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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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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손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본래 이름은 육의(陸議)이며 오군 오현 출신이다. 그는 손권 휘하에서 형주 공방전과 이릉 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승상에까지 올랐다. 육손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 유비와의 이릉 전투에서 촉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위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오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나, 말년에는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의 후계 다툼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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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육손의 청나라 시대 삽화
육손의 청나라 시대 삽화
이름육손
로마자 표기Ru Syon
본명육의
백언
시호소후
출생183년
출생지한나라 오군 오현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망245년 3월 19일 (향년 62세)
사망지오나라 무창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시)
아버지육준
친척육모 (형)
고승의 어머니 (누이)
육강 (종조부)
육기 (재종손)
육개 (친척)
배우자손책의 딸 손부인
자녀육연
육항
직업장군, 정치인
관직
승상244년 1월 또는 2월 ~ 245년 3월 19일
선임고옹
후임보즐
군주손권
상대장군229년 ~ 244년 1월 또는 2월
후임2여대
우도호229년 ~ 244년 1월 또는 2월
대도독222년 ~ 223년 / 228년
보국장군222년 ~ 229년
형주목222년 ~ 229년
진서장군219년 ~ 222년
작위강릉후
군사 활동
주요 참전형주 공방전
이릉 전투
석정 전투
합비신성 전투

2. 생애

육손은 후한강동의 유력 호족인 오군 육씨 출신으로, 어린 시절 원술과 종조부 육강의 갈등 속에서 일족을 이끌고 오군으로 피신했다.[4][92] 203년 손권에게 등용된 후, 해창현에서 둔전을 관리하며 민생 안정에 힘쓰고 산월 등 이민족을 토벌하여 군사력을 확보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124][92][6] 손권의 신임을 얻어 형 손책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강동 내부 평정과 군사력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24][7]

그의 군사적 재능은 형주 공방전에서 크게 발휘되었다. 당시 최전선 사령관이었던 여몽의 추천으로 후임이 되어, 관우를 교묘하게 속여 방심시킨 뒤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형주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14][15][17] 이후 이릉 대전에서는 오나라 군대의 대도독으로 임명되어, 관우의 복수를 위해 침공해 온 유비촉한 대군을 화공 전술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육손은 오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지 시대의 명장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25][31]

유비 사후에도 육손은 오나라의 핵심적인 군사 지도자로서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특히 석정 전투에서는 조휴가 이끄는 위나라 대군을 유인하여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46][49] 234년 위나라와의 전투에서는 신중한 판단으로 군대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지략을 보였으나, 철수 과정에서 석양현을 기습하여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힌 일은 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62][63][65]

말년에는 동오의 승상이라는 최고위직에 올랐으나,[75] 손권의 두 아들인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사이의 후계자 다툼인 이궁의 변에 휘말렸다. 육손은 태자 손화를 지지하며 손권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반대파의 모함과 손권의 계속된 의심과 질책을 받게 되었다.[77][78] 결국 245년, 이러한 정치적 압박과 심적 고통 속에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78][79] 육손 사후 손권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후회했으며,[81] 훗날 오나라의 3대 황제 손휴 대에 '소후'(昭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어 그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79]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육손의 본명은 육의(陸議)이며, 본관은 양주 오군 오현(현재의 장쑤성 쑤저우시 우중 구)이다.[4][92] 그의 가문인 오군 육씨는 강동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대대로 후한의 관리를 지냈다.[124][4] 육씨는 당시 오군강남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4대 가문 중 하나였다.[4] 할아버지 육유(陸紆)와 아버지 육준(陸駿)은 후한 정부에서 관료로 활동했다.[4] 아버지 육준은 덕망 있는 인물이었으나, 구강군 도위 재직 중 일찍 사망했다.[92]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육손은 후한여강군 태수였던 종조부 육강에게 의탁했다.[124][4][92] 당시 세력을 떨치던 군벌 원술은 양주를 장악하고 처음에는 육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93], 194년(흥평 원년) 원술이 헌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황제 참칭을 시도하자 육강은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4] 병량 문제 등으로 대립이 깊어지자[92] 원술은 여강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4] 위협을 느낀 육강은 육손에게 어린 아들 육적을 포함한 일족을 맡기고 본거지인 오군으로 피신시켰다.[124][4][92] 이후 육강은 원술의 부하 손책의 공격을 받아 벌어진 여강 공성전 중 병으로 사망했다.[4] 육손은 육강의 아들인 육적보다 나이가 많았기에[5], 육강 사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육씨 가문을 이끌었다.[4][92]

젊은 시절, 육손의 명성은 같은 오군 출신인 육적이나 고소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장돈, 복정, 오찬 등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았다.[94]

203년(건안 8년), 21세의 나이로 손권 휘하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92] 처음에는 손권 막부의 동조 및 서조 영사(掾史, 비서관 격) 같은 문관직을 맡았다.[92] 이후 해창현의 둔전 도위가 되어 해당 지역을 다스렸다. 당시 해창현은 수년간의 가뭄으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육손은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써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124][92] 이로 인해 '신군'(神君)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95] 또한 당시 오나라를 괴롭히던 산월 등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주민들로 지원병을 모집해 격파하고, 항복한 이들을 군사력으로 흡수했다.[124] 이러한 육손의 능력과 활동을 눈여겨본 손권은 그를 신임하여 형 손책의 딸과 혼인시키고 정치적 조언을 구했다.[124] 특히 육손이 이민족을 평정하여 정예병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손권은 이에 동의하고 그 임무를 맡겼다. 육손은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오나라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124]

2. 2. 손권 휘하에서의 경력

203년(건안 8년), 21세의 나이로 손권 휘하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94] 처음에는 손권 막부의 동서조영사(東西曹令史)라는 문관직을 맡았으며, 이후 해창현(현재 저장성 해녕시)의 둔전 도위가 되어 해창 지역을 다스렸다.[6][95] 당시 해창현은 수년간 가뭄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육손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로 인해 지역 사람들로부터 '신군'(神君)이라 불리며 신뢰를 얻었다.[95][6]

당시 오군, 회계군, 단양군 등 손권의 통치 지역에는 세금과 징병을 피해 숨어 지내는 백성들이 많았고, 산월 등 이민족의 활동도 잦았다. 육손은 이들 가운데 병사를 모집하여 군사력을 강화할 것을 손권에게 건의했다.[6] 그는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을 모집하여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격파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신의 군세에 편입시켰다.[124] 육손은 회계군에서 활동하던 산적 두목 반림(潘臨)을 토벌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여 험난한 지형을 통과하며 진압했으며, 이때 2,000명 이상의 병력을 확보했다.[7] 216년(건안 21년)에는 하제와 함께 파양(鄱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우돌(尤突) 등을 토벌했다. 이 공으로 정위교위(定威校尉)에 임명되어 이포(歷浦)에 주둔하게 되었다.[7][96]

손권은 육손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형 손책의 딸을 아내로 맺어주었으며[124][96], 종종 정치적인 조언을 구했다. 육손은 손권에게 중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동 내부의 산월 등 반항 세력을 평정하여 안정시키고, 그 과정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7][124] 손권은 이 의견에 동의하여 육손에게 실행을 맡겼다.[124]

217년(건안 22년), 손권은 육손을 장하우부독(帳下右部督)[97](친위대 우부 지휘관)에 임명하고, 회계, 파양, 단양 3군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게 했다.[97] 마침 단양의 산월 두목 비잔(費棧)이 조조의 사주를 받아[8]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육손에게 토벌을 명했다. 육손은 비잔의 군대보다 병력이 훨씬 적었지만, 많은 깃발을 세우고 밤중에 북을 울리는 등의 계책을 써서 대군처럼 보이게 하여 기습 공격으로 비잔을 격파했다.[8][97]

이후 육손은 3개 군에서 대대적으로 병사를 모집하여 신체 건강한 젊은이들은 군대에 편입시키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농업 등에 종사하도록 조치하여 총 수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손권 진영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해당 지역의 반대 세력은 일소되어 치안도 안정되었다. 육손은 임무를 마친 후 오호(蕪湖)로 돌아와 주둔했다.[9]

한편, 회계태수 순우식(淳于式)은 육손이 불법적으로 백성을 징집하여 혼란을 야기한다고 손권에게 보고했으나, 육손은 오히려 손권 앞에서 순우식을 칭찬하여 대인배다운 면모를 보였고, 손권은 육손의 이러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2. 3. 형주 공방전과 관우와의 대립

215년경, 적벽 전투 이후 약 6년이 지나 손권유비는 남부 형주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였으나, 상강을 경계로 형주 남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11] 관우는 유비 측 영토를, 여몽은 손권 측 영토를 담당했다.[12]

219년, 오나라와 촉한 간의 형주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던 중, 전선 사령관이었던 여몽은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겠다며 관우를 방심시킬 계획을 세웠다.[13] 손권이 여몽에게 후임자를 묻자, 여몽은 육손이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중요한 임무를 맡을 능력이 있고, 비교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강력히 추천했다.[14] 손권은 여몽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손을 편장군(偏將軍) 겸 우부독(右部督)으로 임명하여 형주 전선을 맡겼다.[14]

육손은 새로운 임지인 육구(陸口; 현재의 적벽시 부근)에 도착하자마자, 관우에게 매우 겸손하고 아첨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그의 공적을 칭찬하며 방심을 유도했다.[15] 이후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우금을 격파하자, 육손은 다시 편지를 보내 그의 위업을 진 문공성복 전투한신의 정형 전투에 비견하며 더욱 치켜세우고, 서황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으니 방비를 철저히 하라는 조언을 덧붙여 관우를 완전히 안심시키고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16]

관우가 완전히 방심하여 형주의 방비를 소홀히 하자, 육손은 이 상황을 손권에게 보고하고 관우를 격파할 작전의 세부 사항을 전달했다. 손권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형주 침공을 명령했고, 여몽과 육손이 선봉에 섰다. 여몽은 양쯔 강을 따라 설치된 관우의 망루를 무력화시키는 잠입 전술을 사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관우의 주요 거점인 공안과 남군(현재의 장링현 부근)을 순식간에 점령했다.[17] 결국 관우는 고립되어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형주 정복의 공로로 육손은 220년 1월경 의도군(宜都郡; 현재의 이두시 부근) 태수(太守zho)로 임명되고, 무변장군(撫邊將軍zho)으로 승진했으며, 화정후(華亭侯zho)로 봉해졌다.[17] 유비가 임명했던 이전 태수 번우(樊友zho)는 도주했고, 군의 관리들과 지역 부족장들은 육손에게 항복했다. 육손은 금, 은, 동으로 관인(官印)을 만들어 이들에게 수여하며 민심을 수습했다.[17]

이후 육손은 형주 내 잔존하는 유비 세력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하인 이이(李異zho)와 사정(謝旌zho)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장수 점안(詹晏zho)과 진봉(陳鳳zho)을 공격하게 하여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방릉군(房陵郡)과 남향현(南鄉縣zho)의 태수 등보(鄧輔zho)와 곽목(郭睦zho)도 격파했다. 자귀현의 유력자인 문포(文布zho)와 등개(鄧凱zho)가 수천 명의 병력을 모아 저항하자, 사정을 보내 이들을 격파했고, 서쪽으로 도망쳤던 문포를 유인하여 손권에게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18] 이 과정에서 육손은 수만 명의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귀순시켜 형주를 완전히 평정했다.[19]

이러한 큰 공적을 인정받아 육손은 우호군(右護軍), 진서장군(鎮西將軍)으로 승진하고, 작위도 루후(婁侯)로 격상되었다.[19][98] 손권은 육손의 공을 높이 사, 양주 자사 여범에게 명하여 육손의 복무 기록을 소급 적용하여 그를 별가종사로 삼고 무재로 추천하게 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20][99]

육손은 새롭게 오나라 영토가 된 형주 지역에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음에도 제대로 등용되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활용할 것을 건의했다.[21][22] 손권은 육손의 제안을 합리적이라 여기고 이를 받아들였다.[23]

2. 4. 이릉 대전에서의 활약

220년 말, 조비가 헌제에게 선위를 강요하여 조위를 건국했고, 2년 후 유비촉한을 건국하며 황제를 칭했다. 손권은 조비에게 복종하여 '오왕'(吳王) 칭호를 받았으나, 222년 말 독립을 선언했다.[24]

222년 초,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하고 잃어버린 형주 남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다(이릉 대전).[25]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鮮于丹중국어), 손환 등 5만 명의 병력을 주어 이를 막게 했다.[25]

촉군은 무협, 건평, 연평을 지나 이릉(夷陵; 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 외곽에 도착해 여러 야영지를 건설했고, 유비는 이릉 지역 토착 부족들에게 금과 비단을 주어 회유했다. 풍습이 대도독, 장남(張南중국어)이 선봉을 맡았고, 오반은 수천 명의 병사로 평지에 야영지를 건설하여 오군을 도발했다.[25]

오나라 장수들은 도발에 응하려 했으나, 육손은 "이것은 함정일 것이다. 먼저 관망해야 한다"고 말하며 제지했다.[26] 그는 유비군의 높은 사기와 험준한 지형을 이유로 초기 공격을 반대하며, "지금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고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며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 적이 산악 지형에 있기 때문에 나무와 돌 사이에 끼어 전면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나라 장수들은 육손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적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여 매우 불만을 품었다.[27] 육손은 손권에게 보고서를 보내 이릉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유비가 스스로 불리한 위치에 들어왔으므로 패배는 시간문제이며 주군께서는 안심하시라고 전했다.[29]

육손의 화공으로 불타는 촉군 진영


오랜 대치 상태가 이어지자 오나라 장수들은 7~8개월간의 교착 상태와 강화된 적의 진지에 대해 불평하며 초기 공격을 주장했다. 육손은 이에 대해 "유비는 교활하고 경험이 많습니다. 초기에 그의 군대는 매우 집중되어 있었고 사기가 매우 높았기에, 당시에는 그들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꽤 흘렀고, 그들은 이미 지쳐서 사기가 떨어졌고, 생각도 막혔습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그들을 다각적으로 공격할 때입니다."라고 답했다.[30]

전투에 참여한 많은 오나라 장수들은 손책 시대부터 오나라에서 복무했거나 손씨 가문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높게 평가했고 육손의 명령에 따르기를 꺼려했다.[34] 육손은 칼을 책상에 놓고 군령의 엄중함을 강조하며 말했다. "유비는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조조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가 우리 국경에 있으며,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국가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니, 화합하고 협력하여 적을 물리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비록 미천한 선비일지라도, 우리 주군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국가가 여러분에게 몸을 낮추고 제 명령에 복종하도록 요구하는 이유는 제가 약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더 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굴욕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는 자신의 임무가 있으니, 그것을 핑계 삼을 수 없습니다! 군사 규칙은 오래전에 확립되었습니다.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35]

육손은 먼저 적의 한 야영지를 시험 삼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오나라 장교들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불평하자, 육손은 "나는 적을 꺾기 위한 전략을 고안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각각 짚단을 들고 적에게 화공 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화공 공격이 시작되자 육손은 모든 오나라 부대를 이끌고 촉나라 군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다. 촉나라 장수 장남과 풍습, 그리고 부족 왕 사마가 (유비의 동맹)가 전투에서 사망했고, 오나라 군대는 40개가 넘는 촉나라 야영지를 파괴했다.[31]

촉나라 장교 두로(杜路중국어), 유녕() 등은 탈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항복했다. 유비와 그의 남은 병사들은 마안산()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오나라 군대의 맹렬한 공격과 산사태로 큰 피해를 입었다. 유비는 밤에 도망쳐 부하들에게 갑옷을 쌓아 불태워 추격을 막도록 명령하고 백제성으로 퇴각했다. 그의 모든 배, 군사장비, 보급품은 오나라 군대에 의해 탈취되었고, 강은 촉나라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다. 유비는 자신의 패배에 극도로 화가 나 "내가 육손에게 굴욕을 당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외쳤다.[32]

전투 중, 별동대를 이끌던 손환이 이도(夷道중국어)에서 촉군에게 포위되어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른 오나라 장교들이 "손 장군은 우리 주군의 친척입니다. 포위되었으니 우리가 그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육손은 "그는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그의 기지는 잘 방어되어 있으며, 충분한 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계획이 실행되면,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아도 포위는 자동으로 풀릴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오나라가 승리한 후, 손환은 육손을 찾아와 말했다. "아까 당신이 나를 돕기를 거절했을 때는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리 후에, 당신이 당신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33]

오나라 장교들은 오나라의 승리 후 육손의 전략 덕분에 그에게 더 큰 존경심을 보이기 시작했다.[36] 손권은 장수들이 명령에 불복했던 일을 듣고 육손에게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물었다.[37] 육손은 자신은 린상여와 구순처럼 동료와의 불화를 참고 국가의 공동선을 위해 일하고자 했다고 답했다.[38][39][40] 손권은 웃으며 육손을 칭찬하고 보국장군()으로 승진시키고, 형주 자사(牧중국어)로 임명했으며, 그의 후작 작위를 "강릉후"(江陵侯중국어)로 변경했다.[41]

유비가 백제성으로 퇴각한 후, 오나라의 장수 서성, 반장, 송겸 등은 백제성을 공격하여 유비를 사로잡을 것을 제안했다. 손권이 육손에게 의견을 묻자, 육손은 주연, 낙통과 마찬가지로 조비가 군대를 모아 오나라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며 유비 추격을 포기하고 오나라로 돌아가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비는 조위 군대를 이끌고 세 방향에서 오나라를 침공했다.[42]

유비는 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공격할 경우 성공 가능성을 물었다.[43] 육손은 촉군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화해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며, 다시 공격할 때가 아니라고 답했다.[44]

유비는 22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유선이 촉나라 황제가 되었다. 제갈량은 촉나라의 정부 수장이 되어 오나라와 평화를 맺고 위나라에 대항하는 오-촉 동맹을 재건했다. 손권은 육손에게 제갈량에게 답신할 권한을 부여하고, 그의 관인을 복제하여 사용하도록 했다.[45]

2. 5. 유비 사후와 위나라와의 관계

유비가 병으로 사망한 후, 오나라촉한은 촉한 사신 등지의 중재를 받아들여 다시 우호 관계를 맺고 함께 위나라에 대항하기로 했다. 이 시기 육손은 오나라에게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위나라가 자주 오나라를 침공했지만 그때마다 육손의 전략 덕분에 이를 막아낼 수 있었다.

=== 석정 전투 ===

228년, 손권은 주방에게 거짓으로 위나라에 투항하는 척하여 위나라대사마 조휴를 유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휴는 이 계략에 속아 군대를 이끌고 완현(皖縣,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현)의 오나라 주둔지를 공격했다. 손권은 육손에게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색 의장 도끼를 하사하고 다시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6개 군과 황실 호위 병력을 지휘하며 위나라 침략군에 맞서게 했다.[46] 이로써 육손은 손권을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할 전권을 갖게 되었고, 손권은 모든 신하들에게 육손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47][48]

조휴는 주방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병력이 우세하고 잘 훈련되었다고 판단하여 전투를 강행했다. 석정 전투에서 육손은 중앙에서 지휘하고 주환전종이 각각 좌우익을 맡아 동시에 진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매복해 있던 조휴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협석(夾石)까지 추격하여 수천 명의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많은 군수 물자를 노획했다. 조휴는 위나라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육손과 승리한 오나라 군대는 오창(武昌,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으로 개선했고, 손권은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다. 손권은 육손에게 황제의 일산을 씌워주도록 명하고 많은 선물을 하사하는 등,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후 육손은 서릉현(西陵縣, 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 시링구)으로 이동하여 주둔했다.[49]

=== 234년 위나라와의 전투 ===

234년[61]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 신성을 공격할 때, 육손과 제갈근은 별도로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상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육손이 보낸 보고 전달자 한편(韓扁)이 돌아오는 길에 위나라 순찰대에 붙잡히자, 이 소식을 들은 제갈근은 불안해하며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즉시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폐하께서 이미 군대를 철수하셨고, 적이 한편을 사로잡아 우리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물도 마르고 있으니 서둘러 후퇴해야 합니다."

그러나 육손은 답장하지 않고, 오히려 부하들에게 순무와 완두를 심게 하고 장수들과 바둑을 두는 등 태연하게 행동했다. 제갈근은 "백언(육손의 자)은 지략이 뛰어나니 분명 계획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직접 육손을 찾아갔다. 육손은 제갈근에게 "적들은 폐하께서 철수하신 것을 알았으니 우리에게 집중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이미 중요 지점에 병력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침착하게 병사들을 안정시킨 후, 계획을 세워 철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후퇴하는 기색을 보이면 적들은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공격해 올 것이며,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62]

육손은 제갈근에게 비밀리에 철수 계획을 알리고 함대를 준비하게 하는 한편,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상양으로 진격하는 척했다. 육손을 경계하고 있던 위나라 군대는 오군이 접근하자 성 안으로 급히 후퇴했다. 육손은 군대를 정비하여 상양을 공격할 것처럼 위장한 뒤, 제갈근의 함대가 도착하자 질서정연하게 배에 올라 철수했다. 상양의 위나라 군대는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63]

오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백위(白圍)를 지날 때, 육손은 사냥을 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실제로는 부하인 주준(周峻)과 장량(張梁)에게 은밀히 명령하여 강하군의 신시(新市), 안륙(安陸), 석양(石陽) 현을 기습하게 했다. 특히 석양현에서는 시장에서 활동하던 백성들이 갑작스러운 습격에 성 안으로 피하려 했으나, 위나라 군인들이 성문을 닫는 과정에서 길을 막은 민간인 일부를 죽이고 억지로 문을 닫았다. 주준의 군대는 이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해하고 포로로 잡았다. 육손은 포로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가족과 함께 잡힌 포로들은 보살폈으며, 습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위로한 뒤 돌려보냈다. 이에 감동한 일부 사람들과 인근 위나라 관리 조탁(趙濯), 비생(斐生), 부족장 매이(梅頤) 등이 오나라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가 배송지삼국지 주석에서 육손의 석양현 습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배송지는 육손이 성공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킨 후에도 작은 현을 습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한 것은 부당하며 잔혹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 "육손은 손권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 군대가 자신에게 공격을 집중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척하여 적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후 그는 안전하게 물러났고, 아무런 걱정 없이 오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하들에게 작은 현을 습격하게 하여, 번화한 시장의 백성들을 공포와 당황 속에 몰아넣고, 민간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해를 입혔는가? 1,000명의 민간인 손실은 위나라에게 미미한 영향일지 모르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순수한 잔혹함과 야만성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제갈량촉한 군대가 제갈량의 북벌 동안 위수 주변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전쟁의 규칙이 위반되었고, 그러한 죄는 처벌받지 않을 수 없다. 동오(東吳)는 3대를 넘기지 못하고 손호 시대에 멸망했다. 이것이 응보가 아니겠는가?"[65]

석양현 습격 이후 육손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배송지는 이렇게 언급했다.

> "이는 숲 속의 모든 새 둥지를 파괴한 후 한 마리의 새끼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토록 잔혹한 학살의 손실을 어떻게 이런 사소한 자비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66]

2. 6. 승상 취임과 이궁의 변

244년 1월 27일에서 2월 25일 사이,[74] 육손은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 丞相zho )에 임명되었다. 당시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75]

>짐은 덕이 부족하지만 하늘의 은총으로 보위에 올랐다. 천하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사악한 악당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짐은 근심에 잠겨 밤에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 그대는 뛰어난 지혜와 슬기를 갖추었고, 그대의 총명함과 도덕적 덕성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대는 군사 임무를 맡아 위태로운 시기에 국가를 잘 지켜냈다. 전례 없는 영광을 이룬 자는 그에 걸맞은 영예와 은총을 받을 것이고, 문무의 재능을 가진 자는 반드시 국가를 다스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과거 이윤과 여상은 각각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을 보좌했다. 그대는 내정과 외정을 모두 관장한다. 오늘 짐은 그대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의식부 대신이자 황제의 홀을 받드는 자인 부창(傅常)으로 하여금 그대에게 승상의 관인을 수여하도록 한다. 그대는 도덕적 덕성을 증진하고, 존경받을 만한 업적을 이루며, 황제의 명령을 존중하고 따르며, 천하를 평안하게 해야 한다. 그대는 이제 삼공의 사무를 총괄하므로, 관리들의 기강을 유지하고 그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대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직책을 겸임할 것이다. 형주의 자사; 수도 우익 방어사; 무창 (오늘날의 어저우, 후베이성)의 사무 총감독.[76]

승상에 오른 후 육손은 손권의 두 아들,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사이의 후계자 분쟁, 이른바 이궁의 변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이 두 왕자와 연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을 왕자들의 관직에 추천했는데, 육손은 이들 중 상당수가 자격 미달이며 이는 연고주의에 기반한 사적 이익 추구라고 비판했다. 특히 육손은 두 왕자가 동등한 세력을 가지면서 각자 지지자를 모으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고 동오의 안정에 해를 끼칠 것이라 우려했다.[77] 육손은 이미 태자로 책봉된 손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손패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전기( 全寄zho )는 노왕 손패의 측근으로서 태자 손화를 몰아내려 했는데, 그의 아버지인 위장군 전종은 아들을 옹호했다. 육손은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 전기의 행동을 방치하면 가문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전종은 이를 무시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77]

손화의 태자 자리가 위태롭다는 소문이 돌자, 육손은 손권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태자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되며, 노왕 손패는 제후로서 태자보다 낮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권에게 직접 이 문제를 아뢰기 위해 수도 건업으로 가기를 청했으나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78]

결국 손패파의 모함으로 육손의 외조카이자 태자 손화를 지지했던 고담, 고승( 顧承zho ), 요신( 姚信zho ) 등은 유배되었고, 육손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태자태부( 太子太傅zho ) 오찬은 하옥되어 처형당했다.[78] 손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육손을 질책했다. 계속된 압박과 심적 고통 속에 육손은 이듬해인 245년 63세의 나이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78]

2. 7. 사후

육손은 손권의 질책과 후계자 문제에 대한 압박 속에서 245년 3월 19일[1], 향년 63세(만 62세)의 나이로 화병으로 분사했다.[79] 그는 검소하여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79]

육손이 죽은 뒤에도 손권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양축[107]이라는 인물이 육손에 관한 20가지 죄상을 날조하여 상소하자, 손권은 이를 근거로 아들 육항을 금고(禁錮)하였다. 그러나 육항이 아버지의 무고함을 조목조목 변론하자, 손권은 마침내 의심을 풀었다.

태원 원년(251년) 겨울,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후회했다. 병 치료를 마치고 임지로 돌아가는 육항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예전에 나는 근거 없는 소문을 믿고 그대의 아버지의 충언을 이해하지 못했소. 그대에게 실망을 안겨줬소. 그대의 아버지에 대한 비방이 담긴 모든 문서를 불태워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하겠소."라고 사과했다.[81]

후일 오나라의 3대 황제인 손휴 대에 이르러, 육손은 '소후'(昭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79]

3. 가족 관계

육손의 초상화


216년 이후, 정위교위(定威校尉)로 임명되었을 때, 손권의 주선으로 손책의 장녀와 결혼하여 손씨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84]

육손의 장남 육연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육손의 작위는 차남인 육강에게 상속되었으며, 육강은 마지막 동오 황제 손호 치세 동안 동오의 저명한 장군으로 활약했다. 육강은 육연(陸晏), 육경, 육현(陸玄), 육기, 육운,[85] 육담(陸耽)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86]

육손의 동생 육모 역시 동오에서 관료로 활동했다.[87] 종조부 육강의 아들인 육기는 24효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손권 밑에서 관료로 일했다.[88] 육손의 친척인 육개는 동오의 9대 재상을 지냈다.[89]

4. 평가

육손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검소한 성품을 지녔고, 선견지명과 주도면밀함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108] 손권은 육손을 주유에 버금가는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공근(주유)은 용감하고 담략은 사람을 겸비하여 마침내 맹덕(조조)을 꺾고 형주를 개척했다. 아득히 이어받기 어려운데, 그대가 지금 이것을 잇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나라 신하들 중 능력 면에서는 주유와 함께 높게 평가받는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과 육손만을 단독 열전으로 다루며 그의 뛰어난 계략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으나,[83] 주석을 단 배송지는 석양 급습 등 일부 행적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65][66]

육기는 육손을 주유, 여몽, 노숙과 함께 "궁중에 들어가서는 복심(腹心)이 되고, 지방에 나가서는 고굉(股肱)이 되었다"라고 평했다.

후대에 이르러 육손은 당나라 때 선정된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동진의 원굉이 지은 "삼국명신서찬"(『문선』 수록)에서도 오나라의 명신 7명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118][119] 젊은이들에게는 엄격한 면모를 보였으며,[82] 이릉 전투 등 큰 공적을 세웠음에도 무관보다는 문관으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다는 평가도 있다.[102]

4. 1. 긍정적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육손의 전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83]

: 유비는 당대의 영웅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당시 젊고 비교적 무명이었던 육손은 유비를 물리쳤다. 육손의 뛰어난 전략은 손권의 그의 재능에 대한 인정을 받으면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육손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진실했다. 그는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죽었고, 아마도 그의 국가의 중요한 기둥이었을 것이다.

육손은 선견지명이 뛰어나고 주도면밀하게 숙고하는 능력을 지녔다. 기엄이 영부의 논을 만들었을 때, 육손은 이것이 반드시 재앙을 일으킬 것이라고 간언하며 문제점을 정확히 예측했다. 또한, 광릉의 楊笁|양주zho가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었지만, 육손은 그의 실패를 예견하고 양주의 형인 楊穆|양목zho에게 양주와 관계를 끊으라고 조언했다. 육손의 예측대로 양주는 훗날 손화손패의 후계 다툼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82]

성품은 충성스럽고 정직했으며, 조정에서는 엄숙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검소한 생활을 하여 사망했을 때 집에 남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108] 또한 청렴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엄격한 면모를 보였다. 제갈각에게 "나는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고, 나보다 낮은 사람을 돕는다. 네가 너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하고, 너보다 낮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보니, 이는 안정적인 경력을 쌓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충고하며 경계했다.[82] 또한 젊은 황족의 교육을 맡아 손려, 손송, 사경(황태자 손등의 빈객) 등에게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는 일화가 많다.

이릉 전투 등 공적을 세웠지만, 대신들 중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으로서의 명성이 높았다.[102] 초기에는 손권과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손권은 육손에게 "나와 당신은 정을 나누는 것이 특별히 다르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번성 전투에서 급속한 승진을 하였고, 석정 전투의 전별 연회와 그 후의 축하 연회 등으로 보아 손권과의 친밀함을 엿볼 수 있다. 『전당문』에는 "오군 밀옥사 육손지 금환, 형혁휘영, 막유어차"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손권으로부터 금환을 하사받았음을 알 수 있다.

4. 2. 부정적 평가

역사가 배송지는 《삼국지》에서 육손의 전기를 주석하면서 석양현 습격을 비난하며 이는 완전히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65]

: ''"육손은 손권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 군대가 자신에게 공격을 집중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척하여 적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후 그는 안전하게 물러났고, 아무런 걱정 없이 오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하들에게 작은 현을 습격하게 하여, 번화한 시장의 백성들을 공포와 당황 속에 몰아넣고, 민간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해를 입혔는가? 1,000명의 민간인 손실은 위나라에게 미미한 영향일지 모르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순수한 잔혹함과 야만성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제갈량촉한 군대가 제갈량의 북벌 동안 위수 주변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전쟁의 규칙이 위반되었고, 그러한 죄는 처벌받지 않을 수 없다. 동오(東吳)는 3대를 넘기지 못하고 손호 시대에 멸망했다. 이것이 응보가 아니겠는가?"''

석양현 습격 이후 육손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서도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66]

: ''"이는 숲 속의 모든 새 둥지를 파괴한 후 한 마리의 새끼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토록 잔혹한 학살의 손실을 어떻게 이런 사소한 자비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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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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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Lu Shi Shisong annotation in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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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서적 건강실록
[124] 서적 오서13 육손전
[125] 서적 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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