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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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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의 예술가로, 뛰어난 그림과 시, 서예 실력으로 칭송받았다. 강릉에서 태어나 외가인 오죽헌에서 성장했으며, 유교적 가풍 속에서도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며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특히 아들 율곡 이이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2009년 대한민국 50,000원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와 가부장제를 강화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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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사임당
본명신인선
한글신사임당
한자申師任堂
로마자 표기Sin Saimdang
출생1504년 12월 5일
출생지조선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 복평촌
사망1551년 6월 20일
사망지조선 경기도 파주시 주내면 율곡촌
국적한국
가족평산 신씨
배우자이원수 (1522년 결혼 – 1551년)
자녀아들 5명 (이이 포함), 딸 3명
직업예술가, 서예가, 시인
인물 정보 (추가)
인선(仁善)
사임(師任), 사임당(師任堂), 인임당(姻姙堂), 임사재(姙師齊)
기타 정보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음.
가족 관계
아버지신명화
어머니용인 이씨
배우자이원수
아들이선, 이번, 율곡 이이, 이우 등 4남
매창 등 3녀
학문
종교유교(성리학)
영향 준 인물이이, 이매창, 이우
작품
주요 작품초충도, 수박과 들쥐, 매화도 등

2. 생애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과 학문을 배웠다. 아버지 신명화는 기묘사화에 연루된 후 관직을 단념하고 강릉 처가에 머물며 딸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사임당의 재능을 아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 시, 자수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고자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19세에 이원수와 혼인하였고, 남편과 시댁의 배려 속에서 결혼 후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강릉 친정과 파주 시댁, 한성 등을 오가며 활동했다. 아버지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으며, 슬하에 이이, 이매창, 이우 등 4남 3녀를 두었다. 자녀 교육에도 힘써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 다른 자녀들도 문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신사임당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예술가로서 시, 그림, 서예에 능통했으며, 특히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포도 그림, 산수화가 유명하다. 성리학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도 해박하였다. 동시대의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되기도 한다.

1551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후대에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이러한 이미지는 일제강점기박정희 정권 시기에 강조된 측면이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6] 당시 서양에서 유입된 '현모양처' 사상에 부합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국위 선양을 위한 위인 발굴 과정에서 세종대왕, 이순신 등과 함께 선정되어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현모양처로서의 인식이 강화되었다는 분석이다.[6] 최근에는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6]

50000원 지폐 앞면의 신사임당 초상


5000원 지폐 앞면의 이이 초상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어 2009년부터 발행되었다. 아들 이이5000원 지폐에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은 그의 9촌 조카이며,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신익희는 그의 14대 방손이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강릉 오죽헌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의 외가이자 생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7] 아버지는 평산 신씨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형제로는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중 둘째 딸이었다.[3] 스스로 지은 호 '사임당(師任堂)'은 주나라 문왕[8]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6]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조상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이며, 고조부 신개세종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9] 아버지 신명화는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41세의 나이로 한성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10] 당시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교류했으며,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등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던 친구들 틈에 있다가 함께 체포되어 나흘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장인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아버지 신명화는 한성의 본가와 강릉의 처가를 오가며 생활했으며, 이 때문에 사임당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17][12]

어머니 이씨는 남편 신명화가 과거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고,[13] 결혼 후에도 친정 부모와 함께 살며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녀들을 교육했다. 이씨 부인은 후에 효행과 정절을 인정받아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받고 강릉에 기념각이 세워졌다.[11]

사임당은 외할아버지 이사온에게 아들처럼 교육을 받으며[14] 성리학적 소양을 길렀고, 7세 때는 외할아버지로부터 부덕(婦德)과 소학, 대학, 가례 등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17] 또한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글을 일찍 깨우쳤으며,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차별 없이 성리학과 글씨, 그림을 가르쳤다. 사임당은 아버지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 경전 등을 배우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고, 특히 뛰어난 재능으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14] 이러한 교육 배경은 훗날 자녀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임당은 문학과 시뿐만 아니라 서예, 자수,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4] 특히 일곱 살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려 주변을 놀라게 했고,[14]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탁월했다.[15] 그의 그림과 글씨는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은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가볍게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라고 감탄했다.[17] 엄격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15]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의 남편감을 고를 때 가문이나 재력보다는 딸의 예술적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해 줄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18] 그는 지체 높은 가문에서는 새며느리의 그림 활동을 인정하기 어렵고,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는 살림에 쫓겨 재능을 펼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18] 이에 편모 슬하의 독자여서 시집살이가 덜하고, 처가살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원수를 사위로 선택했다.[18]

2. 2. 혼인과 가정생활

아버지 신명화는 사위감을 고를 때 가문이나 재력보다 딸 신사임당의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18] 그는 지체 높은 가문은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고, 너무 가난한 집안은 살림에 바빠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18] 편모 슬하의 독자였던 이원수를 사위로 선택했다. 이는 시집살이가 심하지 않고 친정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기 때문이다.[18] 당시 이원수는 관직이 없고 집안 형편도 어려웠으나, 신명화는 딸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우선시했다.

1522년(중종 17년) 8월 20일, 19세의 신사임당은 22세의 이원수와 혼인하였다.[18] 당시 풍습과 남편의 동의 하에 결혼 후에도 주로 강릉의 친정에서 생활했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치렀고, 이후 한성, 시댁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 등 남편의 거처에 따라 여러 곳을 오가며 살았다.[19] 한성과 강릉을 오가는 불편함 때문에 두 지역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대관령의 어느 산 언덕


신사임당과 이원수 사이에서는 4남 3녀가 태어났다. 셋째 아들 이이는 훗날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가 되었고, 넷째 아들 이우와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에 능했다.[20] 신사임당은 33세 때 이이를 낳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다.[11]

조선 시대의 엄격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신사임당은 비교적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21] 이는 아들이 없던 친정에서 주로 생활하며 남편 이원수의 이해와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21] 이원수는 아내의 재능을 인정하고 활동을 지지했으며, 부부간의 대화에도 열려 있었다고 전해진다.[21]

그러나 신사임당은 순종적인 아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편 이원수에게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며 10년간 별거를 제안하고 명산으로 보냈으나, 이원수가 금방 돌아오자 결단력이 부족하다며 나무랐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비구니가 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원수는 3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부부 사이는 다소 소원해졌으며, 남편의 외도와 축첩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임당은 친정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시댁인 파주와 친정 강릉을 오가며 어머니를 보살폈다. 1537년, 이이를 데리고 강릉 친정에서 한성으로 돌아가던 중 대관령 고개에서 멀리 보이는 고향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11]

>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 回首北村時一望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11]

> 산처럼 내고향 천리연마는

>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 경포대 앞에 한 줄기 바람

> 갈매기는 모래톺에 혜락 모이락

> 고깃배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가

>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22]

38세에는 한성부에 새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씨와 함께 살며 봉양했다.[11] 그러나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남편과의 관계 문제 속에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2. 3. 예술 활동과 성리학적 부덕



신사임당은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 신명화는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에 머물렀는데, 아들 딸 차별 없이 학문을 가르쳤고 특히 신사임당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아꼈다.[17]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신사임당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학의 기본 서적을 빠르게 익혔고,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도 해박하여 주변 사대부들을 놀라게 했다.[15][17] 7세 때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으로부터 여성의 덕목인 부덕(婦德)과 함께 소학, 대학, 가례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스스로 지은 호 '사임당(師任堂)'은 주나라 주 문왕의 어머니이자 현숙한 부인으로 칭송받는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8] 후대에 여성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당(堂)'을 붙여 부르게 되었으며,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으며,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14] 일곱 살 때 세종 시대의 유명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고, 외할아버지는 그림 재능을 알아보고 안견의 산수화를 교재 삼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도록 지원했다.[14][15]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명종대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은 그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며 어린 사임당의 작품에 감탄했다.[17]

조선 시대의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은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들 형제가 없었기에 결혼 후에도 남편 이원수의 동의를 얻어 시집살이 대신 친정(오죽헌)에서 상당 기간 생활할 수 있었던 점[21], 그리고 아버지 신명화가 딸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사위를 선택한 점[18] 등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재능을 인정하고 존중했으며, 사임당의 말에 귀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21]

그러나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당시의 성리학적 부인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남편 이원수에게 학문에 정진할 것을 촉구하며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해 10년간 별거를 제안했으나, 이원수가 약속을 어기고 돌아오자 결단력 없는 태도를 나무랐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원수는 결국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갔다. 또한, 남편이 세도가이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당숙 이기에게 의지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는 등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기도 했다.[2]

신사임당은 자신의 뛰어난 글이나 그림 실력을 함부로 뽐내지 않았다고 한다.[26] 잔치 자리에서 한 부인이 실수로 빌려 입은 옷에 국물을 쏟아 곤란해하자, 신사임당이 그에게 말했다.[26]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26]

부인이 옷을 벗어 주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어 치마의 얼룩진 부분에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싱싱한 잎사귀를 그려 넣어 얼룩을 가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그것을 팔아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26]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26]

이 일화처럼 신사임당은 뛰어난 그림 솜씨와 기지를 지녔으며, 그 그림은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한다.

신사임당 『초충도』(16세기 전반)


신사임당 『초충도』(16세기 전반)


신사임당 『초충도』(16세기 전반)


신사임당의 작품은 섬세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며, 풀, 벌레(초충도), 꽃, 나비, 난초, 포도, 물고기, 풍경 등을 주로 그렸다. 현재 약 40점의 수묵채색화가 전해지며, 실제로는 더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서예 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대 고위 관리들과 감식안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868년 강릉 부사는 신사임당의 작품을 보고 "사임당의 글씨는 사려 깊고, 고귀하고 우아하며, 고요하고 순수하며, 여인의 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했다.[2]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의 그림에 발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예술적 재능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막내아들 이우는 그림과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형 이이가 "내 아우가 학문에 힘썼다면 내가 따르지 못했을 것"[27]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닭들이 이우가 그린 벌레 그림을 진짜로 착각하고 쪼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큰딸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에 능해 '작은 신사임당'으로 불렸다.[27]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로서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이러한 이미지는 후대에 의해, 특히 일제강점기박정희 정권 시기에 강조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6] 당시 서양에서 유입된 '현모양처' 사상에 부합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국위 선양을 위한 위인 발굴 과정에서 세종대왕, 이순신 등과 함께 선정되어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현모양처로서의 인식이 강화되었다는 분석이다.[6]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재능과 주체적인 삶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6]

한국은행2009년 발행된 50000원 지폐의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초충도』는 아들 이이의 초상이 그려진 5000원 지폐의 뒷면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2. 4. 남편과의 갈등과 말년

유교적 규범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재능이 뛰어나도 결혼과 동시에 이를 드러내기 어려웠다.[21] 그러나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의 배려와 친정 중심의 생활 환경 덕분에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21][18]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재능을 인정하고 존중했지만,[21] 신사임당은 성리학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 시험 공부에 집중하라며 10년간 별거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약속을 어기고 금방 돌아오자, 결단력 부족을 나무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비구니가 되겠다고 압박하며 학문에 정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이원수는 결국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을 기대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23]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씨와 관계를 맺고 첩으로 삼으려 했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남편의 외도는 신사임당에게 큰 충격이었고,[24] 그녀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부부 관계는 냉각되었다. 한때 신사임당이 금강산에 들어갔다 온 일도 있었는데,[28] 이는 훗날 동인남인이이서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두고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24] 이원수가 공자, 증자, 주자 등의 사례를 들며 반박하려 했으나,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대응하며 남편의 재혼을 반대했다.[24][28] 특히 첩으로 들인 권씨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재차 당부했지만,[25]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부부 관계의 불화는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셋째 아들 이이는 평생 화목한 가정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았다.[29] 아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어, 신사임당이 병석에 눕자 외할아버지 사당에서 매일 어머니의 쾌유를 빌었다고 전해진다.

1551년 남편 이원수가 공무로 평안도에 가 있는 동안 신사임당의 병세는 위독해졌다.[31][32] 결국 같은 해 5월 17일, 한성부 자택에서 4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32] 사인은 심장 질환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아들 이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 끝에 한때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신사임당 사후, 이원수는 아내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첩 권씨를 집으로 들여와 함께 살았다.[25] 술을 좋아하고 방종한 성격의 권씨는 신사임당과 매우 대조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자녀들, 특히 이이는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일각에서는 이원수가 아내 신사임당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 평가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며, 주로 현모양처의 표본이자 뛰어난 예술가로 인식된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소양과 예술적 재능을 겸비하고 자녀 교육에 성공한 인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아들 이이서인노론 학파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가 되면서, 신사임당은 이상적인 어머니상이자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더욱 숭앙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송시열 등 후대 학자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는 더욱 강조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정권 시기에 국가적 필요에 의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부각되었다는 시각이 있다.[6] 2007년 한국은행이 신사임당을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면서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35]"을 이유로 들었으나, 일부 여성계에서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시대착오적이며 남성 중심적 사회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제기하며 반발하기도 했다.[35]

오늘날에는 신사임당을 단순히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기보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 가졌던 한계 속에서도 예술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36],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던[17][38] 인물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의 예술적 성취나 당시 사회 통념에 얽매이지 않았던 면모를 중심으로 다각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37][38]

3. 1. 긍정적 평가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 지식이 해박했으며, 자녀인 이이, 이우, 이매창을 대학자, 화가, 작가로 훌륭히 길러낸 점으로 인해 사후 높이 평가받았다. 당대의 문정왕후정난정 등이 부정적으로 평가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했다. 특히 아들 이이서인의 종주이자 노론의 학문적 뿌리가 되면서, 송시열, 윤증 등 후대 학자들에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되었다. 이이가 높은 관직에 오르면서 신사임당은 정경부인(정1품)으로 추증되기도 했다.[34]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에 능통하고 효심이 깊었던 신사임당은 문장, 바느질, 자수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한시회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로 평가받는다. 안견의 화풍 영향을 받은 그녀의 그림은 정교하고 섬세하며, 주로 산수, 포도, 풀, 벌레 등을 소재로 삼았다.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재능을 아끼고 지지하여, 신사임당이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자유로운 환경에서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 『초충도』(16세기 전반)

생전에도 신사임당은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되며 훌륭한 여성상이자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존경받았다. 사후에는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이를 길러낸 어머니로서 더욱 존숭받았다. 17세기 송시열은 그녀의 시와 글씨, 그림 등을 극찬하며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신사임당에 대한 국가적 존경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어머니와 아내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져 양반 가문의 여성 교육에서 중요한 본보기로 삼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특히 1960년대 제3공화국 시기에는 아들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이 국가적 위인으로 부각되면서 신사임당 역시 부덕의 상징으로 다시 조명되었다. 그녀의 시와 작품은 교과서에 실리고 위인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2007년 한국은행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35]"을 들어 신사임당을 50000원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했다. 일부 여성계에서는 이에 반발하기도 했으나[35], 정부 차원의 결정으로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도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상징이자, 봉건적 제약 속에서도 예술가로서 자신을 계발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인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36]

3. 2. 부정적 평가



신사임당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정난정을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로 추앙받으면서, 송시열, 윤증 등에 의해 신사임당 역시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격상되었다.[34]

1960년대 대한민국 제3공화국 시기에는 아들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이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신사임당 역시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다시 부각되었다. 국사, 국어, 미술 교과서에 그의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은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35]"고 설명하며 대한민국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여성계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문화미래 이프김신명숙 이사는 '오늘날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라면서 '화폐 인물 선정만큼은 절대로 여론조사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35] 호주제 폐지 시민모임의 고은광순 대표 역시 '기존 남성 중심 사회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며 '새 화폐에 들어갈 여성으론 유관순이 가장 합당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35] 이러한 비판은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과거의 유산이며, 남성 중심적 사회 가치관에 부합한다는 인식에 기반한다.[35]

신사임당이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 비평가는 '여성들은 지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역사로부터 외면당하고 평가절하되어 왔다. 교과서에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던 신사임당은 어떠한가. 신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예술가였지만 우리 역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을 강조한다.[37]'고 지적한다. 그는 신사임당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식들을 교육하였고, 남편에게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면서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신 효녀효부로 알려져 있다")이 신사임당 개인의 능력이나 삶보다는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서의 역할만을 부각한다고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여성은 이렇게 한정적인 역할만을 맡아 왔다.[37]'고 덧붙였다.

3. 3. 기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그의 14대 방손이다.

신사임당 사후, 그의 자녀들은 서모 권씨 부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33] 신사임당과 달리 권씨 부인은 행실 문제로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아들 이이가 가출하기도 했다.[33]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 지식이 해박했고, 자녀들을 대학자, 화가, 작가로 길러낸 점 때문에 사후 높이 평가받았다. 동시대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되며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받았다. 특히 아들 이이서인의 종주이자 노론의 학문적 뿌리가 되면서, 송시열, 윤증 등에 의해 국가적 위인으로 격상되었다. 송시열이이를 추앙하며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평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양반 가문 여성 교육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1960년대 제3공화국 시기에는 아들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이 국가적 영웅으로 부각되면서, 신사임당 역시 부덕의 상징으로 다시 조명받았다. 그의 시와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며 대한민국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했다.[35] 그러나 이 결정에 일부 여성계는 반발했다. 문화미래 이프지의 김신명숙 이사는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일본 식민 통치의 잔재라고 비판했으며,[35] 호주제폐지 시민모임의 고은광순 대표는 기존 남성 중심 사회의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을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며 유관순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35]

현대에 이르러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봉건적 제약 속에서도 시문, 그림, 글씨 등 예술가로서의 삶을 개척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36] 반면, '현모양처'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예술가로서의 면모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여성을 특정 역할에 한정시키는 데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즉, 그의 개인적 성취보다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지적이다.[37]

작가 김별아 등은 신사임당이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틀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8] 그 근거로 당시 사회 통념과 달리 친정에서 오래 머물며 부모를 봉양했고, 남편에게 순종하기보다 옳은 길로 이끌려 했으며, 자녀들 또한 부계보다 모계에 더 친밀감을 보였다는 점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해석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상에 묶을 수 없는,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자의식을 가진 여성으로 재평가하려는 시각을 보여준다.[38][17]

4. 작품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술가였다.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릴 정도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훗날 숙종, 송시열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의 그림에 발문을 남길 정도였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하여 '어머니가 그리워(思親)'와 같은 한시(漢詩)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특징이며, 주로 곤충, 꽃, 나비, 난초, 포도, 물고기, 풍경 등을 소재로 삼았다. 약 40점의 수묵채색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실제로는 더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서예 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대의 학자 어숙권은 그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과 풍경화가 안견의 작품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1868년 강릉 부사는 신사임당의 작품을 보고 "사임당의 글씨는 사려 깊고, 고귀하고 우아하며, 고요하고 순수하며, 여인의 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2]

신사임당은 뛰어난 글과 그림 실력을 가졌음에도 이를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6] 잔칫집에서 다른 부인이 실수로 빌려온 옷에 국물을 쏟자, 얼룩진 치마폭에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넣어 이를 팔아 새 옷 값을 마련하게 도왔다는 일화는 그의 재능과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다.[26]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결혼 후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쉽지 않았으나,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생활하며 아버지와 남편의 지지를 받아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그림을 벗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져, 막내아들 이우와 큰딸 이매창 역시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이우는 그림과 시에 모두 능했으며, 큰딸 매창은 '작은 신사임당'이라 불릴 정도로 시와 그림에 뛰어났다.[27]

현대에 이르러 신사임당의 예술적 업적은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한국은행은 2009년 발행된 50000원 지폐의 초상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그의 아들 율곡 이이5000원 지폐 앞면에, 신사임당의 대표작 중 하나인 《초충도》는 5000원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다.

한편,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부각된 배경에는 일제강점기박정희 정권 시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6]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와 국위 선양이라는 목적 아래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특정 방식으로 강조되면서, 예술가로서의 면모가 상대적으로 가려졌다는 지적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 신사임당의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업적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6]

4. 1. 시

신사임당은 뛰어난 화가이자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한시(漢詩)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시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 친정인 강릉을 떠나 서울의 시댁으로 가면서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 지은 시이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친정에 두고 떠나는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 〈사친(思親)〉
  • 어머니에 대한 깊은 효심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이다.


〈사친(思親)〉
원문번역문
千里家山萬疊峯천 리 먼 고향 산은 만 겹 봉우리로 막혔으니,
歸心長在夢魂中가고픈 마음은 오래도록 꿈 속에 있네.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 가에는 외로운 둥근 달이요,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이로다.
沙上白鷺恆聚山모랫벌엔 백로가 언제나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各西東파도 위엔 고깃배가 오락가락 떠다닌다.
何時重踏臨瀛路어느 때 강릉 땅을 다시 밟아서,
更著斑衣膝下縫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할꼬.


4. 2. 그림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하녀의 실수로 한 부인이 빌려 입고 온 새 옷에 국물이 엎질러지는 일이 있었다. 옷을 빌려 입었기에 난처해하는 부인을 보고 신사임당은 옷을 잠시 달라고 하여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26] 신사임당은 부인에게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6] 치마의 얼룩진 국물 자국은 신사임당의 붓끝에서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싱싱한 잎사귀 그림으로 변모했다. 신사임당은 그림이 완성된 치마를 부인에게 돌려주며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고, 부인은 그 그림 덕분에 비싼 값에 치마를 팔 수 있었다고 한다.[26]

신사임당은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에 친숙했으며 문장, 바느질, 자수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 특히 시문회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다양한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그림에서는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을 보이며,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묘사로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로 평가받는다. 주로 산수,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렸으며 인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자리도》(紫鯉圖)
  • 《산수도》(山水圖)
  • 《초충도》(草蟲圖) - 신사임당이 창시한 그림 장르로, 식물과 곤충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 《노안도》(蘆雁圖)


이러한 예술적 재능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막내아들 이우와 큰딸 이매창은 어머니를 닮아 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특히 이우는 묵화로 그린 풀벌레를 길에 던지자 닭들이 실제 벌레인 줄 알고 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며, 그의 형 이이는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이다."[27]라고 말하기도 했다. 큰딸 매창 역시 시와 그림에 능해 '작은 신사임당'이라 불렸다.[27]

신사임당의 예술적 업적은 현대에도 인정받아, 한국은행은 2009년 6월 23일 발행된 50000원 지폐의 초상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또한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초상화는 5000원 지폐 앞면에,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5000원 지폐 뒷면에 사용되었다.

5. 대한민국 50,000원권 지폐 도안 인물

2007년 한국은행대한민국5만 지폐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35]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이 "조선 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현모양처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교육 성과를 이룬 인물"로서, 여성과 문화예술인을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다고 밝혔다.[35][4] 또한 이를 통해 성 평등 인식을 높이고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4][45]

그러나 이러한 선정은 발표 이전부터 상당한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특히 여성계를 중심으로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강하며, 이는 가부장제적 시각을 강화하고 현대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35][40][44] 일부 여성단체들은 유관순 등 다른 여성 인물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41][39] 또한 선정 과정의 투명성 부족과[42], 아들인 이이가 이미 5천 지폐 인물이라는 점[42]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은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으며, 5만권은 2009년 6월부터 발행되었다.[4] 하지만 선정 과정과 결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5]

5. 1. 50,000원권 지폐 주인공 선정 과정

신사임당이 5만 지폐 도안 인물로 유력해지자 일부 여성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일었다.[39] 여성언론 문화미래 이프 등은 이러한 반대 움직임을 지지하고 지원하기도 했다.[39][40]

결과적으로 신사임당은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한국은행(BOK)은 2009년 6월 처음으로 5만 지폐를 발행했으며, 디자인은 2009년 2월 25일에 공개되었다. 지폐 앞면에는 신사임당의 초상과 그의 그림 ''묵포도''와 ''초충도수병''(국보 제595호)이, 뒷면에는 ''월매도''와 ''풍죽도''가 세로 방향으로 들어갔다.

한국은행은 신사임당 선정 이유로 "조선 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현모양처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교육 성과를 이룬 인물"이라는 점을 들며, 이 선택이 한국 사회의 성 평등 인식 제고와 교육 및 가족의 중요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5월 5일 발표했다.[4] 당시 5만권의 다른 후보 인물로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유관순이 있었다.[4]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러한 선정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비판했다.[5]

5. 1. 1. 신사임당 선정 반대 운동

한국은행이 2009년 발행 예정인 5만 고액권 화폐의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 선정이 유력해지자, 일부 여성계를 중심으로 반발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성언론 문화미래 이프 등은 '신사임당 주인공 도안 반대 안티 페스티벌 문화운동[39]'을 열고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다.

문화미래 이프는 10월 1일 발표한 긴급성명에서 새 화폐 인물로 여성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환영하면서도, "신사임당은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부계 혈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현모양처로서 지지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신사임당 선정에 반대하고 서명 운동을 통해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40]

이후 여러 여성단체들이 신사임당 선정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회장 김화중)는 2007년 10월 23일 성명을 통해 "개인의 성취가 공동체의 발전, 즉 타인의 삶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 시대에 던지고 있다"며 유관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 5개 단체도 같은 날 성명을 내어 "현재 거론되는 화폐 인물 중에는 유관순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다.[41] 이들 단체는 국민 여론 반영 부족과 선정 과정 미공개의 문제점도 지적하며, 한국은행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여성 인물 중 유관순 지지도가 가장 높았다는 점을 강조했다.[41]

신사임당 반대에 앞장섰던 문화미래 이프(대표 엄을순) 역시 신사임당을 최종 여성 후보로 올린 것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5만 지폐 후보로 신사임당과 장영실을 경합시켜 여성 선정 가능성을 절반으로 낮췄으며', '여성계의 반대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논란이 많은 신사임당을 최종 여성 후보로 올린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며 한국은행과 정부를 비판했다.[41] 문화미래 이프 사무국장 권희정 기자는 "여성계 인물을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한국은행이 신사임당을 장영실과 인위적으로 경합시킨 뒤 여성계 반대를 핑계로 무산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41]

10월 말, 문화미래 이프는 다른 나라의 화폐 여성 인물 사례(호주·노르웨이·스웨덴음악가소설가, 프랑스·이탈리아의 과학자, 미국이스라엘의 여성운동가와 정치가, 일본메이지 시대 소설가 등)를 들며, "세계적 흐름이 이러한데도 현모양처로 부각돼 있는 신사임당을 화폐 인물로 선정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적 망신이자 여성 인력 활용을 통한 국가 발전이라는 정책 방향과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39]

문화미래 이프는 대안으로 '새 시대 새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조선 시대 이전의 소서노, 선덕 여왕 등을, 조선 시대 인물로는 허난설헌, 만덕 등을, 근현대 인물로는 유관순나혜석 등을 제시하며[40], 화폐 초상 후보 인물 선정 경위의 투명한 공개와 여성계 의견 수렴을 촉구했다.[40]

일부 여성단체들은 논란이 신사임당 찬반으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다양한 여성 인물을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김은경 정책홍보부장은 "회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참에 한두 가지 이미지로 굳어진 여성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 작업과 다양한 여성 인물의 추가 발굴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전했다.[43]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유경희는 "일단 여성인물이 새 화폐에 반영되는 것은 찬성하지만, 되도록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인물이었으면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43]

반대 서명 운동은 문화미래 이프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프 측은 운동 시작 3일 만에 500명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프는 제4회 여성전용파티 '시청앞밤마실' 행사에서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여성의 정체성이 현모양처 안으로 포획되는 것에 대한 적극적 저지 운동[39]'을 추진했다. 한편, 서울대학교 정치학 교수 박효종은 선정 과정의 불투명성을 비판하기도 했다.[42]

결과적으로 신사임당은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한국은행은 2009년 6월 5만 지폐를 처음 발행했으며, 2009년 2월 25일 디자인을 공개했다. 앞면에는 신사임당의 초상과 그의 그림 ''묵포도''와 ''초충도수병''(국보 제595호)이, 뒷면에는 ''월매도''와 ''풍죽도''가 세로 방향으로 삽입되었다. 한국은행은 5월 5일, 신사임당 선정 이유로 "조선 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현모양처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교육 성과를 이룬 인물"이라는 점을 들며, 이 선택이 한국 사회의 성 평등 인식 제고와 교육 및 가족의 중요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했다.[4] (당시 5만권의 다른 후보로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유관순 등이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러한 선택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비판했다.[5]

5. 1. 2. 가부장제 정당화 논란

2007년 10월부터 12월까지 대한민국의 여성단체들은 신사임당을 5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0월 2일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서명운동을 진행했으며, 신사임당이 “부계 혈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현모양처로서 지지되고 있다”는 점을 주된 반대 이유로 들었다.[43][39] 2007년 10월 15일에는 새로운 화폐에 들어갈 여성 인물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이프 이사 김신명숙은 “새 화폐에 들어갈 여성 인물은 어머니나 아내 이전에 개인의 고유한 삶을 산 주체적인 여성,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와 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사)문화미래 이프 등은 신사임당이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으로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이율곡의 어머니요, 이원수의 아내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비판하며, ‘어머니·아내’만이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40][39] 또한, 훌륭한 현모양처이자 예술가로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될 경우, 현대 여성들이 겪는 이중 노동 구조를 정당화하고 모성 신화를 강화할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40][39]

이프 측은 외국에서는 음악가, 소설가, 여성운동가 등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사례를 들며, “현모양처로 부각돼 있는 신사임당을 화폐 인물로 선정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착오이자 국가적 망신이며, 여성 인력 활용을 통한 국가 발전이라는 정책 방향과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0] 대안으로는 소서노, 선덕여왕, 허난설헌, 만덕, 유관순, 나혜석 등 시대를 앞서간 주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했다.[40]

한국은행2009년 신사임당을 5만권 인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조선 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현모양처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교육 성과를 이룬 인물"이며, 이를 통해 성 평등 인식을 높이고 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4] (당시 다른 후보로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유관순 등이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러한 선정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비판했다.[5]

5. 2. 신사임당 50,000원권 지폐 도안 여론



2007년 11월 한국은행5만 지폐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한국은행은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35]"고 설명하며, 신사임당이 "조선 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현모양처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교육 성과를 이룬 인물"이라는 점을 선정 이유로 밝혔다. 또한 이 선택이 한국 사회의 성 평등 인식을 높이고 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4] (당시 다른 후보로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유관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도안 선정을 둘러싸고, 특히 여성계를 중심으로 상당한 반발과 비판 여론이 일었다.[44] 여성계는 신사임당 선정이 확정되기 전부터 반대 의사를 표명했으며, 선정 이후에도 항의가 이어졌다.

주요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비판: 문화미래 이프 김신명숙 이사는 "오늘날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라며 비판했다.[35] 엄을순 기자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이유로 화폐인물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많이 뒤처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모든 여성들에게 신사임당처럼 슈퍼우먼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44]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정책국장은 여성 최초 선정을 긍정하면서도 “선정 이유가 현모양처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주체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현대 여성의 역할 모델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42]
  • 현대 여성상 부적합 및 대안 부재: 호주제폐지 시민모임 고은광순 대표는 “기존 남성 중심 사회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며 유관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35] 권희정 이프 사무국장은 “‘어머니=여성’이라는 한 면만을 대표하기보다는 현대 여성들에게 긍정적 역할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여성 인물이 필요하다”며 소서노, 선덕여왕, 허난설헌, 만덕, 유관순, 나혜석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39]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류근창 회장 역시 “21세기 여성상으로 신사임당이 적합한지”, 아들 이이가 이미 화폐 도안 인물인데 중복 선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유관순 제외를 비판했다.[42]
  • 선정 과정의 문제: 서울대학교 박효종 교수는 “고액권 도안 인물 선정 과정이 인기투표처럼 진행된 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부분”이라며 선정 과정 비공개 방침을 비판했다.[42]
  • 교육열 조장 및 기타 비판: 한 주부는 신사임당 선정이 자녀 교육열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44] 또한, 신사임당이 당대나 미래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니라는 점,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를 조장하며 '남성=국가', '여성=가족'이라는 전통적 성 역할을 고착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5]


이러한 비판 속에 일부 인사들과 네티즌들은 5만 지폐 사용 보이콧을 주장하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며, 이를 통해 여성 인물의 등용이라는 관례를 깬 의미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하지만[5], 선정 과정과 인물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은 선정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6. 가족 관계

'''신사임당의 가족 관계'''
구분관계이름비고
친가고조부신개(申槩)문희공(文僖公), 세종 대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우의정, 좌의정 역임
증조모의령 남씨조선 태종의 4녀 정선공주의 딸
조부신숙권(申叔權)영월군수 역임[9]
아버지신명화(申命和)1476 ~ 1522. 진사. 기묘사화 연루.[10]
어머니용인 이씨(龍仁 李氏)이사온(李思溫)의 딸. 1528년 열녀 표창.[11]
자매4명딸 5명 중 둘째. (언니 2명, 여동생 2명)
외가외조부이사온(李思溫)
외조모강릉 최씨(江陵 崔氏)최응현(崔應賢)의 딸
외증조부최치온(崔致溫)오죽헌의 원 소유주
외증조모강릉 김씨
배우자 및 자녀남편이원수(李元秀)1501 ~ 1561. 덕수 이씨
장남이선(李璿)1524 ~ ?
장녀이매창(李梅窓)1529 ~ ?
차남이번(李璠)1531 ~ 1590
차녀이씨(李氏)1547 ~ ? (출생년도 정보는 원본 소스 내 여러 표기 중 하나를 따름)
삼남이이(李珥)1537 ~ 1584. 율곡(栗谷). 자부: 교하 노씨(노경린의 딸)
삼녀이씨(李氏)1550 ~ ? (출생년도 정보는 원본 소스 내 여러 표기 중 하나를 따름)
사남이우(李瑀)1542 ~ 1609. 문신, 화가



신사임당의 고조부는 세종 대 좌의정을 지낸 문희공(文僖公) 신개이며,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9] 아버지 신명화는 1516년(중종 11년) 41세의 나이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10],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당시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교류하였으며,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중종에게 조광조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나흘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가 장인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어머니 용인 이씨는 남편 사후 수절하고 자녀 양육과 부모 봉양에 힘쓴 공으로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 표창을 받았다.[11] 강릉에는 이를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졌다.[11] 신사임당은 5명의 딸 중 둘째였다. 외가이자 생가인 오죽헌은 외증조부 최치온의 소유였으나 외조부 이사온이 처조부에게서 물려받았다.[7]

1522년 19세의 나이로 덕수 이씨 이원수와 혼인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재능을 아껴 지원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되었다.

7. 신사임당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Sin Saimdang http://100.naver.com[...]
[2] 웹사이트 Sin Saimdang http://people.aks.ac[...]
[3] 서적 Creative Women of Korea: The Fifteenth Through the Twentieth Centuries Taylor & Francis Group 2015-02-24
[4] 뉴스 황당한 한은의 '화폐인물' 선정이유 "어진 아내에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 (Korean) http://www.hani.co.k[...] The Hankyoreh 2017-10-04
[5] 뉴스 'Best mom' chosen as face of currency https://www.reuters.[...] Reuters 2007-11-06
[6] 서적 『師任堂(サイムダン)のすべて 朝鮮時代に輝いた女性芸術家』 キネマ旬報社
[7] 문서 후에 아들 율곡 이이를 오죽헌 몽룡실에서 출산하기도 한다.
[8] 문서 그의 손자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9] 뉴스 엽기인물 한국사 6.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아니라, 이원수의 아내 신사임당이다.① http://sports.khan.c[...] 스포츠 경향 2007-09-18
[10]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1]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12]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13]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14] 서적 꿈이 있는 10대 내가 만난 천재들 올댓북 2008
[15]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16] 뉴스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http://h21.hani.co.k[...] 한겨레 21 2004-02-04
[17]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http://people.aks.ac[...] 2012-03-30
[18]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9] 서적 꿈이 있는 10대 내가 만난 천재들 올댓북 2008
[20] 문서 허균의 연인과는 동명이인이다.
[21] 서적 꿈이 있는 10대 내가 만난 천재들 올댓북 2008
[22]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3]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4]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5]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6] 서적 꿈이 있는 10대 내가 만난 천재들 올댓북 2008
[27]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8] 서적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역사의아침 2009
[29] 서적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역사의아침 2009
[30] 문서 조선 여성으로는 사서육경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몇 안되는 여성이기도 했다.
[31]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32]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33]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34] 문서 남편 이원수는 생전 관직은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35] 뉴스 "신사임당은 안돼"… 여성계 반발 예상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7-11-05
[36] 서적 꿈이 있는 10대 내가 만난 천재들 올댓북 2008
[37] 서적 행복한 나쁜여자 미네르바 2008
[38] 뉴스 역사속의 강원인물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http://www.kwnews.co[...] 강원일보 2011-01-20
[39] 뉴스 새 화폐 인물 신사임당 선정 유력…여성계 반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10-02
[40] 뉴스 여성계 "'현모양처' 신사임당 화폐인물은 국가망신" 반대 목소리 나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10-02
[41] 뉴스 새 화폐 인물 “신사임당 대신 유관순을!”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10-23
[42] 뉴스 “신사임당, 21세기 여성상에 안맞아”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11-05
[43] 뉴스 고액 화폐 여성인물 신사임당 논란 가열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10-18
[44] 뉴스 아지매통신 신사임당의 ‘부활’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7-11-08
[45] 뉴스 여성단체 "5만원권 신사임당 선정은 성평등 위배" http://www.nocutnews[...] 노컷뉴스 2007-12-07
[46] 웹인용 한은 "고액권 도안인물 변경 불가" https://www.yna.co.k[...] 200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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