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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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만리는 해주 최씨 출신으로, 조선 세종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1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고제도 연구에 몰두하여 《자치통감훈의》, 《정관정요주》 등을 저술했다. 그는 불교 배척과 유교 이념 수호를 위해 상소를 올렸으며, 1444년에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였다. 1444년 사직 후 낙향했으며, 사후 공혜라는 시호를 받았다.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반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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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5년 사망 - 평원대군
평원대군은 조선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과 세조의 동생으로, 평원대군에 봉해지고 결혼하여 종학에 입학했으나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제안대군이 양자로 제사를 계승했다. - 1445년 사망 - 최윤덕
조선 초기의 무신 최윤덕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 대마도 정벌과 여진족 정벌을 통해 국방에 공헌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축성 사업에도 기여하여 '축성 대감'으로 불린 명장으로, 사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정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해주시 출신 - 김춘광
김춘광은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에 활동한 연극배우, 변사, 극작가, 연출가로서, 신파극단 예원좌와 청춘극장을 이끌며 《검사와 여선생》, 《3·1 운동과 김상옥 사건》, 《안중근 사기》 등 70여 편의 창작극 및 번안극을 집필하여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 해주시 출신 - 박경화 (축구인)
박경화는 축구인이며, 오빠는 박경호이고 남편은 민동진이다. - 조선의 관료 - 박성빈 (조선)
박성빈은 1871년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으며, 아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 조선의 관료 - 김응우
김응우는 김일성의 고조부로 평안도 대동 출신이며, 북한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고, 김일성 가문으로 이어진 전주 김씨이다.
2. 생애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박사를 거쳐 1427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 재직 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 응교·직제학·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 세자(훗날의 문종)가 조현(朝見)할 때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이 되어 직제학 정인지 등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어 주강(晝講)을 담당하였다. 집현전 응교, 우문학(右文學)을 겸하였고, 좌필선(左弼善) 정인지와 함께 세자에게 고금의 고사성어와 훌륭한 정치를 강론하였다.
집현전에서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초시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 1439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440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는데, 불교 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 상소가 3회로 대부분이었다.
세종대왕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관심을 보이자, 최만리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들어 왕실의 불교 지원을 비판하였다. 흥천사(興天寺) 사리각 중수 반대, 경찬회(慶讚會) 혁파와 불교 배척 상소 등 14차례 상소를 통해 유교 사상을 수호하고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5] 상소의 주된 내용은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두와 달리 언문(諺文)은 유익함이 없으며, 널리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과 동궁이 언문 관련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상소를 올린 학자들의 대표격이었으며, 이로 인해 세종의 분노를 사서 처벌을 받았다.[5] 당시 시대적 배경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명(明)을 중심으로 조선이 일본을 교화한다'는 조선 건국 이후의 문화 외교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일본에게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급해준 것에 대한 책임 추궁, 진사시험 출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며 사형의 남용에 반대하여 감형을 주장하는 등의 상소를 올려 시정하게 하였다.[1]
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1] 1445년 10월 23일 사망했다.[1]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1]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1]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 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1]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1]
2. 1. 가계 및 출신
본관은 해주이며,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아버지는 최하(崔荷)이다. 해주 최씨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리며 문헌공도와 사학12도를 세운 최충의 12대손이며,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의 6대손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용수이다.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 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의 딸이다. 중화 양씨 판관 양미(楊美)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다. 딸은 덕수 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는데, 그는 후일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최경창의 고조부이자,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의 9대조가 된다.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의 5대 방조이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최경회의 7대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