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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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크로아티아는 19세기 초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헝가리에 저항하며 제창한 개념으로,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아드리아해, 흑해, 발트해 사이의 슬라브인 거주 지역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17세기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의 주장에서 시작되어 일리리아 운동, 안테 스타르체비치와 에우겐 크바테르니크의 권리당으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19세기 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이전부터 근대적 형태로 나타났으며,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기에는 실현되기도 했다. 보스니아 전쟁 중에는 크로아티아의 영토 확장 시도로 이어졌으며, 지도 제작을 통해 대크로아티아의 영토를 묘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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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크로아티아 | |
---|---|
개요 | |
명칭 | 대크로아티아 |
로마자 표기 | Dae Keuroatia |
크로아티아어 표기 | Velika Hrvatska |
역사적 배경 | |
정의 |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이념 |
주요 시기 |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크로아티아 전쟁 시기 |
관련 개념 | 백색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인의 기원지) |
이념적 특징 | |
핵심 내용 | 모든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건설 역사적 또는 민족적 근거를 토대로 영토 확장 추구 |
지지 세력 | 도브로슬라브 파라가 지지자 크로아티아 순수 권리당 |
논란 및 비판 | |
비판 | 주변 국가와의 영토 분쟁 및 갈등 유발 가능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우스타샤 정권의 인종 청소와 연관되어 부정적인 이미지 존재 |
2. 배경
19세기 초,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은 당시 크로아티아를 지배하던 헝가리에 저항하기 위해 대크로아티아 개념을 만들었다.[21]
현대 대크로아티아 개념은 19세기 초 젊은 크로아티아인 지식인들이 헝가리에 대항하여 만들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대크로아티아 사상을 계속 유지했다.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 성립 이후에도 이 사상은 이어졌다. 크로아티아 공화 농민당의 당수였던 스체판 라디치는 1922년 7월 12일 런던 데일리 뉴스(''London Daily News'')에 기고한 성명에서 바라냐, 바나트, 바치카(Bačka) 지역을 보이보디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 연맹의 감시 하에 이 지역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중 어느 쪽에 귀속될지에 대한 주민 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1930년대에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 사이 민족적 긴장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 크로아티아 자치구였던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는 1939년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약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의회에서 평화적으로 협상되었다. 크로아티아는 단일 영토 단위로 통합되었고, 당시 크로아티아인이 다수였던 현재의 보이보디나, 포사비나, 헤르체고비나, 중앙 보스니아의 일부 지역을 제공받았다.[1]
1929년에 설립된 파시스트 단체 우스타샤는 베오그라드와 드리나강 방향으로 확장된 대크로아티아를 추구했다. 우스타샤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1927년부터 이탈리아와 밀약을 맺었는데, 무솔리니가 크로아티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 합병을 인정하는 대신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가 주장하는 달마티아 영토 획득을 용인하는 내용이었다.[13]
유고슬라비아 붕괴 이후,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스릅스카 공화국을 수립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공격했다.[22] 보스니아 전쟁 초기에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크로아티아군의 주력은 크로아티아 방위 위원회(HVO)였고, 보스니아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이었다. 1991년 11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자치 크로아티아 영토 단위로 설립되었다.[22]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대크로아티아주의는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 이는 티토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시대에 이반 스테보 크라야치치(크로아티아인)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영토 범위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는 독립된 크로아티아를 건국하는 안을 작성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크로아티아의 국토 모양은 바나나나 크루아상에 비유되며,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러한 형태가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불리하다고 인식한다.[11] 비에코슬라브 클라이치는 크로아티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늘어진 소시지와 같다"고 묘사했다.[12]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지도를 통해 대크로아티아 사상을 표현했다. 1960년과 1968년에 발행된 유고슬라비아 백과사전에서는 크로아티아가 드리나 강 서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한 도면을 게재했다. 이 도면에서는 드리나 강 좌안의 영역도 일부 크로아티아에 포함시켰다.[3]
대크로아티아주의는 "크로아티아인의 국가와 역사적 권리"에 기반한다고 주장하며, 15세기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와 연합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1][18] 대크로아티아주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기 전의 크로아티아 역사적 영토는 크로아티아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18] 이 개념은 19세기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 운동과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이후 특히 성행했다.[1][18]
[1]
서적
Ratovi tek dolaze
Nezavisno društvo novinara Vojvodine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활동한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는 모든 슬라브인들을 크로아티아인으로 간주하고, 아드리아해, 흑해, 발트해 사이의 모든 슬라브인 거주지를 크로아티아 영토로 정의했다.[21]
헝가리 왕국은 헝가리화를 시도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류데비트 가이가 일리리아 운동을 이끌었다.[7] 이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크로아티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크로아티아 역사상 최초의 범슬라브주의 운동이었다.
정치인 얀코 드라슈코비치 백작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남슬라브 지방으로 구성된 "대 일리리아"를 구상했고, 주교 요시프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는 달마티아 왕국을 크로아티아와 합병하는 것을 옹호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와 에우겐 크바테르니크는 1861년에 권리당 (HSP)을 창당하여 범슬라브주의와는 독립된 통일 크로아티아를 옹호했다.[8][9]
3. 19세기 근대적 대크로아티아주의의 출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활동했던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는 모든 슬라브인들이 크로아티아인이며, 크로아티아 영토는 아드리아해, 흑해, 발트해 내의 모든 슬라브인 거주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헝가리 왕국은 헝가리화를 시도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류데비트 가이가 이끄는 일리리아 운동이 만들어졌다. 이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크로아티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대크로아티아 국가의 개념은 일리리아 운동에서 현대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크로아티아 개념의 토대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의 저작에서 시작되었다.[3] 그는 모든 남슬라브족을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사상가였다.[4] 비테조비치는 아드리아 해, 흑해 및 발트 해 사이의 모든 영토를 포함하는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정의한다.
헝가리의 마자르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류데비트 가이가 일리리아 운동을 이끌었다.[7] 이 운동은 남슬라브족 간의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국가적 존재감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정치인 얀코 드라슈코비치 백작은 1832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공동 의회에 "논문"을 발표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남슬라브 지방으로 구성된 "대 일리리아"를 구상했다.
주교 요시프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는 달마티아 왕국을 크로아티아와 합병하는 것을 옹호했다.
대크로아티아의 개념은 안테 스타르체비치와 에우겐 크바테르니크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8][9], 그들은 1861년에 민족주의 권리당 (HSP)을 창당했다. HSP는 범슬라브주의 국가와는 독립된 통일된 크로아티아를 옹호했다.[8][10] 스타르체비치는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 왕국과 통일되는 것을 반대했다.
대크로아티아주의 영토 주장은 "크로아티아인의 국가와 역사적 권리"에 기반하며, 15세기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와 연합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의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 운동(일리리아 운동)과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이후 특히 성행했다.
19세기에 나타난 근대적 대크로아티아주의는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는 크로아티아 우익 정당과 연관되어 있었다.
1869년 에우겐 콰테르니크()는 드라바 강에서 아드리아 해까지가 아니라, 잘츠부르크 알프스에서 알바니아 및 코소보까지 순수한 크로아티아 국기가 휘날릴 것이라고 말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가 창설한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지지자인 크로아티아 작가 주로 데젤리치()는 1879년에 "크로아티아 민족" 또는 "크로아티아인의 혼"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며 따라서 크로아티아의 땅인 지방을 나열하였다.
1878년 8월 28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크로아티아의 확장주의는 1893년 11월에 초안된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강령에도 나타난다. 해당 강령은 합스부르크령 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리에카·메주무리예(Međumurjehr)·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스트라·크라인·카린티아·슈티리아 전역이 크로아티아 왕국에 복귀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크로아티아 권리당에 따르면, 국토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종류 설명 실제 영역 중앙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리예카 주변 가상적 주장 메주무리예·달마티아·크바르네르 제도(달마티아 제도)·이스트라 일부·보스니아 북서부 "크로아티아 국가와 자연적 권리" 기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의 주장에 포함되는 지역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1893년 강령에서는 우익주의자에 의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과 카린티아, 슈티리아가 포함되었다.
4. 20세기 초
1923년 9월 23일 런던에서 라디치에게 보내진 편지에는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인의 지도'''" 작성이 제안되었다. 이 지도에는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메주믈리예, 프레크무리예와 함께 크르카(''Krka'')와 카스타브(''Kastav''),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령으로 계승된 전 영역(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바치카, 바나트, 바라냐), 더 나아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포함하도록 했다.[21]
라디치는 외국을 의식한 지도 작성과 영어 및 프랑스어로 설명 삽입 방법을 지시했고, "수보티차에서 아드리아해까지 모든 군에 대해 크로아티아인(보스니아 이슬람교도도 크로아티아인으로 한다)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군을 파란색, 정교도(세르비아인)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빨간색으로 표시하도록 지적했다.[21]
라디치가 1928년 세르비아 급진당 의원에게 암살당하자, 블라드코 마체크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마체크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에 있던 모든 남슬라브인의 땅을 크로아티아의 지도 아래 통합하는 것을 희망했고, 그 국가를 세르비아와의 협상 관계 하에 두려고 했다. 라디치와 마찬가지로 유고슬라비아 분할을 의도한 주민 투표를 드리나 강 주변 및 그 서쪽에서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21]
1936년 마체크는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달마티아는 각각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지역 의회에서 선출된 대표자에 의해 선택하여 (세르비아에 남을지, 크로아티아와 합병할지, 독립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1]
1939년 8월 26일,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en)에 의해 '''크로아티아 자치주'''가 설치되었다. 마체크는 프리모리예 주(Primorje)와 사바 주(Savska)를 포함하여 두브로브니크, 브르바스(Vrbas), 일로크까지의 스리옘, 브르치코 및 주변, 비옐리나, 트라브니크, 포이니차(en), 헤르체고비나를 크로아티아에 통합하려 했다.[21]
5. 체코빅-마제크 협정
6. 크로아티아 독립국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조직 우스타샤의 안테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건국했다. 1941년 추축국의 추축군에 의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이후, 우스타샤의 부지도자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수립을 선포했다.[11]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거의 전역을 영토로 했다. 그러나 우스타샤는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를 통해 영토를 더욱 확장하려 했다. 1941년 5월 14일, 독일의 크로아티아 주재 전권대사 지크프리트 카셰는 독일 외무 장관 리벤트로프에게 크바테르니크가 크로아티아 영토를 알바니아 국경이나 프리보이(Priboj), 프리에폴레(Prijepolje), 프레블랴(Pljevlja) (각각 산자크 지방의 도시)까지 넓히기를 원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외상 갈레아초 치아노는 이러한 요구를 "크로아티아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반대했다. 그는 1941년 6월 30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크로아티아 이념은 나치 인종 이론과 결합되어, 우스타샤에 의해 수행된 세르비아인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NDH의 ''포라이모스''로 이어졌다.[14][15][16]
7. 보스니아 전쟁
헤르체그보스니아 지도자들은 이를 세르비아군과의 갈등 중 임시 조치라고 칭하며 분리주의적 목표가 없다고 주장했다.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준군사 조직인 크로아티아 방위군(HOS)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간의 연방을 지지했지만, NDH를 기반으로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1994년 초 워싱턴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2]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 지역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1991년 카라도르데보 협정에서 보스니아 분할에 동의했다.[22]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는 2013년 다수의 판결을 통해 크로아티아 지도부가 1939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국경에 따라 헤르체그보스니아 지역을 "대크로아티아"에 합병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결했다.[22] 2017년 11월 29일, 항소 법원은 투지만이 "이전 국경을 재구성하고 크로아티아 국민의 재통일을 촉진하는 크로아티아 단위를 설립"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공유했다고 결론 내렸다.[22]
8.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대크로아티아주의
이는 대크로아티아주의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강한 요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치 체제, 국가·사회 구성, 그리고 사람이 변해도 드리나 강까지를 포함하는 크로아티아주의의 개념은 변함없이 계승되었다.
9. 크로아티아인의 지정학적 평가
안툰 라디치는 "달마티아와 통합된 크로아티아의 모습은 빵 껍질과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잘려나가는 속은, 크로아티아 빵에서 잘려나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다. 우리가 만족스럽게 먹기를 원한다면 빵의 부드러운 속, 즉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13]
스체판 라디치는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의 위장이다. 위장을 잘라내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며,[14] 프라노 수필로는 "보스니아가 없는 크로아티아는 오늘날 점령된 (보스니아 등의) 영토를 지배하는 자들의 손 안의 장난감이다"라고 주장했다.[15]
크로아티아 정치인들은 영구적인 경제적, 금전적 자립을 위해 새로운 영토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6] ''Hrvatski dnevnik''는 1914년에 "크로아티아는 현재 크기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왜냐하면 크로아티아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영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17]
이반 필라르는 "지정학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없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왕국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스스로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스니아와 달마티아가 크로아티아의 자연적인 일부이며, 그것들이 없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불완전하고 생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매우 가늘고 길게 뻗어 있으며, 2 방향으로 뻗어 있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왕국에는 (달마티아 일부에서는 폭이 몇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국가나 정치 기구의 어떠한 중심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이 형태의 국가에는 어떠한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해야만 크로아티아가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필라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크로아티아의 국가 생존과 정치적 발전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 보았으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의 국토만으로는 크로아티아인이 그날 벌어먹고 살 뿐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얻고 나서야 완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8]
10.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와 지도
1933년에 제작된 니콜라 즈보니미르 비옐로브치치(en)의 지도에는 크로아티아의 역사적인 영토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 코토르 만 전역, 보이보디나의 바치카, 헝가리령 바야, 페치 남서쪽의 드라바 강변, 스리옘 전역이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안테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비옐로브치치의 지도는 사실에 기초한 민족 분포보다는 크로아티아의 확장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3]
11. 대크로아티아의 영토
"크로아티아 국가와 역사적 권리" 개념은 "민족의 권리"에 의해 더욱 힘을 얻었다. 대크로아티아주의는 크로아티아 민족의 땅과 크로아티아 국가의 역사적 영토를 모두 포함하는 미래의 대크로아티아의 모습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이전부터 19세기에 나타난 근대적 대크로아티아주의는 크로아티아 우익 정당과 연관되어 있었다.
1869년 에우겐 콰테르니크(Eugen Kvaternik)는 드라바 강에서 아드리아 해까지가 아니라, 잘츠부르크 알프스에서 알바니아 및 코소보까지 크로아티아 국기가 휘날릴 것이라고 말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Ante Starčević)가 창설한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지지자인 크로아티아 작가 주로 데젤리치(Đuro Deželić)는 1879년에 출판한 책에서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며 크로아티아의 땅인 지방은 "현재 달마티아 전역 및 코토르 만, 터키령 크로아티아(en)를 포함한 보스니아, 노비 파자르 파샤리크(산자크 지방), 1789년 앙겔의 책에서 터키령 달마티아로 언급된 현재의 헤르체고비나 지방,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북부"라고 했다.
1878년 8월 28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왕국의 통치하로 넘겨져야 한다고 언급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1893년 11월에 초안된 크로아티아 권리당의 강령 첫 번째 조항에서는, 크로아티아 국가와 자연적 권리는 합스부르크령 내에 있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리에카·메주무리예(Međumurjehr|메주무레)·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스트라·크라인·카린티아·슈티리아 전역이 크로아티아 왕국에 복귀함으로써 복원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권리당에 따르면, 국토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 국토가 실제 영역에 의해 형성되는, 중앙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리예카 주변을 포함하는 구역.
# 가상적 주장이 라고 불리는, 메주무리예·달마티아·크바르네르 제도(달마티아 제도)·이스트라 일부·보스니아 북서부를 포함하는 지역.
# "크로아티아 국가와 자연적 권리"에 근거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의 주장에 포함되는 지역.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조직 우스타샤의 안테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건국했다.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하려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소망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거의 전역을 그 영토로 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범위에서도 볼 수 있다.
1941년 5월 14일, 독일의 크로아티아 주재 전권대사였던 지크프리트 카셰는 독일 외무 장관 리벤트로프에게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가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알바니아 국경이나 프리보이(Priboj), 프리에폴레(Prijepolje), 프레블랴(Pljevlja)(각각 산자크 지방의 도시)까지 넓히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외상 갈레아초 치아노는 이 크바테르니크의 요구를 "크로아티아 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포함되는 지역은 다음과 같다.[1][18]
참조
[2]
서적
The Serbian Project and Its Adversaries: A Strategy of War Crimes
C. Hurst & Co. Publishers
[3]
서적
Conflict in the former Yugoslavia: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09-04
[4]
서적
The National Question in Yugoslavia: Origins, History,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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