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이 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툴루이 칸은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로, 1190년대에 태어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정복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잔인하고 술을 좋아하며 통솔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227년 칭기즈 칸 사후,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하며 쿠릴타이를 통해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옹립했다. 이후 금나라 정벌에서 활약했으나, 1232년 오고타이의 병을 대신하여 독주를 마시고 사망했다는 설, 암살되었다는 설 등 여러 죽음에 대한 설이 있다. 툴루이의 아들들은 몽골 제국과 원나라, 일 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몽골 제국에서 강력한 부대를 보유했지만, 호라즘 정복 등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툴루이 칸은 몽골 제국에서 칸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을 통해 이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툴루이 칸 - 쿠투투
쿠투투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로, 남송 침공에 참여했으나 뚜렷한 공적 없이 요절했고, 그의 딸은 킵차크 칸국의 칸비가 되었다. - 툴루이 칸 - 무가 (몽골)
무가(Möngke)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쿠빌라이 칸을 지지하며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하여 쿠빌라이가 칸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 칭기즈 칸의 황자 - 차가타이 칸
차가타이 칸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로, 엄격하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오고타이 칸의 즉위를 지지하고 중앙아시아를 다스려 차가타이 한국의 기틀을 다졌다. - 칭기즈 칸의 황자 - 주치 칸
주치 칸은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몽골 제국 초기에 활약하며 서방 원정에 참여하여 중앙아시아 북부를 정복했으나, 동생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1225년경 사망 후 그의 영토는 아들 바투에게 상속되어 킵차크 한국의 기반이 되었다. - 1232년 사망 - 안혜왕후
안혜왕후는 고려 희종과 성평왕후의 딸로 고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고종과의 사이에서 원종 등을 낳고 1232년 사망 후 안혜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원종의 즉위 후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 1232년 사망 - 살리타이
살리타이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금나라 잔당 토벌에 참여하고 1231년부터 1232년까지 고려 침공을 주도했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권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거란족 출신 장교들을 다수 기용했다.
툴루이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휘 | 툴루이 (拖雷 또는 圖壘) |
사후 칭호 | 영무황제 (英武皇帝) (1251년 추존) 경양황제 (景襄皇帝) (1265년 추존) |
묘호 | 예종 (睿宗) |
가문 | 보르지긴 |
아버지 | 칭기즈 칸 |
어머니 | 보르테 |
배우자 | 소르칵타니 베키 도쿠즈 카툰 |
자녀 | 몽케 칸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 부케 |
생애 | |
사망일 | 1232년 |
통치 | |
몽골 제국 섭정 | 1227년 8월 25일 - 1229년 9월 13일 |
전임자 | 칭기즈 칸 |
후임자 | 오고타이 칸 |
2. 생애
툴루이는 1192년 테무진(훗날의 칭기즈 칸)과 보르테 우진 카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사에는 툴루이, 신원사에는 툴루이와 풀루이(褒雷)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툴루이는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용맹하여 덕망이 있었다고 한다.[1] 1197년 타타르족에게 유괴되었다가 구출되기도 했다.[1]
툴루이는 군사 전략에 능하고 지혜로웠으나, 술을 매우 좋아했고, 통솔력은 부족했으며, 잔인하고 건강 문제가 있었다.[2] 1203년 징기스 칸이 케레이트를 멸망시킨 후, 케레이트 족장 옹 칸의 조카딸 소르칵타니 베키와 결혼했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 차가타이는 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며 갈등했고, 툴루이는 이들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중 후계자를 고민하다가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정했다.
1213년부터 1214년까지 툴루이는 금나라 원정에 참전하여 허베이, 산둥, 황하 강 일대의 여러 성을 점령하고 금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1219년 호라즘 제국 원정에서는 칭기즈 칸을 따라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마와라안나흐르 지방의 여러 도시 정복을 지휘했다. 1220년 가을, 호라산 지방으로 파견되어 니사,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 등을 정복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항복한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1225년 말 서하 원정에서 1226년 2월 오고타이와 함께 서하 영내로 침공했다. 툴루이는 여러 전역에서 공을 세워 무명을 떨쳤다.
1219년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대에 참여하여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부카라, 사마르칸트 등 마와라안나흐르 일대 도시들을 공략하였다.[8] 1220년 가을, 호라즘 샤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하러 파견된 제베와 수부타이의 후발대로 호라산 지역에 파견되어 주요 장수들과 교전했다. 1220년 11월, 니샤푸르에서 발생한 봉기를 진압하러 갔던 매부 토구차르가 살해당하자, 툴루이는 칭기즈칸의 명으로 봉기를 진압하고 도시를 함락한 뒤 보복 학살을 자행하였다.
1219년 호라즘 제국 침공 동안 툴루이는 오트라르에서 진행 중인 공성전을 우회하여 1220년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호라즘 샤 수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공격했다. 부하라는 급습으로 몇 달 만에 함락되었고, 사마르칸트는 몇 달 후에 함락되었다.
툴루이의 군대는 몽골 침략군의 10분의 1로 구성되었으며, 호라즘의 징집병이 증원되었다. 툴루이는 메르브 시로 접근하여 투르크멘 약탈자들을 매복했다. 다음 날 몽골군은 메르브에 도착했고, 6일 동안 도시를 평가한 후 요새가 장기간의 포위를 견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7일째에 공격을 받은 후, 두 번이나 역습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시민들은 항복했고, 툴루이는 이 약속을 어기고 소수의 장인과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시민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툴루이는 니샤푸르로 남서쪽으로 행군했는데, 호라즘 제국 통치자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의 진격을 피해 1220년 4월 18일에 도착했다. 그는 5월 중순에 떠났고, 도시는 장군들에게 항복했으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토쿠차르를 살해했다. 툴루이는 4월 7일에 도착했고, 주민들은 항복 조건을 합의하려 했으나, 칸의 사위 살해는 몽골군에게 심각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모든 제안은 거부되었다. 4월 9일에 성벽이 뚫리고 다음 날 도시는 함락되었다.
호라산의 마지막 주요 도시 헤라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1944년에 재발견된 연대기에 따르면 헤라트에는 두 번의 포위 공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마을에서 몽골 외교관 처형으로 시작되었다. 분노한 툴루이는 8일간의 공격을 시작했고, 결국 마을의 말리크|총독ar가 사망했다. 툴루이는 주민들이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선언했고, 메르브와 달리 몽골군은 약속을 지켜 도시 수비대의 12,000명만 살해했다.
1221년, 잘랄 웃딘이 거병하자, 툴루이는 호라산에 머물며 칭기즈 칸 본군의 후방 지원을 맡았다.
몽골 부족들은 고정된 계승 제도가 없었지만, 종종 막내아들이 상속하는 말자 상속과 같은 형태를 따랐다. 그러나 이는 칭호가 아닌 재산에만 적용되었다.[1] 툴루이에게는 알타이 산맥 근처의 몽골 본토가 주어졌다.[2]
''몽골 비사''에는 1219년 호라즘 제국 원정을 준비하면서 칭기스 칸이 후계자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차가타이는 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여 갈등하였다.[3] 차가타이와 주치의 대립은 주먹다짐까지 가게 되었다.[4] 툴루이는 둘의 대립을 지켜보았다.[5]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내정했다.[6]
툴루이는 군사적으로 우월했다. 그의 호라산 원정은 호라즘 제국을 무너뜨렸고, 오고타이는 몽골 기준으로도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8] 그러나 그는 관대함, 중재 및 타협에 대한 의지로 알려졌다.[9]
1227년 칭기스 칸 사망 당시, 툴루이는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다.[10] 툴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는 것을 꺼린 것은 자신의 야망에 가하는 위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되었다.[11] 결국 툴루이는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야 했다. 1229년, 쿠릴타이는 오고타이를 칸으로 옹립했고, 툴루이가 새로운 통치자를 가장 먼저 찬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2]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면서, 툴루이는 아버지의 재산과 직할 울루스 101개 천인대에 해당하는 백성과 군대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친족 중 가장 강력한 재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후계 카안이 선출될 때까지 제국의 정무를 대행하는 감국의 지위에 올랐다.[9]
칭기스 칸 사후 2년 뒤인 1229년, 툴루이는 자신의 즉위를 고사하고 형 오고타이를 제2대 카안으로 추대했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툴루이는 같은 해 봄에 쿠릴타이를 열 것을 포고했고, 9월에 새 황제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개최되었다.[11] ''세계 정복자사''에 따르면, 우익 제왕의 대표인 차가타이와 좌익 제왕의 대표인 테무게 옷치긴이 오고타이의 손을 잡고 옥좌로 인도하고, 중군을 대표하는 툴루이가 축배를 올리는 의식을 거쳐 오고타이가 즉위했다고 한다.[12]
1226년 8월 칭기즈 칸 사망 후,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장례와 매장을 주관했다.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12만 9천 명의 군대 중 10만 1천 명을 맡게 되었다.[1] 툴루이는 2년간 임시 대칸으로 있다가 형 오고타이에게 양위했다.
1227년 8월 칸위에 오른 그는 스스로를 이크 노얀(ᠶᠡᠭᠡᠡ᠋ ᠨᠣ᠊ᠶᠡ᠊ᠨ, 큰 벼슬), 우르크 노얀(Үлүг ноён ᠡᠣ᠊᠊ᠢ᠊᠊ᠯᠣ᠊᠊ᠢ᠊ᠡ᠋ ᠨᠣ᠊ᠶᠡ᠊ᠨ, ᠡᠣ᠊᠊ᠢ᠊᠊ᠯ᠊ᠢ᠊᠊ᠢ᠊ᠭᠡ᠋ ᠨᠣ᠊ᠶᠡ᠊ᠨ), 에즈단(통치자)이라 칭했다.
1228년 봄, 쿠릴타이가 열렸으나 툴루이와 오고타이 중 누구를 대칸으로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1229년 봄, 몽골 케룰렌 강가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부족장들은 툴루이에게 칸 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툴루이는 칭기스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우구데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후 오고타이는 툴루이에게 할하 몽골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1227년 8월 28일, 서하의 반격이 우려되자 툴루이의 몽골군은 흥경부(興慶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말제 이현과 서하 황족을 사로잡아 암살하고 서하를 멸망시켰다.[2]
1229년 오고타이 칸은 수부타이를 보내 금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1230년 툴루이는 오고타이와 군대를 나누어 금나라 공격을 시도했으나, 군사를 돌려 송나라 국경으로 향했다. 1230년 7월 오고타이 칸의 명을 받아 툴루이는 아들 몽케와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의 천성보(天成堡) 등을 함락시키고 봉익(鳳翔)을 공격하였다.
금나라 잔존 세력은 오고데이 통치 초기에 산시에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났고, 1230년 통관에서 금나라 장군이 몽골 장군을 격파했다. 오고데이는 톨루이와 그의 아들 뭉케와 함께 가을에 직접 전장에 나섰다.
통관이 금나라에 의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몽골군은 고갈된 산시성에서 기근에 시달리자 형제들은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내몽골로 물러났다. 톨루이는 수부타이와 시기 쿠투쿠를 대동하고 통관을 우회하여 송나라 영토를 가로질러 산시성 남쪽으로 이동하는 한편, 오고데이는 황하를 따라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진격할 것이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톨루이의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인육 섭취에 의존했지만, 손대지 않은 송나라 땅에서 식량을 성공적으로 조달하고, 금나라의 허난으로 돌아와 1232년 2월 9일 산펑산에서 적과 교전했다. 톨루이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금나라 군대는 몽골 군대의 모든 여성들을 강간하겠다고 위협했다. 톨루이의 군대가 승리한 후, 그들은 금나라 전체 군대의 수간(Sodomy)으로 보복했다.
1232년 5월, 형 우구데이 칸이 갑자기 중병을 앓게 되자, 툴루이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자신이 형을 대신해 희생하겠다고 기도했다 한다.[16] 그로부터 수일 뒤 우구데이 칸의 병이 갑자기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1232년 7월 툴루이는 카이펑에서 양저우로 퇴각했다가, 같은 달 양저우에서 군대를 돌려 몽골로 귀국했다. 몽골 고원에 이르러 급사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이라고도 한다.[15]
툴루이의 막대한 유산은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비(妃) 소르칵타니 베키를 거쳐, 두 사람의 아들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케에게 상속되었으며, 훗날의 대원 울루스, 일 칸국의 기반이 되었다.
2. 1. 초기 활동
1192년에 테무진(훗날의 칭기즈 칸)과 그의 첫 부인 옹기라트족 출신 보르테 우진 카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사에는 툴루이로, 신원사에는 툴루이라는 이름과 풀루이(褒雷)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툴루이는 어릴적부터 영리한 성격으로, 무용이 뛰어나 덕망이 있었다고 한다. 1197년 타타르족 카르킬 시라에 의해 유괴되었다가 구출되기도 했다.[1] 툴루이는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에 참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1212년 처남 치구와 함께 몽골의 제1차 금나라 원정에 출정하여 몽골군 중군 1개 부대를 이끌었다.[1]툴루이는 군사 전략에 능하고 지혜로운 인물이었으나, 술을 매우 좋아했다. 군사 전술에는 능했지만 통솔력은 부족했고, 잔인했으며, 건강 문제가 일찍부터 있었다.[2] 1203년 징기스 칸이 케레이트를 멸망시킨 후, 케레이트 족의 족장 옹 칸의 조카딸 소르칵타니 베키와 결혼했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 차가타이는 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며 갈등했고,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툴루이는 이들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중 후계자를 고민하다가 온화하고 지적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정했다.
1213년 7월부터 1214년 10월까지 툴루이는 매부 치쿠와 함께 금나라 원정에 참전, 덕흥부(德興府, 현, 허베이 성 줘루 현(河北省涿鹿縣))을 점령했다. 이후 남하하여 저루현, 이주(易州)를 격파하고 허베이, 산둥, 황하 강 일대의 전투에서 금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1213년 툴루이는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의 패(霸), 막(莫) 등 여러 주(州路)를 점령, 복속시켰다.
1212년에 시작된 제1차 금나라 원정에서는 칭기즈 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을 이끌고 항상 아버지 곁을 지키며, 허베이에서 산둥에 걸친 황하 강변 지역의 정복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야호령 전투 후의 1212년에 치구 큐레겐과 함께 요충지인 덕흥부 주변의 여러 성을 평정한 것은, 『몽골 비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6][7]
1219년에 호라즘 제국 원정(칭기즈 칸의 서정)이 시작되자, 다시 칭기즈 칸을 따라 중군을 이끌고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 등 마와라안나흐르 지방의 여러 도시 정복을 지휘했다. 1220년 가을, 호라즘 제국의 술탄 알라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하기 위해 이란 방면으로 전전한 제베와 수부타이 등의 후방 지원을 위해, 툴루이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방으로 파견되었다.[8] 그러나, 이 지방의 주요 도시 니사, 메르브와 니샤푸르, 헤라트 등을 정복했지만,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항복 권고를 촉구하는 사자가 살해되어, 도시 함락 시에는 섬멸전이 벌어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보복으로 항복한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1225년 말에 시작된 서하 원정(제5차 서하 원정)에서, 이듬해 1226년 2월에는 오고타이와 함께 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서하 영내로 침공했다. 툴루이는 이러한 여러 전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군공을 세워, 그 무명을 떨쳤다.
1219년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대에 참여한 툴루이는 서진, 중국인, 몽골인으로 구성된 1개 부대를 이끌고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부카라,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을 포함한 마와라안나흐르 일대 도시들을 공략하였다.[8] 1219년 툴루이의 서방 원정에는 칭기즈 칸의 쿨란 카툰이 동행하였다.
1220년 가을, 툴루이는 호라즘 샤의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하러 파견된 제베와 수부타이의 후발대로 이들을 따라갔다.[8] 툴루이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역으로 파견되어 호라즘 샤 술탄 알라 웃딘 무하마드의 주요 장수들과 교전했다. 징기스칸은 호라즘과 다른 이웃 도시에서 몽골에 대한 세금과 공물 지불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20년 11월, 니샤푸르에서 발생한 봉기를 진압하러 갔던 툴루이의 매부 토구차르가 니샤푸르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툴루이는 칭기즈칸의 명으로 봉기를 진압하고 도시를 함락한 뒤 보복으로 투항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1219년에 시작된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침공 동안 툴루이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군대를 동행했다. 이들은 오트라르에서 진행 중인 공성전을 우회하여 1220년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주요 중심지인 호라즘 샤의 수도 사마르칸트와 그 이웃 도시 부하라를 공격했다. 부하라는 급습으로 몇 달 만에 함락되었고, 사마르칸트는 몇 달 후에 함락되었다.
툴루이의 군대는 몽골 침략군의 10분의 1로 구성되었으며, 호라즘의 징집병이 증원되었다. 역사가 칼 스베드럽은 병력 규모를 약 7,000명으로 추산한다. 툴루이는 발흐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투르크메니스탄 국경의 무리차크로 서쪽으로 행군한 다음 마르가브 강과 그 지류인 쿠시크 강을 건너 남쪽에서 메르브 시로 접근했다. 2월 24일 밤, 투르크멘 약탈자들을 매복했는데, 기습 공격으로 방심한 약탈자들은 몽골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강에 빠져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흩어졌다. 다음 날 몽골군은 메르브에 도착했다. 툴루이는 6일 동안 도시를 평가한 후 도시의 요새가 장기간의 포위를 견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7일째에 일반 공격을 받은 후, 두 번이나 역습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시민들은 저항 의지를 잃고 몽골군에 항복했으며, 몽골군은 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툴루이는 이 약속을 어기고 소수의 장인과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시민을 평원으로 몰아내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툴루이는 니샤푸르를 향해 남서쪽으로 행군했는데, 니샤푸르는 이미 전쟁 중 많은 사건을 겪었다. 호라즘 제국의 통치자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의 트란스옥시아나 진격을 피해 거의 1년 전인 1220년 4월 18일에 도착했다. 그는 그해 5월 중순에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 떠났고, 그들은 다음 날 도착했다. 도시는 장군들에게 항복했고, 장군들은 성벽을 낮추고 지나가는 몽골군을 돕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도시는 이러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대신 몽골군에게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여 통제를 시행하려던 토쿠차르를 살해했다.
툴루이는 4월 7일에 도시에 도착했고, 군대 규모에 압도된 주민들은 즉시 항복 조건을 합의하려고 했다. 칸의 사위 살해는 몽골군에게 심각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모든 제안은 거부되었다. 공격은 그날이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고, 4월 9일에 성벽이 뚫리고 다음 날 도시는 함락되었다.
호라산의 마지막 주요 도시 헤라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20세기 초 역사가 바실리 바르톨드는 1400년대의 지역 역사를 인용하여 수비대를 제외한 주민은 아무도 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근처에서 몽골군과 싸운 연대기 작가 민하즈-이 시라즈 주즈자니는 8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가 함락되고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했다. 1944년에 재발견된 연대기에 따르면 헤라트에는 두 번의 포위 공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마을에서 몽골 외교관 처형으로 시작되었다. 분노한 툴루이는 8일간의 공격을 시작했고, 결국 마을의 말리크|총독ar가 사망했다. 툴루이는 도시 해자 밖에서 주민들이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메르브와 달리 몽골군은 약속을 지켜 도시 수비대의 12,000명만 살해했다.
전통적으로 툴루이의 호라산 원정에 기인하는 사망자 수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간주된다.
1221년, 알라웃딘의 셋째 아들이자 가즈니 지방의 영주인 잘랄 웃딘이 대군을 이끌고 거병하자, 칭기즈 칸이 조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서안에서 맞이했을 때, 툴루이는 호라산에 머물며 칭기즈 칸 본군의 후방 지원을 맡았다.
2. 1. 1. 출생과 유년기
1192년에 테무진(훗날의 칭기즈 칸)과 그의 첫 부인 옹기라트족 출신 보르테 우진 카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사에는 툴루이로, 신원사에는 툴루이라는 이름과 풀루이(褒雷)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툴루이라는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 거울을 의미한다.[1] 출생년도는 1191년생 설, 1190년생 설, 1193년생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툴루이의 동복 친형제로는 형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와 누이 코첸 베키, 알카이 베키, 투멜룬, 알랄툰 베키, 체체이켄 등이 있었다.[1]
툴루이는 어릴적부터 영리한 성격으로, 무용이 뛰어나 덕망이 있었다고 한다. 인색하다는 평도 있었다. 신원사 108권에 의하면 그는 말재주에 능했다(甫能言)고 한다. 1197년 타타르족 카르킬 시라에 의해 유괴되었다가, 의붓 누이이자 할머니 호엘룬의 양자 보로클의 아내인 알타니와 칭기즈칸의 다른 두 부하 등에 의해 구출되었다.[1] 툴루이는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에 참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1212년 처남 치구와 함께 몽골의 제1차 금나라 원정에 출정, 몽골군 중군 1개 부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 덕흥부(德興府, 현 산시성 더싱, 줘루 현 일대) 공략에 출전하였다.[1]
2. 1. 2. 청년기
툴루이는 군사 전략에 능하고 지혜로운 인물이었으나, 술을 매우 좋아했다. 군사 전술에는 능했지만 통솔력은 부족했고, 잔인했으며, 건강 문제가 일찍부터 있었다.[2] 1203년 징기스 칸이 케레이트를 멸망시킨 후, 케레이트 족의 족장 옹 칸의 조카딸 소르칵타니 베키와 결혼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카의 네 아들을 낳았다.칭기즈 칸의 아들 중 차가타이는 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며 갈등했다. 보르테 카툰이 메르키트족 토크토아 베키에게 납치되어 칠게르에게 주어졌다가 9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 이유였다. 차가타이는 주치의 출생에 계속 의문을 제기하여, 몽골 부족장들로부터 후계자로 부적격자로 여겨졌다. 차가타이와 주치의 갈등은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화레즘 원정길에서도 주치와 차가타이는 대립했다. 툴루이는 이들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중 후계자를 고민하다가 온화하고 지적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정했다. 주치, 차가타이는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213년 7월부터 1214년 10월까지 칭기즈 칸의 아들들이 금나라로 출정했다. 1213년 7월부터 툴루이는 매부 치쿠와 함께 금나라 원정에 참전, 덕흥부(德興府, 현, 허베이 성 줘루 현(河北省涿鹿縣))을 점령했다. 이후 남하하여 저루현, 이주(易州)를 격파하고 허베이, 산둥, 황하 강 일대의 전투에서 금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1213년 툴루이는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의 패(霸), 막(莫), 하간(河間), 창(滄), 헌(獻), 심(深), 기(祁), 이(蠡), 기(冀), 은(恩), 복(僕), 개(開), 골(滑), 부(博), 제(濟), 태안(泰安), 제남(濟南), 빈(濱), 예(棣), 익도(益都), 뇌(淄), 유(維), 등(登), 기(萊), 기(沂) 등 여러 주(州路)를 점령, 복속시켰다.
1212년에 시작된 제1차 금나라 원정에서는 칭기즈 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을 이끌고 항상 아버지 곁을 지키며, 허베이에서 산둥에 걸친 황하 강변 지역의 정복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야호령 전투 후의 1212년에 치구 큐레겐과 함께 요충지인 덕흥부 주변의 여러 성을 평정한 것은, 『몽골 비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6][7]
1219년에 호라즘 제국 원정(칭기즈 칸의 서정)이 시작되자, 다시 칭기즈 칸을 따라, 이곳에서도 중군을 이끌고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 등 마와라안나흐르 지방의 여러 도시 정복을 지휘했다. 1220년 가을에는 호라즘 제국의 술탄 알라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하기 위해 이란 방면으로 전전한 제베와 수부타이 등의 후방 지원을 위해, 툴루이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방으로 파견되었다.[8] 그러나, 이 지방의 주요 도시 니사, 메르브와 니샤푸르, 헤라트 등을 정복했지만, 선봉 부대를 포함하여 막료에게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항복 권고를 촉구하는 사자가 살해되어, 도시 함락 시에는 섬멸전이 벌어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보복으로 항복한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듬해 1221년에는 알라웃딘의 셋째 아들이자 가즈니 지방의 영주인 잘랄 웃딘이 대군을 이끌고 거병하자, 칭기즈 칸이 조치, 차카타이, 오고타이 등을 이끌고 이를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서안에서 맞이했을 때, 호라산에 머물며 칭기즈 칸 본군의 후방 지원을 맡았다.
1225년 말에 시작된 서하 원정(제5차 서하 원정)에서, 이듬해 1226년 2월에는 오고타이와 함께 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서하 영내로 침공했다. 툴루이는 이러한 여러 전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군공을 세워, 그 무명을 떨쳤다.
2. 1. 3. 호라즘 정복 전쟁 참여
1219년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대에 15~20만 병력과 함께 참여한 툴루이는 서진, 중국인, 몽골인으로 구성된 1개 부대를 이끌고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부카라,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을 포함한 마와라안나흐르 일대 도시들을 공략하였다.[8] 1219년 툴루이의 서방 원정에는 칭기즈 칸의 쿨란 카툰이 동행하였다.1220년 가을, 툴루이는 호라즘 샤의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하러 파견된 제베와 수부타이의 후발대로 이들을 따라갔다.[8] 툴루이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역으로 파견되어 호라즘 샤 술탄 알라 웃딘 무하마드의 주요 장수들과 교전했다. 징기스칸은 호라즘과 다른 이웃 도시에서 몽골에 대한 세금과 공물 지불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20년 11월, 니샤푸르에서 발생한 봉기를 진압하러 갔던 툴루이의 매부 토구차르(케레이트부 옹 칸의 아들)가 니샤푸르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툴루이는 칭기즈칸의 명으로 봉기를 진압하고 도시를 함락한 뒤 보복으로 투항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1219년에 시작된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침공 동안 툴루이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군대를 동행했다. 이들은 오트라르에서 진행 중인 공성전을 우회하여 1220년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주요 중심지인 호라즘 샤의 수도 사마르칸트와 그 이웃 도시 부하라를 공격했다. 부하라는 급습으로 몇 달 만에 함락되었고, 사마르칸트는 몇 달 후에 함락되었다. 칭기즈는 남쪽 투르키스탄 산맥으로 이동하여 여름 동안 군대를 쉬게 했고, 그의 장군 제베와 수부타이는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아들들은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가을에 나타나 테르메즈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툴루이와 그의 아버지는 1220~1221년 겨울을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바흐시 강 상류에서 반군을 처리하는 데 보냈다. 이때 제베와 수부타이는 이란 서부로 이동했고, 이전에 대호라산 지역에서 항복했던 도시들은 더 대담해졌다. 칭기즈 칸의 사위 토쿠차르는 1220년 11월 니샤푸르에서 발생한 초기 반란으로 사망했다. 1221년 초 발흐를 점령하고 탈리칸을 계속 포위한 후, 칭기즈는 광대하고 부유한 지역에 어떠한 반대도 남아 있지 않도록 툴루이를 호라산으로 보냈다. 그의 임무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지역과 도시를 평정하고 정복하는 것이었고, 역사가 J.A. 보일은 툴루이가 이 임무를 "그 지역이 결코 회복하지 못한 철저함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툴루이의 군대는 몽골 침략군의 10분의 1로 구성되었으며, 호라즘의 징집병이 증원되었다. 역사가 칼 스베드럽은 병력 규모를 약 7,000명으로 추산한다. 툴루이는 발흐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투르크메니스탄 국경의 무리차크로 서쪽으로 행군한 다음 마르가브 강과 그 지류인 쿠시크 강을 건너 남쪽에서 메르브 시로 접근했다. 2월 24일 밤, 투르크멘 약탈자들을 매복했는데, 기습 공격으로 방심한 약탈자들은 몽골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강에 빠져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흩어졌다. 다음 날 몽골군은 메르브에 도착했다. 툴루이는 6일 동안 도시를 평가한 후 도시의 요새가 장기간의 포위를 견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7일째에 일반 공격을 받은 후, 두 번이나 역습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시민들은 저항 의지를 잃고 몽골군에 항복했으며, 몽골군은 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툴루이는 이 약속을 어기고 소수의 장인과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시민을 평원으로 몰아내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각 몽골 병사에게 300~400명의 사람을 죽이도록 할당되었다고 한다. 당시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시르는 사망자 수를 700,000명으로 추산했고, 몇십 년 후에 글을 쓴 아타-말리크 주바이니는 한 성직자가 13일 동안 시신을 세어 1,300,000명이라는 수치에 도달했다고 기록했다.
한편, 툴루이는 니샤푸르를 향해 남서쪽으로 행군했는데, 니샤푸르는 이미 전쟁 중 많은 사건을 겪었다. 호라즘 제국의 통치자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의 트란스옥시아나 진격을 피해 거의 1년 전인 1220년 4월 18일에 도착했다. 그는 그해 5월 중순에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 떠났고, 그들은 다음 날 도착했다. 도시는 장군들에게 항복했고, 장군들은 성벽을 낮추고 지나가는 몽골군을 돕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도시는 이러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대신 몽골군에게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여 통제를 시행하려던 토쿠차르를 살해했다. 사망한 무함마드 2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잘랄 앗딘 밍게브루니는 1221년 2월 10일에 제국의 수도 구르간지에서 진행 중인 몽골군 포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에 도착했다. 그는 조잔 방향으로 떠나기 전 이틀 동안 도시에 머물렀다.
툴루이는 4월 7일에 도시에 도착했고, 군대 규모에 압도된 주민들은 즉시 항복 조건을 합의하려고 했다. 칸의 사위 살해는 몽골군에게 심각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모든 제안은 거부되었다. 공격은 그날이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고, 4월 9일에 성벽이 뚫리고 다음 날 도시는 함락되었다. 주바이니에 따르면, 도시는 복수를 위해 파괴되었다. 토쿠차르의 미망인은 400명의 장인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주민 학살을 감독했다. 메르브와 달리 모든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도시의 모든 고양이와 개를 포함한 1,747,000명의 희생자 시신이 거대한 무더기로 쌓였다. 그 후 땅은 쟁기질되었다. 이 지역을 행군하면서 툴루이는 아비와르드,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사, 이란의 투스, 자자름과 같은 주변 도시를 공격하는 부대를 보냈다.
호라산의 마지막 주요 도시 헤라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20세기 초 역사가 바실리 바르톨드는 1400년대의 지역 역사를 인용하여 수비대를 제외한 주민은 아무도 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근처에서 몽골군과 싸운 연대기 작가 민하즈-이 시라즈 주즈자니는 8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가 함락되고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했다. 1944년에 재발견된 연대기에 따르면 헤라트에는 두 번의 포위 공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마을에서 몽골 외교관 처형으로 시작되었다. 분노한 툴루이는 8일간의 공격을 시작했고, 결국 마을의 말리크|총독ar가 사망했다. 툴루이는 도시 해자 밖에서 주민들이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메르브와 달리 몽골군은 약속을 지켜 도시 수비대의 12,000명만 살해했다. 툴루이는 몽골 감독관을 임명하여 마을을 통치하게 한 후 1221년 중반에 탈리칸에서 아버지와 재회하기 위해 이 지역을 떠났다. 그 후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몽골 장군 엘지기데이에게 몇 달 동안 포위되었으며, 그는 1222년 6월 7일 동안 지속된 학살에서 1,600,000명에서 2,400,000명의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툴루이의 호라산 원정에 기인하는 사망자 수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간주된다.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 도시는 보고된 인구의 일부분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인구는 파괴된 도시로 거의 기적적으로 돌아왔다고 보고되었다. 칭기즈 칸의 양아들 시기 쿠투쿠는 또 다른 반란 이후 1221년 11월 메르브에서 100,000명을 더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토착민들이 파괴를 정량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인구 통계학적 재앙을 분명히 나타낸다. 역사가 미칼 비란은 몽골군이 동아시아의 실용적이고 잔혹한 전쟁 방식을 덜 무자비한 이슬람 세계로 가져온 속도가 이러한 문화적 충격의 한 요인이었다고 제안했다.
1221년, 알라웃딘의 셋째 아들이자 가즈니 지방의 영주인 잘랄 웃딘이 대군을 이끌고 거병하자, 칭기즈 칸이 조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서안에서 맞이했을 때, 툴루이는 호라산에 머물며 칭기즈 칸 본군의 후방 지원을 맡았다.
2. 2. 칭기즈 칸의 후계자 내정
몽골 초원의 부족들은 고정된 계승 제도가 없었지만, 종종 막내아들이 상속하는 말자 상속과 같은 형태를 따랐다. 그러나 이는 칭호가 아닌 재산에만 적용되었다.[1] 몽골은 분봉제를 통해 칭기즈 칸은 자신의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에게 토지와 백성을 재산으로 할당했다. 툴루이에게는 알타이 산맥 근처의 몽골 본토가 주어졌다.[2]''몽골 비사''에는 1219년 호라즘 제국 원정을 준비하면서 칭기스 칸이 아내 예수이의 요청에 따라 후계자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 차가타이는 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여 서로 갈등하였다. 보르테 카툰이 메르키트족 토크토아 베키에게 포로로 끌려가 칠게르에게 주어졌다가, 9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 이유였다.[3] 차가타이는 과격한 성격으로 주치의 출생에 계속 의문을 제기하여, 몽골의 부족장들로부터 후계자로 부적격자로 간주되었다. 차가타이와 주치의 공공연한 대립은 주먹다짐까지 가게 되었다.[4] 화레즘 원정길에서도 주치와 차가타이는 대립했다. 툴루이는 언급하지 않고 둘의 대립을 지켜보았다.[5] 칭기즈 칸은 불문율에 붙이게 했으나 주치와 차가타이는 계속 대립, 갈등했고, 칭기즈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중에서 후계자를 고민하다가 다소 온화하고 지적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내정했다.[6] 주치, 차가타이는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7]
툴루이는 군사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우월했다. 그의 호라산 원정은 호라즘 제국을 무너뜨렸고, 오고타이는 지휘관으로서 훨씬 덜 유능했고 몽골 기준으로도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8] 그러나 그는 모든 국민에게 호감을 받았고, 관대함, 정중함, 중재 및 타협에 대한 의지로 알려졌다. 자신의 군사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신의 유능한 부하들을 신뢰했다.[9]
툴루이는 1227년 서하와의 전쟁 중 아버지 칭기스 칸이 사망했을 때 곁에 있었다. 막내아들인 툴루이는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아마도 이전의 전통을 활용하여 칸의 죽음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10] 툴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는 것을 꺼린 것은 그것이 자신의 야망에 가하는 위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되었다.[11] 결국 툴루이는 관료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야 했다. 1229년, 쿠릴타이는 오고타이를 칸으로 옹립했고, 툴루이가 새로운 통치자를 가장 먼저 찬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2]
2. 3. 감국 시절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면서, 툴루이는 아버지의 재산과 직할 울루스 101개 천인대에 해당하는 백성과 군대 전부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친족 중 가장 강력한 재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후계 카안이 선출될 때까지 제국의 정무를 대행하는 감국의 지위에 올랐다.[9] 툴루이 감국기의 주요 정책으로는 칭기즈 칸 사후 반 몽골 운동을 시작한 지역에 대한 탐마치 파견이 있었는데, 특히 이란에 파견된 초르마군과 요동에 파견된 사리타이는 이때 파견을 시작했다.[9]칭기스 칸 사후 2년 뒤인 1229년, 툴루이는 자신의 즉위를 고사하고 아버지 칭기스 칸이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했던 형 오고타이를 제2대 카안으로 추대했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툴루이는 같은 해 봄에 제국의 여러 왕과 공신에게 쿠릴타이를 열 것을 포고했고, 9월에 새 황제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개최되었다.[11] ''세계 정복자사''에 따르면, 처음 사흘 밤낮에 걸친 대연회가 열린 후, 우익 제왕의 대표인 차가타이와 좌익 제왕의 대표인 테무게 옷치긴이 오고타이의 손을 잡고 옥좌로 인도하고, 중군을 대표하는 툴루이가 축배를 올리는 의식을 거쳐 오고타이가 즉위했다고 한다.[12]
과거에는 ''원조비사''의 기술에 근거하여 툴루이가 4개 천인대의 울루스밖에 소유하지 않은 형 오고타이에게 자신의 울루스 대부분의 지휘권을 양도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이는 오류이며 툴루이는 오고타이의 즉위 후에도 제국 내에서 최대의 세력을 가진 채였다고 여겨진다.[13]
툴루이는 1227년 서하와의 전쟁 중 아버지 칭기스 칸이 사망했을 때 곁에 있었다. 막내아들인 툴루이는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칸의 죽음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 여기에는 몽골 군대가 관련된 모든 공세적인 군사 행동 중단, 섭정이 감독할 긴 애도 기간 설정, 후계자를 지명하고 선택할 쿠릴타이 개최 등이 포함되었다. 툴루이는 여전히 계승에 유효한 후보였고 조치의 가족의 지지를 받았으나, 칭기스가 존경했던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쿠릴타이는 이전 통치자의 소망을 준수하고 오고타이를 통치자로 임명할 것이었다. 툴루이가 쿠릴타이 개최를 꺼린 것은 자신의 야망에 가하는 위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되었다. 결국 툴루이는 관료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야 했고, 1229년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를 칸으로 옹립했다. 툴루이를 편애하는 연대기 작가가 쓴 ''비사''는 그의 역할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2. 4. 생애 후반
1226년 8월 아버지 칭기즈 칸이 서하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류판산 부근에서 사망하자,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장례와 매장을 주관했다.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12만 9천 명의 군대 중 10만 1천 명을 맡게 되었다.[1] 칭기즈 칸의 사후 바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족장들은 툴루이를 새 대칸으로 선출했지만, 툴루이는 2년간 임시 대칸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 오고타이에게 양위했다. 몽골 족장들은 막내아들이 '옷치킨'(화로를 지키는 자)으로서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전통에 따랐지만, 툴루이가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1227년 8월 칸위에 오른 그는 스스로를 이크 노얀(ᠶᠡᠭᠡᠡ᠋ ᠨᠣ᠊ᠶᠡ᠊ᠨ, 큰 벼슬), 우르크 노얀(Үлүг ноён ᠡᠣ᠊᠊ᠢ᠊᠊ᠯᠣ᠊᠊ᠢ᠊ᠡ᠋ ᠨᠣ᠊ᠶᠡ᠊ᠨ, ᠡᠣ᠊᠊ᠢ᠊᠊ᠯ᠊ᠢ᠊᠊ᠢ᠊ᠭᠡ᠋ ᠨᠣ᠊ᠶᠡ᠊ᠨ), 에즈단(통치자)이라 칭했다. 당시 연경(燕京)의 도적떼가 치안 부재를 틈타 부자들의 재물을 약탈했으나 관리들은 이를 처리하지 못했다. 툴루이는 타차르(塔察), 우두차카르(吾圖撒合里)에게 활과 화살을 주어 파견, 도적 16명을 사살했고, 연경의 도적들은 도주했다.
툴루이의 집권 당시 야율초재는 정복지의 백성을 모두 죽이면 세금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항의하며, 한나라 초기 사상가 육가(陸賈)의 서적을 들어 내치에도 힘쓸 것을 권고했다.
1228년 봄, 쿠릴타이가 열렸으나 툴루이와 오고타이 중 누구를 대칸으로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1229년 봄, 몽골 케룰렌 강가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부족장들은 막내아들이 고향을 상속하는 전례에 따라 툴루이에게 칸 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많은 몽골 귀족들이 툴루이를 지지했고, 40일간의 토론 끝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토론 마지막에 차가타이와 삼촌 테무게 옷치킨만이 오고타이를 지지했다. 주치의 아들 바투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관전했다. 툴루이는 몽골 귀족들의 추대를 사양하고, 아버지 칭기스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우구데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후 오고타이는 툴루이에게 할하 몽골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몽골 초원의 부족들은 고정된 계승 제도가 없었지만, 종종 말자 상속과 같은 형태를 따랐다. 막내아들은 형들처럼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얻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속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는 칭호가 아닌 재산에만 적용되었다. 몽골 분봉제를 통해 칭기즈는 자신의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에게 토지와 백성을 재산으로 할당했다. 그의 형제들인 카사르, 하치운, 테무게, 벨구테이는 동쪽의 대흥안령산맥을 따라 토지를 받았고, 세 아들의 영토는 서쪽에 위치했다. 조치에게는 이르티쉬강을 따라 시베리아와 킵차크 영토까지 뻗어 나가는 땅이 주어졌고, 차가타이에게는 투르케스탄의 알말리크 주변의 옛 카라 키타이 영토가 주어졌으며, 오고타이에게는 준가리아의 땅이 주어졌다. 툴루이에게는 알타이 산맥 근처의 몽골 본토가 주어졌다.
''몽골 비사''에는 1219년 호라즘 제국 원정을 준비하면서 칭기스 칸이 아내 예수이의 요청에 따라 후계자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라시드 앗 딘은 서하 정복 전에 결정이 내려졌다고 주장한다. 날짜와 상관없이 다섯 명의 후보자가 있었다. 칭기스 칸의 네 아들과 막내 동생 테무게였는데, 테무게는 가장 약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고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었다.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한 후 태어난 조치가 사생아일 가능성이 컸지만, 칭기스는 이에 대해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조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소원해졌다. 조치가 자신의 분봉지에 머물면서 확장하려는 선호도 때문이었는데, 구르간지 포위전에서 그의 재산 도시를 파괴하려는 것을 꺼려하여 결국 칭기스에게 칸의 전리품을 나누어주지 못한 것이 긴장을 악화시켰다. 칭기스는 조치가 1223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것에 분노했는데, 사냥을 하느라 바빴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오고타이와 차가타이를 보내 그를 데려오려 했지만, 조치가 심각한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차가타이는 조치의 후계 가능성에 대해 "메르키트 사생아"라고 부르고 아버지 앞에서 그와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칭기스는 그가 융통성이 없고, 오만하며, 편협하다고 보았다. 그는 몽골 법률 관습에 대한 뛰어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의 제거로 오고타이와 툴루이가 두 주요 후보로 남게 되었다. 툴루이는 군사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우월했다. 그의 호라산 원정은 호라즘 제국을 무너뜨렸고, 오고타이는 지휘관으로서 훨씬 덜 유능했고 몽골 기준으로도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국민에게 호감을 받았고, 관대함, 정중함, 중재 및 타협에 대한 의지로 알려졌다. 자신의 군사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신의 유능한 부하들을 신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내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인 소르칵타니 베키가 다른 많은 종교의 후원자였던 툴루이보다 몽골 전통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컸다.
툴루이는 1227년 서하와의 전쟁 중 아버지 칭기스 칸이 사망했을 때 곁에 있었다. 막내아들인 툴루이는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아마도 이전의 전통을 활용하여 칸의 죽음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 여기에는 몽골 군대가 관련된 모든 공세적인 군사 행동 중단, 섭정이 감독할 긴 애도 기간 설정, 후계자를 지명하고 선택할 쿠릴타이 개최 등이 포함되었다. 툴루이에게 이것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여전히 계승에 유효한 후보였고 조치의 가족의 지지를 받았다. 칭기스가 승진시키고 존경했던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일반적인 쿠릴타이는 그러나 이전 통치자의 소망을 의심없이 준수하고 오고타이를 통치자로 임명할 것이다. 툴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는 것을 꺼린 것은 그것이 자신의 야망에 가하는 위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되었다. 결국 툴루이는 관료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야 했다. 1229년, 쿠릴타이는 오고타이를 칸으로 옹립했고, 툴루이가 새로운 통치자를 가장 먼저 찬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툴루이를 편애하는 연대기 작가가 쓴 ''비사''는 그의 역할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2. 4. 1. 서하 멸망과 금나라 공략
1227년 8월 28일, 서하의 반격이 우려되자 툴루이의 몽골군은 흥경부(興慶府)를 공격 함락시켰다. 바로 말제 이현과 서하 황족을 사로잡아 암살하고 서하를 멸망시켰다.[2] 이때 툴루이는 말제에게 어떠한 시호나 묘호도 내리지 않았다.1229년 오고타이 칸은 수부타이를 보내 금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1230년 툴루이는 오고타이와 군대를 나누어 금나라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해 중간에 군사를 돌려 송나라 국경으로 향했다. 1230년 7월 오고타이 칸의 명을 받아 툴루이는 아들 몽케와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의 천성보(天成堡) 등을 공격, 함락시키고 봉익(鳳翔)을 공격하였다.
금나라 잔존 세력은 오고데이 통치 초기에 산시에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났고, 1230년 통관에서 금나라 장군이 몽골 장군을 격파했다. 오고데이는 톨루이와 그의 아들 뭉케와 함께 가을에 직접 전장에 나섰는데, 뭉케는 오고데이의 셋째 부인 앙퀴가 키웠다. 이 전역의 많은 사건들은 연대기적 어려움과 이후 금지된 정보의 은폐로 인해 자료에서 혼란스러워졌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앳우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통관에서의 패배 이후 수부타이를 상대로 한 전투를 포함한 두 번의 패배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역전으로 오고데이의 통치가 위협받았고, 그는 가까운 가족과 함께 직접 나섰다. 톨루이의 아들 쿠빌라이 치세에 쓰여진 여러 자료에서는 패배의 원인을 오고데이의 형편없는 지휘력으로 돌리고, 톨루이가 이후의 승리를 거두고 형의 심술궂은 불평에 현명한 말로 꾸짖은 공을 인정한다.
통관이 금나라에 의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몽골군은 고갈된 산시성에서 기근에 시달리자 형제들은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내몽골로 물러났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이디어 중 하나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즉, 거대한 포위 공격에서 톨루이는 수부타이와 시기 쿠투쿠를 대동하고 통관을 우회하여 송나라 영토를 가로질러 산시성 남쪽으로 이동하는 한편, 오고데이는 황하를 따라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진격할 것이다. 이 위험한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톨루이의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인육 섭취에 의존했지만, 손대지 않은 송나라 땅에서 식량을 성공적으로 조달하고, 금나라의 허난으로 돌아와 1232년 2월 9일 산펑산에서 적과 교전했다. 톨루이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금나라 군대는 몽골 군대의 모든 여성들을 강간하겠다고 위협했다. 톨루이의 군대가 승리한 후, 그들은 금나라 전체 군대의 수간(Sodomy)으로 보복했다. 톨루이의 성공은 몽골 궁정에서의 그의 입지를 강화하는 반면, 오고데이의 평범한 군사적 성과는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2. 4. 2. 금나라 원정 참여
1227년 8월 28일, 서하의 반격이 우려되자 툴루이의 몽골군은 흥경부(興慶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말제 이현과 서하 황족을 사로잡아 암살하고 서하를 멸망시켰다. 이때 툴루이는 말제에게 어떠한 시호나 묘호도 내리지 않았다.[8]1229년 오고타이 칸은 수부타이를 보내 금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1230년 툴루이는 오고타이와 군대를 나누어 금나라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해 군사를 돌려 송나라 국경으로 향했다. 1230년 7월 오고타이 칸의 명을 받아 툴루이는 아들 몽케와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의 천성보(天成堡) 등을 함락시키고 봉익(鳳翔)을 공격하였다.
1230년 가을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 정벌군을 편성, 툴루이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천성보(天城堡), 포성현(蒲城縣) 일대를 격파하고, 서부에서 금나라 군사와 교전하는 오고타이 군을 지원하였다. 1230년 말 오고타이는 금나라 원정군의 남서부 사령관을 수부타이에서 툴루이로 교체하였다. 1231년 툴루이는 카이펑 공격을 계획한다. 1231년 2월 툴루이의 군대는 봉주(鳳州), 익주(翔州)를 점령했다.
툴루이는 당시 우익군을 봉익 근처에 주둔했으나 진격하지 못했고, 한수(漢水)를 건너야 했다. 툴루이는 송나라에 사신 사부칸(搠不罕)과 송가도(宋假道)를 보냈으나 송나라에서는 툴루이가 보낸 사절을 죽였다. 격분한 툴루이는 3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봉주와 화양(華陽)을 치고, 흥원부(興元府)를 점령했으며 양주(洋州)지역을 점령, 도살했다. 툴루이는 1개 부대를 분할해 면서(沔西)를 공략하고, 강릉, 가맹(葭萌), 서수현(西水縣)을 공략하게 했다.
1231년 봄 툴루이는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함락시켰다. 그해 5월 오고타이 칸과 군사를 이끌고 관산(官山)을 점령했다. 1231년 중순, 툴루이는 군사를 이끌고 사천성 한중(漢中)을 공략, 사천성 경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사로잡거나, 대량 학살을 감행했다. 살아남은 사천의 주민들은 인근 귀주로 피신했다. 그해 음력 12월 25일 군사를 이끌고 북행, 우산에서 야밤에 불화살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1231년 11월 흥원과 양주 사이에 도착, 분견했던 1개 부대가 동쪽에서 합류해와 금주(金州), 방주(房州) 2개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 무당산(武當山)에서 송나라의 군대를 격파했다. 1231년 12월 16일 한수 이북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금나라 잔존 세력은 오고데이 통치 초기에 산시에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났고, 금나라의 선두 장군이 1230년 통관에서 몽골 장군을 격파했다. 오고데이는 톨루이와 그의 아들 뭉케와 함께 가을에 직접 전장에 나섰는데, 뭉케는 오고데이의 아이가 없는 셋째 부인 앙퀴가 키웠다.
통관이 금나라에 의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몽골군은 고갈된 산시성에서 기근에 시달리자 형제들은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내몽골로 물러났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이디어 중 하나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즉, 거대한 포위 공격에서 톨루이는 수부타이와 시기 쿠투쿠를 대동하고 통관을 우회하여 송나라 영토를 가로질러 산시성 남쪽으로 이동하는 한편, 오고데이는 황하를 따라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진격할 것이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톨루이의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인육 섭취에 의존했지만, 손대지 않은 송나라 땅에서 식량을 성공적으로 조달하고, 금나라의 허난으로 돌아와 1232년 2월 9일 산펑산에서 적과 교전했다. 톨루이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금나라 군대는 몽골 군대의 모든 여성들을 강간하겠다고 위협했다. 톨루이의 군대가 승리한 후, 그들은 금나라 전체 군대의 수간(Sodomy)으로 보복했다.
2. 4. 3. 죽음과 유산
1232년 5월, 형 우구데이 칸이 갑자기 중병을 앓게 되자, 툴루이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자신이 형을 대신해 희생하겠다고 기도했다 한다.[16] 그로부터 수일 뒤 우구데이 칸의 병이 갑자기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1232년 7월 극도의 무더위로 툴루이는 카이펑에서 양저우로 퇴각했다가, 같은 달 양저우에서 군대를 돌려 몽골로 귀국했다. 몽골 고원에 이르러 급사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이라고도 한다.[15] 일설에는 동생의 인망과 공적을 두려워한 형 우구데이에 의한 모살로 보기도 한다.
툴루이의 막대한 유산은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비(妃) 소르칵타니 베키를 거쳐, 두 사람의 아들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케에게 상속되었으며, 훗날의 대원 울루스, 일 칸국의 기반이 되었다.
몽골 초원의 부족들은 고정된 계승 제도가 없었지만, 종종 막내아들의 계승인 말자 상속과 같은 형태를 따랐다. 막내아들은 형들처럼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얻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속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칭호가 아닌 재산에만 적용되었다. 몽골 분봉제를 통해 칭기즈는 자신의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에게 토지와 백성을 재산으로 할당했다. 그의 형제들인 카사르, 하치운, 테무게, 벨구테이는 동쪽의 대흥안령산맥을 따라 토지를 받았고, 세 아들의 영토는 서쪽에 위치했다. 조치에게는 이르티쉬강을 따라 시베리아와 킵차크 영토까지 뻗어 나가는 땅이 주어졌고, 차가타이에게는 투르케스탄의 알말리크 주변의 옛 카라 키타이 영토가 주어졌으며, 오고타이에게는 준가리아의 땅이 주어졌다. 툴루이에게는 알타이 산맥 근처의 몽골 본토가 주어졌다.
''몽골 비사''에는 1219년 호라즘 제국 원정을 준비하면서 칭기스 칸이 아내 예수이의 요청에 따라 후계자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라시드 앗 딘은 서하 정복 전에 결정이 내려졌다고 주장한다. 날짜와 상관없이 다섯 명의 후보자가 있었다. 칭기스 칸의 네 아들과 막내 동생 테무게였는데, 테무게는 가장 약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고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었다.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한 후 태어난 조치가 사생아일 가능성이 컸지만, 칭기스는 이에 대해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조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소원해졌다. 조치가 자신의 분봉지에 머물면서 확장하려는 선호도 때문이었는데, 구르간지 포위전에서 그의 재산 도시를 파괴하려는 것을 꺼려하여 결국 칭기스에게 칸의 전리품을 나누어주지 못한 것이 긴장을 악화시켰다. 칭기스는 조치가 1223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것에 분노했는데, 사냥을 하느라 바빴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오고타이와 차가타이를 보내 그를 데려오려 했지만, 조치가 심각한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차가타이는 조치의 후계 가능성에 대해 "메르키트 사생아"라고 부르고 아버지 앞에서 그와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칭기스는 그가 융통성이 없고, 오만하며, 편협하다고 보았다. 그는 몽골 법률 관습에 대한 뛰어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의 제거로 오고타이와 툴루이가 두 주요 후보로 남게 되었다. 툴루이는 군사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우월했다. 그의 호라산 원정은 호라즘 제국을 무너뜨렸고, 오고타이는 지휘관으로서 훨씬 덜 유능했고 몽골 기준으로도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국민에게 호감을 받았고, 관대함, 정중함, 중재 및 타협에 대한 의지로 알려졌다. 자신의 군사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신의 유능한 부하들을 신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내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인 소르칵타니 베키가 다른 많은 종교의 후원자였던 툴루이보다 몽골 전통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컸다.
툴루이는 1227년 서하와의 전쟁 중 아버지 칭기스 칸이 사망했을 때 곁에 있었다. 막내아들인 툴루이는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아마도 이전의 전통을 활용하여 칸의 죽음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 여기에는 몽골 군대가 관련된 모든 공세적인 군사 행동 중단, 섭정이 감독할 긴 애도 기간 설정, 후계자를 지명하고 선택할 쿠릴타이 개최 등이 포함되었다. 툴루이에게 이것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여전히 계승에 유효한 후보였고 조치의 가족의 지지를 받았다. 칭기스가 승진시키고 존경했던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일반적인 쿠릴타이는 그러나 이전 통치자의 소망을 의심없이 준수하고 오고타이를 통치자로 임명할 것이다. 툴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는 것을 꺼린 것은 그것이 자신의 야망에 가하는 위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되었다. 결국 툴루이는 관료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야 했다. 1229년, 쿠릴타이는 오고타이를 칸으로 옹립했고, 툴루이가 새로운 통치자를 가장 먼저 찬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툴루이를 편애하는 연대기 작가가 쓴 ''비사''는 그의 역할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3. 가족 관계
소르칵타니 소생 네 아들을 라시드 알딘은 칭기스칸과 보르테의 네 아들과 비슷한 국가의 네 기둥이라 부른다.
페르시아의 사가에 따르면 툴루이는 총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며, 원사에 따르면 툴루이의 아들은 총 11명이라 한다.
4. 모살설
1232년 1월 9일 오고타이 칸의 명으로 장군 수부타이, 쿠토쿠 등과 군사를 이끌고 출정, 1월 13일 삼봉산에서 금나라 장군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5만 군대를 격파하고 균주로 퇴각시켰다. 균주에서 완안진화상, 완안합달이 이끄는 금나라 군대를 만났다. 툴루이는 삼봉산 일대에 참호를 파고 군사를 매복했다가, 비가 많이 내리는 틈을 타 병기 조종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금나라 군사를 섬멸하였다. 군량미 부족과 추위에 지친 금나라 군대는 그대로 쓰러졌다.[23]
바로 균주까지 금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잔존 병력과 금나라 장군 포하(蒲阿)가 이끄는 금나라 군을 궤멸시킨 뒤, 쉬저우를 함락시켰다. 1232년 초 툴루이가 이끄는 군대는 금나라의 내륙으로 진입했다. 1232년 4월 금나라의 중도 대흥부를 점령하고, 그해 여름 금나라의 관산을 점령하였다. 툴루이의 군대는 허난을 점령, 카이펑 공략을 시도했으나 금나라 군대의 결사적인 항거로 카이펑 함락은 실패하였다.[23]
1232년 5월 형 우구데이 칸이 갑자기 중병을 앓게 되고 6월 질병이 심해졌다. 원사에 의하면 소식을 들은 툴루이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자신이 형을 대신 희생하겠다고 기도했다 한다. 그로부터 수일 뒤 우구데이 칸의 병이 갑자기 씻은듯이 나았다.[23]
1232년 7월 극도의 무더위로 툴루이는 카이펑에서 양저우로 퇴각했다가, 같은 달 양저우에서 군대를 돌려 몽골로 귀국했다.[23]
5. 툴루이 칸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中國通史·第八卷·中古時代·元時期(下)》
上海人民出版社
[2]
문서
1976
[3]
문서
2023
[4]
문서
1976
[5]
문서
1994
[6]
문서
2012
[7]
문서
1976
[8]
문서
1976
[9]
문서
1992
[10]
문서
1976
[11]
문서
1976
[12]
문서
1976
[13]
문서
1996
[14]
문서
1996
[15]
문서
2014
[16]
문서
2014
[17]
문서
2014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23]
서적
Чингисхан. История Завоевателя Мира = Genghis Khan: the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Издательский Дом МАГИСТР-ПРЕСС»
2004
[24]
서적
Kublai Khan
Bantam Press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