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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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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은 전쟁의 결과로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들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했던 보상금이다. 1918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 프랑스의 주도로 독일의 전쟁 책임을 묻고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배상 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배상금 액수와 지불 방식에 대한 연합국 간의 이견과 독일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배상금 지불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스 안과 영 안 등 배상금 지불을 위한 여러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대공황의 영향과 독일의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배상금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독일은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고, 나치 정권 하에서 모든 배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전후 서독 정부는 런던 채무 협정을 통해 배상금 지불을 재개했지만, 2010년에야 모든 채무가 청산되었다. 배상금 문제는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과 나치 정권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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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
개요
명칭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대상제1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
주요 부채국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결정파리 강화 회의
총액330억 미국 달러 (1920년 기준)
현재 가치1920년 1달러는 2024년에 31.885달러의 가치를 가짐
독일 최종 지불2010년 10월 3일
배경
근거전쟁 배상금
규모 산정동맹국이 입힌 모든 피해와 손실에 대한 보상
규모
총액330억 미국 달러 (1921년 5월, 약 4,420억 독일 마르크)
분할영국 제국: 22%
프랑스: 5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기타: 8%
감액1932년 로잔 회의에서 90% 감액
지불
초기 지불금으로 지불
중단1931년 대공황으로 인해 중단
재개1953년 독일 부채 탕감 협정에 따라 재개
최종 지불2010년 10월 3일 (독일)
영향
독일 경제인플레이션
하이퍼인플레이션
정치적 불안정
국제 관계민족주의 고조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
논란
정당성독일의 전쟁 책임 논쟁
규모독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
추가 정보
연도별 가치1920년: 330억 미국 달러
2024년: 약 1조 580억 미국 달러 (인플레이션 반영)
미국 참여초기 배상 요구
도스 안을 통한 지원

2. 배경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이후 4년 동안 유럽, 중동, 아프리카 및 아시아 전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59]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으로 알려진 성명을 발표했다. 이 연설은 독일이 점령한 영토에서 즉각 철수하고 국제 연맹을 결성할 것을 요구했다.[60] 1918년 4분기, 동맹국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61] 특히,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독일 해군은 반란을 일으켜 독일 11월 혁명을 일으켰다.[62][63][64]

아보쿠르, 1918년, 배상금으로 재건될 수많은 파괴된 프랑스 마을 중 하나


전쟁의 주요 전투는 대부분 프랑스에서 일어났고 프랑스 시골 마을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18년 독일이 퇴각하면서 프랑스 북동부의 가장 산업화된 지역(노르-파드칼레 광산 지구)을 황폐화시켰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독일이 초래한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망소는 배상금을 통해 독일을 약화시켜 다시는 프랑스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65][66] 배상금은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벨기에 등 다른 국가의 재건 비용으로도 사용될 예정이었다.[68]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과도한 배상금에 반대하며, 독일 경제에 덜 해를 끼치는 더 적은 액수를 주장했다. 그는 배상금에 장애 퇴역 군인에 대한 전쟁 연금과 전쟁 미망인에 대한 수당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대영 제국을 위한 배상금의 더 많은 부분을 유보하기 위함이었다.[69][70][71] 윌슨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했고 독일에 어떠한 배상도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72]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담이 개최되었다.[73] 패전국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베르사유 조약을 비롯한 평화 조약의 공통된 특징이었다.[74][75]

2. 1. 연합국의 피해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는 대부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벌어졌으며, 프랑스와 벨기에 시골은 격렬한 전투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다.[65] 1918년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프랑스 북동부(노르-파드칼레 광산 지구)와 벨기에의 가장 산업화된 지역을 파괴했다.[65] 독일군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빼앗고 나머지를 파괴하면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고, 수백 개의 광산이 철도, 교량 및 마을 전체와 함께 파괴되었다.[65]

프랑스와 벨기에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주택 파괴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30만 채 이상의 주택 완전 파괴
공장 피해6,000개 이상의 공장에서 기계 약탈, 릴과 스당의 섬유 산업 파괴
양조장 피해거의 2,000개의 양조장 파괴
광산 피해루베투르쿠앵에서 112개의 광산 갱 폭파, 1,000마일 이상의 광산 갱 침수 또는 봉쇄
철도 피해1,000마일 이상의 철도 제거, 1,000개 이상의 교량 파괴
기타교회 약탈



독일은 전쟁 중 프랑스와 벨기에 민간인에게서 농장 동물(소 약 50만 마리, 양 약 50만 마리, 말과 당나귀 30만 마리 이상)을 징발했다.[65]

전쟁 후 프랑스 당국은 3억 미터 이상의 철조망을 제거하고 2억 5천만 입방 미터 이상의 참호를 메워야 했다. 불발탄과 매설된 가스통에서 계속 누출되는 독가스 오염으로 인해 많은 농지가 전쟁 후 몇 년 동안 사실상 쓸모없게 되었다.

주로 독일의 U보트 작전으로 인한 연합국의 민간 선박 손실도 심각했으며, 특히 영국이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 U보트에 의해 거의 800만 톤의 영국 민간 선박이 침몰했으며, 많은 민간 선원이 사망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은 또 다른 200만 톤의 상선을 잃었으며, 이 역시 선원들의 큰 피해를 동반했다. 또한 120만 톤의 중립국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선박이 침몰했다. 5척의 영국 병원선 침몰 역시 상당한 분노를 야기했다.

3. 베르사유 조약

1919년 1월부터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려 배상 문제가 논의되었다. 회의 초기에는 "프랑스의 자르란트 주 영유", "프랑스의 라인강 좌안 점령 지속", "배상금"이 주요 쟁점이었다.[33] 3월 25일부터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총리의 4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클레망소는 배상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로이드 조지는 독일을 지나치게 억압하면 복수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배상금 지급 기간은 가능한 짧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

1월 23일, 배상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영국 대표는 강경론자들이었다. 미국은 배상을 손해 보상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비용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5] 미국은 채무 삭감에 응하지 않았고,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전문가 위원회는 1200억 마르크의 배상액을 제안했다.[38] 그러나 영국 내 강경론자들의 반발이 거셌고, 결국 배상금 총액 결정은 미뤄졌다. 다만, 군인 은급을 배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주장이 수용되어 조약에는 독일의 은급 지불이 포함되었다.[41]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제231조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 책임이 "독일 및 그 동맹국"에 있다고 명시했고, 제232조는 독일이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조약에 따라 일정 물품을 통한 배상이 정해졌고, 1921년 4월 30일까지 200억 금 마르크 상당의 물자와 자금을 지불하고 400억 마르크의 무기명 채권을 발행해야 했다. 그러나 배상금 총액은 결정되지 않았고, 배상 위원회를 설치하여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배상 청구권은 유보되었다.[4]

3. 1. 독일의 반응

울리히 폰 브록도르프-란차우 외무장관은 1919년 2월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서 독일이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실제 전쟁 비용은 지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78] 1919년 5월 7일 베르사유 조약 초안 작성 후, 독일 대표단과 연합국 대표단 회의에서 브록도르프-란차우 백작은 독일이 전쟁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인했다.[79]

라이히스탁 앞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


베르사유 조약 231조는 "...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모든 손실과 피해를 야기한 것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인정한다 ..." 대신, 독일 정부 판본은 "독일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전쟁의 원인으로서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라고 번역되었다.[79] 이는 독일인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 조항은 불공정하며 독일이 "명예를 포기했다"는 인식이 퍼졌다.[79]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 관리들은 "독일의 입장이 전쟁 중 독일 제국 정부가 믿게 한 것만큼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79] 그러나 국제적 동정을 얻으려는 정치인들은 이 조항을 선전 가치로 이용했고, 조약을 읽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조항이 완전한 전쟁 책임을 의미한다고 설득했다.[79] 이는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유일한 책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배상금 지불 의무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79]

4. 배상금 독촉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1년 배상 위원회가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위원회는 독일이 가진 자원과 지불 능력을 살펴보고, 독일 정부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준 뒤, 최종 배상액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그동안 독일은 금, 상품, 선박, 증권 등의 형태로 (50억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내야 했다.[80][81] 이 돈은 연합군의 점령 비용을 내고 독일의 식량과 원자재를 사는 데 쓰일 예정이었다.[5]

4. 1. 초기 요구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1년에 배상 위원회가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위원회는 독일이 이용 가능한 자원과 지불 능력을 고려하고, 독일 정부에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제공하며, 최종 배상액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독일은 금, 상품, 선박, 증권 등의 형태로 (50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80][81] 이 돈은 연합군의 점령 비용을 지불하고 독일의 식량과 원자재 구매에 사용될 예정이었다.[5]

4. 2. 런던 지불 계획

1921년 5월 5일 런던 지불 계획에서 독일의 배상금 총액은 1,320억 금 마르크로 확정되었다.[15] 이 금액은 벨기에가 제안한 타협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요구한 더 높은 액수와 영국이 지지한 더 낮은 액수 사이에서 "여론이 ... 수용할 수 있는 최소 금액을 평가한 것"이었다.[15]

이 금액은 세 가지 종류의 채권으로 나뉘었다. "A" 채권과 "B" 채권을 합한 액면가는 금 500억 마르크(125억달러)였으며, 이는 독일이 이전에 지불하겠다고 제안한 금액보다 적었다. 나머지 배상금으로 구성된 "C" 채권은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으로 설계되었으며,[15] 현실적인 조건에서는 독일이 이를 지불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이는 프랑스와 영국의 국내 정책에 도움이 되는 "정치적 흥정 수단"이었다.[15] 이 액수는 완전히 비현실적이었다. 그 주요 기능은 여론을 오도하여 "1,320억 마르크라는 수치가 유지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연합국 전문가들은 독일이 1,320억 마르크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연합국도 거의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A 및 B 채권은 독일의 지불 능력을 실제로 연합국이 평가한 것을 나타냈다."[15] 1919년과 1921년 사이에 이미 지불된 금액을 고려하면, 독일의 즉각적인 의무는 금 410억 마르크였다.

이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독일은 현물 또는 현금으로 지불할 수 있었다. 현물로 지불된 상품에는 석탄, 목재, 화학 염료, 의약품, 가축, 농업 기계, 건축 자재 및 공장 기계가 포함되었다. 이들의 금 가치는 독일이 지불해야 할 금액에서 공제되었다. 1914년 8월 25일 독일에 의해 파괴된 루벤 대학교 도서관 복원에 대한 독일의 지원도 이 금액에 포함되었으며, 조약이 독일에 부과한 일부 영토 변경도 포함되었다. 지불 계획은 25일 이내에 2.5억달러를, 그 후 매년 5억달러를 지불하고 독일 수출액의 26%를 지불하도록 요구했다. 독일 정부는 5% 이율의 채권을 발행하고 배상금 지불을 지원하기 위해 1%의 상각 기금을 설정해야 했다.

5월 5일 런던 최후 통첩에서 독일은 지불 계획을 인정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축소 및 독일 "전범"의 인도를 요구하는 데 6일의 시간을 받았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연합군은 루르 지방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최후 통첩을 예상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콘스탄틴 페렌바흐 독일 정부는 5월 4일에 사임했다. 새로운 총리인 요제프 비르트 정부는 5월 11일에 이 최후 통첩을 수락하고 "이행 정책"을 시작했다.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려 시도함으로써, 예정된 지불을 준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4. 3. 독일의 채무 불이행

독일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배상금 지불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1922년 말까지 독일의 지급 불이행은 매우 심각하고 빈번해져 배상 위원회는 위기에 직면했다.[45] 프랑스와 벨기에 대표단은 독일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불하도록 루르를 점령할 것을 촉구했고, 영국은 독일의 재정 재건을 돕기 위해 지급을 연기하는 것을 지지했다.[45]

1922년 12월 26일, 독일은 목재 인도를 불이행했다. 연합국은 이 불이행이 악의적이라고 만장일치로 판단했다.[45] 1923년 1월, 할당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3년 만에 34번째로 석탄 인도를 불이행했다.

1923년 1월 9일, 배상 위원회는 독일이 석탄 인도를 불이행했다고 선언하고 국가의 배상 의무를 강제하기 위해 루르를 점령하기로 투표했다. 영국은 두 조치 모두에 반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1월 11일, 프랑스와 벨기에 군인(이탈리아 군대를 포함한 엔지니어들의 지원을 받음)이 이 지역에 진입하여 루르 점령을 시작했다.[45]

프랑스 총리 레이몽 푸앵카레는 점령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더욱 온건한 제재 제안을 거부한 후에야 이 조치를 취했다.[45] 점령은 약간의 수익을 올렸다. 점령국은 9억 금마르크를 받았고, 이 중 대부분은 점령의 군사 비용을 충당했다. 그러나 점령 뒤에 숨겨진 진짜 문제는 독일의 석탄 및 목재 인도 불이행이 아니라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45]

4. 4. 도스 안

도스 계획에 따라 베를린에 도착한 최초의 미국 금


1924년 4월, 도스 계획이 수용되어 런던 지불 계획을 대체했다.[45] "C" 채권은 계획에서 제외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철회되지는 않았다. 프랑스군은 루르 점령 지역에서 철수했고, 독일 정부와 독립적이며 통치 기구의 50% 이상이 비독일인으로 구성된 은행을 설립하여 독일 통화를 안정시켜야 했다. 배상금 지불도 재조직되었다. 계획 시행 후 첫 해에 독일은 1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이 수치는 계획 5년차까지 연간 25억 마르크로 증가했다. 배상금 지불을 조직하기 위해 연합국 대표로 구성된 배상금 기관이 설립되었다. 또한 독일 통화를 뒷받침하고 배상금 지불을 지원하기 위해 8억 마르크의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이 중 50% 이상이 미국에서, 25%가 영국에서, 나머지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조달되었다.[45][46]

1923년 12월 27일, 배상 위원회는 두 개의 전문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중 찰스 도스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는 1924년 4월 9일에 도스 안을 책정했다. 도스 안은 독일에게 상당히 유리했고, 독일은 즉시 수락했다. 프랑스는 수용에 난색을 표했지만, 강경파 레몽 푸앵카레가 실각하면서 1924년 8월에 합의가 성립되었다. 도스 공채 도입으로 독일 경제는 호조를 보였고, 경기가 개선되면서 배상금 지불은 당분간 원활하게 이행되었다. 1928년 말까지 독일은 총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50]

도스 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매년 배상금 지급액을 단계적으로 증가시킨다. 첫 해는 10억 마르크, 5년차 이후는 25억 마르크로 하고, 그 이후는 경제 상황에 따라 판단한다. 이로 인해 총 금액은 런던 합의 때보다 상당히 감액되었다.
  • 독일 정부는 배상을 마르크화로 지불하고, 배상금을 수령하는 국가는 이를 외화로 환전한다. 이로 인해 배상금 수령 국가는 독일 경제를 고려할 필요가 생겼다.
  • 배상금 지불을 위한 공채를 모집하여 독일에게 차관을 제공한다(도즈 채권). 이 중 8억 마르크는 미국을 중심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인수한다.
  • 독일은 공업 및 독일 국영 철도의 인도, 관세 및 간접세 신설을 통해 배상금을 조달한다.
  • 베를린에 배상금을 채권국 중앙은행에 송금하는 배상 대리 기관을 설립한다.
  • 라이히스방크(독일 중앙은행)를 개편한다.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높이는 동시에 배상 지불 총 대리인 계정을 설립하고, 심사 기관으로서 평의회를 신설하여 정원의 절반을 외국인이 차지하게 하는 등 독일 금융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4. 5. 영 안

제2차 헤이그 회의 개회식: 영 플랜을 시행하기 위한 두 차례의 회의 중 하나


1928년경, 미국 경제가 과열되면서 독일로의 자금 유입이 급감했다. 도스 안에서는 배상금 지급액 변경은 가능했지만, 배상금 총액과 지불 연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독일은 배상금 총액 확정과 감액을 요구했다. 1928년 9월, 오웬 D. 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위원회 설치가 결정되었다.[51] 1929년 2월 11일, 영 위원회는 파리에서 제1회 협의를 진행했다. 프랑스는 연 25억 금 마르크를 주장했지만, 독일은 10억 금 마르크 이내를 원했다.[52] 4월경에는 회의 결렬도 우려되었지만, 6월 4일에 영 안의 큰 틀이 합의되어 배상 총액이 정해졌다.[53]

이에 따라 배상 잔액은 358억 1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확정되었고,[54] 독일은 59년 할부로 이를 지불하게 되었다. 최초 37년간은 평균 19억 8800만 라이히스마르크와 도스 공채 융자 원금을 합하여 20억 5000만 마르크, 나머지 22년간은 16억에서 17억 라이히스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55] 배분은 스파 회의에서의 비율이 원칙이 되었지만, 미국이 약 3.3%에 해당하는 6609.999999999999만달러, 폴란드가 500000USD의 배분을 받았다. 또한, 현물 배상은 남은 10년 동안 중단하게 되었다.[55]

배상금 지불을 국가에서 떼어내 비정치화할 목적으로 배상 대리 기구 대신 국제결제은행 창설이 정해졌다. 앞으로 배상금은 국제결제은행이 독일 정부로부터 징수하여 채권국 중앙은행에 분배하는 형식이 취해졌다. 또한 국제결제은행은 독일의 라이히스방크가 부담 의무를 지는 3억달러의 채권(영 채권)을 발행하여, 판매액을 채권국에 지불하는 형태로의 배상 지불도 이루어졌다. 한편 도스 안에서 도입된 라이히스방크나 독일 국유 철도의 연합국에 의한 관리 조치는 종료하게 되었다.[55]

이 조치로 배상금 총액은 상당히 감액되었고, 부담도 경감되었지만, 독일 국내에서는 영 안이 국민을 장래에 걸쳐 배상금 지불에 묶어두는 "독일 국민 노예화 법안"이라는 캠페인이 우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영 안 반대 국민 투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en:German referendum, 1929). 반대파에는 영 안 제정에 참여했지만, 스스로가 영에게 제안한 국제결제은행 구상의 왜소화에 반발한 라이히스방크 총재 히알마르 샤흐트도 가세했다. 결국 영 안은 비준되었지만, 독일에서 극우파, 특히 나치당의 대두를 초래하게 된다. 1929년 8월 31일에는 헤이그에서 영 안이 정식 채택되었고, 라인란트로부터의 연합군 철수가 시작되었다.[56] 그 후 1930년 3월에 프랑스 의회에서 영 안은 비준되었고, 5월 17일에 발효되었다.[57]

4. 6. 독일 배상금 지불 중단

1929년 10월 24일,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고, 1930년 1월 제2차 헤이그 회의에서 영 안 실행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독일은 배상금 지불의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프랑스는 응하지 않았다. 5월 크레디트 안슈탈트 은행 파산과 9월 선거에서 나치당의 약진은 외국 자본의 이탈을 초래하여 독일은 대규모 신용 공황에 휩싸였다.

1931년 6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는 배상금 지불 정지를 선언했다. 이는 연합국, 특히 프랑스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7월 1일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배상금과 유럽의 대미 채무 지불을 1년간 유예하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발표했다. 그러나 독일 경제는 개선되지 않았고, 배상금 지불은 재개되지 않았다.

1932년 6월 16일 로잔 회의에서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회의에서는 영 안 중단, 3년간 지불 유예, 30억 라이히스마르크 지불로 배상 종료에 합의했다. 그러나 나치당과 공산당의 반대로 독일 내 비준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국 의회도 연합국 채권 감액에 반발하여 비준하지 않았다. 1933년 나치당 집권으로 라이히스방크 평의회 등 연합국의 감독 조치는 철폐되었다.

5. 배상금 지불 재개

나치 독일 붕괴와 연합군 군정기 이후인 1953년, 서독 정부는 서방 국가들과 런던 채무 협정을 체결하여 전전 채무 지불을 약속했다.[55] 이 협정으로 배상 문제 해결은 독일 통일까지 연기되었으나,[55] 도스 안과 영 안 당시 발행된 공채의 이자 지불이 재개되었다. 도스 채권은 1969년, 영 채권은 1980년에 만기가 되어 대체로 이 일정에 맞춰 지불이 이루어졌다. 독일이 전후 지불한 액수는 6.7억유로에 달했지만, 1945년부터 1952년 사이에 발생한 이자는 지불되지 않았다. 이 이자 지불은 독일 재통일 후인 1990년 10월에 재개되었는데, 이 시점 잔금은 1.25억유로였다.[56] 2010년 10월 3일, 7500만유로가 채권자에게 지불되어 90%의 지불이 완료되었다.[57] 남은 2000만유로 상당의 채무는 청구되지 않아 무효가 될 것으로 보인다.[56]

6. 독일 외의 배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 외 다른 국가들의 배상에 대해 다룬다.

불가리아뇌이 조약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30]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각각 생제르맹 조약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배상위원회가 설립되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배상 의무가 경감되거나 면제되었다.[54] 오스트리아는 1930년 1월 20일 제2차 헤이그 회의에서 배상 의무가 최종적으로 면제되었고,[54] 헝가리는 1930년 4월 28일 파리 협정에서 1944년까지 배상 지불이 연기되었다.

터키의 경우, 세브르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배상금은 전면 폐지되었다.[35]

6. 1. 불가리아

뇌이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는 22억 5천만 금 프랑의 배상금을 37년 분할 상환해야 했다.[30] 또한,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에 가축 배상을 실시하고, 유고슬라비아에는 매년 5만 톤의 석탄을 우선적으로 인도해야 했다.[30]

1922년 4월까지 불가리아는 1억 7,300만 금 프랑을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1923년에는 배상금이 5억 5,000만 금 프랑으로 감액되었으며, "점령 비용으로 일시불 2,500만 프랑이 추가"되었다. 불가리아는 1925년부터 1929년 사이에 이 금액 중 4,100만 금 프랑을 지불했다. 1932년, 로잔 회담 이후 불가리아는 배상 의무를 포기했다.

1930년 1월 20일 제2차 헤이그 회의에서 남은 배상금은 약 4억 1524만 금 프랑으로 결정되었으며, 1930년부터 10년마다 점차 증액하여 1966년에 완납하기로 정해졌다.

6. 2. 오스트리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에도 배상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국토 대부분을 잃고 독일과의 합방도 금지된 오스트리아는 극심한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54] 1921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제 연맹에 부흥 계획인 "텔 메렌 계획"의 적용을 신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이사국은 배상 청구권 유예에 응했다. 하지만 배상 위원회에서는 유예에 관한 합의를 얻지 못해 1922년 5월 텔 메렌 계획 도입은 단념되었다. 그러나 6월에는 미국이 배상 청구권 유예에 응했고, 오스트리아는 경제 재건에 정부 자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 1월 20일 제2차 헤이그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배상 의무는 최종적으로 면제되었다.[54]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다음을 이행해야 했다.

6. 3. 헝가리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헝가리에도 배상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헝가리-루마니아 전쟁 이후 헝가리 경제는 악화되어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가 확대되었다. 1923년 9월에는 국제 연맹에 의한 재정·금융 지원을 동반하는 경제 부흥 계획이 시행되었다. 이를 받아 1924년 2월, 배상 위원회는 배상 선취권을 정지했다. 배상금은 자국 지폐로 지불이 인정되었으며, 또한 외화로의 교환은 헝가리 환율을 파괴하지 않는 정도로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금액에 관해서는 향후 20년간 서서히 증액하여 지불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930년 4월 28일 파리 협정에서 1944년까지 배상 지불이 연기되었고, 1966년까지 22년 동안 연간 13500000금 크로네를 지불하게 되었다.

항목내용
선박 인도모든 선박을 배상 위원회에 인도
석탄 인도페치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매년 일정량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에 인도
재건 자재 인도기계 부품, 건축 자재 등 재건 자재 인도
해저 케이블 권리이탈리아 할양 지역에 있는 해저 케이블의 권리를 이탈리아에 인도
미술품 반환약탈한 미술품 반환
역사적 문서 반환할양 지역에 관련된 역사적 문서 반환


6. 4. 터키

세브르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터키의 배상금은 전면 폐지되었다.[35]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로잔 조약 58조에 의해 그리스를 제외한 조약 체결국과의 배상은 상호 포기되었다. 또한, 59조에서는 그리스-터키 전쟁 당시 그리스군이 아나톨리아에서 행한 불법 행위에 대해 터키가 배상 청구권을 갖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재정 상황으로 인해 터키는 그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60조에서는 분리 지역에 있는 터키 재산은 모두 분리 대상 국가의 소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7. 분석

배상금 지급 기간 동안 독일은 270억~380억 마르크의 차관을 받았다. 1931년까지 독일의 대외 부채는 215억 1400만 마르크에 달했으며, 주요 지원국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였다.[4] 데틀레프 포케르트는 1920년대 초의 재정 문제는 전쟁 후 차관과 독일의 전쟁 자금 조달 방식의 결과이며, 배상금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 대신 차관을 발행했고, 이는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4]

나이얼 퍼거슨은 배상금이 없었더라도 독일은 전쟁 부채와 사회 서비스 요구 증가로 인해 심각한 문제를 겪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포케르트의 분석을 부분적으로 지지한다.[4] 그는 1920년대 무역 적자와 마르크화 약세, 이후 마르크화 가치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분석한다.[4] A.J.P. 테일러는 독일이 1920년대의 금융 거래로 순이익을 얻었으며, 민간 미국 투자자로부터 배상금으로 지불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빌렸다고 썼다.[4]

P.M.H. 벨은 다우에스 계획으로 다국적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독일 예산 균형, 통화 안정, 독일 경제 개선을 통해 배상금 지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4] 막스 윈클러는 1924년 이후 독일 관리들이 외국인들의 차관 제안에 휩쓸렸다고 썼다.[4] 1929년 주식 시장 붕괴 이후 외국인 투자와 차관이 갑자기 철회되면서 독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은 처음에는 무역 적자를 보였지만, 1920년대 초 영국은 독일을 유럽 무역에 재통합하려 했다. 프랑스 역시 독일과의 무역 협정을 원했으며, 1920년대 중후반 프랑스와 독일 간 무역이 급격히 증가했다.

막스 한트케와 마크 스포어러는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은 배상금과 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군대 규모 제한(115,000명)이 독일 중앙 예산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6] 즉, 군사비 지출 감소가 재정적 측면에서는 이익이 되었다는 것이다.

7. 1.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

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특히 1921년 연합국이 요구한 배상금 총액은 1320억 금 마르크로, 이는 당시 독일 국민 총소득의 2.5배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45][46]

독일은 배상금 지불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등 노력했지만, 이는 결국 마르크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1922년, 독일은 배상금 지급 유예를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루르 점령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독일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검은 선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 증가를 나타내는 차트.
1923년까지의 바이마르 공화국 초인플레이션을 나타내는 로그 눈금. 금 마크당 1 페이퍼 마크에서 금 마크당 1조 페이퍼 마크로 증가했다.


역사학자 에릭 골드스타인은 1921년 배상금 지불이 경제 위기를 초래했고, 루르 점령이 독일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7] 그는 독일 정부가 더 많은 돈을 찍어내면서 통화 가치가 붕괴되어 1923년 11월에는 1달러가 4조 2000억 마르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7] 나이얼 퍼거슨 역시 배상금이 1921년과 1922년 독일 예산 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초인플레이션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5]

이처럼 배상금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7. 1. 1. 반론

일각에서는 배상금보다 독일의 전쟁 자금 조달 방식과 전후 경제 정책 실패가 더 큰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 대신 차관을 발행했고, 이는 전후 경제 불안으로 이어졌다.[4]

나이얼 퍼거슨은 배상금이 부과되지 않았더라도 독일은 전쟁 부채와 사회 서비스 요구 증가로 인해 심각한 문제를 겪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1920년대 무역 적자와 마르크화 약세, 이후 마르크화 가치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분석한다.[4] A.J.P. 테일러는 독일이 1920년대의 금융 거래로 순이익을 얻었으며, 민간 미국 투자자로부터 배상금으로 지불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빌렸다고 썼다.[4]

막스 한트케와 마크 스포어러는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군대 규모 제한(115,000명)이 독일 중앙 예산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즉, 군사비 지출 감소가 재정적 측면에서는 이익이 되었다는 것이다.[6]

7. 2. 비판과 평가

1933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


클로드 캠벨에 따르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베르사유 조약의 경제 조항에 대한 비판 여론을 주도했으며, 가장 광범위한 비난을 가했다.[22] 케인스는 전쟁 중 영국 재무부에 소속되어 강화 회의에 공식 대표로 참여했으나, "유럽의 경제 문제에 대한 회의 정책"에 대한 실망으로 사임했다.[21]

1919년,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통해 조약을 카르타고의 평화라고 맹렬히 비판하며, 배상금 액수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를 "안전한 최대 수치"로 제시했지만, 이마저도 독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21] 그는 배상 위원회가 독일 경제를 파괴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21] 케인스는 배상금을 "독일이 지불할 수 있는 능력 내에서" 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독일의 경제 회복을 돕고 조약으로 인한 갈등을 줄일 것이라고 했다.[21] 또한 조약이 유럽 경제의 재건, 연합국과 패전국 간의 관계 개선, 유럽 신생 국가들의 안정화, "러시아의 회복", 연합국 간의 경제적 연대 등을 위한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21]

케인스는 독일의 석탄 산업을 예로 들며, 배상으로 인한 석탄 수송이 독일 산업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산업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 문제가 중립 국가인 스위스와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경우, 대부분의 탄전이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외부에 있어 산업적 파멸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21]

버나드 바루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약을 최선의 합의로 여겼지만, 소수의 공격이 경제 조항에 집중되었다고 썼다.[22] 제임스 T. 쇼트웰은 조약의 "견딜 수 없는 예속"은 배상 및 폴란드 관련 조항에 있었으며, 독일의 불만은 요구의 실질과 부과 방식 모두에 있었다고 말했다.[22] 앤드루 맥페이든 경은 조약 조항보다는 실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22]

르네 알브레히트-카리에는 독일 항복 전에 우드로 윌슨이 동맹국들이 독일의 민간인과 재산 피해에 대해 보상할 것이라는 메모를 보냈고, 독일이 이를 수락했다고 썼다. 그는 배상 조항이 "실망스러운 실패"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22] 캠벨은 배상 조항과 특정 영토 할양 외에는 독일의 경제적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약이 독일을 중앙 유럽의 주요 경제 및 금융 안정화 영향력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22]

에티엔 만투는 케인스의 예측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럽의 철 생산량, 독일의 철강 및 철 생산량, 석탄 채굴량, 국가 저축액 등 여러 면에서 케인스의 주장이 현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42] 만투는 독일이 1920-1931년 기간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 산업을 재정비하고 확장했으며, 배상금 지불 능력도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42]

1954년, 미국 국무 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조약의 가혹함이 오히려 독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42]

제프 하코트는 케인스의 주장이 거의 모든 역사가들에게 채택되어 베르사유 조약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사이의 독일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적고 있다.[45] A.J.P. 테일러는 케인스와 독일인들의 우려가 과장되었다고 말한다.[45]

리처드 J. 에반스는 케인스의 배상금 주장이 틀렸으며, 발생한 경제적 문제들은 배상금보다는 1923년의 인플레이션의 결과였고, 이는 독일 정부의 책임이라고 말한다.[45]

나이얼 퍼거슨, 제럴드 펠드먼 등 여러 역사가들은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지만, 독일이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들은 배상금의 심리적, 정치적 영향이 더 컸다고 본다.[45]

샐리 마크스는 독일이 배상금 500억 마르크를 쉽게 지불할 수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훼손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으로 지불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45] 그녀는 1921년 런던 회담에서 연합군이 독일의 지불 능력을 기준으로 배상금을 책정했으며, 이는 독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한다.[45]

마틴 키친 또한 독일이 배상금으로 인해 마비되었다는 인상은 신화라고 말한다.[45]

결론적으로,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배상금 자체가 독일 경제를 파탄 낼 정도는 아니었으며, 정치적,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7. 2. 1. 동시대의 비판



존 메이너드 케인스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조항을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전쟁 중 영국 재무부(HM Treasury)에 소속되어 강화 회의에 공식 대표로 참여했으나, "유럽의 경제 문제에 대한 회의 정책" 때문에 사임했다.[21]

1919년,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저술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카르타고의 평화"라고 비판했다.[21] 그는 조약에서 제시된 배상금 액수가 "합리적인 가능성의 한계 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를 "안전한 최대 수치"로 제시했지만, 이마저도 독일이 지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21] 그는 배상 위원회가 독일 경제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21]

케인스는 배상금이 "독일이 지불할 수 있는 능력 내에서" 고정되어야 하며, 이는 독일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1] 그는 조약이 유럽 경제 재건, 관계 개선, 안정화, "러시아의 회복", 경제적 연대 촉진을 위한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21]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와 1922년의 《조약의 수정》에서 예산 문제와 이전 문제(Transferproblem) 때문에 독일의 배상금 지불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49] 그는 영국과 미국에 대연합국 채권을 모두 포기하게 한 다음, 독일에 배상액을 30년 분할로 12억 6000만 금 마르크씩 지불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안했다.[49]

케인스 외에도 버나드 바루크, 제임스 T. 쇼트웰, 앤드루 맥페이든 경 등 많은 이들이 조약의 경제 조항, 특히 배상금 조항을 비판했다.[22] 프랑스 경제학자 에티엔 만투는 케인스의 예측이 틀렸다고 비판했지만,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42]

미국 국무 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1954년에 조약의 가혹함이 오히려 독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42]

7. 2. 2. 현대의 평가

현대 역사학자들은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나이얼 퍼거슨은 배상금이 부과되지 않았더라도 독일은 전쟁 부채를 지불해야 할 필요성과 더 많은 사회 서비스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로 인해 심각한 문제를 겪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이 1920년 동안 무역 적자와 마르크화의 약세 환율로 인해 악화되었고, 이후 마르크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었으며, 이들 중 어떤 것도 배상금의 결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45]

A.J.P. 테일러는 독일이 1920년대의 금융 거래로 순이익을 얻었으며, 민간 미국 투자자로부터 배상금으로 지불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빌렸다고 썼다.[45] P.M.H. 벨은 다우에스 계획의 결과로 다국적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독일 예산을 균형 있게 하고, 통화를 안정시키며, 독일 경제를 개선하여 배상금 지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45] 막스 윈클러는 1924년 이후 독일 관리들이 외국인들의 차관 제안에 사실상 휩쓸렸다고 썼다.[45]

막스 한트케와 마크 스포어러는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은 배상금과 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독일 군대를 115,000명으로 제한한 것이 독일 중앙 예산을 상당히 완화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5]

제프 하코트는 케인스의 배상금이 독일 경제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 거의 모든 정치적 성향의 역사가들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역사가들과 대중이 베르사유 조약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사이의 수십 년 동안 독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적고 있다.[45] A.J.P. 테일러는 1919년에 많은 사람들이 배상금 지불이 독일을 아시아적 빈곤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믿었고, 케인스도 모든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견해를 가졌으며, 아마도 많은 프랑스인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러한 케인스와 독일인들의 우려는 터무니없이 과장되었다고 말한다.[45]

리처드 J. 에반스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경제사가 케인스의 주장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우리가 지금 아는 바와 같이 케인스의 배상금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다. 에반스는 발생한 경제적 문제들이 배상금보다는 1923년의 인플레이션의 결과였으며, 이는 독일 정부의 책임이라고 말한다.[45]

몇몇 역사가들은 배상금을 비난하는 것과 그것들이 독일에 완전히 부담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데트레프 포케르트는 배상금이 실제로 두려워했던 것처럼 독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배상금의 심리적 영향은 매우 심각했고, 신용과 배상금의 악순환이 국제 금융 시스템에 가한 압박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45]

샐리 마크스는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재정적 측면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물론 독일인들은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바이마르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세금을 인상하면 충분한 자금을 제공했을 것이고, 바이마르는 1871년 이후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시민들로부터 차입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45]

마틴 키친 또한 독일이 배상금으로 인해 마비되었다는 인상은 신화라고 말하며, 약화된 독일이 아니라 그 반대가 사실이라고 말한다.[45]

8. 한국에 대한 시사점

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 문제는 일제강점기 피해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사례는 과도한 배상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한국은 이를 참고하여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8. 1. 일제강점기 피해 배상 문제

독일 배상금 문제는 한국의 일제강점기 피해 배상 문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8. 2. 역사적 교훈

독일 배상금 문제는 과도한 배상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 제국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연합국에 지불해야 했다. 영국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과 프랑스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은 독일에게 최대한의 배상을 요구했으며,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산업 부흥과 동시에 독일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27]

영국 재무부는 독일의 지불 능력을 20억 파운드로 평가했으나,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는 240억 파운드를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이러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는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244조 제7의정서는 독일이 보유했던 해저 케이블의 권리 포기를, 245조는 보불 전쟁 때 프랑스에서 약탈한 미술품 반환을, 246조는 아프리카에서 독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무쿠와와의 두개골을 영국에 반환하도록 규정했다.[42]

한국은 과거사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참고하여,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참조

[1] 웹사이트 Inflation Calculator {{!}} One dollar in 1920 is worth 31.885$ in 2024 https://www.usinflat[...] 2024-11-13
[2] 문서 Fourteen Points Speech
[3] 서적 History of World War 1 Octopus Books 1974
[4] 서적 Bismarck: The Man and the Statesman Hamish Ha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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