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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파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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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아파트의 역사는 1930년대 초반 공동주택의 등장에서 시작되어, 한국 전쟁 이후 주택난 해결을 위한 정부 주도의 아파트 건설로 이어졌다. 1960년대에는 마포아파트, 동대문아파트 등 다양한 형태의 아파트가 등장했으며,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압구정 현대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등 고급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이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와 군인 아파트가 등장했으며, 2010년대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아파트의 보존과 재건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2. 대한민국 아파트의 등장과 초기 발전

산업 혁명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주거 환경이 열악해졌다. 영국 정부는 19세기 후반 도시계획법을 제정했고, 프랑스에서도 르 코르뷔지에가 "현대 도시"(Ville Contemporaine) 계획안을 제시하며 빈민 주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지만,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 코르뷔지에의 계획안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인해 주택난이 심각해지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아파트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에서도 아파트 문화가 발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 형태의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1930년 회현동 미쿠니 아파트, 1932년 충정로 충정아파트(대한민국 최초의 임대 아파트), 1941년1944년 부산광역시 청풍장-소화장 아파트 등이 건설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1956년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한미재단주택이 건설되었고, 1957년에는 종암아파트(해방 이후 한국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이자,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 도입)가 건설되었다.

2. 1. 미쿠니아파트 (1930년)

1930년 회현동에 지어진 미쿠니 아파트는 당시로서는 드문 3층 높이의 공동주택이었다. 사무실이나 백화점 건물은 이전에도 고층이 있었지만, 주거용 건물이 3층으로 지어진 것은 이례적이었다. 특히 한 건물에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 개념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매우 생소했다. 1935년 경성 미쿠니상사는 내자동에 더 발전된 기술을 적용한 두 번째 관사(아파트)를 건설했다. 회현동 관사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내자동 아파트는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4층 높이에 현대식 외관을 갖췄다. 평면 구조는 4개의 다다미 방, 부엌, 화장실을 갖추고 개별 난방을 제공하는 등 현대식 아파트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아파트 내부에 공동화장실, 식당, 오락실 등 부대시설이 있어 '관사'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1]

2. 2. 충정아파트 (1932년)

1932년 조선주택영단은 여러 주택 유형을 연구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다양한 대안을 실현했다. 그 중 하나는 르꼬르 뷔제의 대안이었으며, 산업혁명에서 양산화된 아팔타멘토 건축이 대안으로 쓰였다. 이것이 충정로에 남아있는 5층짜리 충정아파트이다. 초창기 건물 소유주 토요다(豊田)씨의 이름을 따 한국식 발음인 풍전아파트로 불렸으나, 유림아파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재판소로 활용되어 지하실은 처형소로도 쓰였고, 그 뒤 유엔군 호텔로 매입되었다가 아파트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9년 도로 확장으로 인해 1/3이 철거되었고, 이후 보수를 거쳐 현재의 충정로 아파트가 되었다. 서울특별시청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어 단계적 매입이 진행 중이며,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미쿠니아파트가 관사로 지어진 것과 달리, 충정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임대아파트이다. 또한 시설도 처음으로 아파트에 맞는 형식으로 건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충정아파트를 국내 최초의 아파트라고 한다.[2]

2. 3. 청풍장-소화장아파트 (1941년, 1944년)

1941년1944년에 부산토지공사가 부산광역시에 지은 최초의 4층 짜리 아파트인 청풍장-소화장아파트는 초기에는 부산광역시청과 겸용으로 지었으나 이후 건물 전체가 아파트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까지 외관은 아주 노후했지만, 안에 들어가면 넓고, 집주인이 부자라서 세 번 놀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최고급 아파트였다.[3] 1996년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판정받았으나 부지가 작아 재개발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려고 부산광역시에 알리면서 관심이 커졌으며,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부산광역시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을 추진하고 있다.[3]

2. 4. 한미재단주택 (1956년)

한국 전쟁 휴전 후 1956년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한미재단주택이 건설되었다. 한미재단주택에는 대한민국 건설부가 수입한 조립식 자재가 사용되었다.[4][5] 행촌아파트는 이 한미재단주택의 일부로, 2층 연립주택 11동 52가구, 단독주택 11가구와 함께 지어진 3층짜리 아파트 3개동 48가구였다.[4][5]

2. 5. 종암아파트 (1957년)

1957년 중앙산업에서 종암아파트 3개동을 건축했다. 종암아파트는 해방 이후 최초로 한국 기술로 지어진 아파트이자,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도입한 아파트였다.[1]

대한민국 최초 아파트인 종암아파트 전경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낙성식에 참관할 정도로 당시 한국 건축계에서 꽤 주목받는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에서 최초로 '아파트먼트 하우스'라는 명칭이 소개되었고, 이후 '아파트'라는 말로 굳어졌다.[1]

종암아파트 시공현장을 찾은 이승만 전 대통령

3. 1960년대 아파트의 발전과 유형별 등장

1960년대는 대한주택공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형의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대한민국 아파트 발전의 중요한 시기였다.

1964년 완공된 마포아파트는 최초의 계단실형 아파트로, 내진설계가 적용되는 등 당시 최고 수준의 주택건축이었다.[6]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앙정원형 아파트인 동대문아파트와 정동아파트가 건설되었다. 특히 동대문아파트는 "연예인 아파트"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고급 아파트로 인식되었다.[7]

1967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인 세운상가가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로 탄생했다. 세운상가는 1970~1980년대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렸으며, 삼보컴퓨터가 설립된 곳으로도 유명하다.[9] 1968년 완공된 낙원상가는 현재 세계 최대의 악기 전문 상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10]

같은 해 1967년에는 외국인 전용 아파트인 힐탑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고층 아파트였다. 이후 1972년 완공된 남산 외인아파트는 옥상 헬리포트 시설을 설치한 첫 아파트였다.[11] 이처럼 1960년대는 다양한 유형의 아파트 등장은 주거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3. 1. 마포아파트 (1964년)

대한주택공사1961년 10월에 착공하여 1964년 11월 30일 1, 2차 공사를 완료한 아파트이다. 주택공사가 직접 주도하여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기획되었다.

당초 1962년 말 완공 예정으로 10층 11개동, 총 1158호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주변 기관의 반대로 6층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엘리베이터 가동용 전기와 건설 비용 절감을 위한 조치였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으며, 입식 생활 방식에 맞춘 내부 구조를 채택했다.

2차 아파트는 최초의 계단실형 아파트로 지어졌다. 이 방식은 복도를 통한 사생활 침해를 줄이고, 복도식에서 복도 등으로 사용해야 하는 옥외 공간을 가구 내부로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했다. 내진설계까지 적용되어 당시 최고 수준의 주택 건축 기술이 적용되었다. 건폐율은 11%, 용적률은 87%였다. 1992년 재건축되어 현재는 마포 삼성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마포아파트 주민들이 입주 1년도 안 되어 단지 주변에 철조망을 두른 높은 담 설치를 요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주변 지역에 지속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인구가 유입되던 구시가지였고, 마포아파트가 주변 어디서나 눈에 잘 띄는 고층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거대하고 높은 건축물의 상징성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언급된다.[6]

3. 2. 중앙정원형 아파트: 동대문아파트 (1965년), 정동아파트 (1965년)

1965년 대한주택공사서울특별시에 중앙정원형 아파트인 동대문아파트와 정동아파트를 건설했다. 동대문아파트는 7층 높이로, 국내 최초로 지붕 없는 중앙정원 방식을 적용하여 이후 대한주택공사 건축의 기본이 되었다.[7] 초기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연예인 아파트"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고급 아파트로서 주민들이 복도에 물건을 내놓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7]

1993년 안전진단에서 C등급을 받았으나, 후원 기업을 통해 보강공사를 진행하여 현재는 B등급이다.[7] 서울특별시에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충정아파트와 함께 서울미래유산 1000선으로 선정될 예정이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창신숭인 뉴타운 지구 재개발 계획도 무산되었으나, 서울미래유산으로 최종 선정되었다.[7][8]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8-1번지에 위치한 정동아파트 역시 1965년 대한주택공사가 동대문아파트와 거의 동시에 착공한 고급 아파트이다.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외관 상태가 양호하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 3. 주상복합 아파트: 세운상가 (1967년), 낙원상가 (1968년)

1967년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인 세운상가가 지어졌다. '세계의 기운을 가진다'는 뜻의 세운상가는 일제강점기에 공습을 대비하여 소개(疏開)된 지역에 광복 이후 불법 판자촌이 형성되자, 김현옥 시장이 주도하여 건설하였다. 종로구 종로3가 175-4번지에 위치한 세운상가는 당시 재력가나 정부 고위인사 등이 거주하였으며, 상가는 1970~1980년대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렸다. 삼보컴퓨터가 설립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남 개발과 용산전자상가의 설립으로 슬럼화가 진행되어 2008년 서울특별시가 녹지사업의 일환으로 현대상가를 철거하였으나, 부동산 시장 침체로 인해 나머지 철거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현재 정상 영업 중이다. 서울특별시는 세운상가를 공원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9]

1968년 완공된 낙원상가는 아파트와 상가가 있는 주상복합 건물 아래에 도로가 있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1980~1990년대에 아마추어 악기사들이 낙원상가에 모여들어 현재는 세계 최대의 악기 전문 상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부대시설로는 영화관과 슈퍼마켓도 있다. 한때 철거론도 있었으나 서울시는 낙원상가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확정하였으며 미래유산으로 선정하였다.[10]

3. 4. 외인 아파트: 힐탑아파트 (1967년), 남산 외인아파트 (1972년)

1967년 용산구 한남동에 지어진 힐탑아파트는 우리 정부와 기업이 초청한 외국인 기술자들의 거주시설이었다. 당시 외국 기술자들은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존재였기에 최고급 대우를 제공해야 했다. 단기 체류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 호텔에 머물렀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 직원과 상사 주재원들은 전용 주택이 필요했다. 이에 정부는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을 건설했고, 그 첫 결과물이 힐탑아파트였다. 힐탑아파트에는 국내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자동식 전화가 설치되었고, 외국인 전용 매점에서는 서양식 음식도 판매되었다. 11층 높이의 힐탑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층 아파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11]

대한주택공사는 일본 다이세이 건설에서 빌린 100만달러어치의 철근과 목재를 이용해 한남동에 아파트를 건립했다. 1967년 3월 착공하여 1년 7개월 만에 지하 1층, 지상 11층, 120가구 규모의 고층 건물이 완성되었다. 옥상에는 옥상정원과 놀이터가 있었고, 국내 최초로 필로티 구조를 도입했다. 건물 외벽은 단열을 위해 콘크리트로 마감했고, 꺾어진 형태는 남향의 햇빛을 더 오래 받고 북쪽 판잣집을 가리는 효과를 냈다. 힐탑아파트 내부는 62m2~108m2(19~33평)로 구성되었고, 방 1개부터 3개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내부는 대리석 현관, 침실 2개, 넓은 거실 겸 부엌, 욕실, 추가 침실로 구성되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단 높이를 맞췄고, 중앙 스팀난방을 적용했다. 공간 활용을 위해 선반 등 가구 일부를 벽에 붙박이 형태로 만들었고, 발코니는 세대 분리와 이웃 간 소통 역할을 했다.[11]

힐탑아파트는 2003년 리모델링 후 '힐탑트레저'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현재는 한국인도 거주하지만 여전히 외국인 임대 수요가 많다. 2013년에는 서울시 미래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11]

힐탑아파트만으로는 외국인과 미8군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던 정부는 외인아파트 공급에 나섰다. 1972년 완공된 남산 외인아파트는 92.5m2~115.7m2(28~35평), 16, 17층 규모 2개동으로, 온수난방과 세대별 온도 조절이 가능했다. 비상 대피를 위한 옥상 헬리포트 시설을 설치한 첫 아파트이기도 하다. 남산 기슭에 위치해 눈에 잘 띄었던 남산외인아파트는 남산을 가린다는 이유로 1994년 철거되었다. 철거 당시 첨단 철거 공법을 적용해 화제가 되었고, 발파 장면이 TV로 생중계되었다. 남산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되었다.[11]

4. 시민아파트와 아파트의 위기

시민아파트는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건설되었으나,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부실 공사의 심각성을 드러냈다.[12] 이 사고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사임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와우아파트 외에도 회현 제2 시민아파트, 남아현 시민아파트 등이 건설되었다. 회현 제2 시민아파트는 남산 자락에 위치하여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기도 했으며, 서울미래유산 후보로 지정되었다.[13] 남아현 시민아파트는 평지에 건설되었으며,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까지 남아있는 중앙정원 방식 아파트이다.[14]

4. 1. 와우아파트 (1970년)

서울시는 1969년 빈민 주택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 파괴나 불법 점거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와우시민아파트 건립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단 6개월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은 부실 공사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완공 후 입주식 당일, 총 16개 동 중 15동과 14동에서 누수, 벽과 기둥의 균열, 흔들림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장 불안정한 15동 주민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즉시 보수에 들어갔으나, 15동 주민들은 대피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결국 15동은 붕괴되었고, 주민 74명 중 30명이 사망하고 44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건축 과정의 시공 감독 소홀 및 민간과 관청의 방관 책임으로 여겨져 구청장, 감리, 건축과장 등 관련 인사들이 대거 교체되었다.[12] 1970년 4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12] 이후에도 와우아파트에서는 여러 차례 사고가 발생하여, 결국 시민아파트 정리 사업으로 철거되었다.[12]

4. 2. 회현 제2 시민아파트 (1970년)

회현 제2 시민아파트는 1970년에 완공되어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시민아파트이다. 중구 회현동1가 147-23에 위치해 있다. 지어질 당시 철거민을 위한 아파트였으나 지리적 위치가 매우 좋아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연예인들이 거주해 동대문아파트와 함께 연예인아파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13] 박정희 정권의 판자촌 정리 개발계획으로 지어졌으며, 다른 시민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남산의 경사진 곳에 지어졌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 김현옥 시장의 지시로 한 층을 보강하고 벽돌 등을 사용해 튼튼하게 지어, 미래에 지어질 모든 아파트의 본보기가 되라는 의미에서 시범아파트로 개명했지만, 시민아파트로 분류되었다.[13]

특히 남산의 지형을 이용한 구름다리나 'ㄷ'자 형식의 건물 형식 등은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방식이었다.[13] 당시 시민아파트는 서민용이었으나 판자촌 원주민보다는 연예인, 재력가, 방송 PD, 정부 고위인사 등이 더 많이 입주했고, 중앙청사나 방송국 근처에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부분 유명인이 거주했다.[13] 하지만 점점 노후화가 진행되어 2006년에는 외벽을 받치는 콘크리트가 서울시 건축물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으며 재개발이 추진되었다.[13] 그러나 입주민들의 보상 문제로 재개발이 미루어지는 사이 여러 영화 작품의 배경으로 나와 사회적 관심을 끌었으며, 동대문아파트와 함께 서울미래유산 후보로 지정되어 보존을 거칠 예정이다.[13]

4. 3. 남아현 시민아파트 (1970년)

남아현 시민아파트는 1970년에 지어졌으며, 다른 시민아파트와는 다르게 산이 아닌 평지에 건설되었다. 건설사는 서호건설이었으며, 당시 현대아파트와 함께 남아현동의 대표적인 아파트였다. 철거 대신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아파트는 동대문아파트와 함께 현존하는 대표적인 중앙정원 방식의 아파트이다.[14]

5. 시범아파트와 선형식 아파트

1970년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파트가 등장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국내 첫 민간 고층 아파트이자 대단지로, 여의도에 지어진 최초의 건축물이다. 이전에도 '시범아파트'라는 명칭의 아파트가 있었으나, 대부분 시민아파트의 개량형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고층 시범아파트로 지어졌다.

1971년에 건설되어 1972년에 입주한 서소문아파트는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선형식 아파트이다. 만초천을 덮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하천복개지역'이라는 주소가 만들어졌다. 같은 해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에 있는 성요셉아파트도 약현성당이 지은 선형식 아파트이다. 언덕길을 따라 길게 휘어져 있어, 위치에 따라 저층이 다르다.

5. 1. 여의도 시범아파트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아파트 단지이다. 1971년 국내 최초의 민간 고층 아파트이자 대단지 아파트로 건설되었으며, 여의도에 지어진 최초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규모는 1,790세대, 24개 동이며, 삼부토건, 현대건설, 부국건설, 대림산업, 한국건업, 건설산업, 모양건설이 건설에 참여했다.[15]

이전에도 '시범아파트'라는 이름의 아파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시민아파트의 개량형이었다. 반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고층 시범 아파트로 지어졌다. 당시 여의도는 확장 공사를 마쳤으나, 부지를 분양받아 건물을 지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시는 여의도가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범적으로 고층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여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고,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완공되었다.[15]

이후 서울시의 의도대로 여의도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 수많은 증권사 건물들이 들어섰다. 국회의사당, 방송 3사 본사, 63빌딩도 여의도에 건설되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대표적인 기둥식 아파트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5]

5. 2. 선형식 아파트: 서소문아파트 (1971년), 성요셉아파트 (1971년)

1971년에 건축된 서소문아파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다.


1971년에 지어져 1972년에 입주한 서소문 아파트는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선형식 아파트이다. 만초천을 덮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올리면서 미근동 215번지에서 의주로2가 138번지 1 앞에 '하천복개지역'이라는 주소가 만들어졌다. 하천을 따라 115m 길이로 지어진 서소문아파트는 시범아파트로 알려졌으나, 시범식으로 만든 아파트인 단지형 시범아파트와는 형태 자체가 다르다. 40년도 더 넘은 서소문아파트는 오래된 아파트 사이에서 재건축 바람이 불었음에도 재건축 시도조차 없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하천부지 위에는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법이 바뀐 탓이다. 아파트가 철거되면 주민들에겐 임대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진다. 7층 높이에 126가구 규모로 지어진 아파트는 1층이 상가, 2~7층까지는 아파트로 구성되었으며, 오진개발이 건축을 담당하였다. 서울시는 서소문아파트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하였다.[16]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149번지에 있는 성요셉 아파트는 1971년에 약현성당이 지은 아파트이다. 선형식 아파트로서 언덕길을 따라 길게 휘어져 있어, 위치에 따라 저층이 다르다. 저층부 1개 층은 상가로 이용되고 있으며, 저층부 다음부터 최고층인 6층까지 주거 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1개 동으로 구성된 이 아파트는 전면부에 3개의 입구가 있다. 언덕 하단부에 설치된 첫 번째 입구는 2층 1가구와 그 외 전 층을 출입할 수 있고, 중앙 입구는 2층 일부 가구만 출입이 가능하다. 이 외의 출입구는 3층 이상 출입이 가능하다. 성요셉 아파트는 초기 약현성당이 성당 교우들에게 아파트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지만, 이후 민간에 매각됐다. 서울시는 성요셉 아파트의 특이한 건물 형태로 인해 서울미래유산 아파트로 선정하였다.[17]

6. 강남 개발과 주공아파트의 등장

1970년대 후반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아파트는 더욱 대중화되었다.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건설한 반포주공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주공아파트 대단지였다. 1981년 현대건설이 지은 개포주공아파트전두환 정권이 도입하였던 택지개발촉진법의 첫 사례였다. 1976년 현대산업개발에서 건설한 압구정 현대아파트1978년 7월 특혜분양 사건으로 인해 한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자리잡았다.

6. 1. 반포주공아파트 (1973년)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건설한 대한민국 최초의 주공아파트 대단지이다. 22평~62평 3786가구로 지은 대단지로서 주공아파트가 강남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아파트공화국"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18] 국내 최초로 복층 설계를 도입하여 6층이나 1, 3, 5층만 현관을 설치하였고 나머지 2, 4, 6층은 실내에 설치한 계단을 통하여 올라갈 수 있었다.[18] 또한 지역난방시설도 설치한 최신형 아파트였다.[18] 이후 반포주공아파트는 1단지에 이어 2단지와 3단지까지 건축하여 분양하였다.[18] 1단지 이후에 지어졌던 반포주공 2단지와 3단지는 현재 재개발로 인하여 철거되었으나 1단지는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18] 서울시는 국내 최초의 주공아파트라는 점에서 반포주공아파트 1개동을 마을 박물관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밝혔다.[18]

6. 2. 개포주공아파트 (1981년)

1981년 현대건설개포주공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도입한 택지개발촉진법의 첫 사례였다. 1980년대 강남구 개발로 인해 사람들이 강남에 몰리면서 주택난이 심화되자,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곳에 주공아파트를 짓기로 결정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곳이 개포주공아파트와 개포시영아파트이다. 개포주공아파트는 1단지에서 7단지까지 지어졌으며 현재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19]

6. 3. 압구정 현대아파트 (1976년)

1976년 현대산업개발에서 건설한 아파트단지이다. 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강남구는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거시설이 늘고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남’이라고 불리는 영동지구를 중심으로 도시 성장과 변화의 물결이 한강변을 따라 퍼져나갔다. 아파트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공간 팽창을 널리 알리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고층 아파트는 성장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1969년 한남대교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영동지구 개발과 아파트 건설의 속도를 더하여 현대산업개발에게 아파트 건설을 할 수 있는 자본을 주었다. 1975년 강남구가 탄생했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나 고급스러운 시설을 도입한 건물이 아니지만 1978년 7월의 특혜분양 사건으로 한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자리 잡았다. 당시 건설사는 ‘50가구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는 공개 분양해야 한다’는 주택건설촉진법을 무시하고 건설한 아파트의 상당수를 정부 관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주변 집값의 50% 수준으로 특혜 분양했다. 분양과 동시에 약 5000만의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분양가는 3.3m²당 44만였으며, 5000만은 당시 현대아파트 115m² 1채의 분양가에 해당했다. 160m² 이상의 대형 아파트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이 아파트 이후 건설회사의 이름을 따른 아파트 이름이 유행처럼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압구정동 고소득층 주거지에 커다란 문화적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이 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가운데 하나다. 서울시의 한강변 정비 계획과 강변 아파트 촉진 계획에 따라 재건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고 있지는 않다.[20]

7.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등장

1999년 타워팰리스가 착공되고 2004년 모든 단지가 완공되면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잠실 주공 1, 2, 3, 4단지의 저층 아파트를 철거하고 20, 30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는 재건축 사업이 진행되었다. 2006년 12월 4단지를 시작으로, 2007년 8월 3단지, 2008년 7월 2단지, 2008년 9월 1단지가 차례로 입주를 시작했다.

7. 1. 타워팰리스 (2004년 완공)

1999년에 착공하여 2004년에 모든 단지가 완공된 타워팰리스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고급 주거 문화를 선도했다.

7. 2.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2011년 완공), 송도 아트윈 푸르지오 (2015년 완공), 해운대 엘시티 더샵 (2020년 완공)

2011년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였던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가 완공되었다.[1] 2015년에는 인천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인 송도 아트윈 푸르지오가 완공되었다.[1] 2020년 1월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인 해운대 엘시티 더샵이 완공되었다.[1]

8. 군인 아파트

군인아파트는 직업 군인만 거주하는 아파트이다. 직업 군인은 군 복무 기간에만 거주할 수 있으며, 전역하거나 사망하면 거주할 수 없다. 기혼 직업 군인과 그 가족이 거주하며, 미혼 직업 군인은 독신자 간부숙소에 거주한다. 장군은 별도의 관사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군인아파트는 1964년 용산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남산대림아파트와 이태원 주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9. 아파트 보존 및 고령화

201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는 근현대 문물 보존 프로젝트인 서울미래유산의 일환으로 아파트 10군데를 보존 대상 후보로 지정하였다.[21]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지정될 예정이었다.[21]

9. 1. 장수명 아파트 인증제 도입 추진 (2015년)

국토교통부는 2015년까지 100년 주택인 장수명 아파트 인증제 도입을 추진한다고 보도했다.[21]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100년 된 주택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국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40년 넘은 주택조차 찾기 어려워 이에 대한 조치로 추진되었다.[21] 201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는 근현대 문물 보존 프로젝트인 서울미래유산의 일환으로 아파트 10곳을 보존 대상 후보로 지정했다.[21] 소유자 동의를 받아 지정될 예정인 이 아파트들은 다음과 같다.[21]

  • 충정아파트(1933)
  • 동대문아파트 (1965)
  • 정동아파트 (1965)
  • 힐탑아파트 (1967)
  • 회현제2시민아파트 (1970)
  • 여의도시범아파트 (1971)
  • 성요셉아파트 (1971)
  • 서소문아파트 (1972)
  • 반포본동아파트 (1973)
  • 개포주공1단지아파트 (1981)

9. 2. 서울미래유산 아파트 선정

201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는 근현대 문물 보존 프로젝트인 서울미래유산의 일환으로 오래된 아파트들을 보존 대상으로 지정하였다. 후보로 지정된 아파트는 10곳으로, 가장 오래된 충정아파트(1933)를 비롯하여 동대문아파트(1965), 정동아파트(1965), 힐탑아파트(1967), 회현제2시민아파트(1970), 여의도시범아파트(1971), 성요셉아파트(1971), 서소문아파트(1972), 반포본동아파트(1973), 개포주공1단지아파트(1981)가 선정되었으며, 소유자의 동의를 거쳐 지정될 예정이다.[21]

9. 3. 재건축

아파트 단지 차원에서 재건축을 한 최초의 사례는 1994년 재건축이 진행된 마포삼성아파트이다.[22] 마포삼성아파트의 재건축 이후 재건축이 다수 진행되면서 재건축에 관한 법률 분쟁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법원2008년 재건축이 진행된 인왕산아이파크를 둘러싼 사건을 계기로 재건축 관련 분쟁을 민사법원이 아닌 행정법원이 심리하도록 하는 판례변경을 2009년에 단행하였다.[23]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기술적, 경제적 사유로 인해 약 30년 마다 재건축을 하는 등 해외에 비해 재건축 주기가 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바닥 난방을 위해 배관 등 설비를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고 벽체 내부에 포함시켜 건설하는 점, 경제적 측면에서는 재건축을 통한 주택 공급 증대 및 주거 환경 개선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다만 실제로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는 연한 자체는 내륙 지역 기준으로 약 60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4]

참조

[1] URL http://news.mk.co.kr[...]
[2] URL http://www.hankyung.[...]
[3] URL http://news.busan.go[...]
[4] 서적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효형출판 2009
[5] 뉴스 아파트 組立式 건축 붐 매일경제 1990-06-28
[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odopodo.net/[...] 2014-05-19
[7] URL http://www.ohmynews.[...]
[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realestate.da[...] 2014-05-19
[9] 뉴스 영욕의 45년 세운상가 주상복합 꿈도 물거품 위기 뉴스1 2013-12-22
[10] URL http://www.datanews.[...]
[1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m.mk.co.kr/ne[...] 2014-02-14
[12] URL http://news.khan.co.[...]
[13] 웹인용 시범으로 지었듯 시범으로 남겨봅시다, 회현제2시민아파트 http://www.seoulstor[...] 2019-02-25
[14] URL http://news.khan.co.[...]
[1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news.mt.co.kr[...] 2019-02-24
[1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news.mt.co.kr[...] 2014-05-19
[17] URL http://www.mt.co.kr/[...]
[1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fromto.kr[...] 2015-03-08
[1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news.mt.co.kr[...] 2019-02-24
[20] URL http://news.donga.co[...]
[2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news.mt.co.kr[...] 2013-11-13
[22] 뉴스 국내 최초의 ‘재재건축 아파트’ 어디가 될까? https://www.sedaily.[...] 2020-08-29
[23] 뉴스 대법 "재건축조합 관리처분 소송, 행정법원이 판단해야" https://n.news.naver[...] 2009-09-17
[24] 웹인용 아파트는 언제 늙고 어떻게 변해가나? https://www.sciencet[...] 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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