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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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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는 19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저술가로, 복음서의 기적들을 신화로 해석하는 혁신적인 성서 비평으로 큰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27세에 발표한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기독교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복음서의 기적을 부정하며, 예수를 인류 전체의 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저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는 이후에도 기독교 교리,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풍자, 철학적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슈트라우스의 사상은 진화론적 범신론으로 이어졌으며, 니체, 슈바이처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복음서의 신화적 해석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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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기본 정보
이름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원어 이름David Friedrich Strauß
로마자 표기Dabitŭ Pŭridirikhi Syŭt'rausu
직업신학자, 철학자, 저작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출생과 사망
출생일1808년 1월 27일
출생지루트비히스부르크,
사망일1874년 2월 8일
사인(정보 없음)
학력
출신 학교튀빙겐 대학
종교
종교기독교
교파프로테스탄트
가족
영향 받은 인물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기타 정보
서명(정보 없음)

2. 생애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는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태어나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슐라이어마허헤겔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으나, 헤겔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주로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았다.

1832년 튀빙겐으로 돌아와 잠시 강의를 맡았으나, 곧 그의 대표작이자 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예수의 생애'' 집필에 전념했다. 27세에 출간된 이 책에서 슈트라우스는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로 해석하며, 기존의 기독교 역사관에 도전했다. 그는 예수 개인보다는 인류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며, 헤겔의 역사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이 책은 "유다의 배신과 같은 유해한 책"이라는 혹평을 받을 정도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슈트라우스는 평생 대학 강단에 서지 못하고 저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에 답변하는 글들과 ''기독교 교의''를 출판한 후, 그는 약 20년간 신학 논쟁에서 벗어나 문학 및 전기 작가로 활동했다. 만년에는 다시 신학 연구로 돌아와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범신론적 사상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당시 청년 헤겔 학파는 물론 후대의 실존주의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작, 특히 ''예수의 생애''는 니체슈바이처 등 여러 사상가들에게 지속적인 비판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08-1831)

슈트라우스의 출생지, 루트비히스부르크


그는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신학 연구를 준비하기 위해 울름 근처의 블라우보이렌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에 보내졌다. 학교의 두 주요 교사로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켄(Friedrich Heinrich Kern, 1790–1842) 교수와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 교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학생들에게 고대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경뿐만 아니라 고전 텍스트에도 적용할 수 있는 텍스트 비평의 원리를 심어주었다.

1825년, 슈트라우스는 튀빙겐 대학교—튀빙거 슈티프트에 입학했다. 그곳의 철학 교수들은 그에게 흥미를 주지 못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야코프 뵈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이론이 차례로 그의 지지를 받았다.[2] 1830년, 그는 시골 성직자의 조수가 되었고, 9개월 후 마울브론과 블라우보이렌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라틴어, 역사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1831년 10월, 슈트라우스는 베를린에서 슐라이어마허와 헤겔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직위를 사임했다.

2. 2. 베를린 유학 (1831-1832)

1831년 10월, 슈트라우스는 슐라이어마허헤겔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기존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러나 헤겔은 슈트라우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망했고, 그는 주로 슐라이어마허의 강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의 생애에 관한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는 슈트라우스에게 큰 흥미를 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예수의 생애''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슈트라우스는 헤겔의 추종자들과 교류하며 지적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헤겔 철학에서 Vorstellungdeu(표상)과 Begriffdeu(개념)을 구별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슈트라우스는 그의 신학 사상의 핵심이 되는 두 저서, ''Das Leben Jesudeu''(예수의 생애)와 ''Christliche Glaubenslehredeu''(기독교 교리)의 기본 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2. 3. 튀빙겐 복귀와 ''Das Leben Jesu'' 집필 (1832-1836)

1831년 10월, 슈트라우스는 베를린으로 가서 슐라이어마허헤겔 밑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도착 직후 헤겔이 사망하여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만 들을 수 있었다.[2] 이 시기 그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주요 저서가 될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832년, 슈트라우스는 튀빙겐으로 돌아와 보조 교사(Repetent) 자격으로 논리학, 플라톤 철학, 철학사 및 윤리학을 강의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833년 가을, 그는 자신의 역작인 ''예수의 생애''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Das Leben Jesu'' 초판(1835) 표지


슈트라우스는 27세의 나이로 이 책의 완성을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았고, 1835년부터 1836년에 걸쳐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예수의 생애, 비판적으로 고찰함)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신학계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훗날 이 책은 영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 (메리 앤 에번스)에 의해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3권, 런던, 1846)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영어권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4. ''Das Leben Jesu'' 이후 (1836-1874)

그는 《기독교 교리(Christliche Glaubenslehre)》를 출판한 후 20년 넘게 신학 분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1842년 8월 30일, 그는 오페라 가수로 명성이 높았던 교양 있는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제 셰베스트 (1813–1870)와 결혼했다.[10][11]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두 자녀를 낳은 후 1847년 부부는 별거에 합의했다.[12] 슈트라우스는 이후 다른 여성과 재혼을 원했지만, 아내 셰베스트는 끝내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13]

1847년 슈트라우스는 만하임에서 《Der Romantiker auf dem Thron der Cäsaren》(카이사르의 왕좌에 앉은 낭만주의자)를 출판하며 문학 활동을 재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풍자적으로 비교했다. 기독교 확산을 막으려 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비현실적인 몽상가이자, 고대에 대한 향수를 삶의 방식으로 삼아 현재의 절박한 필요에는 눈을 감은 인물"[14]로 묘사했는데, 이는 봉건제 중세 사회의 영광을 회복하려 했던 당시 프로이센 국왕의 낭만주의적 이상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었다.

1848년, 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크리스토프 호프만 (1815–1885)에게 패배했다. 이후 뷔르템베르크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선거구민들로부터 사임 요구를 받았다. 정치적 실망감을 뒤로하고 그는 여러 전기 작품 저술에 몰두하며 독일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슈바르트(Schubart)의 삶》(2권, 1849), 《크리스티안 뫼르클린(Christian Märklin)》(1851), 《니코데무스 프리슐린》(1855), 《울리히 폰 후텐》(3권, 1858–1860) 등이 있다.

슈트라우스는 1862년 H. S. 라이마루스의 전기를 출판하며 다시 신학 연구로 돌아왔다. 2년 뒤인 1864년에는 《독일 민족을 위한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für das deutsche Volk bearbeitet)를 출판했다. 이 책은 첫 번째 《예수의 생애》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비판을 받았고,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팸플릿 《반쪽과 전체》(Die Halben und die Ganzen, 1865)를 통해 다니엘 쉔켈 (1813–1885)과 에른스트 빌헬름 헹스텐베르크 (1802–1869) 등의 비판에 반박했다.

그의 저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Der Christus des Glaubens und der Jesus der Geschichte, 1865)는 당시 처음 출판된 슐라이어마허의 예수 생애 강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1865년부터 1872년까지 슈트라우스는 다름슈타트에 거주했으며, 1870년에는 볼테르에 대한 강의를 출판했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옛 신앙과 새 신앙》(Der alte und der neue Glaube, 1872)은 첫 《예수의 생애》만큼이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책에서 슈트라우스가 기독교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보이고, 현대 과학의 유물론을 수용하며 영적 철학을 포기했다는 주장은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당혹감을 자아냈다. 니체는 그의 첫 번째 반시대적 고찰에서 이 작품을 강하게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는 이 책의 네 번째 판(1873) 서문에 《서문으로서의 후기》(Nachwort als Vorwort)를 추가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 직후 병을 얻은 슈트라우스는 1874년 2월 8일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3. 주요 저작

슈트라우스는 신학 및 철학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담은 ''예수의 생애'',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재검토한 ''기독교 교리'', 그리고 후기 사상을 집대성한 ''옛 신앙과 새 신앙''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비평서와 전기 작품들을 저술했다.

3. 1.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예수의 생애, 비판적으로 고찰함) (1835-1836)

슈트라우스의 대표작인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예수의 생애, 비판적으로 고찰함de''는 1835년부터 1836년까지 출간되어 신학계와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요소라고 주장했다.[3][4][5] 슈트라우스는 성경 기록들을 비교하며 나타나는 여러 모순점을 지적했으며, 초기 교회가 예수를 유대교 예언 속 메시아로 제시하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들을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지배적이던 두 가지 견해, 즉 기적을 초자연적이지 않은 사건에 대한 오해로 설명하려던 합리주의와 성경 기록이 완전히 정확하다고 믿었던 초자연주의 모두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기적 이야기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신화로 해석하는 제3의 길을 제시했으며, 이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문헌적, 역사적 연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8]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카를 아우구스트 폰 에센마이어는 1835년 서평에서 이 책을 "오늘날의 가룟 유다"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는 이에 대해 "신학적 무지와 종교적 편협함 사이의 정당한 결혼의 산물이며, 몽유병 철학의 축복을 받았다"고 응수했다. 다른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다의 배신과 같은, 우리에게 가장 유해한 책"이라는 혹평이 나올 정도였다. 슈트라우스는 이 저서를 통해 기존의 기독교적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의 역사 철학을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한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통해 실현될 때 진정한 기독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논란은 학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슈트라우스가 취리히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자 격렬한 반대 여론이 일었고, 결국 취리히 당국은 그가 부임하기도 전에 교수직을 박탈하고 연금을 지급하며 은퇴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취리히의 사순절 축제 기간에는 슈트라우스의 허수아비가 불태워지는 일까지 벌어졌다.[6] 슈트라우스는 이때 받은 연금(연간 1000CHF)을 빈민들에게 기부했다.[7] 그는 이후 이 책에 대한 비판에 답변하는 글들을 발표했으며, 이 책으로 인한 논란 때문에 평생 대학 강단에 서지 못하고 저술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3. 2. ''Christliche Glaubenslehre'' (기독교 교리) (1840-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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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Der alte und der neue Glaube'' (옛 신앙과 새 신앙) (1872)

3. 4. 기타 저작

슈트라우스는 《기독교 교리(Christliche Glaubenslehrede)》를 출판한 후 20년 넘게 신학 분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1842년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제 셰베스트와 결혼했으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여 1847년 별거에 이르렀다.[10][11][12]

1847년, 슈트라우스는 만하임에서 《카이사르의 왕좌에 앉은 낭만주의자(Der Romantiker auf dem Thron der Cäsarende)》를 출판하며 문학 활동을 재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비교하며, 기독교 이전 시대로 회귀하려 했던 율리아누스를 "비현실적인 몽상가이자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현재의 필요를 외면한 인물"[14]로 묘사했다. 이는 당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가졌던 낭만주의적 환상, 즉 봉건제 중세 사회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크리스토프 호프만에게 패했으나, 뷔르템베르크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지역구민들의 사임 요구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실망 이후, 슈트라우스는 독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전기 작품 집필에 몰두했다.

  • 《슈바르트(Schubart)의 삶》(2권, 1849)
  • 《크리스티안 뫼르클린(Christian Märklinde)》(1851)
  • 《니코데무스 프리슐린》(1855)
  • 《울리히 폰 후텐》(3권, 1858–1860)


1862년, 슈트라우스는 《H. S. 라이마루스》 전기를 출판하며 다시 신학 분야로 돌아왔다. 2년 뒤인 1864년에는 《독일 민족을 위한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für das deutsche Volk bearbeitetde)》를 발표했다. 이 책은 그의 첫 번째 《예수의 생애》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슈트라우스는 1865년 소책자 《반쪽과 전체(Die Halben und die Ganzende)》를 통해 다니엘 쉔켈과 에른스트 빌헬름 헹스텐베르크 등의 비판에 응수했다.

같은 해(1865년) 그는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Der Christus des Glaubens und der Jesus der Geschichtede)》를 출판하여, 당시 처음 공개된 슐라이어마허의 예수 생애 강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1870년에는 볼테르에 관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그의 마지막 주요 저작은 《옛 신앙과 새 신앙(Der alte und der neue Glaubede)》(1872)이다. 이 책은 《예수의 생애》만큼이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점과 현대 과학의 유물론을 수용하며 영적 철학을 포기한 듯한 태도는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당혹감을 자아냈다. 니체는 그의 저서 《반시대적 고찰》의 첫 번째 에세이에서 이 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는 1873년 이 책의 4판에 《서문으로서의 후기(Nachwort als Vorwortde)》를 추가하여 자신의 입장을 보충 설명했다.

슈트라우스의 저작들은 《기독교 교리》를 제외하고 에두아르트 젤러에 의해 총 12권의 전집으로 출판되었으며, 그의 서한들을 모은 《선집 서간(Ausgewählte Briefede)》은 1895년에 출간되었다.

4. 사상과 영향

슈트라우스의 사상은 그의 대표 저서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de, 1835-1836)에 잘 나타나 있다. 27세에 출간된 이 책은 당시 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기존의 기독교적인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의 역사 철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사실성을 부정했다. 이는 복음서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전통적인 시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예수라는 특정 인물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은 역사적 예수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이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서 비평학과 역사적 예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는 출간 직후부터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책을 두고 "유다의 배신과 같은, 우리에게 가장 유해한 책"이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 이 책으로 인한 논란 때문에 슈트라우스는 평생 대학 교직을 얻지 못하고 저술가로 활동해야 했다. 그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몇 권의 답변서를 출간했지만, 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이후 『기독교 교의』(Die christliche Glaubenslehrede, 1840-1841)를 저술한 뒤 약 20년간 신학 논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만년에 슈트라우스는 다시 신학 관련 저술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무신론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범신론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사상은 청년 헤겔 학파는 물론 후대 실존주의 철학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슈트라우스의 사상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니체는 그의 저서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de)의 첫 번째 에세이에서 슈트라우스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문제의식 자체에서는 영향을 받았다. 또한, 슈바이처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de, 1906)에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예수 연구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하며 그의 학문적 기여를 인정했다. 슈트라우스가 촉발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신학계의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다.

5. 비판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출생지인 루드비히스부르크에 있는 기념 명판


J. F. 스미스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1875-1889)의 슈트라우스 관련 기사에서 그의 정신을 거의 전적으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것으로 평가하며, 종교적 감정, 철학적 통찰력, 역사적 공감 능력이 부족하여 그의 작품이 건설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스미스는 슈트라우스가 괴테가 말한, 생산적 비판에 필수적인 '사랑의 공감'이 부족한 사례라고 보았다. 또한 스미스는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가 복음서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 견해뿐만 아니라, 라이마루스나 하인리히 파울루스와 같은 합리주의적 해석 방식에도 반대했다고 언급했다.[15]

슈트라우스의 핵심 이론은 복음서의 그리스도가 개인적인 역사의 희미한 윤곽을 제외하고는, 초기 기독교의 메시아적 기대를 바탕으로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슈트라우스의 작업에 긍정적, 부정적 측면 모두 결함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기적과 신성-인간 관계에 대한 편협한 이론, 역사적 전통의 본질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했다.[15]

스미스는 슈트라우스의 복음서 역사 비판이 문서 자체의 필사본 전통에 대한 철저한 검토에 기반하지 않았다는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의 비판을 언급했다. 스미스는 슈트라우스가 더 넓고 깊은 종교 철학, 더 정확한 역사 비판 규칙, 복음서의 연대와 기원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을 갖추었다면, 신화 이론을 그렇게 파괴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5]

루드비히스부르크의 다비트 슈트라우스 기념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1906)에서 슈트라우스의 작업이 "겉으로는 살아있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설명들에 대한 사망 진단서"와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는 "다비트 슈트라우스 이전 시대와 다비트 슈트라우스 이후 시대"라는 두 시기가 있다고 덧붙이며 그의 작업이 지닌 파급력을 강조했다.

피터 C. 호지슨과 제임스 C. 리빙스턴에 따르면, 다비트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수를 기독교 신앙에서 분리하는 길을 연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서 역사적 예수를 신약성서 기록과 결합하여 쉽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기존 생각에 도전했다. 슈트라우스는 기독교 전통이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며,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신앙에 부합하는 예수의 역사적 이미지를 재구성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예수의 역사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슈트라우스는 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16]

마커스 보그는 슈트라우스 주장의 세부 사항, 헤겔 철학의 사용, 신화에 대한 그의 정의 등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주장, 즉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가 신화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신화'가 단순히 '거짓'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은 주류 학문의 일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보그는 "슈트라우스 시대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것이 이제 성서학자들의 표준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17]

슈트라우스의 해석 중 더 논란이 된 부분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고대인들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방식처럼, 예수를 신화적으로 꾸미기 위해 후대에 추가된 전설로 보았다. 슈트라우스는 오히려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생략하고 요셉을 예수의 정당한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슈트라우스의 저작이 널리 읽힌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논리의 힘만큼이나 명확하고 매혹적인 문체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2]

6. 평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1906; 1910)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장이 "겉으로는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련의 설명에 대한 사망 진단서를 채웠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학문 연구를 "다비트 슈트라우스 이전 시대와 다비트 슈트라우스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덧붙이며 슈트라우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피터 C. 호지슨과 제임스 C. 리빙스턴은 다비트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예수를 기독교 신앙에서 분리하는 길을 연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6]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서 역사적 예수를 신약성서 필사본과 결합하여 쉽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기존의 생각을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 전통이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며, 자료에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예수의 역사적 이미지를 재구성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예수의 역사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슈트라우스는 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16]

마커스 보그는 슈트라우스 주장의 세부 사항이나 헤겔 철학의 사용, 심지어 신화에 대한 정의 자체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기본적인 주장, 즉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가 신화적 성격을 띠며 '신화'가 단순히 '거짓'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은 주류 학문의 일부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보그는 "슈트라우스 시대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것이 이제 성서학자들의 표준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고 덧붙였다.[17]

슈트라우스가 역사적 예수 이해에 도입한 해석 중 하나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것이다. 그의 '탈신화화' 접근은 독일개신교 신학 내 합리주의 운동을 연상시킨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고대 이방인들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신화적으로 기리던 방식처럼, 예수를 존경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된 전설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히려 동정녀 탄생 일화를 제외하고 요셉을 예수의 정당한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존경을 표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편,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J. F. 스미스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1875-1889)에서 슈트라우스의 정신이 거의 전적으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데 치우쳐 있으며, 종교적 감정, 철학적 통찰력, 역사적 공감 능력이 부족하여 그의 작업이 건설적인 면모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스미스는 슈트라우스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이 생산적인 비판에 필수적이라는 괴테의 원리를 간과했다고 보았다.[15] 스미스는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가 복음서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 견해뿐만 아니라, 라이마루스나 하인리히 파울루스와 같은 합리주의적 해석 방식에도 반대했다고 언급했다.[15] 스미스는 슈트라우스가 기적과 신성-인간 관계에 대해 편협한 이론을 가졌으며, 역사적 전통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15] 또한 스미스는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가 슈트라우스의 복음서 비판이 문서 자체의 필사본 전통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한 점을 언급하며, 더 넓고 깊은 종교 철학, 정확한 역사 비판 규칙, 복음서 연대와 기원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슈트라우스가 신화 이론을 그토록 엄격하게 적용하여 파괴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5]

슈트라우스의 저술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그의 명확하고 매혹적인 문체가 꼽히기도 한다.[2]

참조

[1] 웹사이트 David Friedrich Strauss | German philosopher https://www.britanni[...]
[2] 간행물 Strauss, David Friedrich
[3] 서적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2010
[4] 서적 The Making of the New Spirituality 2003
[5] 서적 Familiar Stranger: An Introduction to Jesus of Nazareth 2004-03-22
[6] 웹사이트 On D.F. Strauß and the 1839 Revolution in Zurich http://www.chora-str[...]
[7] 웹사이트 On D.F. Strauß and the 1839 Revolution in Zurich http://www.chora-str[...] Sandberger
[8] 웹사이트 David Friedrich Strauss (Boston Collaborative Encyclopedia of Western Theology) https://people.bu.ed[...] 2024-06-08
[9] 간행물 David Friedrich Strauß and Spinoza https://doi.org/10.1[...] Oxford University PressOxford 2024-06-08
[10] 웹사이트 Agnese Schebest http://mugi.hfmt-ham[...] 2017-05-26
[11] 서적 David Friedrich Strauss and his theology. - http://archive.org/d[...] Cambridge [Eng.]: University Press 1973
[12] 서적 David Friedrich Strauss and his theology. - http://archive.org/d[...] Cambridge [Eng.]: University Press 1973
[13] 서적 David Friedrich Strauss and his theology. - http://archive.org/d[...] Cambridge [Eng.]: University Press 1973
[14] 서적 Iron Kingdom
[15] 간행물
[16] 간행물 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17] 웹사이트 David Friedrich Strauss: Miracle and Myth https://www.west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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