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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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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붓다다사는 1906년 태국에서 태어난 승려로, 불교의 실천과 교리 연구에 헌신했다. 그는 1932년 숲속 사원인 수안목을 열어 불법의 실천, 교리 연구와 포교를 진행했으며, '붓다의 종'이라는 의미의 '푸타탓'을 칭했다. 붓다다사는 단순하고 순수한 수행을 추구하며, 호흡 명상인 아나파나사티를 강조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종교 간의 유사점을 탐구했고, 불교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붓다다사의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993년 8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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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다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붓다다사
붓다다사
법명프라 다르마코사차리야
속명응우암 파닛
다른 이름풋타타트 픽쿠 (Putthathat Pikkhu)
종교불교
종파테라바다
교단마하 니카야
사상
연기
알려진 이유불교 개혁, 담마에 대한 현대적 해석
출생일1906년 5월 27일
출생지차이야, 차이야 (현재의 수랏타니), 태국
사망일1993년 5월 25일
사망지차이야, 수랏타니, 태국
위치수안 목
서명image_file: Buddhadasa.gif
교육 및 수행
스승(정보 없음)
제자(정보 없음)
득도1926년 7월 29일
주요 활동
저서(정보 없음)
웹사이트(정보 없음)

2. 생애

붓다다사는 일반적으로 '''붓다다사 비크쿠'''(พุทธทาสภิกขุ|풋타탓 피쿠th)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응아엄 파닛'''(เงื่อม พานิช|응아엄 파닛th)이며, 법명(팔리어)은 '''인다판뇨'''(อินฺทปญฺโญ|인타판뇨th), 승려 법명은 '''프라 탐마코사찬'''(พระธรรมโกศาจารย์|프라 탐마코사찬th)이었다. 그는 여러 저서에 '''붓다다사 인다판뇨'''(พุทธทาส อินฺทปญฺโญ|풋타탓 인타판뇨th)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22]

붓다다사의 생애는 크게 출가 전, 출가와 수행, 수안 목크에서의 활동, 국제적 교류와 만년으로 나눌 수 있다.


  • 1944년, 수랏타니현 포교부장이 되었다. 이후, 태국의 상가 (출가자들의 모임)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 1947년, 혜능 (638~713년 선종 중흥조)의 저작을 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황벽 희운 (?~850년경)의 저작도 영어에서 태국어로 번역했다.
  • 1950년, 태국 남부 보로마탓차이야 사원에서 라마 9세 국왕의 성수 주정례 제사를 맡았다.
  • 1962년, 시리랏 병원에서 대승 불교의 공 사상에 관한 법문을 했다. 이후 종종 공 사상을 언급했다.
  • 1963년 12월 및 1964년 2월, 쿠크릿 프라모트 (후에 태국 수상)와 공개 토론을 했다. 쿠크릿은 공 사상이 재가자에게는 비현실적이라고 보았으나, 붓다다사는 불법 실천에 있어 출가와 재가는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 1973년 11월, 수안목에서 "불법(불교) 사회주의(불법 공동체 원리, thammik sangkhomniyom|탐믹 상콤니욤th, 영어로는 dhammic(buddhist) socialism)"에 관한 법문을 했다.
  • 1980년, 마하 쭐라롱껀 라차위타야라이 대학교 (불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1906년 ~ 1926년)

붓다다사는 1906년 태국 남부 차이야구 반 품리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앙 파닛(เซี้ยง พานิชth)은 2세대 태국계 중국인(호키엔인) 상인이었고, 어머니 클루안(เคลื่อนth)은 남부 태국인이었다.[2]

붓다다사의 초기 생애는 주로 노쓰 코지의 연구에 기반한다.[22]

  • 1906년 5월 27일, 태국 남부 수랏타니현 차이야군 품리엔 행정 마을에서 꽌 파닛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태국인 시엔, 어머니는 태국인 크루앙이었다. 남동생 지쿠이(후에 탄마탓으로 개명)와 여동생 킴소이가 태어났다.
  • 8살 때, 지역 사찰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운 뒤, 초등학교, 중학교로 진학했다.
  • 192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가게 일을 도우며, 남동생이 쭐라롱껀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비용을 마련했다.
  • 1926년, 우본 사원(통칭 왓 녹)에서 득도, 3개월 예정으로 품리엔 사원(통칭 왓 마이)에서 출가 생활을 시작했다. 승명은 Phra Nayam Indapanno(태국어 발음은 ~ Inthapanyo)였다. 이전부터 독학으로 불교를 배우고 교리에 정통했던 그는 주지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맡는 등 주변의 기대를 받았으며, 붓다다사 자신도 더욱 학문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가졌다. 남동생이 대학에서의 학문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가업을 이음으로써 형을 지원하게 되었기에, 출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2. 2. 출가와 수행 (1926년 ~ 1932년)

붓다다사는 1926년에 속세의 삶을 버렸다. 당시 젊은 승려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는 교리 교육을 위해 수도인 방콕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의 사원들이 더럽고 붐비며, 상가가 부패하여 "명성, 지위, 편안함에 몰두하고 불교의 가장 높은 이상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3] 그 결과, 그는 고향 시골 지역으로 돌아가 자신의 마을 근처 숲 지대에 1932년 수안 목크를 창건했다.

  • 1926년, 우본 사원(통칭 왓 녹)에서 득도하여 3개월 예정으로 품리엔 사원(통칭 왓 마이)에서 출가 생활을 시작했다. 승명은 Phra Nayam Indapanno (태국어 발음은 ~ Inthapanyo)였다. 이전부터 독학으로 불교를 배우고 교리에 정통했던 그는 주지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맡게 되는 등 주변의 기대를 받았으며, 푸타탓 자신도 더욱 학문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가졌다. 남동생이 대학에서의 학문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가업을 이음으로써 형을 지원하게 되어, 출가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 1928년, 방콕에서 교리 연구를 시작했다. 방콕 승려들의 실태에 실망하면서도, 팔리어를 습득하고, 교법 시험 (Naktham)에 합격하는 한편, 과학·영어 등의 학습에도 힘썼다.
  • 1932년 4월, 품리엔으로 귀향했다. 붓다에게 다가가고자 팔리어 삼장 (경·율·론)을 연구할수록 기존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고, 교법 시험에도 불합격했기 때문이다. 남동생의 협력을 얻어 5월 12일에 수행을 위한[23] 삼림 사원, 수안목(Suan Mokkhaphalaram의 약칭. 수안목은 "자유·해방의 정원", The Garden of Liberation"의 의미)을 열어, 불법의 실천, 교리 연구와 포교를 진행했다. 6월에 일어난 입헌 혁명 (태국)(민주 혁명이라고도 함)에 강한 영향을 받은 그는, "붓다의 종"이라는 의미의 "푸타탓" "Putthathat"을 칭하게 된다. 다음 해, 잡지 『불교』를 창간했다.

2. 3. 수안 목크와 활동 (1932년 ~ 1993년)

붓다다사는 1932년 자신의 고향 근처 숲에 수안 목크를 창건했다.[3] 수안 목크는 '해방의 정원'이라는 뜻이다.[3] 그는 이곳에서 불법을 실천하고 교리를 연구하며 포교 활동을 했다. 1943년에는 수행자들이 늘어나면서 수안 목크를 턴남라이 사원으로 이전했다.[22] 본당 없이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는 등 엄격한 수행 방식을 따랐으며, '영혼의 유희관'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포교와 사회 활동에도 힘썼다.[22]

붓다다사는 국제적인 종교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여러 종교의 학자 및 성직자들과 대화하며 종교 간 유사점을 찾고자 했다.[4] 1967년에는 기독교 신학교에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법문을 했고,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와도 교류했다.[22] 1972년에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수안 목크를 방문하여 법문을 하기도 했다.[22]

1985년, 붓다다사는 수안 목크 근처에 국제 담마 은둔 센터를 설립하여 외국인들에게 불교와 요가를 가르쳤다.[4] 수안 목크는 120에이커 규모로 확장되었다.[5] 붓다다사는 1993년 8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22]

1993년 붓다다사의 화장

2. 4. 국제적 교류와 만년 (1954년 ~ 1993년)

붓다다사는 만년에 그의 가르침으로 많은 국제적인 구도자들을 그의 은둔처로 이끌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선도적인 학자 및 성직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러한 논의에서 그의 목표는 각 주요 세계 종교의 핵심에 있는 유사점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1993년 사망하기 전, 그는 자신의 수행처에서 고속도로 건너편에 국제 담마 은둔 센터를 설립하여 불교와 기타 요가 수행을 외국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4] 수안 목크 지역은 약 120acre의 숲으로 확장되었다.[5]

그러나 붓다다사는 자신의 명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수안 목크를 방문하는 버스에 가득 찬 방문객들을 보면서 그는 "가끔 이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여기에 들르는 것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6]

붓다다사의 국제적 교류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954년미얀마에서 개최된 제6회 불전 결집에 태국의 상가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참가, 법문을 함.
1964년방콕에서 달라이 라마 14세를 만남. (연도 이설 있음)
1967년기독교신학교에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 법문을 함. 이후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등과의 교류를 지속함.
1972년 1월달라이 라마 14세, 수안목을 방문하여 법문을 함. 아나파나사티 명상 실습 등에 대해 논의함. (연도 이설 있음)
1985년수안목과 가까운 곳에 International Dhamma Hermitage를 창설.
1993년 7월 8일열반. 87세.[22]



3. 사상

붓다다사는 "선행을 하고, 악을 피하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고타마 붓다의 핵심 가르침을 본받기 위해 단순하고 순수한 수행을 추구했다. 그는 샴(Siamese) 종교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관습적인 의례주의와 내부 정치에 거부감을 느꼈다. 복잡한 철학적, 종교적 아이디어를 모국어인 남부 태국어로 설명하는 그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그의 숲속 수행처로 이끌었다.

그의 주요 가르침은 주로 아나파나사티라고 불리는 자신의 호흡 패턴에 대한 조용한 자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수행은 한편으로는 초기 팔리 경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해석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급진적인 개인적 실험에 크게 기반을 두었다.

붓다다사는 종교 연구 초기부터 비교적 접근 방식을 활용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도교, 힌두교, 유교, 자이나교 및 자연 과학과 같은 다른 사상 체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10]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종교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동일하게 여길 것이다. 그들은 불교, 유대교, 도교, 이슬람교 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는 내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채택하게 되었다.[11]

야노 히데타케의 연구에 따르면,[26] 붓다다사의 사상은 상좌 불교의 사상 체계 전체에 걸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으며,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특징설명
불전 해석 방법"인간의 언어"가 아닌 "불법어"에 의한 해석을 강조. 예를 들어 "일하다"는 불법적으로 불법 실천을 의미하며, 일반 사회에서 일하는 것도 삼학(계, 정, 혜)으로 이어진다고 봄.
심리주의적·현세주의적 해석"윤회"는 죽음 이후가 아닌 "지금·여기"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해석. 삼장을 중시하고 은 중시하지 않음.
선의 영향공사상을 중시하며, "나", "나의 것"에서 해방된 상태를 "열반"이라 부름. 열반은 수행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얻을 수 있는 상태이며, 매일의 수행을 통해 점차 완전해진다고 봄.
불법(불교) 사회주의불법에 기초하여 자기중심성을 제거한 정치 체제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개인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모두 발전한다고 봄.


3. 1. 불전 해석 방법

붓다다사는 "인간의 언어"(태국어: Paasaa khonth, 세속적인 용어)가 아닌 "불법어"(태국어: Paasaa thamth, 불법적인 용어)로 불전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6] 예를 들어 "일하다"는 것은 세속적으로는 일을 의미하지만, 불법적으로는 불법의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 사회에서 일하는 것도 불법의 실천인 "삼학"(계·정·혜: 악행을 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과 통일을 이루며, 진실의 지혜를 깨닫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3. 2. 심리주의적, 현세주의적 해석

붓다다사는 "선행을 하고, 악을 피하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고타마 붓다의 핵심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단순하고 순수한 수행을 추구했다. 그는 샴(Siamese) 종교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관습적인 의례주의와 내부 정치에 거부감을 느꼈다.[7]

붓다다사는 전통적인 윤회와 업 교리를 거부했는데, 이는 그가 그것이 ''순야타''와 양립할 수 없으며 ''두카''의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시아학 및 불교학 교수인 존 파워스에 따르면, 붓다다사는 "합리주의적 해석"을 제시했으며 "윤회에 대한 모든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했다.[7] 붓다다사에 따르면, 붓다는 어떤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실체나 영혼도 부정하는 '무아'(anattāpi, anātmansa)를 가르쳤다.[7] 파워스는 붓다다사의 견해를 인용하여 "태어난 사람이 없으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고 전한다. 따라서 붓다다사는 "윤회에 대한 모든 질문은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불교 가르침의 영역에는 윤회나 환생에 대한 질문이 없다"고 주장한다.[7]

붓다다사는 빠띠짜사뭅빠다를 감각적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나"와 "나의 것"의 탄생,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베다나 ("느낌"), 딴하 ("갈증", 갈망) 및 우빠다나 (집착)으로 설명한다. 그는 "붓다가 의미하는 '탄생'이라는 단어의 실제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물리적이다. 붓다가 지적한 탄생은 영적인 것이었는데,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의 탄생"이라고 말한다.[8]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버림으로써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열반 또는 진정한 에 도달할 수 있다.

붓다다사의 견해는 "강하게 비판"을 받았으며,[9] 보다 정통적인 불교 법에 대한 견해를 가진 많은 동료 테라바다 불교 승려들에게 거부되었다. 예를 들어, 빅쿠 보디는 윤회 교리를 버리는 붓다다사의 접근 방식이 "실질적으로 법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 윤회에 대한 개념은 모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윤리 이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비판했다.[7]

야노 히데타케의 연구에 따르면,[26] 붓다다사의 사상은 상좌 불교의 사상 체계 전체에 걸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으며,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불전 해석 방법: "인간의 언어"(세속적인 용어)가 아닌, "불법어"(불법적인 용어)에 의한 해석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하다"는 것은 세속적인 해석에서는 일을 의미하지만, 불법적인 해석에서는 불법의 실천을 의미한다.
  • 심리주의적·현세주의적 해석 강조: "윤회"는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의 개개인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한다. 또한, 삼장 (붓다의 말씀)을 중시하며, (후세의 주석)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 선의 영향: 사상을 중시하며, "나·나의 것"과 같은 집착에서 해방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부른다. "열반"은 수행자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상태이며, 그러한 순간이 매일의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일상화되어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3. 3. 선(禪)의 영향과 공(空) 사상

붓다다사는 "선행을 하고, 악을 피하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그는 단순하고 순수한 수행을 추구했으며, 당시 샴(Siamese) 종교인들의 삶에 만연했던 의례주의와 내부 정치에 반감을 가졌다.[7]

붓다다사는 전통적인 윤회와 업 교리를 부정했다. 그는 이러한 교리가 ''순야타''(공)와 양립할 수 없으며, ''두카''(고통)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7] 붓다다사는 붓다가 어떤 실체나 영혼도 부정하는 '무아'를 가르쳤다고 보았다. 그는 "태어난 사람이 없으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고 하며, 윤회에 대한 질문은 불교 가르침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7] 붓다다사는 열반을 고통과 행복의 개념을 초월하는 상태로 묘사했다.[7]

붓다다사는 연기를 통해 "나"와 "나의 것"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베다나(느낌), 갈애(갈증), 집착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림으로써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열반 또는 진정한 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8]

붓다다사의 견해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정통 불교 견해를 가진 승려들에게 거부되기도 했다.[9] 예를 들어 빅쿠 보디는 붓다다사의 접근이 윤리 이론의 중요한 부분인 윤회 개념을 부정한다고 비판했다.[7]

붓다다사는 불교 가르침을 도교, 힌두교, 유교, 자이나교 등 다른 사상 체계와 비교하여 설명하려 했다.[10] 그는 모든 종교가 내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으며,[11] "종교"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했다.[11]

야노 히데타케의 연구에 따르면, 붓다다사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26]

특징설명
불전 해석 방법"인간의 언어"가 아닌 "불법어"에 의한 해석을 강조. 예를 들어 "일하다"는 불법적으로 불법 실천을 의미하며, 일반 사회에서 일하는 것도 삼학(계, 정, 혜)으로 이어진다고 봄.
심리주의적·현세주의적 해석"윤회"는 죽음 이후가 아닌 "지금·여기"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해석. 삼장을 중시하고 은 중시하지 않음.
선의 영향공사상을 중시하며, "나", "나의 것"에서 해방된 상태를 "열반"이라 부름. 열반은 수행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얻을 수 있는 상태이며, 매일의 수행을 통해 점차 완전해진다고 봄.
불법(불교) 사회주의불법에 기초하여 자기중심성을 제거한 정치 체제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개인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모두 발전한다고 봄.


3. 4. 불법(불교) 사회주의

붓다다사는 상좌 불교의 사상 체계 전체에 걸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을 갖는다.[26]

  • 불전 해석 방법: "인간의 언어"(세속적인 용어)가 아닌, "불법어"(불법적인 용어)에 의한 해석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일하다"는 것은 세속적으로는 일을 의미하지만, 불법적으로는 불법의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 사회에서 일하는 것도 불법의 실천인 "계·정·혜"(삼학)로 이어진다고 본다.
  • 심리주의적·현세주의적 해석 강조: "윤회"는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의 개개인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해석한다. 삼장 (붓다의 말씀)을 중시하고, (후세의 주석)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선의 영향: 공사상을 중시하며, "나·나의 것"과 같은 집착에서 해방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부른다. "열반"은 수행자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도 얻을 수 있는 상태이며, 매일의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일상화되어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불법(불교) 사회주의: 불법에 기초하여, 자기중심성을 제거한 정치 체제나 사회를 형성할 것을 주장한다. (불법 공동체 원리. thammik sangkhomniyom|탐믹 상콤니욤th, 영어로는 dhammic(buddhist) socialism) 현재의 고난은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행위로 인한 것이므로, 자기중심성을 각자가 노력하여 극복함으로써, 개개인이 열반에 이르고, 사회도 발전한다는 것이다.

4. 실천: 아나파나사티(호흡 명상)

붓다다사는 "선행을 하고, 악을 피하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고타마 붓다의 핵심 가르침을 본받기 위해 단순하고 순수한 수행을 추구했다.[27] 그는 아나파나사티(호흡을 관찰하는 것에 의한 깨어있음)를 주로 가르쳤다.

그의 저서 "''Mindfulness with Breathing''"[28]에 따르면, 아나파나사티 명상은 4가지 명상 대상 (1.kāya 카야 = 몸, 2.vedanā 베다나 = 느낌, 즉 쾌·불쾌·중성 등 감각 경험에 대한 심리적 반응, 3.citta 치타 = 마음, 4.dhamma 담마 = 진리) 각각에 대해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단계내용
1호흡을 관찰·이해하고 몸과 마음을 진정시킨다.
2호흡 관찰 등의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pīti(피티: 희열, 즉, 마음이 청정해짐으로써 생기는 흥분된 행복감)와 sukha(스카: 안락, 피티와 같은 흥분 없는 행복감)의 상태를 알고, 베다나를 진정시킨다.
3각 호흡마다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고, 마음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이 있다면 거기에서 마음을 해방시킨다.
4호흡의 무상·불확실성을 앎으로써, 집착을 경감시키고, 최종적으로 모든 집착을 놓는다.


5. 영향

붓다다사의 쑤언 목크 (해방의 정원) 수도원의 명상실


붓다다사의 불교 전통 해석은 1932년 시암 혁명의 지도자 쁘리디 파놈용에게 영향을 주었다.[12]

종교학자 도널드 K. 스위어는 붓다다사를 초기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13]와 5세기 남인도 학자 붓다고사에 비유했다.[14] 스위어에 따르면, 붓다다사는 붓다고사와 "정반대"에 있으며, 그의 저술은 붓다고사의 ''청정도론''과 명확히 대비된다.[14] 붓다다사는 태국 불교의 ''숲 전통''에 영향을 주었으며, 산티 아소크 창시에도 영향을 미쳤다.[14]

피터 A. 잭슨과 다니엘 린치 등은 붓다다사가 선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15][16] 붓다다사는 선불교를 상좌부 불교와 현대 인본주의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보았고, 일본 경제 강세의 이유라고 생각했다.[16]

2020년 팬데믹 이후 태국 불교가 쇠퇴하면서 붓다다사의 "영적 성장의 합리주의적 관점"보다 행운을 비는 의식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은 태국 사찰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7]

5. 1. 제자와 지지자

붓다다사의 불교 해석은 1932년 시암 혁명의 지도자인 쁘리디 파놈용과 20세기 태국의 사회 운동가 및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2] 종교학자 도널드 K. 스위어는 붓다다사를 초기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13]와 5세기 남인도 학자 붓다고사에 비유했다.[14] 스위어에 따르면, 붓다다사는 붓다고사와는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며, 그의 저술은 붓다고사의 ''청정도론''과 명확히 대비된다.[14] 붓다다사는 태국 불교의 ''숲 전통''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은 산티 아소크 창시에도 영향을 미쳤다.[14]

피터 A. 잭슨과 다니엘 린치와 같은 학자들은 붓다다사가 선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15][16] 붓다다사는 선불교의 사상을 상좌부 불교와 현대 인본주의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보았고, 이것이 일본 경제 강세의 이유라고 생각했다.[16]

2020년 팬데믹 이후 태국 불교가 쇠퇴하면서 붓다다사의 "영적 성장의 합리주의적 관점"보다 행운을 비는 의식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은 태국 사찰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7]

붓다다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승려로는 태국인 아찬 포와 미국인 산티카로가 있다. 아찬 포는 현재 쑤언 목크 수도원장이며, 산티카로는 붓다다사 저작의 영어 번역[29]에 참여했고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태국 불교는 여성 출가(비구니)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란추안 인타라캄헹은 붓다다사의 가르침에 기반한 저술을 했다.[30]

미국에서 상좌부 불교의 초석을 다진 래리 로젠버그는 붓다다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조언을 받은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31] 일본인 비프라티사(후에 미하시 엔칸)는 붓다다사 저작의 일본어 번역[32]을 했다.

붓다다사는 불법 사회주의(불법 공동체 원리)와 관련하여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연결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고통)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문제의 근원(=사회)으로 향해야 한다"[33]

이러한 생각에 따라 활동하는 개발승들은 빈곤층 부조 및 자립, 환경 보전, 협동조합을 통한 마을 부흥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다. 붓다다사의 영향이 명백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34]

  • 태국 설법가이자 사회 사업가인 프라파욤 캄라야노는 쑤언 목크에서 7년간 수행 후, 1987년 논타부리 근교 숲에 쑤안깨우(연꽃의 정원) 사찰을 열었다. 이 사찰에서는 거리의 아이들 보호 및 교육, 마약 중독자 갱생, 말기 에이즈 환자 간병, 피해자 및 구조조정 대상자 수용, 법률 지원, 양로원 운영 등 불법에 기반한 '사회 개발'을 한다.

  • 수랏타니현 모타이 지구 쑤타왓 사원 주지 카세암 탐마란시는 삼림 벌채 폐해(단일 경작, 가뭄)로부터 숲과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NGO와 공동으로 1만 라이(1라이 = 1600m2)의 공유림을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사찰에서 키운 나무를 심는 운동을 한다. 그의 활동은 쑤언 목크에서 5년간 체류하며 감명받은 '붓다는 불법(=자연)의 등불, 숲은 자연의 등불'이라는 붓다다사의 가르침에 기반한다.[35]


개발승 외에도 파윳토와 같은 태국 불교계 대표 승려에게도 붓다다사의 사상은 영향을 주었다. 환경 위기를 논하는 프리차 피엠퐁산도 붓다다사의 영향을 받아 불교 경제학, 녹색 철학을 논한다.[36]

붓다다사는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스웨어러는 번역을 통해 서양에 붓다다사를 소개했고,[39] 가보드는 붓다다사 사상의 특징을 "실존주의해석학"으로 논했으며,[40] 잭슨은 근대 합리주의·민주화 관점에서,[41] 스완나는 대승 불교, 특히 선(禪) 관점에서 연구했다.[42] 불법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도 있다.[43]

일본 학계에서 붓다다사를 처음 다룬 것은 후지요시 지카이로, 아나파나사티에 대한 소개를 했다.[44] 이후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접근이 이루어졌다. 아사미 야스히토[45], 이토 유미[46], 노즈 코지[47], 모리베 하지메[48], 야노 히데타케 등이 붓다다사의 생애, 사상, 영향, 일본 불교와의 비교 등을 연구했다.

5. 2. 사회 참여 불교 운동

1932년 시암 혁명의 지도자이자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쁘리디 파놈용과 20세기의 태국 사회 운동가 및 예술가 집단은 붓다다사의 불교 전통 해석에 영감을 받았다.[12]

붓다다사는 태국 불교의 ''아란냐와시'' (숲 전통)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상은 급진적인 종파 운동의 창시자 산티 아소크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14] 피터 A. 잭슨과 다니엘 린치와 같은 학자들에 따르면, 붓다다사는 선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15][16] 그는 선불교의 사상을 상좌부 불교와 현대 인본주의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이 일본의 경제적 강세의 이유라고 생각했다.[16]

붓다다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승려로는 태국인인 포 찬다사로 비쿠(통칭 아찬 포)와 미국인 산티카로 비쿠가 알려져 있다. 아찬 포는 현재 쑤안목 수도원장으로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산티카로 비쿠는 붓다다사의 저작의 영어 번역[29]에 관여했으며,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래리 로젠버그는 수행 상 붓다다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로부터 조언을 받은 것이 매우 중요했다고 말한다.[31]

붓다다사는 불법 사회주의(불법 공동체 원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연결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고통)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문제의 근원(=사회)으로 향해야 한다."[33]

이러한 생각에 따라 활동하는 개발승들은 빈곤층의 부조 및 자립, 환경 보전, 협동조합에 의한 마을 부흥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보였다. 붓다다사의 영향이 명백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34]

  • 태국 유수의 설법가이며 체계적인 사회 사업을 하고 있는 승려 프라파욤 캄라야노는 쑤안목에서 7년간 수행한 후, 1987년에 논타부리 근교의 숲에 쑤안깨우(연꽃의 정원)라는 사찰을 열었다. 이 사찰에서는 현재 다음과 같은 불법에 기반한 '사회 개발'을 하고 있다.
  • 거리의 아이들 보호와 교육
  • 마약 중독자의 갱생
  • 말기 에이즈 환자의 간병
  • 피해자, 구조조정 대상자 수용 및 법률상 편의 제공
  • 양로원 운영
  • 수랏타니현 모타이 지구의 쑤타왓 사원의 주지, 카세암 탐마란시는 삼림 벌채로 인한 다양한 폐해(단일 경작, 가뭄)로부터 숲과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NGO와 공동으로 1만 라이(1라이 = 1600m2)의 공유림을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나아가 사찰에서 키운 나무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심는 등의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활동의 근저에는 쑤안목에서의 5년간의 체류 동안 깊은 감명을 받은 '붓다는 불법(=자연)의 등불, 숲은 자연의 등불'이라는 붓다다사의 가르침이 있다.[35]


개발승 이외에도, 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인 파윳토에게도 붓다다사의 사상은 완만한 형태로 영향을 주고 있다.

5. 3. 비판과 논쟁

붓다다사는 전통적인 윤회와 업 교리를 거부했는데, 이는 그가 그것이 ''순야타''와 양립할 수 없으며 ''두카''의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 붓다다사는 윤회에 대한 모든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붓다다사에 따르면, 붓다는 어떤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실체나 영혼도 부정하는 '무아'(anattāpi, anātmansa)를 가르쳤다. "태어난 사람이 없으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고 붓다다사는 말한다. 따라서 붓다다사는 "윤회에 대한 모든 질문은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불교 가르침의 영역에는 윤회나 환생에 대한 질문이 없다"고 한다. 그 목표는 ''니르바나''이며, 붓다다사는 이를 "고통을 초월하고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초월하는" 상태로 묘사한다.[7]

붓다다사는 빠띠짜사뭅빠다를 감각적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나"와 나의 탄생,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베다나 ("느낌"), 딴하 ("갈증", 갈망) 및 우빠다나 (집착)로 설명한다. 그는 "붓다가 의미하는 '탄생'이라는 단어의 실제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물리적입니다. 붓다가 지적한 탄생은 영적인 것이었는데,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의 탄생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의 탄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8]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버림으로써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열반 또는 진정한 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의존적 발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감각 접촉의 순간에 그것을 끊어버림"으로써 가능하다.

붓다다사의 견해는 "강하게 비판"을 받았으며[9] 보다 정통적인 불교 법에 대한 견해를 가진 많은 동료 테라바다 불교 승려들에게 거부되었다. 예를 들어, 빅쿠 보디는 윤회 교리를 버리는 붓다다사의 접근 방식이 "실질적으로 법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 윤회에 대한 개념은 모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윤리 이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7]

붓다다사의 불교 전통 해석은 1932년 시암 혁명의 지도자 쁘리디 파놈용에게 영향을 주었다.[12]

종교학자 도널드 K. 스위어는 붓다다사를 초기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13]와 동남아시아에서 "상좌부 불교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5세기 남인도 학자 붓다고사에 비유했다.[14] 스위어에 따르면, 태국의 스승 붓다다사는 여러 면에서 붓다고사와 같은 규범적 인물과 "정반대"에 있다. 예를 들어, 붓다다사의 저술은 붓다고사의 학문적이고 영향력 있는 ''청정도론''과 명확히 대조된다.[14] 붓다다사는 태국 불교의 ''아란냐와시'' (숲 전통)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상은 급진적인 종파 운동의 창시자 산티 아소크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스위어는 말한다.[14]

피터 A. 잭슨과 다니엘 린치와 같은 학자들에 따르면, 붓다다사는 선불교에서 발견되는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15][16] 붓다다사는 선불교의 사상을 상좌부 불교와 현대 인본주의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이 일본의 경제적 강세의 이유라고 생각했다.[16]

2020년 팬데믹 이후 태국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붓다다사가 가르친 "영적 성장의 합리주의적 관점"보다 행운을 비는 축복과 다양한 의식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으며, 붓다다사의 가르침은 태국 사찰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7]

그의 비판자로는, 쿡릿 쁘라못이 있다. 쿡릿 쁘라못은 붓다다사의 설법인 "공"의 달성을 통해 사회나 국가에 대한 관심을 사람들이 잃는 것은 국가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붓다다사는 사람들이 "공"에 도달한다면 자기 중심주의에 의한 혼란을 제거하여 사회적 성취가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답했다.[37]

또한, 전통적인 태국 승려인 프라 팁파린야는 『히말라야의 폭발』이라는 책에서, 붓다다사의 가르침은 붓다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붓다다사가 설법 중에 삼보(불·법·승)는 열반에의 도달을 방해하는 히말라야와 같은 것이라고 하고, 또, "일체지"의 의미를 "붓다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22]

참조

[1] 서적 Sons of the Buddha: The Early Lives of Three Extraordinary Thai Masters https://books.google[...] Wisdom Publications
[2] 논문 Suchira Payulpitack, Buddhadasa's Movement: An Analysis of Its Origins, Development, and Social Impact http://bieson.ub.uni[...] faculty of Sociology, Universität Bielefeld 1992
[3] 문서 Payulpitack 1992
[4] 웹사이트 Ajahn Buddhadasa http://www.suanmokkh[...] 2017-07-06
[5] 서적 Nature Across Cultures: Views of Nature and the Environment in Non-Western Cultures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6] 서적 Heartwood of the Bodhi Tree Wisdom Publication 1994
[7] 서적 Buddhist Philosophy: A Comparative Approach https://books.google[...] Wiley
[8] 간행물 Heart-wood from the Bo Tree https://web.archive.[...] Susan Usom Foundation 1985
[9] 간행물 Reviewed Work: Buddhadāsa: Theravada Buddhism and Modernist Reform in Thailand by Peter A. Jackson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1
[10] 문서 Payulpitack 1992
[11] 웹사이트 Buddhadasa, No Religion http://www.abuddhist[...]
[12] 서적 Rising China and Asian Democratization: Socialization to "Global Culture" in the Political Transformations of Thailand, China, and Taiwan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3] 문서 Dhammic Socialism Thai Inter-Religious Commission for Development 1986
[14] 서적 Me and Mine: Selected Essays of Bhikkhu Buddhadasa https://books.googl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5] 서적 Buddhadasa: A Buddhist Thinker for the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Siam Society
[16] 서적 Rising China and Asian Democratization: Socialization to "Global Culture" in the Political Transformations of Thailand, China, and Taiwan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7] 웹사이트 The Decline Of Buddhism In Thailand – Analysis https://www.eurasiar[...] 2022-10-25
[18] 웹사이트 Historical Ties India and Thailand http://www.esamskrit[...]
[19] 문서 欧米ではこちらの呼称が一般的である。
[20] 문서 1994年8月、西川潤(当時早稲田大学教授)の訪問時には、僧侶・俗人あわせて200名が常住、年間30万人以上の訪問者があり、全国的セミナーの開催もな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藤原書店
[21] 문서 現在のタイの仏教は上座部仏教であり、日本などの東アジア諸国に広がった大乗仏教とは、戒律や教理に大きな違いがある。
[22] 문서 野津幸治「プッタタート比丘の思想と生涯」(西川潤・野田真里編『仏教・開発・NGOータイ開発僧に学ぶ共生の智慧』新評論 2001所収) 新評論
[23] 문서 プッタタートは、いわゆるヴィパッサナーの指導をすることはなかった、という。『実践の近道』(石井美恵子による訳)には、以下のようにある。「ヴィパッサナーと呼ばれるものよりも何よりも、最高のタンマの実践です。なぜなら今は、ヴィパッサナーという言葉に困り切っています。以前にも人に聞かれたとお話したことがあるように、どこへ行っても、『スアンモークではヴィパッサナーをするんですか』と聞く人があるのです。 考えてみてください。私はどう答えたらいいんでしょう。スアンモークではヴィパッサナーをするのですか、と聞くんです。あえてこのように尋ねる人がいるんです。質問者が言っているようなタイプのヴィパッサナーだったら、私のところにはありません。私はしません。したくもありません。 私に質問した人が言っているような意味のヴィパッサナーは、持つのも、するのも望みません。しかしこのような実践、私が、これがヴィパッサナーだと言うような、あるいはヴィパッサナー以上だと言うような実践は、ヴィパッサナー以上の成果のある行動です。私のところにあるのは、彼らがヴィパッサナーと呼ばないものばかりです。 なぜなら彼らは、ヴィパッサナーとは別のものだと理解しているからです。先生やアーチャンを敬う儀式から始まって、いろいろな形式や規定があり、いろいろな姿勢があり、ゆっくり歩いたり、腹の動きを感じたり、山ほどあります。他人に見える、他人が理解できる方式であり、規定です。こう見ることもできます。 誰がしても構いません。それもヴィパッサナーです。そしてそのタイプは、そのタイプのヴィパッサナーは、『自我』のタイプなのです。つまりヴィパッサナーをひけらかし、『俺』のヴィパッサナーを人に見せるので、どうにもならないものです。それが『俺』『俺の』を増や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彼らはまだ知らないのです。」
[24] 서적 龍樹 講談社 2005-07
[25] 서적 J.KRISHNAMURTI: A BIOGRAPHY Penguin Books 1996
[26] 문서 矢野秀武「「生活の宗教」と応用教理学-日本の葬祭仏教研究とタイの改革派仏教の比較」(「宗教研究」76(2) (通号 333) 2002.9)、プッタタート比丘と社会参加型仏教の思想潮流-タイにおける思想・研究・社会活動のネットワーク(「國學院大學日本文化研究所紀要」(通号 83) 1999.03)
[27] 문서 後述「研究者たち」の項目参照。
[28] 문서 MINDFULNESS WITH BREATHING :Unveiling the Secrets of Life- a Manual for Serious Beginners. 1988
[29] 문서 Keys to Natural Truth (1988), Prison of Life (1988)など。
[30] 문서 ランチュアン・イントラカムヘン(石井美惠子訳)『瞑想のすすめ―精神修養の実践』・『三相』(いずれも発行年などのデータなし)など。
[31] 서적 呼吸による癒し-実践ヴィパッサナー瞑想 春秋社
[32] 문서 仏教人生読本 プッタタート財団 1998-10
[33] 서적 Dhammik Socialism Suksit Siam 1986
[34] 문서 以下の記述は鈴木規之の研究成果による。 国際書院
[35] 문서 なお、タイの代表的反体制知識人のスラック・シワラック(Sulak Sivaraksa)は、プッタタートの影響のもとに、心の発展(物質的発展ではなく)をベースとする社会改革を説いているが、彼はプッタタート以外にも多くの思想的源泉をもつため、本項目では採りあげない。
[36] 서적 Dhammik Setthasart Chulalongkorn University
[37] 서적 Buddhadasa: A Buddhist Thinker for the Modern World The Siam Society Under Royal Patronege
[38] 서적 タイ仏教入門 めこん
[39] 서적 Me and Mine: selected essays of Bikkhu Buddhadasa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40] 서적 Une herméneutique bouddhique contemporaine de Thaïlande : Buddhadasa Bhikkhu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41] 서적 Buddhadasa: A Buddhist Thinker for the Modern World The Siam Society Under Royal Patronege
[42] 서적 Prachaya Phuttathat Kap Mahayanatham Chulalongkorn Mahawithayalai
[43] 간행물 '"Luangpor Teean : The Dynamic Practice of a Thai Meditation Master"' 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44] 논문 ブッダダーサ比丘の瞑想法 1972-12
[45] 논문 タイ仏教の新潮流―日本仏教批判の一視点― 1994-10
[46] 논문 現代タイ仏教における「ダンマ」の理解と実践―プッタタート比丘の思想― 1997-06
[47] 논문 プッタタート比丘の母親観―「正法母」の思想― 2000-11
[48] 서적 タイの僧侶Buddhadasaのイメージをめぐって―ダンマ理論と実践活動の検討から― 南山大学人類学研究所叢書Ⅵ
[49] 서적 アーナーパーナサティの完全技法と自然法
[50] 웹사이트 Buddhadasa, No Religion http://www.abuddhist[...]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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