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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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1918년 11월 1일에 독립을 선포하고 1919년 7월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위치했다. 이 국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폴란드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으며, 독립 직후 폴란드와의 전쟁,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의 통합, 내부 갈등 등을 겪었다. 1919년 7월 폴란드에 의해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망명 정부를 운영하다가 1923년 국제 사회의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민주당과 우크라이나 급진당을 중심으로 한 양당 정치 체제를 갖추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를 통화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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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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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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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
현지 명칭 | Західноукраїнська Народна Республіка (자히드노우크라인스카 나로드나 레스푸블리카) |
상태 | 소멸 |
상태 설명 | 부분적으로 승인된 국가 (1918년–1919년). 나중에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분쟁 중인 자율 행정 구역이 됨 (1919년). 망명 정부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존재함. |
소속 국가 |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
위치 | 우크라이나, 폴란드,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
종교 | 58.9% 그리스 가톨릭, 27.8% 로마 가톨릭, 4% 유대교, 1.3%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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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Shche ne vmerla Ukrainy, 우크라이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
정치 | |
정부 형태 | 공화국 |
수반 직함 | 대통령 |
수반 | (예우헨 페트루셰비치) |
의회 | 우크라이나 국민의회 |
역사 | |
이전 국가 | 오스트리아-헝가리 |
이전 국가 구성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건국 | 1918년 11월 1일 |
주요 사건 | 우크라이나 통일법 (1919년 1월 22일) |
망명 | 1919년 7월 16일 |
망명 정부 해산 | 1923년 3월 15일 |
통화 | |
통화 |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 |
언어 | |
공용어 |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이드어 |
2. 명칭
1918년 11월 13일까지 이 국가는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 국가로 알려졌다. 1919년 1월 22일 통일 조약 이후, 이 국가는 통일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동시에 자치 지역이 되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서부 주로 알려졌다.[3][4]
1918년 11월 13일까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 국가'''로 불렸던 이 나라는, 1919년 1월 22일 통일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자치 지역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서부 주'''가 되었다.[3][4]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종종 '''ZUNR'''(우크라이나어 약어 ЗУНР의 직역), '''WUPR'''(West Ukrainian People's Republic), 또는 '''WUNR'''(West Ukrainian National Republic)로 줄여서 표기되기도 한다.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이름은 종종 ZUNR로 줄여서 표기된다(우크라이나어 약어인 ЗУНР을 직역한 것). 때로는 WUPR(West Ukrainian People's Republic의 약자) 또는 WUNR(West Ukrainian National Republic의 약자)로 줄여서 표기하기도 한다.
3. 역사
20세기 초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인이 인구의 약 60%를 차지했지만, 대부분 농촌에 거주했고 도시 지역은 주로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지배했다. 특히 수도가 된 리비우는 폴란드에게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1918년 11월 1일 독립을 선언하자, 폴란드는 즉시 갈리치아 침공을 시작했다. 이에 서우크라이나는 동부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1919년 1월 22일 정식 통일을 선언했다. 그러나 서부는 폴란드, 동부는 소비에트 적군 및 백군과 각각 전쟁 중이었기에 군사적 연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결국 1919년 7월 17일, 폴란드가 갈리치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영토 내의 카미아네츠-포돌스키로 망명해야 했다.
망명 정부는 초기에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와 협력했지만, 폴란드에 대한 입장 차이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폴란드를 주적으로 보았으나, 키예프 정부는 폴란드를 대(對)러시아 전쟁의 잠재적 동맹으로 간주했다. 키예프 정부가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하자,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비밀리에 소련군과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안톤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과 접촉하여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자치권 보장을 대가로 군사 동맹을 맺었다. 키예프 정부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백군을 이용해 소비에트 적군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협력이 불가능해지자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빈으로 다시 망명했다.
1920년 4월, 폴란드와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여 즈브루치 강을 양국 국경으로 확정했다. 이는 동부 갈리치아의 폴란드 편입을 의미했으며, 해당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파리 강화 회의와 신생 국제 연맹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1923년 3월 14일, 국제 연맹 이사회는 동부 갈리치아의 특수한 민족 상황을 고려하여 폴란드의 영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 결정 이후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해산했다.
3. 1. 배경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주장한 영토는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54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민족 | 인구 수 | 비율 |
---|---|---|
우크라이나인 | 3,291,000명 | 약 60% |
폴란드인 | 1,351,000명 | 약 25% |
유대인 | 660,000명 | 약 12% |
기타 (루신인, 독일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로마니인, 아르메니아인 등) | - | 나머지 |
이 지역은 대부분 농촌 지역이었으며, 도시와 마을에는 주로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거주했고 농촌 지역은 우크라이나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러한 인구 분포는 특히 리비우에서 두드러졌는데, 이 지역 44개 행정 구역 중 리비우 주만이 유일하게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6] 리비우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수도로 선포한 가장 큰 도시였지만, 실제 인구 구성은 폴란드인이 49.4%로 가장 많았고 우크라이나인은 19.9%에 불과했다.[7] 게다가 폴란드는 리비우를 자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8]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드루호비치와 보리슬라프 근처, 상부 드네스트르강 유역의 유전이 중요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교통 인프라는 부족하여 러시아 지배 하의 우크라이나나 루마니아로 연결되는 철도는 몇 개 없었다. 주요 노선으로는 리비우에서 상부 스치르강 유역의 브로디로 이어지는 노선, 테르노필에서 포돌리아의 프로스쿠리우로 이어지는 피드볼로치스크를 경유하는 노선, 콜로미야에서 부코비나의 체르니우치로 이어지는 프루트강을 따라가는 노선 등이 있었다.
3. 2. 독립과 존립을 위한 투쟁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1918년 11월 1일에 독립을 선포했다.[9] 본래 우크라이나 국민 라다(오스트리아 의회 양원과 갈리치아, 부코비나 지방 의회의 우크라이나 대표들로 구성)는 11월 3일에 독립을 선포할 계획이었으나, 폴란드 청산 위원회가 크라쿠프에서 리비우로 이동하려 한다는 소식에 날짜를 앞당겼다.[10]독립 선포 직후, 리비우에서는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 당시 리비우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던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이 폴란드인이 아닌 국가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몇 주 후 리비우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이는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11월 9일, 폴란드군은 드로호비치 유전을 기습하려 했으나 수적 열세로 우크라이나군에 격퇴되었다.[11] 이후 폴란드군은 리비우와 도시를 폴란드 본토와 연결하는 철도 주변의 좁은 지역만을 통제했고, 동부 갈리치아의 나머지 지역은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새로 수립된 서우크라이나 국가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보였으며, 이를 "총검, 곤봉, 도끼에 의한" 통치로 간주했다.[12] 폴란드계 관리들은 집단으로 사직하여 공화국의 행정 운영 능력을 약화시켰다. 폴란드인들은 리비우뿐만 아니라 드로호비치, 페레미실, 삼비르, 야로슬라프 등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13] 이로 인해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영토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폴란드의 공세가 용이해졌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서쪽에서는 두 개의 작은 국가가 독립을 선언했다.[14] 동부 렘코 지역의 코만차를 중심으로 한 30개 렘코 마을 연합체인 코만차 공화국은 1918년 11월 4일부터 1919년 1월 23일까지 존재했다. 친우크라이나 성향으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통합을 계획했으나 폴란드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또한, 1918년 12월 5일에는 플로린카 마을을 중심으로 렘코-루신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루신인 정서가 강했으며,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연합에 반대하고 대신 러시아와의 통일을 추구했다.[15]
서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간의 통합 논의는 1918년 12월 1일에 시작되어, 1919년 1월 22일 통일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서부주(Western Oblast)로 불리게 되었다.[9][16] 그러나 이는 대부분 상징적인 행위에 그쳤다.[17] 서우크라이나는 법적, 사회적, 정치적 전통이 달랐기 때문에 통일된 우크라이나 내에서 자치권을 유지했으며,[17] 자체적인 우크라이나 갈리시아군과 정부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공식적인 연합에도 불구하고, 서우크라이나 공화국은 폴란드와의 전쟁에 집중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소비에트 및 러시아 백군과 별개의 전쟁을 치렀다.[17]
서우크라이나 지도부와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 간의 관계는 때때로 긴장 상태였다. 서우크라이나 지도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으며,[18] 오스트리아 의회 시스템에 익숙했던 그들은 키예프 정부의 사회주의적 태도를 경계하고 동부의 사회적 불안이 갈리치아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19] 군대 역시 서우크라이나 갈리시아군은 비교적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반면,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군은 규율이 부족하고 포그롬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어 서우크라이나 측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20][21] 키예프 군대의 규율 부족과 장교들의 불복종은 갈리치아 대표단에게 충격을 주었다.[19]
서우크라이나의 민족 운동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만큼 강력하여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중 4만 명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나 열정을 얻지는 못했다. 일반 주민들은 대체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며, 남성들은 종종 군 복무를 피하려 했다.[22] 20세기 초 갈리치아 지방 인구의 60%는 우크라이나인이었지만, 대부분 농촌에 거주했고 도시 지역은 주로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수도가 된 리비우는 폴란드인에게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
결국 1919년 7월 17일, 폴란드군이 갈리치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영토 내의 카미아네츠-포돌스키로 망명해야 했다. 망명 정부는 처음에는 키예프 정부와 협력했지만, 폴란드에 대한 입장 차이로 관계는 악화되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폴란드를 주적으로 간주한 반면, 키예프 정부는 폴란드를 대(對)러시아 전쟁의 잠재적 동맹으로 보았다. 키예프 정부가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하자,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비밀리에 소련군과 접촉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안톤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과 접촉하여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자치권 보장을 대가로 군사 동맹을 맺었다. 데니킨은 강력한 군대로 알려진 서우크라이나 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키예프 정부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려 했다. 키예프 정부는 이에 격렬히 항의했지만,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백군을 이용해 소비에트 적군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의 협력은 불가능해졌고,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빈으로 다시 망명했다.
1920년 4월, 폴란드와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여 즈브루치 강을 양국 국경으로 확정했다. 이는 동부 갈리치아의 폴란드 편입을 의미했으며, 해당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파리 강화 회의와 신생 국제 연맹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1923년 3월 14일 국제 연맹 이사회는 동부 갈리치아의 특수한 민족 상황을 고려하여 폴란드의 영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 결정 이후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해산했다.
3. 3. 망명과 외교
1919년 7월까지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폴란드군이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서우크라이나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7] 패배한 군대의 일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피난했으며, 약 5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나머지 군대는 1919년 7월 16일 즈브루치 강을 건너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영토로 이동하여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같은 달,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카미아네츠-포딜스키이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23] 그러나 망명 정부와 키예프의 총재 정부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는 양측의 외교적 우선순위가 달랐기 때문인데, 서우크라이나 측은 폴란드를 주요 적으로 간주하고 러시아를 잠재적 동맹국으로 여긴 반면, 키예프의 시몬 페트류라는 폴란드를 볼셰비키 러시아에 맞서는 잠재적 동맹국으로 보았다. 키예프 정부가 폴란드와 외교 협상을 진행하자,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이에 반발하여 소비에트 제12군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소비에트 측이 제시한 동맹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협상은 결렬되었다.

1919년 8월, 서우크라이나 국무장관 코스트 레비츠키는 안톤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에게 러시아 국가 내 자치권 보장을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다.[44] 백군 내부에서는 갈리시아인들의 반러시아 감정에 대한 우려와 폴란드와의 관계 악화 가능성 때문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동시에 잘 훈련된 갈리시아 군대를 확보하여 키예프 정부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18] 결국 1919년 11월, 우크라이나 갈리시아군은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백군과 휴전을 맺고 그 지휘 하에 들어갔다.
서우크라이나 대통령 예브헨 페트루셰비치는 키예프 총재 정부와의 회담에서 백군과의 동맹이 결국 패배할 백군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서방 연합국의 지지를 얻어 향후 승리할 소비에트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몬 페트류라는 이러한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페트루셰비치는 더 이상 키예프 정부와 협력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1919년 11월 15일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44] 이후 키예프 총재 정부는 12월 2일 폴란드 측에 서우크라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24] 이에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12월 20일 통일법의 일방적 폐지를 선언하며 키예프 정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24][25] 망명 정부는 1920년 초, 다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4] 이후 서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국제 사회의 인정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바르샤바 조약과 국제 연맹의 결정으로 동부 갈리치아가 폴란드 영토로 편입되면서 외교적 노선은 실패로 돌아갔다.
3. 3. 1. 바르텔레미 선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화되자, 연합국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연합국은 폴란드, 백러시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군대를 포함하는 반볼셰비키 공동 전선을 형성하려 했으나, 1918년 11월 1일 리비우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 간 적대 행위가 발생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연합국은 폴란드와 서우크라이나 양측에 합의를 모색하고 연합국이 제안하는 경계선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 장군 루이 프랑셰 드스페레이의 명령에 따라, 마리 조제프 바르텔레미 장군이 이끄는 평화 유지 임무단이 1919년 1월 19일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임무단은 먼저 폴란드 측 입장을 파악했는데, 폴란드는 부크강-쉬비차 강 선을 경계로 제안했다. 이후 리비우로 이동하여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만났고, 우크라이나 측은 산강 선을 미래의 경계선으로 주장했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바르텔레미 장군은 1919년 1월 28일, 자신의 중재안인 바르텔레미 선을 제시했다. 이 제안에 따른 휴전선은 다음과 같았다.
- 부크강을 따라 카미안카-부즈카까지 이어짐.
- 이후 옛 행정 경계를 따라 비브르카까지 이어짐.
- 비브르카-미콜라이우 철도 노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 (미콜라이우는 우크라이나 측에 남김).
- 리비우-스트리이 철도 노선을 따라 동카르파티아의 분쟁 지역 경계까지 이어짐.
- 스트리이-라보치네 철도 노선은 우크라이나 측에 남겨짐.[26]
이 경계선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적용될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27] 폴란드 측은 이 제안을 수용했으나,[28][29] 우크라이나 대표단은 기존의 '산강 선' 주장을 고수하며 거부했다.
우크라이나의 반대로 인해 연합국은 다시 중재에 나섰다. 1919년 2월 15일, 조제프 노울렌스를 위원장으로 하는 '폴란드 연합 위원회' 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소위원회에는 조제프 바르텔레미(프랑스), 애드리안 카턴 드 비어트(영국), 로버트 하워드 로드(미국), 조반니 스타빌레(이탈리아) 등이 참여했다.[30]
소위원회는 1919년 2월 15일에 새로운 휴전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이 협약은 바르텔레미 선을 따르는 군사적 휴전을 제안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협약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보리슬라프-드로호비치 유전 지대에 관한 추가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유전 지대는 휴전선 상 폴란드 측에 남겨지지만 국제 위원회의 관리 하에 두며, 생산되는 석유의 50%를 우크라이나 측에 이전하도록 했다. 양측은 생산량을 기록하고 석유 대금을 지불할 권리만 가졌다. 이 제안은 유전 지대에서 연합국의 이익을 확보하고 중립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제안 당시 유전 지역은 우크라이나 갈리시아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에게 이 휴전 조건은 불리했지만, 폴란드와 타협하고 연합국으로부터 국가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31]
위원회는 1919년 2월 24일 휴전 조약 체결에 성공했고, 2월 28일 양측에 최종 제안을 전달했다. 그러나 서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경계선 합의 실패로 인해 3월 2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적대 행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3. 3. 2. 바르샤바 조약 (1920)
키예프의 총재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예브헨 페트루셰비치가 이끄는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1919년 11월 15일 빈으로 망명했다.[44] 이후 키예프 정부는 폴란드와의 협상을 진행했다.1920년 4월, 폴란드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시몬 페틀류라는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즈브루치 강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간의 새로운 국경으로 설정했다.[32] 조약에 따라 폴란드는 동갈리치아를 포함하여 볼린 현, 홀름 현 등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제2조). 그 대가로 폴란드는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제1조).[32]
이 조약은 사실상 동갈리치아 지방이 폴란드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해당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빈으로 망명한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고 강하게 반발했다.[24][25]
3. 3. 3. 자치 지위
서우크라이나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국제 연맹은 1921년 2월 23일 동부 갈리치아가 폴란드 영토 밖에 있으며, 폴란드는 해당 지역에 대한 행정 통제 권한이 없고 단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동부 갈리치아의 최종적인 지위는 국제 연맹의 대사 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수많은 추가 협상과 국제 연맹 이사회에서의 논의 끝에, 1923년 3월 14일 동부 갈리치아를 폴란드에 통합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폴란드가 동부 갈리치아의 민족학적 조건이 자치 상태를 보장받을 만하다는 점을 인정함을 고려하여" 내려졌다.[33] 이 결정 다음 날인 3월 15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는 해산했다.[34] 그러나 폴란드 정부는 동부 갈리치아에 약속했던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4. 정부
1918년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통치 지역에서 입법 기구 역할을 할 우크라이나 국민 의회 의원 150명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했다.[39]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의회 의원이자 새로 선출된 국민 의회의 의장인 예브헨 페트루셰비치는 자동으로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39]
대통령 아래에는 행정부 역할을 하는 국무원이 있었다. 국무원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39]
직책 | 이름 |
---|---|
국무원장 겸 재무부 장관 | 코스트 레비츠키 |
무력 사령관 | 드미트로 비토프스키 |
내무부 장관 | 론힌 체헬스키 |
교육 및 종교부 장관 | 올렉산데르 바르빈스키 |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 민주당과 그보다 작은 경쟁 정당인 우크라이나 급진당이 주도하는 양당 정치 체제를 가졌다.[42] 집권당인 우크라이나 민주당은 정부가 광범위한 국민 연합을 대표하도록 하기 위해 소수 정당에도 일부 의석을 할당했다.[42]
우크라이나 국민 의회 의원들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비율 |
---|---|---|
사회적 배경[40] | 성직자 가문 출신 | 57.1% |
농민 가구 출신 | 23.8% | |
도시 출신 | 4.8% | |
소귀족 출신 | 2.4% | |
직업적 배경[41] | 변호사 | 약 30% |
교사 | 약 22% | |
농부 | 약 14% | |
사제 | 약 13% | |
공무원 | 약 5% | |
학력[41] | 철학 박사 학위 소지자 (주로 법학) | 약 28% |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는 약 9개월 동안 약 4백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을 통치했다. 수도는 처음에는 리비우였으나, 11월 21일 폴란드군에게 점령당한 후 12월 말까지 테르노필, 1919년 5월 26일까지는 스타니슬라비우(현재의 이바노-프란키우스크)로 이전되었다.[42]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 전문가를 고용하여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정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군(county) 및 지역 사회의 경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와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며, 군 법원, 지역 법원, 지방 법원 등 사법 체계와 학교, 우편 서비스, 전신 및 철도 등 공공 서비스도 이전처럼 계속 운영되었다.[42] 오스트리아 법률이 임시적으로 효력을 유지했으며,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세금 징수 시스템을 유지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빈곤으로 세금 징수는 최소화되었다. 정부 수입의 대부분은 석유 및 소금 수출에서 나왔다.[42]
공화국에서 발행된 100종의 우표 중 단 두 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제작된 기존 우표에 오버프린트한 것이었다.[43]
사회 정책 면에서는, 사유 토지 소유주로부터 광대한 영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는 제한적인 경우였고, 기본적으로 사유 재산권은 존중되었으며 토지 몰수는 금지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키예프 기반 우크라이나 정부 정책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42]
군사적으로는 영토를 12개의 군사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 사령관이 병력 징집을 담당했다. 정부는 1919년 봄에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으나, 군수품 부족으로 실제 전투 준비가 된 병력은 4만 명에 불과했다.
전반적으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정부는 질서 정연하고 잘 조직된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옛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수립된 우크라이나 정부의 혼란스러운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42]
5. 민족 정책과 민족 간 관계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지역을 통치했으며, 정부는 이러한 다민족 상황을 관리하고자 노력했다. 1918년 11월에는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문제에 대한 각료급 국무장관직을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다.[17] 1919년 2월 15일에는 우크라이나어를 국가 언어로 지정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나, 동시에 소수 민족이 자신들의 언어로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했다.[42]
그러나 실제 민족 간 관계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특히 공화국 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폴란드인과의 관계는 수립 초기부터 적대적이었으며, 이는 결국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지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통치에 대해 전반적으로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인과의 관계 참조)
반면, 유대인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편이었다. 당시 폴란드 민족주의 진영에서 나타났던 반유대주의와 달리,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대인의 문화적·정치적 자치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60] 이러한 정책은 유대인 공동체 일부의 지지를 얻었으며, 일부 유대인들은 공화국의 행정 및 군사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유대인과의 관계 참조)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 정책과 그 실제 적용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흐리차크는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반폴란드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나 반유대주의로 나아가지는 않았으며, 소수 민족에 대한 대규모 탄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45][42] 반면, 카타르지나 히벨 등 다른 연구자들은 공식적인 권리 보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양측(서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모두 소수 민족의 권리를 침해하고 이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하며,[46] 특히 폴란드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47]
5. 1. 폴란드인과의 관계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마자 리비우에서는 폴란드계 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리비우 인구의 절반은 폴란드인이었으며, 이들은 폴란드인이 아닌 국가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10] 몇 주 후 리비우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로부터 지원을 받았다.폴란드인들은 새로 수립된 서우크라이나 국가에 대해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를 "총검, 곤봉, 도끼에 의한" 통치로 간주했다.[12] 폴란드계 공무원들은 집단으로 사임하여 공화국의 행정 운영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폴란드인들은 도시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리비우뿐만 아니라 드로호비치, 페레미실, 삼비르, 야로슬라프 등지에서도 우크라이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13] 이로 인해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영토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폴란드 역사가 라파우 가루바는 서우크라이나 당국이 폴란드인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다고 기록했다.[47] 1918년 11월 1일 이후, 여러 폴란드 단체의 회원들이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체포되거나 구금되었으며, 우크라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공무원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48] 11월 6일, 우크라이나 당국은 리비우에서 폴란드 언론과 출판물을 금지하고 인쇄기를 파괴했다.[49] 이는 폴란드 측이 자신들의 통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출판물을 금지한 것과 유사한 조치였다.[50] 우크라이나 당국은 군인과 무장 트럭을 거리에 배치하여 폴란드인들의 시위를 위협하고 해산시키려 했다.[51]
폴란드 민간인과 군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우크라이나 최고 사령부는 우크라이나군에 대한 공격이나 사격에 가담한 폴란드 민간인을 즉결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52] 실제로 졸치우에서는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17명의 폴란드인이 처형되었고,[53] 브류호비치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작업 명령을 거부한 폴란드 철도 노동자들이 처형되었다.[54] 1919년 5월, 리비우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 유제프 빌체프스키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 중이던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우크라이나인에 의한 폴란드 사제와 민간인의 잔혹한 살해가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도움을 요청했다.[55]
이에 맞서 많은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당국에 협조하지 않고 사보타주를 벌이는 지하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50] 이들은 현장 작업을 중단시키고, 수확물을 파괴했으며, 기계를 고의로 파손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해 우크라이나 당국은 대량 처형, 군사 재판, 구금 센터 설치 등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일부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구금 센터에 수용되었다.[56] 이 수용소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난방 시설이 없는 나무 막사, 부족한 침구와 의료 서비스 등으로 인해 장티푸스가 만연했고 사망률이 높았다. 코시우 수용소에서는 약 900명, 미쿨린치에서는 300명에서 600명, 콜로미야에서는 100명, 베레자니에서는 영하 -20°C의 기온 속 난방 없는 막사 때문에 16명에서 4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용소에서는 폴란드인 수감자들에 대한 강도, 구타, 고문, 총격 사건도 보고되었다.[57]
역사가 크리스토퍼 믹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통제 하의 폴란드인을 대하는 방식이 폴란드 정부가 통제 하의 우크라이나인을 대하는 방식보다 반드시 더 나빴다고 보기는 어렵다.[50] 그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폴란드어 사용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폴란드 당국의 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58] 다만 믹은 리비우 포위 공격 당시 우크라이나 측이 도시에 대한 물품 공급을 차단하고 상수도 시설을 방해하려 했으며, 격렬한 포격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50]
한편,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흐리차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오스트리아에서 발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반폴란드적이기는 했으나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나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45] 그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민족 소수 집단에 대한 대규모 탄압 사례는 없었으며, 이는 폴란드 정부와의 차이점이라고 주장했다.[42] 반면 카타르지나 히벨은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모두 공식적으로는 민족 소수 집단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양측 모두 이를 위반하고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고 기록했다.[46]
1920년 초 폴란드 외무부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리비우 대주교 유제프 빌체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정부 하에서 벌어진 반폴란드 폭력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12]
5. 2. 유대인과의 관계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흐리차크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발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반폴란드적이었지만 "매우 외국인 혐오적"이지도 않고 반유대주의적이지도 않았다.[45] 1918년 11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는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문제에 대한 각료급 국무장관직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17] 흐리차크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민족 소수 집단에 대한 대규모 탄압 사례는 없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폴란드 정부와 구별되는 점이라고 평가했다.[42] 반면, 카타르지나 히벨은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모두 공식적으로는 민족 소수 집단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위반하고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제5열처럼 취급했다고 지적했다.[46] 1919년 2월 15일에는 우크라이나어를 국가 언어로 지정하는 법이 통과되었으나, 이 법은 민족 소수 집단이 자신들의 언어로 정부와 소통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폴란드인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간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던 반면, 공화국과 유대인 시민들 간의 관계는 대체로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이었다. 유대인 공동체와 폴란드 공동체 사이에는 뿌리 깊은 경쟁 관계가 존재했으며, 특히 폴란드 국민 민주당이 주도하는 반유대주의는 폴란드 국가 이데올로기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폴란드 독립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여겼다. 폴란드 당국이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자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유대인의 문화적 및 정치적 자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대인의 문화 및 국가 자치를 보장하고 유대인 공동체에 자치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1918년 12월에는 중앙 유대 민족 협의회 설립을 지원하여, 이 협의회가 우크라이나 정부 및 서방 연합국과의 관계에서 유대인의 이익을 대표하도록 승인했다.[60]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각료 회의는 유대인 학교를 위해 이디시어 교과서와 시각 자료 구입을 지원했으며, 르비우에서 폴란드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지원했다. 우크라이나 언론 역시 서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유대인 시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및 이디시어 학교, 문화 기관, 출판 활동은 아무런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60]
공화국의 인구 구성을 반영해, 국민 의회 의석의 약 3분의 1은 소수 민족(폴란드인, 유대인, 슬로바키아인 등)에게 배정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선거를 보이콧했지만, 유대인들은 폴란드-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참여하여 전체 대표단의 약 10%를 차지했다. 1919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우크라이나 농민과 군인들에 의한 유대인 대상의 국지적인 공격과 강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이는 폴란드인들의 유사 행위에 비해 훨씬 빈도가 낮고 덜 잔혹했다.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했으며, 가해자들을 투옥하거나 심지어 처형하기도 했다.[60] 정부는 또한 폴란드-우크라이나 분쟁 동안 유대인들의 중립 선언을 존중했다. 예브헨 페트루셰비치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하거나 우크라이나 군사 활동에 기여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금지되었다.[21] 서우크라이나 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유대인 상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도 했다.[60]
서우크라이나 정부의 이러한 우호적인 태도는 유대인 공동체의 많은 구성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유대인 정치 단체들은 폴란드-우크라이나 투쟁에서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지만, 많은 유대인 개개인은 폴란드와의 갈등 속에서 서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하거나 동정했다.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유대인 장교들은 서우크라이나 군대에 합류했으며, 유대인 판사, 변호사, 의사, 철도 직원 등은 서우크라이나 공무원으로 활동했다.[59] 1918년 11월 이후, 서우크라이나 정부에 충성을 거부한 폴란드계 공무원들이 대거 사임하거나 해고되면서 발생한 공백은 우크라이나 국가를 기꺼이 지원하려는 많은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유대인들은 테르노필, 스타니슬라비우, 콜로미야 등지의 법원에서 판사 및 법률 고문으로 활동했다.[60] 유대인들은 자체 경찰 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고,[61] 일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역 유대인 민병대에게 치안 유지를 맡기기도 했다. 삼비르와 라데히우 지역에서는 경찰력의 약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60] 유대인들은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대 내에 자체 대대를 편성했으며,[62] 유대인 청년들은 서우크라이나 군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했다.[60] 서우크라이나 군대와 협력하고 복무한 유대인들 중 다수는 시온주의자들이었다.[41] 전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서우크라이나 정부의 모든 부서에 참여한 비(非)우크라이나 민족 중 가장 큰 집단을 형성했다.[60]
서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취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지식인과 군 장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민족 간 관용과 협력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60] 갈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인 이러한 우호적인 태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총재국의 정책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6. 경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의 행정 체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했다.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 전문가를 고용하고, 기존의 행정 구역과 법률 체계를 잠정적으로 유지했다. 학교, 우편, 전신, 철도 등 공공 서비스도 계속 운영되었다.[42]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빈곤 때문에 세금 징수는 원활하지 않았고, 정부 수입의 상당 부분은 드루호비치와 보리슬라프 근처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와 소금 수출에 의존해야 했다.[42] 이 유전 지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였다.
토지 문제에 있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동부 갈리시아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했던 대규모 폴란드 지주들의[44] 사유지를 몰수하여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극히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유 재산권을 근본적인 권리로 인정하고 토지 몰수를 금지했는데, 이는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정부가 추진했던 사회주의적 정책과는 다른 노선이었다.[42]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의 통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통되던 지폐에 우크라이나 흐리우냐 액면가를 덧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1914년부터 일부 도시에서는 지역 비상 화폐인 노트게르트(Notgeld)를 자체적으로 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우표 역시 대부분 기존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우표에 덧인쇄하는 방식으로 발행되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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