을 때 왼쪽 팔꿈치가 회전하기 때문에 오른팔의 완력으로 커버하고 있었다고 한다.[168] 또한 오른팔의 팔 둘레는 뻗친 상태에서 36cm가 되었다.[168] 몸쪽에 들어오는 공을 적극적으로 승부했으며,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인사이드 공에 덤벼들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2000안타를 달성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고집이 오랜 현역 생활로 연결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69]

전타순 홈런을 기록하는 등 다양한 타순을 맡았지만, 선구안이 좋지 않고 발이 느리다는 이유로 1번 타자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170] 닛폰햄이 도쿄 돔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던 시절, 여름의 장기간 원정 경기 때에는 하반신에 피로가 쌓여 타격 성적이 극도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이를 과제로 삼고 있었다.[137]

5. 1. 타격

다나카 유키오는 강렬한 타격과 강한 어깨를 가진,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공격형 유격수로 알려져 있었다.[166] 한편으로 타격이 부진하면 수비에도 악영향을 받기 쉬운 경향이 있었다.[166]

프로 1년차인 1986년에는 스프링 캠프에서부터 2군에 있었지만, 6월 10일에 1군에 등록되어 그 날 열린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다.[108] 이 경기에서 두 번째 타석에서 고등학교 선배인 이노우에 유지에게서 프로 첫 안타이자 홈런을 쳤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17타석 무안타라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는 등[109] 1군에 복귀하지 못했지만, 그 해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할 9푼 9리, 9홈런, 29타점을 기록하여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10]

2년차인 1987년에는 팀을 젊게 만들겠다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의 방침에 따라 전년도까지 주전이었던 다카시로 노부히로와 입단 동기이자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인 히로세 데쓰로를 대신해서 유격수로 기용됐다.[108][111] 펀치력 있는 타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한편으로 수비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112]

1988년,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해 온 오시마 야스노리로부터 야구에 대한 자세와 배팅에 대해서 큰 영향을 받았다.[111] 5월 중순에는 클린업 타자로 기용됐다.[115]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 1위로 선출됐다.[116] 1988년 시즌에는 타율 2할 7푼 7리, 홈런 16개를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17] 이듬해 1989년에는 감독인 곤도 사다오가 타율 2할 7푼 ~ 2할 8푼, 20 ~ 30홈런을 기록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118] 타격면에서의 성적은 작년보다 떨어졌다.

1990년에는 8월에는 타율이 3할을 넘어서 수위 타자로도 큰 기대를 받았다.[119] 8월 7일 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날려 타자 일순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1번 타자로서 첫 회에 만루 홈런을 날리는 등의 진기한 기록을 달성했다.[120]

1993년에는 리그 최다인 32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124] 1994년에는 모두 개인 최고 성적인 27홈런, 87타점을 기록했다.[127]

1995년에 우에다 도시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유격수로 다시 포지션이 변경됐고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게 됐다.[111] 5월에는 타율 3할 7푼 1리, 5홈런, 18타점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시즌 최종전이 된 10월 4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타점을 올려 이치로, 하쓰시바 기요시와 나란히[129] 시즌 8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해에는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31]

1996년에는 7월에 타율 3할 5푼 1리, 7홈런, 22타점으로 통산 두 번째의 월간 MVP를 수상했고[128] 시즌에서는 22개의 홈런과 82타점 등의 성적을 남겼다.

1998년에는 5월에 타율 3할 4푼 9리, 9홈런, 17타점으로 통산 세 번째의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빅뱅 타선의 1번 타자로서 시즌 전반기에는 리그 1위의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했지만[138] 크고 작은 부상이 계속됐다.

1999년에는 7월 2일부터 7월 8일에 걸쳐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142] 등 컨디션이 회복돼 이중 8일은 것은 퍼시픽 리그 통산 35,000호 홈런이 됐다.

2000년 올림픽 무대에서는 2개의 홈런을 포함한 31타수 10안타, 타율 3할 2푼 3리를 기록했다.[145]

2007년 4월 28일 라쿠텐전에서 2년 만의 홈런(6년 만의 만루 홈런)을 쳤고, 5월 17일 열린 도쿄 돔 (홈 경기)의 라쿠텐전에서 4회에 야마무라 히로키로부터 우전 안타를 쳐서, 사상 35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67]

연도소속 팀경기 수타수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타율
1986닛폰햄142741014.148
198711232566110933.203
19881305091412121657.277
1989130429106163743.247
19901304501293021852.287
19911304531091561362.241
19921000000----
19931284741203211263.253
19941305181482922787.286
19951304881422812580.291
19961305131422932282.277
19971335391372931963.254
19981074201152802463.274
19991315081372322374.270
200097328841611546.256
20011394911252202077.255
20021324671303141753.278
20037824066111932.275
200435792050010.253
20059819446112522.237
20065886152004.174
2007651353040519.222
통산: 22년223876732012394332871026.262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5. 2. 수비

1986년 프로 1년차에는 스프링 캠프에서부터 2군에 있었지만, 6월 10일에 1군에 등록되어 그 날에 열린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다.[108] 이 경기에서 두 번째 타석에서 고등학교 선배인 이노우에 유지에게서 프로 첫 안타인 홈런을 쳤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17타석 무안타라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고,[109] 그 해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할 9푼 9리, 9홈런, 29타점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10]

1987년에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이 팀을 젊게 만들겠다는 방침에 따라, 이전까지 주전이었던 다카시로 노부히로와 입단 동기이자 드래프트 1순위인 히로세 데쓰로를 대신해 유격수로 기용되었다.[108][111] 타격은 좋았지만 수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고, 4월 28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는 1경기 3 실책으로 7점차 역전패의 원인을 제공했다.[112] 개막전 1루 악송구로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고, 그 해 리그 최다인 25차례의 실책을 기록했다.[113] 그러나 프로 수준에 필사적으로 따라가느라 주저앉을 여유조차 없었고, 그 해 코치로 부임해 합숙소에서 함께 지내던 사루와타리 히로시게와 밤늦게까지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113]

1988년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트레이드로 온 오시마 야스노리에게서 야구 자세와 타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111] 스프링 캠프 중반 오른쪽 허벅지 통증으로 오가와 고이치에게 주전 자리를 위협받았지만, 시범 경기 중반에 복귀했고,[114] 5월 중순에는 클린업 타자로 기용됐다.[115] 그 해 올스타전 팬 투표 1위로 선출되었고, 올스타전 3차전에서는 7번·유격수로 선발 기용됐다.[116] 그 해 타율 2할 7푼 7리, 16홈런으로 처음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 해에도 실책은 17개였고, 이시게 히로미치3루수로 가는 등 타 구단 선발이 고정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117]

1989년 곤도 사다오 감독은 견고한 수비와 타율 2할 7~8푼, 20~30홈런을 기대했지만,[118] 타격 성적은 작년보다 떨어졌다.

1990년 봄 허리 통증으로 선발에서 제외됐지만, 상체 힘을 빼는 스윙을 염두에 둬 8월에는 타율 3할을 넘어 수위 타자를 기대했다.[119] 8월 7일 오릭스 브레이브스전에서 첫 타석 2루타로 타자 일순의 도화선을 만들었고, 두 번째 타석에서 1번 타자로 첫 회 만루 홈런을 쳤다.[120]

1991년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 통산 3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22] 1992년 스프링 캠프 중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시범 경기 종반에 출전했고, 개막전 대주자 출전이 전부였다. 오른쪽 어깨가 회복되지 않아 7월 2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123]

1993년 팔꿈치와 어깨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오사와 게이지 감독의 지도 하에 좌익수로 전향했다.

1994년 우익수로 기용돼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 2차전에서 3번·우익수로 선발 출전했다.[126] 이 해에는 중견수로도 자주 기용됐다.

1995년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 부임 후 유격수로 복귀,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111] 6월 7일부터 9월 21일까지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 수비율 9할 9푼을 기록했다.[130]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31]

1998년 프로 입문 후 처음으로 1루수를 맡았다.[137]

1999년 1루수 자리를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넘겨주고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다.

2000년 팀내 최고령 선수로 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로 기용됐다.[145]

2001년 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로 기용됐다.

2002년 가타오카의 FA 이적에 따라 3루수로 변경,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148] 다카시로 노부히로 코치는 연령과 수비 범위를 고려해 타격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149] 우익수, 9월 이후에는 좌익수로 기용됐다.

6. 에피소드

다나카 유키오는 프로 1년 차인 1986년 스프링 캠프에서 2군에 있었지만, 6월 10일 1군에 등록되어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다.[108] 이 경기에서 고등학교 선배인 이노우에 유지에게서 프로 첫 안타이자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17타석 무안타라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109] 그 해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할 9푼 9리, 9홈런, 29타점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10]

1987년에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의 방침에 따라 유격수로 기용되었다.[108][111] 4월 28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는 1경기 3실책을 기록하며 7점 차 역전패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112] 그 해 리그 최다인 25실책을 기록했지만,[113] 밤늦게까지 연습에 몰두하며 기량을 갈고닦았다.[113]

1988년,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해 온 오시마 야스노리에게서 야구에 대한 자세와 타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111] 그 해 올스타전에서 팬 투표 1위로 선출되었고, 3차전에서는 7번·유격수로 선발 기용되었다.[116] 시즌 타율 2할 7푼 7리, 16홈런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17]

1989년에는 곤도 사다오 감독이 견고한 수비와 타율 2할 7푼 ~ 2할 8푼, 20 ~ 30홈런을 기록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118] 타격 성적은 작년보다 떨어졌다.

1990년에는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8월에 타율 3할을 넘어서며 수위 타자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119] 8월 7일 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타석에서 2루타, 두 번째 타석에서 1번 타자로서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120] 시즌 후에는 작년에 열애한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121]

1991년부터 등번호 6번을 사용했고,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통산 세 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22] 1992년에는 스프링 캠프 도중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에 대주자로 출전한 것 외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7월 2일 선수 등록이 말소되어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123]

1993년, 오사와 게이지 감독의 지도 하에 좌익수로 전향하여 리그 최다인 32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107] 퍼시픽 리그 특별 시상(노력상)을 수상했다.[124] 1994년에는 우익수로 기용되어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126] 개인 최고 성적인 27홈런, 87타점을 기록했다.[127]

1995년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 부임 후 다시 유격수로 복귀하여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111] 5월에는 타율 3할 7푼 1리, 5홈런, 18타점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시즌 최종전에서 이치로, 하쓰시바 기요시와 함께[129] 시즌 8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을 달성했다.[130] 그해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31]

1996년 7월, 타율 3할 5푼 1리, 7홈런, 22타점으로 통산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시즌 종료 후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지만 통증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111]

1997년 8월 12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 전 타순 홈런을 달성했다.[133] 시즌 종료 후 FA권을 행사하여 닛폰햄에 잔류했다.[134]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1998년 스프링 캠프 초반 왼쪽 무릎 안쪽 인대 손상을 입었고,[135] 6월에는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6경기에 결장했다.[137] 7월에는 오른쪽 팔꿈치 변형성 관절염과 피로성 관절염이 판명되었고,[139] 8월에는 오른쪽 어깨 쇄관절 타박상을 입었다.[140]

1999년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1루수 자리를 넘겨주고 유격수로 복귀했지만, 5월에 오른쪽 발뒤꿈치와 왼쪽 발목 부상을 당해 타격 폼이 무너졌다.[141] 2001년에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4번 타자를 맡았지만 부진에 시달렸다.[146] 2002년에는 3루수로 수비 위치를 변경하고 다시 4번 타자를 맡았지만,[148] 시즌 100경기 출장이 마지막이 되었다.

2003년 이후에는 지명 타자 혹은 1루수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04년 구단이 홋카이도로 이전하면서 2000안타 달성을 기대했다.[60] 9월 20일 다이에전에서는 SHINJO의 타구가 홈런이 될 뻔했으나, 1루 주자였던 다나카가 2루 앞에서 신조와 얼싸안는 바람에 홈런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61]

2005년 8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시즌 후에는 라식 수술을 받았다.[62] 2006년 주장을 맡아[63]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7년 5월 17일 도쿄 돔에서 열린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67] 9월 7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와 코치 취임 제안을 받았지만, 부상 치료와 휴식을 이유로 코치직을 거절했다.[68][69] 9월 19일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11월 25일 팬 페스티벌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고, 11월 26일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

6. 1. 선수명 표기 및 애칭

다나카 유키오는 선수 시절 유격수였고, 1991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등번호 '6'번을 사용했다. 구계(球界)에서 굴지의 단련된 두꺼운 팔뚝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스로 농담 삼아 "앞다리"라고 부를 정도였다. 오른팔 팔뚝 둘레는 뻗은 상태에서 36cm나 되었다. 2016년 닛폰햄 2군 홈구장인 가마가야에서 열린 이스턴 리그 경기에서 다나카 유키오의 팔 사진을 거의 실물 크기로 인쇄한 "다나카 유키오 팜 감독 엄청난 팔 TICKET"이 발매되기도 했다.[94]

6. 2. 2000안타 관련 기록

다나카 유키오는 2000년에 신인 다나카 겐스케가 시범 경기에서 유격수로 기용됐지만, 시즌 개막 후에는 자신이 주전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166] 시드니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지만, 왼손 과로성 골상해로 5월 말부터 1개월 이상 등록이 말소됐다.[146] 올림픽에서는 팀내 최고령 선수로서 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로 기용되어 2개의 홈런을 포함, 31타수 10안타, 타율 3할 2푼 3리를 기록했고, 3위 결정전에서는 팀의 유일한 타점을 포함해 7타점을 올렸다.[145]

6. 3. 기타

1998년 스프링 캠프 초반에 베이스 런닝 중 발이 미끄러져 왼쪽 무릎 안쪽 인대 손상으로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135] 이후 6월 하순에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6경기를 결장했고, 복귀 후에는 프로 입문 후 최초로 1루수를 맡게 됐다.[137] 7월에는 오른쪽 팔꿈치의 변형성 관절염과 피로성 관절염이 판명됐고,[139] 8월 1일 지바 롯데와의 경기에서 파울 플라이를 잡다 넘어져 오른쪽 어깨 쇄관절에 타박상을 입는 등[140] 크고 작은 부상이 계속됐다.

1999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1루수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다. 그러나 5월 2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발뒤꿈치, 5월 29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왼쪽 발목을 다치는 등 부상으로 인해 타격 폼이 무너져 타율이 한때 2할 3푼 5리까지 떨어졌다.[141]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지만, 왼손 과로성 골상해로 5월 말부터 1개월 이상 등록이 말소됐다.[146] 올림픽에서는 팀내 최고령 선수로 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로 기용됐다.[145]

2001년 시즌 개막 직후부터 주전 선수들이 연달아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들을 대신해 4번 타자를 맡았지만, 4월 하순에는 타율이 2할에 못 미칠 정도로 부진에 시달렸다.[146]

2002년 3루수로 수비 위치가 변경되면서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148] 이 해가 시즌 100경기 출장의 마지막이었다.

3루수유격수 사이의 깊은 위치에서도 따라붙는 수비 범위와 노 바운드로 1루에 보내는 송구를 밑천으로 하고 있었다.[166] 주전 유격수로 정착한 무렵에는 리그 최다 실책수를 기록했지만, 1995년에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퍼시픽 리그 기록을 수립하는 등 ‘수비의 명수’로 불리며 통산 5차례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에 비해 단단한 인조잔디를 갖춘 도쿄 돔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신체적인 부담이 커서 30세를 넘긴 무렵부터 자신의 송구 능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166]

방망이에 대해서는 고집이 적어서 입단 시 후타무라 다다미로부터 받은 방망이의 형태를 기본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172] 길이 34인치(86cm), 무게 920 ~ 930g으로 반발력이 있는 타격감을 좋아해서 화이트 애쉬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172] 다만 부러지기 쉬워서 연습에서는 같은 모양의 아오다모 제품을 사용했다고 한다.[172]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한 시점에서 시즌 타율 3할 이상을 한 번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시바타 이사오,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은 역대 세 번째이다[174](기누가사는 달성 다음 해인 1984년에 타율 3할을 기록했다).

구계(球界) 굴지의 단련된 두꺼운 팔뚝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스로도 농담으로 "앞다리"라고 부를 정도이다. 오른팔의 팔뚝 둘레는 뻗은 상태에서 36cm나 되었다. 닛폰햄 2군 감독을 맡았던 2016년에는, 홈 구장인 가마가야에서 열린 이스턴 리그 경기에서, 다나카 유키오(田中幸雄)의 팔 사진을 거의 실물 크기로 인쇄한 "다나카 유키오 팜 감독 엄청난 팔 TICKET"이 발매되었다[94]

7. 상세 정보

다나카 유키오는 프로 선수 생활 동안 여러 기록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1986년 프로 1년 차에는 6월 10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프로 첫 안타를 고등학교 선배인 이노우에 유지에게서 홈런으로 기록했다.[108] 그러나 다음날부터 17타석 무안타로 부진하여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109] 그해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99, 9홈런, 29타점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10]

1987년에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의 방침에 따라 유격수로 기용되었지만,[108][111] 수비에서 리그 1위인 25실책을 기록했다.[113]

1988년에는 주니치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해 온 오시마 야스노리에게 야구에 대한 자세와 배팅에 대해 큰 영향을 받았다.[111] 올스타전에 팬 투표 1위로 선출되었고,[116] 타율 .277, 16홈런으로 첫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17]

1989년에는 곤도 사다오 감독으로부터 견고한 수비와 타율 .270 ~ .280, 20 ~ 30홈런을 기대받았지만,[118] 타격 성적은 작년보다 떨어졌다.

1990년에는 허리 통증으로 선발에서 제외되었지만, 8월에는 타율이 3할을 넘어 수위 타자로도 큰 기대를 받았다.[119] 8월 7일 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번째 타석에서 2루타, 두 번째 타석에서 1번 타자로서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120] 시즌 후에는 작년에 열애한 부인과 결혼했다.[121]

1991년부터 등번호 6번을 달았고,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세 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22] 1992년에는 스프링 캠프 도중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개막전에 대주자로 출전한 것 외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123]

1993년에는 좌익수로 전향하여 리그 최다인 32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124] 1994년에는 우익수로 기용되어 올스타전에 출전했고,[126] 커리어 하이인 27홈런, 87타점을 기록했다.[127]

1995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돌아와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111] 5월에는 월간 MVP를 수상했고,[128] 시즌 최종전에서 이치로, 하쓰시바 기요시와 함께[129] 8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도 달성했다.[130]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131]

1996년 7월에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고,[128] 22개의 홈런과 82타점을 기록했다. 세 번째 미일 야구에 출전했다.[132]

1997년 8월 12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로 전 타순 홈런을 달성했다.[133] 시즌 후 FA권을 행사하여 3년 계약을 맺고 닛폰햄에 잔류했다.[134]

1998년에는 왼쪽 무릎 안쪽 인대 손상으로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지만,[135] 5월에 세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128] 빅뱅 타선의 1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크고 작은 부상이 계속되었다.[140]

1999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다. 7월 8일에는 퍼시픽 리그 통산 35,000호 홈런을 기록했다.[142]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지만, 왼손 과로성 골절상으로 5월 말부터 1개월 이상 등록이 말소됐다.[146] 올림픽에서는 3위 결정전에서 팀 유일의 타점을 포함한 7타점을 올렸다.[145]

2001년에도 유격수, 좌익수,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146]

2002년에는 3루수로 수비 위치가 변경되어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148] 9월 이후에는 좌익수로 기용되었다.

야구계에서 굴지의 단련된 팔뚝 굵기로 알려져 있으며, '앞다리'라고 불릴 정도였다. 닛폰햄 2군 감독을 맡은 2016년에는 2군 연고지인 가마가야에서의 이스턴 리그 경기에서 다나카 유키오의 팔뚝 사진을 거의 실물 크기로 인쇄한 '다나카 유키오 2군 감독 대단한 팔 TICKET'이 발매되기도 했다.[175]
통산 기록:

연도소속팀경기 수타수안타홈런타점타율
1986닛폰햄 | 1427413.148
198711232566933.203
19881305091411657.277
1989130429106743.247
19901304501291852.287
19911304531091362.241
199210000----
19931284741201263.253
19941305181482787.286
19951304881422580.291
19961305131422282.277
19971335391371963.254
19981074201152463.274
19991315081372374.270
200097328841546.256
20011394911252077.255
20021324671301753.278
20037824066932.275
2004357920010.253
20059819446522.237
200658861504.174
20076513530519.222
통산: 22년 | 2238767320122871026.262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주요 타이틀 및 수상:

수상내용
타점왕1995년
베스트 나인4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5년, 1996년)
골든 글러브상5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1년, 1995년, 1996년)
월간 MVP3회 (1995년 5월, 1996년 7월, 1998년 5월)
도쿄 돔 MVP1회 (1994년)
삿포로 돔 MVP 공로상2007년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3회 (1993년 <노력상>, 2000년 <회장 특별상 (시드니 올림픽 출장)>, 2007년 <공로상>)
미야자키 현 현민 영예상2007년


7. 1. 출신 학교

우메키타 초등학교 5학년 때 연식 야구팀에 들어갔다.[100][101] 나카고 중학교 야구부에서는 8번 타자로 뛰었으며, 눈에 띄는 성적은 없었다.[102] 일반 입시를 거쳐 미야코노조 고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동기 신입 부원은 60명 이상이었으나,[103] 우타 기술과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1학년 가을부터 주전으로 기용되었다.[102] 2학년 때는 다구치 류지와 함께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와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102]

7. 2. 선수 경력

미야코노조 고등학교 시절 1학년 가을부터 2번·유격수 레귤러로 정착했다. 2학년 때에는 제56회 선발 대회와 제66회 선수권 대회에 출전, 두 대회 모두 KK 콤비가 있던 PL 학원에게 패했다. 3학년 때는 미야자키 대회 3회전에서 패했다. 고교 통산 35홈런을 기록했다.[8]

1985년 드래프트 3순위로 닛폰햄 파이터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계약금은 3000만, 연봉은 280만(모두 추정)이었다.

입단 첫 해인 1986년 6월 10일 난카이전에서 고등학교 선배인 이노우에 유지로부터 프로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12] 그해 이스턴 리그에서 타율 .299, 9홈런, 29타점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4]

1987년에는 팀의 젊은 피를 키우려는 다카다 시게루 감독의 방침에 따라 유격수로 기용되었다.[15] 그러나 수비에서 리그 1위인 25실책을 기록했다.[17]

1988년에는 오시마 야스노리로부터 야구에 대한 자세와 타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해 올스타전에 팬 투표 1위로 선출되었고,[20] 타율 .277, 16홈런으로 첫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1]

1990년 6월 19일 세이부전에서 시오자키 테쓰야로부터 사요나라 적시타를 쳤다.[24] 8월 7일 오릭스전에서는 첫 타석에서 2루타를 쳐서 타자 일순의 포문을 열었고, 두 번째 타석에서 1번 타자로 초회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24]

1991년부터 등번호 6번을 달았고,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세 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6]

1993년에는 좌익수로 전향하여 리그 최다인 322루타를 기록했다.[28] 1994년에는 우익수로 기용되어 커리어 하이인 27홈런, 87타점을 기록했다.[31]

1995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돌아와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 5월에는 타율 .371, 5홈런, 18타점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32] 시즌 최종전에서 이치로, 하쓰시바 기요시와 함께[33] 80타점으로 최다 타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339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도 달성했다.[34] 그 해 5년 만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35]

1996년 7월에 타율 .351, 7홈런, 22타점으로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1997년 8월 12일 롯데전에서 NPB 사상 3번째로 전 타순 홈런을 달성했다.[37] 시즌 후에는 FA권을 행사하여 3년 계약을 맺고 잔류했다.[39]

1998년 6월 21일 롯데전에서 구로키 도모히로로부터 역전 사요나라 2점 홈런,[43] 6월 23일 다이에전에서는 오카모토 가쓰미치로부터 사요나라 안타를 쳐서[44] 2경기 연속 사요나라 타를 기록했다.

1999년에는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다. 7월 8일에는 퍼시픽 리그 통산 35000호 홈런을 기록했다.[50]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3위 결정전에서 팀 유일의 타점을 포함한 7타점을 올렸다.

2002년에는 3루수로 포지션 변경되어 다시 4번 타자를 맡았다.[56]

2004년 9월 20일 다이에전에서 SHINJO의 타구가 좌익수 쪽으로 들어갔을 때, 1루 주자였던 다나카는 2루 앞에서 신조와 얼싸안고 한 바퀴 돌았다. 이 때문에 신조는 아웃되어 홈런은 취소되었다.[61]

2005년 8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사요나라 안타로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2006년에는 주장에 취임하여[63]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07년 5월 17일 도쿄 돔에서 열린 라쿠텐전에서 사상 35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67] 9월 7일에 전력 외 통보를 받았고, 9월 19일 경기 후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70] 11월 26일자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

7. 3. 지도자 경력

2003년에는 부상으로 두 차례나 1군 등록이 말소되면서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이 10년으로 끝났고,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이 2,500만 엔 삭감된 1.1억(추정치)으로 변경되었다.[151]

2004년에는 구단이 연고지를 홋카이도로 이전하면서 통산 2000안타 달성이 기대되었다.[152] 시즌 초반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4월 17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1루 수비 도중 타구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맞아 골절상을 입고 약 2개월 반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130] 6월 26일에 복귀하였고, 9월 20일 다이에와의 경기에서는 9회말 동점 2사 만루 상황에서 신조 쓰요시의 타구가 좌익수 뒤 관중석으로 넘어갔을 때 1루 주자였던 다나카는 끝내기 승리가 기쁜 나머지 2루 베이스 앞에서 신조와 얼싸안고 한 바퀴를 돌았다. 이로 인해 선행 주자를 추월한 신조는 아웃으로 선언되어 홈런이 취소되었고, 기록은 단타로 처리되었다. 신조는 다나카에게 사과했지만, 신조는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겼으니깐요!”라며 웃는 얼굴로 다나카를 위로했다.[153]

2005년 8월 27일, 소프트뱅크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쳐 개인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시력이 약해진 것을 느껴 시즌 후 라식 수술을 받았다.[154]

2006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어[155] 감독 트레이 힐만의 기용법에 불만을 느낀 팀 동료를 격려하는 등 정신적인 면에서도 팀을 이끌었다.[107] 9월 이후 6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지만, 프로 생활 21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경험하며 헹가래를 받았다.[155]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대타로 출전해 범타로 물러났고,[156] 이후 출전 기회가 없었다.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라뉴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7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전해 무안타에 그쳤지만,[157] 차이나 스타스와의 경기에서 대타로 출전해 안타를 기록하며[158] 팀의 아시아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7년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1루수로 선발 출전하는 기회가 늘어났다.[152] 4월 2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2년 만에 홈런(6년 만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고, 5월 5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구장별 홈런을 33개로 늘리며 통산 안타 수를 1997개로 만들었다. 이후 홈구장에서 치른 4경기에서 무안타에 그쳤지만, 5월 17일 도쿄 돔(홈 경기)에서 열린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35번째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고, 2년 만에 맹타상도 받았다.[130]

9월 7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와 함께 코치직을 제안받았지만, 팔꿈치 등의 부상 치료와 휴식을 위해 고사했다.[159][160] 시즌 최종전인 9월 19일 도쿄 돔에서 열린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대타로 출전해 적시타를 치고, 경기 후 2007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관중석에서는 ‘유키오’(幸雄일본어)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161] 11월 25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팬 페스티벌에서 은퇴식을 가졌고, 11월 26일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 그해 퍼시픽 리그로부터 특별 시상(공로상)을 받았다.[124] 현역 시절 오랫동안 사용했던 등번호 6번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닛폰햄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이 검토되기도 했으나, 본인의 승낙을 얻은 후 그해 가을에 입단한 나카타 쇼에게 넘겨졌다.

7. 4. 수상·타이틀 경력

다나카 유키오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수상내용
타점왕1995년
베스트 나인4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5년, 1996년)
골든 글러브상5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1년, 1995년, 1996년)
월간 MVP3회 (1995년 5월, 1996년 7월, 1998년 5월)
도쿄 돔 MVP1회 (1994년)
삿포로 돔 MVP 공로상2007년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3회 (1993년 <노력상>, 2000년 <회장 특별상 (시드니 올림픽 출장)>, 2007년 <공로상>)
미야자키 현 현민 영예상2007년


7. 4. 1. 타이틀

田中 幸雄|다나카 유키오일본어는 1995년에 타점왕을 획득했다.[129]

7. 4. 2. 수상


  • 베스트 나인: 4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5년, 1996년)[131]
  • 골든 글러브상: 5회 (유격수 부문: 1988년, 1990년, 1991년, 1995년, 1996년)[131]
  • 월간 MVP: 3회 (1995년 5월, 1996년 7월, 1998년 5월)[128]
  • 도쿄 돔 MVP: 1회 (1994년)[127]
  • 삿포로 돔 MVP 공로상 (2007년)
  •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 3회 (1993년 <노력상>,[124] 2000년 <회장 특별상 (시드니 올림픽 출장)>,[145] 2007년 <공로상>)
  • 미야자키 현 현민 영예상 (2007년)

7. 5. 개인 기록

다나카 유키오는 선수 시절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기록 종류내용비고
통산 100홈런1994년 8월 31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4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2회초에 야마오키 유키히코에게서 솔로 홈런역대 180번째
통산 1000경기 출장1995년 8월 1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0차전(후쿠시마 현영 아즈마 구장), 4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역대 326번째
통산 1000안타1996년 5월 14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6차전(도쿄 돔), 3회말에 오노 가즈요시에게서역대 182번째
통산 150홈런1996년 9월 28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5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2회초에 가네다 마사히코에게서 2점 홈런역대 106번째
통산 200홈런1999년 5월 14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6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1회초에 소노카와 가즈미에게서 좌월 2점 홈런역대 70번째
통산 1500경기 출장1999년 8월 15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도쿄 돔), 5번·유격수로 선발 출장역대 126번째
통산 1500안타2000년 4월 5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차전(도쿄 돔), 6회말에 미즈오 요시타카에게서 2루타역대 79번째
통산 300 2루타2000년 5월 14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8차전(도쿄 돔), 6회말에 다카무라 히로시에게서역대 37번째
통산 1000삼진2000년 5월 30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0차전(도쿄 돔), 3회말에 브래디 라지오에게서역대 26번째
통산 250홈런2001년 9월 4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7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7회초에 오쿠보 마사노부에게서 좌중간 동점 2점 홈런역대 42번째
통산 350 2루타2002년 7월 31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세이부 돔), 7회초에 도이 요시히로에게서역대 23번째
통산 3000루타2002년 9월 7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1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2회초에 나단 민치에게서 좌전 안타역대 36번째
통산 2000경기 출장2004년 6월 30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7차전(삿포로 돔), 6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역대 35번째
통산 1000타점2005년 8월 27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7차전(삿포로 돔), 10회말에 마하라 다카히로에게서 중월 끝내기 적시타역대 25번째
통산 2000안타2007년 5월 17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2차전(도쿄 돔), 4회말에 야마무라 히로키에게서 우전 안타역대 35번째
339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1995년 6월 7일 ~ 9월 21일퍼시픽 리그 유격수 최고 기록[130]
전 타순 홈런1997년 8월 12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7차전(미야기 구장), 5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2회초에 소노카와 가즈미에게서 홈런역대 3번째(후루야 히데오, 마쓰나가 히로미에 이어 달성)[184]
4년 연속 전 경기 출장1988년 ~ 1991년역대 5번째
퍼시픽 리그 통산 35000호 홈런1999년 7월 8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4차전(도쿄 돔), 5회말에 무토 준이치로에게서
33개 구장에서 홈런2007년 5월 5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8차전(삿포로 돔), 8회말에 모토야나기 가즈야에게서 홈런가네모토 도모아키(33개 구장)와 공동 2위[185]
올스타전 출장9회1988년 ~ 1991년, 1994년 ~ 1997년, 1999년


7. 5. 1. 첫 기록

프로 1년차인 1986년에는 스프링 캠프에서부터 2군에 있었지만 6월 10일 경에 1군에 등록돼 그 날에 열린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을 이뤘다.[108] 이 경기에서 두 번째 타석에서 고등학교 선배에 해당되는 이노우에 유지에게서 프로 첫 안타가 되는 홈런을 때려냈다.[108] 하지만 다음날부터 17타석 무안타라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인해 1군 등록이 말소됐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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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기타 참고로 소노카와 가즈미로부터 전타순 홈런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185] 기타 역대 1위는 [[야마우치 가즈히로 (1932년)|야마우치 가즈히로]](39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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