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우시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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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레우시니온은 고대 아테네의 데메테르와 코레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엘레우시스에 위치해 있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 아르카익 시대의 벽으로 둘러싸였다. 주요 건물로는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프로필론, 남쪽 스토아, 원형 건물, 내부 프로필론 등이 있었다. 엘레우시스 비의와 테스모포리아 축제 등 다양한 종교적 행사가 열렸으며, 엘레우시스 밀교 의식의 주요 장소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봉헌물과 비문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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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우시니온 | |
---|---|
개요 | |
유형 | 신전 |
위치 | 아테네의 고대 아고라 근처 |
좌표 | 38.04336° N, 23.54207° E |
설명 | |
설명 | 아테네 시내에 있는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 신전 |
명칭 | |
그리스어 | Ἐλευσίνιον |
그리스어 (고대) | Ἐλευσίνιον τὸ ἐν ἄστει (Eleusinion to en astei) |
위치 |
2. 역사
기원전 8세기경부터 엘레우시니온은 여성 신을 위한 종교적 성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 기원전 6세기 후반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 최초의 담장이 건설되었으나, 이보다 앞선 시기에 지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
기원전 5세기 초,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페르시아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기원전 475년에서 450년 사이에 완공되었다.[8] 기원전 479년 아테네의 페르시아 약탈 동안 성소가 손상되었다는 세 개의 퇴적물이 발견되었다.[8]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시, 엘레우시니온 성소는 피난민들이 점유하지 않은 아테네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8] 기원전 414년, 알키비아데스 등이 비밀 의식 모독과 헤르메스상 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엘레우시스 관리들은 죄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데메테르와 코레의 여사제 테아노는 "저주하는 여사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여사제"라고 선언했다.[9] 기원전 329/8년의 재정 기록에는 리쿠르고스가 주도한 아테네 부흥의 일환으로 엘레우시니온에 대한 대규모 수리가 묘사되어 있다.[10]
기원전 2세기에는 성소에 주요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남쪽 스토아, 헬레니즘 프로필론(정문), 원형 건물이 건설되었다.[17]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 초까지는 대부분의 명예 칙령이 성소에 세워졌으며, 주로 엘레우시스 비밀 의식의 ''에피멜레타이''(조직자)를 기리는 내용이다.[17]
서기 131/2년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설립한 판헬레니온은 엘레우시니온과 엘레우시스 숭배의 행정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1] 서기 2세기 중반에는 하드리아누스 수도교의 지선이 성소 뒤에 건설되었고, 같은 시기에 내부 프롤론이 건설되고 원형 건물이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서기 267년 헤룰리족의 약탈 이후에도 성소가 후-헤룰리안 방벽 안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성소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보여준다. 엘레우시스 신앙은 적어도 서기 375년까지 활발하게 유지되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반이교도 법령 이후에는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쪽 스토아와 아마도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은 4세기 말, 서기 396년 알라리크 1세의 아테네 약탈로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 지역은 주택으로 덮였다.[1] 하드리아누스 수도교가 제공하는 물을 활용하여, 서기 7세기에는 남쪽 스토아의 서쪽 끝에 세탁 시설이 건설되었다.[2] 콘스탄스 2세 (641-668) 통치 기간에 이 지역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세탁 시설이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고전 시대 구조물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보인다.[3]
비잔틴 그리스 시대와 오스만 제국 그리스 시대, 특히 9-10세기에 걸쳐 이 지역의 석조물과 조각품 약탈이 이루어졌다.[4] 17세기에는 히파판티 교회와 그리스도 교회가 각각 이 지역의 남쪽과 북쪽 끝에 건설되었으며, 후-헤룰리안 방벽의 문과 성소 일부를 그 기초에 통합했다.[5] 19세기 초, 이 지역은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한 대리석의 좋은 공급원으로 명성을 얻었다.[8] 엘레우시니온의 대리석은 아테네 구시가지, 특히 리틀 메트로폴리스 전역의 오래된 건물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20세기에 발굴될 때까지 주거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9]
2. 1. 초기 역사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6세기)
기원전 8세기경, 이 곳은 여성 신을 위한 종교적 성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 이 시기 이전부터 이미 신성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있다.[1] 기원전 6세기 후반,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 최초의 페리볼로스(담장)가 건설되었으나, 이보다 앞선 시기에 지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2. 2. 고전 시대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4세기)
기원전 5세기 초,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페르시아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기원전 475년에서 450년 사이에 완공되었다.[8] 기원전 479년 아테네의 페르시아 약탈 동안 성소가 손상되었다는 세 개의 퇴적물이 발견되었다.[8]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엘레우시니온 성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시 시골에서 온 피난민들이 점유하지 않은 아테네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는데, 이는 성소의 벽과 문으로 잠글 수 있었기 때문이다.[8] 기원전 414년, 알키비아데스와 다른 사람들이 비밀 의식 모독과 헤르메스상 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의 재산은 압수되어 경매에 부쳐졌고, 모든 재산, 판매 가격, 구매자를 나열한 "아티카 석비"로 알려진 열 개의 비문이 엘레우시니온에 세워졌다.[8] 모든 엘레우시스 관리들은 죄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데메테르와 코레의 여사제 테아노는 "저주하는 여사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여사제"라고 선언했다.[9]
기원전 329/8년의 재정 기록에는 그 해 엘레우시니온에 대한 대규모 수리가 묘사되어 있는데,[10] 이는 리쿠르고스가 주도한 아테네와 그 숭배 부활의 일환이었다.[10]
2. 3.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1세기)
기원전 2세기에는 성소에 주요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남쪽 스토아, 헬레니즘 프로필론(정문), 원형 건물이 건설되었다.[17] 이 시기에 성소에서 건설을 수행한 개인을 기리는 두 개의 비문이 남아있다. 하나는 단편적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신전과 플루톤 성소를 수리하고 연례 제물을 지불한 테스모포리의 사제 사튀라를 기린다.[17]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 초까지는 대부분의 명예 칙령이 성소에 세워졌으며, 주로 엘레우시스 비밀 의식의 ''에피멜레타이''(조직자)를 기리는 내용이다.[17]2. 4. 로마 시대 (기원전 1세기 ~ 서기 4세기)
기원전 2세기에는 성소에 주요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남쪽 스토아, 헬레니즘 프롤론, 원형 건물이 건설되었다.[17] 이 시기에 성소에서 건설을 수행한 개인을 기리는 두 개의 비문이 있는데, 하나는 단편적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신전, 플루톤 성소를 수리하고 연례 제물을 지불한 테스모포리의 사제 사튀라를 기린다.[17]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 초까지는 대부분의 명예 칙령이 성소에 세워졌으며, 주로 엘레우시스 비밀 의식의 ''에피멜레타이''(조직자)를 기렸다.131/2년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설립한 판헬레니온은 엘레우시니온과 엘레우시스 숭배의 행정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성소 서쪽 외부의 석비에 제국의 한 관리의 편지를 새겼다.[11] 판아테네 거리의 성소 서쪽을 따라 이어진 구간은 서기 1세기와 2세기에 두 단계로 낮아지고 포장되었다. 서기 2세기 중반에는 하드리아누스 수도교의 지선이 성소 뒤에 건설되었고, 같은 시기에 내부 프롤론이 건설되고 원형 건물이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서기 267년 헤룰리족의 약탈 이후에도 성소가 후-헤룰리안 방벽 안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성소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보여준다(대부분의 도시, 특히 아고라는 이 새로운 방벽 밖에 남겨졌다). 성소가 계속 사용되었다는 것은 다른 많은 구조물과 달리 방벽을 위한 건축 자재를 제공하기 위해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엘레우시스 신앙은 적어도 서기 375년까지 활발하게 유지되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반이교도 법령 이후에는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쪽 스토아와 아마도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은 4세기 말, 서기 396년 알라리크 1세의 아테네 약탈로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5. 후기 (서기 5세기 이후)
그 후 이 지역은 주택으로 덮였다.[1] 하드리아누스 수도교가 제공하는 물을 활용하여, 서기 7세기에는 남쪽 스토아의 서쪽 끝에 세탁 시설이 건설되었다.[2] 콘스탄스 2세 (641-668) 통치 기간에 이 지역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세탁 시설이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고전 시대 구조물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보인다.[3]비잔틴 그리스 시대와 오스만 제국 그리스 시대, 특히 하부 테라스에 채석장이 있던 9-10세기에 걸쳐 이 지역의 석조물과 조각품 약탈이 이루어졌다.[4] 17세기에는 히파판티 교회와 그리스도 교회가 각각 이 지역의 남쪽과 북쪽 끝에 건설되었으며, 후-헤룰리안 방벽의 문과 성소 일부를 그 기초에 통합했다.[5] 그리스도 교회는 1850년대에 폐허가 되었지만, 북쪽 벽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으며 벽화는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6] 히파판티 교회는 1936년에 발굴 작업을 위해 폐쇄 및 철거되었다.[7]
19세기 초, 이 지역은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한 대리석의 좋은 공급원으로 명성을 얻었다.[8] 엘레우시니온의 대리석은 아테네 구시가지, 특히 리틀 메트로폴리스 전역의 오래된 건물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20세기에 발굴될 때까지 주거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9]
3. 위치 및 구조
엘레우시니온은 아크로폴리스 북쪽 비탈의 낮은 부분, 아테네 아고라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 경계는 서기 3세기 후반에 후-헤룰리안 성벽이 건설된 파나테나이아 가도였고, 남쪽 경계는 아크로폴리스 상부 경사면을 따라 뻗어 있는 주변 도로이다. 북쪽 경계는 삼각대 거리의 북쪽 지선이었다. 남북 간 거리는 약 200m이며, 동쪽 경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쪽 가장자리에서 최대 200m까지였을 수 있다.
크세노폰, 필로스트라토스,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석에서 엘레우시니온의 일반적인 위치가 알려져 있으며, 특히 파우사니아스는 아고라 남쪽 중앙에 위치한 Enneakrounos(9개의 분사구) 분수 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언급했다.[1] 1936-1939년과 1959-1960년에 아테네 아고라에 대한 미국 발굴의 일환으로 이 부지가 발굴되었다. 엘레우시니온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18m~40m 너비의 띠만 발굴되었으며, 문헌에서 알려진 많은 구조물들은 발견되지 않아 현대 주택 아래 동쪽에 더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고라 전역에서 엘레우시스 숭배와 관련된 비문, 조각, 봉헌 용기가 발견되었지만, 주로 엘레우시니온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세 개의 비문은 엘레우시니온에 설치되었다고 명시하고 있어, 이 부지가 엘레우시니온임을 확인해 준다.
3. 1. 상부 테라스
평평한 기반암으로 형성된 상부 테라스는 성소의 원래 핵심이었다.[1] 서쪽 가장자리에는 너비 2미터, 길이 3미터로 주변 지역보다 높이 솟아 있는 "바위 노두"가 있는데, 이러한 노두는 그리스 세계 전반에 걸쳐 데메테르 숭배에서 종종 중요했다.[2] 이 지역은 기원전 575-550년경에 건설된 다각형 석회암 벽("고대 페리볼로스")으로 둘러싸여 있었다.[3] 기초 두께는 0.9~1.15미터 사이였으며, 서쪽에는 전체 길이 22미터 구간이 보존되어 있고, 북쪽과 남쪽에는 기초 참호와 짧은 구간이 각각 26미터와 28미터 길이로 보존되어 있다. 동쪽 벽은 발굴되지 않았다.[4]원래 구역으로의 입구는 서쪽 끝에서 3미터 떨어진 남쪽에 있었으며 "구역 II"로 열렸다.[5] 두 번째 입구는 기원전 350-325년경 동일한 벽에 동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는데, 아마도 기원전 329/8년 건설 공사의 일부였을 것이다.[6] 헬레니즘 시대에는 남쪽 페리볼로스 벽이 철거되었고, 그 위에 남쪽 스토아가 건설되어 상부 테라스가 "구역 II"에서 분리되고 두 입구가 봉쇄되었다. 남쪽 스토아가 건설됨과 동시에 프로필론(관문)이 남쪽 끝 근처 서쪽의 페리볼로스 벽에 건설되어 이후 엘레우시니온의 주요 입구 역할을 했다.[7] 상부 테라스의 북쪽 가장자리는 스토아에서 북쪽으로 6.8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옹벽으로 형성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철거되었다.[8]
3. 2. 중간 테라스
중간 테라스는 기원전 6세기 말에 엘레우시니온 성소에 추가되어 성소의 크기가 두 배로 커졌다.[1] 이 테라스에는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이 위치해 있었으며, 입구는 상부 스토아의 가장자리를 향하고 있었다.[1]이 지역은 "5세기 초 페리볼로스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벽은 서쪽과 북쪽에 작은 구간으로 보존되어 있다.[1] 벽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너비는 1.10미터였다.[1] 북쪽 벽은 28미터, 서쪽 벽은 21미터 길이로 드러났다.[1] 서쪽 벽은 고대 페리볼로스를 계속 이어나갔다.[1]
기원전 4세기에는 페리볼로스의 북쪽과 서쪽 부분이 거대한 옹벽으로 덮였는데,[1] 이는 파나테나이아 행렬을 보기 위한 플랫폼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1] 이 옹벽의 바깥쪽 서쪽 면에는 비문을 위한 계단이 있었다.[1] 신전 동쪽에서는 너비 0.8미터의 분할 벽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내부 성소와 분리되었다.[1]
3. 3. 주요 건물
파우사니아스는 서기 2세기에 엘레우시스 신전을 묘사하면서, 데메테르와 코레(페르세포네)를 위한 신전과 트립톨레모스를 위한 신전을 언급했다. 그는 트립톨레모스 신전에 대해서는 묘사했지만, 데메테르와 코레의 신전에 대해서는 꿈에서 상세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을 금지당했다고 하며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1] 이는 신전이 더 신성한 내부 구역과 덜 신성한 외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시사한다.다른 자료에서는 제단,[2] 정화수의 원천,[3] 이마라두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신사,[4] 그리고 플루토니온[5]을 언급하고 있다.
엘레우시니온의 주요 건물은 다음과 같다:
- 트립톨레모스 신전: 기원전 5세기 초에 건설된 이오니아식 신전으로, 농업의 신 트립톨레모스를 모셨다.
- 프로필론 (정문): 서기 2세기에 파나테나이아 가도로 연결되는 외곽 담장 서쪽, 남쪽 끝 근처에 건설된 문으로, 이후 엘레우시니온의 주요 입구 역할을 했다.
- 남쪽 스토아: 기원전 2세기에 상부 테라스의 남쪽에 추가되었으며, 봉헌과 성역 방문객을 위해 사용되었다. 남북 방향 길이는 8.9m이다.
- 원형 건물: II 구역의 남쪽 스토아에서 남쪽으로 17.2m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으며, 의례적인 식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내부 프로필론: 기원후 2세기 중반에 건설된 기념비적인 관문으로, 외부 성소에서 내부 성소로 이어졌다.
3. 3. 1.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은 기원전 5세기 초에 건설된 이오니아식 신전으로, 농업의 신 트리프톨레모스를 모셨다. 남북 방향으로 지어졌으며 길이는 17.813m, 너비는 11.065m였다.[1]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고, 상부 테라스로 열려 있었다. 기초와 지붕의 흔적은 발견되었지만, 상부 구조는 남아 있지 않다.[1] 하지만 지붕처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마가렛 마일스는 신전의 치수와 재료로 보아 이오니아식 4주 양측면 신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즉, 북쪽과 남쪽 끝에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후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아테네의 니케 신전과 동일한 설계이다.[1] 기둥의 지름은 기저부에서 약 1.10m였을 것이다.[1]

신전 건설은 기단에서 발견된 도기 증거로 보아 기원전 500년에서 49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지붕의 잔해는 기원전 475~450년으로 추정된다.[1] 이 시기는 아테네 미술에서 트리프톨레모스의 이미지가 급증한 시기와 일치한다.[1] 책임자는 엘레우시스에 5세기 텔레스테리온(Telesterion) 건설을 감독했던 코로에부스(Coroebus)였을 가능성이 있다.[6]
기초는 회색 카라 석회암으로 만들어졌지만, 노란색 다공질 석회암과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져온 석회암도 벽에 사용되었다.[1] 경사가 심했기 때문에 신전의 남쪽 끝은 기반암 위에 직접 놓였고, 북쪽 끝은 10개의 석조를 필요로 했다.[1] 신전 기초를 위한 기반암 절개는 서쪽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1] 기초는 죔쇠나 꺾쇠 없이 고품질의 다각형 석조로 지어졌다.[1] 기초 블록은 북쪽 전체와 서쪽 및 동쪽 측면의 일부가 남아 있다.[1] 전실을 내실과 분리하는 가로벽의 기초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1] 신전 건설 중 동쪽에 연장 부분이 추가되었는데, 너비는 2.20-2.355m이고 다른 용도로 처음 잘린 붉은 결정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이 추가는 신전의 너비:길이 비율이 이 시기에 신전 건설에서 인기를 얻었던 황금비에 더 가깝게 되도록 만들어졌을 수 있다.[1]
지붕 잔해는 대리석 타일 88개 조각(덮개 타일 30개, 판 타일 58개, 끝마루 타일 1개)과 대리석 장식판 4개로 구성되어 있다.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1] 장식판의 팔메트는 엘레우시스의 고대 텔레스테리온 (기원전 510-500년)과 특히 델로스의 아폴론 성역(기원전 478-450년)의 보물창고 지붕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하다.[1]

고고학적 유물은 파우사니아스가 언급한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으로 확인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신전은 성역 바깥쪽에 있었고, 고고학적으로 당시 엘레우시니온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이 신전 옆의 프로필론을 통과했기 때문이다.[1] 신화에서 트리프톨레모스는 데메테르로부터 농업의 선물과 엘레우시스 비의 입문을 처음으로 받은 인간이었다. 그는 날개 달린 전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선물에 대해 알렸다.[1]
파우사니아스는 신전 안에 트리프톨레모스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않았지만, 기원전 4세기의 파나테나이아 축제 암포라에 묘사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기원전 364/3년부터 날개 달린 전차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조각상이 전차 바퀴 옆에 뱀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진 예가 있다.[1]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이 신전 앞에 반전설적인 예언자 에피메니데스와 황소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후자는 늦은 5세기의 초생 과실 포고령에 따라 트리프톨레모스를 위해 표준적인 희생 제물이었던 황금 뿔을 가진 황소를 묘사했을 것이다.[7] 신전 동쪽에는 제단(1.10 x 2.70 미터)의 석회암 기초가 있는데, 아마도 기원전 500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1] 이 동쪽에는 기원전 450-425년 사이에 지어진 길이 2.20미터의 노란색 다공질 석회암 기념물 기단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겨진 석비 세트를 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
3. 3. 2. 프로필론 (정문)
서기 2세기에 파나테나이아 가도로 연결되는 외곽 담장 서쪽, 남쪽 끝 근처에 프로필론(정문)이 건설되었다.[1] 이후 엘레우시니온의 주요 입구 역할을 했다. 이 문은 H자 형태의 평면을 가진 현관으로, 외곽 담벽에 직각으로 두 개의 벽이 있어 지붕을 지탱하고, 두 벽 사이에는 실제 문이 있는 가로벽이 있었다.[2]기초는 다공질 석회암, 역암, 대리석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재사용되었고, 기반암에 직접 놓여져 있다.[3] 중앙에는 히메토스 대리석 포장재로 덮여 있으며, 그 중 일부가 남아 있다. 건설 시기는 기초 포장재에서 발견된 도자기 조각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아테네 건축물과의 유사성으로 추정된다.[4] 이는 서기 1~2세기에 파나테나이아 가도를 낮추고 포장하기 위해 서쪽 기반암을 절개하기 전에 건설되었다.[5]
이 프로필론은 서기 3세기 후반에 헤룰리족 이후의 성벽에 통합되었다.[6]
3. 3. 3. 남쪽 스토아
남쪽 스토아는 기원전 2세기에 상부 테라스의 남쪽에 추가되었으며, 고대 페리볼로스를 대체했다.[1] 이 스토아는 트리프톨레모스 신전을 마주보는 보호된 구역으로, 봉헌과 성역 방문객을 위해 사용되었다.[2] 남북 방향 길이는 8.9m이다. 발굴된 부분은 길이가 25.4m이지만, 스토아는 발굴되지 않은 지역까지 더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3]상부 구조 파편을 보면 계단은 히메토스 대리석으로, 기둥과 엔타블레이쳐는 펜텔릭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기둥은 약 3m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아마도 도리아식이었을 것이다.[4] 높이는 아마도 1층이었겠지만, 확실하지 않다.[5] 다이아몬드 및 타원형 격자 창틀 세트는 2층 난간 또는 서쪽 및 동쪽 벽에서 나왔을 수 있다.[6] 동쪽 끝에서는 뒷벽이 2.75m 높이로 보존되어 있다.[7] 내부 바닥은 다져진 흙으로 덮여 있었으며, 방문객들이 기반암 위를 직접 걷게 될 때까지 천천히 닳아 없어졌다.[8]
뒷면(남쪽) 벽에서는 세 단계의 건설이 확인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서쪽 18.5m 부분에 보존된 기초는 규칙적인 노란색 다공성 정방석 (높이 0.65m, 길이 1.15m, 두께 0.42m)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무 클램프로 연결되고 다듬어진 석조물로 덮였다. 이 초기 단계는 기초 채움재의 도자기와 모르타르 부재로 미루어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된다.[9] 두 번째 단계는 후기 로마 시대에 불규칙한 석회암 블록과 벽돌, 모르타르로 덮어 정방석을 수리했다(동쪽 부분에 보존).[10] 마지막으로 비잔틴 시대에 벽은 벽돌과 돌로 다시 수리되어 후기 구조물의 벽으로 사용되었다.[11] 스토아 북쪽에는 폭 1.5m의 절개가 스토아 전체 길이를 따라 뻗어 있다. 이 절개에 놓인 응집암 블록은 앞 계단과 기둥을 지지했다.[12] 짧은 서쪽 외부 벽에는 파나테나이아 가도의 행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비문을 부착하기 위한 받침대가 있었다.[13]
파괴 잔해는 스토아가 4세기 말에 사용이 중단되었음을 보여준다. 6세기에는 구조의 일부가 새로운 건물에 통합되었고, 뒷벽을 통해 경사로가 건설되어 그 뒤의 동서 도로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14]
3. 3. 4. 원형 건물
II 구역의 남쪽 스토아에서 남쪽으로 17.2m 떨어진 곳에 원형 건물이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기반암에 있는 원형 절단과 높이 0.52m까지 보존된 포로스 벽의 일부를 통해 알려져 있다. 구조물 주변의 기반암은 평평한 지역을 만들기 위해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절단은 지름이 7.75m~8m였음을 나타내지만, 벽의 블록은 지름이 약 19m인 더 크고 원형인 고대 또는 고전 시대 구조물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이전 구조물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바닥은 찰흙으로 채워져 있었고, 방의 정확한 중앙에는 너비 1.35m의 맷돌이 바닥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붕을 위한 내부 지지대가 없으므로 단순한 나무 평면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서 최소 5개의 제단 유물이 발견되어 건물이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렛 마일스는 이 건물이 의례적인 식사에 사용되었다고 제안한다. 이는 이 지역에서 대량의 조리용 그릇이 발견된 것으로 뒷받침된다. 건물의 동쪽에 있는 우물은 이러한 기능과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특히 원형 건물은 도시 엘레우시니온에 신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플루톤을 기리는 식사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으며, 테스모포리아와도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구조물은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기초 채움재에서 나온 도자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북서부와 동부 구역에서 나온 채움재는 서기 100년경에 동일한 평면으로 해체 및 재건되었으며, 이는 아마도 동쪽 우물을 폐쇄한 새로운 배수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채움재 세트는 서기 2세기 말 또는 3세기에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음을 보여준다.
3. 3. 5. 내부 프로필론
기원후 2세기 중반에 건설된 내부 프로필론은 외부 성소(트립톨레모스 신전을 중심으로 한 발굴 지역)에서 비입회자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을 중심으로 한 내부 성소로 이어지는 기념비적인 관문이었다.[1] 이 구조물의 기초는 발굴되지 않았지만, 석조물과 조각 파편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어 리틀 메트로폴리스에 재사용되었다.[1]
이 파편들은 엘레우시스 성소의 내부 프로필론과 매우 유사하며,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이 이루어졌다.[1] 주요 조각 파편은 관문 안쪽에 서서 현관을 받쳤을 두 개의 카리아티드이다.[2] 관문 바깥쪽의 도리아식 프리즈는 엘레우시스 상징 (개양귀비, 도금양, 플레모코이, 피알라, 부크라니아)이 있는 메토프와 트리글리프로 구성되었다.[3] 엘레우시스와 아테네 시의 구조물 간의 유사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건설된 전형적인 특징으로, "엘레우시스의 제국적 아테네화"의 일부이다.[4][5]
4. 기능 및 활동
엘레우시니온은 아테네에서 데메테르와 코레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엘레우시스에 있었다. 이곳은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는 브라우론의 아르테미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남쪽 경사면에 있는 엘레우테라이의 디오니소스 신전과 함께 아테네 시가 아티카 외곽 지역의 숭배와 연결되는 여러 신전 중 하나였다.[8]
엘레우시니온에서는 엘레우시스 비의, 테스모포리아 축제, 플루톤을 기리는 의식, 대 파나테나이아 축제 경기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4. 1. 엘레우시스 밀교 의식
엘레우시스 비의가 시작될 때, 에페보스에 의해 신성한 물건들이 엘레우시스에서 엘레우시니온으로 옮겨졌다. 이 물건들은 축제 기간 처음 5일 동안 그곳에 보관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엘레우시스 비의에 입문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에우몰피다이와 케리케스 구성원들의 지도 아래 "사전 입문"(''미에시스'')을 받기 위해 엘레우시니온에 모였다. 비입문자들은 내부 프로필론에 의해 경계가 쳐진 신전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8] 축제의 여섯째 날, 거대한 행렬이 그들을 다시 엘레우시스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비의의 절정에서 입문자들에게 공개되었다. 비의가 끝난 후, 500인 평의회는 축제의 진행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엘레우시니온에서 회의를 열었다.[8]4. 2. 테스모포리아 축제
엘레우시니온은 여성들이 테스모포리아 축제를 기념하는 장소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8]4. 3. 기타
엘레우시니온에서는 플루톤을 기리는 의식적인 식사가 열렸다. 기원전 4세기 후반과 기원전 1세기의 비문에 따르면, 이 식사는 부유한 아테네 남성들이 준비했으며, 헬레니즘 시대 후반부터는 구역 II의 원형 건물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엘레우시니온은 대 파나테나이아 축제 경기 중 일부 기병 경주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전차 경주와 아포바테스 경주가 이곳에서 열렸다.
5. 현대의 연구
1930년대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는 아고라 발굴을 위해 엘레우시니온이 속한 지역을 매입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아서 W. 파슨스, 마가렛 크로스비, 로드니 영의 책임 하에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3] 이 발굴을 통해 고대 사원, 서쪽 정문, 19세기 발굴 지역 남쪽 스토아 등이 드러났고, 경사면을 따라 남쪽, 파나테나이아 길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938년에는 제물 조각상, 엘레우시스 숭배 관련 동전 및 비문, ''케르노이''로 가득 찬 제물 구덩이 등이 발견되어 이 부지가 엘레우시니온임을 확인시켜 주었다.[4] 특히 2구역 발굴은 전쟁으로 큰 차질을 빚어 유물 대부분이 라벨 없이 분류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고, 도자기 유물 중 약 4분의 3은 복구 불가능한 상태였다.[5]
1959-1960년 유진 밴더풀은 마지막 발굴을 실시하여 동쪽으로 발굴 지역을 확장했다.[6] 1980-1981년 윌리엄 벨 딘스무어와 마가렛 마일스가 조사를 수행했고, 마일스는 1988년과 1992년에 도자기 유물을 다시 연구하여 부지의 시기를 파악했다.[7]
5. 1. 발굴
1848년 6월 22일, 몇몇 석조 블록이 우연히 발견된 후, 키리아코스 피타키스는 발굴을 추진하여 1851년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탐사 발굴을 실시했다. 이는 1851년부터 1852년까지 대규모 발굴로 이어졌다. 가옥들이 철거되었고, 포스트 헤룰리안 벽의 일부(주로 고전 조각, 석조, 비문으로 구성됨)와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위의 옹벽이 드러났다. 피타키스는 이 부지가 불레테리온 (시 의회)의 일부라고 믿었다.[1] 1910년에는 콘스탄티노스 쿠루니오티스가 소규모 발굴을 실시했다.[2]
1930년대, 엘레우시니온은 아고라 발굴을 위해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가 매입한 지역에 속했다. 1936년 발굴이 시작되어 1939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3] 발굴 책임자는 아서 W. 파슨스, 마가렛 크로스비, 로드니 영이었다. 발굴을 통해 고대 사원, 서쪽 정문, 19세기 발굴 지역 남쪽 스토아가 드러났으며, 경사면을 따라 남쪽으로, 파나테나이아 길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제물 조각상, 엘레우시스 숭배 관련 동전 및 비문, 특히 ''케르노이''로 가득 찬 제물 구덩이 발견은 1938년 이 부지가 엘레우시니온임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4] 특히 2구역 발굴은 전쟁으로 큰 차질을 빚었으며, 대부분 유물은 라벨 없이 분류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도자기 유물의 거의 4분의 3이 복구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5]
1959-1960년에 유진 밴더풀이 마지막 발굴을 실시했다. 동쪽으로 발굴 지역을 확장하기 위해 4채의 가옥이 철거되었다.[6] 윌리엄 벨 딘스무어와 마가렛 마일스는 1980-1981년에 조사를 수행했으며, 마일스는 1988년과 1992년 사이에 이 부지의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 도자기 유물을 다시 연구했다.[7]
5. 2. 유물
1848년 6월 22일, 우연히 발견된 석조 블록들을 계기로 키리아코스 피타키스가 발굴을 추진, 1851년 탐사 발굴을 거쳐 1852년까지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가옥 철거와 함께 포스트 헤룰리안 벽의 일부(고전 조각, 석조, 비문 등)와 트리프톨레모스 신전 위 옹벽이 드러났다. 피타키스는 이 부지를 불레테리온으로 추정했다.[15] 1910년 de는 소규모 발굴을 실시했다.[16]
1930년대 엘레우시니온은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의 아고라 발굴 지역에 포함되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다.[17] 아서 W. 파슨스, 마가렛 크로스비, 로드니 영이 발굴을 이끌었으며, 고대 사원, 서쪽 정문, 남쪽 스토아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1938년에는 제물 조각상, 관련 동전 및 비문, ''케르노이''로 가득 찬 제물 구덩이 등이 발견되어 이 부지가 엘레우시니온임을 확인시켜 주었다.[18] 전쟁으로 인해 2구역 발굴은 큰 차질을 빚었고, 많은 유물이 방치되었으며, 도자기 유물 상당수가 복구 불가능한 상태였다.[19]
1959-1960년 유진 밴더풀이 마지막 발굴을 실시, 동쪽으로 발굴 지역을 확장했다.[20] 1980-1981년 윌리엄 벨 딘스무어와 마가렛 마일스가 조사를 수행했고, 마일스는 1988년과 1992년에 도자기 유물을 재연구하여 부지의 시기를 파악했다.[21]
5. 2. 1. 봉헌물
기원전 7세기의 봉헌물로는 테라코타 조각상, 소형 용기, 도자기, 방추, 베틀 추, 원반 등이 있었다.[15] 이 조각상들은 몸통이 치마처럼 아래로 넓어지는 긴 기둥 모양으로, "원주형 여성"이라고 불린다. 팔은 뻗어 있고, 머리는 공 모양으로 코를 만들기 위해 꼬집어 만들었으며, 가슴을 추가하기도 했다.[15] 아고라에서 발견되는 말과 방패 조각상과는 다른 모습이다.[15]

플레모코에(πλημοχόηgrc)는 기원전 4세기 초부터 기원전 2세기 말까지 성소에서 흔히 발견되는 독특한 도자기 용기이다. 이 용기는 너비 0.024미터에서 0.26미터에 이르는 넓은 그릇을 지지하는 높은 발과 양쪽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구멍이 뚫린 뾰족한 뚜껑이 있었다. 장식은 거의 없고 부드럽거나 거친 점토로 만들어져 한 번만 사용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내부 프로필론과 엘레우시스에서 발견된 유사한 부조에 묘사되어 있다. 엘레우시니온의 II구역에서 발견된 큰 대리석 플레모코에(높이 0.62미터)는 플루톤 신전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행렬에서 여성들은 머리 위에 플레모코에를 이고 다녔다. 아테나이오스에 따르면, 엘레우시스 비의 마지막 날에 두 개의 플레모코에를 액체로 채워 동쪽과 서쪽으로 하나씩 기울이고 마법 주문을 읊었다고 한다.[15] 엘레우시스 신앙과의 관련성은 엘레우시니온과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많은 플레모코에가 기반암에 특별히 파인 구멍에 묻혀 있었는데, 이는 지하 환경, 즉 플루톤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15]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성소에 기념물, 주로 조각상을 봉헌했다. 비문이 새겨진 받침대 26개가 알려져 있는데,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450년경 여사제 리시스트라테가 봉헌한 두 개의 관이다.[16] 나머지 중 11개는 기원전 4세기에, 1개는 기원전 3세기에, 5개는 기원전 2세기에, 4개는 기원전 1세기에 (파이드로스의 헤르메스상 포함), 각각 1개는 서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봉헌되었다.[16] 봉헌 부조 13개를 포함하여 조각품 19개가 회수되었다. 이 중 대부분은 데메테르와 코레를 묘사하고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졌다. 3개는 트리프톨레무스를, 다른 것들은 엘레우시스 영웅 이아코스, 에우불레우스, 플루토스를 묘사하고, 2개는 헤카테를 묘사한다. 두 개의 대리석 횃불 파편도 있다.[16] 기원전 2세기까지 데메테르와 코레의 여사제들은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에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17]
5. 2. 2. 비문
안도키데스는 엘레우시니온에 대한 규정이 기원전 6세기 중반 솔론의 법에 포함되었다고 말한다.[18] 문헌 자료와 비문은 규정과 의례적 규범에 대해 정기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규정은 도시 엘레우시니온, 팔레룸의 더 작은 엘레우시니온, 엘레우시스에 있는 데메테르와 코레의 신전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도시 엘레우시니온에서 발견된 비문 규정은 다음과 같다.[19][20][21][22][23][24][25][26][27]시기 | 내용 | 비고 |
---|---|---|
기원전 510-500년경 | 이전 규정 통합 추정 | IG I3 231–232 |
기원전 475-450년경 | 숭배의 많은 측면을 규제 | IG I3 6 |
기원전 450년경 | 숭배 재정에 관한 내용 | I Eleusis 30 ("코로이보스 법령") |
기원전 350년경 | 숭배의 모든 측면에 대한 상세한 규정 | Agora XVI 56 |
기원전 100년경 | 엘레우시스 행렬 규정 | I Eleusis 250 |
서기 220년경 | 에페보이의 엘레우시스 행렬 참여 규정 | IG II2 1078 |
엘레우시니온 문제와 관련된 주제의 수많은 법령 또한 신전에 세워졌다. 30개의 그러한 법령이 발견되었으며, 이 중 17개에서 21개는 명예를 기리는 내용이다. 이들 대부분은 헬레니즘 시대에 속하며 엘레우시스 비의 조직자들을 기린다.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에는 엘레우시스 숭배의 재정을 담당하는 ''에피스타타이'' 위원회가 매년 숭배의 모든 자산을 나열하는 비문 목록을 세웠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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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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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ndocides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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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IG I³ 38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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