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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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재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87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했다. 1909년 이완용 암살을 시도하여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고 자신의 행동이 독립을 위한 의거임을 주장했으며, 1910년 2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재명 (독립운동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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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이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피습, 칼로 흉부를 자격하여 이완용이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보도
이름이재명
한자 표기李在明
출생일1887년 10월 16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선천군
사망일1910년 9월 30일
사망지일제 강점기 경성부 경성감옥
국적대한제국
본관진안
학력평안남도 평양 일신보통학교 졸업
종교개신교
거주지평안남도 평양
하와이주 호놀룰루
한성부
활동
관련 활동독립운동
직업항일 독립운동가
훈장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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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독립유공자 공훈록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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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공립협회 활동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재명은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평안도 순시에 동행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들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기다렸으나, 이토 히로부미 곁에 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활동지를 옮겼다.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이재명은 다음 목표로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호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1909년 12월 22일, 당시 서울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추도식이 열렸다. 이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위장하고 성당 문밖에서 기다렸다. 오전 11시 30분경, 추도식을 마치고 나온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는 것을 보고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아서자 그를 칼로 제압하고, 인력거에 타고 있던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여러 차례 찔렀다.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쓰러지자 죽었다고 판단한 이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거사 직후 현장에 있던 일본 순사의 칼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옮겨져 일본인 의사들의 외과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체포된 이재명은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공판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개인적인 원한이나 범죄(흉행)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의로운 행동(의행)이었음을 당당히 주장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를 강하게 규탄했다.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결국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그의 의거를 도왔던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등 11명의 동지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7년(고종 24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했고 평안남도 대동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1890년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주로 평양에서 성장했으며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 졸업 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2.2. 해외 이민과 독립운동 투신

1904년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가 1906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공립협회는 이완용 등 매국 행위자 처단을 결의했고, 이재명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직접 실행자로 자원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한 결심을 굳힌 그는 1907년 10월, 일본도쿄와 나가사키를 거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동지들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들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국권을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로 다짐했다.

3.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후, 이재명 의사는 국내의 매국노를 제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을사오적의 핵심 인물인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은 이재명 의사는 군밤장수로 위장하고 성당 앞에서 기다렸다. 추도식을 마치고 나온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재명 의사는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혔다. 비록 이완용은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으나, 이재명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의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하였다.

체포 후 재판 과정에서 이재명 의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며 자신의 행동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흉행'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거임을 당당히 밝혔다. 그는 공판 과정 내내 자신의 거사가 정당했음을 주장하며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1910년 5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같은 해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 의거는 비록 최종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침략과 매국노들의 반민족 행위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에 동참했던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 암살 계획 및 준비

1907년, 조국을 뒤흔든 을사늑약한일신협약 체결 소식을 접한 이재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설립 공립협회의 매국노 처단 결의에 따라 실행자로 자원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도쿄와 나가사키를 거쳐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과 평양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주요 인물들과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같은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여 민족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굳게 다짐했다.

1909년 1월, 순종 황제가 평안도를 순시할 때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동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재명은 동지 몇 명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기회를 노렸으나, 이토 히로부미 곁에 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염려한 안창호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거사를 단념해야 했다. 이후 이재명은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했다는 의거 소식을 접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3.2. 암살 시도 및 체포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이재명은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호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사를 계획했다.

당일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성당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 오전 11시 30분경, 추도식을 마치고 나온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자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때 인력거꾼 박원문이 제지하자 그를 칼로 제압한 뒤,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다시 어깨 등을 여러 차례 찔렀다. 이재명은 이완용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인력거꾼 박원문은 사망했다. 거사 직후, 이재명은 출동한 일본 순사의 칼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완용은 폐를 찔리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나, 즉시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옮겨져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3.3. 재판 및 순국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공판 과정에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행동이 단순한 살인 미수가 아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거였음을 당당히 밝혔다.

1910년 5월 18일, 일제에 의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로운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 의거에 함께 참여했던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등 11명의 동지들 역시 일제에 의해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4. 사후

이재명 의사의 의거는 후대에 높이 평가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그의 삶과 의거는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4.1.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및 기념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명동성당 입구에는 1999년 그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석이 세워졌다. 2001년 12월에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진안 이씨 후손들이 전라북도 진안군 군하리에 그의 의거를 기리는 동상을 건립하였다.

4.2. 문학 작품에서의 재조명

박상우의 장편소설 《칼》은 이재명과 그의 이완용 습격 의거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5. 이재명 의거의 역사적 의의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의거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행위를 넘어,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에 대한 민족 전체의 분노와 저항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의거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초기, 좌절감에 빠져 있던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꺼져가던 민족의 독립 의지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완용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이재명 의사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일제와 친일 세력에게 경각심을 주었으며, 이후 전개될 독립운동에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의거는 불의에 맞선 용기와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하며,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이는 이후 여러 독립운동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