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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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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1259년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했다. 그는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를 지지하며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를 겪고 복위 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1274년 사망했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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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원종 (元宗)
왕전(王倎), 왕식(王植), 왕정(王禎)
일신(日新)
묘호원종(元宗)
시호순효대왕(順孝大王), 충경왕(忠敬王)
출생일1219년 4월 5일
출생지개경, 고려
사망일1274년 7월 23일
사망지제상궁, 개경, 고려
매장지소릉(韶陵)
종교불교
왕조고려
가문왕씨
재위
즉위1260년
첫 번째 재위1260년 ~ 1269년
두 번째 재위1269년 ~ 1274년
태상왕 재위1269년 (5개월)
선왕고종
후왕충렬왕
태상왕 후임왕심 태상왕
첫 번째 재위 선왕고종
첫 번째 재위 후왕영종
두 번째 재위 선왕영종
두 번째 재위 후왕충렬왕
가족 관계
부친고종
모친안혜왕후
배우자정순왕후 (사망)
경창궁주
자녀아들:
왕거
왕태
왕종
왕익장
딸:
딸 1명
경안궁주
함녕궁주
기타

2. 생애

1219년 4월 고종과 안혜왕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235년 봄 정월에 관례를 올리고 태자에 책봉되었다.[1][2][3] 1259년 강화 조약을 맺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아버지 고종이 사망하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하였다.[1][2][3]

그의 아버지 고려 고종은 수십 년간 이어진 몽골의 고려 침입 기간 중 몽골과 협상하기 위해 왕세자였던 원종을 쿠빌라이 칸에게 보냈다.[1][2][3] 당시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에 머물던 아리크 보케와 권력 투쟁 중이었으며, 쿠빌라이 자신은 중국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다.[1][2][3]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고려의 왕세자가 항복하기 위해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쿠빌라이 칸은 크게 기뻐하며 "고려는 옛날 당 태종이 직접 원정을 갔지만 정복하지 못한 나라다. 그런데 이제 그 왕세자가 내 앞에 왔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였다.[1][2][3]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쓰촨 성에서 사망하자, 몽골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대립이 발생하였고,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10]

1260년 3월 원종은 신하들과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에 갔다가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와 합류하였다.[10] 쿠빌라이는 '고려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칭찬하였다.[10]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며, 고려 고종(高宗)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10]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으며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세조구제의 내용은 몽골의 복식 강요 금지, 원나라 사신 외 사신 금지, 개경 환도, 압록강 둔전과 군대 철수, 다루가치 철수, 몽고 잔류 고려인 송환 등이었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쿠빌라이 칸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축출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원종은 전임 국왕인 고종의 장남이었다.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쓰촨 성에서 부상과 질병 후유증으로 죽자, 몽골은 차기 후계 계승을 두고 그의 아우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대립하였고,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1260년 3월 원종은 신하들과 함께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몽케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경조(京兆)와 동관(潼關)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당시 몽골의 제후들은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하였다.[10] 고려 원종은 이를 듣고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가 강남(江南)에서 있어 원종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한 길을 거쳐서 양주(梁州)를 거쳐 초주(楚州)의 교외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 칸은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10]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10]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어쩌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고려에서 고종(高宗)의 훙서를 부고하니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명령하여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10]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머지않아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으며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고

# 사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 개경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원 세조는 불개토풍을 보장했으나 그 외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 모두 격하했다. 원나라 간섭으로 말미암아 원종 이후 왕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으며 시호 앞 글자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자를 넣고,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1인칭인 ""은 "고" 또는 "과인"으로, 황제를 부르는 칭호인 "폐하"는 "전하"로, 황제 뒤를 이을 아들인 "태자"는 "세자"로, 황제 명령을 담은 글인 "성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 이후 충렬왕 때 각종 관청과 관직 명칭도 모두 격하했다.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는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직속령으로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원종은 원나라에 입조하여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원나라는 1290년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반환하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1258년(고종 45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류경, 임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 9년) 12월,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다.[4]

이후 실권을 잡은 임연1269년(원종 9년) 6월,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들은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은 해 11월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복구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다.[4]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원종은 전임 국왕인 고종의 장남이었다.

고려 내부적으로 개경환도를 반대하던 무신세력이 제거되자, 원나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1270년(원종 11년) 38년만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진도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으나 1273년(원종 14년)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274년 6월 18일, 제상궁에서 붕어하였다. 능은 소릉이다.

2. 1. 탄생과 태자 책봉

1219년(고종 6년) 4월 고종과 안혜왕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235년(고종 22년) 봄 정월에 관례를 올리고 태자에 책봉되었다.[1][2][3] 1259년(고종 46년) 강화 조약을 맺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아버지 고종이 사망하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하였다.[1][2][3]

그의 아버지 고려 고종은 수십 년간 이어진 몽골의 고려 침입 기간 중 몽골과 협상하기 위해 왕세자였던 원종을 쿠빌라이 칸에게 보냈다.[1][2][3] 당시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에 머물던 아리크 보케와 권력 투쟁 중이었으며, 쿠빌라이 자신은 중국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다.[1][2][3]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고려의 왕세자가 항복하기 위해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쿠빌라이 칸은 크게 기뻐하며 "고려는 옛날 당 태종이 직접 원정을 갔지만 정복하지 못한 나라다. 그런데 이제 그 왕세자가 내 앞에 왔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였다.[1][2][3]

2. 2. 몽골과의 강화와 즉위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쓰촨 성에서 사망하자, 몽골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대립이 발생하였고,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10]

1260년 3월 원종은 신하들과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에 갔다가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와 합류하였다.[10] 쿠빌라이는 '고려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칭찬하였다.[10]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며, 고려 고종(高宗)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10]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으며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세조구제의 내용은 몽골의 복식 강요 금지, 원나라 사신 외 사신 금지, 개경 환도, 압록강 둔전과 군대 철수, 다루가치 철수, 몽고 잔류 고려인 송환 등이었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쿠빌라이 칸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축출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원종은 전임 국왕인 고종의 장남이었다.

2. 3. 치세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쓰촨 성에서 부상과 질병 후유증으로 죽자, 몽골은 차기 후계 계승을 두고 그의 아우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대립하였고,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1260년 3월 원종은 신하들과 함께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몽케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경조(京兆)와 동관(潼關)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당시 몽골의 제후들은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하였다.[10] 고려 원종은 이를 듣고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가 강남(江南)에서 있어 원종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한 길을 거쳐서 양주(梁州)를 거쳐 초주(楚州)의 교외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 칸은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10]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10]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어쩌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고려에서 고종(高宗)의 훙서를 부고하니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명령하여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10]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머지않아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으며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고

# 사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 개경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원 세조는 불개토풍을 보장했으나 그 외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 모두 격하했다. 원나라 간섭으로 말미암아 원종 이후 왕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으며 시호 앞 글자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자를 넣고,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1인칭인 ""은 "고" 또는 "과인"으로, 황제를 부르는 칭호인 "폐하"는 "전하"로, 황제 뒤를 이을 아들인 "태자"는 "세자"로, 황제 명령을 담은 글인 "성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 이후 충렬왕 때 각종 관청과 관직 명칭도 모두 격하했다.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는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직속령으로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원종은 원나라에 입조하여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원나라는 1290년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반환하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1258년(고종 45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류경, 임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 9년) 12월,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다.[4]

이후 실권을 잡은 임연1269년(원종 9년) 6월,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들은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은 해 11월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복구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다.[4]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원종은 전임 국왕인 고종의 장남이었다.

고려 내부적으로 개경환도를 반대하던 무신세력이 제거되자, 원나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1270년(원종 11년) 38년만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진도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으나 1273년(원종 14년)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2. 3. 1. 몽골(원)과의 관계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쓰촨 성에서 부상과 질병 후유증으로 죽자, 몽골은 차기 후계 계승을 두고 그의 아우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대립하였고,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1260년 3월 원종은 신하들과 함께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몽케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경조(京兆)와 동관(潼關)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당시 몽골의 제후들은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하였다.[10] 고려 원종은 이를 듣고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가 강남(江南)에서 있어 원종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한 길을 거쳐서 양주(梁州)를 거쳐 초주(楚州)의 교외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 칸은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10]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10]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어쩌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고려에서 고종(高宗)의 훙서를 부고하니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명령하여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10]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머지않아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으며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고

# 사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 개경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원 세조는 불개토풍을 보장했으나 그 외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 모두 격하했다. 원나라 간섭으로 말미암아 원종 이후 왕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으며 시호 앞 글자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자를 넣고,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1인칭인 ""은 "고" 또는 "과인"으로, 황제를 부르는 칭호인 "폐하"는 "전하"로, 황제 뒤를 이을 아들인 "태자"는 "세자"로, 황제 명령을 담은 글인 "성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 이후 충렬왕 때 각종 관청과 관직 명칭도 모두 격하했다.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는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직속령으로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원종은 원나라에 입조하여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원나라는 1290년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반환하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2. 3. 2. 무신정권의 종식과 왕정 복고

1258년(고종 45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류경, 임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 9년) 12월,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다.[4]

이후 실권을 잡은 임연1269년(원종 9년) 6월,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들은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은 해 11월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복구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다.[4] 그는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5]

1269년, 임연이라는 군 지도자가 원종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반란군을 축출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원종은 복위 후 1271년 원나라 황실에 조서를 방문했다.

원종은 전임 국왕인 고종의 장남이었다.

2. 3. 3. 개경 환도와 삼별초의 난

고려 내부적으로 개경환도를 반대하던 무신세력이 제거되자, 원나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1270년(원종 11년) 38년만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진도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으나 1273년(원종 14년)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2. 4. 죽음

1274년 6월 18일, 제상궁에서 붕어하였다. 능은 소릉이다.

3. 가족 관계

원종의 부모는 고종과 안혜왕후이다.[11][12] 고종은 강종과 원덕왕후의 아들이고, 안혜왕후는 희종과 성평왕후의 딸이다.[11][12]

원종은 두 명의 왕후와 한 명의 궁녀에게서 자녀를 얻었다.

첫 번째 왕후는 정순왕후 김씨로, 김약선의 딸이자 최우의 외손녀이다.[13] 원종과의 사이에서 충렬왕과 일찍 죽은 공주를 낳았다.[18]

두 번째 왕후는 경창궁주 유씨이다.[14] 신안공 왕전과 가순궁주의 딸로,[15] 원종의 7촌 조카였다. 원종과의 사이에서 시양후 왕태,[17] 순안공 왕종, 경안궁주, 함녕궁주를 낳았다.

궁인에게서는 승려가 된 아들 왕익장을 얻었다.[17]

4. 대중문화 속 원종

참조

[1] 웹사이트 최강의 몽골제국군도 무서워했던… http://leekihwan.kha[...] Kyunghyang Shinmun 2018-03-22
[2] 웹사이트 <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http://www.pressian.[...] 2014-01-03
[3] 웹사이트 중국 남방 행재소에서 몽고 황제가 왕을 후대하다 http://db.history.go[...]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18-03-22
[4] 뉴스 [역사저널 그날]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https://www.medicalw[...] 2016-09-10
[5] 뉴스 [역사저널 그날]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https://www.medicalw[...] 2016-09-10
[6] 기타
[7] 기타
[8] 기타
[9] 기타
[10] 기타
[11] 기타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15] 기타
[16] 서적 고려사 1277-09-16
[17] 서적 고려사 1280-01-23
[18] 서적 동궁비주시책문 https://db.itkc.or.k[...]
[19] 기타
[2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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