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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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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1970~80년대 이후 학계에서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성장했고, 1167년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치안 경찰권을 위임한 사건과 1179년 지쇼 3년의 정변을 거치며 권력을 강화했다. 고시라카와 천황과의 연계를 통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웠으며, 1180년 모치히토 왕의 령지에 따른 반란과 미나모토 씨의 봉기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헤이시 정권은 국수호인과 지토를 임명하는 등 무가 정권적 성격을 보였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수호와 지토의 선구적인 형태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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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시 정권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정부 개요
정부명평씨 정권
배경색'#ff6347'
평씨의 [[평씨|가문]] [[가몬|문]]・[[아게하쵸|양아제비나비]]
평씨의 가문 문・양아제비나비
창건년닌안 2년 (1167년)
해산년겐랴쿠 2년 (1185년)
대표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무네모리
(이세 평씨)
정청 소재지야마시로국 헤이안쿄 (롯파라) (현: 교토부 교토시)
셋쓰국 후쿠하라쿄 (현: 효고현 고베시)
기관조정 제기관. 일문이 위계를 받고 높은 관직에 취임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이전 정부[[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5x20px]] 조정
비고귀족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일본 최초의 무가정권적 성격도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 맥락
평씨의 양아제비나비 문
정치 체제
정부 형태무가정권
천황로쿠조 천황 (1165-1168)
안토쿠 천황 (1180-1185)
사용 언어 및 종교
공용어중세 일본어
종교신불습합
통화
통화일본 냥

2. 역사

헤이시 정권의 역사는 전사(前史), 형성기(形成期), 전성기(全盛期), 동요기(動揺期), 쇠퇴 및 소멸기(衰退・消滅期)의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전사(前史)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 시라카와인세이 시기에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이라노 마사모리는 이세 헤이시 출신으로, 시라카와 천황의 딸에게 장원을 기증하고 아즈카리도코로가 되어 도다이지나 고쿠가의 지배를 벗어나 토지를 소유했다. 그는 타토 농민층을 로도·가인으로 삼아 무사단을 형성했고, 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마사모리의 무력을 필요로 했다. 마사모리는 호쿠멘 무사로서 미나모토노 요시치카를 토벌하고 탄바 국 수령으로 임명되는 등 활약했다. 마사모리의 아들 타다모리 역시 인세이의 무력적 주축이 되어 세토 내해의 해적을 토벌하고 자신의 가인으로 조직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형성기(形成期)호겐 원년(1156년), 호겐의 난이 발발하자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하여 하리마노카미가 되었다. 헤이지 원년(1159년)에는 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하여 정삼위산기에 임명되어 무사로서 처음으로 공경이 되었다. 기요모리는 도키코니조 천황유모였기 때문에 천황의 후견인 지위를 얻었고, 시게코(겐슌몬인)가 고시라카와의 황자를 낳자 립태자 책략을 통해 황거 경호 체제를 정비하는 등 니조 지지 자세를 명확히 했다. 에이만 원년(1165년) 니조 천황이 붕어하고 정치 중심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기요모리는 내대신을 거쳐 태정대신까지 승진했지만, 곧 사임했다.
전성기(全盛期)닌안 3년(1168년) 로쿠조 천황이 퇴위하고 다카쿠라 천황이 즉위하면서 헤이시 정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협력하여 일송무역을 추진하고, 사이코쿠의 고쿠시를 역임하며 세토 내해의 해적을 이세 헤이시 세력 하의 수군으로 편성하는 등 세력을 강화했다. 모토자네 사후에는 셋칸가의 장원군을 관리하게 되면서 막대한 경제 기반을 확보했다. 닌안 3년(1168년) 출가한 기요모리는 후쿠하라의 산장으로 옮겨 일송무역 및 세토 내해 교역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쇼안 원년(1171년)에는 딸 도쿠코 (켄레이몬인)를 다카쿠라 천황의 주궁으로 삼아 권력을 공고히 했다.
동요기(動揺期)안겐 2년(1176년) 겐슌몬인의 죽음으로 고시라카와 상황과 키요모리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고쿠라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의 대립, 엔랴쿠지와의 갈등,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 등이 발생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지쇼 2년(1178년) 도쿠코가 고토히토 친왕을 낳고 황태자로 세워졌지만, 지쇼 3년(1179년) 시게모리와 모리코가 잇달아 사망하자 고시라카와 상황은 기요모리에게 무단으로 시게모리와 모리코의 영지를 몰수했다. 이에 기요모리는 지쇼 3년의 정변을 일으켜 고시라카와 상황을 유폐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쇠퇴 및 소멸기(衰退・消滅期)지쇼 3년의 정변 이후 헤이시 정권은 군사적 색채를 강화했지만, 고시라카와 상황의 유폐는 많은 반대 세력을 낳았다. 지쇼 4년(1180년) 고토히토 친왕안토쿠 천황으로 즉위하고 고쿠라 상황에 의한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이는 헤이시의 괴뢰 정권이었다. 모치히토 왕의 거병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겐지 세력의 봉기로 헤이시 정권은 위기에 처했다. 키요모리는 후쿠하라 천도를 단행했지만, 조정 내부의 반발과 다카쿠라 상황의 건강 악화로 교토로 돌아왔다. 지쇼 5년(1181년) 다카쿠라 상황이 붕어하고 키요모리가 급사하면서 헤이시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쥬에이 2년(1183년) 기소 요시나카의 공격으로 헤이시는 교토를 탈출하여 서국의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츠네 군에게 패배하면서 헤이시 정권은 완전히 멸망했다.

헤이시 정권은 오늘날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2. 1. 전사(前史)

이전 학계에서는 헤이시 정권을 귀족 정권적인 성격이 강한 정권으로 보았으나, 1970년대·1980년대 경부터는 헤이시 정권이 지토(地頭)와 슈고(国守護人)를 설치한 사실에 착안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닌난 2년(1167년) 5월 선지[1]를 시작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선지는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도산도·도카이도·산요도·난카이도의 치안 경찰권을 위임한 내용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모든 구니의 치안유지권을 승인한 겐큐 2년(1191년)의 신제와 비견된다. 이는 무가 정권의 성격을 가진 헤이시 정권이 이 선지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후자는 지쇼 3년의 정변 때 헤이시 세력이 종래의 국가 기구의 지배권을 공고히 장악한 것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어(호겐의 난·헤이지의 난 등), 닌난 2년 5월 선지로 큰 전환점을 맞고, 지쇼 3년의 정변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평씨 정권으로 이어지는 기반 형성은 시라카와인세이 시기에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라노 마사모리는 간무 평씨사다모리류의 이세 평씨 출신으로, 그 아버지 마사히라까지는 군사 귀족 중에서도 유력한 일족은 아니었지만, 에이초 2년(1097년) 이가 국의 소령을 료쿠조인(시라카와 상황의 딸 이쿠호몬인)에 기증하여 토다 장원을 성립시켰다. 마사모리는 아즈카리도코로가 되어 주변의 도다이지령도 편입하여 장원을 세우는 등 시라카와의 정치 권력을 배경으로 도다이지나 고쿠가의 지배를 제거하고 실질적인 토지 소유에 성공했다. 장원 성립의 배경에는 도다이지나 고쿠가의 지배와 수탈을 피하려는 타토 농민층과 자신의 소령 확대와 안정을 꾀한 마사모리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사모리는 자신에게 복종한 타토를 로도·가인으로 삼아 무사단을 형성해 갔다.

한편, 시라카와 상황도 권력 유지를 위해 마사모리의 무력을 필요로 했다. 당시 시라카와는 인령이 적었고, 직속 무력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시라카와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이복 동생 호닌 친왕과 셋칸케를 비롯한 전통적 귀족이 존재했고, 타토 농민층을 진닌·기인으로 조직하여 거대화된 사찰 세력의 압력도 치열했다. 이러한 여러 세력을 억누르고 국정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시라카와는 자신의 수족인 인킨신과 친위대와도 같은 호쿠멘 무사를 수령·태정관·병위부·에몬부 등의 공적 기관에 강제로 파견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호쿠멘 무사가 된 마사모리는 이즈모 국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치카의 횡포가 일어나자 가쇼 2년(1107년) 12월 19일, 추토사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재빨리 요시치카의 목을 가지고 화려하게 개선하여 시라카와는 마사모리를 탄바 국 수령으로 임관했다(다만, 이후에도 요시치카 생존설이 남아있다). 이를 계기로 호쿠멘 무사의 규모는 급격히 팽창하여 겐에이 원년(1118년) 엔랴쿠지의 강소를 막기 위해 가모가와하라에 파견된 부대만으로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추우키』). 마사모리는 주로 호쿠멘 무사·케비이시·추토사와 같은 국가 권력의 손톱과 이빨로서 활약했지만, 각지의 수령도 역임했다. 당시 고쿠가는 재지 영주·타토 농민층과의 투쟁으로 그 지배 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보강이 요구되었다.

마사모리의 아들 타다모리도 아버지의 노선을 계승하여 인세이의 무력적 주축이 되었다. 그 역할은 토바 인세이 시기에도 변함없이, 소와 말의 관리·어행의 경호를 담당하는 인의 무력 조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 어마야(인의 마구간)의 아즈카리가 되었다. 토바 인세이 시대가 되자 장원 정리가 전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지에서 장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타다모리도 수령으로서 장원 설립에 관여하여 인령 장원의 관리도 맡게 되었다. 히젠 국칸자키 장원의 아즈카리가 된 타다모리는 다자이후의 관여를 배제하고 일송 무역에도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일송 무역으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인 세토 내해는 해적의 횡행이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해적들은 유력한 재지 영주, 진닌·구교인의 특권을 얻은 연안 주민 등이 경제 활동 틈틈이 약탈하는 경우가 많아 고쿠가의 힘만으로는 추토가 곤란했다. 진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사도료를 추토사로 임명하는 수밖에 없었고, 타다모리에게 발탁되었다. 타다모리는 해적 추토에 성공했지만, 항복한 해적(재지 영주)을 자신의 가인으로 조직했다. 타다모리는 다른 인킨신 수령과 마찬가지로 인에 대한 경제 봉사에 힘쓰는 한편, 장원의 아즈카리·수령·추토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재지 세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편성하는 등 무사단의 증강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의 권위만을 의지하는 일반적인 인킨신과는 다른 점이었다.

닌헤이 3년(1153년) 타다모리가 사망했을 때,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수 국의 관리를 거쳐, 부는 억만을 쌓고, 노복은 나라에 가득하며, 무위는 사람보다 뛰어나다'''"(『우카이키초』)라고 평했는데, 이것은 평씨의 실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타다모리가 구축한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아들 키요모리에게 계승되었다.

2. 2. 형성기(形成期)

이전 학계에서는 헤이시 정권을 귀족 정권적인 성격이 강한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970년대·1980년대 경부터는 헤이시 정권이 지토(地頭)와 슈고(国守護人)를 설치한 사실에 착안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닌난 2년(1167년) 5월 선지를 시작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선지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장남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도산도·도카이도·산요도·난카이도의 치안 경찰권을 위임한 내용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모든 구니의 치안유지권을 승인한 겐큐 2년(1191년) 3월의 신제와 비견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어, 무가 정권의 성격을 가진 헤이시 정권이 이 선지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후자는 지쇼 3년의 정변 때 헤이시 세력이 종래의 국가 기구의 지배권을 공고히 장악한 것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어(호겐의 난·헤이지의 난 등), 닌난 2년 5월 선지로 큰 전환점을 맞고, 지쇼 3년의 정변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겐 원년(1156년), 치천의 군 자리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어, 호겐의 난이 발생했다. 이 난에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했고, 그 무공으로 하리마노카미가 되었다. 이후 정치를 주도하는 신제와 고시라카와 인세이 파(후지와라노 노부요리·후지와라노 나리치카·미나모토노 모로나카)·니조 친정 파(후지와라노 쓰네무네·후지와라노 고레카타)의 대립이 격화되어, 3년 후인 헤이지 원년(1159년)에 헤이지의 난이 일어났다. 노부요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휘하에 두고 신제를 자결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지만, 니조 친정 파의 배신과 기요모리의 반격에 의해 허무하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헤이지의 난 이후인 에이랴쿠 원년(1160년), 기요모리는 정삼위산기에 보임되어, 무사로서 처음으로 공경(정치 결정에 참여하는 의정관)이 되었다. 호겐·헤이지 양 난은 정치 항쟁이 무력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난 후,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의 대립은 잠시 소강 상태를 거쳐 재연되지만, 무사로서 최대의 실력자가 된 기요모리는 부인 도키코가 니조의 유모였기 때문에, 천황의 유부로서 후견인 지위를 얻어 게비이시벳토·주나곤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시라카와 인청 별당으로서 고시라카와에 대한 봉사도 게을리하지 않고, 양 파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도키코의 여동생 시게코(겐슌몬인)가 고시라카와의 황자·노리히토 친왕(후의 다카쿠라 천황)을 출산하자, 다이라노 도키타다·다이라노 노리모리 등은 그 립태자를 책략하여 니조의 노여움을 사서 해관, 고시라카와 인세이는 정지되었다. 이에 이르러, 기요모리는 인세이 파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황거의 경호 체제를 정비하는 등, 니조 지지의 자세를 명확히 했다. 게다가 관백고노에 모토미치를 딸 모리코의 사위로 맞이하여, 섭관가에도 접근하는 자세를 취했다.

에이만 원년(1165년)에 니조 천황이 붕어했다. 전후하여 전 관백 후지와라노 타다미치(1164년 훙거), 태정대신후지와라노 이에미치(1165년훙어), 섭정고노에 모토미치(1166년 훙거) 등, 정치의 중심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기요모리는 원근신의 승진 한계로 여겨졌던 대납언이 되어 사위인 모토미치를 보좌하고 있었지만, 모토미치가 급사하고 고시라카와 인세이가 부활하자 "훈로가 오랫동안 쌓여, 사직을 안정시키고 온전히 하였으니. 그 공이, 옛날을 떨쳐도 비할 데가 드무니, 보상이 없어서야 어찌 될까"라는 이유로 닌안 원년(1166년)에 내대신으로 승진했다. 대신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섭관가(주몬류·가잔인류도 포함)·무라카미 겐지·간인류에 한정되어 있었고, 기요모리의 승진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태정대신이 되지만, 태정대신은 이미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 되어, 기요모리는 불과 3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 시기 기요모리의 출세에 대해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기요모리를 시라카와 상황의 낙인으로 여기는 설이 믿어졌으며, 이 사실이 기요모리의 이례적인 승진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한편, 하시모토 오사무는 이에 대해 노리히토 친왕이 립태자 의식을 거행한 곳이 섭관가의 정저·도산조덴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산조덴의 당시 소유자가 기요모리의 딸인 모리코였다(모토미치는 이 립태자식의 3개월 전에 훙거)는 것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설을 세웠다. 하시모토에 따르면, 기요모리는 이 상황을 기화로 시게코가 낳은 황자의 양모를 "전 섭정의 미망인"인 모리코에게 맡기고, "동궁의 양모의 아버지"인 기요모리가 내대신이나 태정대신으로 출세하는 구실로 삼았다고 한다.

2. 3. 전성기(全盛期)

헤이시 정권은 초기에는 귀족 정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1970년대1980년대를 거치면서 지두(地頭)나 국수호인(国守護人)을 설치한 점에 주목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졌다.[1]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는 닌안 2년(1167년) 5월의 선지를 획기적인 시점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 (1179년)을 획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선지는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도산·도카이·산요·난카이 제도의 치안 경찰권을 위임하는 내용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여러 나라의 치안 유지권을 승인한 겐큐 2년(1191년) 3월의 신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평가되어 무가 정권의 성격을 가진 헤이시 정권이 이 선지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본다. 후자는 지쇼 3년의 정변 때 헤이시 세력이 기존 국가 기구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닌안 2년 5월 선지를 큰 획기로 하고, 지쇼 3년의 정변으로 헤이시 정권의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여겨진다.[1]

닌안 3년(1168년) 로쿠조 천황이 퇴위하고 노리히토 친왕이 다카쿠라 천황으로 즉위했다. 다카쿠라 천황의 즉위는 다이라노 기요모리뿐만 아니라 안정된 왕통의 확립을 목표로 했던 고시라카와 상황도 원했던 것으로, 이 둘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관계였다. 이 시기까지 고시라카와 상황과 기요모리의 관계는 양호했다. 기요모리의 가계는 대대로 원에 시중드는 것으로 세력을 키웠고, 기요모리도 고시라카와 상황의 원사로서 정력적으로 공헌했다. 오호 2년(1162년) 고시라카와 상황이 일송무역의 발전을 꾀하여 셋쓰의 오와다노토마리를 수축했을 때, 기요모리는 인접지인 후쿠하라에 일송무역의 거점으로서 산장을 지었는데, 이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기요모리가 공동으로 일송무역에 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

기요모리는 젊은 시절부터 사이코쿠의 고쿠시를 역임하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이코쿠의 헤이시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다자이 다이니를 맡았을 때는 일송무역에 깊이 관여했고, 아키노카미하리마노카미를 맡았을 때는 세토 내해의 해적을 이세 헤이시 세력 하의 수군으로 편성하여 세토 내해 교통의 지배를 강화했다. 이렇게 함양한 실력을 바탕으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1]

모토자네가 죽었을 때, 기요모리는 셋칸가가 축적해온 장원군을 모토자네의 정실・모리코에게 전령했다. 이로써 기요모리는 방대한 셋칸가령을 자기 관리 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셋칸가를 이은 모토후사는 헤이시의 압령이라고 비난했지만, 이 사건은 셋칸가의 위신 저하를 보여주었고, 기요모리 일족은 큰 경제 기반을 획득했다.[1]

1160년대 후반, 정치 세계에서 무력이 차지하는 비중 증가, 고시라카와 상황과 기요모리의 강한 연계, 고시라카와 상황과 시코의 관계, 다카쿠라 천황의 즉위, 기요모리의 대신 보임, 일송무역과 축적한 소령(장원)에 기초한 거대한 경제력, 사이코쿠 무사나 세토 내해의 수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 등을 배경으로 헤이시 정권이 확립되었다.[1]

이 시기, 고시라카와 상황은 인세이의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기요모리의 장남시게모리에게 군사 경찰권을 위임하고, 도카이도・토산도・산요도난카이도의 추토를 담당하게 했다. 또한 내리의 경비를 위해 여러 나라에서 무사를 교대로 상경시키는 내리 다이반야쿠의 독촉에 대해서도 기요모리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원과 깊이 연계하여 인세이의 군사 경찰 부문을 담당하는 것을 헤이시 정권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시게모리가 있었지만, 그 한편으로 기요모리는 사이코쿠에 구축한 견고한 경제・군사・교통 기반에 의해 인세이와는 독자적인 노선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1]

닌안 3년(1168년)에 기요모리는 출가했다. 정계에서 은퇴하여 후쿠하라의 산장으로 옮겨 일송무역 및 세토 내해 교역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고시라카와 상황도 기요모리의 자세에 이해를 보였고, 카오 원년(1169년)부터 안겐 3년(1177년)까지 매년 후쿠하라의 산장으로 갔다. 카오 2년(1170년) 고시라카와 상황은 후쿠하라 산장에서 송나라 사람과 대면했는데, 이는 당시 우다 천황의 유계로 금지되었던 행위였다.[2] 쿠조 카네자네는 "우리 조정, 엔기 이후 미증유의 일이다. 천마의 소행인가"(『교쿠요』)라고 경악했다. 같은 해에 후지와라 히데히라가 친슈후 쇼군이 되는데, 일송무역의 수출품인 의 공납과 맞바꾸어 임명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 카네자네는 "이적(오랑캐)"의 히데히라를 임명한 것은 "난세의 기틀"이라고 비난했지만, 이러한 정책으로 일송무역은 본격화되었다.[1]

쇼안 원년(1171년), 기요모리는 딸인 도쿠코 (켄레이몬인)를 다카쿠라 천황의 주궁으로 삼았다. 기요모리 일족과 마찬가지로 켄슌몬인에 연계된 도쇼 헤이시(다카무네류)도 번성하여, 양 헤이시에서 전성기에는 10명 이상의 공경, 덴조비토 30명 이상을 배출하게 되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도키타다는 "헤이케 일문이 아닌 자는 사람이 아니다(이 일문에 있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호언했다고 전해진다.[1]

2. 4. 동요기(動揺期)

이전에는 학계에서 헤이시 정권을 귀족 정권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였지만, 1970년대·1980년대 무렵부터는 헤이시 정권이 지두(地頭)나 국수호인(国守護人)을 설치한 사실에 주목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매우 유력해졌다.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닌안 2년 (1167년) 5월 선지[1]를 획기적인 시점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 (1179년) 시점을 획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전자의 선지는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도산·도카이·산요·난카이 제도의 치안 경찰권을 위임하는 내용이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한 여러 나라의 치안 유지권을 승인한 겐큐 2년 (1191년) 3월 신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평가되어, 무가 정권의 성격을 가진 헤이시 정권이 이 선지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편, 후자는 지쇼 3년의 정변 때 헤이시 세력이 기존의 국가 기구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을 중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닌안 2년 5월 선지를 큰 획기로 하면서, 지쇼 3년의 정변으로 헤이시 정권의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고시라카와키요모리의 좋은 관계는 안겐 2년(1176년) 겐슌몬인의 죽음으로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시라카와가 총애하던 겐슌몬인은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존재였지만, 그의 죽음은 양자 사이에 축적되어 있던 대립점을 현저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고쿠라 천황은 성년이 되어 정치에 관여를 깊게 했지만, 고시라카와도 원정 지속을 원했기 때문에, 고쿠라를 옹호하는 헤이씨와 고시라카와를 옹호하는 원근신 사이에는 인사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원근신인 후지와라 사다요시, 후지와라 미츠요시가 쿠로도노토가 된 것에 대항하여 헤이씨 측에서는 시게모리, 무네모리가 각각 사다이쇼, 우다이쇼가 되는 등, 한동안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다. 고시라카와는 후쿠하라를 방문하여 헤이씨와의 관계 회복을 모색하지만, 여기에 갑자기 새로운 요소로 엔랴쿠지가 등장한다. 카가노카미·후지와라 모로타카의 메다이이자 동생인 후지와라 모로츠네가 하쿠산의 말사를 불태운 것이 발단이 되어, 처음에는 메다이와 현지의 절 사찰 간의 흔한 분쟁에 불과했지만, 하쿠산의 본사가 엔랴쿠지였고, 모로타카·모로츠네의 아버지가 원근신인 사이코였기 때문에 중앙으로 파급되어 엔랴쿠지와 원 세력과의 전면 충돌로 발전했다. 이 강소에서는 시게모리의 병사가 신코시를 쏘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 엔랴쿠지 측에 유리하게 일이 진행되어 모로타카의 유배·모로츠네의 금고로 일단락되었다.

안겐 3년(1177년) 4월에는 다이리·다이코쿠덴·관청 전부가 전소되는 대화재가 발생했다(타로 소실). 이 대화재는 고시라카와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가운데 엔랴쿠지에 대한 원한을 품은 사이코는 고시라카와에게 텐다이좌주·묘운이 강소의 장본인이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묘운은 갑자기 좌주에서 해임되어 소령까지 몰수된 데다 이즈유배되었다. 격노한 엔랴쿠지의 대중이 묘운의 신병을 탈환했기 때문에 여기에 엔랴쿠지와 원 세력과의 항쟁이 재연되었다.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에게 엔랴쿠지 공격을 명령하지만, 키요모리 자신은 공격에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고시라카와나 사이코에게 분노를 품고 있었다. 엔랴쿠지 공격 직전인 6월 1일, 타다 유키츠나가 교토 교외의 시카가타니에서 나리치카, 사이코, 슌칸 등 원근신들이 모여 헤이씨 타도를 모의했다고 밀고했다. 키요모리는 관계자를 신속하게 참수형이나 유배형 등으로 처단했다(시시가타니 음모). 음모가 사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로 인해 키요모리는 엔랴쿠지와의 원치 않는 군사 충돌을 피할 수 있었고, 고시라카와는 많은 근신을 잃고, 정치 발언권을 현저하게 저하시키고 말았다. 또한, 나리치카와 혼인 관계를 맺고 일관되게 맹우 관계였던 시게모리의 헤이씨 정권 후계자로서의 지위는, 그가 키요모리의 현재 정실이었던 토키코 소생이 아닌 점도 있어서, 동요하게 된다(시게모리는 키요모리의 첫 정실이었던 타카시나 모토아키의 딸 소생).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한편 고쿠라 천황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고쿠라도 또한 고시라카와 원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여, 이듬해 지쇼 2년(1178년), 양자는 연계하여 신제 17조를 발포했다. 같은 해에는 츄구·토쿠코가 고쿠라의 황자·고토히토 친왕(후의 안토쿠 천황)을 출산, 동 친왕은 생후 1개월 만에 황태자로 세워졌다.

지쇼 3년(1179년) 시게모리와 모리코가 잇달아 사망하자, 고시라카와는 칸파쿠 모토후사와 공모하여, 키요모리에게 무단으로 시게모리의 치교쿠(에치젠)과 모리코의 장원을 몰수했다. 특히 모리코의 소령은 고쿠라가 상전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쿠라·키요모리 측과 고시라카와 측의 대립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11월 14일 키요모리는 후쿠하라에서 상경하여, 모토후사·모로이에 부자를 시작으로 후지와라 모로나가 이하 39명(공경 8명, 덴조비토·주령·케비이시 등 31명)을 해관, 고시라카와도 토바도노에 유폐했다. 이것은 사실상, 군사력에 의한 조정의 제압이며 고시라카와 원정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이후, 헤이씨 정권은 더욱 군사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다. 이 지쇼 3년의 정변을 기점으로, 무가 정권으로서의 헤이씨 정권이 처음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종전의 고관 대신 헤이씨 일족이나 친헤이씨적인 귀족이 등용되었고, 또한 치교쿠의 대폭적인 교체도 있어서 중앙·지방 양면에서 헤이씨 일문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인 지배 체제가 강화되었다.

같은 해의 헤이씨 일문의 치교쿠 25개국, 국수 29개국에 달했고, 헤이씨의 세력 기반인 서국뿐만 아니라 동국에도 헤이씨 정권의 세력이 미치게 되었다. 헤이씨의 장원은 500여 곳이었다고 전해지지만, 헤이씨는 혼케 등과 같은 최상위의 영주로서 장원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료케나 아즈카리쇼와 같은 직책으로 장원 관리에 임했다. 헤이씨 정권은 각지의 무사를 계열화하거나, 가인의 무사를 각지로 파견하여, 치교쿠에서는 국수호인, 장원에서는 지토라고 불리는 직책에 임명하여 현지 지배에 임했다. 다만, 이러한 현지 지배의 형태는, 관계 사료가 적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헤이씨 지배지에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무사에 의한 지배를 모색하는 가운데 나타났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후의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본격적인 무가 정권 지배와 비교하면, 고케닌 제도처럼 확립된 것도 아니고 미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사를 통한 지배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종전의 귀족 정권에서는 볼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라 하여, 학계에서는 발현기의 무가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주류가 되고 있다. 또한 키요모리가 둔 국수호인·지토는, 가마쿠라 시대에 있어서의 슈고·지토의 조형이라고 생각된다.

지쇼 4년(1180년) 2월, 고쿠라 천황은 고토히토 친왕에게 양위(안토쿠 천황), 헤이씨의 괴뢰로서의 고쿠라 원정이 시작되었다. 키요모리가 앞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고토히토 친왕의 탄생으로 키요모리 자신이 치천의 군(고쿠라 천황→고쿠라 상황)과 지금상(고토히토 친왕→안토쿠 천황)을 옹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 있으며, 이 양위로 인해 헤이케는 단순한 군사적·경찰적인 측면에서 조정에 봉사하는 권문에서, 황위 계승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권력 집단으로 상승할 수 있었고, 명실상부한 무가 정권으로서 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

헤이씨는 군사 귀족의 틀을 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고시라카와의 유폐는 많은 반대 세력을 낳았고, 고쿠라 원정도 쿠데타로 성립된 정권이므로 헤이씨의 군사력에 지탱되고 있는 면이 크고, 그 정통성에 의문이 있었다. 더욱이 새롭게 헤이씨의 치교쿠가 된 나라에서는, 국사와 국내 무사 간의 대립이 발생하는 등, 헤이씨 정권은 매우 취약한 기반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5. 쇠퇴 및 소멸기(衰退・消滅期)

1970년대·1980년대 무렵부터 헤이시 정권이 지두(地頭)나 국수호인(国守護人)을 설치한 사실에 주목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매우 유력해졌다.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닌안 2년 (1167년) 5월 선지[1]를 획기적인 시점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 (1179년) 시점을 획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닌안 2년 5월 선지를 큰 획기로 하면서, 지쇼 3년의 정변으로 헤이시 정권의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키요모리는 모치히토 왕(고시라카와 천황의 제3황자)이 헤이시 추토의 령지를 발하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결탁하여 거병하자 신속하게 대응하여, 헤이시 군은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를 곧 패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란에 고후쿠지나 온조지 등의 유력 사원이 가담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헤이시에게 지세적으로 불리한 교토로부터의 천도를 목표로 후쿠하라 행차를 단행했다.

그러나 조정 내부에 키요모리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게다가, 모치히토 왕의 령지를 받아 도고쿠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기소 요시나카, 다케다 노부요시 등이 잇따라 반 헤이시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반 헤이시의 움직임의 배경에는, 헤이시가 현지 세력을 경시하고 스스로의 가신이나 계열을 우선하여 헤이시 지행국이나 헤이시 소령의 지배에 임하게 한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특히 쿠데타고쿠시가 교체된 가즈사사가미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래에 무사들이 순식간에 집결하여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키요모리는 손자인 고레모리에게 추토군을 이끌게 했으나, 후지카와 전투에서 맥없이 패주하고 말았다.

후쿠하라로의 행차 이후, 귀족들의 불만도 높아졌고, 다카쿠라 상황의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친 헤이시파인 엔랴쿠지 등으로부터의 요기를 계기로, 후쿠하라 행차로부터 반년 후인 11월, 키요모리는 후쿠하라에서 교토로 돌아왔다. 다음 해 12월, 온조지・고후쿠지 등이 반 헤이시의 거병을 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단호한 태도로 임해, 토모모리가 이끄는 군은 온조지를 불태우고 오미 겐지를 격파, 시게히라가 이끄는 군도 난토(나라)의 여러 절을 불태워 장원을 몰수했다 (난토 소토). 이로 인해 기나이 주변의 반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지쇼 5년(1181년) 1월, 다카쿠라 상황이 붕어하고, 고시라카와 인세이가 재개되었지만, 기나이에 임시 군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다카쿠라의 유지를 바탕으로, 키요모리는 적자인 무네모리를 기나이 주변을 직접 관할하는 소관으로 임명했다. 키요모리는 이로 인해 교토의 부유층으로부터 병량을 징수하는 동시에, 이세 주변의 수군에 동원을 걸어, 반 헤이시 세력의 추토에 의욕을 불태웠지만, 같은 해 윤 2월에 열병으로 급사하여, 헤이시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키요모리의 사후, 뒤를 이은 무네모리는 고시라카와와의 융화 노선을 채택했고, 각지의 반란도 헤이시의 반격과 요와의 대기근으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쥬에이 2년(1183년) 7월에 기소 요시나카의 군이 호쿠리쿠에서 일거에 교토로 진군하자, 요시나카 군에게 주력을 궤멸당했던 헤이시는, 마침내 안토쿠 천황을 데리고 교토를 탈출하여 다자이후로 향했지만, 분고무사・오가타 고레요시에게 격퇴당해 야시마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헤이시 정권은, 귀족 사회에 형성해 온 기반을 버리고, 서국의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 고시라카와는 헤이시와 행동을 함께 하지 않고, 교토에 남아 손자인 고토바 천황을 즉위시켰지만, 이로 인해 천황이 2명 존재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되었다.

헤이시는 서국의 세력을 재편성하여 군의 재건을 진행하고, 세토 내해 연안에서 요시나카 군을 서서히 밀어내어, 쥬에이 3년(1184년) 1월에 요시나카가 가마쿠라 군(미나모토노 노리요리・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군)에 의해 멸망할 무렵에는 후쿠하라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헤이시는 고시라카와의 중재에 의한 교토로의 복귀를 목표로 했지만, 고시라카와로서는 헤이시가 정권에 복귀하게 되면 다시 인세이 정지・유폐가 될 위험성이 있었고, 화해는 있을 수 없었다. 헤이시는 반쯤 속아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패배하여, 서쪽으로 내려갔다.

그 후, 헤이시는 서국의 여러 세력을 조직하여 전쟁에 임하고 있었지만, 겐랴쿠 2년(1185년) 3월, 간몬 해협에서의 최종 결전(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츠네 군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헤이시 정권은 명실상부하게 소멸했다.

3. 의의와 평가

이전의 학계에서는 헤이시 정권을 귀족 정권적인 성격이 강한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970년대·1980년대 경부터는 헤이시 정권이 지토(地頭)와 슈고(国守護人)를 설치한 사실에 착안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4]

헤이시 정권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닌안 2년(1167년) 5월 선지[1]를 시작으로 보는 견해와,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선지는 다이라노 시게모리에게 도산도·도카이도·산요도·난카이도의 치안 경찰권을 위임한 내용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모든 구니의 치안유지권을 승인한 겐큐 2년(1191년) 3월의 신제와 비견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어 무가 정권의 성격을 가진 헤이시 정권이 이 선지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후자는 지쇼 3년의 정변 때 헤이시 세력이 종래의 국가 기구의 지배권을 공고히 장악한 것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12세기 중반부터 단계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닌안 2년 5월 선지를 큰 획기로 하면서, 지쇼 3년의 정변으로 헤이시 정권의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헤이시 정권은 오늘날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여겨진다.

헤이케 이야기나 구칸쇼 등 동시대 문헌은 헤이시 멸망 후 헤이시 정권에 억압받아 온 귀족 사회나 사찰의 시점에서 묘사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시라카와 법황이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헤이시를 이용해 높은 관직을 주고 지행국을 늘려왔다는 경위나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귀족 사회의 대응 능력 부재는 언급하지 않고, 기요모리와 헤이시 일문이 얼마나 횡포를 부리고 "교만한 자"였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후의 역사서도 이러한 역사관에 휩쓸리는 형태로 "헤이시 정권관"을 형성해 갔다.

1970년대 - 1980년대 즈음부터 사료에 근거한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헤이시 정권도 가마쿠라 막부에 앞서 무가 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4] 헤이시 정권은 지배 지역의 세력을 무사로 계열화하고, 지행국·장원에 국수호인·지두 등 기존에 거의 보이지 않던 직책을 두어 반군사적인 지배를 진행했다. 관련 사료가 적기 때문에 헤이시 정권에서의 국수호인·지두의 설치와 그에 따른 지배의 심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반드시 명확하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이들 국수호인·지두는 후의 가마쿠라 막부에서의 수호·지두의 선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지쇼 5년(1181년)에 설치한 기내총관직과 제도로 진무사는, 그 직능의 상세는 불명확한 점도 있지만, 여러 국가에 걸쳐 넓은 영역을 군사적으로 직할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기내총관직은 정벌대장군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헤이시 정권은 기존의 귀족 정권과 달리 무력에 큰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학계에서는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또한 무사의 기원을 재지 영주층에서 찾는 기존 역사학계의 견해도, 197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군사 귀족층을 무사의 기원으로 하는 새로운 견해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한 견해로부터는 헤이시는 본래 귀족이며, 구래의 지배 세력과 동질화된 것이 아니라, 구래의 지배층 중에서 군사 귀족인 헤이시가 대두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헤이시 정권은 키요모리라는 한 개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어, 키요모리의 죽음으로부터 수년 안에 붕괴에 이르렀다. 또한 고시라카와와의 양호한 관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컸다. 지쇼 3년의 정변으로 헤이시 정권은 완성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헤이시와 반대 세력의 전면 충돌을 가져왔다. 헤이시의 군제 결함은 직속 부대가 이세·이가의 대대로 전해지는 가신이나 "사롱종"이라고 불리는 여러 나라의 특정 무사들뿐이며, 병사의 대부분을 공권력의 발동에 의해 동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도읍에서 쫓겨나 헤이시 추토 선지가 내려진 시점에서 헤이시에 따르는 병사는 극소수가 되었다. 안토쿠 천황을 옹립하고 있어도 그 즉위는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고, 헤이시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려웠다.[6]

4. 가인(家人)

평씨 가인(家人)의 상당수는 본래 이가, 이세의 낭당(郎党)으로 구성되었지만, 이후 서국(西国)에서의 해적 토벌, 국사(国司) 부임, 장원(荘園) 관리를 통해 새로운 가인을 확보하면서 기내(畿内),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 규슈(九州)의 재지 영주(在地領主)의 비중이 높아졌다. 헤이지의 난 이후에는 겐지의 기반이었던 도고쿠에도 확대되었다. 주요 가인은 다음과 같다.

주요 가인


참조

[1] 서적 鎌倉幕府の検断と国制 吉川弘文館 2011
[2] 학술지 平家物語の延喜帝像 : 「昔」の理想化と諸行無常 http://www.lib.kobe-[...] 神戸大学「研究ノート」の会
[3] 서적 武家政権について 吉川弘文館 2020
[4] 논문 平氏軍制の諸段階 史学会 1979
[5] 논문 唐代の朝貢と貿易 吉川弘文館 1998
[6] 서적 平重盛論 思文閣出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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