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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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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치호 일기는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기록한 일기이다. 초기에는 한문과 국문으로 작성되었으며, 후반에는 영문으로 기록되었다. 일기에는 개화기 조선 사회의 모습, 윤치호의 개인적인 경험, 미국 유학 및 청나라 체류, 국내 활동, 일제강점기 동안의 경험 등이 담겨 있으며, 특히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여성,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 있다. 1910년부터 1915년 사이의 일기는 소실되었으며, 6.25 전쟁 당시 분실 위험을 피해 일부는 미국으로 보내졌고,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되어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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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
기본 정보
이름윤치호일기 (尹致昊日記)
유형대한민국의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2-6 국사편찬위원회
제작 시기조선~일제강점기
관련 정보
참고 문헌정용화, "문명개화론의 덫 - 『윤치호일기』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41(4), 2001.
김정렬, 박정례, "좌옹 윤치호의 영어 일기 분석", 영어영문학연구 50(2), 2008.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 윤치호 컬렉션

2. 시기별 특징

윤치호 일기는 작성 시기에 따라 사용된 언어와 내용, 관점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83년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는 국문으로,[1] 1889년 12월 7일 이후부터는 영어로 쓰였다.[1] 윤치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기를 볼 것을 염려하여 1889년 12월 7일부터는 영어 어휘력 공부를 겸하여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1]

1889년1894년 사이의 일기에는 존경하는 미래 씨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쓴 내용도 있다.

1910년부터 1915년 사이의 일기는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조선총독부 경찰에 끌려갔을 때 압수당하여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2. 1. 초기 (1883년 ~ 1889년)

윤치호는 초기 일기를 한문과 국문으로 작성했다.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는 국문으로[1] 일기를 썼다.

초기 일기에는 개화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윤치호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다. 윤치호일본 유학 시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갑신정변 전후로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실망, 개화파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 등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884년 말부터 1888년 말까지 중국 유학 시기 일기에는 상하이에서의 대학 생활과 당시 중국의 상황, 상하이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의 동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중국 내 조선인 유학생들의 실태, 중국인 가정의 불결한 위생 상태, 영국인 등 유럽인들이 중국인을 멸시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2. 1. 1. 한문 일기 (1883년 ~ 1887년)

윤치호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 한문으로 일기를 작성했다. 이 기간 중 1883년 1월 1일부터 1월 16일까지의 일기는 임오일기(壬午日記)로 불리며, 윤치호 생전에 언론에 공개되어 1934년개벽》지 제1호에 실리기도 했다.

1880년대 초 일본 유학 시절과 귀국 직후의 일기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상과 김옥균 등 인사들의 도쿄 체류 동향, 일본 내 한국인 동향이 기록되어 있다. 1883년~1884년 국내 체류 시기 일기에는 국내외 정세, 특히 미국공사관과 개화당 및 갑신정변 관련 기록이 상세히 담겨있다. 초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존경심과 기대, 개화파 김옥균박영효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갑신정변 전후로 이들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왕과 왕비에 대한 실망과 경계를 표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2. 1. 2. 국문 일기 (1887년 ~ 1889년)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 윤치호는 일기를 국문으로 작성했다.[1]

2. 2. 미국 유학 시기 (1888년 ~ 1893년)

1888년 11월부터 1893년 10월까지 미국 유학 시기의 일기에는 사소한 개인 이야기, 고국의 부모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과 에모리 대학(Emory)에서의 대학 생활과 신앙 활동 및 강연 활동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의 문명 발전과 인종차별 문제, 현지 성경 설교 순회 강연 시 만나본 미국인들의 생활, 일부 목회자들의 음주와 사창가 출입 등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미국 유학 중 윤치호아프리카기독교 선교를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말 오전 예배 때 흑인들을 모조리 박멸해야 한다는 어느 남부 감리교 목사의 이중적인 발언을 듣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2. 3. 청나라 체류 시기 (1893년 ~ 1894년)

1893년 11월부터 1894년 12월까지 윤치호청나라에 체류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혼인을 하였고, 김옥균 암살 전후 상황과 청일전쟁의 경과를 지켜보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 총영사관 직원들과 민영익 등 여러 조선인들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윤치호는 이들의 활동 상황을 일기에 기록했다. 또한, 영국과 유럽 열강이 청나라를 공략하려 한다는 소문과,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만주, 베트남,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정세도 일기에 언급했다.

윤치호는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상과 위생 상태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특히 중국인 가정의 불결한 위생 상태를 언급했다.

2. 4. 국내 활동 시기 (1895년 ~ 1907년)

1895년 1월 귀국 후 1907년까지 국내 활동 시기의 일기에는 국내 정치, 사회 분위기와 갑오개혁, 을미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의 전후 사정과 당시 부패하고 경직된 관리들의 태도, 명성황후 암살 사건 전후의 정치 상황,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수행원 참석 관계의 여행 과정 및 독립신문 편집 참여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의 인권 운동, 국권·민권 운동의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일기에는 주로 국내 관료들의 무능함과 부패함, 표리부동한 처신과 행동 등이 담겨져 있고, 언문을 사용할 것을 상주하자 나는 언문을 배우지 못했다는 김홍집 외 일부 고관들의 반발, 개화파와 민권 운동에 대한 모함을 하는 일부 관료들에 대한 의견이 담겨 있다. 1896년 이후의 일기에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무고하는 황국협회조병식을 비롯한 정부 대신들에 대한 비판, 고종에 대한 경멸과 대한제국 황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의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을미사변 당시의 일기와 이후 일기에서 왕비 암살에 유길준을 비롯한 조선인 협력자들이 가담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2. 5. 일제강점기 (1916년 ~ 1943년)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차별 정책과 세금 인상, 구한국 화폐 이용 금지, 3·1 만세 운동과 일부 민족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 1920년대 총독 교체 이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는 과정,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당시 자신의 입장과 국내외 지식인의 동향, 독립운동가 및 반체제인사들의 활동사항, 조선총독부의 대응, 조선총독부의 역차별과 총독부 관리들의 실적 올리기식 정책 등과 한국인의 어려운 생활상, 해외에 망명한 한국인 교포들에 대한 일본 헌병, 중국 마적, 한국인 독립운동가, 공산당 빨치산 등에 의한 이중삼중의 약탈, 그가 1920년대부터 맡던 각종 기독교단체 및 기독교 단체 사람들의 관계와 활동사항, 특히 YMCA 청년회 서울지부 및 YMCA중앙기독교청년회 본부 일과 기타 교육사업·사회사업 문제, 그밖에 적극신앙단 사건 등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3. 사회상 및 윤치호의 비판적 시각

윤치호 일기에는 당시 조선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문제점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초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존경심과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등에 대한 기대를 보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전후로 이들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왕과 왕비에 대해 실망하고 경계하는 내용을 담았다. 1895년 일기에는 국내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표리부동한 처신, 언문 사용 상주에 대한 김홍집 등 일부 고관들의 반발, 개화파와 민권운동에 대한 모함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이후 일기에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무고하는 황국협회조병식 등에 대한 비판, 고종에 대한 경멸,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회의감이 나타나 있다.

1900년대 일기에는 민중의 무기력, 고위층의 부패와 타락한 지식인, 무능력한 중류층, 조선 사회의 위생관념 결여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일 합방 조약 이후 고종 측근 신하들의 석연찮은 행동과 고종 독살설한진창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 윤덕영 등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일제강점기 일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차별 정책, 세금 인상, 구 한국 화폐 이용 금지, 해외 망명 한국인 교포들에 대한 일본 헌병, 중국 마적, 한국인 독립운동가, 공산당 빨치산 등의 이중 삼중 약탈, YMCA 청년회 서울지부 및 YMCA중앙기독교청년회 본부 활동, 기타 교육·사회사업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다.[1]

3. 1. 조선 사회의 문제점

윤치호는 조선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비판했다.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 글을 모르는 고위 관리, 사치스러운 결혼식과 장례식 문화도 그의 비판 대상이었다.

특히 지방 관리들의 부패, 개신교, 천주교 선교사들의 권력 남용, 철도 부설권을 외국에 넘기는 문제 등을 지적하며 조선 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모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슬퍼하기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슬픈 척하는 모습, 사촌의 호화로운 결혼식에 박영효의 이름을 넣은 것 등을 예로 들며 조선 사회의 허례허식을 비판했다.

3. 2. 여성 문제

윤치호는 남성 중심적인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에 주목했다. 그는 남성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으며, 부당하게 이혼당한 나혜석, 박인덕 등의 여성들 편에 섰다.[1]

3. 3.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1919년 3·1 운동 당시 윤치호는 일부 민족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였다.[1] 그는 이광수최남선이 민족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도, 민족 대표자 서명에는 서명을 거절한 것을 비판했다.[1] 또한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30년대 후반 앞장서서 총독부 학무국에 협력한 것을 비판했다.[1] 적극신앙단신흥우와 가깝게 지내던 박인덕에 대한 동정심을 버리고 비판적인 태도로 변하기도 했다.[1]

4. 일기의 소실과 복원

1943년까지의 일기는 남아있으나, 1943년 이후 1945년까지는 윤치호가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인지, 분실 또는 파손되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경기도 개성에 있던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일기 일부를 소장하고 월남했고, 나머지 일제강점기 부분은 미국에 있는 동생이자 한국영사관 외교관인 윤장선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1968년 휴전 후 윤영선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 자료를 기증하면서 일기가 번역되었다. 이후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윤장선 역시 1980년대 중반 형에게서 받은 자료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 택배로 기증했다.

참조

[1] 저널 문명개화론의 덫 - 『윤치호일기』를 중심으로 http://dbpia.co.kr/v[...] 2012-02-21
[2] 저널 좌옹 윤치호의 영어 일기 분석 2012-02-21
[3] 웹사이트 Yun Chi-Ho papers http://findingaid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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