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칸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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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료칸은 1758년 일본 에치고국에서 태어난 조동종 승려이자 시인, 서예가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수행하며, 전국을 유랑하며 시와 서예를 통해 자연과 삶의 진리를 탐구했다. 그는 승려로서의 직함을 거부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으며,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료칸은 말년에는 비구니 데이신니와 교류하며 하이쿠를 주고받았고, 1831년 좌선 자세로 입적했다. 그의 삶과 작품은 문학,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 그의 묘소는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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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료칸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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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료칸 다이구 (良寛大愚) |
| 별칭 | 료칸 (良寛) |
| 출생 | 1758년 |
| 사망 | 1831년 2월 18일 |
| 국적 | 일본 |
| 종교 | 불교 |
| 종파 | 조동종 |
| 칭호 | 로시 |
| 학문 및 경력 | |
| 스승 | 국선 화상 |
| 직업 | 승려 |
| 기타 | |
| 출생지 | 에치고국 니가타현 |
| 저서 | 없음 (정보 없음) |
2. 생애
료칸은 에도 시대 후기의 조동종 승려이자 뛰어난 시인이며 서예가이다. 그의 삶은 세속적인 명예나 부를 멀리하고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8]
에치고국 이즈모자키(현 니가타현 이즈모자키정)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8세에 출가하여 고쇼지에서 수행을 시작했다.[9] 이후 빗추국(현 오카야마현)의 엔츠지에서 고쿠센 화상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12년간 엄격한 수행을 거쳤다.[10]
스승 고쿠센 화상이 입적한 후, 료칸은 특정 사찰에 머물지 않고 여러 지방을 자유롭게 떠도는 탁발승의 길을 걸었다. 40대 후반에 고향 에치고로 돌아와 고쿠조산(国上山)의 고쿠조지(国上寺) 경내에 있는 작은 암자인 오합암(五合庵)에 정착했다. 이후 오합암과 인근 오토코 신사(乙子神社)의 초암 등지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특히 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거나 숨바꼭질하며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러한 순수하고 소탈한 모습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료칸은 와카, 한시, 하이쿠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남겼으며, 그의 시는 꾸밈없고 솔직하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의 서예는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서풍으로 유명하다.
평생 동안 특정 사찰의 주지를 맡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고,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도 늘 온화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어려운 불교 교리 대신 자신의 삶과 쉬운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며, 이러한 모습은 당시 민중들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만년에는 병을 얻어 후원자의 집에서 지내며 제자인 비구니 데이신니의 간호를 받다가 1831년, 74세의 나이로 평온하게 입적했다.[5] 그의 묘소는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의 류센지[11][15]에 있다. 료칸의 삶과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2. 1. 출생과 출가
료칸은 에치고국 이즈모자키(현 니가타현 산토군 이즈모자키정)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8] 그의 생가는 지역 명주(名主)인 다치바나야(橘屋)였으며, 아버지 이난(以南)은 명주이자 이시이 신사의 사직(祠職)을 맡았고, 하이쿠 작가이기도 했다.
료칸은 가업을 잇기 위해 명주 견습 과정을 밟았으나, 18세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출가를 결심했다. 당시 일본은 전국적으로 쌀 소동이 빈번했고, 료칸이 살던 에치고 지역 역시 자연재해와 흉작, 역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명주 견습생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분쟁을 조정하고, 절도죄를 지은 이의 사형 집행에 입회해야 했던 경험은 젊은 료칸에게 세상의 고통과 무력감을 깊이 느끼게 했다. 그는 "이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들로 가득한 가련한 곳"이라 여겼고, 이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출가 후, 료칸은 어릴 적 학문을 익혔던 조동종 사찰인 고쇼지[9]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안에이 8년(1779년), 22세가 되던 해에 그는 빗추국 다마시마(현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엔도지에서 고쿠센 화상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료칸은 비록 속세를 떠났지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부모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엔도지는 격식이 높고 입문 절차가 엄격했으며, 경전 공부보다는 노동을 통한 수행을 중시했다. 고쿠센 화상은 중국 선승 백장의 유명한 말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료칸에게 거듭 강조했으며, 이는 훗날 료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엔도지에서의 수행은 12년간 이어졌다. 수행 4년째 되던 해 봄,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부고를 접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10] 간세이 2년(1790년), 34세의 나이로 료칸은 마침내 수행을 마치고 승려로서 인가(印可)를 받았다. 이듬해, 스승 고쿠센 화상이 "마음 가는 대로 여행을 떠나 보아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자, 료칸은 스승의 뜻에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도는 긴 순례 여행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그의 방랑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기다이니(義提尼)로부터 와카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2. 2. 엔도지에서의 수행
안에이 8년(1779년) 22세 때, 빗추국 다마시마(玉島, 현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엔츠지(円通寺)에 있던 고쿠센 화상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사사하였다. 료칸은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부모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엔츠지는 격식이 높았으며, 입문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계율을 통과해야 했다. 경전을 배우는 것보다 노동에 힘쓰는 것을 우선시했으며, 중국 선승 백장선사의 유명한 말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가르침을 고쿠센 화상은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료칸에게 설파했다. 이 가르침은 훗날 료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엔츠지에서의 수행은 12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수행 4년째 되던 해 봄,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귀향은 허락되지 않았다.[10] 엔도지 수행 시절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료칸은 엔츠지에서 사토리를 얻었고, 간세이 2년(1790년)에는 인가를 받았다.
1791년, 료칸이 34세 되던 해에 스승 고쿠센 화상이 "마음 가는 대로 여행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자, 료칸은 엔츠지를 떠나 여러 지방을 순례하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일설에는 당시 엔츠지의 주지였던 겐토 소쿠추가 공안과 같은 '외래적' 요소를 배제하며 소토 종파를 개혁하려던 움직임에 료칸이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2. 3. 전국 유랑
1791년, 료칸의 나이 34세 때 스승 국선 화상이 "마음 가는 대로 여행을 떠나 보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자, 료칸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도 료칸의 방랑 여행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 기다이니(義提尼)로부터 와카의 영향을 받았다.
48세 때, 료칸은 고향 에치고국의 쓰바메시에 위치한 고쿠조산(国上山) 고쿠조지(国上寺)의 '오합암'(五合庵)에 머물기 시작했다. 오합암은 고쿠조지 본당을 재건한 객승 만겐 상인(萬元上人)이 매일 쌀 다섯 홉을 시주받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서 료칸은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웠고, 《추추첩》(秋萩帖)을 스스로 모범으로 삼았다. 오합암에서의 생활은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었다. 죽순이 자라나 방 안까지 들어오면 자리를 피해주고, 아이들이 찾아와 놀아달라고 조르면 해가 저물 때까지 함께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노래집 『후루산토』(布留散東)에서 “이 마을에서 공놀이하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봄날 하루가 저물지 않았으면”(この里に 手まりつきつつ 子どもらと 遊ぶ春日は 暮れずともよし)이라고 읊으며 아이들과의 소박한 교류를 즐겼다. 또한 서예는 료칸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기존의 서법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느껴 독자적인 서법을 만들어나갔다. 그의 서예는 기교를 부려 능숙하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점 하나, 획 하나의 위치에 따라 글자의 생명이 좌우되는 아슬아슬함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오합암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겨워진 61세 때, 료칸은 오토코 신사(乙子神社) 경내의 초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서예가 원숙기에 이른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70세에는 나가오카시 시마자키촌(島崎村)의 기무라 모토오에몬(木村元右衛門)이라는 사람의 저택 안에 머물렀다. 료칸은 평생 자신만의 사찰을 갖지 않았으며, 물질에 욕심이 없고 담백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어려운 불교 교리를 설파하기보다는, 자신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거나 쉬운 말과 격언을 통해 불법을 전했다. 이러한 자세는 평범한 민중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신뢰를 얻었다.

료칸의 임종은 제자 데이신니(貞心尼)가 끝까지 지켰으며, 그녀는 료칸의 와카를 모아 《연꽃의 이슬》(蓮の露)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료칸은 와카 외에도 한시, 교카, 하이쿠, 속요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에 능했으며, 특히 서예의 달인으로도 유명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 그의 이름을 빌린 위작도 많이 남아 있다. 료칸은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시마자키에 위치한 류센지(隆泉寺)[11]에 잠들어 있다.
2. 4. 고쿠조지와 오토코 신사
48세 때, 에치고국 가모하라군 고쿠조촌(현 쓰바메시)에 위치한 고쿠조산(国上山)의 고쿠조지(国上寺) 경내 '오합암'(五合庵)에 거처를 정했다. 오합암은 고쿠조지 본당을 재건한 객승 만원 상인(萬元上人)이 매일 쌀 다섯 홉(五合)을 시주받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10] 오합암에서 료칸은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죽순이 자라 방 안까지 들어오면 거처를 내주었고, 마을 아이들이 찾아와 놀아달라고 조르면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공놀이를 즐겼다. 료칸은 자신의 노래집 《후루산토》(布留散東)에서 "이 마을에서 공놀이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봄날 하루가 저물지 않았으면"(この里に手まりつきつつ子どもらと遊ぶ春日は暮れずともよし)이라고 읊으며 아이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이 시기 료칸은 서예에 몰두했는데, 서법의 본보기로 《추추첩》(秋萩帖)을 스스로 선택하여 익혔다. 또한 서예는 료칸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기존의 서법으로는 자신의 심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느껴, 료칸은 자신만의 독특한 서법을 만들어 나갔다. 료칸의 서예는 기교를 부려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점 하나, 획 하나의 위치와 균형을 통해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세심한 노력이 담긴 것이 특징이다.
오합암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겨워지자, 료칸은 61세 때 거처를 오토코 신사(乙子神社) 경내의 초암으로 옮겼다. 료칸의 서예는 이 시기에 이르러 원숙미를 더하게 되었다.
2. 5. 만년
48세 때, 료칸은 에치고국 가모하라군 (현 쓰바메시) 고쿠조산(国上山, 쿠가미야마)에 위치한 고쿠조지(国上寺, 코쿠조지)의 '고고암'(五合庵)에 머물기 시작했다. 고고암이라는 이름은 절을 재건한 객승 만원 상인이 매일 쌀 다섯 홉을 시주받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이곳에서 료칸은 서예를 본격적으로 익혔으며, 특히 《추국첩》(秋萩帖)을 스스로 선택하여 모범으로 삼았다.
고고암에서의 생활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죽순이 자라나 방 안까지 들어오면 거처를 내어주고, 아이들이 찾아와 놀아달라고 조르면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노래집 《후루산토》(布留散東)에 "이 마을에서 공놀이하며 아이들과 노는 봄날은 저물지 않았으면 좋겠다"(この里に手まりつきつつ子どもらと遊ぶ春日は暮れずともよし|일본어)라는 와카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서예는 료칸에게 답답하거나 울적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기존의 서법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느껴,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체를 만들어나갔다. 그의 서예는 기교를 부려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점 하나, 획 하나의 미세한 위치 차이가 글자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붓을 움직여 완성하는 것이었다.
61세가 되자 고고암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어져, 인근 오토코 신사 경내에 있는 초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시기에 료칸의 서예는 더욱 원숙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70세에는 시마자키촌(현 나가오카시)에 사는 기무라 겐에몬이라는 사람의 저택 안으로 이사하여 머물렀다. 료칸은 평생 자신 소유의 절을 갖지 않았으며, 물질적인 것에 욕심 없이 소박하고 담백한 삶을 살았다. 그는 어려운 불교 교리나 설법 대신, 자신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거나 쉬운 말과 격언을 통해 사람들에게 불법의 가르침을 전했다. 이러한 자세는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신뢰를 얻었다.
1826년(분세이 9년), 료칸은 병을 얻어 더 이상 혼자 지내기 어려워졌다. 그는 자신을 후원하던 기무라 모토우에몬의 집으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젊은 비구니인 테이신니(貞心尼)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기쁨이었으며, 료칸의 마지막 생애에 따뜻한 빛을 더하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4] 그들은 서로 하이쿠를 주고받으며 교감했으며, 이 시기에 주고받은 시들은 활기차면서도 다정한 감정을 담고 있다.
료칸은 1831년(덴포 2년) 1월 6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을 지킨 테이신니는 료칸이 좌선 자세로 앉아 마치 잠이 들 듯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5] 테이신니는 이후 료칸의 와카를 모아 《연꽃의 이슬》(蓮の露)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료칸은 와카 외에도 한시, 교카, 하이쿠, 속요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능했으며, 특히 서예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높은 명성 때문에 후대에 그의 이름을 빌린 위작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의 묘소는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시마자키에 있는 류센지[11][15]에 마련되어 있다.
3. 사상과 예술
료칸은 생애의 많은 시간을 시와 서예 창작에 몰두하며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데 보냈다. 그의 시는 꾸밈없이 단순하며, 주변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깊어,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탁발하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스스로를 승려나 '시인'과 같은 특정 직함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태도는 선(禪)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으며, 그의 글과 인용구에서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머 감각과 자신을 낮추는 소탈한 면모가 드러난다. 료칸의 예술 세계는 이처럼 그의 선 사상 및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3. 1. 선(禪) 사상
이제 숨겨진 면을 드러내고이제 다른 면을 드러내며—그렇게 떨어진다,
가을 잎.
3. 2. 시(詩)
료칸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솔직한 표현을 사용하여 많은 와카(和歌)를 남겼다.
- この宮の木(こ)したに子供等と遊ぶ夕日は暮れずともよし (이 궁의 나무 아래 아이들과 노는 저녁 해는 지지 않아도 좋다)
- 風きよし月はさやけしいざともに踊り明かさむ老いのなごりに (바람 맑고 달 밝으니 함께 춤추며 밤새우세, 늙음의 아쉬움으로)
- 歌もよまむ手毬もつかむ野にもいでむ心ひとつを定めかねつも (노래도 읊고 공놀이도 하고 들에도 나가려네, 마음 하나 정하지 못하고)
- いにしへを思へば夢かうつつかも夜はしぐれの雨を聞きつつ (옛 생각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밤에는 가을비 소리 들으며)
- 世の中にまじらぬとにはあらねどもひとり遊びぞ我はまされる (세상에 섞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홀로 노는 것이 나는 더 낫네)
또한 평생 231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지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한시는 다음과 같다.
生涯懶立身 … 생애 입신하기 저어하여
騰々任天真 … 등등히 하늘에 맡겼다네
嚢中三升米 … 주머니 안에 석 되 쌀
炉辺一束薪 … 등불 가까이 한 가닥 땔감
誰問迷悟跡 … 뉘라서 깨달음의 자취가 미혹함을 묻고
何知名利塵 … 어찌 명리가 먼지 같음을 알까
夜雨草庵裡 … 밤비 내리는 초암 속에서
双脚等閑伸 … 두 다리 편히 뻗고 있는데
— 료칸, 입야기타카 역주, 『良寛詩集』
료칸의 한시 작품 번역 및 해설서는 다이쇼 후기부터 쇼와에 이르기까지 100권 이상 출간되었다. 주요 시집 및 유고집은 다음과 같다.
- 『良寛』 (2001), 이이다 토시유키 편집, 현대어역 동문선문학집, 국서간행회
- 『良寛道人遺稿』 (2002), 야나기다 세이잔 편집, 중공 클래식스, 중앙공론신사
- 『良寛』 (2002), 이노우에 요시타카 편집, 일본한시인선집 11권, 연문출판
- 『良寛詩集』 (2006), 이리야 요시타카 편집, 평범사 동양문고, 강담사 (여러 차례 간행됨)
료칸은 많은 시간을 시와 서예에 할애하며 자연과 교감하며 보냈다. 그의 시는 종종 매우 단순하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여 때로는 마을 아이들과 놀다가 탁발하는 것을 잊기도 했다. 료칸은 승려나 시인으로서 어떤 직위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선(禪)의 전통에서 그의 인용구와 시는 그가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녔으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료칸은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친절함과 관대함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종 시에는 가까운 동료였던 비구니 테이신(貞心尼)에게 다음과 같은 선종게(禪宗偈)를 남겼다.
:裏を見せ 表を見せて 散る紅葉일본어
:うらをみせ おもてをみせて ちるもみじ일본어
:''ura wo mise / omote wo misete / chiru 단풍''
:
이제 숨겨진 면을 드러내고
이제 다른 면을 드러내며—그렇게 떨어진다,
가을 잎.
1826년 병을 얻어 은둔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후원자 중 한 명인 키무라 모토우에몬의 집으로 옮겨 테이신의 간호를 받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료칸의 말년에 빛을 더하는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다.[4] 그들은 일련의 하이쿠(俳句)를 주고받았는데, 활기차면서도 다정한 내용이었다. 료칸은 1831년 신년 6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테이신은 료칸이 좌선 자세로 앉아 마치 잠이 드는 것처럼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5]
3. 3. 서예
료칸은 많은 시간을 시와 서예를 쓰고 자연과 교감하며 보냈다. 그의 시는 종종 매우 단순하며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때로는 근처 마을 아이들과 놀다가 구걸하는 것을 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료칸은 스스로를 승려나 "시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거부했으며, 선(禪)의 전통 속에서 그의 인용구와 시는 그가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녔고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료칸은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친절함과 관대함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는 임종 시 가까운 동료였던 테이신에게 다음과 같은 선종게를 남겼다.
裏を見せ 表を見せて 散る紅葉|우라오 미세 오모테오 미세테 지루 모미지일본어
''ura wo mise / omote wo misete / chiru 단풍''
이제 숨겨진 면을 드러내고
이제 다른 면을 드러내며—그렇게 떨어진다,
가을 잎.
료칸의 작품에 대한 번역 및 해설서는 다이쇼 시대 후기와 쇼와 시대부터 현재까지 100권 이상 출간되었다.
4. 일화
료칸은 생전에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여 자주 어울려 놀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이의 순진한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부처의 마음"이라고 여겼다고 한다.[12] 아이들과 숨바꼭질이나 공차기를 즐겼고, 언제든지 놀 수 있도록 주머니에는 항상 공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12]
명필로 알려졌지만, 유명하거나 고명한 인물들의 글씨 의뢰는 거절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연에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기뻐하며 '天上大風|텐조타이후일본어'[13]이라는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때 써 준 연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전해진다.[13][16]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어느 날 저녁, 료칸은 자신이 숨을 차례가 되자 근처 논에 숨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료칸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온 농부가 논에 숨어 있는 료칸을 발견하고 놀라서 이유를 묻자, 료칸은 "쉿! 조용히 하시오. 큰 소리를 내면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도둑이 료칸의 오두막에 들었으나 워낙 가난하여 훔쳐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료칸이 돌아와 그를 붙잡고 "나를 만나러 먼 길을 오셨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제 옷을 선물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다. 도둑은 어리둥절하며 옷을 가져가 사라졌다. 료칸은 옷을 벗은 채 앉아 달을 바라보며 "불쌍한 친구, 이 아름다운 달을 그에게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료칸이 남긴 아래 하이쿠를 해석한 것일 수 있다.
:盗人に 取り残されし 窓の月일본어
:ぬすっとに とりのこされし まどのつき일본어
:''nusutto ni / torinokosareshi / mado no tsuki''
:
:''도둑이 남겨두고 간 것:''
:''달''
:''내 창가에.''[7]
한번은 그 지역의 번주(藩主)가 사람을 보내 료칸을 초청했다. 마침 료칸은 외출 중이었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사자는 암자 주위의 무성한 잡초를 뽑고 깨끗하게 청소했다. 돌아온 료칸은 깔끔해진 주위를 보며 "풀을 다 뽑아 버렸으니 이제 풀벌레 소리도 듣지 못하겠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료칸의 가난한 생활을 전해 들은 번주가 다시 사자를 보내 생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료칸은 "땔감으로 쓸 낙엽 정도는 바람이 가져다준다"며 거절했다.
료칸은 많은 시간을 시와 서예에 할애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보냈다. 그의 시는 매우 단순하며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 많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여 때로는 마을 아이들과 노느라 탁발하는 것을 잊기도 했다. 료칸은 승려나 시인 같은 어떤 직위나 명칭으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선종(禪)의 전통에서 그의 인용구나 시는 그가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녔으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료칸은 임종 시 가까운 벗이었던 여승 테이신에게 다음과 같은 선종게(禪宗偈)를 남겼다.
::裏を見せ 表を見せて 散る紅葉일본어
::うらをみせ おもてをみせて ちるもみじ일본어
::''ura wo mise / omote wo misete / chiru 단풍''
::
이제 숨겨진 면을 드러내고
이제 다른 면을 드러내며—그렇게 떨어진다,
가을 잎.
승려는 육식을 삼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료칸은 때때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젊은 승려가 료칸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그가 생선을 먹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묻자, 료칸은 "나는 생선이 나오면 먹는다. 그리고 밤에 잠잘 때는 벼룩과 이가 나를 실컷 뜯어먹도록 내버려 둔다. 어느 쪽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모기장 안에 몸의 일부만 넣고 자서 밖에 있는 벌레들을 해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료칸은 사케를 좋아하여 때로는 과음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에게 시골 술을 사 오게 하고 / 취한 뒤에는 몇 줄의 서예를 남긴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6] 한여름 본 축제에는 승려 신분으로 참석할 수 없었음에도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참여하기도 했다.
낭비를 싫어했던 료칸은 먹다 남은 음식을 작은 냄비에 보관했는데, 시간이 지나 음식이 썩어 구더기 등 벌레가 생기기도 했다. 주변에서 먹지 말라고 말리자 료칸은 "괜찮다. 먹기 전에 벌레를 덜어내면 맛은 괜찮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소탈하며 자연 친화적인 료칸의 모습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많은 사람에게 친근한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그의 일화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등으로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5. 어록
> 재난을 만나는 시기에는 재난을 만나는 것이 좋고, 죽는 시기에는 죽는 것이 좋으며, 이것이 바로 재난을 피하는 묘법이라오.
1828년, 료칸이 71세였을 때 산조 지진이라 불리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은 진도 7에 상당하는 강력한 흔들림을 동반했으며,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진원지 바로 남쪽의 요이타(与板)에 살고 있던 료칸의 지인 중 야마다 도코는 특히 료칸과 가까운 사이로, 그를 '반딧불이'(蛍)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였다.
도코는 이 지진으로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었고, 료칸 역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위문 편지를 보냈다. 료칸은 자신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하는 답장을 보내면서 편지 말미에 위의 말을 덧붙였다. 이는 불교의 사고팔고(四苦八苦), 즉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고뇌가 깊어지므로,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처럼 현실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도코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6. 사세(辭世)
1826년, 료칸은 병에 걸려 은둔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워지자, 후원자 중 한 명인 키무라 모토우에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젊은 비구니 테이신니(貞心尼)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4]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료칸의 말년을 밝혀주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4] 그들은 일련의 하이쿠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는데, 이 시들은 활기차면서도 다정한 감정을 담고 있다. 료칸은 1831년 신년 6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테이신니는 료칸이 좌선 자세로 앉아 마치 잠이 드는 것처럼 평온하게 임종했다고 기록했다.[5]
료칸이 남긴 사세(辭世)는 테이신니가 『하스의 이슬(蓮の露)』에 기록하였다. 임종 자리에서 직접 읊은 것은 아니지만, 친동생인 요시유키(由之)에게 유언으로 보낸 노래가 있으며, 이는 요시유키의 일기 『야에기쿠(八重菊)』에 전해진다.
- 사세구
- うらを見せおもてを見せてちるもみぢ일본어
- (번역: 뒷면을 보여주고 앞면을 보여주며 지는 단풍)
- : 이 시는 료칸과 인연이 있는 엔쓰지(円通寺)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유품으로 보낸 노래
- 形見とて何残すらむ春は花夏ほととぎす秋はもみぢ葉일본어
- (번역: 유품이라 남길 것은 무엇이 있으랴,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뻐꾸기, 가을에는 단풍잎)
7. 료칸에 관한 작품
료칸의 저작을 후대에 집대성하여 출판한 주요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 출판 연도 | 제목 | 편집자 | 출판사 | 비고 |
|---|---|---|---|---|
| 1879 | 료칸 선사 가집 (良寛禅師歌集) | 고바야시 지로(小林二郎) | ||
| 1918 | 료칸 전집 (良寛全集) | 다마키 레이키치(玉木礼吉) | 료칸회 | 1994년 마키노 출판에서 복각. |
| 1929 | 료칸 전집 (良寛全集) | 오시마 가즈라(大島花束) | 이와나미 서점 | 2001년 복간. 1958년 신겐샤(新元社)에서 제2판 발행, 1989년 고분샤(恒文社)에서 복각. |
| 1959 | 료칸 전집 (良寛全集) (상・하) | 토고 토요하루(東郷豊治) | 도쿄 소겐샤(東京創元社) | 전기 연구로 제9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 이후 신장판 발행. 1813년 의사이자 시인인 스즈키 류조(鈴木隆造, 토겐 桐軒)가 료칸의 시집 『초당집』(草堂集) 간행을 시도했으나 료칸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동생 스즈키 친조(鈴木陳造, 분다이 文台)가 형과 함께 간행을 추진하여 서문까지 작성했으나 미완으로 그쳤다. 편집은 류조의 아들 쥰테이(順亭)에게 이어졌으나 출판되지 못했고, 쥰테이가 정리한 원고를 바탕으로 이 책이 출판되었다. |
| 1979 | 료칸 선사 기화 (良寛禅師奇話) | 게라 에이쥬(解良栄重) | 노지마 출판(野島出版) | 료칸을 직접 알았던 게라 에이쥬가 쓴 료칸 일화집. 사본의 영인본. |
| 1981 | 료칸 전기・연보・문헌 목록 (良寛伝記・年譜・文献目録) | 타니카와 토시로(谷川敏朗) (저자), 료칸 전집 간행회 (편집) | 노지마 출판(野島出版) | 료칸 전집 별권 1. |
| 1992 | 료칸 가집 (良寛歌集) | 요시노 히데오(吉野秀雄) (교주) | 토요 문고(東洋文庫) | 1992년 헤이본샤 토요 문고 신판. 교주(校注)를 맡은 요시노 히데오는 료칸 전기 연구로도 저명하다. |
| 1996 | 교주 료칸 전가집 (校注良寛全歌集) | 타니카와 토시로(谷川敏朗) | 슌주샤(春秋社) | 2014년 신장판 발행. |
| 1998 | 교주 료칸 전시집 (校注良寛全詩集) | 타니카와 토시로(谷川敏朗) | 슌주샤(春秋社) | 2014년 신장판 발행. |
| 1998 | 료칸 전기 고설 (良寛伝記考説) | 다카하시 쇼지(高橋庄次) | 슌주샤(春秋社) | 2008년 신장 보급판 발행. |
| 2000 | 교주 료칸 전구집 (校注良寛全句集) | 타니카와 토시로(谷川敏朗) | 슌주샤(春秋社) | 2014년 신장판 발행. |
| 2006 | 정본 료칸 전집 (定本良寛全集) (전 3권) | 우치야마 토모야(内山知也), 타니카와 토시로(谷川敏朗), 마츠모토 시즈(松本市壽) | 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
료칸을 소재로 한 작품
- 니이미 난키치(新美南吉), 『료칸 이야기: 데마리와 하치노코』(良寛物語 : 手毬と鉢の子), 학습사(学習社), 1941년. (2013년 주니치 신문사에서 복각) - 장편 소설. 저자 생전에 출판된 두 책 중 하나이다.
- 안도 히데오(安藤英男), 『료칸: 일화로 엮는 생애』(良寛 : 逸話でつづる生涯), 스즈키 출판(鈴木出版), 1978년.
- 기타가와 쇼이치(北川省一), 『표박의 인 료칸』(漂泊の人良寛), 아사히 신문사・아사히 선서(朝日選書), 1983년.
- 미즈카미 쓰토무(水上勉), 『료칸』(良寛), 츄오코론샤(中央公論社), 1984년. (훗날 주고 문고로 출간, 1997년 개판)
-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료칸』(良寛), 슌주샤(春秋社), 1992년.
- 야시로 세이이치(矢代静一), 『야야』(弥々), 1992년. - 희곡. 료칸과 그의 첫사랑 야야(弥々)의 인생을 야야의 딸이 이야기하는 형식의 1인극이다. 배우 마리야 도모코(毬谷友子)가 초연 이후 1998년 야시로 사망 후에도 계속 연기했다.
- 야시로 세이이치(矢代静一), 『료칸 이문』(良寛異聞),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1993년. (훗날 가와데 문고 수록)
- 요시노 히데오(吉野秀雄), 『료칸: 노래와 생애』(良寛 : 歌と生涯), 치쿠마 쇼보(筑摩書房)・치쿠마 학예 문고(ちくま学芸文庫), 1993년. (2001년 아트데이즈에서 복간)
- 사다나가 히로시 감독, 카토 히로코 외 각본, 세토우치 자쿠초 원작, 영화 '료칸', 1997년. - 마츠모토 코시로, 스즈키 쿄카, 와시오 이사코, 와타나베 히로유키 출연. (출연자 이름 수정: 마츠모토 유키시로 -> 마츠모토 코시로)
- 미즈카미 쓰토무(水上勉), 『료칸의 모든 것』(良寛のすべて),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2002년. - 자선 불교 문학 전집 3권. 이외 2권은 『료칸을 걷다』(良寛を歩く), 『삿갓 쓴 사람』(蓑笠の人).
- 우에노 메이세키(植野明磧), 『사랑받는 삶의 방식 료칸 씨』(慕われる生き方 良寛さん), 중경출판(中経出版)・중경 문고(中経の文庫), 2010년.
8. 료칸 관련 시설
9. 계도
이남(以南일본어)은 요이타정의 割元|와리모토일본어인 新木与五右衛門|신키 요고에몬일본어의 아들이다. 신키 요고에몬은 요이타 4대 山田四郎左衛門高重|야마다 시로자에몬 타카시게일본어의 차남이다. 료칸(良寛일본어)은 이남의 아들이다.
참조
[1]
문서
[2]
서적
The Koan: Texts and Contexts in Zen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Japanese Death Poems
Tuttle
[4]
서적
Great Fool: Zen master Ryōkan: poems, letters, and other writings
University of Hawaii Press
[5]
문서
[6]
문서
[7]
서적
The Enlightened Heart: An Anthology of Sacred Poetry
Harper Perennial
[8]
문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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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番札所 光照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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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11]
웹사이트
隆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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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서
[13]
웹사이트
良寛禅師『天上大風』
http://www.all-japan[...]
2023-01-2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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