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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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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이살 1세는 1885년 오스만 제국 메카에서 태어났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랍 대봉기를 이끌었다. 그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랍 독립을 주장했으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인해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왕으로 잠시 재위한 후 프랑스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후 이라크 국왕으로 선출되어 통치하며 범아랍주의를 장려했으나, 1933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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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파이살 1세
로마자 표기Fayṣal al-Awwal bin al-Ḥusayn bin ʿAlī al-Hāšimī
파이살 1세
파이살 1세
통치
작위이라크 국왕
재위 기간 (이라크)1921년 8월 23일 – 1933년 9월 8일
선임군사 점령
후임가지 1세
총리압드 알-라흐만 알-길라니
압드 알-무흐신 아스-사둔
자파르 알-아스카리
야신 알-하시미
타우피크 알-수와이디
나지 알-수와이디
누리 알-사이드
나지 샤우카트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
작위2시리아 국왕
재위 기간 (시리아)1920년 3월 8일 – 1920년 7월 24일
선임2군사 점령
후임2왕정 폐지
총리2리다 파샤 알-리카비
하시ム 알-아타시
출생과 사망
본명파이살 빈 후세인 빈 알리 알-하시미
출생1885년 5월 20일
출생지오스만 제국 헤자즈 빌라예트 메카
사망1933년 9월 8일 (48세)
사망지스위스 베른
안장지이라크 아다미야 이라크 왕실 묘지
가문
왕가하심가
아버지후세인 빈 알리
어머니압디야 빈트 압둘라
가족 관계
배우자후자이마 빈트 나세르
자녀아자 공주
라지하 공주
라피아 공주
가지 1세
종교 및 기타
종교수니 이슬람

2. 어린 시절

파이살은 1885년 오스만 제국 메카(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후세인 빈 알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2][3] 그의 형제로는 알리와 후에 요르단의 왕이 되는 압둘라 1세가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로부터 지도력에 대해 배웠다. 1913년, 그는 제다 시의 오스만 의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1914년 12월 오스만 제국이 연합국에 전쟁을 선포한 후, 파이살의 아버지는 그를 오스만 측의 아랍의 전쟁 참여 요청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파이살은 도중에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아랍 비밀 결사 알-파타트와 알-'아흐드의 대표들을 만났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후 파이살은 다마스쿠스를 거쳐 메카로 돌아와 다시 아랍 비밀 결사들과 만나 다마스쿠스 의정서를 받았으며, 아랍 민족주의자 단체인 알-파타트에 합류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랍 대봉기

1916년 10월 23일, 와디 사프라의 알함라에서 파이살 왕자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만났다. 전후 아랍 독립국을 구상한 로렌스는 하심가 병력을 이끌 적정한 인물이자 아랍 독립국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물로 파이살을 주목했다.[24]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파이살은 서부 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 시리아가 되는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운 북부군단을 지휘했다.[25]

1917년, 파이살은 오스만 제국에게 시리아와 모술 지역의 오스만 속주를 지배할 수 있도록 협상을 제안했다.[26] 그해 12월, 파이살은 아흐메드 제말과 접촉해 지배할 제국을 준다면 오스만의 편을 들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으며, 연합군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허황된 것이고 그는 그의 무슬림 동료들과 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27]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그의 책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파이살의 이중 협정이 연합군의 믿음직스러운 친구라는 파이살의 이미지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배신당한 자로 변했다고 말했으며, 파이살은 오직 민족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를 나누려고 했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학자 에프레임 카시와 이나리 카시는 로렌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29]

1918년 봄, 독일 제국이 미카엘 작전을 개시해 연합군의 패배를 예측하는 동안, 파이살은 다시 한번 제말 파샤와 접촉해 그가 시리아를 지배할 수 있게 한다면 평화를 제공하겠다고 이야기했고, 제말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다고 판단했다.[29]

메디나 포위가 끝난 후 파이살은 메디나를 정복했다. 파이살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연합군이 시리아다마스쿠스를 점령하는 것을 도왔고, 이후 다마스쿠스의 새로운 아랍 정부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에미르 파이살 대표단. 왼쪽부터: 루스툼 하이다르, 누리 알사이드, 파이살 왕자, 피사니 대위 (파이살 뒤)], T. E. 로렌스, 대표단의 미상 멤버, 타신 카드리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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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6년, 파이살은 연금되어 있던 터키를 탈출한 후,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1918년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버지와 영국이 체결했던 후세인-맥마흔 협정과 달리,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인해 아랍 지역 전체를 하심 왕국으로 만드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0년 3월 8일 다마스쿠스 아랍 민족 회의에서 시리아 아랍 왕국(대 시리아, 현재의 레바논시리아 지역)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7월 24일 시리아 아랍 왕국은 점령되었고,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파이살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이탈리아 왕국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하여 영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21년 3월 카이로 회의에서 거트루드 벨 등이 주도하여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 창설과 당시 36세의 파이살을 국왕으로 즉위시키는 것이 결정되었고, 5월에 그는 몇 가지 유보 조건과 함께 이라크 왕 지위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6월 이라크에 상륙하여 수 주일 안에 '국민 투표'에서 96%의 지지를 얻어 8월 23일에 즉위한다.

1922년 영국-이라크 조약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했으나, 충수염으로 1922년 9월까지 공무에서 물러났다. 파이살 투병 중 조약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파이살은 조약 지지를 선언했다. 1924년 6월 영국-이라크 조약이 이라크 측에서 비준되었다.

1930년 6월 30일 신 영국-이라크 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이라크 독립을 약속받았다. 1932년 10월, 이라크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종료로 독립하여 이라크 왕국이 성립한다.

1933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인 아시리아인과 이라크군 간 갈등이 발생했다. 바크르 시드키가 이끄는 이라크군과 쿠르드인에 의한 아시리아인 학살(:en:Simele massacre)이 일어났고, 파이살은 건강이 악화되어 같은 해 9월 스위스로 요양을 떠났지만, 도착 1주일도 안 되어 서거했다.

4. 1. 평화 회담과 시리아 아랍 왕국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파이살은 거트루드 벨의 지지를 받아 이전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 우위 지역에 아랍 토후국을 수립해 줄 것을 요구했다.[19] 1918년 10월 영국군과 아랍군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뒤이어 무드로스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결된 이후 파이살은 영국의 보호 하에 아랍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도왔다. 1919년 5월 시리아 국가의회에서 선거가 열렸다.

1919년 1월 3일, 파이살은 시온주의 지도자 하이임 바이츠만과 협정을 체결하고 밸푸어 선언을 받아들였다. 이후 파이살은 에스켈을 각료로 중용하는 등 유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1920년 3월 8일 다마스쿠스의 아랍 민족 회의는 파이살을 시리아 아랍 왕국(대 시리아, 현재의 레바논시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국왕으로 선출했고, 그의 형인 압둘라 1세도 이라크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7월 24일 시리아 아랍 왕국은 점령되었고,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추방되었다.

4. 2. 파이살-바이츠만 합의

1919년 1월 3일, 파이살은 시온주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과 파이살-바이츠만 합의를 체결했다.[30][31] 이 협정에서 파이살은 아서 밸푸어가 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발표한 공식 선언인 밸푸어 선언을 조건부로 수락했다. 밸푸어 선언은 예루살렘 관구에 유대인 고향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8] 파이살-바이츠만 합의 몇 년 후, 아랍 국가들이 유럽 열강으로부터 자치를 얻고 새로운 아랍 국가들이 유럽에 의해 인정받자, 바이츠만은 결국 밸푸어 선언이 지켜졌으므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협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9]

그러나 이 협력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1920년 말에는 유명무실해졌다. 파이살은 시온주의가 영국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프랑스의 시리아에 대한 계획을 막을 만큼 충분하기를 바랐지만, 시온주의의 영향력은 프랑스의 이익과 경쟁할 수 없었다. 동시에 파이살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고향을 건설한다는 생각에 대해, 아랍의 느슨한 종주권 하에서조차, 아랍 엘리트 지지자들로부터 상당한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1920년 4월 산레모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라, 1920년 5월 13일, 앨런비 경은 영국 전쟁 내각에 파이살의 서한을 전달했는데, 이 서한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밸푸어 제안에 대한 파이살의 반대가 담겨 있었다.[10][11]

5. 이라크 국왕

1920년 3월 8일 다마스쿠스의 아랍 민족 회의에서 대 시리아 지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7월 24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시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이탈리아 왕국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 영국의 보호를 받았다. 이 경험으로 파이살은 현실적인 정치가가 되었고,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1년 3월 카이로 회의에서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 건국과 함께 파이살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되었고, 파이살은 이라크 국왕 지위를 수락했다. 같은 해 6월 이라크에 도착한 파이살은 '국민 투표'에서 96%의 지지를 얻어 8월 23일에 즉위했다. 파이살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부족했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어 조직적인 반대는 없었다. 파이살은 무함마드의 첫 손자 하산의 자손인 샤리프였지만, 이라크에는 후세인의 자손인 후세이니 가문의 사이드가 다수 존재했다.

1922년 영국-이라크 조약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여 초대 총리 알-길라니가 사임했지만, 파이살은 충수염으로 공무에서 물러났다. 파이살 투병 기간 동안 조약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 영국의 의지를 확인한 파이살은 1924년 6월 길라니를 총리로 복귀시켜 조약을 비준했다.

1930년 6월 30일 신 영국-이라크 조약으로 영국으로부터 이라크 독립을 약속받았으며, 1932년 10월 이라크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종료와 함께 독립하여 이라크 왕국이 되었다.

파이살은 뛰어난 인품과 통찰력으로 이라크 내 권위를 확립했지만, 말년에는 국가의 불안정한 기반과 사회 분열을 보며 절망했다고 전해진다.

1933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인 아시리아인과 이라크군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바크르 시드키가 이끄는 이라크군과 쿠르드인의 아시리아인 학살(:en:Simele massacre)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건강이 악화된 파이살은 같은 해 9월 스위스로 요양을 떠났지만, 도착 1주일도 안 되어 누리 알사이드와 루스톰 하이다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거했다.

5. 1. 이라크 왕위 계승



1920년 겨울, 이라크인들은 커피숍과 텐트에서 모임을 갖고 새로운 이라크 국가의 형태와 지도자에 대해 논의했다. 이라크의 위임 통치국인 영국 정부는 식민지 내 불안에 우려하여, 직접적인 행정에서 물러나 위임 통치를 유지하면서 이라크를 이끌 군주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을 토착 지도자를 세우고자 했다.

1921년 3월,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은 파이살이 열강에 대한 화해적인 태도와 T. E. 로렌스의 조언을 바탕으로 영국령 이라크 위임통치령을 통치하기에 좋은 후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 사람들은 파이살이 누구인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거트루드 벨을 포함한 영국 관리들의 도움으로 그는 이라크 아랍인들 사이에서 성공적인 선거 운동을 펼쳐 수니파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시아파 다수는 처음에 파이살에 대해 미온적이었고, 바스라 항구에 그가 나타났을 때 무관심으로 맞이했다.[13] 1921년 4월 23일부터 5월 8일까지 누리 파샤 알사이드를 포함한 이라크인들은 파이살에게 이라크 국왕 후보로 초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5월과 6월 사이에 파이살은 자신의 선출을 확인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냈다.

1921년 6월 12일, 파이살은 여러 이라크 귀족들과 키나한 콘월리스와 함께 RIMS 노스브룩호를 타고 제다를 떠나 이라크로 향했고, 6월 23일 바스라의 주요 항구에 도착했다. 파이살의 도착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는데,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은 그를 환영했지만, 울라마를 포함한 일부, 특히 나자프울라마사마와를 포함한 남부 이라크 부족민들은 실망하거나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그다드 시장은 파이살을 환영하는 전보를 보냈고, 힐라 시도 그를 환영했다. 파이살이 6월 26일 바그다드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그다드인들에게 널리 환영받았다. 다음 날, 그는 카짐의 알 카지미야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환영을 받았다.

파이살은 사이드 무하마드 알사드르, 알리 자우다트 알 아유비와 함께 이라크 국왕 후보가 되었다. 96%가 찬성하는 국민 투표가 실시된 후 파이살은 국왕이 되기로 동의했다. 1921년 8월 23일, 그는 이라크 국왕이 되었다. 이라크는 이전 오스만 제국의 모술, 바그다드, 바스라의 ''빌라예트''(지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국가였다. 오스만 ''빌라예트''는 보통 수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므로, 바스라 ''빌라예트''는 남부 이라크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파이살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라크 민족주의나 국가 정체성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악단은 영국 국가를 연주했는데, 이라크는 아직 국가가 없었고 1932년까지 갖지 못했다.[14]

5. 2. 통치

파이살 1세는 국왕으로 통치하면서 범아랍주의아랍 민족주의를 장려했다. 그는 영국 위임 통치령인 이라크시리아, 레바논을 통합하려 했다. 파이살은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 아랍인들이 자신의 권력 기반임을 인식하고 있었다.[15]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이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 수니파 무슬림 아랍인이 신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이라크의 아랍 시아파 무슬림과 쿠르드족은 소수가 될 것이었다.[15] 당시 이라크의 아랍 시아파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이란을 지도자로 여겼고, 범아랍주의는 아랍 수니파와 시아파를 아랍 정체성을 중심으로 결집시킬 수 있었다.[15] 이라크 아랍인 대다수는 시아파 무슬림이었으며, 샤리프 후세인은 헤자즈 출신 수니파 무슬림으로 여겨져 "대아랍 봉기"에 참여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16] 오스만 제국에서 국교는 수니파 이슬람이었고 시아파 무슬림은 종교 때문에 소외되어 더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았다.

1920년 시리아의 파이살 1세


1933년 예루살렘 위임통치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와 압둘라


파이살 1세는 시아파 무슬림, 쿠르드족, 유대인 공동체의 친구라고 선언했으며, 1928년에는 유대계 이라크인들을 공무원에서 해고하려는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범아랍주의아랍 민족주의를 장려하는 그의 정책은 아랍인과 쿠르드족 공동체 사이에 틈을 벌려 이라크에서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았다.[17] 파이살의 '와타니야'(wataniyya, '애국심')를 아랍인이 되는 것과 동일시하는 정책은 쿠르드족을 소외시켰다.[17]

파이살은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로,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암만으로 이어지는 사막 도로를 개발했다. 이는 모술 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라크 경제에 도움이 될 지중해 항구로 이어지는 송유관 건설 계획으로 이어졌다. 재위 기간 동안 파이살은 이라크군을 강력한 군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징병제를 시행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 시리아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파이살은 반군을 특별히 지지하지 않았다.[18] 1925년, 시리아 드루즈 반란 이후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 문제에 대해 파이살과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에 다마스쿠스에 하심가의 권력을 회복하도록 조언했다. 프랑스는 파이살이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가 시리아의 국왕으로 복위될 수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그를 이용했고, 시리아 반란을 진압하자 하심가가 시리아를 통치하는 데 관심을 잃었다.[18]

파이살은 1930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자신의 범아랍주의적 견해에 방해물로 여겼지만, 이 조약은 이라크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독립을 제공했다. 그는 조약에 만료일을 삽입하고 싶어했는데, 그 이유는 이 조약이 프랑스 통치 하에 있는 시리아와 영국 통치 하에 있는 이라크를 더욱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 조약을 진전으로 여기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파이살이 자신의 지도하에 더 큰 이라크-시리아 국가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터키, 이집트의 푸아드 1세, 헤자즈-네지드의 이븐 사우드의 반대에 직면했다.[18] 누리 알사이드가 1931년 5월 예멘을 방문하여 이맘 야흐야 무하마드 하미드 앗딘에게 파이살의 지도하에 "아랍 동맹"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묻자, 이맘은 "아랍 동맹"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랍 세계"라는 구절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18]

1932년 시다라를 착용한 파이살 1세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도착한 지 몇 주 후, 이슬람 학자 마흐무드 슈크리 알-알루시의 인사를 받았고, 여러 교육받은 이라크인들을 만나 그들의 관점을 배웠다. 1920년대 바그다드의 "이르샤드 클럽"과 같은 여러 클럽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파이살은 여러 작가와 시인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전통을 시작했다.[15] 이 시인들 중에는 왕을 찬양하는 시를 쓴 마루프 알-루사피가 있었다.[15] 파이살이 받아들여 왕실의 일원으로 만든 또 다른 시인은 무함마드 마흐디 알-자와히리였다.[15]

파이살은 교사들을 격려하고 육성하는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루스탐 하이다르와 동행하여,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바그다드의 학교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는 여러 남녀 교사들을 만나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는데, 그는 교사들이 왕이나 장관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5]

파이살이 나자프에 최초의 여자 학교를 열었을 때 전통적인 도시의 보수적인 그룹으로부터 반발을 받았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개교 행사에서, 나자피 출신인 알-자와히리는 "''반동자들''"이라는 시에서 도시 사람들의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로 인해 도시에서 큰 항의가 일어났고 파이살은 알-자와히리를 용서하고 왕실에 계속 머물도록 결정했다.[15]

파이살 1세는 금요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15] 파이살은 종파적 고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며, 알 리하니는 파이살이 모든 이슬람 종파를 반영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 모든 세계 종교를 존중하고 관용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압바스 바그다디는 파이살이 금요 예배를 위해 알-사라이 모스크에 아랍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파이살은 또한 샤딜리 교단의 테케와 같은 모술의 수피 사당 재건을 명령했다.[15] 파이살은 또한 바그다드와 모술의 최고 랍비와 같은 소규모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만났다.[15]

파이살은 시아파 무슬림에 대해 큰 관용을 보였으며 종교 간 화합의 구성 요소였다.[15] 파이살과 시아파 공동체의 주요 연결고리는 사이드 무하마드 알-사드르였다.[15] 파이살은 항상 시아파 무슬림에게 그의 알리 혈통을 상기시키고 싶어했다. 이 때문에 그의 대관식은 이슬람력에 따라 18 둘 히자에 열렸는데, 이는 가디르 쿰 축제와 일치했다.[15] 파이살은 통치 기간, 특히 초기에는 행정부에 시아파 무슬림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타우피크 알-수와이디를 바그다드 법학 대학에 고용하고, 시아파 무슬림 기반 학교의 자격을 인정하고, 무하람 기념 행사를 지원하며,[15] 아야톨라 메흐디 알-칼리시와 협력하고, 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나자프와 카르발라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파이살은 한때 퍼시 콕스 경에게 이라크 시아파 무슬림 무즈타히드가 그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15]

1932년 3월, 독립을 불과 몇 달 앞두고 파이살은 새롭게 설립된 국가에서 이라크 국민의 이라크 국가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비판하는 각서를 썼다.

5. 3. 이라크 독립과 말년

1932년,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료되면서 이라크 왕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했고, 파이살은 이라크의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1933년 8월, 시멜 학살과 같은 사건은 영국과 이라크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램지 맥도널드 총리는 고등 판무관 프랜시스 험프리스에게 즉시 이라크로 가도록 명령했고, 영국 정부는 파이살에게 기독교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유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파이살은 런던 주재 이라크 공관에 "이라크의 모든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프랜시스 험프리스 경이 바그다드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제 전보의 내용을 영국 정부에 알리십시오."라는 전보를 보냈다.[16]

같은 해 7월, 파이살은 런던을 방문하여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 증가로 인한 아랍인들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영국에 유대인 이민과 토지 매입을 제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파이살은 이라크에서의 자신의 권위 확립에 기여했지만, 말년에는 국가의 불안정한 기반을 형성하는 분열된 사회를 보며 절망했다고 한다.

1933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인 아시리아인과 이라크군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아시리아인의 자치 운동이 영국의 책략으로 여겨지면서, 같은 해 8월 바크르 시드키가 이끄는 이라크군과 쿠르드인에 의해 아시리아인 학살(:en:Simele massacre)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파이살은 건강이 악화되어, 같은 해 9월 스위스로 요양을 떠났으나, 도착 1주일도 안 되어 서거했다. 누리 알사이드와 루스톰 하이다르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6. 외교 관계

파이살 1세는 이라크와 시리아 간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시리아 망명객과 관직 희망자들의 이라크 유입을 장려했고, 교육 개선을 위해 시리아 출신 의사와 교사를 공무원으로 고용했다. 특히 다마스쿠스 전 교육부 장관이자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자인 사티 알 후스리를 교육부 국장으로 임명했다.[19] 그러나 이러한 시리아인들의 유입은 이라크 내에서 반발을 샀다. 특히 시리아 이민자들이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아랍의 "황금기"로 찬양하고 알리를 무시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발행하자,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 공동체가 크게 반발했다. 결국 파이살은 1927년에 문제가 된 교과서를 철회했고, 1933년에 재발행되었을 때 다시 철회했다.[19]

1919년 1월 3일에는 시온주의 지도자 하이임 바이츠만과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을 체결하여 밸푸어 선언을 수용했다. 이후 사순 에스켈을 각료로 중용하는 등 유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1930년 6월 30일 체결된 신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이라크의 독립을 약속받았다. 1932년 10월, 이라크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가 종료되면서 독립하여 이라크 왕국이 성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소련에 의해 폭로되자, 파이살은 오스만 제국과 비밀 평화 협상을 진행하여 독일 제국바이에른 왕국과 동등한 지위를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부하 아랍인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다마스쿠스 함락 이후 무의미해졌다.[20]

프랑스는 시리아에 대한 야심 때문에 파이살을 적대시했지만, 동생 자이드를 더 크게 적대시했다.

6. 1. 팔레스타인 문제

1929년 예루살렘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공동체 간에 유혈 폭동이 발생했을 때, 파이살 1세는 아랍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영국에게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친아랍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1] 1929년 12월 7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메모를 영국 고등 판무관 허버트 영 경에게 제출하면서, 파이살은 밸푸어 선언을 최소한의 의미로만 받아들였다.[2] 파이살은 전 세계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는 유대인들이 갈 수 있는 "유대인 민족의 고향"으로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지만, 유대 국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3] 파이살은 가장 좋은 해결책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독립을 부여하여 형제인 트란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가 이끄는 연방으로 통일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주권 아래 유대인의 "민족의 고향"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

파이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언젠가 성지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에 대한 반대를 포기하는 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5] 파이살이 선호하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책은, 그가 현재는 실현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지도력 아래 통합하는 연방이었다.[6]

7. 사망

파이살 1세는 1933년 9월 8일 스위스 베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3]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파이살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 가지 1세가 왕위에 올랐다.

파이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의문을 낳았다. 스위스 의사들은 그가 건강했고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개인 간호사는 죽음 직전 비소 중독 흔적이 있다고 보고했다. 많은 동료들은 그가 심장이 아닌 복부에서 고통을 느꼈다고 주장했다.[32]

그를 기리기 위해 바그다드 하이파 거리 끝자락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세워졌고, 광장에는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이 기마상은 1958년 이라크 쿠데타로 군주제가 전복된 후 쓰러졌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이스라엘 하이파에도 파이살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기리는 부러진 기둥이 세워져 있다.

바그다드에 있는 파이살 1세의 묘


1933년 트란스요르단 암만 시청 앞에서 파이살 1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

참조

[1] 간행물 'IRAQ – Resurgence In The Shiite World – Part 8 – Jordan & The Hashemite Factors' https://archive.toda[...] APS Diplomat Redrawing the Islamic Map 2005-02-14
[2] 웹사이트 rulers.org http://rulers.org/in[...] rulers.org 2012-01-02
[3] 웹사이트 britannica.com https://www.britanni[...] britannica.com 1933-09-08
[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United States-Middle East relations https://search.world[...] Scarecrow Press, Lanham 2007
[5] 뉴스 Faisal of Arabia http://www.jpost.com[...] The Jerusalem Post
[6] 서적 Islamic Imperialism A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06
[7] 논문 Faisal Ibn Husain and the Zionists: A Re-examination with Documents https://www.jstor.or[...] 1983
[8] 웹사이트 Official records of the Second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https://unispal.un.o[...] 2018-10-20
[9] 간행물 Official records of the Second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A/364/Add.2 PV.21) https://unispal.un.o[...] United Nations 1947-07-08
[10] 서적 The Implementation of the Balfour Declaration and the British Mandate in Palestine: problems of conquest and colonisation at the nadir of British Imperialism (1917-1936) https://research.stm[...] University of Surrey, School of Arts and Humanities 2016-01-01
[11] 서적 Documents on Palestine PASSIA
[12] 서적 Baghdad - City of Peace, City of Blood https://books.google[...] 2014
[13] 문서 "Letters from Baghdad" 2016
[14] 웹사이트 VI. King Faisal I - First Issue, 1927 & 1932 - rezonville.com http://www.rezonvill[...] Rezonville.com 1931-02-17
[15] 서적 Sectarianism in Iraq: The Making of State and Nation Since 1920 Routledge 2014
[16] 뉴스 Time Time (magazine) 1933-08-28
[17] 서적 The Modern History of Jordan https://books.google[...] I.B.Tauris 1998-12-15
[18] 웹사이트 Family tree http://www.alhussein[...] 2014-01-01
[19] 웹사이트 Fayṣal I https://www.britanni[...]
[20] 문서 「アラブが見たアラビアのロレンス」参照
[21] 웹인용 rulers.org http://rulers.org/in[...] rulers.org 2012-01-02
[22] 웹인용 britannica.com http://www.britannic[...] britannica.com 1933-09-08
[23] 서적 Faisal I of Iraq Yale University Press 2014
[24] 서적 The Seven Pillars of Wisdom Wordworth Editions Limited 1997
[25] 뉴스 Faisal of Arabia, Jerusalem Post http://www.jpost.com[...]
[26] 서적 Islamic Imperialism A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06
[27] 서적 The Empires of the S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28] 서적 The Empires of the S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29] 서적 The Empires of the S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30] 웹사이트 Faisal's Acceptance of the Balfour Declaration https://www.jewishvi[...] Jewish Virtual Library
[31] 간행물 Official records of the Second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A/364/Add.2 PV.21) https://unispal.un.o[...] United Nations 1947-07-08
[32] 뉴스 78 years after the murder of King Faisal the First, Al Janabi, K., Iraq Law Net http://www.qanon302.[...] Iraq Al-Qan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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