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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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루이섬은 센 강에 있는 시테섬과 함께 자연 섬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파리 중심부에 위치하며, 17세기부터 도시 개발이 시작되어 현재는 주택, 상점,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루이 르 보가 설계한 건축물군과 생루이 앙릴 교회가 있으며, 앙주 강변, 부르봉 강변 등 여러 강변이 섬을 둘러싸고 있다. 폴 세잔, 샤를 보들레르, 마리 퀴리 등 많은 유명 인사가 이 섬에서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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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루이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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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생루이섬 |
프랑스어 명칭 | Île Saint-Louis |
로마자 표기 | Il Seang-Lwi |
과거 명칭 | Île de la Fraternité (프라테르니테 섬) |
면적 | 11 헥타르 |
지리 | |
위치 | 세느강 |
국가 | 프랑스, 파리 |
인구 통계 | |
인구 (2016년) | 2,323명 |
2. 역사
센 강에 있는 하중도 가운데 시테섬과 함께 자연 섬이며, 시뉴섬은 인공 섬이다. 섬 이름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서 유래되었다.
도시 개발 사업 이전까지는 소 시장과 목재 적재장이 들어서 있었지만, 17세기 앙리 4세와 루이 13세 때부터 도시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2. 1. 초기 역사와 개발
이 섬은 처음에는 '''노트르담 섬(Île Notre-Dame)'''으로 알려졌으며, 주로 소를 방목하고, 낚시를 하고, 빨래를 말리고, 때때로 결투를 하는 데 사용되었다.[1] 1360년에는 당시의 푸리에르 거리(Rue Poulettiere) 근처에서 운하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 샤를 5세가 건설한 도시 주변의 새로운 벽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약간 더 작은 동쪽 부분은 바슈 섬(Île des Vaches, 암소 섬)이라고 명명되었다(하류에 있는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섬과 혼동하지 말 것). 이 부분은 나무를 저장하고 배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1]원래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수도회가 소유했다.[2] 이 섬은 앙리 4세 왕 아래에서 부동산 개발을 위해 지정되었지만, 1610년 왕의 암살로 인해 프로젝트가 지연되었다. 1616년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Christophe Marie), 푸리에르 르 레그레티에(Poulettiere Le Regrettier)에 의해 부활되었다. 섬을 나누는 운하가 메워지고, 부지가 정리되었으며, 인상적인 저택이 건설되었다.[2] 섬의 도시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50년 안에 완전히 점유되었다. 섬을 오른편 강변과 연결하는 마리 교(Pont Marie)는 섬의 부동산 개발업자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마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14년부터 그는 마리 드 메디치의 수석 건축가였으며,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어린 왕 루이 13세의 섭정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섬의 두 부분을 나누는 운하를 메우고, 섬 전체에 견고한 돌 제방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부분은 새로운 다리인 루이 13세 다리(Pont Louis XIII)였으며, 첫 번째 돌은 당시 13세였던 어린 왕 자신이 놓았다. 여러 문제로 인해 다리 공사가 지연되어 1635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다리에는 다섯 개의 아치가 있으며, 각각 크기가 다르다. 아치 사이에 동상을 위한 틈새가 만들어졌지만, 정권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상은 설치되지 않았다.[3]
마리 드 메디치는 섬에 부지를 구입하고 집을 지은 사람들에게 테니스 코트와 의류 및 린넨 세탁을 위한 세탁 배를 포함한 장기적인 혜택을 약속했다. 그녀는 판사들과 금융가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원이 있는 더 넓은 토지를 선호했던 마레 지구를 선호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또한 섬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노트르담 수도회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들의 반대는 결국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를 파산시켰다. 결국 부유한 사람들의 집은 해안가에 위치했고, 내부는 상인과 장인들이 점유했다.[4]
이 섬은 1725년이 되어서야 생루이 섬(Saint-Louis)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270년에 사망한 지 30년 만에 성인이 된 루이 9세는 때때로 이 섬에서 재판을 열고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여겨졌다.[2]
프랑스 혁명 동안, 이 섬은 잠시 "우애 섬(Île de la Fraternité)"으로 개명되었다.[2]
2. 2. 17세기 도시화
센 강에 있는 하중도 가운데 생루이섬과 시테섬은 자연 섬이며 시뉴섬은 인공 섬이다. 섬 이름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서 유래되었다. 17세기 앙리 4세와 루이 13세 때부터 도시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이 섬은 처음에는 '''노트르담 섬(Île Notre-Dame)'''으로 알려졌으며, 주로 소를 방목하고, 낚시를 하고, 빨래를 말리고, 때때로 결투를 하는 데 사용되었다.[1] 1360년에는 당시의 푸리에르 거리(Rue Poulettiere) 근처에서 운하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 샤를 5세가 건설한 도시 주변의 새로운 벽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약간 더 작은 동쪽 부분은 바슈 섬(Île des Vaches, 암소 섬)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부분은 나무를 저장하고 배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1]
원래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수도회가 소유했다.[2] 이 섬은 앙리 4세 왕 아래에서 부동산 개발을 위해 지정되었지만, 1610년 왕의 암살로 인해 프로젝트가 지연되었다. 1616년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Christophe Marie), 푸리에르 르 레그레티에(Poulettiere Le Regrettier)에 의해 부활되었다. 섬을 나누는 운하가 메워지고, 부지가 정리되었으며, 인상적인 저택이 건설되었다.[2] 섬의 도시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50년 안에 완전히 점유되었다. 섬을 오른편 강변과 연결하는 마리 다리(Pont Marie)는 섬의 부동산 개발업자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마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14년부터 그는 마리 드 메디치의 수석 건축가였으며,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어린 왕 루이 13세의 섭정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섬의 두 부분을 나누는 운하를 메우고, 섬 전체에 견고한 돌 제방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부분은 새로운 다리인 루이 13세 다리(Pont Louis XIII)였으며, 첫 번째 돌은 당시 13세였던 어린 왕 자신이 놓았다. 여러 문제로 인해 다리 공사가 지연되어 1635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다리에는 다섯 개의 아치가 있으며, 각각 크기가 다르다. 아치 사이에 동상을 위한 틈새가 만들어졌지만, 정권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상은 설치되지 않았다.[3]
마리 드 메디치는 섬에 부지를 구입하고 집을 지은 사람들에게 테니스 코트와 의류 및 린넨 세탁을 위한 세탁 배를 포함한 장기적인 혜택을 약속했다. 그녀는 판사들과 금융가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원이 있는 더 넓은 토지를 선호했던 마레 지구를 선호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또한 섬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노트르담 수도회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들의 반대는 결국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를 파산시켰다. 결국 부유한 사람들의 집은 해안가에 위치했고, 내부는 상인과 장인들이 점유했다.[4]
2. 3.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생루이 섬은 처음에는 '''노트르담 섬(Île Notre-Dame)'''으로 알려졌으며, 주로 소를 방목하고, 낚시를 하고, 빨래를 말리고, 때때로 결투를 하는 데 사용되었다.[1] 1360년에는 당시의 푸리에르 거리(Rue Poulettiere) 근처에서 운하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건설한 도시 주변의 새로운 벽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약간 더 작은 동쪽 부분은 바슈 섬(Île des Vaches, 암소 섬)이라고 명명되었다(하류에 있는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섬과 혼동하지 말 것). 이 부분은 나무를 저장하고 배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1]원래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수도회가 소유했다.[2] 이 섬은 앙리 4세 왕 아래에서 부동산 개발을 위해 지정되었지만, 1610년 왕의 암살로 인해 프로젝트가 지연되었다. 1616년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Christophe Marie), 푸리에르 르 레그레티에(Poulettiere Le Regrettier)에 의해 부활되었다. 섬을 나누는 운하가 메워지고, 부지가 정리되었으며, 인상적인 저택이 건설되었다.[2] 섬의 도시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50년 안에 완전히 점유되었다. 섬을 오른편 강변과 연결하는 마리 다리(Pont Marie)는 섬의 부동산 개발업자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마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14년부터 그는 마리 드 메디치의 수석 건축가였으며,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어린 왕 루이 13세의 섭정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섬의 두 부분을 나누는 운하를 메우고, 섬 전체에 견고한 돌 제방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부분은 새로운 다리인 루이 13세 다리(Pont Louis XIII)였으며, 첫 번째 돌은 당시 13세였던 어린 왕 자신이 놓았다. 여러 문제로 인해 다리 공사가 지연되어 1635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다리에는 다섯 개의 아치가 있으며, 각각 크기가 다르다. 아치 사이에 동상을 위한 틈새가 만들어졌지만, 정권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상은 설치되지 않았다.[3]
마리 드 메디치는 섬에 부지를 구입하고 집을 지은 사람들에게 테니스 코트와 의류 및 린넨 세탁을 위한 세탁 배를 포함한 장기적인 혜택을 약속했다. 그녀는 판사들과 금융가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원이 있는 더 넓은 토지를 선호했던 마레 지구를 선호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또한 섬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노트르담 수도회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들의 반대는 결국 개발업자 크리스토프 마리를 파산시켰다. 결국 부유한 사람들의 집은 해안가에 위치했고, 내부는 상인과 장인들이 점유했다.[4]
이 섬은 1725년이 되어서야 생루이 섬(Saint-Louis)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270년에 사망한 지 30년 만에 성인이 된 루이 9세는 때때로 이 섬에서 재판을 열고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여겨졌다.[2]
프랑스 혁명 동안, 이 섬은 잠시 "우애 섬(Île de la Fraternité)"으로 개명되었다.[2]
3. 지리 및 교통
센 강에 있는 하중도 가운데 생루이섬과 시테섬은 자연 섬이며 시뉴섬은 인공 섬이다. 섬 이름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1]
섬 안에는 시테섬을 연결하는 생루이 교가 있다.[1] 섬에는 좁은 일방 통행로만 있고 철도역은 없으며 버스 정류장 2개가 있다.[1] 주택 단지가 대부분이지만 음식점과 상점, 커피 전문점과 아이스크림 전문점 그리고 대규모 성당(생루이섬 대성당)도 들어서 있다.[1]
이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다음 5개이다.[1]
4. 주요 건축물 및 거리
생루이섬은 센강에 있는 하중도 가운데 하나로, 시테섬과 함께 자연 섬이다. 섬 이름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서 유래되었다.
섬 안에는 시테섬을 연결하는 생루이 교가 있다. 17세기 앙리 4세와 루이 13세 때부터 도시 개발 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소 시장과 목재 적재장이 있었다. 섬에는 좁은 일방 통행로만 있고 철도역은 없으며 버스 정류장 2개가 있다. 주택 단지가 대부분이지만 음식점, 상점, 커피 전문점, 아이스크림 전문점, 그리고 대규모 성당(생루이앙릴 교회)도 있다.
17세기에 생루이섬 개발은 공공 사업 총괄 건설업자인 크리스토프 마리에게 주어졌다. 그는 귀족을 비롯하여, 부유한 사업가 및 정치인들이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도록 우아한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면허를 받았다. 마리는 루이 르 보를 건축가로 선택하여 1620년에서 1650년 사이에 타운 하우스를 건설했다.
섬 프로젝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신중하게 작성된 도시 계획을 사용했다. 새로운 거리는 직선으로 중앙 축에 수직으로 건설되었으며, 화재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석재와 슬레이트가 사용되었다. 주거지는 외부를 향하도록 배치되어 창문과 발코니가 강을 바라보았다.
생루이섬의 주요 상업 거리는 루 생루이 앙릴 거리이다. 섬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어진다.
- 퐁 생 루이(Pont Saint-Louis)는 시테섬과 생루이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이며, 길이는 60m이다. 최초의 다리는 1634년에 나무로 건설되었다. 현재의 다리(아홉 번째)는 1970년에 개통되었다.[1]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도 종사한 바로크 건축의 건축가 루이 르 보가 설계한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건축물 | 비고 |
---|---|
생루이앙릴 교회 | :fr:Église Saint-Louis-en-l'Île |
로장 저택 | :en:Hôtel de Lauzun |
르 보 저택 | Hôtel Le Vau |
랑베르 저택 | :fr:Hôtel Lambert |
브르통빌리에 별관 | :fr:Le pavillon de Bretonvilliers |
슈니조 저택 | :fr:Hôtel Chenizot |
- 파리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베르티옹은 생루이앙릴 거리 29번지부터 31번지에 점포를 두고 있다.
4. 1. 앙주 강변 (Quai d'Anjou)
생루이섬 북쪽에 위치한 앙주 강변(Quai d'Anjou)은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오를레앙 공작(가스통)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지역은 1614년 크리스토프 마리(Christophe Marie)에 의해 개발되었다. 주요 건물 중 하나는 왕의 수석 건축가였던 루이 르 보(Louis Le Vau)의 저택(앙주 강변 3번지)이다. 앙주 강변의 다른 유명한 거주자로는 루이 15세를 위한 왕립 건물 감독관이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의 형제인 아벨-프랑수아 푸아송(Abel-Francois Poisson), 마르니 후작(앙주 강변 5번지)이 있었다. 이후 앙주 강변의 거주자로는 최상층에 석판화 공방을 가지고 있던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앙주 강변 9번지)가 있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1843년부터 1846년까지 앙주 강변 17번지 안뜰의 최상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거주했다.[2]- 폴 세잔 - 화가. 생루이 섬의 캥지유 가(앙주 강변, Quai d'Anjou) 15번지에 거주.
- 샤를 보들레르 - 시인. 1842년부터 1845년까지 생루이 섬 캥지유 가 15번지에 잠시 거주.
4. 2. 부르봉 강변 (Quai de Bourbon)
부르봉 강변(Quai de Bourbon)은 프랑스 왕가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 17세기 초에 건설된 우아한 타운하우스들이 있다. 혁명 이후 잠시 'Quai de la Republique'로 불렸지만, 1814년에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1] 1번지에는 추기경 리슐리외가 가장 아끼던 화가 필리프 드 샴페인이 거주했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은 1899년부터 1923년까지 19번지에 거주하며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을 가졌으며, 정신병원에 갇히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1]
- 카미유 클로델 - 여성 조각가. 1899년부터 1913년까지 부르봉 강변(Quai de Bourbon) 17-19번지의 자소관(Hôtel de Jassaud) 1층에 아틀리에가 있었다. 동관 17번지 부분은 역사 기념물이다.
- 레옹 블룸 - 정치인, 수상. 프랑스 인민 전선 시대에 부르봉 강변 25번지에 거주. 그 저택은 원래 1662년 국왕 루이 14세의 비서관이었던 앙투안 모로(Antoine Moreau)의 소유였다.
- - 작가, 루마니아 "왈라키아 대공비". 보야르 비베스코 가(en, fr), 왈라키아 대공 (en) 게오르그 (fr)의 손자 조르주 (fr)의 아내. 남편 조르주가 1941년에 사망하고, 고국이 공산화되면서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생루이 섬 부르봉 강변(Quai de Bourbon) 45번지에 거주. 동 45번지는 1919년-2004년까지 비베스코 가 소유였으며, 딸 프리실라가 2004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외 외교관 가 파시나 동 45번지에 거주.
4. 3. 베튄 강변 (Quai de Bethune)
베튄 부두는 생루이섬의 남동쪽을 따라 뻗어 있다. 앙리 4세 암살 직후에 건설되었으며, 앙리 4세의 재상이었던 막시밀리앙 드 베튄 쉴리 공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섬 남동쪽 끝에 있는 쉴리 다리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이 부두는 원래 건축가 루이 르보가 모든 건물에 발코니를 설치하여 건물의 남쪽 면을 활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발코니 부두"라고 불렸다.[1] 이 부두의 거주자로는 미국의 화장품 제조업체 헬레나 루빈스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1934년부터 1938년 사이에 베튄 부두 24번지에 섬에서 몇 안 되는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나무 문에 새겨진 사자 가면은 17세기 저택의 유일한 흔적이다.[1]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공식 거주지 외에도 베튄 부두 24번지에 개인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코미디언 루이 드 퓌네스도 잠시 같은 주소에 살았다.[1] 이 부두의 다른 유명한 거주자로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가 있는데, 그녀는 1912년부터 1934년 사망할 때까지 36번지에 살았다.[1]
4. 4. 오를레앙 강변 (Quai d'Orleans)
오를레앙 부두는 베튄 부두의 서쪽으로 이어진다. 앙주 부두와 마찬가지로 루이 13세의 남동생인 가스통 도를레앙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는 1806년까지 평등 부두로 이름이 바뀌었다. 생루이 다리에서 부르봉 부두와 연결되며, 섬의 서쪽 지점과 가깝다.[1]
오를레앙 부두 6번지에 있는 폴란드 도서관은 원래 루이 13세의 비서인 앙투안 모로를 위해 지어졌다. 1838년에 폴란드 도서관이 되었다. 섬의 이 부분은 폴란드와 관련이 깊다. 폴란드 차르토리스키 공은 앙주 부두 쪽에 살면서 쇼팽을 초대했고, 마리 퀴리는 베튄 부두 근처에 살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인 샤를 스완도 이곳에 살았던 허구의 인물이다.[1]
4. 5. 생 루이 앙 릴 거리 (Rue Saint-Louis-en-l'Île)
생루이 섬의 주요 상업 거리는 루 생루이 앙릴 거리이다. 섬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어진다. 상업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초기 주거 건물들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섬 동쪽 끝의 앙주 부두에 위치한 오텔 랑베르(Hôtel Lambert)이다.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원형 홀이 있는 이 대저택은 왕실 건축가 루이 르 보에 의해 1640년부터 건설되었다.[1]강과 부지의 근접성 때문에 앞뜰과 뒤뜰에 정원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모델을 따를 수 없었으므로, 르 보는 정원과 안뜰을 나란히 지었고 정원은 1층 또는 귀족 층 높이로 올렸다. 최초의 내부 벽화 장식은 외스타슈 르 쉬외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오리지널 패널 중 일부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헤라클레스 갤러리는 샤를 르 브룅이 설계했으며, 그의 향후 루이 14세를 위한 작품에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이 포함되었다.[1]
수년에 걸쳐 이 집은 놀라운 일련의 거주자들을 맞이했다. 18세기에는 마르키 드 샤틀레가 구입했는데, 그의 아내 에밀리 드 브르퇴유는 15년 동안 볼테르의 정부였다. 1843년에는 폴란드 왕자이자 애국자 아담 예르지 차르토리스키(Adam Jerzy Czartoryski)의 집이 되었으며, 발자크, 조르주 상드,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 프레데리크 쇼팽을 포함한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들을 환영했다. 20세기에는 배우 미셸 모건의 집이었고, 1975년에는 미술품 수집가 남작 기 드 로스차일드의 집이었으며, 2007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카타르 에미르의 형제인 압둘라 알 타니의 집이 되었다. 2013년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되었다.[2]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도 종사한 바로크 건축의 건축가 루이 르 보가 설계한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건축물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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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루이앙릴 교회 | :fr:Église Saint-Louis-en-l'Île |
로장 저택 | :en:Hôtel de Lauzun |
르 보 저택 | Hôtel Le Vau |
랑베르 저택 | :fr:Hôtel Lambert |
브르통빌리에 별관 | :fr:Le pavillon de Bretonvilliers |
슈니조 저택 | :fr:Hôtel Chenizot |
파리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베르티옹은 생루이앙릴 거리 29번지부터 31번지에 점포를 두고 있다.
4. 6. 오텔 랑베르 (Hôtel Lambert)

오텔 랑베르(Hôtel Lambert)는 생루이섬 동쪽 끝, 앙주 부두에 있는 대저택이다.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원형 홀을 갖추고 있으며, 왕실 건축가 루이 르 보가 1640년부터 건설했다.[1]
강과 부지가 가까워 앞뜰과 뒤뜰에 정원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르 보는 정원과 안뜰을 나란히 배치하고, 정원을 1층 높이로 올렸다. 최초의 내부 벽화 장식은 외스타슈 르 쉬외르가 맡았으며, 그의 오리지널 패널 중 일부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샤를 르 브룅이 설계한 헤라클레스 갤러리는 훗날 루이 14세를 위한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 영향을 주었다.[1]
이 저택은 여러 유명 인사들이 거쳐갔다. 18세기에는 볼테르의 정부였던 에밀리 드 브르퇴유의 소유였다. 1843년에는 폴란드 왕자이자 애국자인 아담 예르지 차르토리스키가 이곳에 살면서 발자크, 조르주 상드,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등 유명 작가와 음악가들을 맞이했다. 20세기에는 배우 미셸 모르간과 미술품 수집가 남작 기 드 로스차일드가 거주했으며, 2007년에는 카타르 에미르의 형제인 압둘라 알 타니가 소유하게 되었다. 2013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 랑베르 관(Hôtel Lambert) 거주자
- 에밀리 뒤 샤틀레 - 수학자, 물리학자.
-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폴란드 귀족 차르토리스키 공작)
- 러시아 제국 외무장관도 역임했지만, 폴란드 독립의 11월 봉기에 실패하여 파리로 망명("대망명")해 온 다수의 폴란드 귀족 중 한명으로 랑베르 관에 거주하며 "랑베르파"라고 불렸다.
- 칠레인 억만장자 실업가. 양성애자. 제2차 세계 대전 후 랑베르 관을 각 실 아파트로 나누어 분양 임대. 사망 시 거주했던 뇌이쉬르센의 저택은 시가 매입하여 박물관(Musée des automates)으로 개조.
- 제3대 로젠베르크-레데 남작 알렉스 폰 로젠베르크-레데 (Oskar Dieter Alex von Rosenberg-Redé, 3rd Baron von Rosenberg-Redé영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유대계 가문의 은행가. 탐미주의자. 위 윌쇼와 함께 랑베르 관에 거주.
- (사교계 명사, 패션 아이콘)
- 켄터키주 출신의 미국인. 평생 5번 결혼했으며, 4번째로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의 손자 알브레히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백작(Count Albrecht von Bismarck-Schönhausen (1903–1970))과 결혼(1955-1970). 샤넬이나 마들렌 비오네, 랑방 등에 의해 "더 베스트 드레스트 우먼"으로 미국인 최초로 선정되었으며, 잡지 "베니티 페어 (Vanity Fair)"의 "International Best Dressed List" 등에도 게재. 발렌시아가의 뮤즈. 생루이 섬의 랑베르 관의 한 실(아파트), 그 후 5번가나 예나 다리 근처 16구 뉴욕 대로 34번지, 이탈리아 카프리섬 등에 거주. 1983년 사망 후, 16구의 타운하우스는 미국인 아티스트 등의 파리 거주를 지원하는 재단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미국 문화를 소개하는 모나 비스마르크 아메리칸 센터(Mona Bismarck American Center)가 됨.
- 미셸 모르간 - 배우. 뇌이쉬르센 출생.
- 기 드 로칠드 - 파리 로칠드 가문 당주 은행가. 랑베르 관을 구입, 후년 아래 카타르 왕족 압둘라 빈 할리파에게 매각.
- 압둘라 빈 할리파 알사니 - 카타르 왕족, 전 카타르 수상.
4. 7. 생 루이 앙 릴 교회 (Église Saint-Louis-en-l'Île)
생 루이 앙릴(Saint-Louis-en-l'Île) 거리 19 비스에 위치한 생 루이 섬의 생 루이 교회(Église Saint-Louis-en-l'Île)는 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1] 이 교회는 왕실 건축가 루이 르 보의 동생인 건축가 프랑수아 르 보가 설계했는데, 그가 설계한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1] 1664년 10월 1일 파리 대주교가 첫 번째 돌을 놓았지만, 자금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1726년 7월 14일에 완공되었다.[1]이 교회는 원래 계획에 포함되었던 전통적인 서쪽 정면이 없다.[1] 건설 지연으로 인해 교회 옆에 주택이 세워져 공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1] 원래 종탑은 1740년 폭풍으로 파괴되었고, 새로운 개방형 탑으로 교체되었다.[1] 탑의 특이한 특징은 상점 간판처럼 거리에 걸려 있는 시계이다.[1]
내부는 프랑스 바로크 건축의 좋은 예로, 중앙 돔 또는 큐폴라와 금색과 흰색이 풍부하며, 이는 이탈리아에서 차용한 스타일이다.[1]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을 위해 파리를 방문하는 동안 1805년에 이 건물에서 미사를 거행했다.[1] 교회 내부는 프랑스 혁명 동안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1805년 손상된 벽에 태피스트리를 걸어 피해가 대부분 가려졌다.[1] 이 교회에는 2005년에 설치된 특히 훌륭한 오르간이 있으며, 교회는 콘서트 장소로 자주 사용된다.[1]
5. 섬과 관련된 유명인
- 폴 세잔: 화가. 생루이 섬의 캥지유 가(앙주 강변, Quai d'Anjou) 15번지에 거주했다.[1]
- 샤를 보들레르: 시인. 6구 오트푀유 거리(Rue Hautefeuille) 13번지 출생. 1842년부터 1845년까지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 르 르그라티에 거리(Rue Le Regrattier) 6번지와 캥지유 가 15번지에 거주했다.[1]
- 카미유 클로델: 여성 조각가. 1899년부터 1913년까지 퀘 드 부르봉(부르봉 강변, Quai de Bourbon) 17-19번지의 자소관(Hôtel de Jassaud) 1층에 아틀리에가 있었다. 동관 17번지 부분은 역사 기념물이다.[1]
- 레옹 블룸: 정치인, 수상. 14구 몽파르나스 대로(Boulevard du Montparnasse) 126번지와 프랑스 인민 전선 시대 퀘 드 부르봉 25번지에 거주했다. 퀘 드 부르봉 25번지 저택은 원래 1662년 국왕 루이 14세의 비서관이었던 앙투안 모로(Antoine Moreau)의 소유였다.[1]
- 헬레나 루빈스타인: 실업가. 1934년, 퀘 드 베튀느(Quai de Béthune) 24번지의 역사 기념물 에슬랭관(Hôtel d'Hesselin)을 개축했다.[1]
- 조르주 퐁피두: 정치인, 대통령, 수상. 퀘 드 베튀느 24번지 건물에 거주했으며, 1974년에 사망했다. 자선가이자 아내 클로드(Claude Pompidou)[2]도 2007년에 같은 건물에서 사망했다.[1]
- 루이 드 퓌네스: 프랑스 희극 배우. 퀘 드 베튀느 24번지 건물에 아파트를 소유했다. 누나 마리아 드 퓌네스(Maria de Funès)는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간 생루이 섬 부타렐 거리(Rue Boutarel) 주변에 거주했다.[1]
- 클로드 모리아크: 작가. 노벨 문학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아들. 퀘 드 베튀느 24번지 건물에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1]
- Marthe Bibesco프랑스어: 작가, 루마니아 왈라키아 대공비. 보야르 비베스코 가(en, fr), 왈라키아 대공 (en) 게오르그 (fr)의 손자 조르주 (fr)의 아내. 1941년 남편 사망, 고국 공산화로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생루이 섬 퀘 드 부르봉(Quai de Bourbon) 45번지에 거주했다. 1919년-2004년까지 비베스코 가 소유였던 45번지에는 딸 프리실라가 2004년 사망할 때까지, 외교관 Antoine Bibesco프랑스어가 파시나 동 45번지에 거주했다.[1]
- Nancy Cunard영어: 영국 여성 시인, 전위 예술가, 반차별 정치 운동가. 영국 해운 회사 큐나드 라인 상속인 가문 출신. 벨 에포크 후 광란의 20년대에 루이 아라공, 트리스탕 차라, 에즈라 파운드 등 시인들의 뮤즈. 1920년대 생루이 섬 르 르그라티에 거리(Rue Le Regrattier)에 거주[3], 1930-1934년 동안 파리 6구 겡고 거리(Rue Guénégaud) 15번지에서 출판사 아워스 프레스(Hours Press)를 경영[4]했다.[1]
- 마리 퀴리: 화학자. 1912년부터 1934년까지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르네 게농: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아룬 타지에프: 지질학자, 화산학자.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조르주 무스타키: 가수.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Claude Sarraute프랑스어: 여성 저널리스트. 16구 출생, 생루이 섬에도 거주했다.[1]
- Pascal Sevran프랑스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회자, 싱어송라이터.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기시 케이코: 일본의 여배우. 결혼 이후 일본을 떠나 생루이 섬에 거주했다.[1]
; 랑베르 관(Hôtel Lambert) 거주자
- 에밀리 뒤 샤틀레: 수학자, 물리학자. 랑베르 관(Hôtel Lambert)에 거주했다.[1]
-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폴란드 귀족 차르토리스키 공작): 러시아 제국 외상을 역임했지만, 폴란드 독립 11월 봉기 실패 후 파리 망명("대망명"). 랑베르 관에 거주하며 "랑베르파"로 불렸다.[1]
- Arturo López Willshaw프랑스어: 칠레 억만장자 실업가. 양성애자. 제2차 세계 대전 후 랑베르 관을 아파트로 나누어 분양 임대. 사망 시 거주했던 뇌이쉬르센 저택은 시가 매입, 박물관(Musée des automates)으로 개조했다.[1]
- Alexis von Rosenberg, Baron de Redé영어: 제3대 로젠베르크-레데 남작 알렉스 폰 로젠베르크-레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유대계 은행가. 탐미주의자. 윌쇼와 함께 랑베르 관에 거주했다.[1]
- Mona von Bismarck프랑스어 (사교계 명사, 패션 아이콘): 켄터키주 출신 미국인. 5번 결혼. 4번째 남편은 독일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의 손자 알브레히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백작(1903–1970). 샤넬, 마들렌 비오네, 랑방 등에 의해 "더 베스트 드레스트 우먼"으로 미국인 최초로 선정, "베니티 페어 (Vanity Fair)"의 "International Best Dressed List" 등에도 게재. 발렌시아가의 뮤즈. 생루이 섬 랑베르 관, 5번가, 예나 다리 근처 16구 뉴욕 대로 34번지, 이탈리아 카프리섬 등에 거주. 1983년 사망 후, 16구 타운하우스는 미국인 아티스트 등의 파리 거주 지원 재단, 미국 문화 소개 모나 비스마르크 아메리칸 센터(Mona Bismarck American Center)가 되었다.[1]
- 미셸 모르간: 배우. 뇌이쉬르센 출생, 랑베르 관에 거주했다.[1]
- 기 드 로칠드: 파리 로칠드 가문 당주 은행가. 랑베르 관 구입, 후년 카타르 왕족 압둘라 빈 할리파에게 매각했다.[1]
- 압둘라 빈 할리파 알사니: 카타르 왕족, 전 카타르 수상.[1]
6.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Paris Neighborhoods: The Ile Saint Louis
http://gofrance.abou[...]
2015-04-02
[2]
문서
アラン・ドロンのボディガードであったステファン・マルコヴィッチが射殺体で発見された事件(マルコビッチ事件、L'affaire Marković)では、アランとナタリー・ドロン夫妻のほか、クロードら大統領夫妻も巻き込まれた。同事件は迷宮入りした。
[3]
서적
Nancy Cunard: Heiress, Muse, Political Idealist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4]
서적
he Golden Moments of Paris: A Guide to the Paris of the 1920s
https://books.google[...]
Museyon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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