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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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는 183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조선 선교사였다. 1864년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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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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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다른 이름 | 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
직업 | 사제, 순교자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축일 | 9월 20일 |
생애 | |
출생 | 1838년 2월 28일 |
출생지 | 프랑스 디종 샬롱쉬르손 |
사망 | 1866년 3월 7일 |
사망지 | 서울 새남터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서품 및 시성 |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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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38년 프랑스 디종 교구의 샬롱쉬르손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58년 생 쉴피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186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64년 사제 서품과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행을 자원했으며 순교를 갈망했다.
1865년 5월, 볼리외 사제, 도리 사제, 위앵 사제 등과 함께 충청도 내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정의배의 집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고 밤을 이용해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펼쳤다.
1866년 2월 병인박해가 시작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사제는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체포를 준비했다. 2월 27일 밀고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조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각오했다고 밝혔다. 고국 송환 제의를 거절하고 순교 의지를 확고히 했다.
1866년 3월 6일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이튿날인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함께 순교하였다. 여러 형벌을 겪은 후 참수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사제 서품
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Just Ranfer de Bretenièresfra)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부르고뉴 디종 교구 소속의 샤롱=쉬르=소뉴(Chalon-sur-Saône)에 있는 외조부모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 부부의 장남이었으며, 부르고뉴 의회 판사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는 신심이 깊은 천주교 신자들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받침했다. 가족은 브르트니에르 성과 디종의 생프랑수아 드 살 별장에 나뉘어 거주했다.어린 시절, 쥐스트(브르트니에르의 아명)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으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선교사의 삶에 매료된 후로는 스스로 피로, 더위, 갈증 등을 견디는 훈련을 하며 의지를 다졌다. 여섯 살 때 동생과 함께 성 정원에서 놀던 중, 땅에 구멍을 파다가 갑자기 자신들 쪽으로 오는 중국인들이 보인다고 소리쳤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2]
1856년 리옹에서 바칼로레아와 문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해외 선교사를 희망했던 그는 고해 신부와 부모의 권유로 파리 근교 이시(Issy-les-Moulineaux)에 있는 생 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2년 동안 그곳에서 수학하며 오르간 연주자와 간호사 역할도 맡았다. 당시 한 동료 학생은 그의 외모와 인품에 대해 "키 큰 모습은 완벽한 건강과 활력을 보여주었고, 창백하지만 활기찬 기질을 드러냈다. 물결치는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인 높은 이마는 귀족 출신임을 말해주었으나, 가장 큰 매력은 한없이 상냥하면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빛을 담은 그의 눈에 있었다. 그의 솔직함과 타고난 겸손함은 곧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불러일으켰다"고 기록했다.[3]
1861년 7월 25일, 단발식을 받고 파리 백(Bac) 거리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기도와 학업, 노동에 매진했으며, 1864년 5월 21일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장상에게 "제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나라입니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표했고, 첫 미사에서는 순교의 특별한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순교의 은총을 저에게 구해주십시오"라고 썼으며, 조선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자 "순교자의 땅, 한국 만세! (Vive la Corée, terre des martyrs !fra)"라고 외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2. 2. 조선 입국과 선교 활동
1865년 5월,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위앵 신부 등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를 떠나 홍콩, 상하이, 랴오둥 등을 거쳐 긴 여정 끝에 충청도 내포 해안을 통해 비밀리에 조선 땅을 밟았다.[1][2] 이는 1864년 7월 19일 마르세유를 출발한 지 약 10개월 만이었다.조선에 도착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먼저 한양에 있는 베르뇌 주교와 연락하려 했으나, 당시 베르뇌 주교는 화재로 인해 잠시 내포 지방으로 피신해 있던 다블뤼 부주교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다블뤼 부주교의 도움으로 베르뇌 주교를 만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한양으로 이동하여 천주교 신자 공동체의 회장인 정의배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1]
정의배의 집에서 그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베르뇌 주교를 도와 선교 활동에 나섰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신변 안전을 위해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집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상복을 입고 다녔으며, 주로 밤에만 외출하며 조심스럽게 전교 활동을 펼쳤다.[1][2]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입국 초기 약 40여 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고, 80여 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1]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을 보여, 조선에 온 지 6개월 만에 한국어로 설교하고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2] 1년이 지나자 그는 더욱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며 신자들의 고해를 듣고, 새로 입교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혼인성사, 견진성사, 병자성사 등을 집전하며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다.[2] 그의 헌신적인 활동과 신자들의 열의가 더해져, 때로는 150km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도 신자들이 세례를 받거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2]
2. 3. 병인박해와 순교
1866년 2월 병인박해가 발발하였다.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지방에 있는 동료 성직자들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고 체포를 각오하며 마지막 미사를 집전했다.2월 27일,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는 순순히 포도청으로 연행되어 수감되었고, 다음 날 옥사장에게 "저는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이로 인해 베르뇌 주교가 갇혀 있던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흥선대원군 치하의 관리들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심문은 거의 하지 않고 주로 형벌과 고문을 가했다. 그는 감옥에서 베르뇌 주교, 볼뤼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정강이와 발을 삼각형 막대로 때리는 고문(시엔눔, shien-noum)을 받기도 했다.
3월 5일 심문 중, 관리들이 "차마 죽일 수 없어 네 고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떻겠느냐?"라고 회유하자, 신부는 "저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의 풍습이 익어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죽든 살든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순교의 의지를 굳혔다.
1866년 3월 6일,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3월 8일, 새남터의 사형장으로 압송되었다.
사형장에서 그는 옷이 벗겨지고 양쪽 귀에 화살이 꽂혔으며, 팔을 뒤로 묶인 채 막대에 꿰여 군중에게 보여지는 형벌을 당했다. 또한 주뢰를 틀리는 고문도 받았다. 심한 갈증으로 물을 청했으나, 한 병졸이 주려던 물을 다른 병졸이 "곧 죽을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하겠느냐?"라고 말하며 땅에 버렸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베르뇌 주교의 참수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 다음 차례가 되어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자세에서, 관리의 신호에 따라 망나니가 네댓 번 내리친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3. 시복 · 시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사제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6]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7]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이때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누 주교, 앙리 드리, 자크 샤스탕, 루이 볼뤼 신부 등 다른 한국의 순교자들도 함께 시성되었다.
4. 기념
- 고향인 샤롱쉬르소느에는 시의 대성당, 생피에르 교회, 생콤 교회, 시타델 예배당을 관할하는 생쥐스트드브르트니에르 구역이 있다.
- 샤롱쉬르소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쥐스트 드 브르트니에르 거리가 있다.
- 디종에는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거리가 있다.
- 디종 근교의 탈랑(Talant)에는 생쥐스트 교회가 있다.
- 코트도르의 쏘느 평원 구역에는 브르트니에르라는 이름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 프랑스 단일 스카우트(Scouts unitaires de France) 단체 중 하나로, 디종의 생쥐스트드브르트니에르 그룹이 있다.
- 캐나다 퀘벡주 몽마니 지역 자치체에는 생쥐스트드브르트니에르 시가 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0857 - RANFER DE BRETENIÈRES Just
https://irfa.paris/m[...]
2024-04-22
[2]
서적
近代殉教者の思想
ドン・ボスコ社
[3]
서적
近代殉教者の思想
ドン・ボスコ社
[4]
웹사이트
(제목 정보 없음)
http://newsaints.fai[...]
[5]
웹인용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 유해실
http://www.jeoldusan[...]
2015-01-11
[6]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11
[7]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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