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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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토스 전쟁은 115년부터 117년까지 로마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전쟁은 유대 속주의 로마 총독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디아스포라 반란, 제2차 유대-로마 전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쟁의 배경은 로마 제국 내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 간의 긴장과 갈등이 심화된 데 있었으며,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여파로 유대인들의 반로마 정서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반란은 키레나이카, 이집트,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등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로마에 저항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로마는 마르키우스 투르보 등 장군들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당했다. 키토스 전쟁의 여파로 유대 속주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132년에 바르 코크바의 난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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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키토스 전쟁 | |
일부 | 제2차 유대-로마 전쟁 |
시기 | 115년–117년 |
장소 | 로마 제국 동지중해 |
원인 | 불명 |
결과 | 로마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제국 |
교전국 2 | 유대인/유대의 열심당 |
지휘관 | |
로마 제국 | 트라야누스 황제 (자연사) 마르키우스 투르보 루시우스 퀴에투스 (암살) |
유대 반군 | 루쿠아스 (안드레아스) (처형) 율리아누스 (처형) 파푸스 (처형) 아르테미오 감리엘 2세 (자연사) |
피해 규모 | |
로마 제국 | 일부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는 등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 460,000명 이상의 로마 시민 (대부분 로마령 그리스인)들이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에서 살해당했으며, 아이깁투스, 리비아 및 나머지 동부 지중해의 피해 숫자는 불명 |
유대 반군 | 200,000명 사망 키프로스, 키레나이카 및 그 외 지역의 유대인 지역사회가 완전히 격감하고 영구적으로 로마의 동부 속주 지역으로 추방당함 (주로 유다이아) |
2. 명칭
이 분쟁에 대한 히브리어 명칭인 פולמוס קיטוס|Polmus Ḳīṭushe는 유대인 아람어를 거쳐 그리스어 Πόλεμος του Κυήτου|Pólemos tū Cyḗtūgrc ('''퀴에투스의 전쟁'''이라는 의미)를 변형한 것으로, 반란을 진압한 유대의 로마 총독인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
로마 제국 내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 간의 갈등은 1세기에 심화되어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특히 유대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5] 알렉산드리아 포그롬처럼 제국 내 다른 지역에서도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 통치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했다.[15]
"키토스 전쟁", "디아스포라 반란",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라는 용어는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앞의 두 용어는 후자의 더 큰 분쟁의 무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1]
3. 배경
이러한 긴장은 결국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종교적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이후 세금 반대 항의와 로마 시민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되었다.[16]
3. 1.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그 이후
66년부터 7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유대 지역의 로마 지배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긴장 때문에 발생했지만, 점차 세금 반대 항의 및 로마 시민들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되었다.[16][7]
로마 군대는 초기에 반란군에게 압도되었고, 친로마파 왕 헤로데 아그리파 2세는 로마 관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피신했다. 시리아의 레가투스인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베스 호론 전투에서 유대 반란군에게 패배했다.[16][7]
이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가 반란 진압을 맡아 4개의 군단을 이끌고 67년에 갈릴래아를 시작으로 유대 지역을 공격했다.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했으며, 이후 남은 유대인 요새들도 점령하면서 전쟁은 끝났다.[16][7] 전쟁 결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로마는 유대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3. 2. 로마 제국 내 민족 갈등 심화
로마 제국 내에서는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들 사이에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긴장은 1세기에 들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대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폭력적인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포그롬과 같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대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했다.[15]
이러한 긴장 상태는 결국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간의 종교적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이후에는 세금 반대 항의와 로마 시민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확대되었다.[16]
4. 반란과 전쟁
115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 제국을 상대로 동방 원정을 지휘하던 중, 로마 제국의 후방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파르티아가 대아르메니아 왕국을 침략하여 친로마 성향의 왕을 위협하자, 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파르티아를 공격했다. 이는 약 50년 전 네로 시대부터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두 제국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8]
트라야누스의 군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후방의 유대 반란군은 소규모 로마 수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키레나이카에서 시작된 반란은 곧 이집트와 키프로스로 퍼져나갔고, 유대에서도 반란을 일으켰다. 리다를 중심으로 한 봉기는 이집트에서 오는 곡물 공급을 위협했다. 니시비스, 에데사, 셀레우키아, 아르벨라 등 유대인 인구가 많은 도시들도 반란에 가담하여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8]
유대인 지도자 루쿠아스는 유대로 도망쳤고,[8] 마르키우스 투르보가 그를 추격하여 율리아누스와 파푸스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리다를 포위했고, 결국 리다는 함락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되었다. "리다의 학살자들"은 탈무드에서 경건하게 언급된다.[4] 파푸스와 율리아누스는 순교자로 여겨졌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동방 정복지 대부분을 포기하고 동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포기했지만, 오스로에네의 왕으로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임명하여 완충 국가로 삼았다. 유대 상황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고, 제6군단 ''페라타''가 카이사레아 마리티마로 이동했다.
4. 1. 키레나이카
키레나이카에서 반란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 루쿠아스 혹은 안드레아스라는 인물이 이끌었다.[17] 반란군은 헤카테, 유피테르, 아폴로, 아르테미스, 이시스 등의 신전들과 카이사레움, 바실리카, 공중 목욕탕 같은 로마의 상징적인 공공 시설들을 파괴했다.[17]4세기 기독교인 역사가 오로시우스는 이 폭력 사태로 키레나이카 속주가 몹시 황폐화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식민 도시들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17]
디오 카시우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키레나이카의 유대인들은 지도자 안드레아스를 중심으로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살점을 먹고, 내장으로 요대를 만들었으며, 피를 몸에 바르고, 가죽을 옷처럼 입었다. 많은 이들이 머리부터 아래까지 두 동강이 났고, 일부는 야생동물에게 던져지거나 검투사처럼 싸우도록 강요받았다. 그 결과, 총 22만 명이 사망했다.[18]
1906년 유대 대백과사전은 키레나이카에서의 학살로 인해 리비아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몇 년 뒤 새로운 식민 도시를 세워야 했다고 언급하며,[19] 5세기 초 키레나이카 출신 주교 시네시오스가 유대인들이 초래한 재앙에 대해 언급했다고 전한다.[19] 유대 대백과사전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을 중요하게 보면서도,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섬에서 유대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한 묘사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20]
4. 2. 이집트
키레나이카에서 일어난 반란은 이집트로 확산되었다.[21]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은 도시를 공격하고, 이집트 신들의 신전들과 폼페이우스의 무덤을 파괴했다.[21] 당시 총독 마르쿠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다. 유대인 반군들은 전해진 바에 따르면 116년에 헤르모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했다.[21]트라야누스 황제는 ''친위대 사령관'' 마르키우스 투르보 휘하의 새로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집트와 키레나이카는 117년 가을이 되어서야 안정화되었다.
4. 3. 키프로스
키프로스에서 아르테미온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이끌었고, 이 반란으로 키프로스 섬의 통제권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수많은 키프로스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이 학살로 240,000명의 그리스인이 사망했다고 한다.[18][22] 로마는 군대를 파견하여 키프로스의 중심 도시를 탈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로마는 유대인들이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4. 4. 메소포타미아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 제국 원정을 떠난 사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유대인 반란이 발생했다.[8] 니시비스, 에데사, 셀레우키아 등 유대인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반란에 가담하여 소규모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8] 로마는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이 지역의 도시들을 재점령했다.[8]4. 5. 유대
루쿠아스는 키레나이카에서의 반란 이후 유대로 도망쳤다.[23] 마르키우스 투르보가 그를 추격하여 반란의 핵심 지도자들이던 율리아누스와 파푸스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대인들의 정복자이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유대의 로마군을 지휘했고, 유대인 반군들이 율리아누스와 파푸스의 지휘 아래 모여 있던 리다를 공격했다. 로마의 압박이 거세지자, 최고 랍비 가마리엘 2세는 하누카 기간에도 금식을 허용했고 다른 랍비들도 이 조치를 묵인했다.[24] 리다가 함락된 후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되었는데, 이는 탈무드에서 "리다의 학살"로 언급된다.[25] 반군 지도자 파푸스와 율리아누스는 같은 해에 로마인들에게 처형당했다.[26]5. 여파
115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동방 원정을 진행하는 동안, 키레나이카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의 반란은 이집트와 키프로스로 확산되었고, 유대 지역에서도 반란을 일으켰다. 리다를 중심으로 한 봉기는 이집트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곡물 공급을 위협했고, 니시비스, 에데사, 셀레우키아, 아르벨라(현재 에르빌) 등 유대인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반란에 가담하여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8]
루쿠아스는 유대인 반란 지도자로 유대로 도망쳤다.[8]
트라야누스는 전쟁을 끝내고 동방 정복지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며 동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메소포타미아 속주는 포기했지만, 오스로에네는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왕으로 복위시켜 완충 국가로 유지했다.
5. 1. 로마의 강경 대응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했다. 유대인 반군 지도자인 루쿠아스는 유대로 도망쳤으나, 마르키우스 투르보가 그를 추격하여 반란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던 율리아누스와 파푸스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23]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대인들을 정복했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유대의 로마군을 지휘하며 유대인 반군들이 모여 있던 리다를 공격했다. 로마의 압박은 몹시 대단해서, 최고 랍비 가마리엘 2세조차도 금식을 허용했고 다른 랍비들도 이 조치를 묵인했다.[24] 리다는 점령당하고 많은 유대인 반란군들이 처형되었는데, "리다의 학살"은 탈무드에서 종종 언급된다.[25] 반군 지도자 파푸스와 율리아누스는 같은 해에 로마인들에게 처형당했다.[26]트라야누스에게 중용되었고 로마에도 충실했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하드리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자 지휘권을 빼앗겼다. 그는 118년 여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일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의 상황이 로마에 긴장 상태로 남아있다고 판단하여, 페라타 제6군단을 유대의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에 상주시켰다.
5. 2. 바르 코크바의 난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동지중해를 방문했을 때 유대 속주에서 긴장 사태가 고조되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파괴된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을 딴 로마 식민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하드리아누스의 다른 유대인 제재와 함께 132년 극도로 폭력적인 봉기인 바르 코크바의 난이 발발한 이유 중 하나였다.[1] 이 반란은 유대인 인구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과 유대교 관습 금지로 이어졌으며, 이 금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138년에야 해제되었다.[1]참조
[1]
웹사이트
The second Jewish Roman war occurred forty-five years after the fall of Jerusalem during Trajan's invasion of Parthia. It started in a Jewish community in Cyrene. The rebels destroyed many Roman Temples, and killed both Greeks and Romans. The revolt spread to Alexandria and Cyprus, where thousands of citizens were killed, both Jew and Gentile. The rebellions were disordered mobs, rather than armies, however, and the engagements were riots rather than battles. The governor of Egypt used his legions to protect the unmolested cities, but relied on Trajan to send enough forces to put down the rebels. Trajan eventually raised an army to put down the rebellions in Cyrene and Alexandria, and at the same time, he tried to prevent more rebellions among Jews in his newly won Mesopotamia regions by proactively killing Jews in some of the major cities in the region before they had a chance to rebel. The loss of life during these rebellions was terrific, especially in North Africa, and many of the Jewish urban strongholds outside of Judea were destroyed.
https://www.heritage[...]
[2]
문서
Histoire des Juifs, Troisième période, I - Chapitre III - Soulèvement des Judéens sous Trajan et Adrien
[3]
서적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4]
문서
Pes. 50a; B. B. 10b; Eccl. R. ix. 10
[5]
문서
Ta'anit 18b; Yer. Ta'anit 66b
[6]
서적
Rome and Jerusalem: The Clash of Ancient Civilizations
https://books.google[...]
Vintage Books
[7]
문서
Josephus, ''War of the Jews'' II.8.11, II.13.7, II.14.4, II.14.5
[8]
문서
Abulfaraj, in Münter, "Der Jüdische Krieg," p. 18, Altona and Leipsic, 1821
[9]
문서
Ta'anit ii. 10; Yer. Ta'anit ii. 66a; Yer. Meg. i. 70d; R. H. 18b
[10]
서적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True Jew: Challenging the Stereotype
2012
[12]
문서
Abulfaraj, in Münter, "Der Jüdische Krieg," p. 18, Altona and Leipsic, 1821
[13]
문서
Pes. 50a; B. B. 10b; Eccl. R. ix. 10
[14]
문서
Ta'anit 18b; Yer. Ta'anit 66b
[15]
서적
Rome and Jerusalem: The Clash of Ancient Civil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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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tage Books
[16]
문서
Josephus, ''War of the Jews'' II.8.11, II.13.7, II.14.4, II.14.5
[17]
문서
Orosius, Seven Books of History Against the Pagans, 7.12.6.
[18]
웹인용
Dio's Rome, Volume V., Book 68, paragraph 32
http://www.gutenberg[...]
[19]
웹인용
Cyrene
http://www.jewishenc[...]
JewishEncyclopedia.com
[20]
웹인용
Dion Cassius
http://www.jewishenc[...]
JewishEncyclopedia.com
[21]
웹사이트
http://www.seder-ola[...]
[22]
웹인용
Cyprus
http://www.jewishenc[...]
JewishEncyclopedia.com
[23]
문서
Abulfaraj, in Münter, "Der Jüdische Krieg," p. 18, Altona and Leipsic, 1821
[24]
문서
Ta'anit ii. 10; Yer. Ta'anit ii. 66a; Yer. Meg. i. 70d; R. H. 18b
[25]
문서
Pes. 50a; B. B. 10b; Eccl. R. ix. 10
[26]
문서
Ta'anit 18b; Yer. Ta'anit 6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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