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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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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농민전쟁은 16세기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정치적 분권, 종교개혁, 경제적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배경이 되었다.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 농노화 시도, 그리고 군사 기술 발전으로 인한 하급 귀족의 몰락으로 인한 압박에 시달렸으며,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등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봉기를 일으켰다. 슈바벤 동맹 군대와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군사적 열세와 분열로 인해 패배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농민들의 권리와 자유는 더욱 위축되었다. 이 사건은 계급투쟁, 사회주의 혁명의 시초로 해석되기도 하며, 농민 반란의 성격과 원인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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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농민 봉기와 주요 전투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농민 봉기와 주요 전투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부분유럽 종교 전쟁 및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일부
시기1524년–1525년
장소독일어 사용 중앙유럽 지역, 특히 현재의 독일, 알자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결과반란 진압 및 참가자 처형, 재침례파 운동에 큰 영향
교전 세력
교전국 1농민군
교전국 2슈바벤 동맹
부분:
헤센 방백국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작센 선제후국
지휘관 및 지도자
농민군토마스 뮌처
미하엘 가이스마이르
한스 뮐러 폰 불겐바흐
야코프 로르바흐
벤델 히플러
플로리안 가이어
보나벤투라 쿠어슈너
괴츠 폰 베를리힝겐
슈바벤 동맹게오르크, 트루흐세스 폰 발트부르크
필리프 폰 헤센
게오르크 폰 베틴
하인리히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병력 규모
농민군300,000명
슈바벤 동맹6,000–8,500명
사상자
농민군100,000명 이상
슈바벤 동맹미미

2. 배경

16세기 당시 유럽의 많은 지역들은 신성로마제국과의 정치적 연결을 공유했다. 당시의 신성로마제국은 신성로마황제가 자신의 직할령 바깥에서는 거의 권위를 가지지 못하는 분권적 정체였다. 독일농민전쟁 시점에서 신성로마황제는 에스파냐 국왕이기도 했던 카를 5세(에스파냐 국왕으로서 카를로스 1세)로, 그는 1519년 황제로 선출되었다.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거의 독립적인 수백 개의 세속 및 성직 영토들을 다스리는 귀족 왕조들이 있었고, 또한 반독립적인 도시국가가 수십 개 있었다. 이 지방 왕조를 다스리는 공후들은 로마 천주교회에 종교세를 납부했는데, 그들은 종교개혁의 시국에서 로마교회를 버리고 자기들이 지배하는 독일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 대부분의 독일 공후들이 “독일교회를 위한 독일 돈”이라는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세우며 로마교회와 결별했다.

공후들은 대개 세금을 인상하고 로마민법을 도입함으로써 자기 영지의 자유농민들을 농노로 전락시키려 했다. 로마민법은 모든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하고, 토지를 둘러싼 영주와 영민 간의 봉건적 신뢰와 의무의 개념을 없앴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공후들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대의 법의 잔재를 끌고와 모든 토지와 세수를 자신들의 사유물로 삼음으로써, 공후들은 제국에서의 부와 지위를 높일 뿐 아니라 자기 영지의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증진시켰다.

1522년부터 1523년까지 서독일 라인란트의 소지주였던 기사들은 기사들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기사들은 종교개혁의 맥락에서 종교적인 수사를 동원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난의 근본적 성격은 종교적이지 않았고 경제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었고, 봉건적 질서를 보존하고자 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옥죄어오는 새로운 돈의 질서에 맞서 저항했던 것이다.

후기 중세 시대의 군사 기술 혁신은 하급 귀족(기사)을 군사적으로 쓸모없게 만들기 시작했다. 군사 과학의 도입과 화약과 보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기병과 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가격이 계속 상승하면서 그들이 가진 적은 수입을 고갈시켰다. 그들은 영토에서 수입을 짜내기 위해 고대 권리를 행사했다.

독일 북부에서는 많은 하급 귀족들이 이미 세속적이고 교회적인 영주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노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독일 남부에서는 그들의 권력이 더 온전했다. 따라서, 하급 귀족의 농민에 대한 가혹한 처우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처우가 북부보다 남부에서 더 심했다는 사실이 전쟁이 남부에서 시작된 이유였다.

기사들은 지위와 수입이 감소하고 점점 더 제후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면서 격분했고, 두 집단은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기사들은 또한 성직자를 오만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기면서 그들의 특권과 부를 질투했다. 또한 기사들은 빚 때문에 도시의 귀족들과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독일의 다른 계급과 대립하면서 하급 귀족은 변화에 가장 덜 적합했다.

그들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았고 종종 그들의 지역 제후를 지지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서, 농민전쟁 초기에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부당함과 농민들의 무분별한 폭력을 모두 비판하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26] 그는 경제 중앙집권화와 도시화를 지지하여 소지주들을 소외시키고 도시민들과 이해를 공유했다. 루터는 농민들의 노동은 농장노동이고 지배계급의 일은 평화 유지라고 주장하며,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켜 평화를 깨뜨린 것이 더 큰 악이라고 보아 농민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1525년 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루터는 민란 진압을 지지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농민들을 광견병 걸린 개에 비유하며 신속하고 난폭하게 진압하라고 독려했다.[26] 농민전쟁이 진압된 후, 루터는 지배계급의 폭력을 지지하는 글 때문에 비판받았고, 카스파어 뮐러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며 귀족들의 진압이 너무 가혹했다고 변명했다.[27] 루터는 왔다갔다하는 입장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28]

토마스 뮌처는 농민들의 요구를 지지한 급진파 종교개혁가였다. 뮌처의 신학은 사회적 격변기에 떠오른 종교적 회의와 융합되어 발전했다. 1524년 말과 1525년 초, 뮌처는 서남독일을 돌아다니며 농민군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농민들의 요구사항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클레트가우 지역에서 농민들의 불만 표현을 도왔으며, 상슈바벤 서약동맹의 12개조 정강은 아니지만, Constitutional Draft는 뮌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25년 초, 뮌처는 작센과 튀링겐에서 농민군 조직을 도왔고, 프랑켄하우젠 전투(Battle of Frankenhausen)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뮌처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는 농민들의 봉기를 종말의 징조로 보고 농민군 지도자 자리를 받아들였다.[29] 그는 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농민들을 선동했다.

루터와 뮌처는 서로의 사상과 행동을 공격했다. 루터는 12개조 정강으로 정리된 온건한 요구에도 반대했으며, 1525년 5월 「살인마 도둑떼 농민들에 맞서」라는 논고를 발표했다.

1525년 농민들의 팸플릿인 12개 조항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사회 변화의 시기에 다양한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지 근대화를 추구한 대귀족 공후(Fürst)들은 성직자 및 도시귀족(patricians), 유산시민(burgher)과 연합하여 소귀족과 농민들을 핍박하는 경향을 보였다.

공후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세금 부과 및 자금 조달 권한을 가졌다. 영지 근대화로 인한 행정 및 군사 비용 증가는 봉신들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고, 공후들은 중앙집권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경제적 근대화는 하급 귀족의 몰락을 야기했고, 라인란트에서 발생한 기사들의 난(1522년-1523년)의 원인이 되었다. 이 반란은 가톨릭 및 루터교 공후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유산시민들은 경제 집중화와 하급 귀족 몰락으로 인한 무역 자유화로 이득을 얻었기에 공후들과 연합할 수 있었다.

하급 귀족인 기사들은 중세 말기 군사 기술 혁신으로 인해 도태되기 시작했다. 군사학의 발전과 화약, 보병의 중요성 증가는 중기병과 성관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가격혁명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사치스러운 생활 유지는 그들의 수입을 고갈시켰다. 하급 귀족들은 수입 확보를 위해 낡은 권리들을 행사했고, 특히 남독일에서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핍박하여 독일 농민전쟁의 뇌관 역할을 했다. 사회적 지위와 수입 감소, 공후들의 간섭 증가는 기사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대귀족과 하급 귀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기사들은 성직자들의 특권과 부를 질투하고 도시 귀족들에게 빚을 져 관계가 경색되었다. 많은 하급 귀족들은 농민전쟁에서 공후 편에 섰다.

성직자들은 당시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으며, 귀족과 부자의 지지를 받거나 대중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인쇄술 발전과 상업 확대로 문해율이 높아지면서 성직자들의 지적 권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매관매직과 성직겸임 등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심각했으며,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 공후만큼 봉신들을 착취했다. 면죄부 판매와 기도원 설립, 직접 과세는 교회 부패에 대한 분노를 일으켰고,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 게시로 이어졌다.[9] 루터를 반대한 성직자들은 귀족 출신으로 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포함한 변화에 반대했다. 반면 가난한 성직자들은 종교 개혁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루터의 평등주의 사상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려 했다.

도시 귀족들은 시 참사회를 장악하고 행정을 독점한 부유한 가문들이었다. 면세 특권으로 인해 농민들에게 세금이 부과되었고, 길드 성장과 도시 인구 증가는 도시 귀족에 대한 반대를 증폭시켰다. 그들은 농민 수입 확보를 위해 통행세를 설치하고 공유지를 사유화했으며, 길드세를 징수했다. 징수된 수입은 공식적인 행정을 거치지 않아 횡령과 사기가 만연했다.

유산시민 계급은 길드에 속하거나 무역에 종사하는 중산층 도시민으로, 도시 귀족을 비판하고 시 참사회 의석 확보 또는 성직매매 금지를 요구했다. 성직자들의 특권 철폐와 수 감소를 요구하며 성직자들과도 대립했다. 유산시민의 우두머리인 장인 또는 길드장은 생산수단인 공방과 연장을 소유하고 도제들을 부렸다. 엥겔스는 프란츠 폰 시킹겐이 이끈 기사들의 난과 독일 농민전쟁이 도시 유산시민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진압되었다고 평가했다.

평민들은 도시 임노동자, 직인, 행상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었다. 몰락 유산시민도 이 계급에 속했다. 직인들은 잠재적 유산시민이었지만, 길드를 운영하는 부유한 가문들에 의해 고위직에서 배제되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결여된 “임시적” 지위가 영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평민들은 재산이 없다는 점에서 몰락 유산시민이나 농민과 처지가 같았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부담을 지는 사회 최하층이었다. 16세기 농민들은 공유지를 박탈당해 사냥, 낚시, 벌채의 자유를 상실했다. 농민들은 야생동물이나 귀족의 사냥 놀음으로 인한 작물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혼 시 영주의 허락과 결혼세를 내야 했다. 농민 사망 시 영주는 최상품을 가질 권리가 있었다. 성직자나 유산시민, 도시귀족들이 맡는 사법제도는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랜 농노제와 영지들의 반독립적 자치성은 민란을 지역적 단위로 국한시켰다.

농민전쟁 시대의 전단

2. 1. 로마 민법 도입과 농노제 강화

공후들은 대개 세금을 인상하고 로마민법을 도입함으로써 자기 영지의 자유농민들을 농노로 전락시키려 했다. 로마민법은 모든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하고, 토지를 둘러싼 영주와 영민 간의 봉건적 신뢰와 의무의 개념을 없앴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공후들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대의 법의 잔재를 끌고와 모든 토지와 세수를 자신들의 사유물로 삼음으로써, 공후들은 제국에서의 부와 지위를 높일 뿐 아니라 자기 영지의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증진시켰다.

1522년부터 1523년까지 서독일 라인란트의 소지주였던 기사들은 기사들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기사들은 종교개혁의 맥락에서 종교적인 수사를 동원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난의 근본적 성격은 종교적이지 않았고 경제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었고, 봉건적 질서를 보존하고자 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옥죄어오는 새로운 돈의 질서에 맞서 저항했던 것이다.

2. 2. 기사들의 몰락과 경제적 변화

후기 중세 시대의 군사 기술 혁신은 하급 귀족(기사)을 군사적으로 쓸모없게 만들기 시작했다. 군사 과학의 도입과 화약과 보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기병과 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가격이 계속 상승하면서 그들이 가진 적은 수입을 고갈시켰다. 그들은 영토에서 수입을 짜내기 위해 고대 권리를 행사했다.

독일 북부에서는 많은 하급 귀족들이 이미 세속적이고 교회적인 영주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노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독일 남부에서는 그들의 권력이 더 온전했다. 따라서, 하급 귀족의 농민에 대한 가혹한 처우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처우가 북부보다 남부에서 더 심했다는 사실이 전쟁이 남부에서 시작된 이유였다.

기사들은 지위와 수입이 감소하고 점점 더 제후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면서 격분했고, 두 집단은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기사들은 또한 성직자를 오만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기면서 그들의 특권과 부를 질투했다. 또한 기사들은 빚 때문에 도시의 귀족들과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독일의 다른 계급과 대립하면서 하급 귀족은 변화에 가장 덜 적합했다.

그들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았고 종종 그들의 지역 제후를 지지했다.

2. 3. 루터와 뮌처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는 독일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서, 농민전쟁 초기에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부당함과 농민들의 무분별한 폭력을 모두 비판하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26] 그는 경제 중앙집권화와 도시화를 지지하여 소지주들을 소외시키고 도시민들과 이해를 공유했다. 루터는 농민들의 노동은 농장노동이고 지배계급의 일은 평화 유지라고 주장하며,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켜 평화를 깨뜨린 것이 더 큰 악이라고 보아 농민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1525년 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루터는 민란 진압을 지지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농민들을 광견병 걸린 개에 비유하며 신속하고 난폭하게 진압하라고 독려했다.[26] 농민전쟁이 진압된 후, 루터는 지배계급의 폭력을 지지하는 글 때문에 비판받았고, 카스파어 뮐러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며 귀족들의 진압이 너무 가혹했다고 변명했다.[27] 루터는 왔다갔다하는 입장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28]

토마스 뮌처는 농민들의 요구를 지지한 급진파 종교개혁가였다. 뮌처의 신학은 사회적 격변기에 떠오른 종교적 회의와 융합되어 발전했다. 1524년 말과 1525년 초, 뮌처는 서남독일을 돌아다니며 농민군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농민들의 요구사항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클레트가우 지역에서 농민들의 불만 표현을 도왔으며, 상슈바벤 서약동맹의 12개조 정강은 아니지만, Constitutional Draft는 뮌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25년 초, 뮌처는 작센과 튀링겐에서 농민군 조직을 도왔고, 프랑켄하우젠 전투(Battle of Frankenhausen)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뮌처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는 농민들의 봉기를 종말의 징조로 보고 농민군 지도자 자리를 받아들였다.[29] 그는 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농민들을 선동했다.

루터와 뮌처는 서로의 사상과 행동을 공격했다. 루터는 12개조 정강으로 정리된 온건한 요구에도 반대했으며, 1525년 5월 「살인마 도둑떼 농민들에 맞서」라는 논고를 발표했다.

2. 4.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사회 계급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사회 변화의 시기에 다양한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지 근대화를 추구한 대귀족 공후(Fürst)들은 성직자 및 도시귀족(patricians), 유산시민(burgher)과 연합하여 소귀족과 농민들을 핍박하는 경향을 보였다.

공후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세금 부과 및 자금 조달 권한을 가졌다. 영지 근대화로 인한 행정 및 군사 비용 증가는 봉신들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고, 공후들은 중앙집권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경제적 근대화는 하급 귀족의 몰락을 야기했고, 라인란트에서 발생한 기사들의 난(1522년-1523년)의 원인이 되었다. 이 반란은 가톨릭 및 루터교 공후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유산시민들은 경제 집중화와 하급 귀족 몰락으로 인한 무역 자유화로 이득을 얻었기에 공후들과 연합할 수 있었다.

하급 귀족인 기사들은 중세 말기 군사 기술 혁신으로 인해 도태되기 시작했다. 군사학의 발전과 화약, 보병의 중요성 증가는 중기병과 성관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가격혁명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사치스러운 생활 유지는 그들의 수입을 고갈시켰다. 하급 귀족들은 수입 확보를 위해 낡은 권리들을 행사했고, 특히 남독일에서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핍박하여 독일 농민전쟁의 뇌관 역할을 했다. 사회적 지위와 수입 감소, 공후들의 간섭 증가는 기사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대귀족과 하급 귀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기사들은 성직자들의 특권과 부를 질투하고 도시 귀족들에게 빚을 져 관계가 경색되었다. 많은 하급 귀족들은 농민전쟁에서 공후 편에 섰다.

성직자들은 당시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으며, 귀족과 부자의 지지를 받거나 대중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인쇄술 발전과 상업 확대로 문해율이 높아지면서 성직자들의 지적 권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매관매직과 성직겸임 등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심각했으며,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 공후만큼 봉신들을 착취했다. 면죄부 판매와 기도원 설립, 직접 과세는 교회 부패에 대한 분노를 일으켰고,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 게시로 이어졌다.[9] 루터를 반대한 성직자들은 귀족 출신으로 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포함한 변화에 반대했다. 반면 가난한 성직자들은 종교 개혁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루터의 평등주의 사상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려 했다.

도시 귀족들은 시 참사회를 장악하고 행정을 독점한 부유한 가문들이었다. 면세 특권으로 인해 농민들에게 세금이 부과되었고, 길드 성장과 도시 인구 증가는 도시 귀족에 대한 반대를 증폭시켰다. 그들은 농민 수입 확보를 위해 통행세를 설치하고 공유지를 사유화했으며, 길드세를 징수했다. 징수된 수입은 공식적인 행정을 거치지 않아 횡령과 사기가 만연했다.

유산시민 계급은 길드에 속하거나 무역에 종사하는 중산층 도시민으로, 도시 귀족을 비판하고 시 참사회 의석 확보 또는 성직매매 금지를 요구했다. 성직자들의 특권 철폐와 수 감소를 요구하며 성직자들과도 대립했다. 유산시민의 우두머리인 장인 또는 길드장은 생산수단인 공방과 연장을 소유하고 도제들을 부렸다. 엥겔스는 프란츠 폰 시킹겐이 이끈 기사들의 난과 독일 농민전쟁이 도시 유산시민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진압되었다고 평가했다.

평민들은 도시 임노동자, 직인, 행상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었다. 몰락 유산시민도 이 계급에 속했다. 직인들은 잠재적 유산시민이었지만, 길드를 운영하는 부유한 가문들에 의해 고위직에서 배제되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결여된 “임시적” 지위가 영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평민들은 재산이 없다는 점에서 몰락 유산시민이나 농민과 처지가 같았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부담을 지는 사회 최하층이었다. 16세기 농민들은 공유지를 박탈당해 사냥, 낚시, 벌채의 자유를 상실했다. 농민들은 야생동물이나 귀족의 사냥 놀음으로 인한 작물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혼 시 영주의 허락과 결혼세를 내야 했다. 농민 사망 시 영주는 최상품을 가질 권리가 있었다. 성직자나 유산시민, 도시귀족들이 맡는 사법제도는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랜 농노제와 영지들의 반독립적 자치성은 민란을 지역적 단위로 국한시켰다.

3. 원인

독일 농민전쟁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발생한 종교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 부유한 농민들이 사회 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부와 권리가 유출되는 것을 보고 이를 사회의 법적, 사회적, 종교적 구조 속에 확고히 하려 했다는 견해, 농민들이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 출현에 반대했다는 견해 등이 있다.

흑사병 이후 14세기 하반기부터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었고, 식량과 상품 품귀 현상으로 농작물 가격도 상승했다. 그 결과 일부 농민, 특히 소규모 자영농들은 경제적, 사회적, 법적 혜택을 누렸다. 이들은 새로운 권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이미 획득한 권리를 보호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확대하려 했으며, 뮐hausen의 농민들이 영주 부인의 실을 감는 데 사용하기 위한 달팽이 껍데기 수집을 거부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약화되었던 봉건 영주 제도가 부활하는 것을 농민들은 원치 않았다.

분트슈 반란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을 표현하고 확산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기사도 참조. thumb 사회 계층의 모든 사람들—농노나 도시 거주자, 길드원이나 농부, 기사 및 귀족—은 기성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과 독일 농민 전쟁은 같은 시기에 발생했지만 독립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는 사회적 평등을 확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루터는 팜플렛 ''살인적이고 도둑질하는 농민 무리에 반대하며''에서 농민 반란에 격렬히 반대했다.

역사가 롤랜드 베인턴은 이 반란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루터의 종교 개혁의 수사법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경제적 긴장에 의해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투쟁으로 보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도시 계급)가 제후의 권력에 맞서 자율성을 주장하는 데 실패하고 농촌 계급을 운명에 맡긴 사건으로 해석했다.

4. 전개

수많은 소규모 봉기도 진압되었다. 예를 들어, 1525년 6월 23일/24일 페더스하임 전투에서 팔츠 농민 전쟁의 반란군 haufensde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1525년 9월까지 모든 전투와 징벌 조치가 종료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슈바벤 동맹의 개입에 감사를 표했다.

1524년 8월 24일, 한스 뮐러 폰 불겐바흐는 슈튈링겐에서 농민들을 모아 "복음주의 형제단"을 결성하고 독일 전역의 농민 해방을 맹세했다.[13]

슈바벤 동맹의 1개 파견군(기병 200기, 보병 1,000명)으로는 사태를 진압할 수 없었다. 1525년이 되자 슈바르츠발트, 브라이스가우, 헤가우, 준트가우, 엘자스에서만 기병 300기와 보병 3,000명이 동원되어야 했다.[35]

12개조』 속표지.


1525년 3월 6일, 상슈바벤 지역 농민군 대표 50여 명은 메밍겐에 모여 슈바벤 동맹의 진압에 대응하는 공동의 대의를 논의했다. 이들은 기독교연맹 출범을 선포하고, 3월 15일과 30일에 다시 모여 12개조 정강과 동맹령을 채택했다. 분트슈를 그린 기가 서약동맹의 상징으로 내걸렸다. 12개조 정강은 2개월간 25,000부 이상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12개조 정강은 목회자 임금 삭감 및 남은 대십일조의 공공목적 활용, 소십일조 폐지, 농노제와 사망세 철폐, 어로권과 수렵권 복권, 공유림과 공유지 환원, 과중한 노동·세금·지대 규제, 자의적 사법과 행정 종식 등을 요구했다. 당시의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토마스 뮌처를 포함한 농민들을 향해 “도둑놈들”이라고 비난하며, 귀족 편을 들어 진압하도록 하였다.

일러강은 자유 제국 도시 켐프텐과 켐프텐 수도원을 나누고 있다.


1525년 4월 4일, 5,000명의 농민들, 즉 Leipheimer Haufende(문자 그대로: 라이프하임 무리)은 울름시에 대항하기 위해 라이프하임 근처에 집결했다. 농민들은 아르케부스와 몇 문의 경야포로 무장했다. 트루흐세스는 자신의 군대의 주력을 라이프하임을 향하게 한 채, 헤센과 울름에서 파견된 기병대를 도나우강을 건너 엘칭겐으로 보냈다. 농민 주력 부대로부터 일제 사격을 받은 트루흐세스는 경기병과 소수의 보병대로 구성된 경비대를 농민들의 요새화된 진지에 투입했다. 그 뒤를 그의 주력이 따랐다. 농민들은 그의 주력 부대의 규모를 보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요새화된 진지를 지키던 약 4,000명의 농민 중 2,000명은 부상병들을 수레에 태워 라이프하임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도나우강을 건너 탈출하려 했고, 400명이 그곳에서 익사했다. 트루흐세스의 기병대는 추가로 500명을 베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첫 번째 중요한 전투였다.[16]

|thumb|포도밭에 둘러싸인 바이엔스베르크 성의 삽화. 바이엔스베르크에서 농민들은 성을 함락시키고 귀족 영주들을 학살했다.]]

오덴발트의 농민들은 시토회 수도원인 쇤탈을 점령했으며, 슈베비슈 할 근처의 림푸르크와 호엔로에에서 온 농민 부대와 합류했다. 야코프 로르바흐의 지휘 하에 네카어 계곡에서 온 대규모 농민 부대가 그들과 합류하여 네카어줄름에서 왔다. "밝은 부대"(독일어: Heller Haufende)라고 불린 이 확장된 부대는 바이엔스베르크 마을로 진군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의 뷔르템베르크 총독이었던 헬펜슈타인 백작이 그곳에 있었다.[17] 농민들은 바이엔스베르크 성을 공격하고 점령하여 백작을 포로로 잡은 후, 그와 그와 함께 피신한 약 70명의 다른 귀족들에게 을 강요했다.[17] 4월 말, 부대는 아모르바흐로 진군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를리힝겐의 피를 원하는 급진적인 오덴발트 농민들과 합류했다. 행진 과정에서 그들은 와일덴부르크 성을 불태웠다. 바이엔스베르크 학살은 루터에게도 너무 심했다. 이는 그가 《농민의 살인적이고 도둑질하는 무리에 반대하여》에서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행동이었다.

|thumb|농민전쟁 당시 농민 지도자였던 작은 잭(Jacklein) 로르바흐가 네카가르타흐에서 화형당하는 모습

5월 15일, 헤세 방백 필리프와 작센 공작 게오르크의 연합군은 슈바르츠부르크 백국의 프랑켄하우젠 근처에서 뷘처 휘하의 농민들을 격파했다. 군주들의 군대에는 6,000명에 가까운 용병, 즉 란츠크네히트de가 포함되었다. 반면 농민들은 장비가 열악하거나 아예 없었으며, 많은 이들이 경험과 훈련을 받지 못했다. 뷘처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5월 27일 뮐하우젠에서 처형되었다.[18]

뵈블링겐 전투(1525년 5월 12일)는 농민들이 발트부르크의 트루흐세스(집사)가 로텐부르크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5월 10일 그를 향해 진격하여 헤렌베르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뷔르템베르크군은 뵈블링겐과 진델핑겐 사이에 세 개의 야영지를 설치했다. 농민들은 동맹의 기병에 의해 포위되어 수 킬로미터나 추격당했다. 뷔르템베르크군은 약 3,000명의 농민을 잃었지만, 동맹은 40명 이하의 군인을 잃었다.

2월 6일, 쾨니히스호펜에서 농민 지휘관 벤델 힙플러와 게오르크 메츨러는 마을 외곽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농민 포병대는 좌측에서 공격해 온 동맹 선두 기병대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트루세스의 보병대가 정면 공격을 가했지만, 그는 보병의 교전을 기다리지 않고 농민의 후방에 대한 공격도 명령했다. 기사들이 후열을 공격하자 농민들 사이에 공황 상태가 벌어졌다. 힙플러와 메츨러는 대포병들과 함께 도주했다. 이 전투는 전장의 감시탑 때문에 투름베르크 전투라고도 불린다.

프라이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영토였으며, 농민들과 싸울 징집병을 충분히 모으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5월 초, 한스 뮐러는 8,000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이부르크 근처의 키르제나흐에 도착했다. 다른 여러 무리들이 도착하여 총 18,000명으로 늘어났고, 며칠 만에 도시는 포위되었으며 농민들은 공성전을 계획했다. 5월 23일, 도시 원로들은 항복하고 농민들과 소위 "기독교 연합"에 참여했다.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를 농민들이 장악한 후, 한스 뮐러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라돌프첼 공성을 지원했다. 나머지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6월 4일, 뷔르츠부르크 근처에서 뮐러와 그의 소규모 농민 군대는 헬렌 리히텐 하우펜의 프랑켄 농민들과 합류했다. 이 연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력은 비교적 소규모였다. 뷔르츠부르크 인근 발트부르크-차일에서 그들은 괴츠 폰 베를리힝겐("쇠손의 괴츠")의 군대와 마주쳤다. 제국 기사이자 경험이 풍부한 군인인 그는 비록 그의 군대도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농민들을 쉽게 격파했다. 약 2시간 만에 8,000명 이상의 농민이 사망했다.

4. 1. 봉기의 시작과 확산

1524년 수확철, 슈바르츠발트 남쪽 슈튈링겐에서 루펜 백작부인이 농노들에게 실패로 쓸 달팽이 껍데기를 모아 오라고 명령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며칠 사이 1,200명의 농민이 모여 불만사항 목록을 작성하고 대표를 선출, 기치를 올렸다. 이후 몇 주 만에 서남독일 대부분 지역이 반란 상태에 들어갔으며, 봉기는 슈바르츠발트에서 라인강을 따라 콘스탄체호, 슈바반 고지, 다뉴브강 상류, 바이에른, 티롤까지 확산되었다.[35]

1525년 2월 16일, 메밍겐 자유시에 속한 25개 촌락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 조건과 전반적인 정치 상황 개선을 요구했다. 이들은 농노제, 토지 이용, 숲과 공유지의 지역권, 종교적 요구사항 등을 호소했다. 시참사회는 위원회를 설치했으나, 농민들은 농민-도시 관계의 기둥뿌리를 흔드는 12개 조항의 정강을 내놓았고, 시참사회는 이를 거부했다. 역사학자들은 메밍겐에서 제기된 개혁안이 상슈바벤 서약동맹의 12개조 정강의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525년 3월 6일, 상슈바벤 지역 농민군 대표 50여 명은 메밍겐에 모여 슈바벤 동맹의 진압에 대응하는 공동의 대의를 논의했다. 이들은 기독교연맹 출범을 선포하고, 3월 15일과 30일에 다시 모여 12개조 정강과 동맹령을 채택했다. 분트슈를 그린 기가 서약동맹의 상징으로 내걸렸다. 12개조 정강은 2개월간 25,000부 이상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12개조 정강은 목회자 임금 삭감 및 남은 대십일조의 공공목적 활용, 소십일조 폐지, 농노제와 사망세 철폐, 어로권과 수렵권 복권, 공유림과 공유지 환원, 과중한 노동·세금·지대 규제, 자의적 사법과 행정 종식 등을 요구했다. 당시의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토마스 뮌처를 포함한 농민들을 향해 “도둑놈들”이라고 비난하며, 귀족 편을 들어 진압하도록 하였다.

1524년 8월 24일, 한스 뮐러 폰 불겐바흐는 슈튈링겐에서 농민들을 모아 "복음주의 형제단"을 결성하고 독일 전역의 농민 해방을 맹세했다.[13]

슈바벤 동맹의 1개 파견군(기병 200기, 보병 1,000명)으로는 사태를 진압할 수 없었다. 1525년이 되자 슈바르츠발트, 브라이스가우, 헤가우, 준트가우, 엘자스에서만 기병 300기와 보병 3,000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4. 2. 12개조 정강

1524년 슈바르츠발트 남쪽 슈튈링겐에서 루펜 백작부인이 농노들에게 실패로 쓸 달팽이 껍데기를 모아 오라고 명령한 것을 계기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35] 며칠 사이 1,200 명의 농민들이 모여 불만사항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봉기했으며, 이는 서남독일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35] 봉기는 슈바르츠발트로부터 라인강을 따라 콘스탄체호, 슈바반 고지, 다뉴브강 상류, 바이에른, 티롤까지 이어졌다.[35]

1525년 2월 16일, 메밍겐 자유시에 딸린 25개 촌락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조건과 전반적인 정치적 상황의 개선을 요구했다. 이들은 부채노역, 토지이용, 지역권 문제, 종교적 요구사항 등을 호소했고, 시참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해 위원회를 설치했다. 농민들은 예상과 달리 농민-도시 관계의 기둥뿌리를 때리는 정갈한 선언서를 내놓았고, 이는 12개 조항으로 정리되었다. 시참사회는 농민들의 요구 대부분을 거부했지만, 메밍겐에서 제기된 개혁안은 이후 상슈바벤 서약동맹에서 발표한 12개조 정강의 기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1525년 3월 6일, 상슈바벤 지역의 농민군 연대 대표자 50여 명이 메밍겐에 모여 슈바벤 동맹의 진압에 대응하는 공동의 대의를 논의하고, 기독교연맹의 출범을 선포했다.[35] 농민들은 3월 15일과 3월 30일 재차 메밍겐에서 모여, 추가적인 심의를 거쳐 12개조 정강과 동맹령을 채택했다.[35] 분트슈를 그린 기가 서약동맹의 상징으로 내걸렸다.[35] 12개조 정강은 이후 2개월간 25,000부 이상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35]

12개조 정강은 목회자의 임금을 삭감하고, 그 차액으로 남은 대십일조를 공공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 대십일조란 천주교회에서 밀과 포도에 매긴 십일조로서 농민들 수입의 10% 이상을 떼어갔다. 또한 12개조 정강은 밀과 포도 이외의 작물에 매기는 소십일조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예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와 같은 당시의 종교개혁가들은 토마스 뮌처를 포함한 농민들을 비난하며 귀족편을 들어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12개조 정강에서는 농노제와 사망세를 철폐할 것, 농민의 어로권과 수렵권의 복권할 것, 귀족들이 사유화한 공유림과 공유지를 환원할 것, 과중한 노동과 세금 및 지대를 규제할 것, 자의적 사법과 행정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요구했다.

4. 3. 주요 전투

켐프텐임알게우는 바이에른이 뷔르템베르크오스트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인 알게우의 중요 도시였다. 8세기 초 켈트족 수도사들이 켐프텐 수도원을 세웠고,[15] 1213년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켐프텐 수도원장에게 공작 작위를 내렸다. 1289년에는 합스부르크루돌프 1세일러강을 사이에 두고 켐프텐 수도원 맞은편에 형성된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여 자유제국도시로 만들어 주었다. 1525년에는 수도원장의 재산권이 자유시 측에 판매되어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도시가 공존하게 되었다. 켐프텐은 이렇게 층층이 지배구조가 형성된 곳이었는데, 농민전쟁 당시 수도원에 예속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원을 약탈하고 도시 쪽으로 이동했다.[15]

1525년 4월 4일, 5,000명의 농민들, 즉 Leipheimer Haufende(문자 그대로: 라이프하임 무리)은 울름시에 대항하기 위해 라이프하임 근처에 집결했다. 동맹 정찰대는 게오르크, 트루흐세스 폰 발트부르크에게 농민들이 화약과 포탄을 갖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수는 3,000~4,000명에 달했다고 보고했다. 농민들은 비버 강 동쪽 제방의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왼편에는 숲, 오른편에는 개울과 늪지가 있었으며, 그 뒤에는 마차 요새를 세우고 아르케부스와 몇 문의 경야포로 무장했다. 트루흐세스는 자신의 군대의 주력을 라이프하임을 향하게 한 채, 헤센과 울름에서 파견된 기병대를 도나우강을 건너 엘칭겐으로 보냈다. 분견대는 1,200명의 농민들이 현지 징발에 참여하고 있는 별개의 무리와 마주쳤고, 전투를 벌여 그들을 흩어 버리고 250명을 포로로 잡았다. 농민 주력 부대로부터 일제 사격을 받은 트루흐세스는 경기병과 소수의 보병대로 구성된 경비대를 농민들의 요새화된 진지에 투입했다. 그 뒤를 그의 주력이 따랐다. 농민들은 그의 주력 부대의 규모를 보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요새화된 진지를 지키던 약 4,000명의 농민 중 2,000명은 부상병들을 수레에 태워 라이프하임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도나우강을 건너 탈출하려 했고, 400명이 그곳에서 익사했다. 트루흐세스의 기병대는 추가로 500명을 베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첫 번째 중요한 전투였다.[16]

|thumb|포도밭에 둘러싸인 바이엔스베르크 성의 삽화. 바이엔스베르크에서 농민들은 성을 함락시키고 귀족 영주들을 학살했다.]]

오덴발트의 농민들은 시토회 수도원인 쇤탈을 점령했으며, 슈베비슈 할 근처의 림푸르크와 호엔로에에서 온 농민 부대와 합류했다. 야코프 로르바흐의 지휘 하에 네카어 계곡에서 온 대규모 농민 부대가 그들과 합류하여 네카어줄름에서 왔다. "밝은 부대"(독일어: Heller Haufende)라고 불린 이 확장된 부대는 바이엔스베르크 마을로 진군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의 뷔르템베르크 총독이었던 헬펜슈타인 백작이 그곳에 있었다.[17] 농민들은 바이엔스베르크 성을 공격하고 점령하여 백작을 포로로 잡은 후, 그와 그와 함께 피신한 약 70명의 다른 귀족들에게 을 강요했다.[17] 로르바흐는 부대의 피리 연주자에게 창살 통과형 처형 동안 연주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다른 부대의 많은 농민 지도자들에게는 너무 심했다. 그들은 로르바흐의 행동을 비난했고, 기사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그를 대신했으며, 이후 부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4월 말, 부대는 아모르바흐로 진군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를리힝겐의 피를 원하는 급진적인 오덴발트 농민들과 합류했다. 행진 과정에서 그들은 와일덴부르크 성을 불태웠다. 바이엔스베르크 학살은 루터에게도 너무 심했다. 이는 그가 《농민의 살인적이고 도둑질하는 무리에 반대하여》에서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행동이었다.

|thumb|농민전쟁 당시 농민 지도자였던 작은 잭(Jacklein) 로르바흐가 네카가르타흐에서 화형당하는 모습

4월 29일, 튀링겐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공개적인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다. 뷘처가 5월 11일 뮐하우젠에서 온 300명의 병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 주변 영지의 수천 명의 농민들이 들판과 목초지에 진을 쳤다. 농민과 마을 병력의 최종 규모는 6,000명으로 추산되었다. 헤세 방백 필리프와 작센 공작 게오르크는 뷘처를 추적하며 프랑켄하우젠으로 란츠크네히트 부대를 투입했다. 5월 15일, 헤세 방백 필리프와 작센 공작 게오르크의 연합군은 슈바르츠부르크 백국의 프랑켄하우젠 근처에서 뷘처 휘하의 농민들을 격파했다. 군주들의 군대에는 6,000명에 가까운 용병, 즉 란츠크네히트de가 포함되었다. 반면 농민들은 장비가 열악하거나 아예 없었으며, 많은 이들이 경험과 훈련을 받지 못했다. 많은 농민들은 싸울지 협상할지를 두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5월 14일, 그들은 헤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군대의 작은 기만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성공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대신 반란군은 휴전을 맺고 수레 요새로 후퇴했다. 다음 날 필리프의 군대는 게오르크 공작의 작센 군대와 합류했고 즉시 휴전을 깨고, 강력한 보병, 기병, 포병의 연합 공격을 시작했다. 농민들은 기습을 당했고 공황 상태에 빠져 마을로 도망쳤으며, 공권력에 의해 계속 추격당하고 공격받았다. 대부분의 반란군은 학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뷘처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5월 27일 뮐하우젠에서 처형되었다.[18]

뵈블링겐 전투(1525년 5월 12일)는 농민들이 발트부르크의 트루흐세스(집사)가 로텐부르크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5월 10일 그를 향해 진격하여 헤렌베르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슈바벤 동맹이 헤렌베르크를 탈환하려 하자, 뷔르템베르크군은 뵈블링겐과 진델핑겐 사이에 세 개의 야영지를 설치했다. 농민들은 동맹의 기병에 의해 포위되어 수 킬로미터나 추격당했다. 뷔르템베르크군은 약 3,000명의 농민을 잃었지만, 동맹은 40명 이하의 군인을 잃었다.

2월 6일, 쾨니히스호펜에서 농민 지휘관 벤델 힙플러와 게오르크 메츨러는 마을 외곽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동맹과 연합 기병 2개 부대가 양쪽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는 트루세스의 위험한 전략임을 인지한 그들은 마차 요새와 대포를 마을 위의 언덕으로 재배치했다. 기마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을 배운 농민들은 대포 뒤, 마차 요새 앞, 즉 후방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4개의 밀집 대형으로 집결했다. 농민 포병대는 좌측에서 공격해 온 동맹 선두 기병대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트루세스의 보병대가 정면 공격을 가했지만, 그는 보병의 교전을 기다리지 않고 농민의 후방에 대한 공격도 명령했다. 기사들이 후열을 공격하자 농민들 사이에 공황 상태가 벌어졌다. 힙플러와 메츨러는 대포병들과 함께 도주했다. 해 질 녘까지 600명의 농민만이 남아 있었다. 트루세스는 그의 군대에 전장을 수색하라고 명령했고, 병사들은 죽은 척했던 약 500명의 농민을 발견했다. 이 전투는 전장의 감시탑 때문에 투름베르크 전투라고도 불린다.

프라이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영토였으며, 농민들과 싸울 징집병을 충분히 모으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가 간신히 병력을 구성하여 그들과 맞서기 위해 진군했지만, 농민들은 숲으로 흩어졌다. 바덴 공작 에른스트 변경백이 12개 조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후, 농민들은 검은 숲의 수도원을 공격했다. 요한 기사단은 5월 2일에 하이터스하임에서 그들에게 함락되었고, 북쪽의 하우펜은 테넨바흐와 에텐하임뮌스터의 수도원을 약탈했다. 5월 초, 한스 뮐러는 8,000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이부르크 근처의 키르제나흐에 도착했다. 다른 여러 무리들이 도착하여 총 18,000명으로 늘어났고, 며칠 만에 도시는 포위되었으며 농민들은 공성전을 계획했다. 5월 23일, 도시 원로들은 항복하고 농민들과 소위 "기독교 연합"에 참여했다.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를 농민들이 장악한 후, 한스 뮐러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라돌프첼 공성을 지원했다. 나머지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6월 4일, 뷔르츠부르크 근처에서 뮐러와 그의 소규모 농민 군대는 헬렌 리히텐 하우펜의 프랑켄 농민들과 합류했다. 이 연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력은 비교적 소규모였다. 뷔르츠부르크 인근 발트부르크-차일에서 그들은 괴츠 폰 베를리힝겐("쇠손의 괴츠")의 군대와 마주쳤다. 제국 기사이자 경험이 풍부한 군인인 그는 비록 그의 군대도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농민들을 쉽게 격파했다. 약 2시간 만에 8,000명 이상의 농민이 사망했다.

5. 군사 조직

5. 1. 슈바벤 동맹군

슈바벤 동맹의 본부는 울름에 있었고, 동맹의 전쟁평의회에서 지휘권과 가맹 영방이 각자 동원할 병력의 수를 결정했다.[32] 동맹에 가맹한 영방국가들은 각자 여력에 따라 특정한 숫자의 승마기사와 도보병사를 동원했는데, 이렇게 동원된 병력을 파견군(contingent)이라 했고, 파견군들을 보태서 동맹군을 형성했다.[32] 예컨대 아우크스부르크 주교는 반 개 중대에 해당하는 기병 10기와 보병 62명의 파견군을 보탰다.[32] 민란 초기, 슈바벤 동맹의 영방들은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어서 병사로 동원된 농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32] 또한 민란 지역이 확대되면서 영방의 공후들은 각자 영지에서 반란군과 싸우기 바빠서 동맹에 파견군을 보태기 어려웠고,[32] 귀족들이 동맹에 병력을 보탤 의무가 있는 동시에 자기 상전인 공후에게도 충성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32]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병력 운용에 혼선이 발생함으로써 진압군 측이 충분히 많은 병력을 집결시킬 수 없었던 것이 민란이 초기에 진압되지 않고 들불같이 확산된 한 원인이었다.[32]

도보병사들은 대부분 란츠크네히트에서 동원되었다.[32] 란츠크네히트는 용병 집단들로, 대개 월급 4 길더를 받았고 연대(haufende)와 중대(fähnleinde)들로 조직화되어 다른 병력들과 구분되었다.[32] 1개 중대의 병력은 120-300 명이었고, 각 중대는 다시 10-12명의 분대(rottede)들로 구성되었다.[32] 란츠크네히트는 의복과 무장, 식량을 스스로 조달했으며, 그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제공하는 제빵사, 세탁부, 창녀, 매점상 등 잡다한 직종으로 구성된 무리를 함께 끌고 다녔다.[32] 이런 수행집단(trossde)이 전투병력보다 더 수가 많을 때도 있었고, 그들 역시 나름의 규율로 조직화되었다.[32] 란츠크네히트들은 용병대마다 제각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구조를 게마인(gemeinde)이라 했다.[32] 게마인에는 지도자격인 슐타이스(schultheissde)와 기강 유지 장교인 프로포슈트(provostde)가 있었다.[32] 독일농민전쟁에서 란츠크네히트가 동원된 것은 귀족이 전쟁을 담당하는 전통적인 책임 내지 역할이 용병을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바뀌는 전환기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16세기에 걸쳐 아주 흔한 현상이었다.[33][12]

동맹군의 주력인 기병대는 여전히 귀족 기사들이었다.[32] 슈바벤 동맹은 중기병경기병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경기병인 렌파흐네(rennfahnede)가 전위대 역할을 했다.[32] 렌파흐네는 보통 가난한 기사나 몰락귀족의 차남 또는 삼남 출신이었다.[32] 장남만 부친의 지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하급귀족 또는 몰락귀족의 차남-삼남들은 시골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거나 또는 노상강도로 돌변하곤 했다.[32]

동맹군을 지휘한 사령관은 게오르크 3세 폰 발트부르크차일이었다.[32] 그는 농민전쟁을 진압하면서 보여준 잔혹한 행적으로 "농민고문자(Bauernjörg)", "농민 잡는 채찍(Scourge of the Peasant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2] 발트제 출신인 게오르크 3세는 요한 2세 폰 발트부르크볼페크와 헬레나 폰 호엔촐레른의 아들로, 1509년 아폴로니아 폰 발트부르크조넨베르크와 결혼했고, 이후 마리아 폰 외팅겐과 재혼했다.[34]

농민의 재앙, 게오르크 트루흐세스 폰 발트부르크

5. 2. 농민군

농민군은 란츠크네히트와 비슷하게 연대(Haufen) 단위로 조직되었고, 각 연대는 하연대(unterhaufen) 또는 중대(fähnlein), 분대(rotten)라는 하위 집단들로 구성되었다.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이 다양한 지역 출신자들로 구성된 것과 달리, 농민군은 각 지역별로 나뉘어 조직되었고, 그래서 농민군 연대의 규모는 해당 지역에서 민란에 참여한 사람의 수효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어떤 연대의 수는 4000 여명이었고, 프랑켄하우젠 같은 곳에서는 8,000 명이나 모였다. 차베른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의 수효는 1만 8,000 명에 이르렀다.

연대를 구성하는 중대들의 병력은 대개 500 명이었고, 다시 10-15명 병력의 소대들로 나뉘었다. 농민군은 란츠크네히트와 비슷하게, 대령격인 최상급야전대장(Oberster feldhauptmann), 위관(leutinger) 등의 직함을 사용했다. 각 중대는 대위가 지휘했고, 중대마다 소위격인 기수(fähnrich)가 있어서 중대기를 들었다. 또한 중대마다 부사관(feldweibel)과 분대장(rottmeister)들이 있었다. 이런 장교들은 대개 선출되었고, 특히 최상급야전대장과 위관은 거의 선출로 뽑혔다.

농민군은 링(ring)이라는 기구로 행정을 꾸렸는데, 농민들이 원형으로 모여 앉아 전술, 기동, 동맹, 노획물 분배를 논의했다. 링은 의사결정기구였다. 이렇게 민주적인 구조를 가지는 동시에, 최상급야전대장과 슐타이스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도 있었다. 슐타이스는 란츠크네히트들처럼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 밖에 농민군의 계급 겸 보직으로는 위관, 중대장(대위), 기수(소위), 포술장(master gunner), 수레요새장(wagon-fort master), 훈련장(train master), 경계장(watch-masters) 4인, 전투시 대오를 유지하는 선임부사관(sergeant-majors) 4인, 각 중대별 부사관 1인, 병참장(quartermaster) 2인, 장제사(farriers), 말병참장(quartermasters for the horses), 연락장교, 노획장(pillage master) 등이 있었다.

농민들은 야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전술적 자원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15세기 후스 전쟁의 유산이었던 수레요새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사슬로 묶어 원형으로 연결한 수레들을 적절한 방어위치에 배치하고, 그 중앙에 기병과 사역동물들을 넣어 보호했다. 수레들의 고리 바깥쪽에 참호를 파고, 목재로 수레들 사이와 수레 아래의 틈을 막았다. 후스 전쟁 때는 가운데 흙을 도담하게 쌓아 포병을 거기 배치해서 아군의 요새선 너머로 곡사할 수 있게 했었다. 수레요새는 빠르게 세우고 또 빠르게 해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기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려면 적당히 크고 평탄한 대지가 있어야 했고, 완벽한 방어선은 못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수레요새가 사용된 초창기는 총포의 사정거리와 위력이 증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농민들은 돌아가면서 농민군에 참여했는데, 대개 1주일에 4일을 복무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고향에 돌아갔다. 농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일은 고향의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맡았는데, 때로 그 일은 농민군의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컨대 잘츠부르크 대주교후국에서 농민들의 부역으로 채취된 은 대주교가 란츠크네히트를 고용해 슈바벤 동맹의 파견군으로 보태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슈바벤 동맹과 비교해 기병 전력이 절대적으로 빈약했다. 말이 적었고, 마갑은 거의 없었다. 농민군의 기병은 전투병력보다는 수색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병대의 부재는 측면 방어의 취약함을 의미했고, 취약한 측면을 란츠크네히트 방진이 뚫고 들어오는 것은 농민전쟁 내내 농민군 측의 전술적 전략적 문제로 상존했다.

독일 농민 전쟁 중 반란군의 방황하는 무리들

6. 평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농민전쟁을 계급투쟁으로 해석하였으며,[19]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토마스 뮌처의 독일농민전쟁을 사회주의 혁명의 전통이 시작된 사건으로 평가한다.[19] 엥겔스는 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개념을 바탕으로 1524년부터 1525년까지의 사건들을 1848년 혁명의 전조로 묘사하면서, 농민 전쟁이 현재의 투쟁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싸워야 할 적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다.[19] 그는 반란의 실패 원인을 농민들의 보수성에서 찾았으며,[19]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19]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도시와 귀족들은 제후들의 군대와 개별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 구질서를 복원했다. 이 질서는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통제하에 있었다. 반란 실패의 주요 원인은 영토 분할로 인한 농민 집단 간의 의사소통 부족과 군사적 열세였다. 슈바벤 동맹란츠크네히트와 전문 군인, 기사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군사 기술, 전략, 경험 면에서 우위를 점했다. 독일 농민 전쟁의 여파로 농민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줄어들었고, 정치 생활에서 밀려났다. 다만, 상부 슈바벤의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영토 의회(Landschaft)를 통해 세금 문제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2개 조항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변화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고 정체되었으며, 진정한 변화는 수 세기 후에야 나타났다.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수천 명의 농민이 목숨을 잃어 관련 지역의 경제가 황폐화되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반란의 성격과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종교적 논쟁에서 비롯된 것인지, 부유한 농민들이 재산과 권리를 재확립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에 대한 저항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19] 1930년대 이후, 귄터 프란츠는 농민전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이해했으며, 농민들의 불만이 경제적 근거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19] 그는 봉기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했고, 패배는 농민들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보았다.[19]

1989년 동독에서 발행한 토마스 뮌처 우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새로운 경제적 해석이 등장하여, 농민들이 경제적 이점을 잃고 이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19] 동독의 역사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20] 1970년대부터는 사회 및 문화사학자들의 관심으로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21]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는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며, 남부 독일에서 후기 중세 시대에 봉건주의의 위기를 보았지만, 농민과 영주가 장기적인 기후, 기술, 노동 및 작물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19] 블리클레에게 반란은 남서부 독일의 의회 전통과 농업 생산 및 유통에 상당한 이익을 가진 집단의 우연한 일치가 필요했다.[19]

이러한 관점은 농업 집단의 경제 회복 참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스크리브너, 스탈메츠, 베르네케는 블리클레의 분석이 맬서스주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으며, 농민 경제 회복이 제한적이어서 소수의 농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21][22] 새로운 연구는 농민들이 많은 권리와 전통적 자유를 회복하거나 확대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23] 전쟁의 과정은 새로운 해방 이데올로기, 카리스마적 인물들의 등장, 특정한 경제적, 사회적 기원을 가진 불만 사항, 도전받는 정치적 관계, 그리고 정치적 및 사회적 담론의 공동체적 전통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23]

농민 반란의 민족적 측면은 나치에 의해 이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8 SS 기병 사단 플로리안 가이어(8th SS Cavalry Division Florian Geyer)는 농민 부대를 이끈 기사 플로리안 가이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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