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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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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구는 고조선과 관련된 지명으로, 동쪽의 푸른 땅을 의미하거나 하늘의 별에서 유래했다는 해석이 있다. 중국 문헌에서는 이상향 또는 주변 이민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지명으로 묘사되며, 고조선을 포함한 한반도 일대에 거주했던 동이족과의 연관성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고대 사서에서는 고조선을 포함한 한반도 북부 지역을 지칭하며, 신라와 고구려가 영토로 간주하기도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조선과 청구 지역의 연관성을 제기하지만, 정확한 위치와 명칭 기원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또한, 당나라가 한반도를 '청구'로 인식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구려 멸망 후에도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청구는 현재에도 지명으로 사용되며, 한국인의 정체성, 문화유산, 일본과의 연관성 논란 등 다양한 측면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2. 어원

청구(靑丘)라는 이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3] 일반적으로 '청(靑)'과 '구(丘)'의 의미를 통해 그 뜻을 추측한다. '청(靑)'은 음양오행 사상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의미하며, '구(丘)'는 언덕이나 땅을 뜻한다.[3]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은 청구를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동방의 나라' 또는 '푸른 땅'으로 해석한다.[3]

다른 해석으로는 하늘의 별 이름인 '청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별이 동쪽에 뜨는 별이기 때문에 '동방세계'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의 여러 고대 문헌에서도 청구는 주로 동쪽 지역과 관련되어 언급된다. 예를 들어,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에는 ‘조양곡(朝陽谷)의 신령을 천오(天吳)라고 한다. 청구국(靑丘國)은 그 북쪽에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청구가 중국 동쪽 해외(海外)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가 동이(東夷) 땅에서 신선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14]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서는 황제가 청구 땅에서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전하기도 한다.[14] 한대(漢代) 동방삭(東方朔)의 저작으로 알려진 『십주기(十洲記)』에는 청구가 바다에 있는 열 개의 주(洲) 중 하나인 장주(長洲)의 별칭으로,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2][13] 이러한 기록들은 청구가 고대 중국의 동쪽에 존재했던 신성하거나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3. 역사

'청구(靑丘)'라는 이름이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과 사상서인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이들 문헌에서는 청구를 중국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묘사하고 있다. 《산해경》은 청구가 군자국(君子國, 신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함)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여[4], 그 위치를 만주 남부나 한반도 북부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5]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도 '청구'는 꾸준히 등장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승을 책봉하는 글이나,[6]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에게 보낸 답서 등에서 '청구'가 언급된다. 이는 청구가 당시 한반도 내의 특정 지역 또는 한반도 자체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6]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청구'는 한국을 지칭하는 문학적 표현이나 지리적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김종직의 시집 『청구풍아(靑丘風雅)』, 김천택의 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 김정호의 지도 「청구도(靑丘圖)」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당나라고구려를 침공할 때 설정한 진군로 중 하나로 '청구도(靑丘道)'가 언급되는데, 이는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향하는 경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청구가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청구'는 고대 중국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후 한국의 역사 기록과 문학 작품 등에서 한국 또는 그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그 정확한 지리적 범위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3. 1. 중국 문헌 속 청구

중국의 문헌에서 청구(靑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산해경(山海經)』「대황동경(大荒東經)」에서 찾을 수 있다. “군자국(君子國) 북쪽에 있으며 이 나라에서는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인 구미호(九尾狐)가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구미호는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에는 하(夏)나라의 백서자(伯杼子)가 동쪽을 정벌하여 구미호를 잡고 천하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서도 청구 나라에 사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이라고 언급하는 등, 동방의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간주되었다.[15]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가 동이(東夷) 땅에서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서는 황제가 청구 땅에서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이라는 비결을 전수받았다고 전한다.[14]

청구의 '청(靑)'은 음양오행 사상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의미하며, '구(丘)'는 언덕을 뜻한다. 따라서 '청구'는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 있는 '청구'라는 별이 동쪽에 뜨는 별이라는 점에서 '동방 세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문헌도 존재한다.

이 외에도 여러 중국 문헌에서 청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청구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바다 밖의 땅, 즉 해외(海外)에 위치하며 중국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는 ‘조양곡(朝陽谷)의 신령을 천오(天吳)라고 부르며, 청구국(靑丘國)은 그 북쪽에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 중국 한(漢)나라 시대 동방삭(東方朔)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십주기(十洲記)≫에는 청구가 바다 가운데 있는 열 개의 주(洲) 중 하나인 장주(長洲)의 다른 이름이며, 남해(南海)의 동남쪽(진사(辰巳) 방향)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 신비한 풀(선초, 仙草)·영험한 약(영약, 靈藥)·단 물(감액, 甘液)·옥구슬 같은 정기(옥영, 玉英) 등이 있다고 한다.[12][13]


전국 시대부터 서한 시대에 걸쳐 편찬된 《산해경》과 《여씨춘추》에는 청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타난다.

> 청구국(靑丘國)은 그 북쪽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오곡을 먹고 비단 옷을 입는다. 그곳의 여우는 발이 네 개이고 꼬리가 아홉 개이다.


> — 산해경

> 또한 청구국(靑丘國)이 해외에 있다.


> — 여씨춘추

《산해경》은 청구가 "군자국(君子國)"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기록했는데, 군자국은 고대 중국인들이 신라 지역을 지칭하며 사용했던 이름으로, 유교 사상을 받아들인 문명화된 지역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4] 청구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고, 군자국 즉 신라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청구의 위치를 만주 남부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추정한다. 기록의 어조로 볼 때, 청구는 당시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나 중화 중심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독립적인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청구를 고조선(기록상으로는 단순히 '조선'으로 표기됨)으로 보기도 하지만, 《산해경》 등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청구와 별개로 등장하여 다른 지역으로 간주될 여지도 있다.[5]

반면에, 여러 자료에서는 청구가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삼국사기가 대표적인 예이다.[6]

> 공의 대조(大祖)이신 중모왕(中牟王, 고구려 동명성왕)께서는 덕을 쌓음이 북산(北山)에 비길 만하고 공을 세움이 남해(南海)에 닿았으며, 위엄과 명성은 청구(靑丘)에 떨치고 인자한 가르침은 현도(玄菟)에까지 미쳤다.


>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당서에는 당나라 당 태종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하자, 장수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青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青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세 총관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 — 신당서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나라 군대가 황해를 건너 한반도 내륙으로 진격하는 경로를 이용했던 점을 고려할 때, '청구도(靑丘道)'는 한반도 방면의 진군로 또는 그 지역 자체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여러 문헌 기록들은 청구가 한반도 또는 그 인근 지역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3. 2. 한국 문헌 속 청구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청구라는 별칭이 등장한다. 문무왕이 고구려의 왕손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하는 글에서 "공의 선조의 덕과 공은 크고 높아 위풍이 청구에 떨쳤다."[6]고 언급한 사례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이 보낸 서신에 대해 고려 태조가 답신하며 "청구에서 난을 수습한다."라고 기록한 내용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청구라는 별칭은 여러 서적과 지도에 사용되었다.

  • 조선 전기 김종직이 편찬한 시집 『청구풍아(靑丘風雅)』
  • 영조김천택이 조선의 민요를 수집하여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
  •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지도 「청구도(靑丘圖)」


이처럼 청구는 한국의 역사 기록과 문헌에서 한국 또는 그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꾸준히 사용되어 왔다.

3. 3. 고조선과의 연관성

중국의 고대 문헌인 《산해경》에는 청구가 "군자국(君子國)" 북쪽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자국은 고대 중국인들이 신라 지역을 지칭하며 부여한 이름으로,[4] 청구가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기록 때문에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청구의 정확한 위치를 만주 남부나 한반도 북부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청구는 당시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나 중화 중심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독립적인 지역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추정과 독립적 성격을 바탕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고조선(고대 기록에서는 단순히 '조선'으로 알려짐)을 청구의 위치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산해경》과 같은 문헌에서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청구와는 별개로 언급되기도 하므로, 청구와 고조선을 동일시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5]

한편, 다른 역사 자료들은 청구가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구려 동명성왕(기록상 중모왕)의 위엄이 청구에까지 떨쳤다는 기록이 나타난다.[6] 이는 청구가 고구려의 영향권 내 혹은 인접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신당서에는 당나라 당 태종 시기 고구려-당 전쟁 때, 당나라 장수 우진달(牛進達)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해로(海路) 중 하나인 "청구도(靑丘道)"의 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당나라 군대가 황해를 건너 한반도 내륙으로 진군했던 여러 경로를 고려할 때, '청구도'는 한반도 서해안이나 내륙으로 향하는 특정 경로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청구가 한반도와 관련된 지역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이처럼 여러 사료에서 청구가 한반도 인근 지역 또는 한반도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정황이 나타나지만, 청구와 고조선을 명확히 연결 짓기는 어렵다. 청구의 정확한 위치와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3. 4. 고구려-당 전쟁과의 연관성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세 총관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신당서)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나라 군대의 주요 침공 경로 중 하나는 황해를 건너 한반도 내륙으로 직접 향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청구도'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을 위해 설정한 특정 해상 경로, 즉 한반도 방면으로의 길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청구가 한반도 또는 그 인근 지역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시사한다.

4. 청구의 의미와 상징

'청구'(靑丘)는 한국 역사에서 한반도를 가리키는 중요한 명칭 중 하나로 사용되어 왔다. 이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지칭을 넘어,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그 의미를 더해왔다. 역사 기록과 지도 제작, 심지어 일제강점기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현대 한국 사회의 여러 지명에도 그 흔적이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청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1. 한국인의 정체성

청구도, 한반도 지도 (1834)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청구'라는 이름을 자신들의 정체성의 일부로 여겨왔으며, 이는 한반도를 청구로 기록한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 이름은 한반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청구도와 같은 지도에는 해당 지역을 나타내기 위해 '청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7]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에는 민족의식을 담아 ''청구신보''라는 이름의 신문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청구역


현대 한국에서도 청구역이나 청구동 등의 지명에 '청구'라는 이름이 사용되며, 고대의 명칭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2. 지명 및 문화유산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청구'라는 이름을 자신들의 정체성 일부로 널리 사용해왔다. 이는 한반도를 청구로 기록한 많은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 이름은 한반도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와 같은 지도에는 지도에 그려진 땅, 즉 한반도를 나타내기 위해 '청구'라는 명칭이 포함되어 있다.[7]

일제강점기에는 같은 이름으로 ''청구신보''라는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다.

현대 한국에서도 청구역, 청구동 등 여러 지명에 '청구'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고대에 사용된 지명과 동일한 한자를 공유한다.

5. 일본과의 연관성 논란

청구의 주민들이 여우 정령을 숭배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신토 신앙과 관련될 수 있다. 특히, 신토의 신 중 하나인 이나리는 신라에서 건너간 하타 씨에 의해 일본에 소개된 외래 신으로 여겨진다.[8] 이나리 신은 여우를 상징하며, 비옥함, , , , 농업산업 전반의 번영과 현세적 성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히고 가즈오와 같은 학자들은 "이나리"라는 이름이 고전 일본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10] 이 신앙이 5세기 후반경 일본에 처음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9]

하타 씨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이나리 신을 공식적으로 모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사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도 여우 신이 일본 고유의 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한반도의 왕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8] 삼국 시대 한반도에서는 불교의 영향 등으로 여우를 신성시하며 농업과 번영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믿음이 하타 씨를 비롯한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 열도로 전파되었을 수 있다. "稲荷 (いなり)"라는 한자 표기는 892년 류이 국사에 처음 등장하며, 이는 "쌀을 운반하다"(문자 그대로 "쌀 짐")라는 의미를 가진다.

중국 당나라 시기의 기록인 태평광기에는 도교 학자 뤄궁위안이 신라로 추방된 여우 정령을 만났으며, 신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않고 숭배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羅公遠上前報告說,“這是天狐,不能殺,應該把它流放到東方去。”于是就寫符把它流放到新羅。於是就寫符把它流放到新羅。


:도교 학자 뤄궁위안은 "류청"이라는 개인으로 위장한 여우 정령을 죽이지 않고 신라로 쫓아냈다고 말했다. 신라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이 정령을 숭배한다.


(태평광기)

또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남긴 시에서도 여우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하며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狐能化美女。 狸亦作書生。


:여우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고, 살쾡이는 잘생긴 남자로 변한다.


(최치원, 시 '고의' 발췌)

이처럼 중국, 한국, 일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에서는 한국 무속 신앙과 이후 불교의 영향 아래 여우를 신성시하는 문화가 존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청구와 신라 등 고대 한국의 여러 왕국에서 여우가 중요하게 여겨진 배경을 설명해 준다.

참조

[1] 서적 Classic of Mountains and Seas
[2] 웹사이트 청구(靑丘) https://encykorea.ak[...]
[3] 간행물 Son Chint'ae and the Foundations of Modern Korean Folklore Studies
[4] 웹사이트 國中歷史 - 君子國 https://www.ehanlin.[...]
[5] 서적 Classic of Mountains and Seas
[6] 문서
[7] 서적 《한국 고지도 발달사》
[8] 웹사이트 「おいなりさん物語」 ~伏見稲荷大社~ https://inari.jp/abo[...]
[9] 문서 Inari Shinkō no Hajime Yūzankaku Shuppan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뉴스 박정진의 차맥, 조선의 선비 차인들 ④ 한재 이목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2-09-24
[14] 서적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한 권으로 끝내는 동양철학 이야기 평단문화사
[1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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